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ike」. 1931년 4월 문학잡지 <뉴아델피>에 게재, 문학적인 에세이로선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 글이다. 사립 명문교 이튼을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의 5년간(1922~1927)의 경찰 생활을 접고, 밑바닥 생활을 하며 작가수업을 하다 지면에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의 에세이다. 이 글은 나중에 줄이고 고쳐져 그의 첫 책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27장과 35장에 실렸다. ‘스파이크‘는 구빈원에 딸린 부랑자(노숙자)를 위한 임시 무료 수용소를 일컫는 속어인데, 간결한 번역어가 마땅찮고 강렬한 어감을 살리기 위해 본래 발음대로 적는다.

늦은 오후였다. 우리들 마흔아홉 명은(마흔여덟은 남자고 하나는 여자였다) 스파이크(부랑자 임시숙소)가 열릴 때까지 대기소인 풀밭에 누워 기다렸다. 너무 피곤해서 말들이 별로 없었다. 지칠대로 지쳐 뻗어버린 우리는 지저분한 얼굴에 사제로 만든 담배만 삐죽 내물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 위로는 꽃 흐드러진 밤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로는 맑은 하늘에 커다란 양털구름이 거의 움직임 없이 떠 있었다. 그 아래 풀밭에 흩어져 있는 우리는 도시의 거무죽죽한 쓰레기 같았다. 우리는 풍경을 더럽히는 존재였다.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정어리 통조림이나 종이봉투처럼.
그나마 하는 얘기는 주로 이 스파이크의 부랑자 감독Tramp Major 에 - P9

대한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동의하는 마왕이었고, 포악한 폭군이었으며, 고함과 모독과 가혹을 일삼는 빌어먹을 녀석이었다. 그가 가까이 있으면 그들은 자기 영혼을 제 것이라 말할 수 없을 만치 주눅이 들었고,
부랑자들 중에 말대꾸를 하다 한밤중에 쫓겨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제대로 몸수색이라도 할 일이 있으면 그는 상대를 거꾸로 매달아 털다시피 했다. 담배를 피우다 걸리면 어떤 후환이 있을지 몰랐으며, 돈을가지고 들어갔다 발각되면(금품 소지는 불법이었다) 신의 가호를 바라는수밖에 없었다.
내 수중엔 8페니가 있었다. "아이구 이 사람아, 큰일 나." 부랑자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이 조언을 해주었다. "가지고 들어가지 말게. 스파이크에 8페니 들고 들어갔다 걸리면 일주일은 살아야 돼!" - P10

그래서 나는 울타리 아래에 돈을 묻어야 했다. 부싯돌 한무더기로 자리를 표시해두었다. 이윽고 우리는 성냥과 담배를 따로 챙기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스파이크에서 담배도 반입 금지여서 정문에서 내놓는 게원칙이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양말 속에 숨겼다. 양말을 신지 않는 20퍼센트 정도는 담배를 신발 속에, 심지어 발가락 밑에 숨겨 들어가야 했다. 발목 둘레에다 밀반입품을 잔뜩 채워넣은 우리를 누가 봤으면 코끼리피부병에 걸린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지독한 부랑자 감독이라 할지라도 무릎 아래는 뒤지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는데 결국엔 딱 한 사람만 걸렸다. 스코티Scotty라는 키 작은 털보로, 글래스고출신이 런던 사투리를 흉내내는 듯한 묘한 악센트를 구사하는 부랑자였다. 그는 엉뚱한 순간에 양말에서 담배꽁초가 든 깡통이 떨어지는 바람에 압수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P10

6시에 정문이 활짝 열리자 우리는 발을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에서 직원 하나가 우리 이름과 이런저런 사항을 기입하더니 우리의소지품을 받아 챙겼다. 단 한 명이던 여자는 구빈원workhouse으로 보내졌고, 남은 우리는 스파이크로 갔다. 그곳은 음산하고 싸늘하고 회벽으로 된 건물로, 욕실과 식당 하나 그리고 100개 정도의 돌로 만든 골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부랑자 감독은 현관에서 우리를 맞이하더니 욕실로 몰고 가 옷을 벗게 하고 검사를 했다. 그는 마흔쯤 된퉁명스럽고 군인 같은 사람으로, 부랑자들에게 연못가로 몰고 간 양떼를 대하는 것 이상의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고면박을 주던 그는 나한테 다가와서는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젠틀맨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 P11

그는 다시 나를 오래 쳐다봤다. "팔자 한번억세게 사납소, 나리." 그가 말했다. "거 참 사나운 팔자로군." 그때부터 그는 나에게 경의에 가까운 배려를 작심한 듯했다.
욕실의 풍경은 역겨웠다. 우리들 속옷의 꼴사나운 비밀이 다 드러났다. 때가 시커멓고, 해어지고 기운 데, 단추 대신 실로 묶은 데, 몇 번이나 덧대 기운 데 투성이였던 것이다. 실내는 어느새 김이 모락거리는 알몸 한 무리로 북적였다. 부랑자들의 땀내와 스파이크 특유의 대변 냄새비슷한 악취는 막상막하였다. 일부는 목욕은 됐다며 땟국이 번들번들한
‘발싸개‘ 만 씻었다. 우리에게는 각자 3분씩 씻을 시간이 주어졌고, 우리 모두가 함께 써야 하는 롤러 타월은 기름기가 배어 미끈미끈한 것6개뿐이었다. - P11

골방은 가로세로 8피트 5피트고, 벽 위쪽에 창살 달린 조그만 창말고는 조명기구가 없었다. 벌레는 없었고 침대 틀과 밀짚 매트리스가 있었으니, 우리에겐 제법 호사였다. 다른 스파이크에서는 딱딱한 나무 침상아니면 맨바닥에서 베개 대신 외투를 말아 베고 자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나는 독방에다 침대도 있으니 하룻밤 푹 잘 수 있겠다는 기대를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스파이크엔 반드시 무언가 잘못된 게있기 마련이며, 이곳 특유의 결함은 추위라는 걸 나는 당장 알 수 있었다. 5월이 시작된 터라, 계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봄의 신들에게 바치는약간의 희생인 모양이었다) 당국에서 스팀을 차단했던 것이다. 무명 담요들은 거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반쯤 얼어붙은 듯 깬 채 동이 트기를기다리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보면 잠드는 시간은 10분이 될까 말까 했다. - P12

차, 더 정확히 말해 차라고 잘못 부르는 그것 없이 부랑자들이 살 수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양식이요약이며, 모든 불행에 대한 만병통치약인 것이다. 그것이나마 매일 반갤런쯤 홀짝일 수 없다면,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다시 옷을 벗고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천연두에 대한 예방책의 하나였다. 의사가 오기까지는 45분이 걸렸으니, 자기주변을 둘러보며 우리가 어떤 꼴인지를 볼 시간은 충분했다. 가관이었다. 우리는 복도에서 상의를 홀랑 벗은 채 두 줄로 서서 떨고 있었다. 높은 창으로 스며든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빛이 무자비하도록 선명하게 우리를 비추었다. 배만 불룩한 변변찮은 똥개들 같다는 느낌은 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으리라. 머리는 난발이고, 얼굴은 수염과 주름이 가득하고, 가슴은 푹 꺼지고, 발은 평발이고, 근육은 축 처진 것이, 온갖 기형과 몰골들이 다 모인 듯했다. 게다가 모두가 축 늘어져 있었고 혈색도 희한했다. - P13

해수뇌 ㅇㄱㄱㄴㄱㅆㄴ이 음산한 방에서 부랑자들 대부분은 연이어 10시간을 있어야 했다.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따분함이야말로부랑자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심지어 언제나 남 보기 망신스럽다는 느낌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온종일 아무 할 일 없이 가두어둔다는 건 어리석고도 잔인한 짓이다. 개를 통 속에 가둬놓고 묶어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영문도 모르고 의지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니 10시간동안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혀놓으면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지 - P15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그들에겐 무위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삶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아무 일도 안 하면서보내야 하는 그들로선 따분함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법이다.
나는 그들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 10시에 부랑자 감독이 오더니 스파이크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일을 할 사람으로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빈원 부엌일을 돕는 것으로,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나는 자리를 슬쩍 피해 감자를 보관하는 광에 숨어 있었다. 그곳엔 나 말고도 일요일 아침 예배가 싫어서 몰래 빠져나온 구빈원 소속 빈민들이 좀 있었다. 또 그곳엔 난롯불도 있었고, 편히 앉을 만한 궤짝도 있었고, <패밀리헤럴드> 지난 호들도 있었으며, 구빈원 도서실에서 가져온 ‘래플스‘ 추리소설도 한 권 있었다. 스파이크에 있다 가니 거긴 천국이었다. - P16

나는 또 구빈원 식탁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내가 여태 먹어본 최고의식사 중 하나였다. 부랑자는 스파이크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런 식사를일 년에 두 번 다시 구경하기 힘들다. 구빈원 빈민들은 내게 자신들은일요일이면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머지 엿새 동안은 굶고 지낸다고 했다. 식사가 끝나자 주방장은 내게 설거지를 하고 남은 음식을 버리라고했다. 음식쓰레기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쇠고기로 만든 굉장한 요리들,
그리고 들통 몇 개 분량의 빵과 채소가 쓰레기처럼 내버려진 채 다 우려낸 찻잎으로 더럽혀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좋은 음식으로 넘쳐나도록채워넣은 쓰레기통은 5개나 되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나의 동료 부랑자들은 200야드 떨어진 스파이크에 앉아 여느 때와 똑같은 빵과 차로,
그리고 잘하면 일요일이라 특별히 나오는 차가운 삶은 감자 2개로 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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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남은 음식을 부랑자들에게 주지 않고 버리는 건 고의적인 방침인 듯했다.
3시에 나는 구빈원 부엌을 떠나 스파이크로 돌아갔다. 이젠 그 바글바글하고 불편한 방에서의 따분함이 못 견딜 정도였다. 담배도 더 피울수 없었다. 부랑자의 담배란 게 길에서 주운 꽁초뿐인데, 풀 뜯는 짐승이 그러하듯, 풀밭 같은 보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부랑자는 굶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는 부랑자 중에 좀 잘난 체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눠보았다. 그는 칼라와 넥타이 차림의 젊은목수로, 연장 한 벌이 없어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다는 이였다. 그는다른 부랑자들과는 늘 거리를 좀 두었고, 스스로를 떠돌이 막일꾼이라기보다는 자유인에 가까운 사람으로 여겼다. - P17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118218시곗바늘은 고문을 하듯 느릿느릿 기어갔다. 우리는 너무 따분한 나머지 이젠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욕설과 긴 하품뿐이었다. 시계만 쳐다보던 시선을 억지로 거두고 한평생은 지났다 싶어 다시보면 바늘은 고작 3분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권태로움이 우리 영혼의움직임을 찬 양고기 비계처럼 막아버렸다. 때문에 우리는 뼈까지 아파왔다. 시곗바늘은 4시에서 멈춰 서버린 듯했고, 저녁식사는 6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를 들여다보듯 찾아온 달 아래엔 주목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19

그로부터 13시간이 지났다. 7시에 깨워진 우리는 욕실로 달려가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물을 다툰 다음, 빵과 차를 삼켰다. 이제 우리가 스파이크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은 다 채웠다. 하지만 우리는 의사에게 한번더 검진을 받을 때까지 나갈 수 없었다. 당국에선 천연두가 부랑자들을통해 퍼지는 걸 끔찍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번에는 의사를 2시간 동안 기다렸고, 결국 우리는 10시가 되어서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드디어 때가 되어 우리는 뜰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음산하고 악취진동하는 스파이크에 있다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게 어찌나 환하고 바람냄새는 또 어찌나 향기롭던지! 부랑자 감독이 압수했던 소지품 꾸러미를 각자에게 돌려주고 점심으로 먹을 빵 한 덩이와 치즈를 나눠주자,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스파이크의 외관과 그 규율을 어서 벗어나려고서둘러 떠났다. 한동안 자유를 누릴 때가 온 것이었다. 하루 낮 이틀 밤을 허비하고 난 우리는 8시간 정도 기분전환도 하고, 길에서 담배꽁초도 줍고, 구걸도 하고, 일거리도 찾아볼 터였다. 그리고 10마일이나 15마일, 아니면 20마일 정도 가야 다음 스파이크에 당도할 것이고, 거기서게임이 새로 시작될 것이었다. - P20

길은 조용했다. 차도 안 다니고, 꽃이 만발한 밤나무는 거대한 밀랍 초 같았다. 모든 게 너무고요하고 너무 향긋해서 몇 분 전만 해도 한 무리의 포로들과 함께 역한 하수구 냄새와 비누냄새 진동하는 곳에 바글바글 갇혀 있었다는 게실감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다 사라졌고, 이제 우리 둘만 길에 나선 부랑자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서둘러 다가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누가 내 팔을 두드렸다. 키 작은 스코티였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우릴 쫓아온 것이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깡통 갑 하나를 꺼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세 진 걸 갚으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자 이거, 친구."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한테 담배를 좀 빚졌잖아. 어제 나한테 선심을 썼지. 아침에 나올 때 부랑자 감독이 내 담배꽁초갑을 돌려주더라구. 친절은 베풀면 돌아온다니까. 자 여깄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에 눅눅하고, 다 썩어빠지고, 구질구질한 담배꽁초 4개를 쥐여주는 것이었다. - P21

