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 리히너
캄보디아 어린이를 보듬은 첼리스트 의사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Siem Reap의 앙코르와트를 여행한 이라면, 남문에서 도보로 5분 남짓 거리의 아동 전문병원 자야바르만7세Jayavarman VI‘ 앞에 걸린 ‘비토첼로Beatocello‘의 자선 콘서트 홍보 입간판을 봤을 수도 있다. 혹시 짬이 나서 거기 들렀다면,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들, 관광객들에 둘러싸인 비토첼로의 바흐나 카잘스, 혹은 자작곡 연주와, 그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판소리 사설처럼조리는 캄보디아의 의료 현실, 그리고 자기 병원 이야기를 듣기도 했을 것이다. 토요일 저녁, 관광 성수기엔 목요일까지 매주 두차례 열리던 자선 콘서트의 마지막 멘트는 으레 후원 요청이었다.
"나이 든 방문객은 돈을, 청년들은 헌혈을 해달라. 청년도 노인도아니면 둘 다 기부해달라." 그의 말에 대개는 웃었지만, 그는 늘 간절했다. 웬만한 여행자 하루 숙박비면 결핵이나 폐렴으로 입원한어린이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99

그는 캄보디아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92년 수도프놈펜에 무료 아동병원 ‘칸타보파 제1병원Kantha Bophal‘을 연이래 시엠레아프의 자야바르만까지 총 5개 아동 · 산모 병원을 개설해 운영하며 지금까지 25년여간 약 1천 7백만 명을 진료하고 중환자 170만 명을 치료했다. 병원을 늘리고, 의료 기구를 장만하고, 의사 등 직원 2500여 명의 급여를 마련하는 모든 책임이 그의 것이었다. 그는 병원 운영을 동료에게 맡긴 채 고국 스위스의여러 도시를 첼로를 메고 다니며 모금 연주회를 열곤 했고, 스위스와 캄보디아 정부 당국자들의 지원을 부탁하러 다녔으며, 그의
"지속 불가능한" 의료봉사 모델을 비판한 세계보건기구WHO 등국제기구와 글로벌 비정부기구NGO 등에 맞서 싸웠다. 스스로 지은 예명 비토첼로로 더 알려진 비트 리히너가 2018년 9월 9일 별세했다. 향년 71세. - P100

캄보디아 현대사는 1991년 파리평화협정 전과 후로 나뉜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 1954년 독립했지만 이내 인도차이나-베트남전쟁에 휩쓸렸고, 크메르루주Khmer Rouge 집권기(1975~1979)의 폭압 이후에도 약 10년간 베트남 등이 개입한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끝이 파리평화협정이었고, 1년의 과도기를거쳐 망명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와 훈센Hun Sen총리 체제의 입헌군주정이 시작됐다. 농업사회주의를 표방했던크메르루주 정권은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치아를 표적 삼아 탄압했고, 그 결과 지식인과 의사 등 전문인 다수가 학살당하거나 수 - P100

용소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독립 이후 어렵사리 구축해온사회·의료 시스템이 사실상 와해된 것이었다. 리히너가 자신이운영하던 취리히의 병원을 동료에게 넘기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으로 건너간 게 1991년 그해였다.
캄보디아 병원 재건은 평화협정이 진행 중이던 1991년, 프랑스파리의 한 모임에서 시아누크가 리히너에게 즉흥적으로 건넨 제안이었다고 한다. 칸타보파 병원은 시아누크가 1952년 숨진 네 살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국립 아동병원이었고, 리히너는 신참의사였던 1974~75년 스위스 적십자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거기서 일한 인연이 있었다. 크메르루주 집권으로 중도에 되돌아온 게안타까웠던 그는 즉석에서 시아누크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출국하는 날까지 스스로도 불안했다고 훗날에야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왕은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였고, 신생 내각은 가난했다. 병원은거의 폐허 상태였다. 의료진도 장비도 새로 구해야 했고, 건물도수리해야 했다. 그 난관을 그는 돈키호테 같은 낭만적 기질과 용기로, 그리고 스위스 시민들의 후원으로 돌파해나갔다. - P101

그는 1991년으로 되돌아간다면 국왕의 제안을 거절할지 모른다고, 취리히 호반의 안락한 집에 살면서 성공한 의사로 가끔 첼로콘서트나 열며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슈투더는 "한번 생각해봐라. 그는 하루 평균12만 스위스프랑을 모금해야 했다"고 말했다. 리히너는 "입원한아이들을 안고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그건 저속하고 kitsch,
무례한 짓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모금을 위해 그런 사진들을 찍어야 했다. 기억을 잃어가는 퇴행성 뇌질환을 얻은 그는 2017년 3월 스위스로 귀국해 치료를 받았다.
그의 별세 소식에 병원 전 직원은 묵념으로 애도했고, 삶은 계 - P106

란 두 개와 커피 한 잔을 놓은 빈소를 마련했다. 일주일의 애도기간을 선포했던 캄보디아 정부는 조문객이 쇄도하자 기간을100일로 늘렸다. 슈투더는 "그가 바란 건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일뿐이었다"고, "(나는 슬프지만 그에게 죽음은 어쩌면 구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는 내가 살 곳이 아니고, 결코 그걸 바란 적도 없다.
재정문제만 해결되면 홀가분하게 스위스로 돌아갈 것"이라던 그였지만 죽어서는 캄보디아에 묻히길 원했다. 슈투더는 "병원 한편에 리히너가 즐겨 머물곤 하던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다"고말했다. 이제 그의 공연은 볼 수 없지만, 그의 나무를 보러 가는이들은 있을 것이다. - P107

프레더릭 D. 톰슨
흑인 여성에게 육상의 길 열어준 코치


미국 연방의회는 1972년 6월 교육법을 개정Title IX, 타이틀 나인, 초·중등 공립학교 커리큘럼과 특별활동에서의 성차별을 금지했다. 지역과 여건에 따라 다르긴 했겠지만, 그전까지 학교 운동장과 체육관은 주로 남학생 차지였고, 운동부도 대부분 남자들만받았다. 여학생 커리큘럼에는 체육 수업이 아예 없는 곳도 많았다. 한마디로 스포츠는 남성의 영역이었다. 참가 신청서에 성별란이 아예 없던 1967년 보스턴마라톤에 ‘K. U. 스위처‘라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참여한 최초의 여성 캐서린 스위처 Katherine Switzer보다. 뒤늦게 여성인 걸 알아채고 그의 달리기를 저지하려 한 대회운영위원들과 남성 참가자들이 더 ‘상식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니 뉴욕 브루클린의 변호사 프레더릭 D. 톰슨Frederick D.Thompson이 1959년 흑인 여성 육상 클럽 ‘아톰 트랙 클럽Atom TrackClub, 이하 아톰클럽‘을 만든 건, 조금 과장하자면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 팀을 만드는 것에 견줄 만한 일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시민회관 복도가 그들의 트랙이었고, 몰래 학교 담장 - P109

을 넘나들기도 했다. 멤버는 여덟 살 아이부터 삼십대 주부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십대였다. 가입과 강습은 당연히 무료. 하지만 청소년의 경우 엄격한 가입 요건이 있었다. 성실히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 당시 뉴욕, 특히 브루클린의 가난한 십대 흑인청소년들에겐 학교보다, 달리기보다 훨씬 유혹적인 것들(술, 마약, 섹스, 폭력)이 널려 있었다.
그런 어려움들을 딛고 톰슨의 아톰클럽은 1960~70년대 다수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전미육상대회 스타 선수들을 배출하며독보적인 흑인 여성 육상 명문 클럽으로 이름을 날렸다. 설립자이자 유일한 코치 겸 후원자인 톰슨은 스포츠 아마추어리즘의시대가 저문 2000년대까지, 다시 말해 트랙에 서 있을 힘이 다빠질 때까지 클럽을 지켰다.  - P110

개정 교육법 ‘타이틀 나인‘의 영향으로 여학생 운동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1973년, 그는 생활용품 회사인 콜게이트의 요청으로 미국 최대 여성 아마추어 육상대회인 ‘콜게이트 위민스 게임Colgate Women‘s Game‘을 창설했다. 그는 그해 변호사업을 아예 접고 대회 운영위원장으로 2014년까지일했다.
아톰의 ‘아이들‘은 톰슨을 코치란 호칭 대신 ‘프레디‘라 불렀고, 성인이 된 뒤에도 힘들 때면 찾아와 기대곤 했다. 그들에게톰슨은 ‘스톱워치‘로는 잴 수 없는 귀한 것들을 베푼 멘토이자 친구였다. 프레더릭 D. 톰슨이 2019년 1월 22일 별세했다. 향년85세. - P110

그런 설움과 어려움에도, 마분지를 잘라 잉크로 직접 찍은 ‘ATOM CLUB‘ 티셔츠 유니폼을 아이들은 자랑스러워했다. 클럽 구성원은 그들의 새로운 가족이었고, 점점 나아지는 기록은 열정을 쏟아 도전할 만한 일이었다. 아톰클럽 멤버는 평균 50여 명,
많을 땐 근 200명에 이르기도 했다. 딸의 연습 장면을 구경하고응원하기 위해 가족들이 찾아오는 예도 점차 늘어났다. 간식거리를 챙겨오는 이들, 어두울 때 쓰라고 플래시를 만들어 선물한 부모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대회에 학교 대표팀이 아닌 아톰클럽 소속으로 출전하는 것이 대회 규정상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 육상 트랙이 아닌 실내 구기 코트에서, 코너링 연습도 못하는 직선 코스만 주로 달린 아이들이었지만, 20주년이던 1979년 무렵 그들은이미 다섯 차례 전미 실내 육상대회 팀 우승과 옥외 대회 3번 우승, 10여 개의 개인 금메달을 획득한 명문 팀이 돼 있었다. 텍사스대와 애리조나대 등이 톰슨에게 꽤 탐나는 연봉을 제시하며육상 팀 코치를 맡아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제 돈을써야 하는 아톰클럽 코치로 남았다. - P113

아누차 브라운 샌더스 Anucha Browne Sanders는 아톰클럽을 거쳐 노스웨스턴대 농구팀에서 활약하며 두 차례 ‘올해의 선수‘에 뽑힌 이력의 스타였다. 그는 여자프로농구WNBA 출범 전인 1985년대학을 졸업(커뮤니케이션 전공),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마케팅-커뮤니케이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IBM의 스포츠 마케팅 프로그램 매니저와 올림픽 국가대표팀 홍보팀으로 일했다. 그는 NBA뉴욕 닉스의 마케팅 이사와 팀 수석부회장을 지내다 2006년갑자기 해고당했다. 그 직후 샌더스는 자신의 상관인 총괄매니저의 성희롱 사실을 폭로하며 그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상관의 성적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성 해고라고 그는 주장했고, 회사 측은 샌더스의 미흡한 업무 성과가 해고 사유이며성희롱은 없었다고 맞섰다.
샌더스의 곁에 73세의 전직 변호사이자 전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톰슨이 있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소송 제기 후샌더스와 그의 가족이 겪은 직간접적 협박과 위협들을 폭로하며가해자 측의 비열한 행위를 고발했다. 그리고 "아톰클럽의 모든어린 선수들에게 샌더스는 모범적인 롤 모델 중 한 명이다. 그의 - P116

꿈이 지금 무참히 부서졌다. 농구는 그의 사랑이고 삶이었다. 지금 나는 무척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법원은 상사의 성희롱 사실과 사측의 은폐 혐의를 인정, 회사가 징벌적 손해배상금 116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양측은 그해 12월1150만 달러에 합의했다.
톰슨은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셰릴 투생은 1999년부터 콜게이트 대회 부위원장을 맡아 노쇠한 스승을 도왔고, 로나 포드는이웃에 살며 그를 아버지처럼 간병했다. 그가 사망한 뒤 열린 제45회 콜게이트 대회 결승은 상복 차림의 투생이 위원장을 맡아치렀다. 그리고 닷새 뒤 브루클린의 한 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제자들은 단체 추도사에서 "우리는 톰슨처럼 놀랍고 비범한이를 만나 함께 지내는 커다란 행운을 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미소 지을 수 있는 것도 모두 그의 덕입니다"라고 했다. - P117

제임스 르 메주리어
시리아 내전 인명구조대 ‘화이트 헬멧‘ 창설한 영웅


시리아 내전 인명구조대의 공식 명칭은 ‘시리아 민방위대 SyriaCivil Defensc‘지만 ‘화이트 헬멧White Helmets‘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2017년 만해대상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에도 꽤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전인 2014년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생후 10일된 아이를 구조한 뒤 흐느껴 우는 영상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킨바 있다. 그 장면이 포함된 2016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화이트헬멧: 시리아 민방위대>는 이듬해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고, 2017년 개봉한 영화 <알레포의 마지막 사람들>은그해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탔다. - P119

