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를 쌓고 있는 동안, 매끈한 절굿공이를 꼭 움켜쥐고 아래로내리찧는 내 손가락 근육과 내 몸의 녹진한 핵심 사이에 근원적 관계가생겨난 듯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발산되는 새로이 무르익은 충만감이나의 핵심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드러난 클리토리스처럼 팽팽하고민감한 이 보이지 않는 실은 구부린 손가락 끝에서 토실토실한 갈색 팔을 따라 축축한 겨드랑이까지 이어졌고, 겨드랑이에서 풍기는 뜨뜻하고 날카로운 체취는 절구 속 마늘 냄새, 그리고 한여름 특유의 가득한땀 냄새와 뒤섞여 향기를 한 겹 덧입혔다. 보이지 않는 실은 아릿하게 노래하며 갈비뼈 위를, 등줄기를 타고내려가 내 골반 사이 위치한 옴폭한 곳, 지금 내가 향신료를 빻는 동안낮은 조리대에 대고 꾹 누르고 있는 그 부위로 들어갔다. 이 옴폭한 곳에서 피로 이루어진 바다가 차올라 진짜가 되어 내게 힘과 지식을 전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 P135
내 움직임의 리듬은 갈수록 누그러지고 또 길게 늘어졌으며, 나는결국 꿈을 꾸는 기분으로 부조가 새겨진 절구를 한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채 내 몸 한가운데에 대고 절굿공이를 든 다른 손으로는 촉촉해진 향신료를 누르며 둥글게 둥글게 문지르고 있었다. 따뜻한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음조가 없는 콧노래를흥얼거리면서 이제 여성이 되었으니 앞으로의 내 삶이 얼마나 단순해질지 생각하며 안도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알려준 월경의 주의사항 따위는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온몸이 강하고, 꽉 차고, 열린느낌이었지만, 여전히 절굿공이의 부드러운 움직임, 그리고 부엌을 가득 채운 풍부한 향기, 초여름의 열기가 품은 충만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머니가 현관문에 열쇠를 꽂는 소리가 들렸다. - P136
하지만 우리는 흑인 또는 백인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 사실이 우리의 친구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논쟁의 여지없이 인종주의를 규탄했다. 우리는 인종주의를 무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차이를 위협이라고밖에는 느낄 수 없는 고립된 세계에서 자라났고, 대개는 실제로 그랬다. (헬렌 언니가 벌거벗고 목욕하는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열네 살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옅은 갈색 가슴에 달린 언니의 젖꼭지가 나처럼 짙은 보랏빛이 아닌 옅은 분홍색인 걸 보고 언니가 마녀인 줄 알았다.)그러나 때때로 나는 나와 나의 백인 친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만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칠것같았다. 왜 친구들은 나를 집에, 파티에, 주말 동안 여름 별장에 오라고 초대하지 않는 걸까? 우리 어머니처럼 그 애들의 어머니들 역시 친구를 데려오는걸 싫어해서? - P140
우리는 스스로가 유별나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사용하는 특이한 잉크와 깃펜을 자랑스러워하는 ‘낙인찍힌 자들‘이자 ‘과격한주변인들‘이었다. 고지식한 무리를 조롱하는 법을 배웠고, 우리가 가진집단적인 편집증을 퇴학당하지 않을 선에서 멈출 수 있는 본능적인 자기보호에 이르도록 계발시켰다. 모호한 시를 쓰고, 불복종의 전리품인우리의 괴상함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통과 거부가 상처를 준다는 걸 배웠지만, 그럼에도 그런 것들이 치명적이지는 않으며, 또피할 수 없기에 쓸모 있다는 걸 배웠다. 우리는 아픔이 무감각보다 낫다는 걸 배웠다. 그 시절엔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미덕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기에 ‘낙인찍힌 자들‘이 되었다. - P141
고등학교를 다니던 4년간 나는 근근이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빈약하기 짝이 없는지, 그러나 그런 생계가 나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마치 수용소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만한 것을 골라내면서 이 쓰레기 없이는 굶어 죽으리라는 걸 아는 내 모습이 담긴 오래된 사진을 보는 기분이다. 내가 짝사랑하던 이들을 포함해 선생님들은 대부분 극도의 인종차별을 일삼았다. 사람과의 접촉에 있어 나는 내가 의식하던 욕망에 비해 얼마나 미약한 정도로만족해야 했던가. 내가 백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 내가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라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 P141