교수형


버마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이었다. 누런 양철판처럼 희부연 빛줄기 하나가 높은 담벼락 너머 형무소 안마당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우리는 철창이 이중으로 된 작은 짐승 우리 같은 헛간이 줄지어있는, 사형수 감방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감방 하나는 가로세로 10피트 정도의 크기에, 판자로 만든 침상과 마실 물이 든 단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중에는 안쪽 철창가에 갈색 피부의 남자들이 담요를 두른 채 말없이 쪼그려 앉아 있는 방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형수로, 1~2주안에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감방에서 끌려나왔다. 힌두인‘인 그는 꼬챙이처럼 마른몸에 머리는 삭발을 했고 눈빛은 흐릿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숱 많고두툼한 콧수염을 길렀는데,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서 마치 영화에나오는 코미디 배우의 수염 같았다. 키가 큰 인도인‘ 간수 여섯 명이 그를 감시하는 동시에 교수대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둘은 총에 착 - P23

검을 한 채 서 있었고, 나머지는 힌두인 죄수에게 수갑을 채우고 사슬을수갑 사이로 통과시켜 자기네 혁대에 고정시킨 뒤 그의 팔을 옆구리와함께 단단히 묶었다. 그들은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고, 줄곧 그가 정말곁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조심스레 손을 얹고 있었다. 마치 아직살아 있어 물로 뛰어들지도 모를 물고기를 다루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모르기라도 하듯 오랏줄에 맥없이 팔을 맡긴 채 아무 저항도 없이 서 있었다.
8시 정각이 되자 집합 나팔 소리가 먼 막사에서 습한 공기를 타고 고적하고 여리게 들려왔다. 우리와는 따로 서 있던 형무소장은 시무룩하니 지팡이로 자갈을 찌르고 있다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군의관으로, 칫솔 같은 회색빛 콧수염에 목소리가 걸걸한 사람이었다. "이런, 이런, 어서 서둘러, 프란시스" 그가 안달을 했다. "저 사람 지금쯤 벌써 죽었어야지. 아직 준비 안됐나?" - P24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관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 P26

아니다.
듯 낑낑거렸다. 여전히 교수대에 서 있던 집행인은 밀가루 부대를 닮은작은 무명 자루를 꺼내더니 죄수의 얼굴에 씌웠다. 하지만 천에 가로막혀도 그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람! 람! 람! 람! 람!"
이윽고 집행인은 아래로 내려와 손잡이를 잡고 섰다. 몇 분이 흘러간것만 같았다. 자루에 걸러진 죄수의 꾸준한 외침은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람! 람! 람!" 계속됐다. 고개를 가슴에 처박고 있던 형무소장이지팡이로 땅바닥을 천천히 쑤시기 시작했다. 그는 죄수의 외침을 일정한 숫자만큼(50번 아니면 100번) 용납하기로 하고 수를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인도인들의 낯빛이 상한 커피처럼 잿빛으로 변해갔고,
총검 한두 개가 흔들흔들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올가미와 자루를 쓰고교수대 발판에 올라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외침을 듣고 있었다. 소리 한 번이 연장된 목숨 1초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다. 제발 어서 죽여버려. 그냥 끝내라구 저놈의 징글맞은 소리 그만 듣게! - P27

방금 교수형이 집행된 것치고는 우리는 업무를 마친 것에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노래라도 부르거나, 느닷없이 마구 달리거나, 낄낄거리기라도 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우리는 갑자기 모두가 흥겹게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 걷던 유라시아계 소년은 우리가 온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아는 체하는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아십니까요. 나리? 우리 친구가(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항소가 기각됐다는 말을 듣고 감방 바닥에다오줌을 쌌다는 것 말입니다. 겁을 먹은 겁죠. 자, 나리, 제 담배 하나 태워보십쇼. 제가 새로 산 은제 담뱃갑 멋지지 않습니까요. 나리? 행상한테 2루피 8아나를 주고 샀는데, 고급스러운 유러피언 스타일입죠."
여럿이 껄껄 웃었다. 무엇 때문에 웃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같았지만.
프란시스는 소장 옆에서 걸으며 수다를 떨었다. "자, 나리, 모든 게 더없이 만족스럽게 끝났습니다요. 전부 휙! 하면서 다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요. 항상 그런 건 아닙죠. 암, 절대 안 그렇습죠! 저는 의사가 교수 - P29

대 밑으로 가서 죄수의 다리를 당겨보고 죽었는지 확인해야만 하는 경우도 여러 번 봤습죠. 얼마나 찝찝한 일입니까요!"
"안 죽고 꿈틀꿈틀할 때 말이지, 음? 그거 고약하지." 소장이 말했다.
"예, 나리, 그런데 놈들이 뻗댈 때는 더 고약합죠! 우리가 데리러 갔을 때 감방 철창에 떡 붙어 있는 녀석도 다 있었습죠. 녀석을 떼어놓느라고 간수 여섯이 들러붙어야 했다고 하면 못 믿으실 겁니다요. 나리.
다리 하나에 셋씩 붙어야 했지 뭡니까요. 나중엔 달래기까지 했습죠.
이 친구야. 자네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애를 먹이고 있는지 생각 좀해보게나! 그런데 녀석이 들으려고 해야지요! 아이고, 정말 골치 아픈녀석이었습니다요!"
나는 제법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모두가 껄껄 웃고 있었다. 소장마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나가서 한잔하자구." 그가 꽤 다정하게 말했다. "차에 위스키 한 병이 있어. 그거 다 비워버리자구."
우리는 이중으로 된 형무소 정문을 지나 길에 들어섰다. "다리를 붙들고 끌어내야 했다니!" 버마인 치안판사가 갑자기 외치더니 큰 소리로키득거렸다. 우리 모두 다시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 순간엔 프란시스말한 일화가 너무 재밌다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유럽인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어울려 제법 의좋게 한잔했다. 죽은 자는 100야드쯤 떨어져 있었다. - P30

코끼리를 쏘다


남부 버마의 몰멩 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미움을 받을 만큼 내가 중요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막연하고 사소한 반유럽 정서가 상당히 독한 그 도시에 배속된 경찰관‘이었다. 누구도 소요를 일으킬 배짱은 없었으나, 유럽 여성이 혼자시장에라도 다니면 옷에다 비틀‘ 즙을 뱉는 사람은 있을 정도였다. 나는경찰이라 손쉬운 표적이 되었고, 안전하다 싶으면 누군가가 꼭 골탕을먹였다. 축구장에서 날렵한 버마인이 내 발을 걸면 심판은(역시 버마인이었다) 딴 데를 쳐다봤고, 관중은 포복절도를 했다.  - P31

이 모든 것들이 당혹스럽고 언짢았다. 왜냐하면 그 무렵 나는 제국주의가 사악한 것이니 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론적으로는(물론 남몰래 그랬다) 전적으로 버마인들 편이었고, 그들의 압제자인 영국인들을전적으로 적대시했다. 내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할 수있는 그 어떤 정도보다 지독하게 혐오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제국의추악한 짓거리들을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악취 지독한 철창에 처박혀 있는 불쌍한 죄수들, 장기 재소자들의 겁먹은 얼굴, 대나무로 매질을당한 사람들의 터진 엉덩이. 이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나를짓눌렀다. 하지만 난 그럴싸한 내 나름의 관점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나는 아직 어린데다 부실한 교육을 받았고, 동양에 가 있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내 문제를 철저히 함구한 채 혼자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는 대영제국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것을 대체해가는 신생 제국들보다는 영국이 훨씬 낫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 P32

그러던 어느 날 우회적으로 깨우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체로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제국주의의 본질을(달리 말해 전제적인 지배의 진짜 동기를) 이전보다 더 잘 간파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아침 일찍 시내 다른 경찰서의 고참 경위가 내게 덜컥 전화를 하더니 코끼리 한마리가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부디 와서 어떻게 좀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몰랐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 조랑말에 올라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소총도 챙겼는데, 케케묵은 윈체스터 44구경이라 코끼리를 잡기에는 너무 빈약했지만 그 소리는 위협으로 쓸 만하다 싶었다. 도중에여러 버마인들이 나를 지체시키며 코끼리의 소행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야생 코끼리는 아니었고, ‘발정기‘ 를 맞은 길든 코끼리였다. 길든 코끼리가 다 그렇듯 녀석은 ‘발정기가 닥치자 묶여 있었는데,
전날 밤 사슬을 끊고 탈출한 것이었다. 발정난 코끼리를 다룰 수 있는유일한 사람인 조련사는 녀석을 잡으러 나섰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바람에 그곳에서 12시간은 걸리는 곳에 있었고, 아침에 녀석이 갑자기시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 P33

전령은 몇 분 뒤에 총과 탄약통 5개를 들고 왔다. 그사이 버마인 몇사람이 우리한테 오더니 코끼리가 불과 몇백 야드 거리의 밭에 있다고했다. 내가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실상 그 동네 인구 전체가 집에서 몰려나와 나를 따라왔다. 큰 총을 본 그들은 내가 코끼리를 쏠 거라며 모두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들은 코끼리가 자기네 집을 대놓고 부술 때는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코끼리가 총에 맞을 거라고 하니 달라졌다. 영국인 군중이라도 그랬을 것처럼, 이 일은 그들에게도 제법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고기 생각도 있었던것이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 나는 코끼리를 쏠 생각이 없었으며(필요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총을 빌려오라 했을 뿐이었다)자기 뒤를 따라오는 군중이 있다는 건 언제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나는비탈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총을 어깨에 걸친데다 뒤로는 계속해서 늘기만 하는 군중이 서로 밀치며 졸졸 따라오니, 내 모습은 내가 느끼기에도 바보스러웠다.  - P36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발정기‘ 의 발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녀석은 위험하지 않게 그저 배회할 것이고, 조련사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그만일 터였다.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은 마음이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P37

나는 일어섰다. 버마인들은 이미 나를 지나쳐진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코끼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건 분명했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아주 규칙적으로 길게 그르렁거리며 헐떡일 때마다 거대하고 불룩한 옆구리가 고통스레 오르내렸다. 입은 헤벌려져 있어 옅은 분홍빛인 목구멍 깊은 곳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호흡은 더 약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남은 두 발을 심장이있지 싶은 부분에 발사했다. 빨간 벨벳처럼 진한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그래도 죽지 않았다. 총을 맞을 때 몸을 꿈틀하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호흡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그 불쾌한 숨소리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거대한 짐승이 움직일 힘도 죽을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꼴을 보는 것도, 그 목숨을 어서 끊어버릴 수 없는 것도 몹시 불쾌한 노릇이었다. 나는 내 작은 소총을 가져오라고 해서 코끼리의 심장과 목에다 한 발씩 쏘아넣었다. 아무 효과도 없는 듯했다. 고통스러운헐떡임은 시계 초침이 움직이듯 꾸준히 이어졌다. - P41

서점의 추억


헌책방에서 일하던 때 주로 느낀 것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었다(일해보지 않으면 매력적인 노신사들이 송아지 가죽으로 장정한 고서들을 마냥 열독하고 있는 천국 같은 곳으로 상상하기 쉽다). 우리 서점은예외적으로 흥미로운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손님들 중에 10분의 1이나마 그 진가를 알았을까 싶다. 초판 밝히는 속물들이 문학 애호가들보다 훨씬 흔했고, 싼 교과서 값을 더 깎으려는 동양 학생들이 그보다 더 흔했으며, 막연히 조카 생일 선물이라도 구하러 들르는 여성들이제일 흔했다.
우리 가게에 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어딜 가나 성가신 존재이겠지만 서점에 와서 특별한 기회를 누리려고 하는 부류였다. 이를테면 "아픈 사람 줄 책"을 원한다거나(아주 흔한 요구다),  - P43

그런데 그들 말고도 어느 헌책방에나 자주 출몰하는 성가시기로 유명한 유형이둘 있다. 하나는 묵은 식빵 껍질 냄새가 나는 쇠약한 사람이 매일같이,
어떤 때는 하루에 몇 번씩 찾아와 무가치한 책들을 팔려고 하는 경우다.
또 하나는 살 의향이 조금도 없으면서 책을 대량으로 주문하는 경우다.
우리 가게에선 물건을 외상으로 팔진 않았으나, 나중에 가져가겠다는사람들을 위해 책을 따로 남겨두거나 필요하면 주문을 해주기는 했다.
그런데 우리를 통해 책을 주문한 사람들 중에 다시 오는 사람은 절반이되지 않았다. 나는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나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점에 찾아와 꽤 귀하고 비싼 책을 요구하며 구하게 되면 꼭 남겨두라고 우리에게 몇 번이나 다짐하고 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틀림없는 편집증 환자였다.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아주 거창하게 하곤 했다. 또 집을 나서면서어떻게 돈을 깜빡 두고 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대단히 기발한 얘기를지어내곤 했는데, 많은 경우 스스로 그 얘기를 믿고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런던 같은 도시에서는 딱히 병원에 가야할 정도는 아닌 정신이상자들이 길에 나다니는 경우가 언제나 많고, 그들은 종종 서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왜냐하면 서점은 돈을 전혀 쓰지 않고도 오랫동안 서성일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P44

우리 서점은 햄스테드와 캠든타운 바로 접경에 있었기 때문에 준남작에서부터 버스 차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형의 손님이 빈번히 드나들었다. 아마 우리 대여문고 회원들은 런던 독서 대중의 그럴싸한 단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문고 저자들 가운데 가장 잘 나간‘ 작가를언급할 만할 터이다. 프리스틀리 헤밍웨이? 월폴? 우드하우스? 아니다. 에셀 M. 델이 1위요, 워윅 디핑이 아깝게 2위요, 3위는 제프리 파놀정도이지 싶다. 델의 소설은 물론 여성들만 보는데, 한 많은 노처녀나 - P46

