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으로서 수탈: 경제적 논의


‘수탈‘이 자본주의에 구조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정의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앞 장에서 본 대로, 수탈은 다른 수단을 통한 축적이다. 즉, 착취와는 다른 방식을 통한 축적이다. 자본이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계약 관계 대신, 수탈은인간 역량과 자연 자원을 징발하여 자본 확장 회로에 징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징발은 신세계 노예제에서 그랬듯이 뻔뻔스럽고폭력적일 수도 있고, 우리 시대의 약탈적 대출과 담보물 압류에서 그렇듯이 상거래라는 베일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또 수탈당하는 주체는 자본주의 주변부의 농촌이나 토착민공동체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중심부의 종속 집단이나 하위 집단 구성원일 수도 있다. 한때 수탈을 당했더라도 운이 좋으면 착취받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빈민, 슬럼거주자, 물납 소작인sharecropper˝, ‘원주민, 노예, 임금 계약 바깥에서 계속 수탈당하는 주체로 끝날 수도 있다. 징발된 자산은노동, 토지, 가축, 도구, 광산이나 에너지 매장지일 수도 있지만, 또한 인간, 인간의 성적·생식적 역량, 자녀와 장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은 징발된 역량들이 자본의 핵심 특징인 가치 확장 과정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도둑질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강탈 같은 행위와는 달리, 내가 말하는 수탈은 징발과 징용을 통해 축적에흡수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탈은 다수의 죄악을 포함하며, 그중 대다수는인종적 억압과 강한 상관성이 있다. 그 관련성은 영토 정복, 합병, 노예화, 강제 노동, 아동 유괴, 조직적 강간처럼 자본주의 초기 역사(물론 지금도 계속되지만)와 광범하게 결합된 행위들에서는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대적인‘ 형태(이를테면인종적 억압과도 연관된 수감 노동, 초국적 성매매, 대기업의 땅뺏기, 약탈적 대출에 따른 압류 등)를 취하기도 하며, 현대 제국주의와 함께하기도 한다. p85, 86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1947~)

미국의 정치철학자, 사회이론가. 뉴욕 뉴스쿨의 철학·정치사회이론 담당 교수로 있다. 독일 비판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프레이저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계급과 젠더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펼쳤다.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신자유주의가 확고한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은 1990년대에 착수한 ‘정의‘론 작업이었다. 그는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는 존 롤스식 정의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197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여성운동, 흑인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이 제기하는 또 다른 정의관, 즉 문화적 정체성의 ‘인정‘을 중심에 둔 정의관을 적극수용해 이 둘의 공존과 상호작용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의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정의론은 악셀 호네트와 벌인 논쟁의 기록 《분배냐, 인정이냐?》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프레이저의 정치사회이론은 부단히 진화했다. 그는 정의의 또 다른 축으로서, 분배와 인정의 측면에서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적 ‘대표‘의 측면에서 만인의 동등한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삼차원적 정의론을 발전시켰다. 또한 지구화 시대에 정치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공론장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그의 이러한 정의론 작업을 결산한 저작이다.
경제 위기와 극우 포퓰리즘의 창궐, 기후 급변 등으로 어지러웠던 2010년대에 프레이저는 이제까지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다른 어떤 사회이론가보다더 맹렬히 현실에 개입하면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그는 정체성 정치만 강조하며 분배 요구를 등한시한 사회운동들을 비판했고, 최근 극우 포퓰리즘이 상당수 대중에게 대안으로 선택받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통렬히 지적했다. 특히 페미니즘의대중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식의 낡은 틀

에 갇혀 있는 여성운동을 향해 자기 성찰과 노선 전환을 촉구했다. 그 결실이《전진하는 페미니즘> <99% 페미니즘 선언》(공저) 같은 저작들이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사회운동과 좌파정치 전반이 환골탈태해야 함을 역설했다. 2020년 미국 대선 직전에 펴낸 팸플릿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에서 그는,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극우 포퓰리즘이 발호하도록 만든원홍이기에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즉, 극우 포퓰리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동맹에 바탕을 둔 ‘진보적 포퓰리즘‘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운동, 흑인운동 등이 굳건한 동맹을 발전시켜야 할 근거를 ‘자본주의‘라는 토대 자체에서 찾아내려 한다. 다만, 이 ‘자본주의‘는 더 이상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이야기하던 그 ‘자본주의‘와 같지 않다. 자본- 임금노동관계만으로 환원되지않는, 더 복잡한 제도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책 《좌파의 길: 식인자본주의에 반대한다》에서 드디어 프레이저의 새로운 자본주의관은 그 전모를 드러낸다.