메주리어는 시민들이 최소한의 훈련과 장비만 갖춰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생명을 구조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전역 후만 17년 동안 유엔과 여러 국제단체 및 민간 보안 회사에서 일해온 그는 매년 수백 수천만 달러씩 퍼붓는 중동 평화·안보 프로젝트들보다 시민들에게 헬멧과 로프를 들려주는 게 더 값지고 절박한 일이라 판단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 일본 정부기관과 중동지원기금 운영자들을 설득해 후원금 30만 달러를 모았다. 그리고터키의 비영리 구난 단체인 ‘수색구조협회AKUT‘의 도움을 얻어7일짜리 초단기 인명구조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2013년 초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서 자원한 시민 스무 명이 처음 그프로그램을 이수했다. - P120

내전이 격화하면서 지원자도 점차 늘어났다. 훈련 프로그램도1개월로 확장되고 세분화해, 형식적인 팔다리 부목법은 골반 대퇴골 부목법으로, 단순 지혈은 팔다리 절단 지혈로 전문화했다.
화재 진압 장비와 기술, 생존자 유무와 위치를 보다 정교하게 파악하는 청음 장비 조작 기술도 프로그램에 포함됐다.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에서 최남단 다라까지, 반군이 있고 전투와 폭격이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에나 그들이 있었다. 전국 100여 곳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그들이 2014년 10월, 단일 네트워크의 ‘시리아 민방위대‘로 정식 출범했다. 누구는 시리아인들의 희망이라고 하고 누구는 휴머니즘의 마지막 보루라고도 부른, 총 인원 3천200여 명의 화이트 헬멧이 그렇게 탄생했다. - P120

그가 숨진 채 발견되기 불과 사흘 전 러시아 외무장관은자기 트윗에 그를 ‘테러조직과 연계된 전직 MI6 (해외 파트 요원‘
이라고 비난했다.
저 모든 정황들이 그를 맥 빠지게 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그가 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를 복용했다고 터키 경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아마도 시리아 내전의 전황자체였을 것이다.
시리아 정부와 야권, 그리고 이른바 시리아 시민사회 대표단은지난 10월 말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내전 종식을 위한 새로운 헌법 제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유엔 시리아특사는 "역사적 순간"이라며 "내전 고통을 끝내기 위한 실질적방안을 마련해달라"고 당부했다. - P128

러시아 전폭기를 앞세운 시리아정부군이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북부 이들리브 주 탈환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보름 전인 10월 15일 ‘국경없는의사회‘도 시리아에서 철수했다. 위험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마지막까지버티기로 정평이 난 그들조차 "더 이상 국제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헬멧 대원들은 지금도 현지에서 활동 중이다.
근년의 메이데이 레스큐는 소말리아 모가디슈와 레바논 북부베카 계곡의 응급의료 지원 시스템 구축 사업 등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메주리어는 시리아의 저 모든 절망적 상황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기후 활동가들이 악화하는 기후 상황을 속절없이 지켜보며 늪처럼 빠져든다는 ‘기후 우울증climate Grief‘, 비영리 및 공익 활동가들이 흔히 겪는다는 번아웃 모두 메주리어의 사정이기도 했을것이다. - P128

룰라 콰워스
요르단의 한 세대를 가르친 페미니스트


1984년 요르단대학 영문과 대학원생 룰라 콰워스Rula Quawas에게 지도교수가 추천한 논문 주제는 T.S. 엘리엇과 타예브 살리Tayeb Salih, 영국에서 활동한 수단 출신 이슬람 작가의 작품 분석이었다. 콰워스는 그 무난한 선택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미국 페미니스트 작가 케이트 쇼팽Kate Chopin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케이트 쇼팽은 이슬람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친서구적인 요르단에서조차 생경한 작가였다. - P131

콰워스는 케이트 쇼팽의 대표작 『각성』에 매료돼 있었다. 1899년 작품 『각성』은, 애정 없이 결혼해 두 아이를 둔 미국 남부의 한 상류층 여인(에드나)이 여름 휴양지에서 육체적·정신적 사랑에 눈뜬 뒤, 시대와 계층의 인습과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부과된 사회적 금기, 윤리적 책임을 벗어던지고 여성으로서의 주체적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로선 적나라한" 육체적·심리적 성애 묘사로 "천박하고 혐오스럽다"는 평가와 불륜을 미화한 "유해한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작가는 지인들로 - P131

부터 외면당하고 책은 공공도서관에서조차 거부당하게 만든 문제작이었다.
콰워스가 논문을 쓰려던 무렵 요르단의 젠더의식은 케이트 쇼팽이 살던 19세기 말 미국 남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콰워스는 논문을 포기하고 미국에 유학 중이던 남동생에게 건너가 석 달 남짓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tton과 윌라 캐더willa Cather, 아그네스스메들리Agnes Smelley 등을 알게 됐다. 콰워스에겐 그들의 작품뿐아니라 젠더에 갇히길 거부했던 그들의 삶, 예컨대 워튼의 여행편력과 당당한 이혼, 스메들리의 저널리스트 활동 등이 부러웠을것이다. - P132

귀국 후 그는 용기를 내 교수에게 미국 여성주의 작가 넷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고 했고, 대강의 작품 내용을 설명했다. "교수님의 첫 반응은 ‘섹스에 대해 쓰겠다는 거냐?‘는 거였어요." 논문을 지도해줄 만한 페미니스트는커녕 여성 교수도 전무하던 때였다. 논문 심사 통과 과정이 험난할 것이라며 교수는 만류했지만,
그는 각오가 돼 있노라 말했다고 한다.
어쨌건 그의 논문)는 교내에 모스크를 둔 그 대학의 완고한남자 교수들을 설득해냈고, 1991년 요르단에선 처음으로 페미니즘 문학 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땄다. 1995년 미국 노스텍사스대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모교 영문과 교수가 된 그는 비록대학원 선택과목이긴 했지만 요르단 최초의 페미니즘 강좌를 개설했고, 대학 내 여성학연구센터와 요르단 국가여성위원회 지식생산분과를 만들었다. - P132

하지만 그가 만들고 이끈 건 강좌와 연구센터가 아니라 요르단의 새로운 한 세대였다. 룰라 콰워스가 2017년 7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57세. - P133

여성학연구센터를 설립할 수 있었던 데는 현 국왕(압둘라 2세)의고모인 바스마 빈트 탈랄Basma Bint Talal 공주의 후원 덕이 컸다고한다. 2009년 콰워스는 여성 지위 및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탈랄 공주가 주는 리더십 · 헌신 공로훈장을 탔고, 2013년 미국국무부의 ‘국제 용기의 여성상IWCA, International Women of CourageAward‘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7년 8월 1일, 요르단 의회는 강간범이 피해자와 결혼하면기소하지 않도록 규정한 형법 308조, 이른바 ‘강간범 결혼 면책법Marry-Your Rapist Law‘을 폐지했다. 성폭력 피해를 가문의 수치로여겨 여동생이나 딸을 ‘명예살인‘하기도 하는 아랍 몇몇 나라와가톨릭 국가인 필리핀 등이 지금도 저 법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모로코가 강간을 당한 뒤 강제 결혼을 앞두고 있던 16세 소녀 아미나 필랄리Amina Filali의 자살 2년 뒤인 2014년 저 법을 폐지했다. - P137

이미 ㄹㄹ니ㅠㅠㅠㅠ
"여성은 고깃덩이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주체로 인식돼야 한다.
반드시 그리되리라 나는 믿는다. 내 생애에 이뤄지지 않더라도언젠가는・・・・・・"이라고 말하던 콰워스는 저 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대동맥 파열로 수술을 받았지만, 사인은 생체검사 합병증이었다.
콰워스는 이십대 무렵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적 없다고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믿기 때문에, 내 소명임을 알고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도 내게 다른 길을가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좋은 교육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교육이란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힘과 기술,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 P137

그리고 맞서 도전하며 ‘내 생각은 다르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인과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의 열정과 애정을 더불어 추모했다.
이십대 초반의 콰워스는 소설 『각성』을 읽으며 부러움과 막막함과 자괴감으로 흐느꼈다고 말했다. 소설은 주인공 에드가 영혼의 해방을 맞이했던 루이지애나 그랜드아일Grand Isle 의 해변에 다시가 알몸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헤엄을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날 밤이 떠올랐고, 해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에드나는 지금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소녀시절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같은 푸른 초원을 가로지르던 그때가 생각났다. 팔과 다리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

에드나처럼, 콰워스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그는 숨이멎을 때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 P138

버지니아 R. 몰런코트
퀴어 신학의 선구적 전사


원죄를 품고 태어나 동성을 사랑하는 이중의 죄를 짓고,
제 안에 든 악마의 영을 저주하며 감정도 판단도 불신하고, 심지어 교사에게 두꺼운 성경책으로 얻어맞고 그만 살자고 물에 뛰어든 적도 있는 여성이, 문학에서 위안을 얻으며 공부해 교수가 되고, 성경을 다시 읽음으로써 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자신을 긍정하게 됐다. 그 경험과 배움을 그는 ‘잃어버린 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요지의 책으로, 그것도 여러 권이나 "독창적이고도 설득력있게" 썼고, 보수 교단과 열성 신자들의 위협과 조롱, 저주를 측은히 여기게 됐다. 그는 십여 권의 책과 숱한 강연을 통해 자신이 찾은 진짜 예수를 차별 없는 사랑과 다름에 대한 격려로 북돋는 신앙을 열성적으로 ‘전도‘했다.
"할렐루야, 아이 엠 퀴어 Hallelujah, I‘m Queer!" 퀴어 신학의 선구적 전사 버지니아 R. 몰런코트virginia R. Mollenkott가 2020년 9월25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 P141

몰런코트는 "부디 하나님she 그 자신과 우리에 대해, 여성 일반에 대해 하신 말씀을 떠올려보시라. 우리 모두가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우리는 신성하지 않다는 말씀이냐?"라고 답장을 썼다.
몰런코트는 목숨의 위협까지 감당해가며 행한 자신의 분투를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죄의식을 벗고 위안과 힘을 얻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성소수자 중심 교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교회 목사 겸 작가로 활동해온 키트리지 체리 Kittredge Cherry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몰런코트의 1978년 책을 읽고 힘을얻어살아남은 LGBTQ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상상도 할수 없을 것"이라고, 그가 "할렐루야, 아이 엠 퀴어"라고 우람차게외친 1987년 강연 테이프를 지금도 찾아 듣곤 한다고 썼다. - P146

미국 연합감리교회 목사이자 트랜스젠더인 데이비드 위클리David Weekley와의 인터뷰에서 몰런코트는 트랜스젠더들에 대한폭력 등 혐오 범죄의 대처법에 대해 "건강한 자의식과 같고 다른이들끼리의 연대 외에는 궁극적 해법이 없다"며 상상을 통해 타인의 감정에 다가설 수 있는 능력, 즉 ‘공감적 상상력 sympatheticimagination‘이 도덕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같고 다른 이들의 상호존중과 믿음, 힘의 북돋움cmpowering이 페미니즘의 핵심이라 했던것, 차별 없는 사랑과 연민이 성경과 신의 참모습이라 했던 것이 그렇게, 윤리학-철학-문학이 구현하고자 했던 공감적 상상력과 포개졌다. 나는 윤리야말로 궁극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신은 전능하고, 전능해야 신이다. 스스로는 보편구제설을 믿 - P146

는 복음주의자라 했지만, 몰런코트는 이미 신앙의 망토를 두른인본주의자였다.
2018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마음으로 남성이기도 하고여성이기도 한 바이젠더 bigender"라 했고, 『편재하는 젠더』에서는
"남성적 여성, 트랜스섹슈얼은 아닌 트랜스젠더"라고도 자신을소개했다. 그는 재무설계사인 데브라 모리슨과 16년간 파트너로지냈고, 1997년 연인으로 만난 고교 교사 주디스 수재너 틸턴과2013년 결혼해 사별할 때까지 해로했다. 그는 2020년 6월 낙상사고 후 치료를 받았고, 대통령선거 우편투표와 집에서 임종하고 싶다는 두 가지 마지막 소원까지 이룬 뒤, 아들 부부와 전파트너 모리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히 눈을 감았다. - P147

레이 힐
이데올로기를 가로지른 한 노동자


영국인 노동자 레이 힐Ray Hill의 삶은 크게 5단계로 나뉜다.