담뱃가게의 뚱뚱한 부인네만이 아니라 의외로 모든 부류, 모든 연령층6의 여성들이 즐겨 찾는다. 남성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아예 피하는 소설 장르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거칠게 말해서 ‘평균치‘ 소설이랄 만한 것들은 여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하다(영국 소설의 표준처럼 되어버린 평범하고 좋으면서 나쁜, ‘골즈워디 에다 물 타기‘ 식인것들을 말한다). 남성들은 존경할 만하다 싶은 소설이나 추리소설을 보는데, 그들의 추리소설 소비량만은 엄청나다. 우리 회원 한 사람은 내가아는 바로는 1년 내내 추리소설을 매주 네댓 권씩 읽었는데, 다른 서점문고에서 빌려 보는 숫자를 뺀 게 그 정도였다.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나읽으면서도 같은 책은 절대 다시 고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런 나부랭이들을 그렇게 많이 섭렵해도 어떻게든 기억에 다 남는 모양이었다(1년 동안 읽은 페이지를 계산해보니 4분의 3에이커를 덮을 면적이었다). 그는 제목이나 저자명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책을 슬쩍 들여다보기만 하면 ‘이미 본 것인지를 알았다.
대여문고를 운영해보면 사람들의 그런 척하는 취향 말고 진짜 취향을알게 된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영국 고전소설가들의 인기가 완전히끝났다는 점이다. 디킨스나 새커리, 제인 오스틴, 트롤로프 같은 이들은 일반 대여문고에 넣어보나 마나다. 아무도 고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세기 소설은 보기만 해도 "어휴 그건 옛날 거잖아요"라며시 - P47

당장 피해버린다. 하지만 디킨스를 파는 건 셰익스피어의 경우가 그렇듯 언제나 꽤 쉬운 일이다. 디킨스는 사람들이 언제나 읽을 의향이있는 작가 중 하나로, 성경과 마찬가지로 간접적으로만 안다. 모세가파피루스 바구니 안에서 발견됐고 하느님의 뒷모습을 봤다는 걸 들어서 알듯, 빌 사익스가 강도였고 미카버 씨‘가 대머리였다는 걸 들어서아는 것이다. 대단히 주목할 만한 다른 사실 하나는 미국 책이 점점 인기가 없어져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건 단편소설이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출판업자들은 이 문제로 2~3년에 한 번씩은 안달복달을 한다). 문고지기에게 책을 하나 골라달라고 하는 유형의 사람들은, 우리문고의 한 독일인 고객이 그러는 것처럼 거의 항상 "단편소설은 원치않고요" 혹은 "짧은 이야기는 바라지 않아요"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왜냐고 물으면 단편은 이야기마다 인물들이 바뀌기 때문에 적응하는 게고역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때문에 첫 장 이후론 더 이상의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 장편에 ‘빠져드는 게 좋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단편소설은 대부분 철저히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것이, 대부분의 장편보다 그정도가 훨씬 더하다.  - P48

또한 이 장사는 어느 정도 이상은 천박해질 수 없는 인도적인 사업이다. 독점기업연합은 식료품 잡화상과 우유 배달 점포를 찍어눌러 퇴출시켜버릴수 있겠지만, 영세 독립 서적상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은 대단히 길다. 나야 파트타임 종업원일 뿐이었지만 내고용주는 매주 70시간씩 근무했는데, 책을 사러 멀리까지 끊임없이 다니느라 가게에 없는 시간을 뺀 게 그 정도였다. 게다가 근무환경이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 서점은 겨울이면 대개 지독히도 추운데, 너무 따뜻하면 창에 김이 서리게 되고 서적상은 창이 깨끗해야 먹고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물건보다도 더 많고 고약한 먼지를 뿜어내며, 책머리만큼 왕파리가 죽을 장소로 선호하는 곳은없다.
하지만 내가 서점 일을 평생 하고 싶지는 않은 진짜 이유는 그 일을하는 동안 내가 책에 대한 애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서적상은 책에 대해 - P49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책이 싫어지게 된다. 더 나쁜 건 언제나 책 먼지를 털고 책을 이리저리 옮겨야만 한다는 점이다. 내가 책을정말 사랑한 적이 있긴 했다. 덧붙이자면 적어도 50년이 넘은 책의 모습과 냄새와 감촉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골에서 경매로 책을1실링에 한 무더기씩 사는 기쁨도 대단했다. 오래된 뜻밖의 책들을 그런 식의 묶음으로 얻는 데는 묘한 흥취가 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18세기 시인, 옛날 지명사전, 표지가 독특한 잊혀진 소설, 장정이 된1860년대 여성지 같은 것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부담 없이 뭘 읽고싶을 때(이를테면 목욕할 때나 너무 피곤해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이나 점심을기다리는 15분 정도의 애매한 시간 동안에는 <걸스 오운 페이퍼>의 지난 호만 한 게 없다. 그러던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되자마자 책을 더는 사지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 번에 5000권, 만 권씩 보다보니 책이란게 시시했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요즘은 가끔씩만 책을 사고, 그것도 읽고는 싶은데 빌려 볼 수 없는 것만을 산다. 그리고 시시한 건 절대사지 않는다. 묵은 종이의 달큰한 냄새는 더 이상 내 마음을 끌지 못한다. 편집증 환자 같은 손님들과 죽은 왕파리들이 너무 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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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수요일(5월 5일)쯤이었다. 철수한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외출하게 된 극소수의 행인들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몸을 웅크리고 살금살금움직였다. 총알이 날아들지 않는 람블라스거리 한복판의 어떤장소에서는 몇 사람이 텅 빈 거리를 향해 신문을 사라고 소리쳤다. 화요일에는 무정부주의자의 신문인 솔리다리다드 오브레라가 전화교환소 공격을 <극악무도한 도발>(어쨌든 그런 의미였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수요일에는 분위기가 바뀌어 모두들 생업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 지도자들도 똑같은 메시지를 방송으로 내보냈다. 전화교환소가공격을 받을 무렵 무방비 상태이던 통일노동자당 신문 《라 바탈랴》의 사무실도 치안대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라 바탈랴》는 다른 장소에서 인쇄되어 적은 부수가 배포되었다. 그 신문은 모두들 바리케이드에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촉구했다. 사람들은 갈등을 일으켰다. 일이 도대체 어떻게돌아갈지 불안하게 생각했다. 아직 바리케이드를 떠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모두들 의미 없는 싸움에 싫증을 냈다. 이 싸움에서는 어떤 현실적인 결론도 나올 수 없음이 명백했다.  - P177

전면적 내전이란 곧 프랑코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의미했다. 모두들 이 점을 걱정하였다. 내가 사람들 이야기를통해 추측해 본 바로는, 당시에 전국노동자연맹 조합원들은 오직 두 가지만을 바라고 있었다―사실 처음부터 두 가지만 바랐다. 즉 전화교환소의 반환과 혐오스러운 치안대의 무장해제였다. 만일 헤네랄리테에서 이 두 가지 요구 사항과 식량으로폭리를 취하는 짓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하면, 바리케이드는 두시간 내에 철거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헤네랄리테는 굴복할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흉흉한 소문들이 돌았다. 발렌시아 정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기 위해 6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5천 명의 무정부주의자와 통일노동자당 병력이 아라곤 전선을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 소문들 가운데 첫번째 것만이 사실이었다. 관측탑에서는 나지막한 잿빛 군함들이 항구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선원 출신인 더글러스 모일은 그것이 영국 구축함같다고 했다.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영국 구축함들이었다. - P178

그 건물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며 보낸 그 지루하고 악몽 같은 저녁이 기억 난다. 우리는 정문에 강철셔터를 내리고, 건물개조 공사를 하다 남은 석판으로 그 뒤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어 무기를 점검했다. 맞은편 폴리오라마 지붕에 있는 소총 여섯 자루를 빼면 스물한 자루의 소총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자루는 불량이었다. 총알은 소총마다 쉰 발 정도씩 돌아갔고, 수류탄도 몇 십 개 있었다. 그 외에는 피스톨과 리볼버 몇 자루밖에 없었다. 일이 터질 경우 여남은 명이 카페 모카를 공격하겠다고 자원했다. 주로 독일인들이었다. 물론 새벽에 지붕에서 기습 공격을 시도해야만 했다. 수적으로는 우리가 열세였으나 사기는 더 높았다. 설사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는다 해도 우리는 상대편 건물 안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건물 안에는 초콜릿 몇 조각 외에 식량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물 공급도 차단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 P179

나는 기분도 몹시 나쁜데다가, 예순 시간 정도 잠도 제대로못 잔 탓에 몹시 지쳤다. 늦은 밤이었다. 사람들은 아래층 바리케이드 뒤의 바닥에 흩어져 자고 있었다. 위층에는 소파 하나가들어가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응급 치료소로쓸 작정이었다. 물론, 건물에서는 요오드나 붕대를 찾을 수가없었다. 아내는 혹시 간호사가 필요할까 해서 호텔에서 우리 건물로 내려와 있었다. 나는 소파에 누웠다. 모카를 공격하기 전에 삼십 분이라도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격을 하다가 죽을수도 있었다. 피스톨 때문에 무척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허리띠에 찬 피스톨이 등허리를 계속 찔러댔다. 그 다음에 기억나는것은 아내가 내 곁에 서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며 잠을 깼다는것이다. 날이 환했다. 간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인민전선 정부는 통일노동자당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수도도 끊기지않았다. 거리에서 간헐적으로 총소리가 들리는 것 외에는 모든것이 정상적이었다. 아내는 차마 나를 깨우지 못하고, 앞쪽 어느 방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서 잤다고 했다. - P180

나도 지붕의 내 위치로 돌아갔다. 역겨움과 격분이 강렬하게돌려왔다. 이런 사건에 참여하게 되면 미약하나마 스스로 역사를 만드는 셈이 되니 의당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잘한 물리적 일들이 늘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전투 내내 나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기자들이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내놓는 올바른 상황 <분석>이란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내가 주로 생각했던 것은 이 비참한 내분의옳고 그름이 아니라, 단지 밤낮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지붕에 앉아 있는 일의 고생과 권태,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는 배고픔뿐이었다. 사실 우리는 월요일 이후로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못했다. 내 마음속에는 이 일이 끝나자마자 전선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내내 자리잡고 있었다.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백십오 일 동안 전선에 있었다. 그런 후에 약간의 휴식과 안락을 찾아 바르셀로나에 왔다.  - P181

다음날, 사방에 깔린 돌격대가 정복자들처럼 거리를 활보했다. 정부는 주민이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위압감을 주기 위해 힘을 과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만일 다시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을 두려워했다면 돌격대가 병영에서 나와이렇게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어쨌든 홀륭한 부대였다. 내가 스페인에서 본 부대 가운데 최고라 할 만했다.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 <적>이긴 했지만, 나는 그들의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경탄 비슷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아라곤 전선의 남루하고 무장도 형편없는 의용군의 모습에익숙했기 때문에 공화국에 이런 부대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들은 신체적으로만 정예부대가 아니었다. 내가 가장 놀랐던이유는 그들의 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제 소총>(이 소총들은 소련이 스페인에 보낸 것이지만, 미국에서 제조된것으로 여겨진다)으로 알려진 신형 소총으로 무장했다. 나는 그소총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았다. 완벽한 소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가 전선에서 사용하던 형편없이 낡아빠진 나팔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 P186

발렌시아 정부는 바르셀로나 전투를 통해 오랫동안 찾던 구실을 얻었다. 카탈로니아를 좀더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구실이었다. 정부는 노동자 의용군들을 해산시켜 인민군에 재배치할 계획이었다. 스페인 공화국 국기가 바르셀로나 전역에서 나부꼈다. 나는 파시스트 참호를 본 이래로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노동자 계급 거주지의 바리케이드들은 철거되었다. 그러나 바리케이드라는 것이 쌓는 것보다 부수는 것이 훨씬 어려웠기 때문에 대충 치워졌다. 통일사회당 건물들 밖에 있는 바리케이드는 그대로 두어도 좋다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바리케이드가 6월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치안대들은 여전히 전략적 거점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자연맹의 요새에서 대규모의무기가 몰수되었다. 물론 몰수되지 않은 무기도 많았을 것이다.
《라 바탈랴》는 계속 발간되었다.  - P187

나는 지금까지 바르셀로나 전투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어떤기분을 느꼈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낯선 느낌을 제대로 전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때를 돌이켜볼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당시에 우연히만났던 사람들의 모습, 갑자기 내 시야에 흘끗 들어온 민간인의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의미 없는 소동으로비칠 뿐이었다.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람블라스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던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장바구니를 들고하얀 푸들을 끌고 갔다. 한두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는 소총이시끄럽게 땅땅거렸다. 물론 그 여자는 귀머거리였을 수도 있다. - P191

그리고 완전히 텅 비어버린 카탈루냐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던 남자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는 양손에 하얀 손수건을 하나씩 쥐고 흔들었다. 모두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도 떠오른다. 그들은 한 시간 가량이나 카탈루냐 광장을 건너려고 하다가결국 건너지 못했다. 그들이 모퉁이의 골목길에서 나타나기만하면 콜론 호텔의 통일사회당 기관총 사수들이 사격을 개시하여 그들을 도로 쫓아버렸다. 이유를 모르겠다. 그들은 분명히무장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들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폴리오라마 위에 있는 미술관에서관리인 노릇을 하던 작은 몸집의 남자도 떠오른다. 그는 그 사태를 사교 행사로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영국인이 그를 찾아준것에 몹시 기뻐하였다. 영국인은 아주 심파티코" 하다고 그는 말했다.  - P191