장석준

사회학을 공부했고 진보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다. 진보신당 부대표,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으며,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의 기획위원이다. 저서로 《근대의 가을》 《장석준의 적록서재><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사회주의》《신자유주의의 탄생》《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유령들의 패자부활전》(공저) 등이 있고, 《길드 사회주의><G.D. H. 콜의 산업민주주의》《유럽민중사》《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이전》(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굳이 지금이 혼란기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난마처럼 서로 얽힌 미래의 위협과 현재의참사에 이미 익숙해져 있으며, 실은 이로 인해 이미 요동치고 있다. 부채는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노동은 불안정하며, 생계는위협받고 있다. 공공 서비스는 퇴보하고, 인프라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며, 국경 감시는 더욱 가혹해진다. 거기에다 인종화된폭력, 생명을 위협하는 팬데믹, 극단적인 기후까지 엄습한다. 그리고 그 해법을 상상하거나 실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정치의 기능 장애가 이 모두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중에서 처음듣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으므로 여기에서 굳이 장황하게 부연할 필요는 없겠다. - P15

‘식인[동족포식]cannibalism‘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가장 익숙하고도 구체적인 의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신체를 먹는 의례‘
라는 것이다. 기나긴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이 말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묘사하는 데 주로 쓰였는데, 실은 이들이야말로 오히려유럽 제국주의의 식인적 약탈의 희생자들이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식인종‘을 자본가 계급을 묘사하는 말로 다시 불러내면서우리는 얼마간 복수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이 집단이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좀 더 추상적인 의미도 있는데, 여기에는우리 사회를 둘러싼 더 심층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cannibal-ize"라는 동사에는 ‘어떤 설비나 사업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 - P16

하는 부품이나 부서를 떼어내 다른 설비나 사업을 만들거나 유지하는 데 쓴다‘는 파생적 의미도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자본주의 경제가 시스템 내부의 ‘비-경제적‘ 주변 영역과 맺는 관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 관계란, 자본주의 경제가 제 배를채우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 생활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빨아먹어 버리는 현실이다.
게다가 특별한 천문학적 의미도 있다. 우주 공간의 물체가 중력을 통해 다른 물체의 상당부분을 흡수할 때에도 ‘cannibal-ize‘라는 동사를 쓴다. 역시 이 책에서 다루겠지만, 이는 자본이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천연자원과 사회적 부를 끌어다 자기궤도에 가둬놓는 과정을 적절히 묘사한다. 이것은 결국 우로보로스ouroboros, 즉 제 꼬리를 먹으며 자멸하는 셈이다. 역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는 바로 자신을 지탱해주는 사회·정치·자연의 토대(우리의 토대이기도 한)를 먹어 치우느라 여념이 없는 이시스템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다. - P17

이 모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식인‘이라는 은유가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분석을 발전시킬 여러 통로를 열어준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먹이 떼를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 무리를제도화한 것‘으로서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서 중심 메뉴는 우리다.
‘자본주의capitalism‘ 역시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할 단어다. 보통 이 말은 사적 소유, 시장 교환, 임금노동, 그리고 이윤을 위한생산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을 일컫는 데 쓰인다. 그러나 이정의는 너무나 협소하여, 시스템의 참된 특성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모호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더 커다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 때 좀 더 쓸모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더 커다란 무엇‘이란, 이윤 주도 경제가 그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들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societal 질서를뜻한다. 자연과 예속민subjects으로부터 수탈한 부富, 오랫동안 - P18

가치를 무시당해온 다양한 형태의 돌봄 활동, 자본이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감축하려 드는 공공재와 공적 권력public power,
노동 대중의 열의와 창의력 등이 그런 경제 외적 기둥에 해당한다. 이런 형태의 부는 기업 회계장부에 표시되는 이윤과 수익의필수 전제조건이지만, 정작 회계장부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축적의 핵심 기반인 이런 형태의 부 역시 자본주의 질서의 구성적costitutive 요소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의 한 유형만이 아니라 사회의 한 유형을 가리킨다. 투자자와 소유주를 위해 화폐화된 가치를 축적하는 공식적으로 ‘경제‘라 지정된 영역을 인가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화되지 않은 모든 부를 먹어 치우는 사회 말이다. 이러한 사회는 그 부를 접시에 담아 대기업 소유 계급에게 대접한다. 또한 이 사회는 그들이 우리의 터전인 지구와우리의 창조적 역량에서 먹을 것을 뽑아내도록 해준다. 저들에게는 자신들이 소비한 것을 보충하거나 훼손한 것을 원래대로고쳐놓을 책임은 애당초 면제돼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온갖 곤경이 생겨난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마저 먹어 치울 태세다.  - P19