-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중퇴하고 거리의 거친 싸움꾼으로 성장한 청소년기
- 군 제대와 결혼 후 버스 차장 등 온갖 노동으로 돈을 벌어가족을 부양하고자 분투한 시기
- 극우 이념에 사로잡혀 네오나치 단체 활동가로 살았던 삼사십대 20년 세월
- 공개적으로는 극우파 리더로 살면서 은밀히 조직의 비밀을언론에 폭로해 여러 조직을 내파시킨 ‘변절전향‘의 5년
- 자신의 부끄러운 진실과 극우의 추한 얼굴을 폭로하고, 극우이념에 취약한 청년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 바친 여생

힐의 드라마 같은 삶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그가 글과 말로 먹고산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극우 활동가로 사는 동안에도 늘 - P149

몸으로 가정을 부양한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옳다고 여긴바, 저 광역의 이념 지대를가로질렀다. 말년의 그는 "칠면조에게 크리스마스에 표를 주라ask turkeys to vote for Christmas‘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결코 정치적 극단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공적인 해악을 알면서도 극단주의에 선동당하는 이들에게 극단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의미,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바에 동조하라는 요구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신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한때의 나처럼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계급이 극우의 유혹에빠지지 않게 하려면, 그들에게 영감의 리더십과 진정한 열망, 무엇보다 희망을 위한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는 주류 정치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 P150

그는 3년간의 군복무 후 자신의 딸을 임신한 웨이트리스 글레니스 샵코트Glennis Shapcott와 1966년 결혼해 레스터의 가난한 동네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혼자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게 당시 그에겐 무척 버거웠다고 한다. 그는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솔깃하고강렬한 유혹이 찾아왔다. ‘모든 게 이민자 탓‘이라는 극우의 꼬드김이었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 "당신의 불행이 모두 다른 누군가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인종 편견은 가장으로서의 위신을세우는 동력이 된다. 가난과 고통은 더 이상 내가 못난 탓이 아니다. 모든 원인은 이민자들에게 있고, 이민자와 싸우는 것이야 - P152

말로 내 가정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썼다.
그는 신념의 활동가이자 열정적 웅변가였다. 1968년 더 규모가큰 극우단체 국민보존협회RPS, Racial Preservation Society로 옮겨 당시영국 네오나치의 거물 콜린 조던Colin Jordan을 만났다. 힐은 조던이 1968년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은 전국 규모의 극우단체 ‘브리티시무브먼트BM‘의 레스터시 지부장이 됐다. 조던이 이듬해 버밍엄 하원 보궐선거에 출마(낙선)했을 땐, 보디가드 겸 핵심 참모로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내 글레니스는 점점 변해가는 남편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대체로 참아줬다고 한다. - P153

공에 정착해 사는 동안 그의 가족도 유대인 등 여러 ‘2등‘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고, 인종차별과 비백인의 비참을, 그들의 인권·저항운동을 보고 겪은 터였다.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 일가족이 당한 일이 나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세상 어디에도 갈 곳 없이 거리에 내몰린 그 불쌍한 가족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바로 내가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는 자각 때문에 그 단순한 인간적 동정조차 할 수 없었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 인종주의자로서의 나의 삶이 그렇게 끝이 났다." 몇달간 번민하던 끝에 그는 1979년, 아내와 셋으로 불어난 아이들과 함께 10년 만에 레스터로 귀향했다. 2015년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적인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남아공에서10년을 머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혐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끔찍했다. 끔찍함 그자체였다"라고도 말했다. - P154

힐의 제보 덕에 1981년 이탈리아 볼로냐,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 등지에서 잇달았던 극우 폭탄테러의 배후, 즉 유럽 네오나치 네트워크가 드러났고, 여러 건의 무기 밀거래 현장이 적발됐으며,
1981년 런던 노팅힐 페스티벌 폭탄테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극우파 테러리스트들의 영국 내 비호 및 은신 네트워크를 적발한 것도 그의 제보 덕이었다. 극우파 리더로서 음지에서 저 활약을 펼치는 동안에도 그는 노동자였다. 택시 기사였고,
도박장 매니저였으며, 아내를 도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했다.
1984년 BBC 채널4 다큐멘터리 〈테러의 이면The Other Face ofTerror〉에 그가 비로소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하며 출연해 자신의진실, 즉 극우파로 산 20년과 내부 첩자로 산 지난 5년의 진실을고백하고 극우파의 이면을 폭로했다. <가디언>은 당시의 충격을두고 "(영국 극우파가) 할 말을 잃고 분노로 졸도할 지경이 됐다" 고 썼다.
보복 살해 등 힐에 대한 극우파의 위협이 이어졌다. 소이폭탄 - P156

테러로 집이 전소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년까지 학교 강연과 집회 등을 통해 인종주의 극우집단의 해악과 비열함을, 불의와 부도덕을 폭로하는 데 헌신했다. <서치라이트>는 "그 누구도(적어도 실명을 공개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는) 영국 극우 운동에 레이 힐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람은 없었고, 반파시스트 세대에 영감을 제공한 사람도 없었다"고 썼다.
그는 극우 운동에 포섭된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 계층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한사코 삼갔다. 극우의 유혹에 그들의 처지)이 얼마나 취약한지, 유혹의 방식과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능란한지, 그래서 얼마나 저항하기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극우를 자라나게 하는 궁극적인 토양, 다시 말해 책임이 정치의 실패, 정치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 P157

사디 야세프
독립 영웅과 테러리스트 사이


이라크전쟁 개전 직후인 2003년 9월 미국 국방부는 파병 장교와 백악관 안보보좌관실 관계자 등 40여 명을 모아놓고 영화 한편을 단체 관람했다. 또 이례적으로 그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초대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프랑스는 어떻게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이념 전쟁에서 패배했는가. (…) 이 영화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다." 이들이 본 영화는이탈리아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의 1965년 영화 <알제리 전투>였다.
영화는 130년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제리인들이 벌인 독립전쟁(1954~1962) 중 1956, 1957년 수도 알제에 집중된 테러와 보복 테러, 체포, 고문과 살인, 진압의 양상을 다뤘다. 네오리얼리즘 거장 폰테코르보는 뉴스 화면을 편집한 것 같은 흑백 다큐 기법으로 저 영화를 촬영했고, 출연진도 한 명을뺀 전원을 일반 시민과 여행자로 채웠다. - P159

영화 〈알제리 전투〉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던 좌파 감독 폰테코르보가, 테러 주체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LF, National LiberationFront 전투 사령관의 회고록을 토대로 만든 시나리오로, 독립 직후 알제리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폰테코르보는, 군인들의 고문장면뿐 아니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냉혹한 테러 양상, 예컨대유럽 민간인 여성, 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희생시킨 폭탄테러장면까지 여과 없이 담았고, 테러 및 고문의 논리와 심리까지 파헤침으로써 값싼 선전영화의 함정을 벗어나 폭력과 해방, 야만과휴머니즘이라는 본질의 틈새로 돌진했다. 영화는 196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당국은 고문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영화의 국내 상영을 5년간 금지했다. - P160

사디 야세프 Saadi Yacef는 도심 테러의 지휘자인 알제자치지구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사령관이었고, 영화 시나리오의 원작인 『알제전투 회고록souvenirs de la bataille d‘Alger』을 쓴 작가였으며, 감독을섭외하고 제작비를 댄 영화 제작자였고, 직접 출연까지 해서 자신(엘 아디 자파르 역)을 연기한 배우였다. 다시 말해 그는 해방전쟁의 분수령이 된 1956~57년 알제 테러의 주역이자 영화의 숨은 주연이었다.
폰테코르보의 성취에 가려져 있던 사디 야세프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원작 필름이 고화질 영상으로 복원된 2004년 무렵이었다. 그는 후세대가 자신들의 삶과 활동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주길 바랐다고. 다만 자신들의 테러에 대해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알제리내전‘ 테러에 대해서는 "민족해방전선의 테러와 방식만 닮았을뿐 동기도 지향도 전혀 다르다"고, "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주장했다.
20세기 무슬림 테러 역사에 논쟁적인 첫 장을 연 ‘이슬람 전사‘ 출신의 작가 겸 영화인 사디 야세프가 2021년 9월 10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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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가 녹는다‘는 흔한 말은 틀린 건 아니지만 한가한 표현이었다. 빙하는 녹을 뿐 아니라 붕괴되고 있었다. 슈테펜이 2002년〈사이언스> 논문에서 밝힌 빙상의 ‘동적 반응Dynamic Response‘, 즉빙상 표면의 용해-증발이나 해양 경계면 붕괴는 드러난 현상일뿐, 결정적인 건 대륙빙하 바닥까지 스민 물이 윤활작용을 하면서 대륙빙하 자체가 거대한 썰매처럼 바다로 미끄러지고 있다는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연구는 학계를 경악시켰고, 기후 위기의 모든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했다. - P28

먼저 용어를 알자. 극지 얼음은 크게 바닷물이 얼어서 형성된해빙과, 수만 년간 쌓인 눈이 다져진 민물 얼음, 즉 빙하로 나뉜다.
지구는 민물의 약 99퍼센트를 극지와 고산의 빙하 형태로 담고 있고, 지구의 모든 강과 호수 등의 물을 다 합친 게 나머지 1퍼센트다. 빙하는 다시 빙상과 빙붕, 빙산으로 나뉜다. 빙상은 면적이 5만제곱킬로미터(남한 면적의 절반 이상인 거대 얼음 평원으로 대부분 남극과 그린란드에 펼쳐져 있다. 빙붕은 빙상이 바다로 이어져물에 잠긴 경계 권역이다. 빙붕은 바다에 떠서 녹기도 하지만 빙상으로부터 계속 얼음을 공급받기 때문에 크기와 두께(300~900미터)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해수 온도 상승 등의 변수가 빙상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이를테면 빙상의 방벽이다. 빙상과 빙붕의 파편 중 해수면 위로 5미터 이상 솟아 바다에 떠다니는 것들이 빙산이고, 5미터 미만은 그냥 얼음 덩어리다. - P28

상식 하나도 환기하자. 대양의 모든 빙산이 녹더라도 해수면은그대로다. 빙산의 90퍼센트는 이미 물에 잠겨 있고, 10퍼센트의
‘일각‘이 녹더라도 얼음이 물로 변하면서 부피가 10퍼센트 줄기때문이다. 물론 수온 상승은 그 자체로 해수면을 높인다. 물 분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부피가 팽창하기 때문(열팽창)이다. 하지만 해수면 상승의 주범은 대륙빙하, 즉 빙상의 붕괴다. 빙상 면적이 줄어들면 ‘알베도albedo, 물체가 빛을 받았을 때 반사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가 낮아져, 햇빛을 덜 반사하고 열을 더 흡수하기 때문에 온난화와 빙상 붕괴는 더 가속화한다. 거기에 더해 슈테펜이 밝힌 ‘동적 반응‘은 빨라진 노화를 걱정하는 이에게 사고로 인한 급사의 가능성을 더한 카산드라적 충격이었다.  - P29

과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그린란드 빙상이 모두 녹으면 지구 해수면은 약 6미터 오르고, 남극까지 녹으면 60미터 상승한다. 그린란드 빙상은 2012년에만 약 4천억 톤이 사라져 10년 전보다 소실 속도가 네 배가량 빨라졌다. 이제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고 예측하고 있다.
빙상은 이름과 달리 고르게 평평하지 않다. 오히려 파도처럼 거칠고 불규칙하다. 깊은 균열과 골짜기(크레바스)가 있고, 강과 여울이 있고, ‘물랑moulin‘이라 불리는 수직의 동굴들도 즐비하다. 캘리포니아대 빙하학자 로런스 스미스 Lawrence Smith는 2015년한 인터뷰에서 빙상 구조를 ‘스위스 치즈‘에 비유하며, 물랑과 크레바스를 통해 바닥까지 흘러든 물이 ‘칼로 버터를 자르듯‘ 빙상을 결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현상은 오직 현장에서만 포착할 수 있는 거였다. - P29

그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와 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등 유력 정치인과 기자들을스위스캠프에 초대해 기후 위기의 실태를 직접 보게 했다. 현장에 가려면 군수송기로 래브라도해를 건너 설상 착륙용 경비행기나 헬기로 갈아탄 뒤, 다시 설상차로 캠프까지 이동해야 한다. 식량과 장비도 물론 싣고 가야 한다. 헬기의 경우 1회 화물 적재한도는 360킬로그램, 시간당 비용은 약 5천 달러다(2007년 기준).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다 싼 화물을 풀어 359킬로그램에 맞추는연구원들의 수고도, 그는 예산을 줄 정치인들이 보게 했을 것이다.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그는 "매년 사라지는 그린란드빙상의 물을 워싱턴 DC에 부으면 당신들은 수심 약 1마일(1.6킬로미터) 물 밑에 잠길 것"이라고 말했다. 방대한 민물이 극지 바다로 유입되면 조류와 해양생태계가 격동하고, 줄어든 빙상이 제트기류를 흔들어 지구의 기후를 요동치게 한다. 극지는 기후 위기의 미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자, 슈테펜의 표현에 따르면 거대한 ‘기상 기계 Weather Machine‘다. 그 재생 불능의 기계가 무서운 속도로 망가지고 있다고도 증언했다. 기후 연구는 돈이 많이 드는장기 프로젝트다. 그는 빼어난 학자이자 교육자였을 뿐 아니라 예산을 따내는 데도 탁월한 행정가였다. - P31