그러나 그 가운데 10분의 9는 사실이 아니라 해도 과장이아닐 것이다. 당시에 신문에 난 기사 대부분은 멀리 떨어져 있던 기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사실 보도로서 부정확할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왜곡할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문제의 어느 한 측면만이 대중에게 전달되도록 허용되었다. 당시에 바르셀로나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나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포되어 온 거짓말들 가운데 많은 부분에 대해 반박할 수있을 만큼은 보고 들었다. 이전 장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논란이나 혼란스러운 이름(꼭 중국 전쟁에 나오는 장성들 이름 같다)의 수많은 정당과하급단체들에 관심이 없다면 빼놓고 읽어도상관없다. 정당 내부의 논쟁에 너무 자세하게 파고드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오물 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능한 한 진실을 확립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먼 도시에서 벌어진 이 지저분한 싸움이 보기보다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93

바르셀로나 전투에 대하여 완벽할 정도로 정확하고 편견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필요한 기록이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대량의 비난 문건과 정당 선전물 외에는 검토할 자료가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 그리고 다른 목격자들에게서 들은, 그나마 믿을 만한 소문 외에는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나는 극악한 거짓말들 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있다. 그것이 넓은 시야로 이 일을 조망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있을 것이다.
우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전투가 시작되기 얼마 전부터 카탈로니아 전역에 긴장이 팽팽했다. 이 책 앞장들에서 이미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해 약간 이야기하였다.  - P194

나는 지금까지 바르셀로나 시가전에 대해 객관적으로 쓰려고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가 없다. 실질적으로 어느 한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어느 편인지도 분명할 것이다. 또한 나는 이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불가피하게 사실을 왜곡시켰을지 모른다. 스페인 전쟁에 대하여 정확하게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선전용이 아닌 문건이 거의 없기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을 편견이나 내가 저질렀을 실수에 대해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정직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이 외국 언론, 특히 공산주의계열의 언론에 나온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P206

그러나 이들이 파시스트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지붕에 올라가서 물어보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는 단순히 자기가 들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리고 그 말이 공식적 설명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사실 그는 기사 앞 부분에서 선전부 장관을 경솔하게 언급함으로써 대부분의 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무심코 드러냈다. 스페인에 온 외국 기자들은 대책 없이 선전부에 휘둘렸다.
그러나 나는 그 부서의 이름만으로도 벌써 경계를 해야 한다고생각한다. 스페인의 선전부가 바르셀로나 사태에 대해 객관적인 설명을 할 가능성은 고(故) 카슨 경이 1916년 더블린 봉기에 대해 객관적인 설명을 할 가능성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기때문이다.
치지 마나는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바르셀로나 전투 설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했다. 여기에 덧붙여 통일 - P219

220노동자당이 프랑코와 히틀러의 돈을 받는 비밀 파시스트 조직이라는 일반적 비난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공산주의 계열 매체에서는 이런 비난이 되풀이되었다. 특히1937년 초부터 심해졌다.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범세계적인 운동의 일환이었다. 통일노동자당도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주의〉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간주되었다. 《프렌테로호》(발렌시아의 공산주의 신문)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는 정치적 원칙이 아니다. 트로츠키주의는 공식적인 자본주의적 조직이며, 인민에 대항하여 범죄와 파업을 자행하는 파시스트 테러리스트 집단이다.〉통일노동자당은 파시스트들과 동맹한〈트로츠키주의> 조직이며, <프랑코의 제5열>의 일부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처음부터 이런 비난의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권위적인 목소리로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비난에는 최대한의 인신 공격과 전쟁에 미칠 영향을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벽한 무책임성이 뒤따랐다.  - P220

사실 나는 후방에서 그들을 향해 쏟아부은 이런 비난이 실제로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의 사기를 꺾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효과를노린,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반파시스트 연합보다 정당간의 정치적 원한을 더 중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은 결국 이런 뜻이 된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수만 명의 사람들, 외국에서 그들에게 공감하여 그들을 도우러 온 많은 사람들―그 대부분은파시스트 국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그리고 수천 명의의용군이 모두 파시스트에게 매수된 엄청난 규모의 첩자 집단이다. 이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그리고 통일노동자당의 과거 역사는 이런 주장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통일노동자당의 모든지도자들은 오랜 기간 혁명가로 활동해 왔다.  - P221

또한 전쟁 동안에도 친파시스트적인 활동의 기미는 없었다.
통일노동자당이 좀더 혁명적인 정책을 다그침으로써 정부의 힘을 분열시키고, 그럼으로써 파시스트들을 도왔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다―나는 결국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게 되었지만. 개혁주의적인 정부가 통일노동자당과 같은 정당을 귀찮은 존재로여기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직접적인 반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통일노동자당이 정말로 파시스트단체였다면 그 의용군이 왜 충성을 유지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1936년-37년의 겨울 동안 견디기 힘든 조건에서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 속하는 8천 내지 만 명의 병사들은 전선의 주요부분을 담당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한번에 너댓 달씩 참호에있었다. 그들이 왜 그냥 전선에서 빠져나오거나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는지 알기 힘든 일이다.  - P222

마지막으로 통일노동자당이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에 대해 살펴보자. 이 말은 이제 더욱더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다. 이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가 매우 쉽고, 또 실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여기서 잠깐 그말의 정의를 내려볼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세가지 분명한 사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1) 트로츠키처럼 일국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세계 혁명>을 옹호하는 자.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혁명적 극단주의자이다.
(2) 트로츠키가 우두머리로 있는 실제 조직의 구성원(3) 혁명가로 가장한 파시스트. 특히 소련에서 사보타지 활동을 하며, 전체적으로 좌익 세력을 분열시키고 그 힘을 약화시키는 자.
(1) 의 의미에서 통일노동자당은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이야기될 수도 있다. 영국의 독립노동당, 독일의 사회주의노동당, 프랑스의 좌익 사회주의자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통일노동자당은 트로츠키나 트로츠키주의자(<볼셰비키-레닌주의자> 조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P227

외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열다섯 내지 스무명 정도였다)은 처음에는 통일노동자당에서 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가장가까운 정당을 골랐지만 그 당원이 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그 추종자들에게 통일노동자당 정책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당의 간부직에서 숙청되었다. 그러나 몇 명은 의용군에 남았다. 마우린이 파시스트에게잡힌 후 통일노동자당 지도자가 된 닌은 한때 트로츠키의 비서였다. 그러나 몇 년 전 그를 떠나, 여러 반대파 공산주의자들을지난날의 정당인 노동자농민연합과 합하여 통일노동자당을 결성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매체는 닌이 한때 트로츠키와 관련이있었다는 사실을 이용해 통일노동자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라면 영국 공산당이야말로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스트래치는 한때 오스왈드 모슬리 "
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 P228

(2) 의 의미, 즉 유일하게 정확히 정의된 의미에서 보자면, 통일노동자당은 분명히 트로츠키주의가 아니다. 이런 구별은 중요하다.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다수는 (2)의 의미의 트로츠키주의자는 반드시 (3) 의 의미의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라는 것은 파시스트의 간첩 조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러시아의파업에 관한 재판에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어떤사람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살인자, 선동 분자 등으로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좌익적 관점에서 공산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받기 - P228

‘쉽다. 그렇다고 혁명적 극단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모두 파시스트에게 매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그것은 지역적 형편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맥스턴이 앞서 언급한 대표단과 함께 스페인에 갔을때, <베르다드》, 《프렌테 로호》를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 신문들은 즉시 그를 〈트로츠키-파시스트〉, 게슈타포의 간첩 등으로비난했다. 그러나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비난을 똑같이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영국 공산주의 계열의 언론에서맥스터는 그저〈노동계급의 반동적인 적>으로만 묘사된다. 이런 표현은 막연하면서도 편리하다. 물론 그 이유는 영국 공산주의 언론이 몇 번 뜨거운 맛을 보면서 문서비방법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난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는 나라에서는 그 같은 비난이 되풀이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 P229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 문제를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길게논의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내란이라는 엄청난 불행에 비추어보면 이런 종류의 정당간 내분은, 설사 불의와 거짓 비난이 불가피하다 해도, 사소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런 종류의 비방과 언론을 통한 공세,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정신의 습관은 반파시스트 대의에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잠깐이라도 살펴본 사람은 날조된 비방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는 공산주의 전술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늘날 핵심어는 <트로츠키 - 파시스트>지만 전에는 <사회주의 - 파시스트였다. 러시아 국사범 재판에서 레옹 블룸과영국 노동당의 저명한 당원들을 포함한 제2인터내셔널이 소련 - P229

230에 대한 거대한 군사 침공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입증된 지불과 육, 칠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기꺼이 블룸을 지도자로 받아들인다.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당에 들어오기 위해 야단이다. 아무리 종파적인관점에서라지만, 나는 이런 따위의 일이 도움이 될까 의심스럽다. 한편 <트로츠키-파시스트>라는 비방으로 인해 증오와 불화가 생긴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디에서나 하급 공산주의자들은 지도자들의 말에 이끌려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한몰상식한 마녀 사냥을 벌인다. 통일노동자당과 같은 유형의 정당들은 단지 반공산주의 정당이라는 이유로 몹시 불리한 처지에 몰린다. 세계 노동 계급 운동에는 이미 위험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평생 사회주의에 헌신해 온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조금이라도 더 쌓이게 되면,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혐의처럼 날조된 혐의들이 조금이라도 더 쌓이게 되면, 그 분열은 치유 불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다.  - P230

예를 들어 내가 공산당 당원과 더불어 바르셀로나 시가전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다시 말해 <좋은〉 공산주의자는 내가 사실을 진실하게 설명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의 〈노선〉을 착실하게 따른다면,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기껏해야 내가 가망 없을 정도의 착각에 빠져 있으며, 사건 현장으로부터 1천 5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데일리 워커》의 머릿기사를 흘끗 본 사람이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일을 나보다 더잘 안다고 주장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논쟁이 있을 수 없다. 필요한 최소한의 합의에도 이를 수 없다. 맥스턴같은 사람들이 파시스트에 매수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되겠는가? 진지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유일한 목적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체스를 두다가 상대가 방화나 중혼죄를 지었다고 갑자기 악을 써대는 것과 같다. 진짜 쟁점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 비방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 P231

우리가 전선으로 돌아간 것은 바르셀로나 시가전이 끝나고사흘쯤 뒤였을 것이다. 시가전이 끝나고 난 후라, 그러니까 신문에서 헐뜯기 경쟁을 보고 난 후라, 예전처럼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인 관점으로 그 전쟁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스페인에서 몇 주 이상을 보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어느 정도씩은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온 첫날 만났던 신문 특파원이생각났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사기요」 그때 나는 그 말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에는(12월이었다) 그 말이 진실이 아니었다. 5월에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 점점 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모든 전쟁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락해 간다.
개인적 자유나 진실한 언론 보도는 군사적 효율성과는 절대로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232

그러나 프랑코는 단순히 이탈리아와 독일의 꼭두각시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봉건적 대지주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케케묵은 교권주의적·군국주의적 반동을 표방하는 존재였다. 인민전선이 사기일지는 모르나, 프랑코는 시대 착오였다. 오직 백만장자나 낭만주의자들만이 그가 승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더욱이 파시즘의 국제적 위신에 타격을 주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일, 이년 전부터 그 문제가 악몽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1930년 이래 파시스트들은 늘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그들이 매를 맞을 차례였다. 누구한테서 매를 맞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프랑코와 그의 외국인 용병들을 바다로 몰아낼 수만 있다면, 설사 스페인 자체가 숨막히는 독재에 시달리고 유능한 인사들 모두가 감옥에 갇힌다 해도, 그 승리는 세계 정세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려놓는 엄청난 일이 될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전쟁은 이길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 P234

병사들은 나를 다시 눕혔고, 누군가가 들것을 가져왔다. 총알이 목을 관통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총알이 목 한가운데를 관통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나 짐승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맥이 날아갔구나」 나는 생각했다. 경동맥이 잘렸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죽음을 예상한 시간이 2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는 것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처음 떠올린 것은, 다분히 관습적이게도, 아내였다. 두번째 떠오른 것은 세상 - 생각해 보면 결국 무척이나 마음에드는 세상이었다――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격렬한분노였다. 나는 그 감정을 매우 생생하게 느낄 만한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불운에 격분했다. 얼마나 의미 없는일이냐! 전투도 아니고 이 염병할 참호 한 귀퉁이에서 순간의부주의 때문에 죽게 되다니! - P240

휴가를 나온 의용병 두 명이 친구를 면회왔다가 나를 알아보았다. 내가 전선에 나간 첫주에 만났던 병사들이었다. 열여덟 살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내 침대 옆에 어색하게 서서 할말을 생각해 내느라 애를 썼다. 이윽고 내가 부상을 당해 안타깝다는 마음을보여주기 위해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일제히 꺼내 나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돌려줄 틈도 없이 달아나버렸다. 정말 스페인 사람들다웠다! 나중에야 나는 시내 어디를 가도 담배를 살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일주일치 배급받은 것을 몽땅 털어주고 간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일어나서 한쪽 팔을 삼각건에 걸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냥 늘어뜨리고 있을때보다 훨씬 더 아팠다. 한동안은 쓰러질 때 입은 상처로 인해몸 안의 통증이 심했다. 게다가 목소리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한 순간도 총상 때문에 아팠던 적은 없다. 보통 이런 식인 것 같다. 총알이 주는 엄청난 충격 때문에 국지적으로 감각이 마비되는 것이다.  - P243

