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카터 헷
BENJAMIN CARTER HETT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뉴욕시립대학 헌터칼리지 ·대학원의 역사학 교수, 토론토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하버드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헷은 사법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독일의 역사적 사건 · 인물을 추적한 책을 선보여 왔다. 독일제국 전환기 베를린에서 일어난 형사사건 · 재판을 통해 당시의 사회변화를 조망한 첫 저서 <티어가르텐에서의 죽음>, 용감한 반나치 변호사 한스 리텐의 전기 《히틀러와 맞서며》,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미스터리를 탐구한 《국회의사당 불태우기》 등이 그 결과물이다.

최근 몇 년간 헷은 관심을 더 넓혀 1930년대 초 독일의 민주주의 위기가 어떻게 2차 세계대전으로 번졌는지 탐구하고 있다. 최근
연구를 반영한 이 책에서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과 원인을 돌아보면서,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던 1930년대와 오늘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틀러와 맞서며》로 에른스트 프랭켄상을, 《국회의사당 불태우기》로 한스로젠베르크상을,《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로 바인상 역사 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며 연설, 라디오, TV, 역사 다큐멘터리에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어떤 사회 집단이 나치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았는지 돌이켜 보는 게 중요하다. 1930년에는 뚜렷한 흐름이 나타났다. 앞에서 말했듯 나치는 중산층신교도 진영을 넘겨받았다. 가톨릭 진영 표를 약간 가져오고, 사회주의진영에서 약간 더 가져왔지만, 신교도 진영에서 가져온 표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나치를 뽑은 유권자는 기본적으로 농촌 지역, 특히 독일 북부와 동부의 농촌 지역 신교도와 도시에 사는 중산층 신교도였다. 가톨릭신자와 노동자는 대부분 자신들의 전통적인 진영에 남아 있었다.
독일 신교도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할 만한 종교적·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신교도는 인간 본성을 비관적으로 생각했고, 권위주의 국가만이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느꼈다. 권위주의 국가는 하나님 - P166

의 도구이고, 혁명은 하나님에 맞서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프로이센에서는 1817년에 루터파와 칼뱅파 교회가 통합되면서 프로이센 교회 연합이만들어졌고, 1918년 이전까지 프로이센 왕이 이 연합의 수장이었다. 독일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선 1517년 이래, 독일 개신교가 극도로 민족주의적으로 된 일은 자연스러웠다. 훗날 주교가 된 오토디벨리우스Otto Dibelius 목사는 "교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이지만 국가인민당에 투표한다"1" 라고 말했다(그는 모순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신교도가 싫어하는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1918년 이전에 신교도들은 강력한 군주제가 정치를 넘어서는 국가 기관으로서 도덕적인 사회생활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정당이 권력을 가지고 세속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자 신교도들은어찌할 줄 몰라 했다. 타협과 부패로 얼룩진 정치가 국민 생활을 지배하고, 오랫동안 확고했던 도덕이 사라졌다고 여겼다. - P167

게다가 혁명으로 새 국가가 들어섰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헌법을 만들고, 가톨릭을 대변하는 중앙당이 매우 중요한 정당으로 자리잡았다. 중앙당은 중도인 데다 선거에서도 표를 많이 얻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어떤 연정에서도 중요 위치를 차지했다. 1932년까지 모든 프로이센주정부와 연방정부 구성에 참여한 정당이었다. 신교도는 그렇게 정치적힘을 얻은 가톨릭을 질투하며 화를 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같은 사람들은 보수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들을 한데 모아 개신교적인 대안을만들어 균형을 잡으려고까지 했다. 독일 신교도 세계관으로는 전쟁을 끝내고 혁명을 일으킨 일을 반역으로 보는 게 당연했다. 한 신교도는 사회민주당이 "쓸데없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혁명을 일으켰"을 뿐아니라, "그저 자기 당이 집권하려고 나라를 배신했다"라고 말했다.  - P167