나는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 전부 무척이나 단순하고 무척이나슬프다고 여겼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 때문에 두 분이 그렇게나 짜증을 낼 리가 없을 터였다. 두 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나는자기보전이 가능한 선 안에서 내가 최대한 그들을 역정 내게 만들어도마땅하다고 여겼다. 이따금 어머니가 내게 고함을 지르는 대신 두려움과 고통이 남긴 눈으로 나를 관찰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심장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느라 아프고 또 아팠다. - P146
그때부터 인생은 내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를 목표로 하는 게임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사물함 뒤에서 서로의 부드러운 몸을 만져보면서 ‘만지기 놀이‘ ‘느낌이 어때‘ ‘내가 더 세게 때릴 수 있어" 같은 온갖 이름을 붙인 온갖 게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니가 물었다. "네가 아는 친구 사귀는 방법은 이런 것뿐이야?" 그때부터 나는 친구를 사귀는 다른 방법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느끼고 질문은 그다음에 하는 방법을 배웠다. 처음에는외면을, 그다음에는 무법자라는 사실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 P148
우리는 한때 아이였던 것을 위해 울지 않았네. 한때 아이였던 것을 위해 울지 않았네. 한때의 것을 위해 어리디어린 살을 뜯어 먹은 깊고 검은 어둠을 위해 울지 않았네. 그러나 우리는하늘아래 외따로이 서서 어린 피를 잠재우려 담요처럼 흙을 퍼내며 서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고 울었네. 검고 따스한 어머니의 담요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대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더는 어리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보았으므로 그리고 처음으로 우리가 외따로이 죽어 있음을 알았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울지 않았네 - 울지 않았네 우리는 한때 아이였던 것을 위해 울지 않았네.
1949년 5월 22일 - P166
"차를 한잔 타주마, 얘야, 그렇다고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거라. 어머니가 돌아서더니 차 거름망 테두리를 몇 번이나 문질러 닦았다. "얘, 우리 아가야. 그 애랑 친했던 것도, 그래서 속상한 것도 알지만, 여태 내가 늘 너한테 잔소리하지 않았니?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조심해야한다. 너희들은 항상 특이한 짓을 하면서 어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생각하지. 그러나 이 늙은 엄마도 알건 다 안다. 세상엔 처음부터 잘못된 것들이 있어. 내 말 똑똑히 듣거라. 아버지 행세를 하는 그 남자는 네친구를 입에 담지도 못할 그런 일에 이용하고 있었단 말이다." 어머니의 어설픈 통찰은 잔인했기에,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는 또 한 번의 살인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혹독한 말이 내게 강인함을 전해줄 수 있기라도 하다는 걸까. 어머니한테는 진실로 보이는 그 불꽃 속에서 내가 제련되어 종국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당신을 꼭 닮은 복제물이 될 수 있기라도 하다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상관없지는 않았다. 캄캄해지는 창밖, 맞은편 집 와셔 씨가 자기 집 블라인드를 내렸다. 제니는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동전한닢 토끼의 머리. - P174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바닷가로 걸어갔다. 보름달 아래 밀물이들어오고 있었다. 잘게 이는 파도의 물마루는 하얗게 부서지는 대신 형광빛을 뿜어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는 아물아물 보이지 않았다. 비스듬한 녹색 불꽃들이 층층이 겹쳐지며 밤을 가득 메우더니, 물결에 실려 리드미컬하게 물가로 밀려오는 파리한 부채꼴의 빛 덕에 칠흑같던 어둠이 환해졌다. 무슨 수로도 그 흐름을 멈출 수 없었고, 다시 물러가게 할 수도 없었다. - P183