그러나 결국은 그가 틀렸다. 한두 달 가량 나는 속삭이는 정도로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어느 날 갑자기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른 성대가 <보정>을 해준 것이다.
팔의 통증은 총알이 목 뒤의 신경 가닥들을 끊어놓았기 때문에생긴 것이었다. 신경통처럼 쿡쿡 쑤셨다. 한 달 가량 계속해서아팠다. 특히 밤에 통증이 심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오른손의 손가락들도 반쯤은 마비되었다. 다섯 달이 지난 지금도 검지손가락에는 감각이 없다. 목 부상의 결과치고는 희한하기는하지만,
내 부상은 작으나마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여러 의사가 혀를끌끌 차며 부상을 살피고는 「케 수에르테! 케수에르테!」" 하고중얼거리곤 하였다. 한 의사는 아주 권위 있는 태도로 총알이<약 1밀리미터 정도〉 동맥을 벗어났다고 말했다. 그 의사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 P249

내가 바르셀로나에 머물러 있던 마지막 몇 주일 동안, 그곳에는 독특하고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의심, 공포, 불안,감추어진 증오의 분위기였다. 오월 전투는 지울 수 없는 후유증을남겼다. 카발례로 정권의 붕괴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확고하게정권을 잡았다. 치안 책임은 공산주의자 각료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 즉시 정적들을 숙청해 버릴 것임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진행될지 상상도 할 수없었다. 그런데도 늘 막연한 위기감을 느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눈앞에 닥쳤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음모와 아무 관계가없는 사람이라도 꼭 음모에 가담한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강요하는 분위기였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카페 구석 자리에서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면서 혹시 옆에 앉은 사람이 경찰첩자가 아닌가 의심하는 일뿐인 것 같았다. - P250

당시의 악몽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늘 바뀌는 소문으로 인한 불안감, 검열당하는 신문과 사라지지 않는 무장 병력으로 인한 불안감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 불안감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당시 분위기에 걸맞는상황이 현재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아직 정치적 불관용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물론 영국에도 사소한정치적 박해는 존재한다. 만일 내가 광부라면 사장에게 공산주의자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훌륭한정당인〉, 즉 대륙 정치에 등장하는 폭력배나 하수인 같은 인간들은 드물며,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숙청>하거나 〈제거〉한다는 생각은 아직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권좌에 올랐다.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이위험에 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254

그 마지막 여행의 세세한 내용들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나는 그전 몇 달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좀더관찰을 하려는 태도였다. 나는 제대증을 받았다. 29사단 직인이찍혀 있었다. 〈무능〉이라고 적힌 의사의 증명서도 받았다. 이제마음대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제 비로소 스페인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바르바스트로에서 하루를 지체했다. 기차가 하루에 한번밖에없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잠깐 지나가면서 바르바스트로를 본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전쟁의 일부로 보아 넘겼던 것 같다.
곳곳에 진창이 널린 잿빛의 차가운 곳. 굉음을 내는 트럭과 초라한 병사들이 가득한 곳. 그런데 이제는 묘하게도 달라 보였다. 나는 바르바스트로를 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발견하였다.  - P260

꼬불꼬불하고 재미있는 거리, 오래된 돌다리, 사람 키 높이의 커다란 술통이 즐비한 포도주 가게, 사람들이 수레바퀴, 단검, 나무 숟가락, 염소가죽 물통을 만들고 있는 재미있는 반지하 상점들. 나는 염소가죽으로 물통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주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털을 없애지 않고 털이 있는 부분을 안쪽으로 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물통으로 물을 마시면 염소털에 의해 불순물이 걸러진 물을 마시는 셈이었다. 나는몇 달 동안 염소 물통으로 물을 마시면서도 그것을 몰랐다. 바르바스트로 뒤쪽으로는 옥빛의 얕은 강이 흘렀다. 강변에는 수직의 바위 절벽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바위를 파서 집을 지어놓았다. 따라서 침실 창문에서 침을 뱉으면 수십 미터 아래 강물로 떨어졌다. - P260

레리다에는 곧 부서질 것 같은 낡은 건물들의 처마장식 위에 수없이 많은 제비들이 둥지를 틀었다. 조금 떨어진곳에서 보면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장식물처럼 보였다. 어떻게지난 여섯 달 동안 그런 것을 보지 못했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제대증을 호주머니에 넣자 다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관광객이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거의 처음으로 내가 오랫동안 가보고 싶어하던 나라 스페인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리다와바르바스트로의 조용한 뒷골목에서 나는 잠깐이나마 모든 사람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아득한 소문과 같은 나라 스페인을 본것 같았다. 하얗고 뾰족뾰족한 산맥, 염소지기,종교재판을 하던 지하감옥, 무어인의 궁전, 꾸불꾸불 줄지어 가는 검은 노새, 잿빛의 올리브나무와 레몬숲, 머리에서 어깨까지 검은 베일을 덮어쓴 처녀들, 말라가와 알리깐떼의 포도주, 성당,추기경, 투우,집시,세레칸테. 간단히 말해 이것이 스페인이었다. - P261

유럽국들 가운데 나의 상상력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았던 나라였다.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어지러운 전쟁의 와중인데다가 계절도 겨울인지라 이 북쪽 한 귀퉁이만 보게 된 것이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갔을 때는 시간이 늦었다. 택시가 없었다.
마우린 요양소는 시 경계선 바로 너머에 있었지만 거기까지 갈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콘티넨털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저녁을 먹었다. 아버지와 같은 풍모를 지닌 웨이터와 떡갈나무로 만든 물병에 대해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그 식당에서는 구리를 감은 떡갈나무 병에 포도주를 담아왔다. 나는 그것을 하나사서 영국에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 P261

그러나 왜 사람들을 체포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통일노동자당의 불법화는 확실한 소급 효과를 가지는 것 같았다. 통일노동자당은 이제 불법이다, 따라서 과거에거기에 소속되었던 사람들도 현재의 법을 어기고 있는 셈이었다. 늘 그렇듯이 체포된 사람들은 정식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발렌시아의 공산주의 계열 신문들은 엄청난 <파시스트음모〉에 대한 기사로 열을 올렸다. 적과 무전으로 내통을 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서명한 문서를 주고받았다는 등등의 이야기였다. 전에도 이미 접해본 적이 있는 기사였다. 중요한 점은 그 기사가 오직 발렌시아 신문들에만 실렸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신문에는 공산주의 계열이든, 무정부주의 계열이든, 공화주의 계열이든 상관없이 <파시스트 음모> 기사나 통일노동자당 불법화에 대한 기사가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아마 내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에 대한 혐의의 성격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스페인 신문이 아니라하루 이틀 뒤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영국 신문들을 통해서였다.  - P264

나는 줄곧 되뇌었다. 왜 나를잡아간단 말이야?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나는 통일노동자당의당원도 아닌데. 물론 나도 5월 시가전 때 무기를 소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 무기를 소지한 사람은 대략 4, 5천 명은 될 터였다. 게다가 나는 극도로 수면이 부족한 상태였다.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내 말을들어주지 않았다. 아내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범죄자 검거가 아니다. 단지 공포 정치일 뿐이다. 당신은 어떤 특정 범죄를 저지른것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는 죄를 지었다. 당신이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 복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옥에 갈 만한 죄가된다. 법을 지키기만 하면 안전할 거라는 영국식 사고 방식에매달려봤자 소용없다. 법은 경찰이 마음먹는 대로 만들어졌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몸을 숨기고 통일노동자당과 관계되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다. 우리는 호주머니에 있는 서류를 뒤졌다. - P270

우리는 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밤이면 추적당하는 도망자신세였지만, 낮에는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통일노동자당 지지자들을 숨겨준다고 알려진 항구의 모든 집은 감시를 당했다. 어쨌든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호텔이나 하숙집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호텔 주인은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즉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포고를 내렸기 때문이다. 결국 한데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큰 도시였기 때문에 낮에는 상당히 안전한 편이었다. 거리에는 치안대원, 돌격대원, 단총부대, 일반 경찰관들이 우글거렸다. 그외에도 사복을 입은 첩자들은 또 오죽 많았을까.  - P274

그들 가운데 혹 내가 경찰에서 <수배 중인 사람임을 눈치챈 사람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행동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독일인과 공개적으로 악수하는 것과 같았다. 아마 그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파시스트의 첩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악수까지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일을 기록하는 것은, 그것이 왠지 스페인적인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최악의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스페인 사람들의 아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페인에 대해서 매우 나쁜 기억들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스페인 사람에게 정말로 화를 낸 기억은 두 번밖에 안된다. 그 두 번도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관대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들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다. 이 점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견딜 만한 형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 P285

결국 우리는 무사히 국경을 건넜다. 기차에는 일등칸도 있었고 식당칸도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카탈로니아에는 최근까지도 기차의 등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사두 명이 기차를 돌아다니며 외국인들 이름을 적었다. 그러나 우리는 식당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품위 있는 사람들이라고 안심한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지배하던 여섯 달 전만 해도 프롤레타리아처럼 보여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페르피냥에서 스페인의 세르베레로 가는 도중에 같은 칸에 탄 한 프랑스 상인이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런 차림으로 스페인에 들어가면 안 되오. 칼라와 타이를 떼시오. 바르셀로나에 가면 그곳 사람들이 그것을 떼어버릴 것이오」그의 말은 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카탈로니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났다. 국경에서는 무정부주의자 경비병이 옷을 잘 차려입은 프랑스인 부부를 돌려보내기도 했다.  - P291

그런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부르주아처럼 보이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여권 심사자들은 용의자 명단에 우리 이름이 올라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경찰의 비효율성 때문에 우리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맥네어의 이름조차 없었다. 우리는 머리에서발끝까지 수색을 당했지만 범죄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나오지않았다. 예외라면 내 제대증 정도였다. 그러나 나를 수색한 단총부대들은 29사단이 통일노동자당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덕분에 우리는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꼭 여섯 달만에나는 다시 프랑스 땅을 밟았다. 스페인에서 가지고 나온 기념품은 염소가죽 물통과 아라곤의 농민이 올리브 기름을 태우는 데 쓰는 아주 작은 쇠등잔뿐이었다. - P291

우리는 바니월에 사흘 있었다. 이상하게도 불안정한 시간이었다. 폭탄, 기관총,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늘어선 줄, 선전, 음모 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한적한 어촌에서 우리는 깊은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껴야 마땅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스페인과의 거리는 멀어졌을지만, 스페인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들이 뒤로 물러나 적당한 비율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쏜살같이 우리 뒤를 덮쳐, 모든 것이 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페인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꿈을 꾸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스페인에서 나가면> 지중해 근처의 어딘가로 가서 한동안 조용히 지내며 낚시라도 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막상 그런곳에 오니 따분함과 실망뿐이었다. 날씨는 쌀쌀했다. 바다로부터 끈질기게 바람이 불어왔다. 물은 탁하고 물결은 거칠었다.
항구 둘레를 따라 재, 코르크, 생선 내장이 더껑이를 이루어돌에 부딪히고 있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아니 오히려 누군가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해도, 우리 둘 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투옥된 상태이기를 바랐다.  - P293

외적인 사건들은 약간씩 기록을했지만, 그 사건들이 나에게 남긴 느낌은 기록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글로는 전달할 수 없는 광경이나 냄새, 소리와 뒤섞여 있다. 참호의 냄새, 가없이 뻗어나가는 서광, 땅땅거리는싸늘한 총소리, 폭탄의 굉음과 섬광. 지난 12월, 사람들이 아직 혁명을 믿고 있던 시절의 바르셀로나를 찾은 아침의 맑고 차가운 빛, 병영 연병장에서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음식을 사기 위한 줄과 검붉은 깃발과 스페인 의용군 병사들의 얼굴. 무엇보다도 스페인 병사들의 얼굴. 전선에서 만났지만 이제는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르는 사람들.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불구가 되고, 일부는 투옥되었겠지. 바라건대 그들 모두가 여전히 안전하기를, 그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들이 전쟁에서이겨 독일인,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할 것 없이 모든 외국인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역할에 무력함을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 P294

모두가 부담스런 생활비와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스페인에 갔다 오니 파리마저도 기운차게 번창하는 도시로 보였다.
박람회도 한창 활기를 띠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그곳을 찾지않았지만.
이어 다시 영국으로 왔다. 영국 남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산뜻한 풍경을 지닌 고장일 것이다. 그쪽을 지날 때, 특히임항 열차의 편안한 쿠션 위에 앉아 평화롭게 배 멀미로부터 회복되고 있을 때는,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 도시는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 P295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가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제복의 경찰관,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 P296

옮긴이의 말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자신의 『카탈로니아찬가가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책이라고 말했다(민음사 간행[동물농장』에 수록되어 있는 「나는 왜 쓰는가」참조). 물론 이 발언은 발언 이태 전에 나왔던 『동물농장』―― 우화적으로 에둘러간 정치 이야기에 비해 그렇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작가 스스로도 꺼림칙하면서도 결국 정당화할 수밖에 없었던 한 장(章)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는 뜻일 수도있다. 오웰은 이 <신문 기사 등을 인용한 긴 장><본 번역본에서는 11장)은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비난을 받은 트로츠키파를 변호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지만, <일이 년 시간이 지나면 보통독자들로선 흥미를 느끼지 못할 이런 장이 거기 끼어 있다는 것은 책을 망칠 것이 분명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트로츠키파의 억울함으로 인한 분노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예 그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오웰로서는 그 장을 생략할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 - P297