 "우리는 ‘그가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고, 혈관에 피 대신 에스프레소가 흐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그는 담배를만 24시간 동안 딱 한 번 ‘끊은 적이 있었다. 한 동료와 배핀만 인근 랭커스터 해협Lancaster Sound의 부빙에서 학위 논문을 위해 현장연구를 하던 1978년, 혼자 얼음 경사면을 횡단하다 눈사태로 설상차가 전복돼 다리가 부러진 때였다. 그는 관측 장비 표식용 알루미늄 막대로 부목을 대고 설상차로 눈보라를 막으며 만 하루를 버틴 끝에, 품에 ‘유서‘를 지닌 채 구조됐다. 그는 한 기자에게 "담배까지 피우면 혈관이 확장돼 얼어 죽을 판이었다"고 말했다. 당시썼던 유서를 늘 간직하고 살았던 그는 1984년 결혼해 아들 둘을낳았고, 2017년 재혼했다. - P32

저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그는, 그래도 언젠가는 조금은 다른전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란 기대와 낙담을 거듭했을것이다. 2007년 IPCC 보고서는 "지금 추세라면 2100년 해수면은약 18~58센티미터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근년 NASA 보고서는 ‘최소 65센티미터 상승해 3천 2백만~8천 6백만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2007년 무렵부터 "(해수면이) 1미터 이상 상승할 수도 있다"고, "그래도 지금이 낫다"고말했다. "우선 사람들이 과학자들의 말을 듣고, 정치인들이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고, "빙상의 과학자가 나 혼자가 아니기때문"이었다. 그를 멘토 삼아 우주공학에서 기후빙하학으로 전공을 바꾼, 현 지구과학협동연구소 소장 윌리드 압달라티waleedAbdalati는 슈테펜을 따라 스위스캠프에 처음 갔을 때 "헬기에서내리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가슴을 활짝 열고 지그시 그린란드의 - P32

공기를 음미하던 그를 회상하며 "그에겐 그게 노동이 아니라 열정이고 기쁨이었다"고, "그곳이 그에겐 집이었다"고 말했다. - P33

컬럼비아대학교 영문학과 35세 대학원생 캐서린 "케이트" 머리밀렛Katherine "Kate" Murray Millett 이 논문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으로박사학위를 받은 해가 1969년, 저 소용돌이의 한복판이었다.
1970년 7월 출간된 동명의 책은 시사주간지 <타임>이 8월 31일자 여성운동 특집호 표지로 밀렛의 초상화를 실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페미니스트들의 제사장"이라 소개했다. 서평의 압권은 <타임>이 인용한 밀렛의 논문지도교수 조지 스테이드George Stade의 말이었다. "호두까기 집게에불알을 물린 기분으로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자 2세대 페미니즘의 정전正典,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의 첫 장을 연 책으로 꼽히는 『성 정치학』의 저자케이트 밀렛이 2017년 9월 6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 P36

밀렛은 문학뿐 아니라 에덴동산의 이브에서부터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당대 기능주의 철학과 인류학, 심리학, 정치·경제학,
법·의학, 교육학 등 곳곳에 내장된젠더정치의 장치와 권력 메커니즘을 해부하고 폭로했다. 그 거시 권력의 뿌리를 그는 가정에서 찾았다. "가장은 가부장 권력 안의 가부장 권력으로서, 거대사회의 거울이자 연결고리다." 책 3부에서 그는 당대의 문학권력이던 D. H. 로런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대표작 비평을 통해문학이 묘사하는 이성애 관계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수동적·순종적 존재로 대상화되며 ‘내면적으로 식민화‘하는지에 집중했다. - P37

그는 『성 정치학』 2000년판 서문에 "나는 가부장제를 지위와 기질, 성 역할에 근거한 지배적인 정치제도로,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믿음의 체계로 간주하려 했다. 이 체계는 스스로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라고 썼다.
가장 미시적인 침실 풍경에서부터 현대사회 젠더정치의 구조로까지 거침없이 나아간 그의 저작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것"이라는 페미니즘 2세대 슬로건의 이론적·철학적 뼈대가 됐다.
『성 정치학』 출간 2주 만에 1만 부가 팔리는 등 연말까지 8만부가 팔렸고,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과 동갑인 밀렛은 가장 뜨거운 이론가 겸 리더로 급부상했다. - P38

페미니즘 운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진 동력을 잃어가던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문화 페미니즘‘으로 선회했다. 그들은 가부장권력에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 여성적 ‘반문화 공간‘ 개척에 주력했다. 그 공간은 "일종의 능동적 저항의 문화로 상상됐지만, 에이드리언 리치의 지적처럼, 가부장 권력을 회피하기 위한 ‘그것 자체가 목적인 이주의 장소가 됐다. (…) 사회 변혁보다는 개인 변혁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2세대 페미니즘의 이념은 그렇게 변색됐다.
밀렛은 서서히 잊혔고, 1990년대 들면서 『정치학』을 비롯한 그의 대다수 "과격하고 급진적인 책들도 절판됐다. 미국 시인이자 활동가였던 로빈 모건Robin Morgan과 점심 식사를 하며 페미니즘 권장 도서 목록에조차 자신들의 책이 포함되지 않는 현실을탄식했다는 게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밀렛에게 그건 명예나 대의의 문제 이전에 생계의 문제였다. - P43

모아둔 돈을 다 쓰고 난 뒤 닥쳐올 가난이, 감당해야 할 굴욕이, 어쩌면 노숙자의 삶이 겁이 난다."그 무렵의 그는 언젠가 한인터뷰에서 베티 프리던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을 언급하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정치인들이지만, 나는 아니다. ‘여성해방의케이트 밀렛‘도 아니다"라며 냉소하던 때의 그와 달랐다.
2000년 『성 정치학』 등 그의 책들이 복간된 것은 그의 저 칼럼덕이 아니라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부각된 결과일 것이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합적이므로 개별적인 것들을 교차시키며 파악해야 한다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밀렛의 성 정치학과 레즈비언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 등 2세대 하위 진영을 활발히 재조명했다. 걸출한 페미니스트들의 밀렛에 대한 헌사도 대부분 그 무렵 쏟아졌다. - P44

"1963년 베티 프리던이 ‘여성의 신비‘라고 지적한 문제에 ‘성 정치학‘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가부장 권력‘이라는 원인을 규명한 이가 밀렛이었다." -캐럴 J. 애덤스Carol J. Adams


밀렛은 2012년 성소수자 문학단체인 람다 문학재단 LambdaLiterary Foundation의 ‘개척자상‘과 오랜 친구인 오노 요코가 제정한 ‘용기 있는 예술인 상‘을 탔고, 이듬해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수락 연설에서 밀렛은 활동가 시절의 행복과 참여의 기쁨, 시대의 전위에서 그 시대의 일부가 되는 삶의 흥분을 회고한 뒤, 젠더정치의 불의에 끊임없이 맞서자고 촉구했다. "살면서 일상의 불만을 표출하듯, 거리에서, 연인에게, 또 친구에게 항의의 목소리를 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이 여성의 얼굴이 돼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45

마이클 큐잭
경계를 가르며 헤엄친 두 팔


지적장애인 국제 체육 행사인 ‘스페셜올림픽‘의 창설에 기여한다운증후군 수영선수 마이클 큐잭Michael Cusack이 2020년 12월17일 별세했다. 향년 64세. 그가 한 일은 물만 보면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들어 신나게 활개친 게 거의 전부였지만, 그 소박한 열정이 세상 한편을 달라지게 했다. 소수의 사람들을 열정으로 사로잡아 뭐든 해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했고 실천하게 했다.
정반대로 말할 수도 있겠다. 한 어린 장애인의 그리 대단할 것없는 열정에 특별히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고. 몸으로 물을 미는동안, 그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었다. 극복해야 할 제약도, 도움받아야 할 결핍도 아니었다. 장애는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기지만, 어떤 제약과 불편은 세상이 만들고 사회가 강요한다는 것, 폄하와 차별이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를 보며 깨달아갔다. - P47

장애·비장애, 무능-유능의 이분법

큐잭은 1956년 5월 6일, 미국 시카고 라잉인 병원에서 경찰관아버지 존과 전업주부 어머니 에스더의 둘째로, 다운증후군을지닌 채 태어났다. 의사는 ‘아이가 정상적 삶을 누릴 수 없으니,
돌보느라 고생하지 말고 일찌감치 시설로 보내라‘고 조언했다.
다운증후군은 선천성 염색체 질환이다. 부모에게서 각 23개씩46개의 염색체를 받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수태전후알수없는 이유로 21번 염색체에 여분의 염색체가 끼어들어 47개의 염색체를 지니면 그리 된다. 신생아 800~1000명 당 한 명꼴로 태어나며, 지적장애 등 육체적·정신적인 차이를 발현하고, 여러 잠재적 합병증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아직 예방도 완치도 불가능하다. - P48

장애-비장애를 비정상-정상, 무능-유능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장애인을 우생학적 단종수술로 도태시키거나 시설에 강제수용해 격리 · 배제하던 때가 있었다. 미국연방대법원이 장애인 시설 수용자에 대한 불임·단종수술을 수정헌법 14조(평등 조항)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한 게 1927년이었고(Buck v. Bell), 큐잭이 태어난 1950년대에도 장애인은 시민적 자질인 자립·자결 능력이결여된 존재여서 시설에 수용하는 게 그들과 공동체 모두에 이롭다는 게 상식이었다."
의사의 조언도 아마 선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그를 집 - P48

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일리노이주는 1960년대 말에야 지적장애인 공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부모는 큐잭과 유사한 장애를지닌 아이의 부모들을 수소문해 돈을 모아 창고를 임대하고, 은퇴 교사를 고용해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 큐잭은 세발자전거 타기나 공놀이 등 몸 쓰는 놀이에 유난히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가족은 그의 애칭 ‘미키Micky‘ 뒤에 ‘마우Mouse‘ 대신 ‘무스Moose, 크고 힘센 사슴종인 말코손바닥사슴‘란 별명을 붙였다. ‘미키 무스‘는 무스처럼 건강하게 성장했다.
1965년 시카고 파크디스트릭트 당국이 장애인 레크리에이션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한다는 공고를 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만 20세 체육교사 앤 버크Anne Burke가 거기 자원했고, 첫 학생으로 큐잭을 만났다. 물만 보면 환장을 해서 제어하기조차 힘들던 큐잭은 점차 놀이와 학습을 구분하게 됐고, 고된 훈련에도 성실히 임했다. 버크는 연습이 끝난 뒤 큐잭 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2년 뒤 버크의 제자는 약 100명으로 늘어났다. - P49

1972년 LA 대회 땐 경기 도중 수영복 끈이 풀리자 아예 트렁크를 벗고 경기를 마친 뒤 곧장 풀에서 나와 자기 기록을 확인한뒤 다시 물에 뛰어들어 수영복을 챙겨 입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아이처럼 경기에 몰두했고, 기량도 뛰어나 한 코치는 "내 수영 실력도 꽤 좋은 편이지만 그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 나를 앞지르곤 했다"고 말했다. 더 인상적인 건 이긴 뒤에도 승리감에 도취돼 으스대는 법 없이, 무심히 제 할 일을 하곤 했다는 점이었다고 코치는 덧붙였다. 큐잭은 관중들의 주목과 갈채를 즐겼지만, "그건 자의식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랑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시합에 졌을 때도 늘 경쟁자에게 먼저다가가 축하했고, 단 한 번도 결코 질투하지 않았다"고 그의 가족들은 회고했다. - P51

젠더 · 인종차별의 의·과학적 근거가 된 저런 주장을 믿는 사람은 이제 드물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비장애인의의식과 무의식 속에, 사회제도와 구조 속에 온존하고 있다. 장애라는 렌즈로 미국사를 조명한 킴 닐슨은 자신의 책 『장애의 역사』에서 장애는 고정불변의 몰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썼다. 큐잭의 수영장처럼 물리적 · 구체적 장애를 포용할 수 있는 기회와 제도, 시설과 공간을 마련할 책임은 공동체에게,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정치인과 행정가에게 있다. 헬렌 켈러처럼 장애인으로서 큰 성취를이룬 위인을 칭송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하지만 책임 있는정치인이라면, 헬렌 켈러가 차별적으로 누린 교육 등 여러 기회에 주목해야 한다. - P53

보비 레이먼드
공존 가능한 마을의 설계자


‘분리 segregation‘는 차별의 양식이자 하나의 이념이다. 법·제도가 쇠사슬과 채찍을 금지해도 차별로서의 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을 모색한다. 아파트단지 등 주거지역 전체에 담장을 두르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이른바 ‘빗장 공동체‘가 단적인 예다. 경제적 신분과 지위는 주거와 교육, 문화 등현대인의 삶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뻔한 얘기지만, 가난한 지역일수록 공공 인프라가 부실하고, 교육의 질과 직업 선택의 기회, 구직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이 취약하기 마련이다. 분리는 차별을 재생산하는 무한 폐쇄회로이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 P55