맨해튼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청명한 일요일 아침, 저렴하게 장을 보려고 작정하고 나온 뉴욕 사람들은 길거리에 내놓은 통을 뒤지며 값싸고 낡은 물건들을 열심히 찾았다. 오처드 스트리트 한구석에서 피클장수가 나무통에 다양한 크기와 온갖 색조의 녹색으로 된 즙 많은 잠수함들을 펼쳐놓았는데, 그 온갖 색조 하나하나는 피클의 여러 단계와 여러 맛을 담고 있었다. 둥둥 뜬 마늘이며 후추알과 딜 가지 아래에서 피클들이 한 떼의 양념한 물고기처럼 한 입 맛보라는 듯이 배를 뒤집고 반쯤 잠겨 떠다녔다. 멀지 않은 곳, 길가 줄무늬 차양 아래 펼쳐놓은 톱질 모탕 위에 납작하게 말린 살구들이 신비롭게 반투명한 짙은 오렌지 빛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옆, 반쯤 열린 기다란 사각형 나무상자 안 열어젖힌 유산지 아래로깨를 갈아 반죽한 사탕인 기다란할바가 보였다. 바닐라맛 상자, 부드러운 초콜릿 맛 상자,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누비이불처럼 섞어놓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블 맛도 있었다. - P225
크리스퍼스 애턱스. 무엇보다도 나는 나일론이 풍기는, 톡 쏘는 것같고 생명력도 인정머리도 없는 냄새가 싫었고, 그 냄새가 그 어떤 인간적이거나 연상작용도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점이 싫었다. 나일론이가진 거슬리는 성질은 그것을 신은 사람의 체취로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신었건, 날씨가 어떻건, 나일론 스타킹을 신은 사람은늘 내 코에는 사슬갑옷을 온몸에 두른 채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전사 같았다. 나일론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데를 배회하고 있었다. 크리스퍼스 애턱스, 보스턴? 진저는 알고 있었어. 나는 열렬한호기심과 풍부한 독서 덕분에 쓸모가 있건 없건 잡다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의식의 뒤편에 그런 잡다한정보들을 모아두었다가 적절한 기회가 오면 꺼내 썼다. 대화 중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 역할을 하는 데 익숙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걸 다 안다고 믿었던 건 아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많은 걸 알았을 뿐이다. - P228
진저는 잠시 나이를 계산해보더니 "너 같은 열여덟 살은 처음이야" 하고 스물다섯 살에 어울리는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어느 날은 진저가 나를 위해 바닷가재 집게발을 슬쩍해왔다. 찰리가 코라와 화해하려고 사 온 식재료였는데 사실을 알게 된 코라는 진저를 집에서 내쫓겠다고 을러댔다. 진저는 자기가 치르는 대가가 너무 커진다고 결론 내렸고, 뒷문 포치에서 나누는 길고 긴 굿나잇 키스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저는 먼저 다가오기로 했다. 11월 초, 가을이 끝나고 있었다. 나무들은 여전히 강렬한 빛깔이었지만 공기에는 벌써 겨울의 냉기가 감돌았다. 낮은 점점 짧아졌고 나는점점 불행해졌다. 일이 끝나면 오래지 않아 해가 졌다. 도서관에라도 가면 밀 리버 로드로 돌아올 무렵에는 이미 어두컴컴했다. 진저가 따뜻한마음으로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키스톤 일렉트로닉스에서 하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도 쉬워지지도 않았다. - P231
나는 그의 몸과 그의 욕망에 대한 나의 삶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날 밤 진저를 사랑하는 일은 집으로 돌아가 애초 내 것이었던, 어떻게 여태 모르고 살 수 있었는지 남몰래 생각에 잠기게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것과 같았다. 사랑을 나눌 때 진저는 웃을 때와 마찬가지로 솔직하고 수월하게몸을 움직였고 나는 그와 함께, 그와 몸을 맞댄 채, 그라는 따뜻한 갈색바닷속에서 움직였다. 손끝을 살며시 움직이면 그의 몸에서 기쁨의 소리와 깊은 안도감으로 인한 떨림이 쏟아져 나왔고, 그러면 나는 기쁨, 그리고 그를 조금 더 느끼고 싶다는 허기에 사로잡혔다. 그의 달콤한 몸이 내 입술에 닿아 내 입 안을 가득 채웠고, 내 두 손은 그의 몸 어디에닿더라도 안정감과 충족감을 느꼈다. 마치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이제 막 처음으로 그 몸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그의 몸을 불러내고 있는 것처럼. - P240
알람이 울릴 때까지 한두 시간이 더 남아 있었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머릿속으로 모든 조각을 하나로 맞춰보려고, 내가 상황을주도하고 있으니 겁낼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제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감미로운 여자와 나는 어떤 사이인 걸까? 밤의 진저는 낮에 알던 진저와는 사뭇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내 욕망이 빚어낸 아름답고 신화적인 피조물이 쾌활하고 현실적인 내 친구의 자리를 차지한 걸까? 예전에 진저가 손을 뻗어 촉촉하게 젖은 내 몸을 만지려 했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유도 모른 채 그 손길을 쳐냈었다. 그런데 나는 진저의 몸이 맞닿아 있는 내 몸의 핵심으로부터 흘러넘치는 힘에 이끌린채 움직이며 토해내던 기쁨의 비명과 솟구치던 경이를 아직까지도 원하고 있었다. 진저는 내 친구, 이 낯선 동네에서 하나뿐인 친구였고,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같이 잤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인이 된걸까? - P241