새로 들어선 공화국은 현대적이고, 세속적이고, 도시적이고, 물질주의적이었다. 신교도들은 이 모든 특징이 불쾌했다. 한 신교도 신학 교수는
"물질주의적인 개화와 민주주의와의 결합은 보통 문화민족이 쇠퇴할 때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 이라고 말했다. 공화국에서는 가톨릭뿐 아니라 유대인의 세력까지 강했다. 민족주의 우파는 1919년 헌법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 유대인 법학 교수 후고 프로이스라는 점을 항상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인이 이제 "유대인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시가 베를린에서 돌아다녔다.  오토 디벨리우스는 자신이 항상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현대 문명의 타락을 보여주는 온갖 현상에서 유대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앞에서 보았듯 ‘유대인 문제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독일인의 태도를 결정하는 문화코드였다.  - P168

신교도들은 자신들이 경멸하는 공화국에 맞서 저항할 전략을 세웠다.
개신교 공동체 구축 후 20세기의 대중 정치에 동원할 ‘국민교회 Volkskirche‘
를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국민교회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에서 개신교와 독일의 가치관(신교도는 둘을 똑같이 생각했다)을 지킬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많은 신교도는 그런 구상이 나치가 민족 통합을 위해 내세운 ‘민족공동체(폴크스게마인샤프트)‘ 개념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스나브뤼크 출신 목사로, 유명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친구인 리하르트 카르벨Richard Karwehl은 바이마르 신교도의 생각을 잘 보여줬다. 카르벨은 나치에 반대했고, 나치 이념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도 좋아하지 않았고, 신교도들이 왜 나치에 끌렸는지 이해할수있었다. 카르벨은 신교도들이 나치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국민교회‘를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각각의 독일인을 - P168

‘우리 국민‘ 속에, 그리고 ‘우리 조국‘의 땅에 두셨다고 한다. 카르벨이 느끼기에는 나치는 개인이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반면 공한국은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주의적 합리주의‘ 그리고 ‘서로 간섭하지않는 문학적 지식인‘을 내세웠다. 나치 운동에는 "이러한 부자연스러운현상, 현대 문화에서 타락하고 후퇴한 측면‘에 대한 근본적인 분노가 있다고 카르벨은 생각했다. 한편 카르벨이 나치즘의 어떤 면을 좋아하지 않았는지(주로 나치의 인종차별주의)를 보면, 독일 신교도들이 나치즘에 반대할 수 있었다는 걸 알수있다. 민주주의·관용·다원주의를 받들어서가 아니라 그저 나치의 절대주의와 상반되는 또 다른 절대적인 이념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치에반대한 신교도들의 세계관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수년 후 신교도레지스탕스 헬무트 야메스 폰 몰트케Helmuth James von Moltke 백작이 나치 인민법정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을 때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판사가 "기독교와 민족사회주의(나치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전인적인 인간을 요구하죠"라고 말하자 폰 몰트케 백작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 P169

목사이자 나치에 저항했던 영웅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는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전체주의 제도를 요구했다"라고 전쟁 후에 말했다. 카르벨은 나치즘과 자유주의가 근본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나치즘이 절대 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치즘은 그저 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오만‘을 ‘민족의 오만‘으로 바꾸려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이념도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것이 두 이념과 개신교의 아주 중요한 차이였다. 그렇지만 분명 많은(결국, 아마도 대부분) 신교도들이 카르벨보다 훨씬 더나치에 마음을 빼앗겼다. 1931년, 루터교 단체 ‘내적 선교 Innere Mission‘ 모 - P169

임에서 연설자마다 나치에 대해 열변을 토해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나치가 종교에 관해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을 때, 한 나치 고문은모임에서 "그리스도, 주의 사람, 주의 말씀, 주의 일을 중심에 두고 ・・・ 어느 편을 들지 정하자! 볼셰비즘과 맞서 싸우자! 복음주의 교회는 본질이나 역사를 볼 때 독일 민족주의와 가장 가깝다!"라고 말했다. 신교도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에 품은 적대감이 공화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증명된다. 가톨릭 교회도 공화국을 그리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샤를 모라스의 반공화주의 단체 ‘악시옹 프랑세즈‘처럼, 가톨릭 권위주의가 목소리를 높이던 시류에 발맞춘 우파 민족주의 가톨릭 단체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유럽 곳곳에 많았고 독일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 가톨릭은 중앙당이라는 확고한 정치적 보금자리가 있었다. 중앙당은 공화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당이었기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반민주적이더라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 P170