오웰은 이런 갈등에서 선택권을 슬며시 독자에게 넘긴다. 독자가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관심이 없다면 빼고 읽어도 좋다고허락해 준 것이다. 5장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오는데, 판본에따라서는 오웰의 말을 확대 해석하여 아예 5장과 11장을 부록으로 돌린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본 번역본이 원본으로 삼은, 1987년에 간행된 미국 하코트 브레이스사의 판본은 두 장을모두 본문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번역본 역시, 오웰의 책이 나오고 나서 두 세대가 지난 뒤에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간행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장 모두 본문에 포함시켰다. 그렇게 한 데에는 오웰의 <정치적> 의도를 존중해 주자는 의도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으로, 오웰이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독자가함께 경험해 나가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 P298

오웰은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애초에 왜 스페인으로 갔으며, 왜외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있었길래 스스로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긴 <정치적인〉 장을 쓰게되었을까? 오웰은 어떤 면에서는 시원시원하고 직선적인 작가이니만큼 이런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간단하고 추상적인 답을내놓기도 하지만(『카탈로니아 찬가』내에서 또는 「나는 왜 쓰는가」같은 답변서에서), 그 답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것이 옮긴이의 생각이다. 그런 간단하고 추상적인 답으로 만족할 독자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답이 가능했다면『카탈로니아 찬가』같은 분량의 책을 쓸 필요도 없지 않았겠는가.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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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깜깜할 때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젖은 채로, 소총과 탄약통까지 들고는 절대 될 수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오십 명에서 백 명 가량 되는 무장 군인들이 쫓아온다고 생각하니 언제라도 뛸 수 있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빨리 뛸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빨리 뛸 수도 있었다. 열심히 달아나고 있는데 마치 한 줄기 유성 같은 것이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스쳐갔다. 전진시 나보다 앞서 나아갔던 세 명의 스페인 병사였다. 그들은 아군 흉벽에 돌아가서야 발을 멈추었고, 나는 그때서야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는 다섯 명이 뭉쳐있으면 눈에 잘 띄어도, 한 명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을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다시 수색에 나서기로 했다. 나는 적의 외곽 철조망까지 갔다. 최선을 다해 그곳을 수색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수색은 아니었다. 줄곧 기어다녔기 때문이다.
호르헤나 히들스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기어서 돌아왔다. 호르헤와 히들스톤은 가장 먼저 응급 치료소로 후송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호르헤는 어깨에 경상을 입었고히들스톤은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한 총알이뼈를 몇 조각으로 부수어 버렸다. 그렇게 꼼짝 못하고 땅바닥에누워 있는데 옆에서 또 다른 수류탄이 터지며 그의 몸의 다른부분들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다행히 그는 회복되었다.  - P134

날이 많이 밝아졌다.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계속 내리는 비처럼 전선 몇 킬로미터에 걸쳐 무의미한 사격이 계속되면서 귀에 거슬리는 큰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황량해 보였다. 진흙으뒤덮인 늪지, 흐느끼는 포플러, 참호 바닥에 고인 황톳물.
지친 병사들의 얼굴은 면도를 못해 꺼칠했고, 뺨에는 흙탕물이줄줄 흘러내렸으며, 연기 때문에 눈까지 시꺼멨다. 개인호로돌아왔을 때 나와 참호를 함께 쓰는 세 사람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군장을 그대로 걸친 채였다. 진흙 범벅인 소총도 꼭움켜쥐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비에 젖었다. 참호 안이나 밖이나다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여기저기 뒤진 끝에 나는 간신히 불을 지필 만한 마른 장작 조각들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아껴두었던 시가를 피웠다. 그런 밤을 겪었는데도 시가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중에 우리는 그 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135

배급받은 식량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한 일이라고는 기껏 추위와 수면부족을 견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대부분의 전쟁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와서 좀더 긴 안목으로 그 시기를 돌아보면, 전선에 간 것이 다후회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페인 정부에 좀더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개인적인입장에서 볼 때, 그러니까 나 자신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전선에서 보낸 처음 서너 달은 내가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무익했다.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일종의 휴지 기간이었다. 이전에 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아마 앞으로 살게될 어떤 삶과도 다를 것이다. 그 시기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는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lll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39

요점은 내가 이 기간 내내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선은 바깥 세계와 거의 완전히 단절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지는 일들조차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었다. 대충 혁명가라 불러도 무방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데도 그랬다. 이것은 의용군 체제의 결과였다. 아라곤 전선에서 이 체제는 1937년6월 무렵까지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노동자 의용군들은노동조합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각각의 의용군은 비슷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가장 혁명적인 정서를 한곳으로 모으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는 우연히 정치적 의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그 반대의경우보다 더 정상으로 취급되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법 규모를 갖춘 것으로서는 서유럽에서 유일했다. 이곳 아라곤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는 만 명 정도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노동 계급 출신이었다. 모두들 똑같은 수준에서 생활하였으 - P139

며,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어울렸다. 이론적으로는 완전한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사회주의를 미리 맛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곳을 지배하는 정신적 분위기가 사회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 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자본주의 사회에 일반적인 계급 분리는 돈에 물든 영국의 분위기에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없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농민과 우리만 있었다.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게임 속에서의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한 국면일 뿐이었다. - P140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만큼은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아무리 욕했을지라도 나중에는 뭔가 신기하고 귀중한 어떤 것과 접해보았다는 사실을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인것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지금은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文士)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와는 아주 다른 사회주의에 대한 비전도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 - P140

등 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몇 달이 나에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스페인의용군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축소판이었다. 아무도 자기 이익에 급급해하지 않는 공동체,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특권이나 아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의 서막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것 같다. 결국 나는 그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의 수립을 갈구하는 내 욕망은 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내가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있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타고난 품위와 변함 없는 무정부주의적기질 때문에, 기회만 얻는다면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조차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줄 사람들이다. - P141

물론 당시에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주로 느끼는 것은 권태, 더위, 추위, 더러움, 이, 궁핍, 이따금씩의 위험 따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뭇 다르다. 당시에는 그토록 무익하고 지루할 정도로 평온하게 느껴지던 시기가 지금은 매우소중하다. 그 시기는 내 인생의 다른 시기들과는 워낙 달라서, 빌써부터 마술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속성은 보통 오래된 기억에만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앞장들에서 조금이라도 전달됐기를 바랄 뿐이다. 내 마음의 모든기억들은 겨울 추위, 의용군 병사들의 넝마가 된 제복, 스페인 - P141

사람들의 달걀 같은 얼굴, 모르스 신호 같은 기관총 소리, 지린내와 빵 썩는 냄새, 더러운 접시에 담아 후루룩 들이키던 함석내 나는 콩스튜 등에 연결되어 있다.
고양이만한그 시기 전체가 이상하리만큼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되돌아볼 가치도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다시 살고 있다. 나는 다시 몬테 포세로의 개인호 속에 들어가 침대 역할을 하는 석회암 선반에 누워 있다. 내 어깨뼈 사이에 코를 처박고 자는 젊은 라몬이 시끄럽게 코를 곤다. 더러운 참호 안을 비틀거리며 걷는다. 안개는 차가운 증기처럼 내주위에서 소용돌이친다. 산비탈의 갈라진 틈 사이로 반쯤 기어올랐다. 균형을 잡고 땅에서 야생 로즈메리의 뿌리를 캐려고 애쓴다. 머리 위 높은 곳에서는 의미 없는 총알들이 노래를 한다.
나는 몬테 오스쿠로 서쪽 저지대의 자그마한 도금양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엎드려 있다. 옆에는 콥과 보브 에드워즈, 스페인 병사 셋이 있다. - P142

버마 북부의 만달라이에서 기차를 타면 마이미오까지 갈 수있다. 마이미오는 샨 고원 지대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중요 주둔지이다. 그 기차 여행은 묘한 경험이었다. 기차는 동양 도시의전형적인 분위기 속에서 출발한다. 이글거리는 태양, 먼지 낀종려나무, 생선과 양념과 마늘 냄새, 질퍽한 열대 과일, 떼를지어 몰려다니는 시커먼 얼굴의 사람들. 이런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기차 안에서도 그 분위기는 그대로 유지되는 느낌이었다. 기차가 해발 천이백 미터의 마이미오에 이르렀을 때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만달라이에 있게 된다. 그러나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마치 지구의 반대편에 들어선 기분이든다. 갑자기 영국에서와 같은 시원하고 달콤한 공기가 코로 들어온다. 주위에는 푸른 풀밭, 고사리, 전나무가 펼쳐져 있다. 뺨이 발그레한 고지의 여자들은 바구니에 담은 딸기를 판다. - P144

전선에서 석 달 반을 보내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자 그 기차여행이 생각났다. 그때처럼 분위기가 놀랄 만큼 갑자기 바뀌어버린 것이다.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줄곧 전선의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흙, 소음, 불편함, 넝마가 된 옷, 궁핍감, 동지애와 평등, 바르바스트로를 떠날 때부터 이미 의용군으로 만원이던 기차는 역에 설 때마다 농민을 더 태웠다. 어떤농민은 야채 꾸러미를 들었고, 어떤 농민은 겁에 질린 닭의 발을 쥐었고, 어떤 농민은 배낭을 들고 탔다. 바닥에 놓인 배낭들은 둥글게 말리며 꿈틀거렸는데, 알고 보니 그 안에는 살아 있는 토끼들이 가득했다. 마지막에는 양떼가 밀려 들어와 빈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의용병들은 혁명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노랫소리에 열차의 덜그덕거리는 소리도 묻혀버렸다.  - P145

군중의 변화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용군 제복과 푸른 작업복들은 거의 사라졌다. 모두들 스페인 재단사들이 만든 멋진여름 양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나 뚱뚱한 부자,
우아한 여자, 늘씬한 차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자가용은 없는것 같았다. 그래도 한다하는 사람들은 차를 마음대로 부렸다.)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는 거의 없던 새로운 인민군 장교들이놀랄 만큼 많이 돌아다녔다. 인민군은 장교가 열에 하나꼴이었다. 이 장교들 가운데 일부는 의용군에서 복무하다가 기술 교육을 위해 후방으로 불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의용군에 입대하는 대신 전쟁 학교를 택했던 젊은이들도 다수 있었다. 이들장교와 부하의 관계가 부르주아 군대와 똑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사회적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보수와 제복의 차이로 표현되었다. 사병들은 거친 갈색 작업복을 입었고, 장교들은 우아한 카키색 제복을 입었다. 영국군 장 - P146

교복처럼 생겼는데, 허리가 좀더 잘록했다. 아마 스무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전선에 가본 적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모두들허리에는 자동권총을 차고 있었다. 우리가 전선에 있을 때는 애걸로도, 돈으로도 구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가 거리를 걸어갈때마다 사람들이 우리의 더러운 외관을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물론 전선에 몇 달 있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몰골은 형편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 내가 허수아비처럼 비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가죽 저고리는 넝마나 다름없었다. 모직 모자는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자꾸밑으로 내려와 한쪽 눈을 가렸다. 군화 밑창은 거의 다 떨어져나가고, 윗덮개도 끝자락이 옆으로 벌어져 보기 흉했다. 우리모두 대체로 비슷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더러웠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도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지난 석 달 동안 그곳에뭔가 야릇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 P147

며칠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증거들을 통해 내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도시 전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사람들, 즉 민간인들이 전쟁에 관심을 잃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빈부 상하의 계급 구분이라는 일반적인 사회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무관심은 놀랍기도 했고, 또 좀 역겹기도 했다. 마드리드나 심지어 발렌시아에서 온 사람들조차 그런 무관심에 혐오감을 느꼈다. 우선 바르셀로나가 싸움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 한 가지 원인이었다. 나는 한 달후 타라고나에서도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 멋진 해변 도시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 P147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빵은 예외였다. 매우 엄격하게 배급되는 편이었으니까. 어쨌든 빈부간의 이 같은 노골적인 격차는 노동 계급이 지배하던 몇 달 전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정치적 권력의 이동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바르셀로나가 안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이따금씩 벌어지는 공습 외에는 전쟁의 위협이 거의 없었다. 마드리드에 있던 사람들 누구나바르셀로나의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마드리드에서는공통의 위험 때문에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뚱뚱한 사람이 메추라기를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빵을 구걸하는 모습은 역겨운 광경이다. 그러나 총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 P153

5월 1일 노동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국노동자연맹과 노동자총연합이 모두 참여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자신들의 추종자들보다는 더 온건한 전국노동자연맹 지도자들은 오래전부터 노동자총연합과의 화해를 시도해 왔다. 실제로 그들의 정책 기조는 두 단위의 조합을 하나의 거대한 연합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국노동자연맹과 노동자총연합의 조합원들이 노동절에 함께 행진함으로써 단결력을 대외에 과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시위는 취소되었다. 폭동이 일어날 게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1일에는 아무런 행사도 치러지지 않았다. 묘한상황이었다. 파시스트에게 장악되지 않은 유럽에서 그날 기념식을 열지 않은 도시는 이른바 혁명 도시라는 바르셀로나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안심이 되었다. 영국의독립노동자당 대표단은 통일노동자당 쪽에 끼어 행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누구나 일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의미 없는 시가전에 휘말려드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사기를고취하는 구호들이 적힌 붉은 기 뒤에서 거리를 행진하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거리의 창문에서 쏜 기관총에 맞아 죽는 것-이것은 내가 보기에 가치 있게 죽는 방식이 아니었다. - P158

