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츠킬 산맥의 낡은 호텔 지역이 보르시 벨트 농담‘의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1950년대 후반, 대학생시절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던 내게 캐츠킬 산맥은 위험하고 짜릿하며 거친 공간, 포식동물만 득시글하고 온순한 동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의 호텔들에서 몇 년을 보내며 나는 직무의 야수성을, 환상의 살인적인 면을,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꾸려진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립을 처음 - P83

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최근 들어 그 고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곳에 처음 닿는 순간부터 그 고립이 얼마나 두드러졌으며 적나라하고 선명하게 드러났는지에 대해.
- P84

가먼트 지구의 세일즈맨과 미드타운에서 일하는 비서들로 꽉 찬 크고 화려한 호텔에서, 열기와 악다구니로 가득한음식들이 날아다니고, 쟁반들이 부딪히고, 종업원들은 욕설을 퍼부어대는) 엄청나게 큰 주방을 어색하게 들락날락하며 보낸 그첫 주말, 쟁반을 너무 꽉 움켜쥔 나머지 그 뒤로 며칠이나 내열 손가락 관절은 전부 하얘져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내 바로 옆에서 그릇 치우는 일을 하던 소년이 메인 요리 세가지를 맛본 손님에게 주먹을 내밀며 "관절 샌드위치 좀 드릴까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일요일 밤, 입을 쩍 벌린 엄마 앞에서 식탁 위에 1달러짜리지폐 50장을 내던졌을 때는 달콤한 기쁨을 느꼈고 내가 다시일하러 가리라는 걸 알았다. 그토록 자신만만한 도덕주의자처럼 굴던 나라는 노동자 계급 소녀의 내면에는 처음으로 욕망할 기회가 생긴 데서 오는 예기치 않은 흥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P85

다섯 번째 호텔에서 나는 목에서부터 무릎까지 온통 가슴밖에 안 보이고, 조그만 발에 앙증맞은 신발을 신고, 부드럽고포동포동한 손에 보기 좋게 매니큐어를 칠하고, 화장한 얼굴에앳된 두 눈이 돋보이는 한 여자 손님에게 서빙을 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3분 동안 익힌 달걀들을 테이블에 가져다주자 여자는 내게 말했다. "아가씨, 달걀 좀 까줘. 껍데기가 뜨거워서 손이 아파." 나는 몸을 돌려 벽에 놓인 준비 테이블로 가서 달걀껍데기를 갔다. 그 일은 나라는 존재는 그저 직무의 연장일 뿐이라고 처음 말해준 일이었고, 분명 그 사실을 말해줄 마지막일도 아닐 것이었다. 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든 건 어린 시절 아버지 무릎 위에서 들었던 사회주의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캐츠킬 산맥에서의 경험들이었다. - P89

아니, 고집 센 얼굴이 대답했다. 충분하지 않구나. 충분한것 근처에도 못 갔는걸.
"넌 해고야." 급사장이 내게 말했다. "아침식사 서빙하고정리해서 나가"
내 몸의 모든 피가 단번에 빠져나가는 듯했다. 잠깐 동안기절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일 아침이면이 자리에는 내가 늘 받던 손님들이 돌아와 있을 테고, 그들 대부분은 아침식사 후에 떠날 테고, 나는 당연히 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정확히 꽉 채워서 팁을 받을 것이다. 급사장은 사실 나를 벌주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그도 알았고, 이제는 나도 안다. 금발 여자만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의 엉망진창인 삶을, 그러니까 주름이 쪼글쪼글한 얼굴과 짜증나는 남편, 실망스러운 섣달그믐 밤을 위로하기 위해 나는 해고되어야 했다. 급사장은 그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고.
나는 처음으로 권력에 관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모욕을 당한 급사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갇혀 있다는 걸, 늘 누군가는 굴욕을 당해야만 하는노동하는 삶에 붙들려 꼼짝 못 하는 신세라는 걸 알게 되었다. - P95

스물한 살이 되던 여름, 나는 시티 대학과 캐츠킬산맥을모두 졸업했다. 그해 여름, 그 호텔에서의 시간은 절정이라 할만했다. 누구도 그리고 어떤 것도 사소하거나 단순하다고, 혹은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소유주들은 호텔 자금을 횡령하고 있었고, 급사장은 뇌물을 받고 있었으며, 요리사는 우리에게식중독을 선사했다. 그릇 치우는 소년들과 남자 종업원들 사이에 흐르는 악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리낌이 없었다. 여자 종업원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그건 다시 말하면 급사장이 음흉하게 말한 것처럼 밤에 카지노에 나와서 남자 손님들과 함께 ‘춤을 추라‘는 얘기였다. - P96

나는 잔디밭 위에선 채 나 자신의 멍청한 갈망을 노려보았다. 적막함이 밀려들어왔다. 나는 외로웠다.
그 후에 내가 외로움에서 나 자신을 비틀어 떼어냈던 게 기억난다. 외로움은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균형이야말로 모든 것이었다. 나는 내 주위 잔디밭을, 건물들을, 주차장을, 직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조그맣고 빈틈없는 세계를둘러보았다. 이 세계에서 내가 훌륭하게 작동하는 방법을(다시말해 무례한 모욕을 피하고 어디까지 굴복할지 한도를 조절하는방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한 가지. 똑바로 앞을 보고, 입을 다물고,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삶의 크기가 얼마나 되든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 - P102

되든, 삶은 순간이라는 좁고 똑바른 길을 걸어 나가는 데 달려있다고 나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나는 몽상으로부터 몸을 돌려걸어갔고, 주방 문을 통과했다.
그럼에도 그해 여름에는 모든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게 느껴졌다. 팁은 시원찮았고, 요리사는 가학성애자였으며,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고기와 과일과 우유를 훔쳐내야 했다. 산맥에서 지내는 기간은 늘 장기적으로 비타민이 부족해지는 괴로운 기간이었다. 아무도 어떤 도움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릇치우는 소년이 오렌지주스를 마시거나 램 참을 먹고 있는 걸발견했을 때 호텔 소유주의 얼굴에 떠오를 괴로운 표정이 손에잡힐 듯했다. 어느 날 밤에는 한 남자 종업원이 해고되었다. 식당을 나서던 그를 급사장이 붙잡아 불룩 튀어나온 셔츠 앞섶을잡아 뜯듯 열어 보니 스테이크 두 조각이 맨가슴에 납작하게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까지 여섯, 아니면 여덟 명쯤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입을 열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경우에는 상황이 더 나빴는데, 돈 상납을거부한다는 이유로 급사장이 그 종업원을 해고하려 한다는 걸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03

 비니의 집착이 그의 내면에 있는 은밀한 무언가를 건드렸고, 우리 둘 모두의 내면에서 일종의 방탕한 기질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아름다운 사람들, 영리한 사람들, 나혼자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을 상상 속에 그렸을 때, 그환상은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비니와 마리가 나오는 망상을 시작하자 내 안에서 너무도 솔직하고 격렬한 갈망이 솟아오른 나머지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무모하고 달콤하며 저항할 수 없는 그 갈망은 환상이 되어 사타구니에 들어앉았다. 비니의 욕망은 우리 둘의 욕망이 되었고, 그의 절박함은 우리 둘의 절박함이 되었으며, 그에게 필요한 무언가는그도 나도 충분히 가질 수 없는 극적인 상상의 대상이 되었다. - P113