바이마르공화국의 중산층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평등주의 정치를 원하면서도 민족주의자였다는 증거는 많다. 나치로 옮겨간 한 독일 유권자는 "옛날 정당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대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포퓰리즘적인 정치 운동은 거의 언제나 사회개혁과 민족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 중산층은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사회민주당에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노동자층과 중산층이 사회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중산층이 사회 개혁과 사회 복지를 원할수도 있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보여준 무시무시한 경고였다. 또 중산층 중 누구도 자신이 노동자층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중산층은 절대 사회민주당에 투표하려 하지 않았고, 물론 공산당에도 투표하지 않았다. 어쨌든 슐라이허같은 중산층 대부분은 사회민주당은 민족주의자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독일은 또 다른 유럽 국가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곳에서만 파시즘이 고개를 들었다. 중산층이 두려워할 정도로 사회주의 좌파가 약진했기 때문이었다.  - P171

나치의 지도자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라 자신들이 내세우는사회적 의제의 강력한 사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특정층의 이익을 옹호했다. 예를 들어 25개조 강령은 특별히 소작농과 영세 상인의 이익을 옹호했다. 하지만 나치는 항상 ‘폴크스게마인샤프트‘라는 민족공동체를 들먹이며 호소했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는 ‘1914년 신화‘를 바탕으로 한 개념으로, 결국 나치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나치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가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독일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최소한 유대인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뺀 모두였다.
나치의 민족주의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세계화라는 단어를 아무도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에 너무나 익숙했다.
나치는 무엇보다 세계화에 맞선 민족주의 저항운동이었다. - P172

다음 구절들은 오늘날 읽어도 놀랍다. 시대를 뛰어넘어 요즘 이야기처럼느껴진다.
"독일 국민은 독일 금융그룹과 독일 선박회사가 상하이에 이른바 자회사를 설립해 중국 노동자를 고용하고, 외국산 철강을 사용해 중국 배를 - P172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독일 회사는 그렇게 해서 이익을 거두겠지만, "매출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독일 국민은 계속 손해를 볼 것이다." 자본가가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할수록 이렇게 외국에 설립하는자회사가 점점 더 많아지고, 독일인은 점점 더 외국에 일자리를 빼앗길것이다. "지금은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고 웃을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30년이 지나면 유럽에서 빚어진 결과를 보고 한탄할 것이다" 35라고 히틀러는 썼다.
히틀러가 그렇게 쓴 건 1928년 출간되지 않은 《나의 투쟁> 속편에서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언급했다. - P173

그는1920년대 말에 히틀러는 세계 경제 및 금융 체제에서 독일의 취약한 위치를 주로 들먹이면서 독일 국민, 특히 나치의 기반이 된 신교도 집단을정치적으로 동원했다. 농민들은 무역협정에 분노해서 시위를 벌였다. 캐나다, 미국과 아르헨티나가 엄청난 양의 농산물을 수출해 세계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던 시기에 들려온 수입 농산물 관세 인하 협정이었다. 히틀러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영 플랜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적으로인정받으려고 했다. 후겐베르크는 배상금을 모으는 데 참여하는 독일 관리를 처벌하는 법률을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독일이 통제할 수 없는 국제적인역학 관계의 희생물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자유무역과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 체제를 재편해 부와 권력을 누렸다.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부와 권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이겼고, 독일이 헤쳐나가야 하는 세계를 계속해서 좌지우지했다. - P173