관측소의 작은 창문으로 주변 몇 킬로미터씩을 내다볼수 있었다. 높고 날씬한 건물들에 이어 유리 돔, 밝은 녹색과구리색 타일을 얹은 환상적인 나무결 모양의 지붕들이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멀리 동쪽으로는 푸르스름한 바다가 희미하게반짝거렸다. 스페인에 온 후로 처음 보는 바다였다. 그러나 인구 백만의 거대한 도시가 일종의 광포한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작은 없고 소리만 있는 악몽이었다. 햇빛이 비치는 거리들은 완전히 텅 비었다. 바리케이드나 모래주머니를 댄 창으로부터 총알이 물줄기처럼 날아오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리에는 차량도 없었다. 람블라스거리 여기저기에 전차들이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전투가 시작되자운전사들이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 같은 소음은수천 동의 석조 건물들을 울리며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열대의폭풍우 같았다. 땅땅, 덜컹덜컹,우르릉. 때로는 몇 발의 총성으로 잦아들었다가 때로는 귀가 멍멍할 정도의 일제사격으로바뀌었다. 그러나 해가 지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 P171

그러나 해가 지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동이 트는 것과 동시에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누가 누구와 싸우는 것이고 누가 이기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가 무척힘들었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시가전에도 익숙하고 동네 지리에도 밝아서 어느 정당이 어느 거리와 건물들을 장악하고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이 점에서 외국인은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관측소에서 보니 바르셀로나의 중심 거리들 가운데 하나인 람블라스가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람블라스 오른쪽의 노동 계급 거주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견고한 터전이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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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들이 딱히 아름답다고 할 수는없었지만, 이 진지에 다른 소대의 남자 병사들이 접근하는 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오른쪽으로 5백 미터 거리에는 통일사회당 진지가 있었다. 알쿠비에레로 향하는 도로가 휘어지는 지점이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도로의 주인이 바뀌었다. 밤이면 우리의 보급 물자를 싣고 알쿠비에레로부터 구불거리며다가오는 화물 트럭의 불빛이 보였다. 사라고사로부터 오는 파시스트 화물 트럭의 불빛도 동시에 보였다. 남서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사라고사도 보였다. 불을 켠 배의 현창들처럼 불빛들이 가는 띠를 이루고 있었다. 정부군은 1936년 8월부터 그 거리에서 사라고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 P55

우리는 스페인 병사 한 명(윌리엄스의 처남 라몬이었다)을 포함하여 서른 명 정도였다. 우리 외에 스페인 기관총 사수도 여남은 명 있었다. 언제나 끼어들기 마련인 짜증 나는 사람 한두명을 제외하면 —— 모두가 알다시피 전쟁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꾀기 마련이니까 영국인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예외적일 만큼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마 보브 스마일리였을 것이다. 그는 광부들의 유명한 지도자의 손자였는데, 나중에 발렌시아에서 덧없이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영국 병사들과 스페인병사들이 늘 잘 지낸 것을 보면, 스페인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 누구나 영어 표현 두 가지씩은 알고 있었다. 하나는 「오케이, 베이비였고 또 하나는 바르셀로나의 창녀들이 영국인 선원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아마 그말을 이 글에 올린다 해도 식자공이 인쇄해 주지 않을 것이다. - P55

날씨는 대체로 맑았지만 추웠다. 한낮에는 가끔 해가 환하게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추웠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부리처럼생긴 야생 크로커스의 녹색 열매가 보이기도 했고, 붓꽃이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게 왔다. 밤은 평소보다 추웠다. 새벽에 경계 근무를 끝내면, 취사실에서 불을 때고 남은 것을 긁어모아 발갛고 뜨거운 깜부기불 앞에 서 있곤 했다. 군화에는 좋지 않았지만 발을 녹일 수 있어좋았다. 때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동트는 것을 보기 위해, 이른시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산을 싫어한다. 좋은 위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조차 싫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전쟁 기간 동안에,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바라건대는,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 동안 보아야 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 것이면 좋겠다. - P57

전선에 투입되고 나서 처음 서너 달 동안에는 잠 한숨 못 자고 24시간을 버틴 적이 여남은 번을 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푹 자본 밤도 여남은 번을넘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총 스무 시간 내지 서른 시간을 자면지극히 정상이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머리가 매우 멍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되레 어려워지긴했지만 몸은 건강했고 늘 배가 고팠다. 맙소사,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모든 음식이 맛있게 느껴졌다.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모든 사람이 보기도 싫어했던, 그 어딜 가나 빠지지 않던 강낭콩조차도. 얼마 안 되는 물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노새나 심하게 부려먹는 작은 당나귀에 실어 왔다. 왠지 모르지만아라곤 농부들은 노새한테는 잘해 주었지만 당나귀는 구박을했다. 당나귀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면 불알을 걷어차기 일쑤였다. 초 보급은 중단되었다. 성냥도 줄어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연유깡통, 탄약클립, 걸레조각으로 올리브유 램프를 만드는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행여 올리브 기름이라도 생기게 되면, 램프 기름으로 사용했다. 램프의 불꽃은 깜빡거리며 연기를 내뿜었다. 밝기는 촛불의 4분의 1쯤 되는것 같았다. 옆에 있는 소총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 P58

어둠 속에서 총알들이 우리 주위를 날아가며땅ㅡ핑ㅡ땅 하는 소리를 냈다. 포탄 몇 개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 근처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대부분은 터지지도 않았는데, 이 전쟁에서는 보통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후방의 봉우리에서 또 한 정의 기관총이 불을뿜는 순간, 나는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사실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올라온 기관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가 완전히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기관총은 금세 망가졌다. 그형편없는 총알 때문에 늘 그 모양이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탄약 꽂을대는 찾을 수도 없었다. 그냥 가만히서서 총알을 맞는 것 외에는 달리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스페인기관총 사수들은 숨는 것을 경멸했다. 사실 그들은 일부러 몸을노출했다. 나도 그렇게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일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총탄 사례를 받았다고 할만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무지하게겁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총알이 빗발칠 때는 늘 똑같은느낌이었던 것 같다. 총알에 맞는 것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디에 맞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총알이 도대체 어디에 박힐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몸 전체가어불쾌할 정도로 예민해진다. - P62

처음에 나는 전쟁의 정치적 측면은 무시했다. 그러나 이 무렵이 되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혹시 정당 정치의 소름끼치는 측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이 부분은 건너뛰기 바란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정치적인 부분은 별도의 장으로 다루려 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전쟁을순전히 군사적인 각도에서만 쓴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전쟁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전쟁이었다. 어쨌든 정부 방어선 뒤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당 내부의 투쟁을 파악하지 못하면 첫해 동안에 이 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P66

그러나 정당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포세로 산에서 병사들이 우리 왼쪽 진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쪽은 사회주의자들이야(통일사회당이라는 의미였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 아니야?」나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내 태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왜 다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짓거리를 그만두고전쟁이나 잘하지 못하는 거야?」물론 이것은 올바른「반파시스트」적 태도였다. 또한 영국 신문들이 주도면밀하게 퍼뜨리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 태도를 퍼뜨리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이투쟁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특히 카탈로니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막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 유지하지도 않았다. 암만 내키지 않아도 모두가 조만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했다. 아무리 정당과그들의 모순되는 「노선」에 관심이 없다 해도, 자신의 운명이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의용병으로서 프랑코와 싸웠다. 그러나 병사들은두 개의 정치적 이론을 놓고 벌어지는 거대한 투쟁의 볼모이기도 했다.  - P67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프랑코의 실질적인 적은 인민전선 정부라기보다는 노동조합들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시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응대했다. 이어 공공 무기고에 가서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투쟁 끝에 얻어냈다.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다소간 독립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프랑코는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일에는 확실한 답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는 있다. 인민전선 정부는 반란을미리 막으려는 노력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반란은 오래전부터 예측되어 오던 것이었다. 막상 문제가 터지자 정부는주저하는 유약한 태도를 보였다. 수상이 하루에 두 번 바뀌었을정도이다. 게다가 눈앞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노동자의 무장을 한참 머뭇거리다가 강력한 대중적 요구에못 이겨 마지못해 허용했다. 결국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나누어주게 되었다.  - P69

실제로는 모든 곳의 교회가 약탈당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스페인 교회가 자본주의적인 돈벌이의 일부라는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여섯 달을 있으면서 내가 본 교회들 가운데 파괴되지 않은 것은 딱 두 개였다.
그리고 1937년 7월까지는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 있는 개신교 교회 한두 개만예외였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혁명의 시작에 불과했지 혁명의 완성은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그럴 힘이 있었음에도――카탈로니아에서는 분명히 그랬고, 아마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정부를 전복하거나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프랑코가대문을 망치로 두드리고 중간 계급의 일부 계층들이 그들 편에있는 상황에서는 물론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일반적인 자본주의 공화국으로갈 수도 있는 과도기 상태였다. 대부분의 땅은 농민이 가졌다.
프랑코가 승리하지 않는 한 농민들이 그 땅을 그대로 가지게 될가능성이 높았다. 큰 공장들은 모두 집산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런 상태를 유지할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재도입될지는 어떤 그룹이 통제하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될 문제였다.  - P73

카탈로니아에서는 한동안, 노동조합들의 대표단이 다수를 이루는 반파시스트 방어 위원회"가 헤네랄리테를 대신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중앙정부는 개편될 때마다 우익 쪽으로 움직여갔다. 처음에는통일노동자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여섯 달 뒤에는 카발례로가 물러나고, 우익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직후 전국노동자연맹이 정부에서 쫓겨났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총연합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전국노동자연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전쟁과 혁명 발발 1년 뒤, 결국중앙정부에는 우익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우익으로의 전환은 1936년 10월, 11월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은 정부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권력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친절을 보여주지 않았다. 멕시코야 물론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없었다. - P74

정부는 러시아정부가 직접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든 나라의 공산당은 러시아의 정책을 이행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통일노동자당에 반대했고 나중에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카발례로의 사회주의일파에 반대했으며, 혁명적 정책 전반에 대해서 반대했던 주동자가 공산당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련이 개입한 이상 공산당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었다. 우선 공산주의자들의 위신이 크게 올라갔다. 그것은 무기 공급에 대해 러시아에감사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특히 <국제 여단>의 도착 이후 공산당이 전쟁에서 승리할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 P75

그러나 의용군을 노동조합의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면서 좀더 능률적으로 재조직하는 방법도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 해체의 주목적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의용군의 민주적 분위기 때문에 혁명적 사상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시행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간의 평등 보수 원칙을 쉴새없이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결과 전체적인 〈부르주아화〉, 즉 혁명 초기 몇 달 간 이루어졌던 평등 정신의 고의적 파괴가 일어났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몇 달 간격으로 스페인을 다시 찾은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온 것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스페인은 잠깐이지만 언뜻 노동자 국가로 보였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는 눈앞에서 평범한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바뀌어 갔다. 이제 그곳에는 부자와 빈자라는 일반적인 구분이 존재했다. 1937년가을이 되면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대중 연설에서 <우리는 사적 소유를 존중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 P77

스페인의다른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형식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점과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어디에서나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통일사회당은 U.G.T. (Unión General deTrqbqjqdores, 노동자총연합), 즉 사회주의 노동조합들의 정치적기관이다. 스페인 전역에 걸쳐 이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이제 약백오십만에 이른다. 여기에는 많은 계층의 육체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후 중간 계급으로부터 유입된사람들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혁명> 초기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노동자총연합(U.G.T.)이나 전국노동자연맹(C.N.T.)에 가입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원들은양 조직에 이중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서 전국노동자연맹이 단연 노동 계급을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통일사회당은 일부의 노동자와 일부의 프티부르주아지 상점 주인, 공무원, 부유한 농민로 이루어진정당이었다.  - P81

스페인 사람들 모두가그렇듯이 무정부주의연합의 모든 구성원들도 어느 정도 무정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반드시 순수한 의미에서의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쟁 초기 이후 그들은일반적인 사회주의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상황 때문에 중앙 집권적 행정부에 참여했고, 심지어 모든 원칙을 어기고 정부에 들어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마찬가지로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노동자들의 통제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는 통일동자당의 구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통일노동자당보다는 덜 교조적이었다.  - P84

그러나 혁명 정당들이 상황을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초기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는 해묵은 반목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통일노동자당은 무정부주의에 회의적이었다.
반면 순수한 무정부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노동자당의〈트로츠키주의>가 공산주의자들의 <스탈린주의>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 때문에 두 정당은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월에 통일노동자당이 바르셀로나에서 시가전에 뛰어들어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것도 전국노동자연맹을 지지해야 한다는 본능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중에 통일노동자당이 탄압을 당했을 때, 대담하게도 그들을 옹호하여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다.
따라서 대략적인 세력 배치는 이렇다. 한쪽에서는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자연합,통일노동자당, 사회주의자들 일부가 노동자들의 통제를 지지한다. 다른 쪽에서는 우익 사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이 중앙 집권적 정부와 정규군을 지지한다. - P85