즉, 현 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은 ‘식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현재의 위기는 다양한 폭식증의 발작이 한데 모인 예외적유형의 위기다. 수십 년에 걸친 금융화로 인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단지‘ 극단적인 불평등이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위기만이 아니다. ‘단지‘ 돌봄이나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만도 아니고, 이민과 인종화된 폭력의 위기만도 아니다. 또한 뜨거워진 지구가 치명적 전염병을 토해내는 ‘단순한‘ 생태적 위기만도 아니고, 무너져가는 인프라와 군사주의 증대, 독재자의 만
‘연을 특징으로 하는 ‘오로지‘ 정치적인 위기만도 아니다. 아니,
이 위기는 ‘더 나쁜 무엇‘이다. 이 모든 재난이 한데 모여 서로를악화시키며 우리를 집어삼키겠다고 위협하는, 사회질서 전체의 전반적 위기다. - P20

 이를 ‘사회주의‘라 부르는 아니면 다른 뭐라 부르든, 우리가추구하는 대안은 시스템의 경제 영역 재편만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 경제 영역이 현재 제살 깎아먹기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저 모든 형태의 부가 경제 영역과 맺는 관계 역시 재편해야만 한다. 즉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 사적 권력과 공적 권력의 관계,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한다.
이것이 무리한 요구라 느낄지도 모르지만, 여기에 최선의 희망이 있다. 오직 더 커다란 대안을 사고해야만, 우리 모두를 잡아먹으려는 식인 자본주의의 끝없는 식욕을 제압하기 위해 싸울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 P23

요점은, 우리가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살고 있지만 그 위기를 명쾌히 정리해주는 비판이론을 갖추지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방의 해법으로 인도할 이론이 없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오늘날의 위기는 우리가 물려받은 표준적인 이론 모델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현 위기는 금융 등의 공식 경제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 ‘돌봄 결핍‘, 광범위한 공적 권력의 유명무실화 같은 ‘비경제적‘ 현상까지 포괄하는 다차원적 위기다. 하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위기 이론은 경제 측면에만 집중함으로써 이를 다른 측면들과 분리하고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 P29

나는 이런 개념의 하나로 ‘식인 자본주의‘를 주창한다. 먼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Capital》 제1권이 제시하는 핵심 주장의 이면에 숨은 내용을 물으면서 이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본>은 일반적인 개념들의 재료 면에서 풍부한 내용을 제공하며, 원칙적으로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광범한 관심들에도 열려 있다.
하지만 젠더, 인종, 생태계, 정치권력을 자본주의 사회 내부 불평등의 구조적 축으로서 체계적으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회 투쟁의 관심사로서나 그 전제로서도 마찬가지다. - P30

하나, 상품 생산에서사회적 재생산으로


인식의 전환에서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은 ‘생산‘에서 ‘사회적 재생산‘으로 나아가는 전환이다. ‘사회적 재생산‘이란, 인간 존재와 사회적 유대를 생산하고 지탱하는 상호작용, 필수재공급, 돌봄 제공의 형태들을 뜻한다. ‘돌봄‘, ‘감정노동‘, ‘주체화subjectivation‘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이러한 활동은 자본주의의 인간 주체들을 형성하고, 그들을 육체를 지닌 자연적 존재로지속시킨다. 또한 그들을 사회적 존재로 구성하고 그들의 활동반경을 이루는 아비투스habitus‘ 와 사회-윤리적 내용 혹은 인륜성을 형성한다. - P40