베른하르트 폰 뷜로 국무장관은 ‘적국 국민‘들을 ‘계몽‘하면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뤼닝 총리는 독일이 자유를 되찾는게 ‘평화의 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수입·수출·해외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 세계 경제와 완전히 관계를 끊으며, 자국 자원에만 의존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는 국가를 만들자는 더 급진적인 주장도 나왔다. 사실 독일은 이러한 정책에 맞지 않았다. 중앙은행의 한스 루터는 정통적 견해를 밝히며 "독일 국민은 자급자족할 수 없다. 공산품을 외국에 팔고, 그 돈으로 농산물을 수입해야 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루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독일의 정치·경제 지도자는 ‘독일 국경 너머에서도 신뢰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 국민이 세계 경제 질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가능한 결론이었다. 독일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자급자족 국가에 찬성하는 반대하는 모든 독일인은 국가의 경제 정책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 P176

자급자족 국가는 나치 정치 유세의 핵심이었다. 적대적인 세계에 의존하던 독일을 해방한다는 주제는 확실히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치의 약삭빠른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간과천연자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외국에 의존하면서자유를 잃게 될 것"이라고 1932년에 썼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와 전후세계의 본질이 이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괴벨스는 주장했다. "그래서 독일 주위에 두꺼운 벽을 쌓아야 할까?"라고 그는 묻고 적었다. "우리는 분명히 벽, 보호 장벽을 쌓고 싶다." 1930년대 초에 독일인이 정말 많이 공감한 정치 연설이 자급자족 국가를 주제로 다룬 연설이었다. 이는 나치 안에서 괴벨스의 팽팽한 맞수였던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연설이었다.
- P177

슈트슈트라서는 나치의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 나치 지도자였다. 빡빡 밀은머리에 목소리는 멋진 데다가 몸집이 큰 남자였고, 언제나 정적과 싸울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예술가·작가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쉴 때는 호머나 다른 고전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슈트라서는 감성적이면서 다정했고, 나치 지지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존경한 유일한 나치지도자였다. 영국 대사는 그를 "가장 유능한" 나치 지도자라고 불렀다.
회의주의자인 미국 기자 휴버트 렌프루 니커보커H. R. Knickerbocker는 슈트라서가 총리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고, 비관적인 역사학자 오스발트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슈트라서가 사업가 후고 슈티네스 다음으로 "가장 똑똑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 P177

슈트라서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1932년 5월 10일에 나치의원총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 왜 정적(예를 들어 빌헬름 회그너)조차 슈트라서를 경멸하지 않았는지 알수 있다.
그날 연설은 한 구절 때문에 유명해지면서 두고두고 이야기되었다. 슈트라서는 "오늘날 우리 국민의 95%는 아마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자본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자본주의를 향한 이러한 반감이 "타락한 경제에 맞서는 국민 저항"에 이를 것이라고 슈트라서는 전망했다. 독일이 "악마의 금금본위제, 세계 경제, 물질주의와 관계를끊고 수출 통계나 중앙은행 대출금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국민의 요구"라고 그는 말했다.  - P179

슈트라서는 나치가 농촌 경제를 살리고, 농촌 주민들이 도시로 쏟아져들어오는 일을 막아 "폐쇄경제를 확고히 다지면서 내수를 늘리고자 한다"라고 주장했다. 슈트라서는 약간 간접적인 반유대주의를 섞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나치 기준으로는 조심스러운 표현이었지만, 반유대주의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슈트라서는 금융계 지도자들이 "자급자족 경제가 시작될까봐 걱정하는데, 이는 "대규모 국제 금융거래로 쉽게
‘레바흐 Rebbach 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레바흐는 유대인 언어로 ‘떼돈을 벌다‘라는 뜻이다. 슈트라서가 어떤 금융인들을 말하는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알 수 있었다. "
53독일인은 국제 금융 외에도 외부의 다른 적대적인 힘들에 대항할 수 없다고 느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길고 구불구불한 국경이 새로 생겼다. 1차 세계대전 전에는 독일 영토였던 땅(슐레지엔 일부와 서프로이센)이강화조약으로 폴란드에 넘어갔다. - P179

