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기 2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 신혼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산 지아코모 데이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폴리의 모든 공간도, 얼어붙을듯 차가운 2월의 창백한 햇살도, 아버지가 내뱉은 문장까지도.
나만 혼자 그곳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내 글은 혼란일 뿐,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저 구원 없이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 P9

나는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아 자로 선을 그어 사진의 일부를직사각형 속에 넣고 선밖으로 색이 삐져나오지 않게 사인펜으로 꼼꼼하게 도형을 색칠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이지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직사각형은 사진 속에 있던 무언가를 지운 흔적이고 그 새까만 도형 밑에는 틀림없이 빅토리아 고모의 모습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부엌에서 칼을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가려놓은 사진의 일부를 조심스레 긁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사진을 긁어내면 하얀 종이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서 작업을 멈췄다. 이것이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일로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더 식어버릴까봐 두려웠다. - P23

고모와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보다 더 강렬했다. 나는 그때처음으로 짧은 순간에 모든 감정을 욱여넣을 수 있는 공간이 내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통난 거짓말에 대한 부담감, 부모님을 배신했다는 수치심, 그들이 받았을 상처로 인한 괴로움은 어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철로 만든 새장 같은 엘리베이터 유리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건물 입구를 지나 차에 들어가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빅토리아 고모 옆에 앉는 순간, 나는 생소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것은 그날 이후 내가 종종 느끼게 될 감정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환경과 나를 향한 변치 않을애정을 이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 나는 때로는 안도감을 느꼈고 때로는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위협적이면서도 포근한 여인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 P91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유년 시절 동화 나라로의 회귀는아버지뿐 아니라 나의 책임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악의 기원에 빅토리아 고모의 마법이 있었다면 현 사태는 내가 태어난 순간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고모를 찾게 만든 그 어둠의 힘은 이미오래전부터 작용하고 있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예수님이 내쫓지 말라고 한 아이들처럼 죄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졌다. - P188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방과 후에 일어난 일로 인해 그 팔찌가 내게만 사무치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내 방 침대 머리맡서랍장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서랍에서 팔찌를 꺼내들고 그것이 마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팔찌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사악한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새 어머니의 어깨가 축 처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뼈만 앙상한 데다 등이 굽어 있었다. - P189

이웃 사람들, 길을 지나다니는 행인들,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할 것 없이 하나같이 눈에 거슬렸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다. 어머니는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진을 마시고 매사에 느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내가 공책이나 책을 사야 한다고 할 때마다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넌덜머리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어머니가 날이 갈수록 헌신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아내와 최소한 지난 15년간 바람을 피웠는데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태도에 질려버렸다.
나는 무관심한 표정 연기를 그만두고 일부러 나폴리 사투리와 표준어를 섞어가며 어머니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영화관에라도 가든가 춤이라도 추러 가라고 고함을 쳤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 남편이 아니니 죽은 셈 치라고 했다. - P239

솔직히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내용을 잘 모르겠다. 내게 그날 강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아름다운 입과 목에서 나오는 매혹적인 소리의 흐름이었다. 나는 로베르토의 목젖이 지구에 바글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복제품이 아니라 실제로인류 최초의 남성이었던 아담의 숨결에 의해 진동하는 것처럼그의 툭 튀어나온 목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조각한 듯한 두 눈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강렬했던가. 긴 손가락과 빛나는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 P256

나는 인간을 이토록 연약하게 만든 하나님 아버지가 싫었다. 인간을 끊임없이 고통에 노출시키고 이토록 쉽게 부패하게 만든그가 싫었다. 우리가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배고픔과 목마름질병과 공포, 잔혹함과 교만함, 때로는 불신으로 인한 배신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좋은 감정까지도 어떻게 다루는지 바라보고만 있는 그가 싫었다.
동정녀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자신의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들이 겪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것도 싫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힘을 인류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찮은 놀이에만허비한 아들도 싫었다. 자기 어머니는 홀대하면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는 화낼 용기조차 없는 아들이 싫었다. 자기 아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두고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이 싫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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