공모 관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무엇에 대한 공모인지는몰랐지만, 차 안의 분위기가 비밀로 풍성해졌다는 것만 알 수있었다. 비니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져주었다. 내 질문들은 집착을 더 길어지게, 극적인 상상을 더 깊어지게 했다. 우리가 주고받는 은밀한 대화 속으로 어떤 생생하고유동적인 움직임이 기다란 자국을 남기며 이어졌다. 속도를 높이며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숨겨진 약속의 파도가 솟아올랐다부서져 내렸고, 다시 솟아올랐다. 나는 영원히 그 파도를 타고싶었다. - P113

일요일에는 막사 전체가 병을 앓고 난뒤 같은 일종의 무기력한 분위기에 하루 종일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요란한 수다가 계속되던 복도의 분위기와 강렬하게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그 여름은 우리를 수다 떨게 한 갈등들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도 마련하지 못한 채 갑자기 멈춰 서버렸다. 우리의 동요는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이제 우리는 오직 풀려나기만을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다. 저녁식사 서빙은 그어느 때보다도 딱딱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는데, 다들 마음이 이미 호텔을 떠나 있어서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차분하고 조심스럽고 냉정했다. 특히 비니는 누구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표정이었다. - P121

그곳은 무분별한 갈망에 따라 앞날이 가늠되는 세계였다.
그곳의 모든 것이 그 무분별함에 달려 있었다. 무지한 채 남아있기 위해서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했다. 모르는 채 남아 있는일에 실패한 사람들은 고립되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의 굴욕을 필요로 했다. - P123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서른다섯 살이었고, 로더는 쉰 살이었다. 나는 인생 대부분을 여기저기 헤매며, 문이 잠긴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느끼면서 보냈다. 사랑, 명성,세속의 모험 같은 것들은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이라는 걸 해보려는 내 안의 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혼란스러운 정신은 내가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작정한 것같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글을 쓰고자 하는 내 욕망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에 대해 격하게 화를 내고 울고 강박적으로 생각을 거듭하면서 수년을 보냈다. 절뚝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를 분석하며 "난 못해, 안 할 거야, 해야 돼, 못해"라고 불평을 반복해서 늘어놓았다. - P131

로더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나를 놀라게 했고, 그를 싫어하게 했다가 다시 이끌리게 했으며, 그렇게 그에게 돌아갈 때면 나는 새롭게 삶의 힘을 느꼈다. 그날 만나고 나서 열흘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만나 어퍼웨스트사이드의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몇 시간 뒤 나는 걸어서 그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이른 봄이었다. 자기가 사는 건물 현관에서 로더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감고는 막 찾아온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눈꺼풀이 떨렸고, 꽤 오래라고느껴지는 시간 동안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 몸짓이 너무 길어져서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33

로더는 큼직한 방을 가로질러 바다를 향한 포치로 걸어갔다. 낮은 나무 칸막이 위에 놓인 긴 막대 하나를 발견한 그는그걸로 덧문 하나를 열어 받쳐놓았다. 선명한 바다 빛깔을 한작은 정사각형 하나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로더는 나머지 덧문들을 하나씩 차례로 열어 일렬로 된 나무 차양처럼만들었고, 그러자 방은 그늘을 품은 빛으로 둘러싸였다. 포치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에 앉자 세상은 내 눈높이에서 녹색 절벽과 은빛 바다, 푸르디푸른하늘로 구성된 하나의 작은 작품으로 변했다. 기쁨이 내 심장을 가득 채웠다. 그늘지지 않은,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칠해진기쁨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테이블에라면 영원히 앉아 있을 수도 있겠어. 영원히 앉아 있고 싶어. 그리고 이 자리를 떠난다면, 오직 로더와 함께 저 아래 돌투성이 해변을 걸으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우리가 발견하는 세상을 이야기할 때였으면좋겠어. - P143

첫 일주일은 상상 속에서 그려보던 것이 그대로 눈앞에 실현되는 삶에서 믿기 힘든 순간 중 하나였다. 다 허물어져 가는별장에 함께 틀어박힌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을 하는 데 행복하게 익숙해져 가는 로더와 나. 나는 2년인가 3년째 조금씩조금씩 읽던 책을 붙잡고 있었고, 로더는 《여성과 권위》를 1부로 계획해둔 3부작의 2부를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책은심지어 <여성과 권위》보다도 중요한 책이 될 것이었다. 로더의관심사의 폭과 상상력의 범위를 명료히 드러내줄 책이었다. 로더는 몇 년 동안 그 책을 구상해오고 있었다.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지만 막 시작한 단계도 아니었다. 로더는 작업에 착수하기 직전이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시작하리라는 걸 우리는알았다. 로더가 나를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게 영광스러웠다. - P1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는 지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있다.
저 흉흉한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하는 세상속으로.

여기는 서귀포다.
˝서귀 피안˝



비비언 고닉Vivian Gornick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 비평가. 예민하고 집요한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관찰하고, 솔직하고 냉정하게 의미를 발견해내는 작가다. 특히 내면 깊숙이까지들여다보는 솔직하고 생생한 글로 회고록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뉴욕 시티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뉴욕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 <빌리지 보이스>의 기자로 일하면서 페미니스트를 취재했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페미니즘에 빠져들었다. 그 밖에도 <뉴욕 타임스> <네이션> <뉴욕 리뷰 오브 북스> 등에 글을 기고해왔다.
2019년 어머니와 애증의 관계를 날카롭게 풀어낸 《사나운 애착》이 <뉴욕 타임스>에서 지난 50년간 최고의 회고록‘으로 선정되었고, 2021년에는 윈덤 캠벨 문학상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에도 《사랑 소설의 종말TheEnd of the Novel of Love》 《내 인생의 남자들The Men in MyLife>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 비평 부문 후보에, 《이상한여자와 도시The Odd Woman and the City》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 자서전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귀감이 되는 글을 썼다.
이 책에서 고닉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멀어지면서도 기꺼이 낯선 이들 사이로 들어가연결되고자 했던 자신의 노력과 변화를 그대로 내보인다. 마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글을 읽다 보면,
20세기 뉴욕 거리를 걷던 비비언 고닉의 감정과 마음을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이 도시 그 자체처럼 넓은 범위에 걸쳐 있지만, 하나로 어우러져 있지는 않다. 내 친구인 사람들이 서로 친구는 아니다. 가끔씩 내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이들고 뉴욕 사람들이 모두 동류로 느껴질 때면, 이런 우정들은느슨하게 연결된 목걸이의 구슬처럼 느껴진다. 각각이 서로 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두 내 목 아래쪽에 가볍지만 단단하게자리 잡고 있어서 내게 마법 같은 따스한 연결감을 불어넣어주는 구슬.
그럴 때 삶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도시의 정수를, 다시말해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삶의 빡빡하고도 독특한 면을, 그모든 것을 매일 새롭게 짜 맞춰야 하는 데서 오는 위태로움과 짜릿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 P15

아무도 곁에 없고 아무도 만날 수 없을 때 나는 창문 밖을노려보며, 도시 생활을 낭만적이라고 여기다니 그런 바보가 또어디 있을까 생각한다. 외로움이 덥고 건조한 공기처럼 나를에워싼다. 그것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뉴욕의 외로움, 당신은 바보이고 실패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외로움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마음껏 즐기고 있는데, 당신 혼자만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거다.
나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내 삶이 짐 끄는 말의 삶과 같다는 걸 깨닫는다. 마구를 걸치고 있기만 하면 나는 걸음을 놓치는 일 없이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디딜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균형을 깨뜨리면 나는 또다시 목에 걸린 형편의 무게를, 그밑에서 스스로 똑바로 걷는 법을 익혀야 했던 짐의 무게를 느낀다. - P16