게다가 사회적 재생산과 상품 생산의 분리는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중심을 이룬다. 실로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강조한 것처럼, 이 구별은 심각하게 젠더화되어 있다. 재생산은 여성과 결합되고, 생산은 남성과 결합되는 식으로 말이다. 역사적으로 ‘생산적인 유급 일자리와 무급 ‘재생산‘ 노동의 분할은 여성 종속의 근대 자본주의적형태를 뒷받침했다. 소유주와 노동자의 분할과 마찬가지로 이분할 역시 이전 세계의 해체에 바탕을 둔다. 파괴된 이전 세계에서는, 여성의 일이 비록 남성의 일과 구별되기는 했지만 그래도눈에 잘 띄었고 공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사회적 우주의 불가결한 부분을 이루었다.  - P42

둘, 경제에서 생태로


이제 우리는 또 다른 감춰진 장소로 이끄는, 중대한 두번째 인식의 전환을 고찰해야 한다. 이 전환은 생태사회주의 사 - P43

상가들의 저작에 가장 훌륭하게 담겨 있는데, 요즘 이들은 자연을 둘러싼 자본주의의 제살 깎아먹기에 초점을 맞추며 또 다른배경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이 이야기는 생산 ‘투입물‘의 원천이자, 생산 과정에서 배출된 폐기물을 빨아들일 ‘하수구‘로서, 자본이 자연을 ‘합병‘(로자 룩셈부르크가 ‘병탄[땅뺏기]Landnahme‘이라칭한하는 것과 관련된다.
여기에서 자연은 자본을 위한 자원이 되는데, 그 가치는 전제됨과 동시에 부인된다. 자본 회계에서 자연은 마치 비용이 제로인 듯 처리된다. 그래서 아무런 수선이나 보충도 없이 무상으로혹은 헐값에 전용되는데, 이런 행위의 노골적인 전제는 ‘자연은스스로 무한히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명을 지탱하고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자연의 역량이 상품 생산과 자본 축적의 또 다른 필수 배경조건이 되며, 따라서 이를 놓고 또 다른제살 깎아먹는 짓이 벌어진다. - P44

셋,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다음으로 세 번째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살펴보자. 이는자본주의를 존립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조건, 즉 자본주의가 자신의 구성적 규범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공적 권력에 의존하는현실을 가리킨다. 사기업과 시장 교환의 토대를 이루는 법률적틀이 없다면 자본주의의 존립은 꿈도 꿀 수 없다. 자본주의의 본이야기는 이 공적 권력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이를테면 재산권을 보장하고, 계약 내용을 실행하게 하며, 분쟁을 심판하고, 반자본주의 반란을 진압하며, 자본의 생계수단이라 할 화폐 공급을 지속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공적 권력은 대개영토국가 안에 고정돼 작동했으며, 여기에는 식민지 보유국이나제국주의 강대국처럼 초국적으로 움직이는 국가도 포함되었다. - P47

넷, 착취에서 수탈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전개 전반에 영감을준 생각, 즉 원시 축적이 자본 축적의 역사적 전제조건이라는 마르크스의 설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생각을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린 초창기의 흔적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에서도 지속되는 특징으로 재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사회 시스템에서 구조적으로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감춰진 장소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장소‘를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감춰진 필수 요소란 수탈, 즉 종속되고 소수자화된 사람들의부를 지속적으로 강제 탈취하는 것이다. 대개 수탈을 자본주의만의 특징인 착취 과정의 반反명제로 여기지만, 오히려 착취가 - P50

이뤄질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보는 것이 수탈을 더 잘 이해하는길이다.
착취와 수탈 모두 축적에 기여하지만 그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착취는 자유 계약에 따른 교환으로 위장한채 가치를 자본에 이전시킨다. 즉, 노동자는 노동력 사용 대가로임금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하고, 자본은 ‘잉여노동시간‘을 전유하는 한편 ‘필요노동시간만큼만 급여를 지불한다. 반면에 수탈의 경우에는 자본가가 타인의 자산을 대가를 거의 혹은 전혀 지불하지 않은 채) 폭력적으로 징발하는 쪽을 선호하기에 이러한 온갖세심함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즉 강제 노동, 토지, 광물, 에너지를 기업 활동에 몰아줌으로써 기업의 생산비를 낮추고 이윤을 늘린다. - P51

게다가 수탈과 착취의 구분은 지위 위계와조응한다. 착취의 대상이 되는 ‘노동자‘는 당당한 개인과 시민의 지위에 해당하며, 국가에 의해 보호받을 자격을 갖추고 자기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 반면 수탈의 대상이 되는 ‘타자‘는 부자유하고 종속적인 존재이며, 정치적 보호 바깥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채 본질적으로 ‘불가침하지 않은violable" 신세가 된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 계급마저도 서로 다른 두 범주로 나누니, 하나는 ‘순수한 착취에 어울리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 수탈을 당하는 운명이다. 이 분할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제도적 단층선 - P52

