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제시한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역사적으로인종주의의 구조적 토대 노릇을 하던 것이 (비록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무너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본주의에는 수탈과 착취가 모두 필요했다. 하지만 과거에는 수탈과 착취가 분리돼, (피부색 경계선에 따라분할된) 서로 구별되는 두 인구집단에게 따로 적용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것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현체제는 거의 모든 무자산 상태의 성인을 임금노동에 징용하면서도, 압도적 다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생산 비용보다 적은임금을 받는다. 공적 지원을 해체해 ‘사회임금‘을 줄이는 바람에막대한 수의 무자산 대중이 부채의 마수에 얽혀든다. - P1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이 국면에서도 인종적 억압은 건재하다. 유색인은 여전히 인종화되며, 빈민·실업자·노숙자가 되어 굶주리고 병들 가능성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높다. 범죄나 약탈 대출에 희생될 가능성 감금되거나 사형 선고를 받을가능성, 경찰이 괴롭히고 살해할 가능성, 총알받이나 성노예로이용당하며 끝없는 전쟁에서 난민이나 ‘부수적 피해자 collateraldemage‘가 될 가능성, 자산을 박탈당하고 폭력·빈곤·기후변화가 야기하는 재앙을 피해 도주할 수밖에 없어 결국 국경 수용소에 갇히거나 바다에서 익사할 가능성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태 전개를 한데 합치면 한 가지 수수께끼가 제기된다. 한편으로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이전 체제에서 인종적 억압의 토대 노릇을 하던 정치-경제적 구조를 해체하고 있다.  - P107

인종주의는과거에 자본의 포식 행위에 맞설 방패가 있었던 이들의 상당수가 이제는 짐을 함께 들려는 의지를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인종주의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물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인종주의적이기는 하다). 그들에게도 정당한 불만이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보편적으로 수탈을 강제하는 사회 시스템을 폐지하려는 인종 교차적 운동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러한 불만은 대개 권위주의적 우익 포퓰리즘이 성장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적 중심부에 속한 거의모든 나라에서, 그리고 예전의 주변부에 속했던 몇몇 나라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만개하고 있다.
이 흐름들은 우리 시대의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측가능한 반작용을 보여준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체화한 엘리트들은 냉소적으로 ‘공정‘에 호소하면서도 수탈을 확대한다. 한때 ‘백인‘ 혹은 ‘유럽인‘ 지위 덕택에 최악은 면하도록 보호받던 이들에게 이제는 특혜 받는 지위를 버리라고, 불안정성의 증대를 받아들이고 폭력에 굴복하라고 말한다.  - P109

하지만 이에 대해 비탄에 빠지기 전에, 현상황에서비인종적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어떤 해석에 따르면, 이는 한편으로 유색인이 그 인구수에 비례해 글로벌 금융의 관제고지에 진출하거나 정치적 실력자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탈과 착취를 당하는 이들 사이에서도인구수에 맞게 포진하는 체제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반인종주의자에게는 그다지 위안거리가 못 되는데, 이 상황에서유색인 중 대다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생활 조건이 계속 악화할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비인종적 자본주의는 급증하는불평등 안에서 격차를 조절함으로써 기껏해야 (인종적 증오가 치솟는 상황에서) 제살 깎아먹기의 기회균등을 실현할 뿐이다. - P110

여기에서 내가 전개한 분석은 그보다 급진적인 변혁이 긴급하게 필요함을 보여준다.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인종주의는 제 살 깎아먹기의 기회균등으로는 격퇴되지 못한다. 또 통상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같은 법률 개정을통해서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흑인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실례되는 이야기이지만, 기업 유치정책이나 지역사회통제 혹은자결권도 해결책이 아니다. 또한 전통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착취에 집중한다고 하여 인종화된 대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것도 아니며, 어떤 피부색의 노동 대중도 그렇게는 해방되지 못한다. 오히려 앞서 말한 것처럼, 착취와 체계적인 연계를 맺고 있는 수탈까지도 공격 목표로 삼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강고한 수탈-착취 결합체를 극복하는 일이며, 그 기반 전체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탈-착취 공생을 유발하는 더 큰 시스템을 철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수탈과 착취 모두를 근절하는 것이다. - P111