엄마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거 하나야."
어깨가 똑바로 펴지고 보폭이 넓어진다. 가슴속의 절망이녹아 사라지기 시작한다. 도시가 내게 자신을 열어 보이고 있다. 나는 마치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의 품에 안긴 것 같다. 남들눈을 신경 쓰지 않는 풍부한 표정이라는 초대장만 있으면 거절당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 P18

마지막 순간까지 애쓰는 모습, 그 다양하고도 독창적인 생존기술을 지켜보다 보면 나를 짓누르던 것이 덜어지고 넘치던 감정이 비워지는 걸 느낀다. 나는 그들의 불안과 함께한다. 그들의 문제를 나눠 갖는다. 쓰러지지 않겠다는 공동의 의지가 내신경 끄트머리에서 느껴진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혼자일 때가 가장 외롭지 않다. 혼자일 때 나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혼자일 때 나는 시간을 번다. 나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내 뉴욕 친구들 모두가 그렇다. - P20

그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에는 로라다. "내 말 못 믿을 거야." 로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한테 전화한 용건을 꺼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부터 로라는 온전히 믿을 수있는 상대다. 로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는 함께 웃음을터뜨리고, 심리학 지식을 담은 문장들이 우리 사이에 오간다.
"언제 저녁이나 같이 먹자." 내가 말한다. "너무 좋지." 로라가말한다. "어디 보자." 로라 역시 자신의 수첩을 들여다본다. "아이고,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다음 주 초까지는 시간이 안 돼.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만." 대화를 나누면서 엄청 즐거워졌는지 로라는 그 기쁨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여기 이 일정을 바꾸면 되겠다. 목요일 어때?" - P21

뉴욕에서의 친구 관계는 우울에 몰두하는 일과 표현하는능력에 매혹되는 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내게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좀 더 높은 수준의 균형 상태에 도달하는 일. 나는 친구 사이에서는 그 일이 일반적인 부부 사이에서와 다르게일어날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우리는 모두 예전에 결혼이란 걸 해본 사람들 아닌가. 많은 사람들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내면의 싸움을,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결론이 나는 전쟁을 하며 삶을 보낸다. 하지만 우리 각자의 인생에는 우위를 차지하는 한두 가지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도시는 이런 역학의 영향 아래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 P22

얼굴을 안다는 것이란! 당신도 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한때
‘기대에 부풀었던‘ 여자의 얼굴이었다. 엉망이 된 입술, 도도한턱, 대담한 색깔의 립스틱, 총명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인 두 눈. 아침 열시에 여기 8번에서, 자신이경험한 모든 것이 선명히 새겨진 얼굴로 그 거리를 등지고 선여자는 내게 화려한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호화로운 방식으로초췌한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 보석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은 오직 도시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 P23


‘어디서든‘ 꽃을 피우려면 사람은 주변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낼 만큼 뛰어나거나, 속한 환경에 맞춰 살 만큼 겸손하게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면 뜻이 맞는최소한의 사람들이 곁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평범한 식물들이 교외의 잔디밭에 심어지는 것과(여기 따분해 보이는 관목이나 저기 쓸쓸한 화단처럼) 풍요롭게 가꾼 정원에 심어지는 것의차이다. 정원에서는 똑같이 수수한 나무과 꽃인데도 한데 모인그 풍성함 덕분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8번로에서는 여자가 경험한 것들이 그를 흥미진진한 사람으로만들었다. 하지만 남부의 어느 도시 대학에 데려다놓는다면, 그는 이내 쓸쓸한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 머리칼. 그 뉴욕 스타일 곱슬머리. 그 머리에는 우리상상 이상으로 ‘한데 모인 풍성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 P24

나는 모여든 사람들 가장자리에 혼자 서 있다. 여자의 목소리와 몸짓이 나를 전율하게 한다. 여자의 유창한 언변에 나는놀란다. 자신의 서사를 전하기 위해 언어와 몸짓을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는가. 여자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자는 혼자고, 나 역시 혼자다. 하지만 그는 저기 있고, 나는여기에 있다. 여자 역시 뉴욕 스타일 곱슬머리를 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도 동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내가 자라날 때 뉴욕은 안전했고, 모든 것은 값이 싸거나공짜거나 둘 중 하나였으며, 미드타운에서는 게이들도 흑인들도 여자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이 도시는 난폭해졌고, 뭐든지 엄청나게 비싸며, 우리 모두는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 P26

거리는 계속 움직이고, 당신은 그 움직임을 사랑해야 한다.
그 리듬으로 된 작품을 찾아내고, 그 동작에서 이야기를 건져내고, 모든 것이 우리가 갑작스레 누군가의 시야에 들어갔다가다시 안 보이게 되는 그 빠른 속도에 달려 있음을 받아들이고서운해하지 말아야 한다. 연결이 만들어졌다 풀리는 바로 그속도에 기쁨과 안도감이 존재한다. 매달릴 필요는 없다. 연결은어디에나 있지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하나의 연결바로 뒤에는 또 다른 연결 하나가 따라온다. - P28

거리는 서사적인 충동의 힘을 증명해 보인다. 인간으로서살아가는 일이 역사상 가장 힘든 시대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그 무한한 힘을. 문명이 붕괴되고 있는가? 도시가 혼란스러운가? 이 세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가? 더 빨리 움직여라.
더 빨리 스토리라인을 찾아내라. - P30

뉴욕에서 가난하고 저속한 사람들, 결함 있는 사람들이 없는 동네는 없다. 도시에서 사회적 유동성이란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서도 도망칠수없음‘을 의미한다. 어디든 대로들은 거리의 삶으로 지나칠 만큼 번쩍거린다. 그럼에도 동네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쌓인다. 파크애비뉴는 여전히 부유층을, 웨스트엔드애비뉴는 중산층을 상징한다. 업타운을 생각할 때면 나는 계급을 떠올리게 된다. - P33

"그 사람들은 어른인 척한 거야." 레너드가 말했다. "그뿐인 얘기지. 40년 전에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불리는 벽장에 들어갔어. 벽장 안에는 옷이 두 벌 있는데 너무 뻣뻣해서 저절로서 있을 정도야. 여자는 ‘아내‘라고 불리는 드레스 속으로, 남자는 ‘남편‘이라고 불리는 정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그게 다야.
그 사람들은 옷 속으로 사라졌어." 레너드는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지금 우리는 척을 하지 않아. 벌거벗은 채로여기 서 있지. 그런 거야." 그가 담배를 빨아들인다. 나는 몇 달만에 처음으로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지켜본다.
"나는 이 삶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한다.
"누군들 적합하겠어?" 레너드가 내 쪽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 P41

하늘이 어두워지고 주위의 모든 건물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북적거리는 도시의 지평선과 나 사이에 내가 낮에 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빨대로 소녀를 찌르던 소년이, 로드 앤테일러 쇼핑백을 들고 있던 여자가 떠오른다. 그들이 했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리고, 그 얼굴과 몸짓이 눈앞에 떠올라 나는혼자 웃는다. 나는 여기에 대화를 저기에 해석을, 또 그다음에딘가에는 논평을 덧붙이며 그 장면들을 수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나는 내가 시간을 뒤로 돌리며 나와 마주치기 전의 그들을 상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나는 흠칫 놀라, 내가 하루의 이야기를 쓰고 있음을 막 나를 지나간 시간에 형태와 질감을 부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 나를 스쳐간 사람들이 이제 나와 함께 방 안에 있다. 그들은 친구가, 거대한 친구들의 집단이 되었다. 오늘 밤 나는 내가 아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 그들은 내게 서사적인 충동을되돌려준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내 삶이 할 수 없는이야기를 하도록 나를 일깨워준다.
ד - P46

