"너 전축이 어떤 단어인지 아니?"
"아니."
"그리스어야."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새 리노는 나를 버려두고 동생과 춤을 추러 갔다. 릴라는 가녀린 탄성을 터뜨리며 내게 춤 설명서를 건넨 다음 오빠와 함께 날아다니듯 춤을 췄다. 나는그녀가 책을 꽂아놓은 곳에 춤 설명서를 놓아두었다. 지금 릴라가뭐라고 한 거지? 전축은 이탈리아어지 그리스어가 아니다. 순간 전쟁과 평화』 아래 페라로 선생님의 도서관 분류번호가 붙은 너덜너덜한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그리스어 문법』이었다. 문법책이라니. 그리스어라니. 릴라는 헐떡거리며 내게 말했다.
"나중에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전축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게."
나는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 P182

릴라는 내가 고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건가? 나는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도 여름 방학동안에 혼자서 공부했단 말인가? 릴라는 왜 항상 내가 해야 할 일을나보다 빨리, 나보다 더 잘하는 걸까. 내가 따라가면 도망가면서 정작 자신은 언제나 내 뒤를 쫓아와 나보다 앞서나가려 하는 걸까. - P182

나는 한동안 릴라를 피했다. 그만큼 화가 났다. 나도 그리스어 문법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에 갔지만 우리 도서관에 비치된 유일한 그리스어책은 체룰로네 온 식구가 번갈아가며 빌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듯이 나에게서 릴라를 지워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연약하게 느껴졌고 모든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그녀를 뒤쫓아 다니거나 반대로 그녀가 나를뒤쫓아온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어느 경우건그녀보다 못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릴라를 찾았다. 나는 그녀가내게 넷이서 함께 추는 춤의 일종인 카드리유 춤을 가르쳐주게 내버려두었다. 내게 이탈리아어 단어를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쓰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내버려두었다. 릴라는 학기 시작 전에 나도 그리스어알파벳을 익히기를 원했고 결국 내게 그리스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의 뾰루지는 늘어만 갔다. 나는 영원히지속될 것 같은 자신감 부족과 수치심에 시달리며 질리올라네로 춤추러 갔다. - P183

한사코 벗어나길 바랐지만 내 느낌은 강해져만 갔다. 언젠가 릴라가 그녀의 오빠와 함께 왈츠를 춘 적이 있다. 얼마나 멋들어지게 춤을 추던지 모든 사람이 그들의 독무대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줄 정도였다. 나도 매혹되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둘 다 아름답고 호흡이 잘맞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릴라가 애늙은이같은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뛰어나게 편곡을 하면 원곡의 익숙한 멜로디가 잊히는 것처럼 말이다.
릴라의 얼굴은 균형이 잡혀가고 있었다.  - P183

정작 내가 릴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는데 릴라는 계속해서 그리스어 어미변화를 물어보았다. 보아하니 나는 아직도 1학년 과정에 머물러 있는데 릴라는 벌써 3학년 과정까지 진도를 나간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푹 빠진 아이네이스』에 대해서도 물었다.
릴라는 책을 며칠 만에 몽땅 읽어치웠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학교진도에 따라 2권 중간 정도까지밖에 읽지 않았다. 특히 디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학교에서 배우기도 전에 릴라에게서 디도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릴라는 내 가슴에 깊이 각인된 화두를 던졌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의 인생만 황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삶도 황폐해지는 거야."
릴라가 정확하게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개념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이 개념을 우리 동네의 더러운 길, 먼지가 이는 공원, 새로 들어선 건물들로 망가진 들판, 가정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연관시켰다. - P207

그 시절 나는 자신감에 넘쳤다. 학교에서는 완벽한 모범생이었다.
이 이야기를 올리비에로 선생님께 전하자 선생님도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노와의 만남도 이어나갔다. 우리는 매일같이 솔라라네 주점까지 산책을 했다. 지노가 내게 빵을 하나 사주면 우리는 그것을 함께나눠먹고 집까지 다시 걸어 돌아오곤 했다. 이따금 나보다도 릴라가내게 더 의존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는 동네의 경계를 넘어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릴라처럼 벽돌공,
자동차 정비공, 야채장수, 식료품점 주인, 구두수선공과 어울리는 대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이제 릴라가 디도나 영어 단어 암기법이나 3인칭 어미변화나 파스콸레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 말할 때면 약간 불안해하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수 있었다. 드디어 릴라가 자신도 나만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증명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았다. - P212