히틀러는 ‘생존 공간‘을 더 넓게 확보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자 "우리에게 선견지명으로 보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생존 공간‘은 유럽, 그중에서도 동쪽, 소련과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쪽에서 찾을 수 있었다.
히틀러는 집권 전 공개 선언에서 그런 생각의 전체 의미를 부드럽게 밝혔다. 다만 프리트와는 달리, 히틀러는 독일이 장악한 중부 유럽과 동유럽 국가의 연합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련을 정복해서 독일 경제가 근본적인 자급자족을 이루는 것이 히틀러의 전체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큰 전쟁을 치러야 하고, 독일 국민은 지난 전쟁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참모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1919년부터 1935년까지펴낸 여러 책과 글에 이러한 교훈이 가장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독일이총력전을 하려면 이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국민을 동원해야 한다.  - P182

군인이나 산업 역군으로 헌신하도록 국민들을 쥐어짜야 한다. 사기가 꺾이지 말아야 하고, 반체제적 좌파가 반대하거나 외국인인 유대인이 내부에서 배신하는 일(루덴도르프와 히틀러 모두 이 점을 중시했다)이 생기지 말아야했다. 총력전을 하려면 정부의 철권통치가 꼭 필요했고, 국민이 육체적으로도 강인해져야 한다. 반체제 인물뿐 아니라 정신적 혹은 신체적 장애인도 총력전에서 싸울 수 없다. 독일은 자국민뿐 아니라 세계를 향해 더 효과적으로 선전해야 한다.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의 해결책을 완벽하게받아들였다. - P183

나치즘은 세계화에 저항한 혁명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히틀러와 나치는 전 세계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분명 터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1차 세계대전 때 터키 북서부의 겔리볼루갈리폴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물리친 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전쟁 후 수립된 터키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된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에서 열렬히숭배하던 인물이었다. 히틀러는 무스타파 케말을 "빛나는 별"이라고 불렀다. 1924년에 히틀러는, 전에 쿠데타를 시도했던 비어홀에서 최근 혁명 중 무스타파 케말의 혁명이 가장 위대했고, 그다음으로는 무솔리니의혁명이 위대했다고 말했다. 한참 뒤인 1938년, 히틀러는 평소와 달리 겸손하게, 무스타파 케말이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첫번째 학생은 무솔리니, 두 번째 학생은 히틀러였다.  - P183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이 오스만제국을 압박하는 수단이었던 세브르 조약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무스타파 케말을 나치는 존경했다. 터키인이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조약 반대 운동은 1923년에 훨씬 호의적인 로잔 조약으로 다시 체결하게 했고, 무스타파 케말을 앞세운 근대 공화국을 수립시켰다. 특히 무스타파 케말 정권이 세브르 조약에 서명한 터키 사람들을 매국노로 몰면서 시민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나치가 어느 부분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느꼈을지 쉽게 알 수 있다.
나치는 또한 오스만 정부가 최소 75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죽인 1915년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알고있었고, 찬성했다. 로잔 조약의 조건에 따라 터키에서 그리스인을 내보낸일 역시 찬성했다. 나치는 강력하고 번영하는, 그들이 감탄하는 터키를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민족 청소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P184

히틀러는 처음부터 독일의 ‘생존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솔리니가 지원한다면 기꺼이 정치적으로 큰 대가를 치르려고 했다. 그 대가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가 1918년에이탈리아로 넘어간 티롤 남부 지역과 관련이 있었다. 그곳 주민 대부분은독일어를 사용한다(지금도 마찬가지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언젠가 오스트리아와 통합하고 싶었기 때문에 티롤 남부도 독일 영토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히틀러는 티롤 남부를 기꺼이 이탈리아에 그대로 남겨두려고 했다. 한편으로 히틀러는 온갖민족주의자들(그리고 기회를 엿보던 사회민주당도)이 독일의 이익을 외국 세력에 팔아넘기는 배신 같은 자신의 행동을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리란사실도 알았다.  - P186