첫 사흘 동안 나는 페미니스트들, 티그레이스 앳킨슨Ti- Grace Atkinson, 케이트 밀렛 Kate Millett, 슐라미스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을 만났다. 그다음 사흘 동안에는 필리스 체슬러Phyllis Chesler, 엘런 윌리스ellen willis, 앨릭스 케이츠 슐먼 AlixKates Shulman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동시에 말을 했고, 나는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들었다. 아니, 그보다 내 귀에는 그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야겠다. 하나의 생각에 강렬한 인상을 받으며 그 일주일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이란 이런 것이었다. 남성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선천적으로 중요시하고 여성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 P51

는 생각은 근거 없는 믿음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 믿음은 문화에 기여하는데, 우리의 삶 전체는 그 문화를 따라간다. 정말이지 단순한 이야기다. 그리고 분명 이미 나온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어째서 나는 이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처럼느꼈을까? 왜 내 귀에 이제야 이 이야기가 들려온 것일까?
사랑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준비된 순간‘이란 여전히 삶의가장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여러 요소가 충분히 결합하는 그 순간 말이다. 그 순간에 응답하는 사람은 결코 그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P52

나는 언제나 삶과 욕망하고 얻어내는 일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지하고 분노에 찬 착한 여자의 방식으로 ‘의미‘를 추구했다. 의미 있는 일(다시 말해, 지성이나 정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적절한 파트너가 될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중요했다. 이 두 가지가 내게 필요한 쌍둥이 같은 조건임을 알았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얽혀 있어서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상상할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강박적으로 수다를 떨어댈 뿐, 공부를 할 만큼 고독을 오래 견뎌내지는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생각이 꾸준하게 나아가도록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것이다. 나는 소설을 읽었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공상에 잠겼고, 남자를 생각하며 넋을 잃었다. 진지함에 대해 끝없이 도덕 - P52

적으로 고찰했지만, 나는 남자를 뒤쫓을 수는 있어도 일을 계속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결정적인데, 나는그 사실을 몰랐다. 내가 사랑은 할 수 있지만 일은 할 수 없는상태라는 것을. 나는 사정이 괜찮아지면 일을 할 거라고 쭉 생각해왔다. 사정이 안 좋은데도 내가 이 남자, 아니면 저 남자에게 계속 사로잡혀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20대 중반에 어느 예술가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나에게는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앉을 책상이 있었고, 나를격려해줄 파트너가 있었으며, 충분한 시간과 돈이 있었다. 이제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P53

또다시 틀렸다. 10년 뒤, 나는 몇 편의 기사를 써낸 공격적인 스타일의 이혼한 서른다섯 살 ‘여자‘가 되어 뉴욕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세 아래 혼란은 깊었고, 막막함 역시엄청났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날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나는 ‘여성 해방 운동가들‘
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야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러자 내가 상황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나는충분히 나이가 많았고, 충분히 지루했고, 충분히 지치고 고통받아왔다.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노동자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한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바로 이것이 한 여자의 존재 중심에 있는 딜레마였다. - P53

똑바로 들여다보기엔 힘겨운, 너무도 힘겨운 진실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과 공동체를 갈망한다. 그 두 가지모두 삶에 있기를 바라기에는 썩 괜찮은 것들이지만 갈망할 만한 것들은 아니다.
갈망은 살인자와 같다. 갈망은 우리를 감상적으로 만든다.
감상적이 되면 우리는 낭만만을 추구하게 된다. 내게 있어 페미니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로맨스가 아니라 힘겨운 진실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힘겨운 진실을 추구한다. - P60

내가 방금 적어놓은 모든 것을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몇 번이고 잊어왔다. 불안과 권태와 우울이 나를 압도하면, 그것들은 나를 지워버리고 나는 ‘잊는다.‘ 영혼의 노예 상태란 일종의 기억 상실이어서, 우리가 아는 것을 붙잡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것을 붙잡지 못하면 우리는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변화가없으면 우리 자신 안에 있던 연결은 끊어져버린다. 그건 견딜 - P60

수 없는 일이기에, 삶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끝없이 ‘기억하는‘ 일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끊임없는 투쟁 속에 있다.
나는 세 차례나 구원 같았던 로맨스의 상실을 견뎌냈다. 사랑이라는 환상, 공동체라는 환상, 일이라는 환상의 상실이 그것이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잃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1970년 11월의 그 계시적이었던 첫 순간으로 돌아갔다. 초기의 페미니즘은 나에게 투명해지는 통찰의 생생한 번쩍임으로남아 있다. 그것은 나를 자기연민에서 구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선물을내게 선사했다. - P61

나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심한다. 내 단단한 마음을, 그리고 또 다른 인간 존재를 동시에 사랑해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나는 일을 한다. 매일의 노력은 여전히 몹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노력하는 한, 나는 로맨스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로맨스에 저항할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진다.
페미니즘은 내 안에 살아 있다. - P61

언제든 같이 있었다. 같이 있는 일이 즐거웠던 건 절대 아니었고, 그저 떨어져 있는 일을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같이 있으면 우리 사이에는 긴장이 피어올랐지만, 혼자 있을 때면 극심한 외로움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외로움은 긴장보다 고통스러웠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었다. 결국 내가 우유 한 통을 사러 간다고 하면 남편이 같이 가겠다고 하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그들은 모두 우리처럼 젊었다)은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 정말 서로에게 헌신적이네." 불안이 헌신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외로움은 인간에게 있어서정의 내리기 가장 힘든 상태라는 것. 결혼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집요하게 우리자신을 외면했고, 그 외면은 모멸적인 것이 되어갔다. 우리의 감정은 이제 우리의 적이 되었다. 모든 감정을 둘러싸고 보호막이 자라났다. 이 보호막이 두꺼워질때면 가운데에 있던 살은 쭈그러들었다. 젊고 건강했던 나는산 채로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굽으면서도 윤기나는 푸른 잎을 잃지 않은 생게남을 영험하게 생각하여여기를 신당으로 삼은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기도하는 마음이 서려 있는 오색천과 소지, 그리고 자연의 산물을 대표한 과일 몇알로 신과 마음을 나누는 모습이 제주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아닐까. 누가 이를 미신이라고 할 것이며 추하다고 할 것이며 가난하다고 비웃을 것인가.
수많은 해녀 노래 중에서 가장 애달픈 구절은 "이여싸나이여싸. 칠성판을 머리에 이고 바다 속에 들어간다"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사시인 석북(北) 신광수(申光洙)는 자녀가(潛女歌)」에서 매일같이 생사를 넘나들며 물질을 하는 해녀의 수고로움을 노래한다. 깊고 푸른 물에 의심 없이 바로 내려가 날리는 낙엽처럼 공중에 몸을 던지며 길게 휘파람 불어 숨 한번 토해낼제 그 소리처량하여 멀리 수궁 속까지 - P165

흔들어놓는 것 같다며 "잠녀여! 잠녀여! 그대는 비록 즐겁다 하지만, 나는 슬프구나"라며 애잔한 서사시를 바쳤다.
생사를 초월한 처연한 마음이 일어나는 종달리 돈지할망당. 아! 그것은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풍광이다. 그래서 나의 제주답사일번지 종점을이곳 종달리 생게남 돈지할망당으로 삼는다.
그날도 숨비소리 아련한 빈 바다엔 노을이 짙게 내리고 있었다. - P166