피착취자가 피수탈자이기도 하고 피수탈자가 피착취자이기도 한 오늘날에는 마침내 둘 사이의 동맹을 구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착취와 수탈의 경계선을 희석시킴으로써 이 둘 모두를 폐지할 물적 토대를 창출하고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역사적 ‘가능성‘을 현실적인 역사적 ‘힘‘ (해방으로 나아가는)으로전환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 P112

이 목적을 달성하기란 어쨌든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몇몇 구조적 측면을 고려해보면, 이는 더욱복잡해진다. 제1장에서 본 것처럼, 인종화된 수탈은 자본주의사회의 뿌리 깊은 지배 형태 중 유일한 예가 아니다. 우리가 찾아낸 다른 감춰진 장소들에, 또 다른 불의들(정치적·생태적·사회재생산적)이 존재하며, 인종화된 수탈은 이들과 깊이 얽혀 있다.
인종주의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그러한 불의들 또한 이해해야한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 장에서, 생산과 재생산의 구조적 분리에서 비롯된 젠더화된 형태의 제살 깎아먹기로 눈길을 옮기고자 한다. - P112

자본은 인종화된 인구집단의 부를 먹잇감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돌봄‘을 폭식하기도 한다. 자본의 식인성이 지닌 이 측면은오늘날 광범한 사회적 탈진과 시간 빈곤을 통해 표출되는데, 이것들은 사회 현실에 구조적 토대를 둔 경험들이다. 실제로 우리의 사회 시스템은 흔히 돌봄 활동이라 일컫는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다. 이를테면 가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가계를 유지하며, 공동체를 떠받치고 우애를 꽃피우며, 정치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연대를 다지는 일 등이다. 이런 활동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일상에서든 세대 간에든, 인간 존재를 보충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유대를 유지시킨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통해 노동력의 공급이 보장된다. 자본이잉여가치를 빨아들이는 대상인, 상품화된 노동력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회적 재생산‘이라 부르는 이런 활동이 없다면 생산도 이윤도 자본도 없으며, 따라서 경제도 문화도 정치도 있을 수 없다. - P115

실로 어떤 사회도(자본주의 사회는 아니든) 사회적 재생산을 놓고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인다면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가 벌이고 있는 짓은 남을돌보는 활동에 쏟아부어야 할 정서적·물질적 자원을 별 필요도없는 활동에 전용하는 것이다. 물론 대기업에게는 돈 보따리를안겨주겠지만 말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에 심각한 위기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돌봄만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 위기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이것이 더 거대한 현상, 즉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의 광란이 발현되는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공적 권력과 정치적 역량을 놓고도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며, 자연과 인종화된 대중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 결과는 우리 사회 질서 전체의 전반적 위기다. 그리고 이 위기의 여러 지류支流들이 상호 교차하며 서로를 더욱 악화시킨다. - P116

나는 현재의 ‘돌봄 긴장‘을 자본주의에 내재한 사회 - 재생산모순의 첨예한 표현으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두 가지 발상을 담고 있다. 첫째, 현재의 돌봄 긴장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앞에서 내가 ‘금융화된 자본주의‘라 칭한 현 사회 질서에 구조적으로 깊이 뿌리내린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현재 형태만이 아니라자본주의 자체에서 뭔가가 썩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현재의 신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변혁되어야만한다. - P117