1958년 12월 31일 저녁에 펼쳐진 대결의 이런저런 이유 가운데는 빈곤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보상받고 싶은 리노의 심리도 있었을것이다. 그는 폭죽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집착해봤자 솔라라 형제와 맞붙을 사람은 아무도없다는 사실을 리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그해에도 솔라라 형제는 며칠에 걸쳐서 밀레첸토 트렁크에 폭죽을 잔뜩실어 날랐다. 그들은 연말 밤 폭죽으로 날아가는 새를 죽이고 개고양이, 쥐를 놀라게 하고, 온 동네 건물을 지하창고에서부터 지붕까지 휘청이게 할 셈이었다. 리노는 그들의 움직임을 증오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체면을 세울 정도의 폭죽이라도 마련하기 위해서 파스콸레와 안토니오, 특히 그나마 수중에 약간의 돈이 있는 엔초와 흥정을 벌였다. - P218

릴라는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수차례에 걸쳐서 파스콸레가 너를 좋아한다고 했지만릴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어느 찬란한 봄날,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표정으로 그녀 앞에 서서 사랑을 애원하며 거절하면 자신의 삶은 의미를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감정을 해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릴라는 아주 조심스럽게 직접적으로 안 된다고 하지 않고 거절할 표현을 생각해냈다. 그녀는 자신도 파스콸레를 좋아하지만 그 감정은 연인에 대한감정과는 다르다고 했다. 파시즘이며 레지스탕스, 왕정, 공화당, 암시장, 라우로 장군, 네오파시즘, 기독교 민주당, 공산주의 등 자신에게 해준 수많은 이야기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라고했다. 하지만 사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P24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릴라와 공부하고릴라와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이었는지를 의미한다. 동네의 범주를 벗어난 외부세계의 사물과 사람, 풍경과 책에 쓰인 사상을 대하면서도 릴라를일종의 정신적인 지지대이자 자극제로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의미한다.
그렇다. 디도를 주제로 한 작문의 논리전개는 순전히 내가 생각해낸 것이고 유연한 문장을 구축하는 능력도 내 것이었다. 그러니 디도에 대해서 쓴 글은 나의 글이다. 하지만 주제를 발전시킨 것은 릴라와 함께한 게 아니었는가. 우리는 건설적인 자극을 주고받지 않았는가. 내 정열은 릴라의 열정 덕분에 커진 것이 아닌가. 선생님들이그토록 좋아했던 ‘사랑이 없는 도시‘라는 주제를 발전시킨 것은 나지만 아이디어는 결국 릴라의 것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P246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 흥미를 끌지 못하는 존재였다. 행여 우리와 시선이라도 마주칠 때면 성가신 듯 즉시 다른 쪽으로 시선을돌렸다. 그들은 철저히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리노와 파스콸레는 이미 알고 있던사실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우울해했고 험상궂게 굴었던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가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나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은 처음으로 이런 경험을 하고 야릇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매혹되고 있었으며 우리 모습이 못나게 느껴지면서도 우리가 제대로 교육받고 좋은 옷을 입고 화장을하고 장신구를 달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우선은 그날 저녁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웃으며 비아냥대기시작했다. - P252

나는 말 그대로 다시 피어났다. 넬라인카르도라는 올리비에로 선생님의 사촌은 바라노에 살고 있었다. 일단 버스로 바라노에 도착한다음에는 손쉽게 넬라 아주머니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거대한 몸집의 친절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명랑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노처녀였다. 휴가차 섬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 방을 모두내주고 자신은 조그만 방 한칸과 부엌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부엌에서 지내기로 했다. - P274