한라산 백록담까지 등반은 8, 9시간 걸리는 관음사 코스(8.7km), 성판악 코스(9.6km), 돈내코 코스(7km)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답사객에게는 해발 1,700미터의 윗세오름까지만 가는 것이 제격이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 이르면 선작지왓 너머로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통째로드러난다. 그것은 장관 중에서도 장관으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내 가슴은 뛰고 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한라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의 반은 만끽할 수 있다. 거기서 백록담까지는 1.3킬로미터 산행길이다. - P168

윗세오름에 이르는 길은 어리목 코스(4.7km)와 영실 코스(3.7km) 두가지다. 왕복 8킬로미터, 한나절 코스로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환상적이면서 가장 편안한 등산길일 것이다. 답사든 등산이든 왔던길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나는 나이들면서는 영실로 올라가서 영실로 내려오곤 한다. 영실 코스는 윗세오름을 올려다보며오르다보면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드라마틱하게 나타나는 감동이 있고, 내려오는 길은 진달래밭 구상나무숲 아래로 푸른 바다가 무한대로펼쳐지는 눈맛이 장쾌하기 때문이다.
영실 코스는 승용차가 영실 휴게소까지 올라갈 수 있어서 2.4 킬로미터(40분) 다리품을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영실이 아무 때나 운동화 신고 오를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다.  - P169

한라산등반기를 쓴 문필가들은 이 대목에서 모두들 한목소리를 내는데 그중 이형상 목사의 묘사가 가장 출중하다.


기암괴석들이 쪼아 새기고 갈고 깎은 듯이 삐죽삐죽 솟아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하고, 어기어 서 있기도 하고, 기울게 서 있기도 하고, 짝지어 서 있기도 한데, 마치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돌아보며 줄지어 따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조물주가 정성들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좋은 나무와 기이한 나무들이 푸르게 물들이고 치장하여 삼림이 빽빽한데 서로 손을 잡아 서 있기도 하고, 등을 돌려 서 있기도 하고, 옆으로 누워 있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니, 마치 누가 어른인지다투는 것도 같고, 누가 잘났는지 경쟁하는 것도 같고, 어지럽게 일어나 춤추고 절하며 줄지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토신이 힘을 다하여 심어놓은 것이다.
신선과 아라한이 그 사이를 여기저기 걸어다닌다. 이쯤 되면 경개(景槪)를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 P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랑쉬오름, 아부오름은 둥근 자배기를 엎어놓은 듯하다. 용눈이오름은 기생화산 서너 개가 겹쳐서 터지는 바람에 어깨를 맞대듯 붙어 있어 능선이 굽이치는 곡선을 이룬다. 거문오름은 굼부리가 겹쳐지면서 등근 원이 아니라 쌍곡선을 이루며 말발굽 모양이 되었다. 어떤 오름은 서너 개의 굼부리가 삼태기 모양으로 드러나 있기도 한다. 그래서 오름은저마다의 표정이 다르다.
제주섬 어디를 가나 오름이 없는 곳이 없다. 한 섬이 갖는 기생화산의수로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오름은 자생식물의 보고(寶庫)며, 지하수 형성지대다. 중산간지대의 오름은 촌락 형성의 모태가 되기도 했고, 말을 돌보는 테우리들의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제주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름을 보고 자랐고, 거기에 의지해 삶을 꾸렸고, 오름 자락 한쪽에 산담을 쌓고 떠나간 이의 뼈를 묻었다. 오름이 없는 제주도를 제주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P82

상철이는 창밖을 가리키며 왼쪽은 샘이오름, 오른쪽은 동거문오름, 앞에 보이는 건 당오름 하고 친절한 교사인 양 나에게 오름의 이름을 알려주는데 가까이서, 멀리서, 그리고 겹겹이 펼쳐지는 오름의 능선들은 그이름만큼이나 신비롭고 아름답고 정겹게 다가왔다.
전화하림파이야제주의 동북쪽 구좌읍 세화리 송당리 일대는 크고 작은 무수한 오름들이 저마다의 맵시를 자랑하며 드넓은 들판과 황무지에 오뚝하여 오름의 섬 제주에서도 오름이 가장 많고 아름다운 ‘오름의 왕국‘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다랑쉬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 P83

다랑쉬오름에는 목본류와 초본류 25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 오름사면은 전체적으로 삼나무, 편백나무로 조립되어 있으며 곰솔, 비목등이 자연식생하고 있다. 오름 서, 북사면은 삼나무,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방화로를 따라 왕벚나무, 비자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곰솔, 비목, 검노린재, 국수나무 등과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정상에는 키가 작은 곰솔, 소사나무 등이 식생하고 있다. 탐방로와 정상 주변에는 초본류가 철 따라 아름다운 꽃들을 피운다. 초본류로는 새끼노루귀, 각시붓꽃, 세복수초, 할미꽃, 산자고, 골등골나물, 층층이꽃 솔체, 절굿대,
바디나물,산비장이, 엉겅퀴, 섬잔대, 한라꽃향유, 한라돌쩌귀, 야고등이 자생하고 있다. - P92

소사나무가 관목림을 형성하고 있어 이것이 철 따라 보여주는 모습은 오름 못지않은 볼거리고 기쁨이라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삼다도 강풍 때 우리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관목이 소사나무였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 소교목으로 분재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사랑하는 나무다. 소사나무는 키가 크지 않아 아주 아담하다. 잎은 달걀모양이고 잎자루에 잔털이 있는데 5월에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를 맺는다.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지만 우리나라가 원산지 격이어서
‘Korean hornbeam‘이라고 한다.
그 소사나무가 오름의 비탈에서 정원사의 가위가 아니라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야무지면서도 단정하게 무리지어 자라니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장관인지 보지 않아도 알 만하지 않은가. 국립수목원 이유미 연구관의 「우리 풀 우리 나무」(『주간한국』 2010.6)에서는 소사나무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 P93

소사나무는 녹음이 멋진 나무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소사나무들은바람이 가장 많이 들고 나는 바닷가 산언덕 즈음에 무리지어 숲을 이루어 특별한 풍광을 자아낸다. 굶어도 아주 크지 않고, 적절히 자연의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의 이리저리 부드럽게 굽은 줄기 하며, 운치있게 흰빛 도는 수피가 점차 짙어가는 초록의 잎새와 아주 멋지게어울린다. 그 숲을 바라보는 시선의 끝머리에 넘실대는 바다라도 보이면 더욱 근사하다. - P93

능선을 한바퀴 돌고 나면 큰 굼부리가 하나, 작은 굼부리가 셋 있어 어미가 세쌍둥이를 보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용눈이오름엔 여러개의 알오름이 있다. 알오름은 오름 속에서 생긴 새끼오름이다. 남서쪽경사면에는 주뚜껑처럼 오목하게 파인 아주 예쁜 알오름이 있는데 둘레가 150미터 정도 되는 작은 크기로 잔디밭이 에워싸고 있다. 또 북동쪽에 있는 알오름은 위가 뾰족하게 도드라져 아주 귀엽다. 그 기이하고도 변화무쌍한 경관 때문에 용눈이오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용눈이오름은 오름 전체가 잔디로 덮인 잔디밭 오름이다. 그 보드라운 촉감과 아름다운 곡선 때문에 사람의 눈을 여간 홀리는 것이 아니다.
용눈이오름 잔디밭엔 미나리아재비도 많고 할미꽃도 많다. 그 미나리아재비와 할미꽃이 보드라운 잔디밭에 지천으로 피어났을 때를 상상해보라. 화가라는 인간은 형태와 색감과 질감에 대단히 민감한 동물이다. 화가 임옥상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내게 감상을 말한다. - P101