분리와 차별의 채찍은 살갗이 아니라 영혼을 할퀸다. 모욕감과분노를 자극하고, 막막한 절망감으로 까라지게 한다. 분리는 공동체 안에 철조망 없는 ‘게토ghetto‘를 구축한다. 그 게토의 담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내면화한다. 분리, 격리, 배제는 점점 이상하지 않은 일, 바람직하진 않아도 어쩌지는 못할 일이 된다. - P55

인종과 피부색, 출신 지역에 따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는, 대도시 주변이면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을 ‘재분리resegregation‘라 부른다. 거기엔 인종에 따른 주거 분리가 개개인의부의 격차나 문화 동질성에 이끌린 탓만이 아니라, 은밀하고도집요한 분리와 차별의 결과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1968년민권법 제8조 ‘공정주택 Fair Housing‘ 조항은 인종을 근거로 주거지선택권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관행을 불법화했지만, 지배집단(백인)의 의식과 텃세까지 통제하진 못했다. 주택금융기관과 부동산 소개 및 관리업체들도 법 이전에 주민들의 바람을 존중해야 했다. 그들은 법을 우회하는 다양한 경로를 개척했다. - P56

미국 연방 · 주정부가 의료 보건 시스템과 함께 가장 난감해하는 사회문제 중 하나도 재분리, 즉 주거 분리 차별이다. 2010년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의료 개혁으로 임기를 시작한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집권 2기의 주력 정책으로 ‘공정주택 원칙 및 빈민지역 주거 환경 개선‘을 상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주무장관이던 연방도시주택개발부의 훌리안 카스트로는 그 정책의 지향이 복지가 아닌 인권 옹호와 반차별에 있다며 "우편번호가 누군가의 꿈과 포부를 저지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가 맨 먼저 전면 중단, 재검토를 선언한것도 이 정책이었다. - P56

자치 의회 겸 행정기관인 마을 이사회는 연방 민권법보다 앞서 공정주택 조례를 제정, 금융기관과 중개업소 등이 재분리를부추기는 행위를 금지했고, 주민소통위원회를 설립해 건물주협회 등 이익단체 대표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활동의 주역은시민단체인 ‘오크파크 주택센터OPHC, 현재는 OPRHC‘였다. 그들은 주택 매매·임대 시장의 최전선에서 직접 소비자들을 상대하며 조화로운 점묘도를 그렸다.
보비 레이먼드Bobbie Raymond 센터를 설립하고 만 26년간사무총장을 지낸, ‘오크파크 전략‘의 총괄 리더였다. 그는 1971년자신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오크파크의 도전: 인종 변화에 직면한 교외 한 공동체The challenge to Oak Park: A Suburban Community FacesRacial Change」의 구상을 주민들과 함께 실험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일어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우리의 뜻에 따라 공동체의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던 보비 레이먼드가 2019년 5월7일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 P57

레이먼드는 1996년 센터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고, 지역 주간지는 16쪽짜리 레이먼드 특집을 기획했다. 그의 후임으로 12년간사무총장을 지낸 롭 브라이메이어는 "오크파크 역사상 가장 큰영향을 미친 인물이 아마 보비일 것"이라고, "오크파크는 그의 헌신 덕에 훨씬 나은 공동체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공정주택 문제의 권위자 하버드대 게리 오필드 교수는 "보비는 미국 공정주택운동의 가장 열정적인 주역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레이먼드는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있다. "나는 아이였던 때가 없었다. 네댓 살 무렵의 나와 지금의 내 - P62

가 똑같다. 나는 항상 매사에 진지했고,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센터 일을 하며 그는 제 뜻을 굽히거나 주도적 역할을 동료에게 넘기는 데 인색해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자신이쏟은 관심과 열정만큼 세상의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과도하게 바라는 유형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고생한 이들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일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오크파크의 성취는 그가 혼자 이룬 게아니었다. 원년 마을 이사회 멤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레이먼드와 함께 센터 창립 및 운영의 3인방으로 꼽히는 셔를린 라이드Sherlynn Reid와 버네트 슐츠vernette Schultz 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대학에서 연극·연기를 전공한 라이드와 슐츠는 레이먼드의 친구이자동지로서 저 모든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갔다.  - P63

1968년 오크파크로이주한 흑인 여성 라이드는 흑인 이주자들과의 소통에 크게 기여했고, 훗날 주민소통센터 책임자가 돼 건물주협회 등 집단과의 상충하는 이해를 도맡아 조정했다. 슐츠역시 원년활동가로, 공정주택 운동의 전미 협의체인 ‘오크파크교류협의회OPEC‘ 창립을 주도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고교 시절 펜화를 출품해 ‘전미학업상‘의 회화 부문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 레이먼드는 은퇴 후 수채화 작가로 활동했고, 두 편의 장편동화를 썼으며, 지역 신문에 가드닝 관련 에세이를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그는 두 차례 결혼과 이혼을 했고, 첫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수학자인 세 번째 남편과 해로했다. - P63

벤 바레스
성차별에 맞선 트랜스젠더 과학자


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은 크게 나눠, 뉴런이라 불리는 신경세포와 뉴런을 감싸고 있는 신경교세포neuroglia cell, 신경아교세포라고도 불림로 구성된다. 과학이 최근 100년간 주목해온 건 당연히 뉴런이었다. 뉴런은 전기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며 감각, 운동, 사고 등 복잡한 인지·생명 활동을 담당한다. 뉴런보다 열 배가량 세포 수가많은 신경교세포는, 아교라는 이름처럼, 뉴런을 붙잡아주는 지지대 혹은 산소나 영양을 공급하는 보조역 정도로 홀대당했다. - P65

그런데, 뉴런과 신경교세포(이하 교세포)가 주종 관계가 아닌 대등한 협력관계라는 사실이 10여년전 밝혀졌다. 교세포에도 여러종류가 있으며, 저마다 기능이 달라 뉴런 확장과 정보 처리 속도및 효율 증강, 뇌 면역을 포함한 신경활동 전반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루게릭병 등 다양한 난치·불치 신경 퇴행성질병들과 ‘만성‘이나 ‘신경성‘이라고 얼버무려야 했던 ‘원인 모를통증들도 교세포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그렇게 알게 됐다. - P65

바레스는 미국의 4~18세 청소년 2만 명의 수학 성적을 조사한결과 유의미한 젠더 차이가 없었다는 데이터, 여성과 소수자가 연구비를 타기 위해서는 남자보다 2.5배의 연구 실적이 필요하더라는 조사 자료, 2005년 미국 국립보건원의 혁신과학자상 PioneerAward 심사위원 64명 중 60명이 남성이었고 수상자 9명 전원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서머스를 편든 하버드대 정치학자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감정적(덜 이성적)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분노에 의한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건 여성보다 남성이 25배나 많다는 데이터를 들어 반박했다. - P67

하버드 의대 신경학과 교수 베스 스티븐스는 2004~2008년 바레스연구소에서 성상세포와 미세아교세포의 면역기능 연구를주도한 연구자였다. 그가 하버드대에 자리를 얻어 스탠퍼드대를떠나게 되자 바레스는 스티븐스에게 그 연구를 하버드로 가져가서 계속하라고 권하며 "너보다 그걸 더 잘 해낼 사람은 없을 것" 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기 연구소의 아이템을 후배 연구자에게떼어주는 예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앞서 바레스는 자신이 찾아낸 교세포를 종류별로 배양하는 독자적이고 효율적인 기법을 조건 없이 공유하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 스탠퍼드대 신경생물학과장을 맡은 앤드루 휴버먼은 저 모든 그의 미덕을 ‘과학의 열정‘이란 말로 압축했다.
"그의 모든 열정은 오롯이 과학을 향해 있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과학 안에서 더불어 성장하게 하는 것을 그는 소명이라 여겼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레스연구소의 연구진은 다양성의 모범적인 표본 같았고, 여성이 남성보다 많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그렇게 즐겁고 창조적으로 다이내믹한 - P72

연구소는 없을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말했다.
바레스는 2016년 4월 췌장암 진단을 받고 20개월의 투병 끝에2017년 12월 27일 별세했다. 향년 63세. 스탠퍼드대는 부고에서투병 말기의 바레스가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든 반드시 해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매달린 것이 제자 및 연구원들의 추천서를 쓰는 일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분화한 연구자들이 하버드대와 듀크대, 뉴욕대를 비롯한 각지로 퍼져서 각자 교세포와 씨름하고 있다.
2017년 1월 스탠퍼드대가 개최한 ‘바레스 헌정 심포지엄‘은 드물게 성대했다고 한다. 그 행사는 물론 학술대회였지만,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반차별 · 다양성 옹호활동가로서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바레스의 정신과 업적을 기린 자리이기도 했다. 스탠퍼드대 총장 마크 테시에 라빈은 기조 발언에서 30년 동안 쌓아온바레스와의 우정과 그의 헌신, 용기를 회고하며 "우리가 그처럼낡은 생각에 도전하는 용기와, 차이를 포용하며 서로에게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하는 한 우리의 잠재력은 무한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벤이 가르쳐준) 다양성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 P73

이문자
피해 여성의 곁을 지킨 ‘여성의전화‘의 대모


한국 여성운동이 종속적 운동에서 벗어나 여성주의(페미니즘)의 독자적 운동으로 갈래를 형성한 시기를 여성사 학계는1980년대 어름으로 본다. 도식화하면 여성운동은 개화기 신여성의 계몽-교육 운동으로 시작해 일제시대 민족주의 계급운동과구국-독립운동에 동참했고, 해방 직후에는 이념 정치단체의 선전 활동에 머물거나 직능단체의 권익 운동에 치우친 경향이 강했다.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 들어 여러 단체가 가족법 개정과 여성·노동·인권 등 이슈들을 부각했지만 그 역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큰 흐름 안에 있었다. - P77

이러한 오랜 활동 경험과 반성 위에서, 1970년대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학습한 활동가들은 1979년 독재 권력의 붕괴와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며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젠더 차별 및억압의 근원적 문제로 눈을 돌렸다. 신군부가 올림픽 유치 등을통해 학살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던 무렵인 1983년, ‘서울의 봄‘의 좌절과 위축감을 떨쳐낸 활동가들이 6월 11일 ‘여성의전화‘를, - P77

6월 18일 ‘여성평우회‘를 각각 창립했다.


"(우리의 목적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들과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돕고 가정에서 폭력을 추방하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심리적 건강에 기여" 하며 "여성들에게 비인간적 삶을 강요하는 모든 제도나 관습, 인습을 없애고 남녀의 평등한 인격 관계를 수립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루는 데 있다."
-여성의전화 창립취지문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 한국 여성은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자요, 산업사회의 소외된 계층이고 국토 분단의 비극적 피해자이다. (.…)한국 여성이여, 우리 모두 단결하여 여성의 인간화 운동에 앞장서 나가자."
-여성평우회 발기취지문 - P78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등 제도-정치 투쟁과 활동가 재생산을 위한 이념 교육에 치중하던 여성평우회는, 1980년대 중반운동 진영의 이념-노선 갈등과 분열 속에 1987년 8월 해산했다.
활동가 일부는 노동운동과 제도권, 1987년 출범한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로 무대를 옮겼다.
이념보다는 현실, 즉 가정폭력과 성폭력이라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문제와 대치했던 여성의전화(이하 여전)는, 역설적으로 너무나만연한 범죄적 사례들 덕에, 공감과 분노라 해도 좋을 ‘현장의 힘‘ - P78

덕에 조직의 역량과 규모를 키우며 운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심화해왔다. 서울 중구의 한 건물 옥탑방에서 달랑 전화기 한 대로 문을 연 여전은 2021년 현재 전국 25개 지부에 32개 상담소와 10개의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둔 우람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이라는 말 자체를 대부분 생경해하던 때였다.
작가 박완서가 여전 사무소 개소식 축사에서 언급한 "여자 팔자" 란 말이 가정폭력을 아우르는 잔혹한 일상어였고, 남의 가정사는모른 척하는 게 미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창립 첫해 여전이 서울 지역 기혼 여성 708명을 상대로 벌인 한국 최초 가정폭력 실태조사의 공식 용어도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구타‘였다. 조사 결과 구타당한 경험이 있는 이는 응답자의 42.2퍼센트였다. 그해 여전에는 6개월 동안 4천여 통의 전화가 쇄도했다. - P79

이문자는 광의의 젠더폭력 피해자였다가 활동가로 변신해 여전의 역사를 몸으로 지탱해온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1988년 자원봉사자로 여전과 인연을 맺은 이래 상담부장과 부설쉼터 관장, 여성인권상담소장 등을 역임했고, 오늘날 여전 안팎에서 맹렬히 활동 중인 수많은 전문 상담가를 양성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성폭력 관련법 제정 등 여러 정책적 진전을 위한 청문회와 투쟁을 이끌었다. 저 세월 동안 그는 피해 여성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정년퇴직 후에도 김포와 성남 등의지역에서 여전 활동을 거들었다. 선후배 및 동료 활동가들이 정당의 공천을 받아 정치인이 되고, 관변 여성단체나 공직의 장을맡아 떠나는 동안에도 그는, 적어도 이력으로 드러난 바에 따르 - P79