밤마다 식탁을 꺼내고, 받침판을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아내 침대를 만들었다가 아침이면 깨끗이 정리해야 했다. 몇 가지 꼭지켜야 할 임무도 주어졌다.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서 넬라 아주머나와 손님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영국에서 온 부부 한쌍과 그들의 두 아이가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컵과 그릇을 닦고, 저녁 식사 상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설거지를 하는 것이었다.
이 일들만 마치면 나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었다. 나는 테라스에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책을 읽었다. 가파르게 뻗은 순백의 길을따라 넓고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해변까지 걸어 내려가기도 했다.
그 해변은 마론티 해변이었다. - P275

모든 일이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도,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상을 치우는 일도, 동네에서 산책하는 일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가며 마론티 해변까지걸어가는 일도, 햇볕 아래 누워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수영하다가다시 해변으로 나와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아버지도, 동생들도, 어머니도, 매일같이 걷던 고향의 길도, 정원도 그립지 않았다.
유일한 그리움의 대상은 릴라였다. 내 편지에 답장한 통 없는 릴라. 내가 없는 동안 릴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나는 두려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것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온, 살면서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릴라의 삶의 일부분을 놓침으로써 내 삶의 밀도와 중요성까지도 희석될 것 같아 두려웠다.
릴라의 침묵에 내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편지에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물처럼 넘치는 내 글과 이에 대비되는 그녀의 침묵은, 빛나는 듯 보이는 - P277

나의 삶은 실은 무미건조해서 남아도는 시간에 매일같이 그녀에게편지를 쓰고 있는 데 비해 암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이야말로 실은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빌라 아주머니는 영국인 가족이 7월 말에 떠나고, 8월 초에는 나폴리에서 섬으로 휴가를 보내려는 가족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전해주었다. 교양 있고 친절하고 우아한 사람들로 작년에 이어 올해두 번째로 아주머니 집에서 휴가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훌륭한 신사로 아주머니에게 언제나 멋진 말을 해준다고 했다. 장남은훤칠한 키에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건장하며 잘생긴 17세 소년이라고 했다. - P278

나는 이미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은 차가웠고 달빛에 거무스름한 잿빛을 띠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외로움에 사무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 걸까. 여드름도 깨끗이 사라졌고 다시 예뻐졌다고생각했었다. 햇볕과 바다 덕분에 몸매도 날씬해졌는데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 내 몸에 낙인이라도 찍힌 것일까. 내 운명은 무엇일까. 빠져나오기 힘든소용돌이처럼 내 생각은 어느새 우리 동네를 향하고 있었다. - P290

어둠으로 밀쳐낸 그의 아들에 대한 믿음직스러운 대안이자 내 편지침묵으로 일관하는 릴라의 대안이 되었다. 나는 나중에야 이러한사실을 깨닫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릴라와 니노는 서로를 잘 알지못하고 친하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 것같았다. 둘 다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언제나 명확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틀렸다면? 마르첼로를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도나토 아저씨를 그렇게 끔찍하게 여길 이유는 또 무엇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릴라와 니노 둘 다 좋아했고 각각 다른 의미에서 이들이 그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니노가 증오해 마지않는 그의 아버지는 나를 비롯한 모든 아이를 존중해주었다. 그날 밤마론티 해변에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평안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그런 도나토 아저씨가 고마웠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니노와릴라가 섬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다. - P295

나는 다시 책 읽기를 시작했다. 릴라에게 답장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편지를 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 대신 사라토레 집안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마리사와 피노, 막내인 치로와 친남매가 된 것 같았다. 특히 치로는 나를 아주 좋아했다. 나와 있을 때만 투정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놀았다.
우리는 함께 소라를 찾곤 했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나를 경계심없이 애정과 호감을 갖고 대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식탁 정리를 할때도, 방 정리를 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아이들을 돌볼 때도, 책을 읽을 때나 공부를 할 때도 무엇을 하든지 꼼꼼하게 한다고 칭찬해주곤 했다. - P295