당시에 내가 왜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통일노동자당의 관점보다 더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분명한 실질적 정책이 있었다. 겨우 몇 달 앞만을 내다보는 상식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분명 더 나은 정책이었다. 확실히통일노동자당의 일상적인 정책, 선전 등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훨씬 더 많은 대중이 그들을따랐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종결지은 것은 우리와 무정부주의자들이 가만히 서 있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에 발맞추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또한이것이 당시의 일반적 느낌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얻고 또 그 당원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그들이 혁명가들에반대하여 중간 계급에게 호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 P86

어쨌든 이것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트로츠키주의자,파시스트, 반역자, 살인자, 겁쟁이, 간첩 등등이었다. 솔직히 기분 나쁜 일이다. 특히 그런 일을 자행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들것에 실려 전선을 내려오며 모포사이로 눈부신 듯 바깥을 내다보는 하얀 얼굴의 열다섯 살짜리스페인 소년을 보면서, 이 소년이 위장한 파시스트임을 증명하는 팸플릿을 쓰고 있는 런던이나 파리의 말쑥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 P88

기자들이 보여준 모습으로만 본다면, 이 전쟁은 다른 모든전쟁들과 마찬가지로 말잔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기자들은 보통 가장 지독한 욕설은 적을 위해 아껴두기 마련인데, 이번 전쟁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노동자당이 서로에 대해 파시스트들보다 더 심하게 비난하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당간 불화는 짜증 나고 역겹기까지 했지만, 내눈에는 사소한 집안 싸움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뭔가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둘 사이에 정말로 양립할 수 없는 정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의 진전에 강력히 저항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혁명을 후퇴시킬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 P90

장군과 사병, 농민과의용군은 여전히 평등한 자격으로 만났다.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받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를〈당신>이나 〈동지〉라고 불렀다. 고용주 계급도 없었고, 하인 계급도없었고, 거지도 없었고, 창녀도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고, 사제도 없었고, 아침도 없었고, 모자에 손을 대는 인사도 없었다. 나는 평등의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순진했다. 대체로 우연때문에 나는 내가 스페인 노동 계급의 가장 혁명적인 일파 속에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적인 교육을 많이 받은 동지들이 나에게 순수하게 군사적인 태도로만 전쟁을 바라볼 수 없다거나, 선택은 혁명과 파시즘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냥웃어 넘기곤 했다. 대체적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에는 혁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일노동자당의 관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은 <전진 아니면 후퇴뿐이다〉로 요약되었다. 후에 통일노동자당이 옳다고, 어쨌든 공산주의자들보다는옳다고 판단한 것은 전적으로 이론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 P91

먼저 <민주주의는 사기다>라고 말한 다음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전술이 아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엄청난 위세를 등에 업고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스페인>이 아닌 <혁명적 스페인〉의 이름으로 호소했다면 아마 큰 호응을 얻어낼 수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혁명적 정책으로 프랑코의후방을 공격하는 것이 어려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일이었다. 1937년 여름, 프랑코는 정부와 비슷한 규모의군대로 정부보다 더 많은 인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식민지의 주민들까지 헤아리면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후방에 적대적인 주민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통신 시설을지키고 파업을 진압하는 등의 일을 해야만 전방의 군대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프랑코의 후방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 운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프랑코의 영토 내에 있는 인민, 적어도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프랑코를 좋아했다거나 그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가계속 우익 쪽으로 움직여가면서 정부의 우월성은 점점 빛을 잃었다. - P94

프랑코는 악명 높은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무어인들은 실제로 인민전선 정부보다 프랑코를 더 좋아했다! 명백한 사실은 모로코에서는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전쟁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어인들에게 인민전선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한 우선적인 조치는 바로 모로코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프랑스와 영국을 회유하려는 헛된 희망 때문에 전쟁에서 가장좋은 전략적 기회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 P95

공산주의 정책의 전체적 경향은 이 전쟁을 평범하고 비혁명적인 전쟁으로 축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극도로 불리했다. 그런 종류의 전쟁은 기계적 수단, 즉 궁극적으로무제한의 무기 공급에 의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주된 무기 지원국인 소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비교해 볼 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건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라는 구호가 언뜻 보기보다 덜 환상적이었는지도모른다.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반혁명 정책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내 나름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내 판단이 옳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이시 내 판단이 틀리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민전선 정부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바란다.
그러나 물론 어떻게 될지 아직 말할 수는 없다. 정부가 다시 좌경화할 수도 있다.  - P95

그러나 1937년 2월에 나는 상황을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했다. 아라곤 전선에서의 교착 상태가 지겨웠다. 나는 주로 내가싸울 만큼 싸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모병포스터를 자주 생각했다. 그 포스터는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질책하듯이 묻고 있었다.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식량만 축냈습니다.> 나는 의용군에 입대하면서 파시스트 한 명은 죽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우리 각자가 하나씩 죽이면 파시스트들은 곧 소멸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나는 마드리드로 가고 싶었다. 군대 내의 모든 사람들이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마드리드로 가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려면 국제군으로 들어가야 했다. 통일노동자당은 이제 마드리드 주둔 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들도 이제그곳에 전처럼 많은 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았다. - P96

하루하루, 특별히 밤마다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경계근무, 정찰 근무, 땅파기. 그리고 진창, 비, 잉잉거리는 바람, 가끔 내리는 눈. 밤에도 따뜻한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진 것은 4월에 접어들고도 한참을 지나서였다. 이곳 고지대의 3월은영국의 3월과 아주 비슷했다.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바람은 끈질겼다. 겨울 보리가 두 뼘 가량 올라왔고, 벚나무의 진홍색 봉오리들이 영글었다(이곳의 방어선은 버려진 과수원과 밭들을 관통했다). 도랑을 뒤져보면 제비꽃이나 블루벨 가운데서도 볼품없는 쪽에 속하는 야생 히야신스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방어선 바로 뒤로는 물거품이 보글거리는 상쾌한 녹색의 내가 흘렀다. 전선에 온 뒤로 처음 보는 투명한 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이를 악물고 물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여섯 주 만의 첫 목욕이었다. 대충 몸만 담그고 나온 꼴이었다.  - P98

이 무렵 우리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여전히 추운 날씨였지만 이가 슬 만큼은 따뜻했다. 나는 몸에 기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벌레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만큼 지독한 벌레는 없었다. 가령 모기 같은 다른 곤충들도 사람을 괴롭히긴 하지만적어도 몸에 상주하진 않는다. 이는 작은 가재를 연상시키는데, 주로 바지 안에 산다. 옷가지를 모두 태우는 것 외에는 이를 없앨 방법이 없다. 이는 바지의 솔기에 반짝거리는 하얀 알을 낳는다. 마치 작은 쌀알갱이 같다. 이 알들이 부화하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기 식구들을 불려나간다. 평화주의자들은이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확대하여 팸플릿에 실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영광이다! 전쟁에서는 모든 병사의 몸에 이가 들끓는다날씨만 어느 정도 따뜻하면.
베르덩, 워털루, 플로든, 센락, 테르모필레 등지에서 싸운 모든 병사들의 사타구니에는 이들이 기어다녔다. 우리는 알을 태우고 가능한 한 자주 목욕을 함으로써 그 지겨운 놈들의 수를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었다. 이만 아니었다면 나는 얼음처럼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03

날씨가 푹해지자 농부들은봄갈이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스페인의 토지 개혁은 그 내용이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의 땅이 집산화된것인지, 아니면 농민이 자기들끼리 땅을 나누어 가진 것인지도분명히 알 수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집산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주들은 사라졌고, 농민들 밭을 경작했다. 농민들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농민이 우리에게 친절했기때문에 나는 늘 놀라곤 하였다. 일부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전쟁 때문에 모든 물자가부족했고, 모든 사람이 우울하고 따분한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농민들은 아무리 좋은 시절이라도 군부대가 자기들 마을에 주둔하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변함없이 친절하였다. 우리가 다른 무리한 짓을 하더라도, 과거의지주가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란이란 묘한 것이다. 우에스카까지의거리는 8킬로미터도 안 되었다. 그곳의 시장은 이 농민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모두들 그곳에 친척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평생 닭도 팔고 채소도 팔았다. 그런데 이제 여덟 달 동안이나 기관총과 뚫을 수 없는 철조망의 장벽이 그 사이에 가로놓여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따금씩 장벽을 잊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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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은 슬픔을 희망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를 막무가내로 진창에 떠밀었을 적에도, 그는 누굴탓하기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강함으로 몰지각한 ‘맹금류‘와 거침없이 맞서 싸워냈다. 여전히 그는 왜곡에 대항해역사와 민중 앞에 놓인 ‘덫‘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있다.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화인(火印)」)라고말하는 도종환 시인은 시와 몸을 따로 두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몰염치에 맞서 떳떳하고 용기 있는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우리에게 이렇듯 서정의 깊이와격과 감동을 더한 시집을 들고 왔으니, 시집 갈피에서 전나무와 삼나무 냄새가 난다. 감자 잎과 도요새가 몸을 펴는소리 들린다. 사과 익어가는 내가 손에 묻고, 오르간 음이귀에 닿아 젖는다. 마른 가슴에 들어온 눈물이 격렬한 희망‘ 되어 온몸으로 퍼진다. ˝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받을 수 있으랴˝ (「해장국」). 시인이 말아 내미는 한그릇 국밥은 뜨겁고도 든든하다. 사무치는 위로가 있는 매혹적인시집이다.


박성우 시인




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능가산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나머지 날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아침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 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어느 저녁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일어서기 전에 듣고 싶어하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 붓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그이의 발소리를 붙잡지도 못하였습니다
밤에도 검은등뻐꾸기는 울고
북두칠성 일곱 별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몸을 틀며 별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아까시꽃이 향기의 긴 꼬리를 그으며
별자리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불빛 하나 고개를 넘어가다 잠깐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난 뒤 사방은 더 어두워졌고
호랑지빠귀가 한숨을 길게 쉬는 듯한 울음을 내뱉는 걸
숲은 다 듣고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들국화


들국화 꽃잎에 가을 햇볕이 앉아 있다
얇고 여린 피부에서 윤이 난다
내게 들국화는 들국화 이상이다
이 세상 모든 꽃이 저마다 빛나는 얼굴을 지녔고
하나의 성기와 몇개의 꽃술을 갖고 있지만
나는 들국화만 그걸 갖고 있는 것 같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꽃이 아니에요라고
들국화는 말하지만 나는
들국화에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다
꽃이파리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꽃잎의 표정을 과장하여 해석하는 걸 보면서느티나무는 내가 들국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망을 들국화라 부르는 거라고 말한다그러나 들국화를 보면 마음이 끌리고
연한 빛깔 위에 내린 햇살 곁에 나란히 있고 싶고
작고 투명한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내 팔에 기댄 채 들국화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의 몸에서 번져오는 맑은 기운이 내 몸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구석구석 따스하게 번져나가고

내 영혼의 물줄기가 그에게 흘러가
그의 뿌리를 적실 때도 있다
오늘도 들국화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고들국화 곁에서도 문득 들국화가 궁금해진다특별할 것 없는 들국화의 소박한 나날과
꽃잎의 흔들리는 머리칼과
짙은 녹색의 이파리와 이파리 밑에 감춰진 그늘과
가을까지 오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짐승들과상처와 빗줄기까지 사랑한다는 걸
들국화가 믿어주길 바란다
사랑이 왜 편애일 수밖에 없는지 알기에
가을 햇볕도 들국화 꽃잎 위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리라

들국화 2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정경
할슈타트에서


아름다운 정경은 사람을 선하게 한다
풍경의 전신을 대하는 순간
짧은 탄성이 저절로 새어나오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니다
탄성이 물무늬처럼 미소로 바뀌어 번져나가고
마음은 천천히 선한 빛깔로 물들게 된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예쁜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도 그렇다
사막에 별들이 하얗게 떴을 때도 그러하다
설산 기슭 순백의 눈을 볼 때도 그러하다
마음을 선하게 하는 초저녁 성당의
성가야말로 좋은 노래다
천천히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오래된 영화가 좋은 영화다
할슈타트 호수에 저녁빛이 내리고 있다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그러하다

사과꽃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피었습니다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하얀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살면서 가졌던 꿈은
그리 큰 게 아니었지요
사과꽃같이 피어만 있어도 좋은
꿈이었지요
그 꿈을 못 이루고 갈 것만 같은
늦은 봄
간절하였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지고 있습니다

저녁노을


눈이 그쳤는데 그는 이제 아프지 않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내 아팠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동안
내 안에 저녁노을처럼 번지는 통증을 그는 알까 
그리움 때문에 아프다는 걸
그리움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그리움은 혼자 남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눈은 내리다 그쳤는데
눈발처럼 쏟아지던 그리움은
허공을 헤매다 내 곁에 내린다 아프다

업연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멈추자 멈추어야 한다 하면서
오늘도 다리를 건넜다
잘 드는 칼로 끊어버린 날도 많았다
달맞이꽃도 밤별도 알고 있으리라
바보같이 천치같이를 되풀이하며
회초리로 나를 때리며 새운 밤도 많았다
오늘도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오늘도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면서

노란 잎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난중일기


새벽에 안개비 뿌리다가 늦게 개었다
잘 죽을 일을 생각하자
치유불능인 걸 알면서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하루하루는 치욕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박해받는 날들이 너무 길다
오늘도 열순의 활을 쏘고
찬술을 마시고
저녁엔 여진이와 잤다고
붓 들어 거짓 없이 쓰자
살아 있는 동안은 전선을 떠날 수 없는데
우린 늘 중과부적
이길 수 있다고 과신하지 말고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물살치는 두려움의 복판으로 배를 저어나가자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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