그러면서 나는 권력과 특권을느꼈고, 비록 그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역할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환상에 불과했을지언정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진저에게도 하나의 역할놀이였는데, 그는 두 여자 사이의 관계를 결코 장난스러운 것 이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관계를 추구하고 또 소중히 한다고 해도 진저로서는 도저히그 관계를 중요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동시에 진실하고도 더 깊은 어떤 차원에서, 진저와 나는 서로의 온기와 피로 이어진 확신을 필요로 하는 두 명의 젊은 흑인 여성으로서 만났고, 우리 몸에 담긴 열정을 나눌 수 있었으며, 아무리 우리가 그저 역할놀이를 하고 있다는 듯 행세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둘 다 자신이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부정하려 무진 애를 썼다.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우리 둘 다, 딱히 개의치 않는 척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 P244
크리스마스 전주, 공장에서 일하던 나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면서절삭실과 판독실을 가르는 벽돌 반벽에 머리를 부딪쳐 약한 뇌진탕을겪었다. 병원에 있을 때 진저가 언니가 보낸 전보를 가져다주었다. 아버지가 또다시 심한 뇌졸중을 일으켰다는 전보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나는 직접 퇴원 절차를 밟고 뉴욕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가족을 만나는 것은 1년 반만이었다. 그 뒤로 몇 주는 두통 속에서 희미했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들이 내주변에서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에는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병문안 때문에 뉴욕에서 지내며 출퇴근을했다. 가끔 진저가 퇴근 후에 나와 함께 병원에 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스탬퍼드의 밤거리에는 무겁고 선뜩한 안개가 드리웠다. 도로 위 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9시 30분 뉴욕행 기차를 타려고 3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역으로 갔다. 크리스퍼스 애턱스 센터까지는 진저가 함께 가주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연석에 걸려넘어질까봐 겁이 났다. 가로등은 먼 곳에 걸린 달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 P247
그 주에 나는 내가 이젠 이 집에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 건 사실이다. 어머니가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보았던 인간은 온 세상에 오로지 아버지 하나뿐이었는데 이제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이 배타성이 어머니에게 부여한 쓸쓸하기 그지없는 고독감이, 그리고 이에 맞서느라 때때로 눈을 감아버리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나와언니들을 볼 때면 그의 시선은 마치 우리가 유리라도 되는 듯 통과해버렸다. 나는 어머니의 고통, 맹목성, 힘을 보았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나와별개의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진기분이었다. 헬렌 언니는 자기보호를 위해 경박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거실에 있는 축음기로 최근에 산 레코드 한 장을 끝도 없이 틀었다. 이레 내내 낮이나 밤이나 같은 음악을 틀고 또 틀었다. - P248
판독실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첫 2주간 나는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매일같이 개수를 늘렸으며 보호덮개를 젖히지 않은 대가로 3달러의 보너스를 받았다. 이 상황을 재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밤 나는 진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일하는 속도 좀 늦춰. 사람들 사이에서 네가 로즈 눈에 들려고 안달이라는 말이 돌아." 나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나 로즈한테 아부하는 게 아니라 돈을벌려고 하는 거야. 그게 뭐가 문제야?" 보너스를 받는 생산량 기준이 아무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거 몰라? 네가 그렇게 많은 양을 처리하면 다른 애들이 무안해지잖아. - P251