면, 울타리 너머를 기웃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안으로, 피해 여성의 곁으로 다가가고자 했다. 1990년대 말 정년에 가까운 나이로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여성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복지학을, 다시 말해 이론보다는 실천에 가까운 전공을 선택한까닭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외적 활동이 드물었던 탓에 그는 진영 바깥에는 상대적으로덜 알려졌지만, 그랬기 때문에 여전의 활동가들은 그를 조직의
‘대모‘나 ‘맏언니‘ 혹은 ‘끈끈이 같은 존재‘라 부르며 존경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리 길지 않은 한국 여성·시민운동 역사에서정부기구NGO의 참된 가치와 현장 활동가의 위태로운 존엄을 지켜냈다. 이문자가 별세했다. 향년 78세. - P80

2005년 책 왜 여성주의 상담인가』에 수록된 자전에세이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세상을 보다」에 이문자는 아이들과의 생이별을 자초했다는 자책감과 이혼 직후의 고립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이제는 다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친정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뒤였고, 아버지는 젊은 여성과 재혼해 깨를 볶고 있었으며, 하소연이라도 할 만한 자매들은 모두 외국에나가 살던 때였다.
1988년 ‘변월수 사건‘이 터졌다. 강간하려는 남자의 혀를 깨물어 자른 혐의(상해)로 피의자가 된 32세 여성 변월수에게 1심 법원은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며, 판결문에 "앞길이구만리 같은 청년의 혀를 잘라 …" 라고 썼다. 이문자가 여전과 - P81

인연을 맺은 게 그해였다.
그는 한 후배의 소개로 1988년 3월 여전 상담원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해 6월 어느 바닷가에서 가진 수련회에서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렵사리 털어놓자 모두가 이혼의 용기를칭찬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자리의 감동을 그는 평생 마음에새겼고, "(그것이)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였다"고 훗날 썼다. 그는 만 2년간 자원봉사자로 일한 뒤 정식 상담자가 됐다. 상근자 월급이 40만 원쯤이던 시절이었다. - P82

 ‘양육비해결총연합회‘를 설립해 이끌어온 조카 이영 씨도 고모 이문자를 "살가운 분이라고 말하긴 힘든, 어려운 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고모는 결코 남에게 치대지 않는 독립적인 성향의 여성이셨다"고, "일상에서도 부당하거나 잘못된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니어서, 피해자를대할 때도 상담과 위로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깊이 고뇌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고모여서, 이영 씨는 새 단체를 꾸려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의존하고 치대는 인상을 줄까 봐 고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문을 구하지 못했다고한다. - P86

이영 씨가 2000년대 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친구를 고모에게소개한 일이 있었다. 듣는 사람조차 답답해할 만큼 ‘바보같이 너무 착하기만 한 친구여서, 혹시 고모가 호통이라도 치지 않을까조마조마했는데, 웬걸 그렇게 자상할 수 없더라고, 조곤조곤 위로하고 격려하며 조언을 건네는 모습이 "진짜 내 고모 맞나 싶더라"고 했다. 이문자는 내담자에게서 젊은 날 수련회 바닷가에 앉아 있던 자신을 보고, 그를 보듬어주며 ‘임파워먼트‘를 알게 한동료들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보곤 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문자가 생각하는 ‘전문가‘였다.
2013년 여전 후배들이 마련한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 이문자고희 파티‘에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았다"고, "여전은 내 삶"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그는 서울 마포의 작은 빌라에서 혼자 지내며 지역 독서 모임과 후배들과의 산책 모임 등으로 활동적인 말년을 보냈다. - P86

연금과 ‘노인 일자리‘월급 28만원까지 합쳐월 100만원 남짓 되는 돈이 그의 수입의 전부였다고 한다. 생전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가난한 독거노인"이라 말하곤 했다지만, 그건 농담도 엄살도 아니었다. 그의 사정을 아는 후배들이 언젠가 1박 2일여행을 함께 한 뒤 그의 몫의 경비를 대신 부담하려 하자, 버럭 역정을 내며 "이러면 함께 안 놀겠다"고 하더라고, 한 후배는 전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모임도 활동도 줄었고 ‘노인일자리‘도 끊겼다. 그는 좀 더 고독해졌고, 가난해졌다.
가까운 후배들은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만나는 것과 별개로,
‘문자리 산책방 with 이문자‘ 등 이름을 붙인 정기 모임을 만들어그의 안부를 챙겼다. 그는 8월 2일 모임에 참여하지 못했다. - P87

샤론 머톨라
길 잃은 동물들의 수호자


벨리즈Belize는 ‘카리브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 작은 나라다. 국토 면적(2만2970제곱킬로미터)은 경기도의 약 두배. 그중 60퍼센트가 야생의 우림이고, 25개의 자연보존지구가있다. 카리브해와 면한 386킬로미터 해안선 연안은 호주 그레이트배리어리프 다음으로 긴 산호초 띠를 둘렀고, 450여 개 섬들이구슬처럼 꿰여 있다. 그런 환경 덕에 주력산업도, 코로나19 사태로 지금은 어렵지만, 농어업에서 관광서비스업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GDP의 10퍼센트 남짓이던 관광업 비중은 2019년44.7퍼센트였다.
긴 식민지 침탈을 겪고도 온전했던 건 이렇다 할 자원이 없어서였다. 2011년까지 종주국이었던 영국이 군대를 파견해 국경을지켜준 덕에 정정이 불안한 이웃 나라의 침탈을 면했고, 인구 급중의 압박도 적어 1981년 독립 당시 약 20만 명이던 인구는 근년에도 40만 명 정도다. - P89

벨리즈 국민들에게 자연-생태의 가치를 일깨운 존재가 있었다. 결코 동물원 같지 않은, 벨리즈 유일의 ‘벨리즈 동물원‘이었다. 그동물원은 1983년 문을 연 때부터 지금까지, 다치거나 병들거나어미를 잃고 구조된 녀석들이 한 식구처럼 지내는 매너만 지키면 철창 없이 사는 곳이다. 2021년 현재 식구는 45종 200여 마리. 다리 하나를 잃은 재규어 ‘엔젤‘과 벨리즈의 스타라는 고아 테이퍼 ‘에이프릴‘ 등 모두가 사연이 있고 이름이 있다. 시민들도 그들을 고유명사로 부르며, 이웃처럼 안부를 챙긴다.
한마디로 그곳은 진귀한 쇼의 공간이 아니라, 종의 존재를 이해시키고 공존의 가치를 도모하는 야생의 대사관 같은 곳이고,
국제야생보존트러스트WPTI, wildlife Preservation Trust International 전의장 빌 콘스턴트의 말처럼 "좋은 동물원이란 게 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곳"이다. 시민들은 ‘나는 벨리즈 동물원을 사랑해 I Love TheBelize Zoo‘란 문구의 스티커를 자랑삼아 자동차 범퍼나 바이크에 붙이고 다닌다. - P90

동물원만큼이나 유명한 게 설립자 샤론 머톨라sharon Matola다.
서커스단 댄서 겸 맹수 조련사로 일하던 무일푼의 28세 여성이맨몸으로 야생에 울타리를 두르고 동물원 간판을 내건 사연에서부터, 동물들 먹이느라 닭을 키워 팔고 ‘막노동꾼‘ 같은 관광가이드로 5년 넘게 뛰어다닌 초기의 고생, 무슨 행사 소식만 들리면배낭에 드레스를 챙겨 넣고 낡은 모터바이크로 달려가서는 동물원 사진첩을 펼쳐 보이며 후원을 청하던 일상, 때로는 배낭에 보아뱀 ‘벨보아‘를 담아 초등학교를 돌며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 P90

가르치고, 초청장(어린이 무료)을 돌리고, 동요를 짓고 동화책을내 읽힌 일, ‘국가의 공적enemy of the state‘이란 비난까지 들으며 댐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한 일까지………. 그의 이름은 몰라도 ‘주 레이디Zoo Lady‘를 모르는 이는 드물었고, 불량배들도 그를 마주치면 돌아설 정도였다. 벨리즈 출신인 캐리비언 기후변화센터 사무총장 콜린 영은 "벨리즈 시민들이 갖게 된 자연에 대한 이해의대부분이 머톨라에게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동물들과 함께 뒹굴며 살 수 있어서.……… 세상에서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던 벨리즈의 ‘주 레이디‘ 샤론 머톨라가 2021년 3월 2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 P91

2019년 지구의 날(4월22일), 벨리즈 미국대사관은 "벨리즈 청년들의 롤모델"인 머톨라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머톨라는1988년 인터뷰에서 "벨리즈에서 평생 살 것"이라고, "지금 입은이 재킷도 단돈 25센트짜리"라고 말했다. 1990년 그는 벨리즈인으로 귀화했다. 2017년 그는 동물원 운영권 일체를 직원들에게물려주었고, 숨지기 2주 전까지 동물들의 야생 복귀 훈련을 도우며 어린 동물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그는 벨리즈에 오던 무렵만 해도 동물원운영은커녕 "환경에 대한 생각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동물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동물을 알아가며 변화해온 벨리즈시민들이 그를 환경보호론자로 만들었다고, "(그렇지만) 결코 엘리트 환경론자가 되고 싶진 않으며 "다만 땅바닥에 엎드려 땀흘리는 게 좋다"고 했다. 뒤를 이어 동물원 운영을 맡은 셀소 푸트의 말처럼 벨리즈 동물원은 샤론 머톨라의 삶 자체였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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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인권은 과분하지 않은가."

친구가 제게 한 말입니다.
현실을 묻는데 당위로 답할 순 없는 노릇이죠. 말이나 글로 된멀끔한 당위는 더러 식상하고, 모욕적일만큼 공허하기도 합니다.
저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말이 질문이었다면, 저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것이 추궁이었다면, 솔직히 저는 맞장구치고 싶을 때가 잦습니다. 형사의 집요한 추궁에 마침내 무너지는 용의자처럼 말이죠.
냉소와 염세, 악마의 유혹이라고도 한다는 달콤한 포기. - P6

어쩌면 저 질문은, 말년의 마더 테레사가 신의 존재를 의심했던것처럼, 이 책에 엮인 이들이 평생 힘겹게 품었던 질문, 그들이 답해야 할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의 ‘당신‘들은 위인전의 주인공들과 달리 세상으로부터 부단히 외면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 실패했거나 기대한 바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한 이들입니다. - P6

대체로 늘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듯,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의미끈한 논리는 당위의 멀끔함만큼이나 믿음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의 글들은 저 추궁에 투항하지않기위해제 나름 아둥거린 작은 흔적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022년 11월최윤필 - P7

도티 프레이저
여성 최초 스쿠버 강사가 헤쳐온 길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토박이 도티 프레이저 Dottie Frazier는2019년 만 7세에 자신의 애마 ‘가와사키‘ 모터바이크를 팔았다.
차량면허관리국이 그에게 면허증을 갱신해주지 않아서였다. 십대 말부터 바이크를 몰고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멕시코 국경 너머까지 누비고 다닌 그였다.
나이 때문에 겪는 짜증스러운 일들이 못마땅했던 그는 구십대에 접어든 이후 "나를 평범한 노파로 여긴다면 그게 당신의 첫번째 실수가 될 것"이란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보란 듯 입고 다니곤 했다. 물론 그를 아는 자라면, 롱비치 해양 레포츠의 산 역사인 그에게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었다.
프레이저는 걸음마와 함께 수영을 익혀 대여섯 살 무렵부터 스킨다이빙을 시작했고, 고교 시절엔 눈뜨자마자 강아지를 안고한바탕 서핑을 한 뒤에야 등교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는 롱비치 바이크 서클의 유일한 여성 정회원이었고, 롱비치 최초 다이버 클럽 ‘롱비치 넵튠스Long Beach Neptunes‘의 1940년 창립 멤버였다. - P17

그가 고집을 부린 덕분에 롱비치 작살낚시대회 여성 부문이 만들어졌고 그는 꽤 오래 혼자 출전해 우승을 독차지했다.
무엇보다 그는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 스쿠버다이버 강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여성으로는 처음 다이버 클럽을 열어 운영했으며, 여성용 다이빙 슈트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보급하면서미 해군과도 협업한 개척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다이버들의 전설이었다.
다이빙 전문지 〈스쿠버뉴스scubanews>의 평가처럼, 그의 진짜놀라운 점은 ‘무엇을 해냈느냐가 아니라 언제 해냈느냐‘를 살펴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는 여자 수영복도 없던 1920년대에 수영을 시작했고, 여성 직업이랄 게 뻔하던 1940년 18세 때부터 프리다이빙 강사로 돈을 벌었다. 스쿠버다이빙이 갓 등장하던 무렵당국과 싸우다시피 해서 강사 자격증을 땄고, 여자라서 못 미더워하는 남성 수강생들을 가르쳤다.
파도와 조류, 수압 못지않게 거칠고 억센 젠더 차별의 장애물들과 부딪치며 여성 다이버의 세계를 연 파이터, 도티 프레이가 2022년 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만 99세.
- P18