릴라가 보낸 편지였다. 나는 편지 봉투를 급히 찢었다. 글씨가 빽특히 채워진 다섯 장의 편지지가 봉투에서 나왔다. 나는 단숨에 편지를 읽어 내려갔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 그랬다. 우선 편지 내용보다 먼저 내게 충격을 준것은 글에서 릴라의 목소리가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편지의 첫 문장에서부터 나는 『푸른 요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 과제물을 제외하고 내가 읽은 릴라의 유일한 글이다.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 왜 『푸른 요정이 그토록 마음에들었는지 깨달았다. 지금 내가 릴라의 글을 읽으며 놀랍게 여긴 특징들이 『푸른 요정』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릴라는 글로써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내 글이나 도나토 아저씨가 쓴 기사나 시와는 달랐다. 과거에 읽었거나 그 당시에 즐겨 읽던 작가들의 글과도 달랐다.  - P299

릴라의 글은 섬세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문법이완벽했다.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었고 문어체의 어색함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글을 읽는 동안 그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의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글씨에 실린 릴라의 목소리에 흔들렸고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때보다 더 강하게 빨려들었다. 글에서는 구어체에 남아 있을법한 쓸데없는 잔가지와 혼란스러움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레코나 체룰로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제우스 신의 머리에서 태어난 사람쯤 되어야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논리 전개였다.
그녀에게 보낸 내 유치한 편지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 과장된 어조 경박스러움, 거짓된 명랑함과 고통이 부끄러웠다. 릴리는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 작문에 9점을 주어 헛된 희망을 갖게 한제라체 선생님에게 경멸과 원망을 느꼈다. 그 편지는 열다섯 살이 되 - P299

는 내 생일날, 내가 사기꾼인 것을 깨닫게 했다. 학교에 간 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 앞에 놓인 릴라의 편지가 그 증거였다.
그러고 나서야 편지 내용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릴라는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은 것은 내가 햇살 아래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뻤기때문이고, 사라토레 가족과 잘 지내기를 바라서였다고 했다. 니노와사랑에 빠지고, 이스키아 섬과 마론티 해변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자신의 불행 때문에 내 휴가까지 망치고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침묵을 깬 다급한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 P300

난 릴라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언제나처럼 릴라의세계는 빠르게 내 세계를 잠식했다. 7. 8월에 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초조해졌다. 그날은 해변에 나가지 않고 릴라에게 진지하게 답장을 쓰려 했다. 릴라의 편지처럼 본질적이고 깔끔하면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 같은편지 말이다. 평소에는 편지를 쓰는 일이 그토록 쉬웠고 특별히 고칠 필요도 없이 앉아서 단숨에 여러 장의 편지지를 채워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쓰고 고치고 또다시 써보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니노의증오와 그 증오의 원인이 된 도나토 아저씨와 멜리나의 정사, 사라토레 가족과의 관계, 심지어는 릴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걱정조차도 - P303

릴라의 글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냄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불안감이 커져 갔다. 릴라는 냄비의 광채를 좋아했다. 냄비를 닦을때면 반짝거리게 하려고 특별히 정성을 들였다. 4년 전 릴라가 돈 아킬레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이 구리 냄비 위로 흘러내렸다고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앞에놓인 힘든 선택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고통을 구리 냄비에 묻어두었다가 일종의 계시인 양 터뜨린 것이다. 마치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갑작스럽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다. 릴라가 없었다면 내가 이런 상상을 할 수나 있었을까.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 모든 것을 내 삶에 녹여낼 수 있을까.
나는 불을 껐다. 옷을 벗고릴라의 편지와 니노의 파란 책갈피를가지고 침대에 누웠다.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 P305

를 다시 읽었다. 냄비들은 반짝이고, 테이블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천장은 숨 막히게 무겁게 느껴졌다. 밤공기와 바다가 사면에서 벽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나는 릴라의 글솜씨에 또다시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형상화할수 있고 나는 그럴 수 없는 것 때문에 눈물이 앞을 흐렸다. 물론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이제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도 않는데 릴라가그토록 뛰어나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동시에 그 기쁨은 나를 불행하게 했고 나는 이런 감정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 P306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는 잘 자라고 속삭이고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꽤 오랜 시간동안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혀의 감촉과 내 몸을 어루만지던 그의손길, 내 몸을 누르던 손의 압력을 떨쳐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니노는 내게 경고했었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내 육체에남은 그 기분 좋은 느낌 때문에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기억하는 한 그때까지 한번도 육체적 쾌락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느낌을 알지 못했기에 막상 경험하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새벽 동이 터올 무렵 나는 정신을차리고 짐을 챙겼다. 침대를 정리한 다음 빌라 아주머니에게 짧은감사의 편지를 남기고는 그곳을 떠났다. - P307