게다가 네가 할 수 있다면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거고 부지불식간에생산량 기준이 또다시 높아질걸. 그러면 모든 사람이 제대로 못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저 사람들은 네가 돈을 벌게 놔두지 않을 거야. 책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서 그것도 몰라?" 진저가 몸을 숙여 내가 베개에기대놓고 읽던 책을 툭툭 쳤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어차피 키스톤 일렉트로닉스에서 버틸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곳을 떠나기 전에 돈을 좀 모아놔야 했다. 뉴욕으로 돌아가면 어디로 가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어디서 살지? 게다가 얼마나 오랫동안 구직생활을 해야 할까? 그리고 저멀리 지평선 위 어둑어둑한 별처럼 멕시코로 가겠다는 소망이 걸려 있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 P252
금요일, 로즈는 공장에서 인원을 감축한다며 나를 해고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는 내가 노동조합원이므로 2주 치 주급을 해고수당으로받게 될 테니 당장 그만두고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내가 바라던바였음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울었다. "해고당하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지." 진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닉코라는 가외소득을 잃게 된 걸 아쉬워했다. 진저는 내가 그리울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가 속으로 안도하리란 걸 알았다. 그가 몇 달 뒤털어놓은 대로 말이다. 나는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P254
멕시코로 가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이유는 모르겠다. 기억 속 나는 언제나 멕시코를 내가 갈 수 있는 곳 중 색채와 환상과 기쁨의 땅이햇빛과 음악과 노래로 가득한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또 초등학교 시민 수업과 지리 수업에서 내가 사는 곳과 멕시코가 바로 붙어 있다는 사실을 배웠으므로 흥미가 일었다. 그건 필요하다면 내가 걸어서도 갈 수있는 곳이라는 의미였으니까. 멕시코에서 그림을 그린다던 진의 남자친구 앨프가 조만간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뉴욕으로 돌아갔을 때 내 가장 큰 목표는 멕시코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거의 만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애도가 깃들 줄 알았던 곳에는 그저 무감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자리를 찾는 동안에는 진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웨스트사이드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결국 의료센터에서 사무직 일자리를 구한 뒤 진과앨프의 진보주의자 친구인 백인 여성 레아 헬드와 같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 P255
그해 여름, 내 마음은 생채기투성이였으나 멕시코라는 꿈이 의지할수 있는 횃불처럼 빛나고 있었기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일을 해서저축한 돈을 아버지 보험금에서 나눠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에 합치면 멕시코에 갈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고, 정치적 상황이 갈수록 암울해지고 공산주의 탄압이라는 히스테리가 심해질수록 내결심은 더욱더 단단해졌다. 나는 로젠버그 부부* 석방 위원회 일에 갈수록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스탬퍼드에서 돌아온 뒤 멕시코에 가기 전까지 뉴욕에서 보낸 몇 달은 단기 체류에 가깝게 느껴졌다. 레아 헬드와 나는 로어이스트사이드 7번가, 당시에는 이스트빌리지라고 알려진 지역에 있는 승강기는 없으나 환하고 해가 잘 드는 7층아파트에서 꽤 사이좋게 살았다. 레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누군가, 그것도 백인 여성과 한 공간을 나누는 법을 배우는 건 때때로 힘겨웠고 또 새로웠다. 특히 나와 레아는 따뜻하고 일상적인 유쾌함을 나눴을 뿐 깊은 정서적 유대감은 없었기에 더했다. - P256