으로서, 앞에서 이미 살펴본 생산과 재생산, 사회와 자연, 정치와경제의 분할만큼이나 자본주의 사회에 구성적이며 그 구조적토대 노릇을 한다.
게다가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 노동자/타자의 분할은자본주의 사회에서 특별한 지배 양식을 강화한다. 즉, 인종적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인 억압이다. 제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보호가 거부되고 반복적으로 폭행을당하는 이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는 인종화된 인구집단이다. 동산動産 노예chattel slaves, 식민지 예속민, 정복당한 ‘원주민‘, 부채 노예, ‘불법 체류자‘ 유죄 확정 중죄인, 인종분리국가와 그 후예들 내부의 인종화된 예속민 등등. 이들은 모두 시민노동자로인정받은 이들과는 달리) 일시적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 수탈의대상이 된다. 즉, 수탈/착취 분할선은 전 지구적 피부색의 경계선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분명히 겹친다. 이로부터 인종적 억압, 제국주의(구식이든 신식이든), 토착민 자산 박탈, 인종 학살에이르는 구조적 불의가 줄지어 나온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구성적인 또 다른 구조적 - P53

분할이다. 그리고 이 분할 또한 역사적으로 변천해왔고, 제살 깎아먹기의 토대 노릇을 했다. 이는 이 책에서 개념화한 다른 분할들과 깊이 얽혀 있으며, 따라서 지금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위기와도 얽혀 있다. 위기의 여러 갈래들, 즉 정치 위기, 생태 위기, 사화재생산 위기는 주변부와 중심부 모두에서 벌어지는 인종화된 수탈과 분리될 수 없다. 예컨대 자본은 수탈한 땅, 강제 노동,
광물 약탈품을 획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공적 권력에 기대고(일국적이든 초국적이든), 독성 폐기물 처리장과 무급 돌봄 활동 공급자로서 인종화된 지역에 의존하며, 정치 위기를 진정(또는 치환)시키거나 아니면 오히려 조장하기 위해 지위 분할과 인종적 원한에 호소한다. 한마디로 경제·생태·사회·정치 위기는 제국주의적·인종적 억압과 긴밀히 얽혀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억압과결합해 점증하고 있는 적대와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 P54

었다. 즉사적 소유, ‘자기‘ 확장하는 가치의 축적,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 등 상품 생산 투입요소의 시장적 할당, 사회적 잉여의시장적 할당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각각 사회적 재생산, 지구 생태계, 정치권력, 인종적 피억압자에게서 수탈한 부의 지속적 유입 등 네 가지 결정적 배경조건 덕분에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네 가지 배경이야기와의 관계 속에서 마르크스의 본이야기가 차지하는 위치를다시 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마르크스적 관점을 비판적 이론작업의 다른 해방적 흐름들, 즉 페미니즘, 생태주의, 정치이론, 반제국주의, 반인종주의와 연결해야만 한다. - P55

자본주의가 경제적 시스템도 아니고 윤리적 삶의 사물화된형태도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자본주의를제도화된 사회 질서an institutionalized societal order 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이해라는 게 나의 답이다. 이를테면 봉건제 같은 하나의 사회 질서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본주의의 구조적분할, 특히 앞에서 확인한 제도적 분리들이 부각된다.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제도적 분리, 즉 남성 지배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형태에 토대를 제공하는 젠더화된 분리는 자본주의에구성적인 것이며, 노동력의 자본주의적 착취가 이뤄질 수 있게하고 이를 통해 공인된 축적 양식이 존립하게 한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 역시 자본주의에 결정적인 것인데, 경제적이라 규정된 사안들을 영토국가의 정치 의제에서 추방함으로써, 자본이주인 없는 초국적 무대를 자유로이 떠돌며 어떤 정치적 통제도없이 패권적 질서에서 떨어지는 이익을 주워 담게 해준다.  - P58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전경/배경 관계에 관한 설명이 정확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생각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첫째, 자본주의의 ‘비-경제적 영역들은자본주의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조건 구실을 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는 그 존립 자체를 자본주의의 ‘비-경제적 영역들에서 나오는 가치들과 투입요소에 의존한다. 하지만 둘째로, 자본주의의 ‘비-경제적 영역들은 각기 고유한 무게와 성격을 지니며, 특정한 환경에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자원을 제공할 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이 영역들은 자본주의 사회의본질적 부분으로서,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와 화합하며로를 구성해왔고 이러한 공생관계가 각 영역에 자취를 남기고있다. - P64