그 이유를 살펴보려면,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해야 한다. 대다수 분석은 자본주의 시스템의경제에 내재한 모순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의핵심에는 ‘자기 불안정화‘의 내적 경향이 있으며, 이는 주기적인경제 위기, 즉 주식시장 폭락, 경기 순환, 대공황 등으로 표출된다. 이 관점은 그 자체로는 옳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사회 시스템의 결정적 측면, 즉 경제를 넘어선(혹은 경제 이면의) 영역의 부를 놓고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려는 자본의 충동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는 앞에서 제시한 확장된 자본주의관을 받아들이게 되면 곧바로 교정된다. 이 관점은 공식 경제만이 아니라 비-경제적 배경조건들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사회적 재생산을 포함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넓게 개념화하고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 P118

자본주의 경제는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필수재공급이나 돌봄 제공, 상호작용 등의 활동에 화폐화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마치 무상인 듯 취급하면서도 이에 의존한다. 아니,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무임승차한다. ‘돌봄‘, ‘감정노동‘, ‘주체화‘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이 활동은 자본주의의 인간 주체를 형성하고, 이들을 신체화된 자연적 존재로 유지시킴과 동시에 사회적 존재로 구성하여 이들의 아비투스와 문화적 에토스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는 새 세대를 낳고 사회화하는 일뿐만 아니라, 노인을 돌보고 가계를 유지하며 공동체를 구축해 사회적 협력을 뒷받침하는 공동의 의미·정서·가치 지평을 지탱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 P119

이렇게 광범하게 이해될 경우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모든 사회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또 다른, 좀 더특수한 기능을 수행한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착취할 노동력 보유 계급을 생산하고 보충하는 일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아이러니하게도 돌봄 활동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생산적‘이라 부르는 노동을 생산하지만, 그 자체는 ‘비생산적‘이라 간주된다. 물론 돌봄 활동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수가 공식 경제의 가치-축적 회로 바깥에 자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가정, 마을, 시민사회 기구, 공공기관 등이다. 그리고 돈을 받고 수행하는 경우에조차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생산적‘인 돌봄 활동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돌봄 활동이 이뤄지는 장소가 어디인지, 보상으로 돈 - P119

을 받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 - 재생산 활동은 자본주의의작동에 필수적이다. 생산적이라 간주되는 임금노동도, 이로부터추출되는 잉여가치도, 돌봄 활동이 없다면 있을 수 없다. 자본이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양과 질을 갖춘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사와 육아, 학교 교육, 정서적 돌봄, 그리고 일군의 관련 활동들 덕분이다. 즉, 사회적 재생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생산의 필수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늦어도 산업화 이후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재생산 활동이 경제적 생산 활동과 분리됐다. 자본주의 사회는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여성과, 경제적 생산 활동은 남성과 결부시킴으로써 특정한 정서적 분위기가 재생산 활동을 에워싸도록 만들었다.  - P120

그 정서란,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그만의 독특한 보상만 있으면 된다거나,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쥐꼬리만한 보수만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본을 위해 일하면서(이론상으로는) 노동자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임금을 받는 활동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 종속의 새로운 근대적형태를 위한 제도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거 인간 활동의 더 큰우주에서는 여성의 일이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자본주의는 여기에서 재생산 노동을 따로 떼어낸 뒤 이를 새롭게 제도화된 가정 공간과 결부시켰다. 이제 이 공간은 사회적 중요성이 탈 - P120

색된 채, ‘여성다움‘이라는 새로 발명된 관념의 안개에 가려지게되었다. 그리고 화폐가 권력의 1차적 매체가 된 새 세상에서는,
돈을 받지 못한다거나 적은 돈만 받는다는 점이 중요한 진실을은폐하는 역할을 했다. 즉 재생산 활동 덕분에 임금노동이 이뤄질 수 있는 것임에도, 이런 필수적인 재생산 활동을 수행하는 이들이 생계임금을 벌어오는 이들(공식 경제에서 잉여가치를 낳는 노동을 하는)에게 구조적으로 종속된다는 진실 말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재생산과 경제적 생산을 분리하여, 전자를 여성과 결부시키고 그 중요성과가치가 눈에 잘 띄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그 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의존해 공식 경제를만들어낸다.  - P121