나에게 로젠버그 부부를 위한 투쟁은 이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한투쟁이자 적대적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가 진보주의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과 맺는 연결감은 의료센터의 동료들과 맺는 것과 매한가지로 미약한 것이었다. 나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함께 어울려 피부색과 인종의 차이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탐구하고 대화하다가도, 어느 날 ‘당신은 현재 동성애 관계에 가담한상태이거나 한때 가담한 적이 있는가?‘라는 비난 섞인 질문을 받는 상상을 했다. 그들에게 동성애자라는 것은 ‘부르주아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의심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또한 이 때문에 ‘FBI에게 꼬리를 잡힐가능성도 큰 존재가 되었다. - P258
비와 나는 지난해 내가 질을 만나러 베닝턴대학교에 갔을 때 만난사이였다. 비 역시 친구를 만나러 왔었다. 만취한 채 보냈던 그 주말 우리는 여러 번 눈이 마주쳤는데 그중 한 번은 새벽 2시 학생식당에서였다. 모두가 잠든 밤에 대화를 나누던 우리 둘은 다른 친구들보다 몇 달더 일찍 태어난 데다가 둘 다 혼자 살고 있으므로 그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또 우리 둘 다한 기숙사에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사실을 놓고 짧지만 조심스러운, 지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 이후로 비는 애인과 헤어지고 다른 여자들과 함께 집을 빌려 필라델피아에살고 있었다. 내가 스탬퍼드에서 진저를 만나던 시기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동쪽을 향해 걸었다. 나는 묵묵히 에 로젠버그와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향해 추모하며 울었고, 비는 공감한다는 듯침묵했다. 차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한 해간 우리 둘 다 여자를사랑한다는 것에 있어 흥미 섞인 대화의 단계를 넘어선 것은 분명했다. - P259
그가 남긴 쪽지에는 어째서 이런 식으로 관계를 끝낸 것인지 묻고싶었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이유를 몰랐으니까. 꼭 괴물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자기보호, 또는 자기보호라고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고,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누구와도 이런 관계를 맺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죄책감은 쓸모 있는 감정이다. - P264
사흘간 복도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해 레아는 어리둥절해하는 한편, 평소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비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지만, 우리 관계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비에 대한 나의 감정을 되물을 겨를이 없도록 말을 잇던 와중에도 레아가 한 말은 옳은 말 같았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지나치게 의존하게 하면 안 돼. 그건 상대에게도 부당한 일이잖아.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못하면 상대는 너한테 실망하고 넌 괴로워지니까." 레아는 때로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현명한 말과 행동을 했다. 나는 그 대화를 잊지 않았고, 이후로 비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일주일 뒤 나는 멕시코로 떠났다. - P264
공원 곳곳 오솔길에 대리석으로 된 석상들이 포진해 있었고 점심때가 되면 길 건너 건물들에서 일하던 주간 근로자들이 이곳으로 와 점심시간을 맞아 파세오**를 즐겼다. 석상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은베이지색 돌로 만든 것으로, 벌거벗은 소녀가 몸을 움츠리고 무릎을 꿇은 채 고개 숙여 새벽을 맞는 형상이었다. 인근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소음이 점점 커지지만 아직은 빛이 희미한 가운데 알라메다 공원의 향기롭고 고요한 아침을 헤치고 걷노라면 꼭 그 무릎 꿇은 소녀의 석상이살아나 고개를 들어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큼지막한 꽃송이처럼 활짝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른 아침 아베니다(대로)의 흐름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공원에서 들이마신 빛과 아름다움이 내 안에서부터 빛을 발했고 골목 구석에서 화로의 숯에 불을 붙이던 여자도 내 얼굴의 환한 빛에 화답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 P269