브뤼닝은 관세동맹 계획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나빠지고, 결국프랑스 차관이 무산되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원하던 결과였다. 브뤼닝이차관을 거절하기는 정치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관세 동맹을 추진하면 불황을 이용해 배상금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을 잃지 않으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점수를 딸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브뤼닝은 오스트리아와의 관세 동맹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덕분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브뤼닝의 평판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지는 않았다. 
이 일에서 두 가지가 명확하다. 첫째,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유럽에서 금융 협상이 얼마나 안보, 특히 독일을 단속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있는지 알 수 있다. 배상금과 금본위제로 꼼짝 못 할 동안에는 독일이 이웃 나라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독일이 이 장애물들을 피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 둘째, 브뤼닝은 불황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대통령 내각의 총리라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만 설명하면 됐기 때문이다.  - P192

브뤼닝이 세계 경제 상황과 씨름하는 동안, 독일 도시들에서는 불황 때문에 정치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베를린을 위한 투쟁 Kampfum Berlin》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이 달린 책에는
"물고기에 물이 필요하듯 베를린에는 자극이 필요하다. 이 도시는 자극으로 먹고 산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정치 선전이든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 101 이라는 직설적인 문장들이 나온다. 나치에서 떠오르는인물인 36세의 요제프 괴벨스가 이 책의 저자였다. 1926년에 히틀러는 괴벨스를 베를린에 보내 나치 조직을 이끌게 했다.
베를린에서 나치를 홍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베를린은 노동자들의도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요새였다. 또한 베를린은 17세기 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신교도 위그노 16-17세기경 프랑스의 칼뱅 신교도를 쫓아낸 - P197

이후 줄곧 박해를 피해 도망친 난민을 포함해 이주자들의 터전이었다. 위그노들은 베를린에 여러 방식으로 흔적을 남겼다. 프랑스어 영향을 많이받은 베를린의 독특한 사투리, 베를린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불레테‘라는 완자 요리, 위대한 작가인 19세기 소설가 테오도어 폰타네TheodorFontane에서 위그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다른 이주민의 물결도 잇따랐다. 프로이센 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습지대의 물을 빼려고 네덜란드 기술자들을 데려왔다. 그들은 ‘오라니엔부르크‘처럼 베를린과 베를린주위 많은 지역의 이름에 ‘오렌지‘를 붙였다. 1880년대부터는 유대인이러시아 제국의 박해를 피해 베를린으로 와, 1918년 이후에는 물밀듯이 들어왔다. "진짜 베를린 사람은 슐레지엔 출신이다"라는 유명한 속담도 있다. 독일 기준으로 볼 때 베를린은 분명 민족적·종교적으로 굉장히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베를린은 독일의 지적·문화적·경제적 수도이자 언론의 수도였다. 나치는 농촌의 신교도 집단에 뿌리내린 당이라 베를린을 근거지로 삼기가 가장 어려웠다. - P198

괴벨스가 베를린에 왔을 때 나치 추종자는 거의 없었고, 아무도 나치를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괴벨스는 베를린 사람들에게 처음 연설할때 나치가 아무 관심도 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덕분에 "훗날 나를 항상 규탄하던 유대인 신문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 신문은 "괴벨스 선생이란 사람이 익숙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라고만 보도했다. 102베를린이 나치와 잘 맞지 않은 도시였다면, 괴벨스는 숙적인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나치 당원이 아니었다. 정치계에 들어오기 전,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대인 교수들 밑에서 공부했다. 정치 광신도로는 아주 드물게 반짝이는 지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P198