이러한 분할division + 의존dependency + 책임 회피disavowal의 별난 관계야말로 불안정화destabilization를 야기하는 비법이다. 실제로 D로 시작하는 이 네 단어는 모순을 압축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생산이 사회적 재생산에 크게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축적하려는 자본주의의 충동이 바로 그 재생산 과정과 역량을 불안정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 장기적 결과는 자본주의 경제에 필수 불가결한 사회적 조건들에 닥치는 주기적 위험이다.
요컨대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적 구조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적 모순‘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한 경제적 모 - P121

순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적 모순 역시 위기 경향의 토대 구실을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 ‘내부‘가 아니라생산과 재생산을 분리하는(그러면서 연결하는 ‘경계‘에 위치한다.
이 모순은 경제-내부도 가정-내부도 아닌, 두 영역에 각기 존재하는 규범적 문법 및 행동 논리 사이에서 충돌을 야기한다. 물론이 모순은 잘 감지되지 않을 때가 잦으며, 이와 결부된 위기 경향 역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축적을 확대하려는 자본의충동이 사회적 토대에서 벗어나 이와 충돌하기 시작할 때 모순은 첨예해진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경제적 생산의 논리가 사회적 재생산의 논리를 압도함으로써 자본이 의존하는 바로 그 과정이 불안정에 빠지며, 장기간 축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역량이 가정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손상을 입는다. 자본 축적이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그 조건을 파괴하면서 자본 축적역학은 마치 우로보로스를 흉내 내듯 자기 꼬리를 먹는다. - P122

주변부의 사회성sociality에 대한 대규모 공격은 19세기의 이른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계속됐으며, 이 시기에유럽 국가들은 식민 통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식민 본국에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초기 제조업 중심지에서 공장주들은 여성과 아동의 노동이 저렴하고 다루기 쉽다는 평판에 군침을 삼키며 이들을 공장과 광산에 강제로 몰아넣었다. 쥐꼬리만 한 임금에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장시간 일하면서, 아동과 여성 노동자는 자본의 생산성을 떠받쳐주는 사회관계와 역량[사회적 재생산 관련]에 대한 자본의 무시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두 지상명령은 서로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모습을 보였다. - P125

주변부에서는 이와는 다른 역학이 펼쳐졌다. 자원 추출 식민주의가 피정복민을 황폐하게 만든 그곳에서는 영역 분리도, 사회적 보호도 통하지 않았다. 토착적인 사회적 재생산 관계를 보호하기는커녕 식민 지배국은 이를 파괴하도록 적극 장려했다.
값싼 식량, 직물, 광물, 에너지를 공급하느라 농민은 노략질당했고 농민 공동체는 망가졌는데, 이런 전리품이 없었다면 식민 본국의 산업 노동자를 착취하더라도 이윤이 시원치 않았을 것이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여성 노예의 재생산 능력이 폭력적으로 점유돼 농장주의 이윤 계산에 맞춰 이용됐고, 노예 가족은 각기 다른 소유주에게, 게다가 많은 경우 아주 먼 곳의 소유주에게 팔려나가면서 갈가리 찢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선주민자녀 역시 공동체에서 유리됐고, 선교사 학교에 징용됐으며, 백인에게 동화되라는 강압적 훈육에 맡겨졌다. - P129

시민으로서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존엄성·권리·존경받을만한 자격뿐만 아니라 안전과 물질적 안녕이필요했는데, 이 모두는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있다고 인식됐다. 즉 노동계급은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경제적 생산에 맞서 사회적 재생산의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실상 공장·시스템·기계에 맞서, 가족·조국·생활세계에 투표한 것이었다. 이전 체제의 보호입법과 달리 국가관리 자본주의의 해결책은 계급 타협에서 나왔으며, 민주주의의 전진을 대변했다. 또한 이전의 제도배열과 달리 새로운 제도배열은 적어도 일부에게는(그리고 한동안은) 사회적 재생산을 안정시켰다.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다수 인종에 속한 노동자들은 이 새로운 제도배열 덕분에 가정생활을 짓누르는 물질적 압박이 경감됐고, 정치적 통합이 촉진됐다. - P134