멕시코시티에서 보낸 첫 몇 주간 걸을 때 발만 내려다보던 평생의습관이 깨지기 시작했다. 볼 것이 너무 많았고, 읽고 싶은 흥미롭고 천진한 얼굴들도 너무 많아서, 나는 길을 걸을 때 고개를 드는 연습을 했고 얼굴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에 기분이 좋았다. 어디를 가든 온갖 색조의 갈색 얼굴들이 내 얼굴과 마주쳤고, 거리에서 나와 같은 피부색을 - P269
수도 없이 보며 내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완전히 새롭고도 짜릿했다. 이전까지는 나 자신이 가시적 존재라 느낀 적도 없었으며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멕시코시티에서 아직 친구를 하나도 사귀지 못했지만 객실 청소부와 반은 영어, 반은 스페인어로 날씨나 옷차림, 비데에 대해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나는 꽤나 즐거웠다. 내가 아침마다 저녁에 옥수수껍질로싼 뜨거운 타말레 * 두 개와 파란 딱지 붙은 우유 한 병을 사는 세뇨라와도, 내가 조그만 방을 빌린 작은 2등급 호텔의 주간근무 직원과도 비슷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 P270
새로운 주민이 등장하면 모두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한편, 낯선 얼굴을 반기고 또 기대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북미의 또 다른 정치적 재난에 대한 기대감도 만발했다. 감미롭게 무르익은 부겐빌레아가 피워내는 불꽃 같은 관능 이면에, 흰색과 분홍색과 보라색의 작은 꽃잎들로이루어진 섬세한 자카란다 꽃비 이면에 도사린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숲속에서는 실제로 침묵하기가 더 쉽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바로 쿠에르나바카의 숨 막히게 아름다운 새벽빛과 빠르게 언덕을뒤덮는 땅거미 속에서였다. 어느 날 새벽, 디스트릭토 페데랄행 버스를타려고 언덕을 내려가 광장으로 향했다. 믿기지 않게 달콤하고 따뜻한공기 속, 온 사방에서 문득 새들이 날아올랐다.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예기치 못한 소리는 처음 들었다. 나는 새가 노래하는 소리의 파도 속에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詩에 담긴 가능성에 눈을 떴다. 여태 나는 꿈을 창조하기 위해 글을 썼지만, 느낌을 재창조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76
신문 속 대법원의 결정문은 마치 내게 특별히 전해진 개인적 약속이나 지지의 메시지 같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 광장에 모인 모두가 그이야기, 또 이 결정이 미국인의 삶에 일으킬지도 모르는 변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니그로라는 말을 색채의 이름이자 아름답다는 의미로 입에 담는 어두운 피부를 가진 이들,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 존재를 알아보는 이들이가득한 이 땅에 있는 내 작은 집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나에게,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내가 마침내 승인받을 수 있으리라는 반신반의하며 믿게 되는 약속처럼 다가왔다. 희망. 나는 이 결정이 내 삶의 속성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거라고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는 오히려 진보라고 느끼는 흐름 속에 나를 적극적으로 위치시키는 일이자, 내게 멕시코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자각의 핵심적 부분으로 느껴졌다. - P299
내 말은 단지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내가 시작한 일을 끝내고자 하는 새로운 다짐이었다. 나는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에? 내 몸이했던 맹세에? 아니면, 의자 등받이 너머로 보이는 둥그런 머리에서부터내게로 쏟아지는 저 부드러움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그 무엇에 매달리려고, 막막해지지 않으려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유도라는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유도라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지않았다. 유도라는 내 앞에서 솔직하게 행동했다. 유도라는 내게 떠나라고 했다. 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길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그를 처음 안던 그날 밤처럼, 나는 내가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라고, - P303