용눈이오름에서 불과 이십 분 거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고 김영갑(金永甲, 1957~2005) 선생만큼이나 소중한 제주의 자산이다. 두모악(혹은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칭으로 백록담 봉우리에 나무가 없는 모양에서 나온 이름이다. 지독히도 제주도를 사랑했고, 끔찍이도 자신의작업에 충실했던 한 사진작가의 처절한 인생이 낳은 우리들의 갤러리다.
김영갑은 1957년 부여에서 태어나 학력은 부여 홍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그는 제주에 반하고 사진에 미쳐 1982년부터 3년 동안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진작업을 하던 끝에 1985년에는 아예 제주에 정착하여타계하기 직전까지 20년간 온 섬을 누비며 제주도의 자연을 소재로 20만여 장의 사진작품을 남겼다. - P102

1985년부터 해마다 서울과 제주에서 사진전을 열었는데 그중 태반이
‘제주의 오름‘이라는 주제였다. 2004년에 펴낸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에세이집에서 김영갑은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통해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고 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사랑했다. 그의 사진을 본사람은 제주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곤 했다. 특히 그는 제주의 바람을 잘 찍어냈다. 
그러던 그가 1999년 친구들 앞에서 카메라가 무겁다. 가끔 손이 떨린다고 하더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루게릭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3년 더 살면 잘 사는 거래"라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2002년에는폐교된 삼달초등학교 분교를 임대하여 개조한 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개관했다. 타계하기 직전인 2005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주인공없이 열린 전시는 「내가 본 이어도 1-용눈이오름」이었다.  - P103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아부오름뿐만 아니라 어느 오름이건 오름에한번 올라본 이는 제주를 다시 보며 제주를 사모하고 사랑하게 된다. 오름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던지고 싶어진다. 결국 그렇게 오름에 미쳐 살다 육신을 오름에 묻은 분이 있다. 『오름나그네』 (높은오름 1995)의 저자인 고(故)김종철(金鍾喆, 1927~95) 선생이다.
한라산과 오름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김종철 선생은 제주의 덕망높은 산악인이자 언론인이었다. 당신은 환갑 나이의 고령에 들어서면서330여 오름을 일일이 답사하며 각 오름의 이름과 생태와 그 속에 담긴사연들을 정리해나갔다. 1990년부터 제민일보』에 매주 연재한 ‘오름나그네‘는 5년간 계속되었다. - P107

제주 자연의 보석이지만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귀한 줄 몰랐던 오름의 가치를 선생이 일깨워준 것이다. 골프장에 깔 흙으로 사용하기 위해 오름 하나가 영원히 사라지는 일을 방치했던 제주인들도 이제는 ‘오름 보호‘를 외치게 되었다.
『오름나그네』 이후 오름 등반 모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제주도는마침내 오름의 소중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제주의 자연자원을 생태관광과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부지역의 다랑쉬오름, 서부지역의노꼬메오름을 제주도의 오름 랜드마크로 지정했다.
「오름나그네』는 제주의 신이 그에게 내린 숙명적 과제였던 모양이다.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앞에도 없었고, 앞으로도없을 것이고, 오직 김종철 그분밖에 없다. - P108

선생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한라산 1700고지 윗세오름 너머백록담을 턱 앞에서 바라보는 곳, "진달래가 떼판으로 피어 진분홍 꽃바다를 이루는 광활한 산중고원" 그래서 "미쳐버리고 싶다"고 하셨던 선작지왓에 뿌려졌다. - P109

제주의 자연이 아름답고 경이롭다는 사실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에 등재됨으로써 이미 객관적이고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다. 요즘 거론되는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이 관광객들의 인기투표라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지질, 생태, 환경등 자연과학자들의 전문적 평가의 결과였다.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도 지정되면서 유네스코 자연환경 분야 3관왕을 차지했으니 그랑프리와 인기상을 모두 차지한 셈이다. - P111

제주도는 120만 년 된 순상(狀, 방패 모양) 화산으로 많은 양의 현무암질 용암류가 연속적으로 분출되고 퇴적되어 방패 모양의 완만한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제주도는 수중 대륙붕 위에서 발생한 수성 마그마성 분화의 결과로 처음 생성되었고 이후 360개의 단성화산(오름)에서 분출된 현무암질 용암이 그 위로 쌓였다. 그리고 현무암질 용암이관(tube) 모양을 만들면서 광범위한 규모의 용암동굴을 형성했고현재까지 120개의 용암동굴이 알려져 있다.


즉 순상화산이고, 오름이 있고, 용암동굴이 있다는 것이 제주도와 한라산 지질의 개요이며 특질이다. 얼마나 간명한가. 이어서 보고서는 지구 전체에서 본 제주도 화산지질의 위상을 말하고 있다. - P115

조사단은 조명반, 기록반, 측량반, 보급반으로 꾸며졌다니 귀엽다고는할지언정 꼬마라고 얕볼 것은 아니었다.
굴 입구에서 1.2킬로미터 들어가자 무너진 돌이 돌동산을 이루고 있는데 위쪽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여 찾아낸 것이 지금 우리가 들어가고있는 제2입구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47년 2월 부종휴 선생은다시 탐사에 나서 동굴 끝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동백꽃이 만발하고 겨울딸기가 열매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부종휴 선생은 그 동굴 끝이 지상의 어디인가를 측정한 결과 그곳은마을사람들이 ‘만쟁이거멀‘이라고 부르는 곳이었고 이로 인해 이 동굴은 만장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종휴 선생은 1968년 5월 만장굴에서 홍정표 선생 주례로 산악인 30명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 결혼식을 계기로 만장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P124

일찍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녕중학교 서무주임을 지낸 김군천(金君天, 1922~2011) 할아버지 덕택이었다.
할아버지는 1960년 퇴임 후 정부에서 관심도 보이지 않고 방치해둔 고항의 김녕사굴지킴이를 자원하여 여기에 정착해 사셨다. 주변 땅 1만2천평을 매입해 정비하여 지금 도로변에 있는 협죽도길, 잔디밭이 모두 이분이 심은 것이란다. 제주에는 이런 고맙고도 위대한 알려지지 않은 분이 곳곳에 있다. - P125

동굴 끝에는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2010년 재조사 결과 길이 800미터. 수심은 8~13미터, 최대 폭은 20미터로 확인되었다. 동굴은 용천동굴, 호수는 ‘천년의 호수‘라고 명명되었다.
용천동굴은 용암동굴이면서 석회암동굴의 성질도 지닌 세계 최대 규모의 ‘유사 석회동굴‘(pseudo limestone cave)이었다. 때문에 천장에서는 지금도 종유석이 생성되고 있는데 가느다란 명주실 같은 것이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어 그 환상적인 분위기는 형언할수 없을 정도이다.
실사단은 우리 조사단의 안내를 받아 용천동굴에 들어가보더니 이런처녀동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며 조사 명목이지만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 P131

동굴과의 상대평가에서도 아주 높은 점수를 주었다.