두 모델 모두 가족임금을 승인했고,
당연시했으며, 장려했다. 또한 가족과 일에 관한 남성 중심 인식을 제도화함으로써 이성애 규범성, 젠더 이분법, 젠더 위계제를자연 법칙인 양 설파했고, 이와 결부된 불평등을 대부분의 정치적 쟁투의 의제에서 지워버렸다.
이 모든 측면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사회보호와 시장화의 동맹에 ‘해방‘을 희생시켰다. 심지어는 수십 년간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을 완화하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1960년대에 전 지구적으로 신좌파가 들고 일어나 제국주의적 · 젠더적·인종적 배제뿐만 아니라 그 관료적 가부장주의에 해방의 이름으로 맞서자 정치적으로 격동했다. 다음으로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 ‘생산성 위기‘, 제조업 이윤율 하락이 시상화에 채워진 족쇄를 풀려는 신자유주의의 시도를 북돋자 경제적으로 요동쳤다. ‘해방‘과
‘시장화‘라는 두 항이 손을 잡은 상황에서 희생된 것은 ‘사회보호‘의 항이었다. - P137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추진한 이 체제는 국가와 대기업이 사회복지 투자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여성을 유급 노동력으로 대거 충원하고, 결국 돌봄 활동을 가족과 공동체에 떠넘겨 외부화하면서 가족과 공동체의 역량을 위축시키도록 조장했다.
그 결과 새롭게 이원화된 사회적 재생산의 조직화가 나타났다. 지불 능력이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사회적 재생산을 상품화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이를 사유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두 번째 범주에 속한 이들은 첫 번째 범주에 속한 이들에게 돌봄 활동을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저임금을 받는다.
한편 페미니즘적 비판을 몇 방 맞은 데다 탈산업화가 덮친 결과로 가족임금은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 사회-민주적 이상은 오늘날 ‘맞벌이 가족‘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자리를 내주었다. - P138

반면에 재생산은 후진적인 잔여 영역이자,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어떻게든 치워야 할 진보의 장애물로 나타난다.
페미니즘의 아우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 해방 이데올로기는 새롭게 강도를 더해가는 자본주의 내사회적 모순의 현재 형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공적 지원을 축소하고 여성을 유급 일자리로 충원할 뿐만 아니라 실질임금을 낮췄고, 이로써 가족을 지탱하려면 각 가정마다 유급 노동에 보내는 시간을 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돌봄 활동을 타인에게 맡기려는 필사적인 쟁탈전을 부채질했다.  - P142

이 돌봄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현 체제는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이주노동자를 수입했다. 과거에는 좀 더 특권을 지닌 여성이 수행하던 재생산·돌봄노동을 떠맡게 된 것은 대개 인종화되고 많은 경우 농촌 출신인 여성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이주민이 자신의 가족·공동체 책무를 다른 이에게, 더 가난한 돌봄 제공자에게 떠넘겨야 하며, 그러면 이 돌봄 제공자 역시같은 선택을 해야 하고,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유례없는전 지구적 ‘돌봄 사슬‘이 등장하게 된다. 돌봄 간극을 해소하기는커녕 최종 결과는 부유한 가족에서 가난한 가족으로,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 간극을 치환하는 것이다. - P142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경계투쟁은 경제적 생산을 둘러싼(협소하게 정의된 계급투쟁만큼이나 현 정세에서 중심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투쟁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구조적 역학에 뿌리를 둔 ‘돌봄 위기‘에 대처한다. 지구화를 추구하며 부채를 원동력으로 삼는 이 자본주의는 사회적 연결을 지속시키는 데 쓰일 수있는 역량을 둘러싸고 체계적으로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인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맞벌이 가족‘이라는 새로운 이상을 선포함으로써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 운동은 시장화의 지지자들과 합작하면서, 최근 점점 더원한에 사무쳐 국수주의적 성격마저 보이는 사회보호의 지지자들에 맞서고 있다. - P145