나는 젊고, 흑인이고,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게 어떤 기분이었는지기억한다. 대체로 내가 진실과 빛과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괜찮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순전히 지옥 같았다. 우리한테는 어머니도 자매도 영웅도 없었다. 우리는 아마존의 자매들처럼, 다호메 왕국에서 가장 외딴 전초기지의 기수들처럼, 뭐든지홀로 해내야 했다. 우리, 젊고 흑인이고 괜찮았고 동성애자였던 우리는점심시간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학교 친구나 회사 동료 하나 없이 첫 실연을 이겨내야 했다. 우리가 행복하고 비밀스러운 미소를 짓게 하는 그이유를, 실재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줄 반지가 없었듯, 우리의 실험실 보고서나 도서관 문서에 얼룩지는 눈물에는 어떠한 이름이나 이유가 주어지지도, 공유되지도 못했다. - P306
웨스트 빌리지의 거리나 로어이스트사이드 시장을 돌아다니는 우리가 매서운 시선이나 웃음의 대상이 될 때, 그게 우리가 흑인 여자와백인 여자의 조합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동성애자이기 때문인지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면 나는 적당히 뮤리얼의 생각에 동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펠리시아와 내가 남들은 할 수 없는 싸움, 남들은 가질 수 없는 힘을 나누는 사이란 걸 알았다. 우리는 남몰래 그사실을 받아들였기에, 우리는 백인 친구들은 들어올 수 없는 세계에 동떨어진 존재들이었다. 이곳은 심지어 내가 아무리 뮤리얼을 들여놓고싶다 해도 그조차도 들어올 수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심지어 연인마저도 자신들이 접근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무시하고, 묵살하고,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면서 우리 사이에 아무 차이도 없다는 착각에 빠졌다. - P353
그러나 차이란 실제로 존재했고 또 중요했다. 아무도, 심지어 자신이 수영모자 없이는 수영하지 않는 이유가, 비 맞는 걸 싫어하는 이유가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진력이 난 플리 자신조차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뮤리얼과 나 사이에는 나를 영영 그에게서 동떨어진 사람으로 만드는 사실이 존재했으나, 내가 고통을 홀로 간직하기로 하는 이상 그 사실은 나만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흑인이고 그는 아니었으며, 우리 사이에는 좋고 나쁨은 물론 바깥세상의 광기와도 무관한 차이가 - P353
존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 차이가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리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이 차이를 우리 둘의 관계와는 별개로 마주해야 하리라는 것을알게 됐다. 그것이 사랑과는 별개로 우리 사이에 처음으로 생겨난 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차이가 가리키는 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사이가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 차이에 담긴 의미로부터 재빨리눈을 돌렸다. 나는 우리 둘의 인종적 차이를 너무 자주 생각하지 않으려애썼다. 애초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레즈비언은 모두 흑인, 특히흑인 여성과 똑같이 억압받고 있다는 뮤리얼의 생각에 동의하는 척할때도 있었다. - P354
우리 모임을 이루는 여자들은 다들 우리 모두 옳은 편에 서 있다는사실을 당연히 여겼으며 누군가 물어보았다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편들고 있다고 여기는 그 옳음의 속성은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이 작은 모임을 이루는, 독립적인 동시에 상호의존적인 레즈비언들은 서로가 삶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자세히 살펴보기를 암묵적으로 꺼렸다. 우리는 이 차이가 영영 해소될 수 없는 것임이드러날까봐 지나치게 겁을 냈다. 단 한 번도 그런 문제를 대하는 방법을배운 적 없었으니까. 우리는 각각의 개인을 무척 소중하게 여겼으나 모임도, 고독이 가진 보다 사회적 측면을 나눌 수 있는 다른 아웃사이더들도 마찬가지로 소중했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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