이제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벌이는 투쟁을 더 잘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또한 이제 많은 이들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위기 심화가 반인종주의와 인종주의적 포퓰리즘의 발전 모두에폭넓은 배경이 되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위기는 자본주의에서 특유하게 나타나는 인종적 억압을좀 더 눈에 잘 띄게 하면서, 동시에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마침내 ‘자본주의‘는 더 이상 금기어가 아니게 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부흥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질문이 다시금 절박하게 제기되었다. 자본주의는필연적으로 인종주의적인가? 과연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인종적억압이 극복될 수 있을까? - P76

자본주의는 그 필수조건으로서 착취만이 아니라 수탈에도 의존하기에 인종적 억압의 구조적 토대를 장착한다는 명제를 옹호할 것이다. 다음으로, 착취/수탈이 자본주의 역사의 주요 국면에서 그 형세배열을 어떻게 바꿔왔는지 윤곽을 그려 보임으로써 이 구조를 역사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여전히 착취와 수탈에 의존하지만 이들을 서로 극명히 나뉘는 인구집단에 적용하지는 않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종적억압을 극복할 전망을 따져볼 것이다. 이런 논의들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특정 인구집단을 인종화함으로써 더 쉽게 제 살깎아먹기를 벌이려 하는 내재적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잔혹한 처벌을 즐기는 수탈탐식가‘로 이해되어야만 함을밝힐 것이다. - P78

충동 일체를 시장 바깥으로 추방하고, 이를 시장의 작동을 왜곡하는 요소로 본다. 따라서 인종주의의 원흉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이를 둘러싼 더 큰 사회가 된다. 인종주의는 역사·정치·문화에서 연유하며, 이 모두는 자본주의에 외재적인 것으로서 오직우발적으로만 이와 연결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단·목적으로 축소되고, 역사적·정치적 내용이제거되면서 형식화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교환 중심 관점은 자본주의 경제에 구조적으로 인종적 억압을 발생시키는 ‘비-경제적‘ 전제조건과 투입요소가 필요하다는 점이 눈에 잘 드러나지않게 한다. 그러한 의존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탓에 자본주의 시스템의 독특한 축적, 지배, 제살 깎아먹기 메커니즘이 잘 보이지않도록 만든다. - P80

바로 이것이 요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핵심이 착취이고, 이는 두 계급의 관계라고 봤다. 이 관계의 한쪽은 사회의생산수단을 소유하며 잉여를 전유하는 자본가이고, 다른 한쪽은자유롭지만 재산이 없는 탓에 나날이 자기 노동력을 팔 수밖에없는 생산자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만은 아니며, 상품 생산을 통해 자본이 자유로운 노동을 착취하는계급 지배의 사회적 시스템이다.
마르크스의 시각에는 많은 장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한 가지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를 착취의 렌즈를 통해 바라봄으로써 교환의 시각이 가리고 있던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에 대한 계급 지배가 이뤄지게 하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구조적 토대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 P81

내 주장은 수탈이 자본주의 사회에 실로 필수불가결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의 얽힘에도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간단히 말해 자본의 수탈 대상이 되는 이들의 예속은 착취 대상이 되는 이들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감춰진 조건이다. 그러므로 전자에 관한 설명이 없다면 후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를 역사적으로얽히게 만드는 구조적 토대 역시 엿볼 수 없게 된다.
이 주장을 풀어놓기 위해 나는 제1장에서 소개한 자본주의에관한 확대된 인식을 활용하고자 한다. 이는 위에서 이야기한 세가지 시각 가운데 뒤의 두 가지, 즉 착취의 시각과 수탈의 시각의 요소들을 결합한다. 그리고 이는 마르크스가 익숙한 교환의수준 이면으로 파고들어가 밝혀낸 착취의 ‘감춰진 장소‘를, 훨씬더 어둠에 가려진 수탈의 순간과 결합시킨다. 이렇게 착취와 수탈의 관계를 이론화함으로써 나는 자본주의와 인종주의를 끈덕지게 얽히게 만드는 구조적 토대를 식별해낼 것이다. - P84