기후정치가 무대의 중심에 등장했다. 기후위기 부정론이 소수나마 잔존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색깔의 정치적 주체들이 녹색으로 전향하고 있다. 새 세대의 젊은 운동가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치명적 위협이 우리를 덮치고 있다고 외치는 중이다. 이 투사들은 나이 든 세대가 젊은이들의 미래를 도둑질했다고 책망하며,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리와 책임을부르짖는다. 동시에 탈성장을 주장하는 운동도 힘을 얻고 있다.
소비주의 라이프 스타일이 우리를 나락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확신하는 성장론자들은 생활양식의 변혁을 촉구한다. 또한 북반구와 남반구의 토착민 공동체가 벌이던 투쟁은 최근에 들어서야 생태적이라 인식되기 시작하며 새삼 지지를 늘려가고 있다. - P151

한마디로, 도처에 생태정치가 등장했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환경운동만의 고립된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며, 이제는 모든 정치적 주체가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긴급한 사안인 것만 같다. 경쟁하는 숱한 의제들에 포함된 이 주제는 이와 한 쌍을 이루는 대의가 무엇인지에 따라 다양하게 굴절된다. 그 결과는 표면적인합의 이면의 떠들썩한 의견 불일치다. 한편에서는 점점 더 많은사람들이 지구 온난화를 지구 위 뭇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이러한 각성 과정을 추동하는 사회 세력들의 공통 시각을 공유하지는 않으며, 지구 온난화를 중단시키기 위해 필요한 사회 변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의견이 같지만, 정치의 측면에서는(상당한 정도로) 다른 것이다. - P154

실은 ‘의견 일치‘와 ‘불일치‘ 같은 말은 상황을 제대로 포착하기에는 너무 무덤덤한 말이다. 우리 시대의 생태정치는 획기적[시대를 가르는] 위기 안에서, 이 위기의 표식이 선명히 찍힌 채펼쳐진다. 이는 물론 생태 위기이지만, 경제·사회·정치·공중보건의 위기이기도 하다. 즉, 기존 세계관과 지배 엘리트에 대한 신뢰를 뒤흔드는 전반적 위기로서 그 효과가 모든 곳으로 전이되는위기다. 그 결과는 헤게모니의 위기이며, 공적 공간의 야만화다.
정치적 공간은 더 이상 지배적인 상식에 의해 길들여지지 못하며, 이제는 더 나은 정책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프로젝트와 - P154

생활양식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공간이 되었다. 이런 심란한분위기는 코비드-19 돌발 이전에도 증대하고 있었지만 팬데믹을 통해 급격히 강화됐으며, 이런 분위기를 무대 삼아 전개될 수밖에 없는 생태정치 안에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기후 의견 불일치가 실로 우려되는 현상인 이유는, 지구의 운명을 알 수 없게됐기 때문만도 아니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정치의 기후 역시 격변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를 지키려면 대항헤게모니를 구축해야한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시끄러운 의견 불일치를, 광범하게 공감하는 변혁 프로젝트로 나아갈 수 있는 생태정치적 상식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P155

물론 이러한 생태정치적 상식이라면서로 충돌하는 관점들의 얽힌 타래를 단번에 끊어내고,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사회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식별해야만 한다. 즉 기후과학의 권위 있는 발견을, 기후변화를 추동한 사회역사적 힘에 관한 권위 있는 설명과 연결해야만한다.
하지만 진정한 대항헤게모니가 되려면, 이 새로운 생태정치적 상식은 ‘단지 환경적이기만 한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전반적위기를 빠짐없이 다룸으로써 생태적 진단을 다른 중대한 관심사들과 연결해야 한다. 이를테면 생계 불안정과 노동권의 부정,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투자 철수와 돌봄 활동에 대한 오래된 저 - P155