1950년대 초 등장한 스쿠버다이빙은 남성 레포츠였다. 장비며 옷이며 모두 남성 체형에 맞춰 제작됐다. 여성에겐 너무 무겁고 컸다. 고무 소재 슈트는 비싼 탓에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1950년대 말 등장한 네오프렌 소재의 웨트슈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여성들의 몸에 맞지 않았다. 프레이저보다 2년 뒤인1957년 스쿠버 강사 자격증을 딴 미국 ‘여성 다이버 명예의 전당‘ 회원 바버라 앨런Barbara Allen도 당시 상하의로 나뉜 남성 다이빙복을 입다가 나중에야 맞춤복을 입었다. 1980년대 여성용 웨트슈트가 출시됐지만, 역시 명예의 전당 멤버인 로레인 새들러Lorraine Sadler에 따르면 "바비인형 몸매의 여성이나 입을 수 있는옷"이었다. 신축성이 가미된 네오프렌 원단 슈트가 출시된 것은1980년대 말부터였다. 1970년대 말 등장한 방수 드라이슈트 역시여성용 기성복은 1995년에야 출시됐다. 새들러는 옷이 너무 커서몸에 덕트테이프를 친친 감곤 했다고 말했다. 부력을 조절해 원하는 수심에 머물 수 있게 돕는 다이빙 장비인 부력 조절기도 여성용은 1988년에야 처음 출시됐다. 초창기 여성 다이버들은 장비의 허들까지 넘어야 했다. - P21

그는 배나 자동차 변속기를 직접 교체할 만큼 기계 수리에도 능했다. 그가 바버라 앨런을 태우고 샌타카탈리나섬으로 다이빙투어를 갔다가 보트 엔진이 멎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앨런은 "배를 견인하려고 다가온 해안경비대 순시선에 프레이저가 손사래치더니 ‘이걸 못 고치면 내가 아니지‘라고 하곤 공구 상자를 들고 와 기어코 고치더라"고 회고했다.
프레이저는 스키와 수상스키에도 능했고, 라켓볼과 당구는 선수급이었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다이빙 강사였고 ‘상업 어부commercial fisher‘였다. 그에게 다이빙은 대다수의 초창기 여성 다이버들과 달리 놀이에 앞서 생업이었다. 스키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받은 뒤에도 다이빙복에 지퍼를 달아 입었고, 작살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노리고 달려든 대형 바다표범에게 부딪쳐 갈비뼈 네 대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샌타카탈리나섬에선 달려드는맷돼지를 작살총으로 제압한 적도 있었고, 바하멕시코Baja Mexico에선 거대한 백상아리와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그는 호기심을보이던 백상아리를 향해 정면으로 유영해 다가가자 상어꽁무니를 빼더라고 했다.  - P22

말년의 프레이저는 롱비치에 위치한 자신의 집 뜰을 텃밭으로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뜰에는 꽃이 아니라 콩, 토마토, 베리, 비트, 아티초크, 브로콜리 등 식용 채소와 유실수로 가득했다. 바다에서처럼 그는 마당에서도 실용적 가치를 함께 추구했다. 지역소방대장을 지내고 은퇴한 아들 대니 프레이저 Danny Frazier는 "어머니는 자급자족을 원했다……. 심지어 밭에 뿌릴 물도 커다란통에 빗물을 받아썼다"고 말했다. - P23

그는 아버지에 이어 롱비치 운영위원으로 말년까지 일했고, 만93세였던 2016년 샌버나디노산San Bernardino Mt. 집라인 최고령도전 기록을 세웠다. 2008년 넘어져 경미한 뇌진탕을 입고도 "나를 물러서게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호언했다는 그다. 2020년 3월그를 인터뷰한 한 기자에게 만 99세에 별세한 아버지의 수명 기록도 넘어서겠다며 "만 100세 생일파티에 초대할 테니 시간 비워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2019년 미국 다이빙협회 개척자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여성 다이버 명예의 전당에 합류했다.
그와 같은 해 명예의 전당에 든 다이버 겸 작가진 B. 슬리퍼Jeanne B. Sleeper는 "프레이저가 앞서 파도를 부수며 길을 터준 덕에 우리는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 산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 P23

콘라트 슈테펜
사라지는 빙하의 최초 목격자


지구온난화는 위기가 아니라 축복(빙하기 지연설)이며 인간 탓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일부(자연 주기설)라는 끈질긴 가설들이47 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해양학자 윌리스 브로커WallaceBroecker에 의해 사실상 처음, 과학적으로 부정됐다. 브로커는 ‘기후 화석‘ 중 하나인 심해퇴적물을 분석한 1975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기후변화의 원인과 충격적 추이를 ‘데이터‘로 처음 입증했다. 기후 연구는 그를 기점으로 옳은 방향을 찾았고 표나게다급해졌다. 1970년대 말 무렵엔 한 해 평균 20~30 편의 주목할만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기후 위기의 실질적 분수령은 1980년대 말 이후의 냉전 종식이라 해야 한다. 미국물리학회 과학사센터장 스펜서 워트Spencer Weart의 말처럼, 냉전기 두 진영은 ‘상대의 핵탄두 숫자에더듬이를 대느라 바빠 50년 뒤 세상에 대비할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냉전 이후에야 기후 위기 연구 예산이 실질적으로 책정됐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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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1967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성애자 사내아이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를 거쳐 1992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다만 서자여서 어른들의 ‘호적 타령‘을 들으며 자랐다. 2006년말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가구 일을 배우며 수도권 변두리 함바집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잠깐 한솥밥을 먹은 적도 있다. 솜씨도 벌이도 변변찮아 2009년 직장에 복귀한 사실을 [가만한 당신] 약력에 누락했다. 국적·지역·성·젠더 · 학력 차별의양지에서 살아온 내게 ‘소수자성‘이란 게 있다면 미미하나마저 경험 덕일지 모른다.
지은 책으로 [가만한 당신』 『함께 가만한 당신』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겹겹의 공간들]이 있다.


나는 윤리야말로 궁극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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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던 선숙은 사람들의 시선이 연달아 자신에게 꽂히고 나서야 마스크를 안 쓴 걸 깨달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현관문 옆 고리에 걸린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까먹지 말라고 문 옆에걸어두고서도 그냥 집을 나서기를 수차례...... 이놈의 마스크는 써도 써도 적응이 안 됐다.
코로나 시대 역시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데, 이번에는 이 종족도 어쩔 수 없는지 백신도 영 신통치 않아 보였고 치료제도 지지부진이었다. 변이 바이러스인지 뭔지는 해괴한 이름을 달고 계속 튀어나왔고, 돌파 감염이니 뭐니 해서 맞은 백신을 또 맞으라고 했다. 그것도 이번에는 다른 상표의 백신을 맞아야 할지 모른다는데, 부작용도 있다고 하고 노인들에게 - P7

위험하다고도 하는 둥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러스가 요동치는 세상에서 선숙 같은 소시민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집에서 편의점까지 500미터 남짓 거리를 걷는데도 숨 가빴다.
한여름 열기에 마스크로 호흡까지 힘들어지니 살집이 있는 선숙으로선 밖에 나오는 일 자체가 불편했다. 선숙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는 예삐와 까미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밤까지 일해야 해서 녀석들 산책이나 시킬 수 있을는지 걱정이 들었다. - P8

아들은 이제 OTT 시대라면서 넷플릭스라는 돈 내고 보는 채널이 있다고 했다. 자기 회사는 그곳에 작품을 걸 거라고 했다. 선숙은 용어부터 이해가 잘 안 됐지만 아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설명해주는 모습이 그저 흡족했다. 자랑하고 싶은 자기 일을 하게 된아들이 대견했고, 그걸 엄마에게 표현해준다는 게 고마웠다. 불과1년 반 동안 일어난 두 사람 사이의 변화였다.
선숙은 이제 아들을 닦달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고시 같은 걸 보라고도 안 한다. 결혼하라는 말도 안 하기로 했다. 아들 세대 앞에놓인 세상 형편이 자신이 젊을 때의 기준과 다르다는 걸, 아들의 설명을 듣고 인정한 뒤에 일어난 변화였다. 자신과 분리되려는 아들의 모습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거리를 지키게 되었다. - P17

평소 같았으면 선숙은 거침없이 생각을 털어놓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막무가내. 어찌 보면 자신의 지난 삶에서 선숙이 일을 해결하는방식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대할 때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그때는 ‘나‘가 아니라 관찰자의시점으로 자신의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고 배웠다. 누구에게? 영숙언니에게 아들과 대화의 물꼬를 튼 시점에서 얼마 안 지나 다시 성질이 끓어오르던 찰나, 그녀의 주의 깊은 조언으로 아들에게 막무가내 따지는 버릇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후 선숙은 영숙 언니에게 고맙다고 밥을 샀고, 당시 유행하던마라탕이란 걸 먹으며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조언 덕에 아들과 관계가 한결 나아졌다는 말에 영숙 언니는 그런데 그게 도대체 자기문제에는 안 먹히는 게 수수께끼라며 풀이 죽었다.  - P27

취준생 3년 차에 접어드는 소진은 그동안 수많은 면접에서 떨어졌다. 서른 번이 넘고 나서는 더 이상 낙방 횟수를 세는 걸 포기했다. 학점도 스펙도 나쁘지 않았다. 영어 성적은 최상급이었고 프리토킹도 가능했다. 하지만 구직 전선에서는 점점 후퇴해 밀려나고있었다.
1년 차 때는 면접에서 많이 떨어졌다. 2년 차에는 서류 전형에서도 많이 떨어졌다. 3년 차인 지금은 어디서부터 얼마나 떨어질지가늠도 안 됐다. 딱지가 앉은 거 같아도 늘 쓰라렸다. 그렇게 떨어지고 떨어지다 보면 서울에서도 떨어져 나가겠지. 멀리 더 멀리 떨어져 나가 목포의 고향 동네로 돌아가겠지.
어쩌면 소진은 그날이 올 때를 기다리며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는 듯했다. 그렇게 완전연소 하고 나면 귀향해도 후회가 없을 거란명분, 그 명분이 소진을 서울에서 버티게 하는 이상한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 P48

근배 씨가 다시 자갈치를 아작 씹었다. 소진은 연갈색 음료를 마저 비웠다. 그런 다음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했다.
"가물치 씨!"
근배 씨의 하이 톤 외침에 소진은 문을 잡고서야 했다.
"이제 소진 씨 내가 가물치라고 부를 겁니다. 힘센 가물치 씨. 그러니까 호구로 살지 말고 포식자로 살라고요. 알았죠?"
소진은 대답 대신 유리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혔다. 사우나 같은열대야의 밤으로 걸어 나갔다. 열기와 객기를 연료로 삼고 싶었다.
그러자 누구 하나 함부로 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오기가 끓어올랐다. 진짜 가물치가 된 듯했고 자정의 어둑한 골목길도, 남영역 굴다리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빠가 일하다 돌아가신 낯선 이 도시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P78

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게를 마친 뒤 편의점 야외테이블에 앉아 봄바람에 묻은 벚꽃 내음을 맡으며 늦게까지 소맥을 기울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더워지면서 확진자가 늘어나더니, 가게도 편의점도 밤 열시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놈의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조치로 인해 가뜩이나 외로운 최 사장은 더욱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죽을 맛이다.
지난해 봄, 코로나가 터졌을 때만 해도 연말쯤 되면 어떻게든 잡히겠지 했다. 미국이고 영국이고 선진국들이 백신도 개발하고 치료제도 개발할 텐데, 그리고 그걸로 돈을 벌려 할 테니 머지않아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2020년이 끝날 때까지 역병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졌고, 영업 제한과 거리두기는 단계를 바꿔가며 점점 정교해졌다. - P83

손님들은 어떤가? 10년 전 단골 어르신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좀처럼 못 오시고, 주 고객이던 인근 대학 교수와 교직원들은 새로생긴 맛집들로 발걸음을 옮긴 지 오래다. 무엇보다 이 상권의 메인소비자인 대학생들에게 소고기는 비싼 음식인지라 외면 받고 있었다.
아무튼 가게라는 건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삶의 터전이자 직원과 손님들 모두 행복한 곳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진 이곳은 망해가는 가게의 특징들만 독버섯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고기 장사로 30년간 IMF, 사스, 구제역, 광우병 소고기 파동, 메르스 등 수많은 고비를 넘긴 최 사장이었지만, 이 전 지구적 재난앞에서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 P88