우리 실사단 대부분은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자연적 특질은 용암동굴이라고 생각한다. 길이 7킬로미터가 넘는 용암동굴은 제주도의 만장굴을 포함해 세계에 단 12개만이 존재한다. 게다가 만장굴은 부근의 김녕사굴 및 용천동굴과도 이어져 13킬로미터 이상의 단일 통로를형성하고 있다.(…)하와이 화산국립공원에도 용암동굴이 여러 개 있으나 전체적인 규모나 상태, 접근성 측면에서 모두 제주도에 필적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캄차카 및 갈라파고스 제도의 순상화산은 규모도 더 작고 용암동굴등의 부차적 지형을 다양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단적으로 말해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전세계 용암동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도가 높다. - P133

세계자연보전연맹은 우리나라에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애초에는 실사단 중 많은 분들이 제주도 전체를 등재하는 것까지 검토했다. 최소한 제주도의 다른 응회구 및 용암동굴까지 포함하여 세계자연유산 범위를 폭넓게 확장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결국 세 군데로만 후보 지역을 국한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토지 소유권, 소유주의 태도, 보존 상태 등관리 측면의 완전성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서 가장 긴 동굴로 웅장한 3차원 구조를 보이는 빌레못동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법적으로 보호되고 있기는 하나 상당 부분이 개인 소유로 이미 많이 훼손되었다. 협재에 위치한 쌍용굴, 황금굴, 소천굴은 거문오름 동굴계에 비해 뛰어나지는 않지만 역시 여러가지 석회암 생성물이 동굴 내부를 장식하고 있어 등재할 만했다. 그러나 사유지인 한림공원 내에 있어 추진이 어려웠다.
실사단은 자연유산에 추가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곳으로 산굼부리, 사라오름, 어승생악, 송악산, 산방산 등을 지목했다. 실사보고서는이 점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다음과 같이 강력히 권고했다. - P134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지역 이외에 더 넓은 지역의 화산지형과 제주도의 생물다양성 가치를 관리하는 데 더욱 주의를 기울여 추가로 제주도의 자연유산등재 범위를 확대하는 가능성을 고려해볼 것. - P135

"나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제주도지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공식적으로 제시한 세계자연보전연맹의 다섯 가지 권고사항을 충실히이행하여 훗날 제주도 전 지역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P136

제주답사 일번지의 마지막 테마는 해녀다. 우리는 거문오름을 떠나해녀문화를 답사하기 위하여 구좌읍 하도리로 향했다. 제주 해녀의 상징은 하도리에서 찾게 된다. 하도리에는 현재도 가장 많은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고, 일제강점기에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에는 기념탑도 세워져 있고, 2006년에 문을 연 해녀박물관도 있다. 하도리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는 마이크를 잡고강의를 시작했다. 가는 길이 짧아 해녀와 해녀의 역사에 대해 핵심만 얘기해주었다.


"해녀는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의 정신이고, 제주의 표상입니다. 해녀 - P137

가 없는 제주는 상상할 수 없죠. 19세기까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뿌리는 육지의 농부와 해안가의 어부였지요. 제주에서는 농부, 어부 외에 해녀와 목자(牧者)가 더 있었습니다.
ISI제주에선 목자를 ‘우리‘라고 하고 해녀는 녀(女)‘ 또는 ‘수(潛媛)‘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해녀라는 말로 바뀌었어요. 학자 중에는 해녀는 일제가 업신여겨 만든 말이라고 해서 잠녀와 잠수를고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녀나 잠수의 어감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해녀라는 말이 이미 익어 있기 때문에 통상 해녀로 부릅니다. 언어는 변하는 것이니까요." - P1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다.
지금 나는 구좌에 있다.


연북정, 비석거리, 번듯한 기와집 마을이 있고, 중산간지대에 와흘리 선흘리의 본향당신당이 신령스럽다. 교래리엔 자연휴양림도 있다. 특히나 구좌엔 김녕리, 평대리, 송당리,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 등 이름도 아름다운 동네 열두 개가 있고 중골, 연등물, 검은흘, 솔락개, 글막개, 첫동네 등제주토속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60여 곳의 묵은 동네가 있다.
구좌는 한라산 북사면의 저지대로 넓은 초지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제법 넓고 비탈진 들판의 긴 밭담 속에서 당근·양파·마늘이 철따라 푸른빛을 발하고 송당목장이 있는 송당리 일대는 마지막 테우리 (목동)들이 여전히 소와 말을 키우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림 (子林)도 구좌에 있다.
하도리에는 지금도 제주 해녀의 10분의 1이 변함없이 물질을 하고 있고, 갯가 곳곳엔 해녀들의 쉼터인 불턱과 세화리 갯것할망당, 종달리 돈지할망당 같은 해안가 신당이 옛날 그 모습으로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구좌에는 제주의 농업, 목축업, 어업이 과거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어 제주인의 건강하면서도 애틋한 삶을 속살까지 만질 수 있다. - P15

구좌는 기생화산(寄生火山) 인 오름의 왕국이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 굽이치며 돌아가는 능선이 감미로운 용눈이오름도 여기있다. 만장굴, 김녕사굴, 용천동굴이 있는 제주도 용암동굴의 종가이기도 하다. 문주란 자생지로 유명한 토끼섬도 구좌에 있다. 게다가 1만 8천신들의 고향인 송당본향당도 여기에 있으니 구좌는 제주 자연과 인문의 원단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읍소재지 세화리에서 하도리 거쳐 종달리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멀리성산일출봉이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 제주도 일주도로 중에서도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조천과 구좌는어느 면으로 보나 당당히 ‘제주답사일번지‘로 삼을 만하다. - P15

심어놓았다. 그러나 하와이나 사모아 섬에서 장대하게 자라는 나무들이제주에서는 억지로 겨우겨우 자라 대빗자루 몽둥이처럼 길게 올라간 것을 보면 감동은커녕 측은지심이 일어날 때가 많다.
진짜 제주도에서 우리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자생종 나무들이다. 구실잣밤나무, 담팔수, 먼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협죽도 같은 늘푸른나무들이다. 자생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들은 한껏우리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제주시내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길, 서귀포의 담팔수 가로수길, 대정제주 추사관 언저리의 먼나무 가로수길, 사려니 숲길 가는 길의 삼나무가로수길, 남원 일주도로의 야자나무 가로수길, 종달리 해안도로의 수국꽃길은 그 자체가 일품이어서 차 타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눈과 마음이 황홀해진다. - P26

‘소원을 새긴 백지!‘


사연이 많은 사람은 소지를 몇십 장 겹쳐서 가슴에 대고 빈다고 한다.
이런 높은 차원의 발원 형식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보냐. 본래는 글모르는 할머니들을 위해 생겨난 의식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글을 써넣은것보다 진한 감동을 주지 않는가!
일본의 사찰에 가면 소원을 써서 절 마당에 걸어놓는 강까께(願掛)가 있고,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선 소원을 적어 돌 틈에 끼워넣는다고하는데 우리 제주도에선 백지에 소원을 전사(轉 寫)해서 걸어놓는 것이다. 팽나무 신목에 흰 소지가 나부끼는 와흘본향당은 제주인의 전통과정체성을 웅변해주는 살아 있는 민속인 것이다. - P41

는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팽나무 대여섯 그루 아래 모셔진 이 다섯 석상을 보면 그야말로 서민적이고 해학적이고 무속적이고 제주도적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면서깊은 정을 느끼게 된다. 불상을 보거나 돌하르방을 볼 때는 전혀 느낄 수없는 인간적 체취이다. 삼다도의 그 많은 돌 중에서 인체를 닮은 것, 얼굴을 닮은 것 다섯 개를 골라 거기에 이목구비만 슬쩍 가했을 뿐인데 누구도 석상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친다. 조형적으로 세련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련되기는커녕 조형이라는 개념도 없이 민초들이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돌을 주워다 세워놓았을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서말할 수 없는 친숙감을 느끼니 이것이 민속의 힘이고 아름다움이라고할 만한 것이다. - P46