평가, 종족적-인종적-제국주의적 억압과젠더·성지배, 이주민의 박탈·추방·배제, 정치적 권위주의, 정치적 야만성 등과 연결해야 한다. 이런 관심사들은 분명히 기후변화와 얽혀 있으며, 이를 통해 악화된다.
또한 새로운 생태정치적 상식은 환원론적인 ‘생태지상주의ecologism‘를 피해야 한다. 지구 온난화를 전가의 보도처럼 다루기보다는 현 위기의 다른 지류들까지 추동하는 근원적 사회 역학에 대한 위협을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적‘이든 ‘비환경적‘이든 이 위기의 모든 주요 측면을 다뤄야만, 그리고 환경적 측면과 비환경적 측면 사이의 연계를 드러내야만, 우리는 공동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정치적무게를 지닌 대항헤게모니 블록을 기획할 수 있다. - P156

첫째로, 구조적 수준에서는 자본주의에 관한 정확한 이해를전제로, 자본주의가 심층적인 생태적 모순의 터전이며 이 모순이 환경 위기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이 모순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고질병들인 다른 여러 모순과도 얽혀 있으므로, 그 모순들을 생략해서는 제대로 다뤄질 수 없다.
다음으로, 역사적 목록으로 시야를 옮겨, 현재에 이르기까지(그리고 현재까지 포함하여) 자본주의 시스템 발전의 다양한 국면에서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이 취한 특수한 형태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환경만을 쟁점으로 삼는 생태지상주의와 달리, 생태-위기와 생태-투쟁이 또 다른 지류의 위기·투쟁들과 끈질기게 얽혀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들이 완전히 분리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드러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수준으로 관심을 이동하여, 오늘날 생태 - P157

정치는 총체적인 반-시스템 성격을 갖춰야 하며 이를 통해 ‘단지 환경적이기만 한 수준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구 온난화가 전반적 위기의 다른 긴급한 측면들과 뒤엉켜 있음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녹색운동이 환경을 넘어 반자본주의에중심을 둔 더 광범한 대항헤게모니 블록에 참여해야 하며, 그래야 일단 원리상으로 지구를 구해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 P158

자칭 탈자본주의 사회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소비에트연방 같은 ‘현실사회주의‘는 지속 불가능한 농업·공업 군대를 운영했고, 화학 비료로 토지를 오염시켰으며, 이산화탄소를대기에 내뿜었다. 물론 과거의 전자본주의 사회들과 달리 현실사회주의의 행위들은 전혀 ‘자연 친화적‘이지 않은 세계관에 맞춰져 있었고, 그 행동에 형태를 부여한 것은 ‘생산력 발전‘을 누리자는 이데올로기적 약속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이런세계관도, 이데올로기적 약속도 사회주의에 내재하는 역학에서비롯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뿌리는 이 사회주의 국가들이 싹을 틔운 지정학적 토양에 있었다. 그 토양이란, 자본주의 사회와 벌이는 경쟁, 이러한 환경이 북돋은 ‘추격‘ 중심 추출주의 사고방식, 이 경우 주된 선호 방식인 화석 연료 기반의 중화학공업 중심 산업화 모델 등에 의해 구조가 형성된 세계체제 였다. - P160