세상은 불공평하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빠는 비 오는 날만 아니면 늘 현장에 나가지만 버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청 받는 오야지 밑에서 일하는 잡부여서 그렇다고하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늘 그 사람들 욕을 한다. 치사하고 더럽다고. 그리고 뒤이어 꼭 이 말이 이어진다.
민규, 너 인마 공부 열심히 해. 공부 못하면 나처럼 여름에 더운 데서 일하고 겨울에 추운 데서 일하는 거야.
세상은 진짜 불공평하다. 환경미화원 엄마를 봐도 역시 알 수 있다. 엄마는 용역회사 소속으로 파견 가서 일하는데, 정작 일하는 엄마와 동료 미화원보다 용역 사장이랑 직원들이 돈을 훨씬 더 많이번다고 한다.  - P125

"맙소사. 어떻게 돈이 안 중요해요!"
"진짜 안 중요해. 그러니까 너한테 오늘 독서토론 잘했다고 간식도막사줄 수 있다고. 자, 뭐 먹을래?"
돈가스 샌드위치는 역시 맛있었다.
민규가 돈가스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아저씨는 손님을 받고, 토론을 하느라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음료를 새로 채우고 진열대에 과자와 컵라면도 채웠다. 그러고 나서 안 팔린닭튀김은 먹어서 처리해야 한다며 전자레인지에 데우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군침이 났다. 아저씨가 닭튀김도 먹고 가라고 했지만,
눈치가 있는 민규는 냉큼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조용했다. 열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고 아빠는 잠든 듯했다. 민규는 내일도 비가 안 오길 바랐다. 그래야 아빠가 새벽에 일을 나가고 엄마랑 싸울 일 없이 조용할 테니. - P145

인수인계 첫날부터 근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카운터 안은 마치 비행기 조종실처럼 복잡해 보였다. 정면의 포스기 화면은계기반 같았고, 우측에는 점포 운영 내역이 잔뜩 뜬 모니터가 있었고 그 아래엔 점포 경영 시스템 태블릿과 검수기, CCTV 본체, 인터넷 모뎀, 와이파이 기기, 오디오 기기, 프린터가 촘촘히 자리하고있었다.
왼쪽으로는 커피머신과 튀김기가 언제든지 커피를 뽑고 닭을 튀길 기세였고, 카운터 아래엔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주위를 모자이크 처리하듯 수많은 공지사항이 다닥다닥 붙어 포위하고 있었다. - P171

유통기한 체크
튀김 상미시간 등록
커피 찌꺼기 비우기
이번 주 점격 통합지표 확인
돌발상황 대처 매뉴얼 숙지
FF 배송매니저 연락처
CK 택배기사 연락처
용모/복장 점검
접객 10계명 연습
주류/담배 판매 시 신분증 꼭 확인
마스크 착용
밤 열시 이후 매장 내외 취식 금지 - P171

결제 전 통신사 할인/적립 확인
온장고/냉장고 보충 점검
상품진열/보충시 페이스 업
카드 분실 주의
봉지 유상판매
아니 편해야 할 편의점이 왜 이리 복잡하고 불편한 거지? 점원입장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생각보다 생소한 단어도 많고 조작법을 습득해야 하는 기계도 많았다. 시재 점검과 입고된 물류 검수는틀리기 일쑤였고포스기 사용법은 유튜브를 틀어놓고 수차례 연습해야 했다. - P172

"만화점이라…… 재밌는데요. 만화책도 있을 것 같고. 하하."
곽 선생은 이미 근배를 파악했는지 반응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백화점이 영어로 디파트먼트 스토입니다. 백화점은 물건이 많지만 파트가 나뉘어 있어 해당 점원이 자기 파트만 담당하면 되죠. 하지만 편의점은 혼자서 수많은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니 일이 쉽지 않겠죠? 나도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세상에는 사소한 일 같아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 없구나 느끼며 많이 배웠습니다."
근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어르신 내가 말 많이 하니까 지지 않으려고 자기도 말씀을 많이 하시네.‘ 그럼에도 새겨들을만한 말이었다. 근배는 편의점 일을 만만히 여겼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 P173

엄마를 보낸 후 갖은 일을 전전하며 살게 되자 사는 건 그저 사는것일 뿐 특별한 의미 따위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걱정은 독이고비교는 암이었으며, 과거는 끝났고 미래는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뿐이었다. 지금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었으며 남은 인생은 언제든반납할 용의가 있었다.
그즈음 코로나가 터졌다. 갑갑한 걸 못 참는 엄마가 이 답답한 재앙 전에 하늘나라로 간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엄마, 살아 계셨으면 매일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제를 로션처럼 바르고 어딜 가나 검문 받듯 방문 기록을 남겨야 하는 꼴을 겪어야 했어요. 하늘나라는안 그렇죠? 꽤 지낼 만하시죠? - P194

2021 년 새해가 밝았다. 왠지 태양도 마스크를 쓰고 일출할 것 같았다. 소의 해이고 백신이 소에서 기원한 단어라며 방송에서는 희망찬 전망을 떠들고 있었으나 근배는 별다른 희망을 품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던 즈음 알바를 시작해 수많은 일을 전전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마스크가 숨통을 막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일자리는 희박하거나 불안했고, 더럽거나 위험했다. 부유한 누군가는 마스크도 좋은 걸 쓰고 거리두기로 인해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근배와 같은 도시 빈민에게 코로나 시대는 전시체제와 다름없었다. 생존에대해 고민해야 했고 감염되고 나면 부상병처럼 후송되어 재기가불가능한 꼴이 되었다. - P203

물음표갈고리들이 엉킨 낚싯바늘이 되어 민식의 뇌를 팽팽하게당기고 있었다. 덕분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풀어줄 그 누구도없었다. 누나도 매형도 이마를 손으로 받친 채 물만 들이켜는 그를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은 민식에게 고민해봐야 투항하는 수밖에없다고 침묵의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어찌어찌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누나가 생각해본 뒤 연락하라고 했다. 매형이 보양식이라도 사 먹고 기운 내라며 봉투를 건넸다.
둘이 주차장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민식은다가온 택시를 향해 겨우 손을 들어 보였다.
집에 와 봉투를 열어보니 2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보양식만 사먹기엔 큰 액수다. 돈은 늘 무언가를 말한다. 의도가 없는 지출은없다. 남의 돈 빼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업을 한 민식은 잘 알고있었다. 200만 원 먹고 자기들 편에 서라는 건데, 그건 민식의 몸값을 후려치고 뺨도 후려치는 꼴이었다.  - P224

여름이 끝났다. 난류와 한류가 섞이듯 가을밤의 따스하면서 선선한 기운이 밤의 출근길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자기 가게에알바하러 가는 기분은 늘 묘했다. 오너 알바라는 금보 형이 만든 요상한 직책이 민식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딸랑.
밤 열시다. 근무 조끼를 입고, 시재 점검을 하고, 저녁 알바 학생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뒤 검수를 끝낸 센터 물류들을 정리한다. 열한 시가 되면 신선식품이 들어오고, 자신이 요청해 들인 신상품을확인하면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느껴져 뿌듯하다. 그리고 그 상품이 잘 팔리면 성취감이 들고 일의 재미를 만끽한다.
새벽이 되고 편의점에 고요가 찾아오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 P245

진열대에 물건을 정돈하듯 그는엉망이 된 기억 속 오와 열을 맞췄다. 그러던 중 엄마가 빌라를 떠나 양산 이모네로 간 게 코로나 때문이 아니란 걸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엄마는 기저질환이 있었다. 엄마는 코로나를 두려워했다. 엄마는 그래서 이모네로 떠났다.
그건 엄마의 핑계였고민식의 자기합리화였다.
엄마는 민식과 함께 지내는 게 힘들어 떠난 것이었다. 그는 이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두 해 전 겨울에 다짜고짜 엄마의빌라로 왔고, 맥주 사업을 한다고 설치고 다니고, 편의점을 팔자고 엄마를 들볶은 것을. 엄마 집에서 삼시 세끼 꼬박 받아먹으며 사업자금 지원 안 한다고 투덜댄 것을 기억해냈다. - P246

고통스러웠다. 죄스러웠다. 어떻게든 되돌려야 했다.
근무를 마친 어느 날 아침, 민식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오너 알바‘로 한 달째 야간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이미 소문 다 났다며, 네가 잘하고 있어 기쁘다고 했다. 민식은 백신2차까지 맞으셨냐고 물었다. 엄마는 2차는 좀 아팠는데 그래도 이제 괜찮다며, 그런 것도 물어보고 기특하다고 또 칭찬을 했다.
민식은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했다.
"엄마. 이제 돌아와."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내가 데리러 갈게.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이제 낮에 자고 밤에 - P246

일하러 가니, 엄마랑 집에서 마주칠 일 별로 없어. 엄마, 나 이제 편의점 도시락도 잘 먹어. 밥 차려줄 것도 없고 가게 팔겠다고 설치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이제 돌아와 내가 데리러 갈게. 응?"
여전히 전화기 너머에는 침묵이 그득했다. 민식은 울먹임이 저너머로 들리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때 엄마의 차분한 목소리가들려왔다.
"데리러 갈게 아니고, 모시러 갈게라고 해야지."
"으응. 모시러 갈게. 엄마 모시러 갈게요!"
이번에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다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렴." - P247

아들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잠깐 휘청했다. 다행히 벽을 짚은 뒤천천히 걸음을 옮겨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에 놓인 갈색 캠핑 의자에 앉으니 녹음으로 가득한 정원이 한눈에 담겨왔다. 지난해 여름에도 여기서 이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아들의전화를 기다리며. 하지만 아들은 정원 끝 감나무가 가을의 결실을뽐낼 때도, 낙엽이 쌓인 정원에 하얀 눈이 내려앉을 때도 연락이 없었다. 안 풀리는 삶에 지쳐 자포자기한 걸까? 코로나 후유증으로여전히 몸이 불편한 걸까? 마음 나눌 사람이 곁에 없어 답답한 걸까? 아니면 잔소리 많은 엄마가 옆에 없어서 편한 걸까?
수많은 질문과 그 질문에 담을 마음의 소리가 있었지만 나는 침묵했다. 그것이 아들을 위해서인지 나 자신을 위해서인지 모르겠 - P248

다. 다만 우리 둘 모두 고난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1년 하고도 4분의 1의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혼자 아닌 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대면의 시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즉에필요한 날들이었으나 챙기지 못해 결핍된, 어떤 성분이 담긴 시간에 온몸을 담가야 했다.
네 해 전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나는 하루하루를 평소와 같이 살기 위해 온 힘을 써야 했다.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랄까,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안간힘이랄까? 편의점을 차린 것도 어떻게보면 분주히 보내야 하는 날들이 필요해서였다. 24시간 내내 불켜진 그곳이 방범 초소인 양 내 삶을 호위하길 원했다. ALWAYS편의점이 남편의 빈자리를 그 이름처럼 ‘언제나‘ 채워주길 희망했다. - P249

팬데믹이 세상을 멈추게 하고 나서야 나는 맹목적으로 지속했던그 시간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그즈음 편의점의 밤을 지키며 자신을 찾은 한 남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나는 독고라는 사내의 용기에 감화되었다. 그는 내게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해했지만 나 역시 그를 통해 정체된 삶에서 벗어날 기운을 얻었다. 어쨌거나 삶은계속되고 있었고, 살아야 한다면 진짜 삶을 살아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내쉬는 호흡이 아니라 힘 있게 내뿜는 숨소리를 들으며 살고싶었다.
패잔병의 몰골로 아들이 내 스무 평 공간을 찾아온 건 두 해 전이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엄마이기에 따뜻하게 아들을 받아주었다. - P249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새삼스러웠다.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은둔 생활 삶의 큰 쉼표. 이곳이 있기에 가능했고, 이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언니와 개와 함께 산책을 다니던 오솔길 조카와 함께 올랐던 살구나무 많던 뒷동산, 여름에 수박을 담가놓았다 꺼내 먹던 건넛마을 계곡. 모두 잊지 못할 것 같다. 자연과 자연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마음과몸에 치유를 가져오는지를, 도시에서만 살던 나는 간과했다. 철이면 철마다 산과 바다로 등산과 낚시를 다니던 남편의 행동이 얄미워서였을까, 좀처럼 나는 도시를 벗어나기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고, 슬며시 기댈 수 있게 되었다. - P261

그날 밤 나는 묘한 만족감에 젖어 잠을 청했다. 행복했냐고? 모르겠다.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삶의 순간순간에 만족하는 찰나가 잦길 바랄 뿐이다. 같이 있는 동안 언니는 내가 예전보다 느슨해져서 좋다고 했다. 사실 언니와도 같이 지낸 게 수십 년 만이라 걱정이었는데, 그동안 둘 모두 늙고 닳아 여유가 생겼는지 서로를 용인할 수 있었다. 너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늙어서도 고집쟁이가된다는데, 생각보다 유들유들해져 다행이라고 한 말은 좀 거슬렸지만 고집은 자기도 못잖았으면서!
나는 상경해 받을 과제에 대해 생각했다. 언니와 조카의 삶에서배운 대로 아들과 효율적인 공생관계를 맺을 것.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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