향이 뒤섞인 냄새만이 짙게 퍼져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한 달 전에 준 현금을 챙겨서 섬에서 떠나는 첫 배를 탔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른 아침 햇살 아래 파스텔 빛의 섬 모습이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릴라에게 이야기를 해줄 만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번만은 그녀도 이보다 더 강렬한 체험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 너무나 커서 릴라에게 차마 이야기를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예기치 않게 끝난 그해의 여름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 P308

틈이 나자마자 나는 릴라를 찾아갔다. 뜰에서 릴라를 부르자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고는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릴라는 나를 포옹하고입을 맞추며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내게 칭찬을 퍼부었다. 나는 그녀의 넘치는 애정 표현에 잠시 넋이 나갔다. 한 달이 조금 넘는기간이었는데 릴라야말로 많이 변해 있었다. 그새 소녀가 아닌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나이도 열여덟 정도는 되어보였는데 내게는어른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입던 옷들이 깡동하고 꽉 끼어보였다.
마치 몇 분 만에 갑자기 성장한 것처럼 그녀의 몸을 필요 이상으로조이고 있었다. 키도 더 컸다. 등이 꼿꼿해졌다. 전반적으로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가녀린 목과 창백한 얼굴에서 섬세하고 비범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나는 릴라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길을걸으면서도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뒤를 돌아봤지만 내게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 P309

걱정하는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수컷들 간의 규칙을 어겼고 나는 릴라와 스테파노의 가까운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 갑자기 이일에 말려든 것이다. 내 존재는 우정일 수도 있는 릴라와 스테파노의관계를 감추기 위해 필요했다. 물론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 같지는 않았지만, 그날 드라이브를 하면서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있었는데 릴라는 일부러인지 아니면 자신도 잘 몰라서인지 내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 옛날 잉크를적신 종잇조각을 던져댔을 때보다 훨씬 강도가 센 지진이 다가오고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릴라에게 정말로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릴라는 그런 아이니까. 그녀는 단지 균형을 되찾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모든 균형을 깰 수 있는 아이였다. - P315

그해 9월 릴라의 삶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나는 이스키아 섬에서 니노와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버지의 입술과 손에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왔다. 내면에 남아 있는 달콤함과 끔찍함이 뒤섞인 감정 때문에 밤낮으로 울며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미처 내 감정에 뚜렷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전에,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니노의 목소리와 그의 아버지의 콧수염이 남긴 불쾌한느낌을 옆에 제쳐두었다. 이스키아 섬은 희미해져서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있는 은밀한 곳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릴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내 모든 마음을 내주었다. - P322

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논의의 최종 목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릴라의인생에서 마르첼로를 내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일들은 우리의 계획을 중심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정도였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놓아두거나 필요할 때 약간 조율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나와 릴라는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언제나 스테파노였다.
정확하게 사흘 후, 그는 약속대로 구둣방에 가서 치수도 맞지 않는 신발을 샀다. 체룰로 부자는 만 리라까지 흥정할 심산으로 자신없는 태도로 2만 5천 리라를 요구했다. 스테파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에 릴라의 그림에 대한 가격으로 2만 리라를 더 지불했다. 그는 그림이 마음에 들어 액자에 넣고 싶다고 했다. - P324

이 모든 일이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났고 결국 릴라는 결과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신발 제작 계획의 돌파구를 마련해 리노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마르첼로를 깨끗이 처리했다. 동네에서 가장 촉망받고 부유한 젊은이의 예비 신부가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아무것도 없을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학교가 평소보다 더 암울하게 느껴졌다.
나는 선생님들을 흡족하게 못할까봐 다시 공부에 파묻혔다. 밤 11시까지 악착같이 공부하다가 시계를 새벽 5시 30분으로 맞춰놓고서야 잠이 들었다. 릴라를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대신 스테파노의동생인 알폰소와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여름 내내 식료품점에서 일했는데도 알폰소는 재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낙제점을 받은 모든 과목,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를 7점으로 통과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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