‘수탈‘이 자본주의에 구조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정의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앞 장에서 본 대로, 수탈은 다른 수단을 통한 축적이다. 즉, 착취와는 다른 방식을 통한 축적이다. 자본이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계약 관계 대신, 수탈은인간 역량과 자연 자원을 징발하여 자본 확장 회로에 징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징발은 신세계 노예제에서 그랬듯이 뻔뻔스럽고폭력적일 수도 있고, 우리 시대의 약탈적 대출과 담보물 압류에서 그렇듯이 상거래라는 베일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또 수탈당하는 주체는 자본주의 주변부의 농촌이나 토착민공동체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중심부의 종속 집단이나 하위 집단 구성원일 수도 있다. 한때 수탈을 당했더라도 운이 좋으면 착취받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빈민, 슬럼거주자, 물납 소작인sharecropper", ‘원주민, 노예, 임금 계약 바깥에서 계속 수탈당하는 주체로 끝날 수도 있다. 징발된 자산은노동, 토지, 가축, 도구, 광산이나 에너지 매장지일 수도 있지만, - P85

또한 인간, 인간의 성적·생식적 역량, 자녀와 장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은 징발된 역량들이 자본의 핵심 특징인 가치 확장 과정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도둑질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강탈 같은 행위와는 달리, 내가 말하는 수탈은 징발과 징용을 통해 축적에흡수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탈은 다수의 죄악을 포함하며, 그중 대다수는인종적 억압과 강한 상관성이 있다. 그 관련성은 영토 정복, 합병, 노예화, 강제 노동, 아동 유괴, 조직적 강간처럼 자본주의 초기 역사(물론 지금도 계속되지만)와 광범하게 결합된 행위들에서는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대적인‘ 형태(이를테면인종적 억압과도 연관된 수감 노동, 초국적 성매매, 대기업의 땅뺏기, 약탈적 대출에 따른 압류 등)를 취하기도 하며, 현대 제국주의와 함께하기도 한다. - P86

수탈과 착취의 구별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두 용어는 (분석상으로는 구분되지만 서로뒤얽혀 가치를 확대하는 ‘자본 축적‘ 메커니즘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지배‘ 양식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특히 권리를 보유한 개인시민과 예속민·부자유한 노예·하위 집단의 종속적 구성원을 구별하는 지위 위계제와 관련된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착취 노동자는 법률상 자유로운 개인의 지위를 갖고 있어, 임금을 대가로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권한이 있다. 일단 생산수단에서 분리돼 프롤레타리아화하면 노동자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추가적인) 수탈로부터 보호받는다. 이 점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노동·재산·인격이 여전히 자본 측의 징발에 내맡겨져 있는 이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징발 대상이 되는 집단은 정치적 보호를 누리기는커녕 수탈하기에 안성맞춤인 무방비 상태가 되며, 이 상태는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 P89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호를 제공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자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국가다. 시민을 예속민이나 체류 외국인과구별하고, 권리를 지닌 노동자를 종속적인 상습 채무자와 구별하는 지위 위계제를 법률로 정하고 집행하는 것 역시 국가다. 이러한 국가의 정치적 주체화 기능은 피착취 주체와 피탈 주체를 구축하고 이 둘을 서로 구별함으로써, 자본의 ‘자기‘ -확대에필수 전제조건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방면에서 국가는 홀로 역할하지 않는다. 지정학적제도배열 또한 관련돼 있다. 일국 수준에서 이러한 정치적 주체화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것은, 국가를 ‘승인‘하고 국경 통제권(합법적 주민을 ‘불법 외국인‘과 구별하는)을 인가하는 국제적 시스템이다. 이렇게 지정학적인 권능을 부여받은 정치적 지위 위계제에 얼마나 쉽게 인종적 내용이 각인되는지 확인하려면, 이민과 난민을 둘러싼 최근의 갈등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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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5:36   좋아요 1 | URL
아, 이해...가 될 때까지 읽다가는...도무지 마칠 것 같지 않아서ㅠ,ㅠ 읽고 또 읽어보고 (뜨거운 음식 빨리 먹으려는 것처럼, 지저분하게 먹는 모습 떠오르시죠.) 그렇게 집어 삼키듯 읽고 있어요. 스스로 위안을 삼듯... 그러다보면 알 듯도, 알겠는 듯도 해지더라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