제3장에서 주장한 것처럼, 임금노동을 수행할 인간 존재를형성하고 지속시키는 사회적 재생산을 비임금 노동을 통해 실행하지 않는다면 상품 생산은 꿈도 꿀 수 없다. 또한 제5장에서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생산은 사적 소유와 계약을 통한 교환을떠받치는 법질서, 억압 기구, 공공재가 없어도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장에서 상술할 내용처럼, 원자재와 에너지원 등의 핵심 투입물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 과정 없이는 이윤도 자본도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에 꼭 필요한 조건인 이러한 ‘비-경제적‘ 심급들은 자본주의에 외재적인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필수 불가결한요소다. 이들을 삭제한 자본주의관은 이데올로기적이다. 자본주의를 경제와 동등하게 취급한다면,이 시스템의 경제주의적 자기 인식을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 이를 비판적으로 따져 물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므로 비판적 시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더욱 폭넓게 이해해야만 한다. - P162

이런 인식의 수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와 그 ‘타자‘ 사이에 수립된 관계(이것이 핵심적인 요소다)를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며, 여기에는 ‘자연‘이라 알려진 핵심적 타자도포함된다. 이 관계는 그 중심에서부터 모순적이며, 위기로 기우는 성향이 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제는 자연에 구성적으로 의존한다. 생산적 투입물을 뽑아낼 수도꼭지로서든, 폐기물을 처분할 하수구로서든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는 두 ‘관할영역‘의 선명한 분할을 만들어낸다. 즉 가치를 발생시키는 창조적 인간 행동의 장으로서 경제를 구축하는 반면에, 스스로를 무한히 보충하며 상품 생산 과정에 쉽게 투입될 수 있는 사물(가치가 없는)의 영역으로서 자연을 구축한다. - P163

이 존재론적인 깊은 골은 자본이 그 둘의 혼합물에 다가갈 경우에는 미친 듯이 타오르는 지옥이 된다. ‘자기 확장하도록 조작된 화폐화된 추상인 자본은 끝없는 축적을 명한다. 그 결과 이윤극대화에 골몰하는 소유주가 ‘자연의 선물‘을 최대한 싸게 징발하는 게 칭찬받을 일이 되고, 그러면서도 사용한 만큼 보충하거나 해를 끼친 만큼 수선할 의무는 모조리 면제받게 된다. 피해는이윤의 동전 반대 면이다. 생태적 재생산 비용을 할인받은 덕에자본주의 생산과 유통에 투입되는 모든 주요 요소는 값이 엄청 - P163

깎인다. 원자재나 에너지, 교통만이 아니라, 노동도 값이 형편없게 매겨진다. 자본이 자연에서 식량을 헐값에 뽑아내면 생활비와 더불어 임금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자본가는 절감액을 이윤의 형태로 전유하며, 그 부산물과 함께 살아가야 할(또한 그 때문에 죽어가야 할 이들에게 환경 비용을 전가한다. 여기에는 미래 인간 세대도 포함된다.
즉, 자본은 노동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관계를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식인적이고 추출적인 관계다. 더 많은
‘가치‘를 쌓아올리기 위해 더 많은 생물물리학적‘ 부를 먹어 치우면서도 생태적 ‘외부성externalities에 대한 책임은 부정한다는점에서 그렇다. 이와 동시에 필연적으로 쌓아올리는 게 하나 더 - P164

있으니, 그것은 더욱더 산처럼 솟아오르기만 하는 생태-피해다.
인간이 배출한 탄소로 뒤덮인 대기, 기온 급상승, 사라지는 극지방 빙상, 플라스틱 섬이 곳곳을 뒤덮은 바다, 대량 멸종, 종 다양성 감소, 기후변화로 인한 생물체와 병원균의 이동, 치명적 바이러스의 인간-야생동물간 전파 증가, 초강력 폭풍, 심각한 가뭄,
거대 메뚜기 떼, 초대형 산불, 초대형 홍수, 데드존dead zones, 유독물질로 오염된 땅, 호흡 불가능한 공기 등등이 그러한 생태-피해다. 스스로를 무한히 보충할 수는 없는 자연에 체계적으로무임승차할 태세를 갖춘 자본주의 경제는 자신을 가능케 하는바로 그 생태적 조건을 늘 불안정에 빠뜨리려 한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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