제주도 답사에서 돌아와 학생들과 얘기하는 도중에 사실 ‘회천 석인상‘이라는 아주 별격의 옛 석인상이 있었다며 사진을 보여주자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재미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이런 곳을 데리고 가지 않은 선생이 원망스럽고 너무도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생각해보자니 제주의 유서 깊은 중산간마을인 세미마을은 오래도록많은 상처를 입었다. 마을 이름은 회천동으로 둔갑했고, 포제를 지내던신당의 석인상은 화천사 오석불이라고 불리고 몸에는 유교식 위패가 새겨졌다. 거기다 4·3사건 때 이 마을들은 전소되고 많은 희생자를 내어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세워놓은 ‘4·3희생자 위령비‘가 길가에 쓸쓸히서 있다.
- P47

성에 배치된 인원도 대대적으로 보강하여 진지의 대장 아래 상비군약 100명과 예비군 100명을 두었고 전용배가 한 척 있었다고 한다. 이때성 위에 망루를 짓고 쌍벽정(雙碧亭)이라고 했는데 선조 32년(1599)에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다시 건물을 수리하고는 정자 이름을 연북정이라고 바꾸었다.
오늘날 조천진의 성벽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동남쪽 정면은 높이 14자의 반듯한 축대이고 북쪽은 타원형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옛날의 장했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모양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둥그렇게 둘러진 옹성(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 P50

연북정 정자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앞뒤 좌우로 퇴(退)가 딸린일곱 량 집이다. 일곱 량이란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도리가 일곱 개 있다는 뜻으로 세 량, 다섯 량이 아니라 일곱 량이나 되는 큰 집이라는 뜻이다.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연결방식이 모두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며 지붕은 합각지붕으로 물매가 아주 낮다. 바람이 세기 때문에 육지의 정자처럼 기둥을 높이 올리지 못하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북정은 시원스런 멋이 아니라 야무진 집이라는 인상을 준다.
모든 정자는 건물 자체보다 거기서 내다보는 전망이 더 중요하고, 더아름답다. 연북정에 오르면 조천항이 멀리 내다보인다. 연북정 너머 펼 - P50

 조천진지붕이 육지의 그것처럼 활짝쳐지는 먼바다에서 파도가 넘실넘실 춤을 추듯 포구로 밀려들어오다가바위섬에 부딪칠 때는 ‘처얼썩!‘ 소리를 내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그러고는 해안에 다다라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가만히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자취를 감춘다. 열지어 들어오는 한 무리 파도가 밀려가는끝까지 눈길을 주면서 몇번 일렁이나 헤아려보기도 하고, 낮은 바위를거뜬히 타고 넘는지 숨죽여 기다려보기도 한다.
연북정 정자에 앉아 검은 바위를 넘나들며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몸과 마음이 홀연히 가벼워진다. 이상(李箱)의 표현대로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아진다. 그것이 연북정에오르는 맛이다. - P51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아버님께 보낸 편지에 연북정에 대한 역설을 이렇게 말했다.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대부분의 유배자들이 배소에서 망경대나 연북정 따위를 지어 임금에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연모를 표시했음에 비하여 다산은 그런 정자를짓지도 않았거니와 조정이 다시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해배만을 기다리는 삶의 피동성과 그 피동성이 결과하는 무서운 노쇠를 일찍부터 경계하였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런 마음으로 20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그랬기에 오늘날 존경받는 지식인상이 된 것이리라. - P54

너븐숭이에서 진짜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추모의 염을 일으키는 것은 길가에 있는 애기무덤들이다. 관도 쓰지 않은 무덤인지라 대야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현무암을 둘러놓은 것이 전부인 애기무덤 여남은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애처롭고 슬픈 풍경을 나는 다 표현하지못한다. 무덤가에는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세운 작은 까만 대리석 비석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평화와 상생(相生)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4·3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남겨진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형제적 연대감과 평화를 기원하나이다."


조촐할지언정 위로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진실되어 가슴이 뭉클해진 - P72

다. 누가 이 애기무덤과 비석을 보면서 4·3을 불온분자의 폭동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유적지의 진정성이란 이런 것이다. 그래도 더러는 애기무덤을 보면서 "아이들까지도 죽였단 말인가?"라고 적이 놀라고 의심이 가는 분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정말 당시는 그랬고, 그보다 더 이해하기힘든 사실도 있다. 제주의 화가 강요배가 4·3사건을 주제로 한 「동백꽃지다」 연작을 전시할 때 얘기다. 요배 그림을 좋아한 그의 팬 한 분은 그의 이름까지 멋있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은 이름도 예술적이에요. 아버님이 멋있는 분이었나 봐요"라고 친근하게 말하자 요배는 멋쩍은 듯 아무 말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때 요배는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에는 4·3사건의 아픔이 그대로 배어 있다. 4·3사건의 양민학살 당시 지금 제주공항인 정뜨르에 토벌대가 수백 명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호명할 때 "김철 - P73

수"라고 불러 동명을 가진 세 명이 나오면 누군지 가려내지 않고 모두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때 요배 아버지는 내 아들 이름은 절대로 동명이 나오지 않는 독특한 이름으로 지을 것이라고 마음먹어 요배의 형은 강거배, 요배는 강요배가 된 것이다. 제주인에게 4·3의 상처는 그렇게 깊고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곁으로 큰길 안쪽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순이삼촌‘이라고 새긴 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순이삼촌 소설의 문장들이 새겨진 수십 개의 장대석이 널부러져 있다. 마치북촌리 학살 때 시신들이 쓰러져 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비석을 향해가는 동안 소설의 구절들을 스치듯 읽게 되니 자연히 고개가 땅을 향하여 추모하는 자세가 된다. 제주도에서 본 가장 진정성이 살아 있는 기념설치물이었다. 그중 한 대목을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 P74

‘순이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 둘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큼직큼직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여 무슨 오해라도 살까봐 4·3을 쉬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4·3사건을 당당히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조천에 왔으면 마땅히 너븐숭이를들러야 진정한 답사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P74

"오름은 제주의 빼놓을 수 없는 표정이자 제주인의 삶이 녹아 있는 곳이라!"

나는 당장 다랑쉬오름을 가보고 싶었다. 그것을 보지 않고 어떻게 그의 그림에 평을 쓸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의 화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단 제주시내로 가서 민예총의 김상철에게 전화를 걸어 답사팀을 꾸려 다랑쉬오름에 가자고 했다. 이런 일은 상철이에게 부탁하면 차질 없이, 아니 150퍼센트 해낸다. 여지없이 상철이는 자동차가진 사람을 꼬드겨서 우리 팀에 끌어넣었다.
다랑쉬오름은 구좌읍 세화리와 송당리에 걸쳐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 비자림의 동남쪽 1킬로미터 지점이다.
제주시내에서 가자면 번영로97번 도로)와 비자림로, 중산간동로를 거쳐가거나 산천단을 지나 일단 5·16도로(1131번 도로)로 들어섰다가 산굼부리를 거쳐가는 1112번 도로로 갈 수도 있다. 제주시내에서 37킬로미터거리로, 탐방로 입구 주차장까지 45분 정도 걸린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잘하는 상철이는 무조건 후자로 가야 한다고했다. - P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