노이쾰른, 프리드리히스하인, 베딩, 샤를로텐부르크의 일부 같은 베를린의 특정 지역은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의 본거지였고, 따라서 공산당의요새였다. 괴벨스가 들어온 다음에는 공산당과 싸우는 게 나치의 전략이었다. 돌격대는 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에서 한 선술집을 찾아냈고, 매달어느 수준 이상의 맥주를 마시겠다고 주인에게 약속했다. 주인은 돌격대가 선술집을 본부로 사용하게 해 주기만 하면되었다. 그러자 그 선술집은 ‘돌격대 선술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돌격대는 그곳을 보통 밤에 공격할 공산당원들을 찾으러 나가기 전에 모이는 기지처럼 활용했다. 나치와공산당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때가 많았고, 때때로 다른 정당의준군사조직이 끼어들기도 했다. 1930년대 초에는 베를린과 다른 독일 도시들이 내란과 비슷한 상태에 이르렀다. 나치의 전략은 여러 면에서 효과적이었다. 나치는 조금씩 베를린의 험악한 동네들을 장악해 나갔다. 그래서 그들이 선거운동을 하고, 포스터를붙이고, 집회를 열기가 더 쉬워졌다. 무엇보다 언론에 실리는 점이 정말 결정적이었다. - P200

괴벨스는 돌격대의 폭력이 언론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부분 나치가 싸움을 걸면서 폭력이 시작되었지만, 나치는 항상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폭력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는 공산당원들이 언제나돌격대원들을 맹렬하게 쫓고 있다고 끊임없이 선전했다. 펠제네크 주말농장을 습격해서 프리츠 클렘케를 죽인 일도 그러한 사례였다. 나치는 그일을 한 공산당원이 숨어 있다가 돌격대원들을 공격한 사건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중산층 언론, 경찰, 검사, 심지어 형사법원까지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말도 안 되는 선전일 때가 많았는데도 사람들에게 통했다. 법을 준수하는 중산층 독일인은 돌격대원들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선량하고 애국적인 청년들이며, 공산주의자들을 막을 만한 배짱을 유일하게 가졌다는 결론을 점점 내려갔다.  - P201

1931년과 1932년에 내란과 같은 상황이 계속 심각해지면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브뤼닝이 경제 안정을 포기하면서까지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던 것처럼, 안정을 유지시키지 못하는 무능력이 많은 국민 눈에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좀먹는 걸로 보였다. 폭력이 점점 더 일상이 되면서 국민들은 훗날 나치가 저지르는 국가 폭력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나치가 권력을 잡기 쉬워졌다거나, 1931년이나 1932년에 집권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1923년 비어홀 폭동에 실패한 후 히틀러는 군대와 경찰의 반대에 맞서면서 권력을 절대 잡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1931년과 1932년을 거치는 동안 히틀러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노력해도 기득권력의 문은 잘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 P202

집단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정말 잘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후겐베르크의 꿈이지, 히틀러의 꿈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사실 후겐베르크와 협력하면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고 가능한 많은 홍보 효과와 정당성을 얻고 싶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모임직전에야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의 편지를 처음 받았다. 나치가 국가인민당과 협력하면서 사실 히틀러 운동이 존중받는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나치는 아직 보잘것없었지만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거리 행진에서 돌격대가 지나가자 다른 집단의 행진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떴다. 괴벨스는 국가인민당과 협력은 순전히 전략적 목적으로, 합법적으로 집권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사설에서 단언했다. 바트 하르츠부르크 행사에 대한 괴벨스의 개인적 생각은 더 냉 - P203

혹했다. 특히 국가인민당 원내 대표인 에른스트 오베르포렌Ernst Oberfohren이 잘난 척한다며 싫어했다. "오, 우리 야만인이 얼마나 더 나은 사람들인지!"라며 "그를 보면 토할 것 같다"라고 덧붙일 정도였다. 연합하든 말든나치가 드디어 권력을 잡으면 "보수주의자들을 가능한 한 빨리 내쫓는게 목표다. 우리 혼자 독일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나치가 독일의 주인이 되려면 다른 사람들이 필요했다. 나치를지지하는 유권자들, 연합을 제안하는 보수 세력, 권력의 문을 열어주는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필요했다. 이 중 누가 나치를 위해 행동해 줄지가1932년의 문제가 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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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나치의 권력 장악 과정에 의문을 품을 때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1930년대 독일인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여기며, 당대인들의 실수를 살필 때도 우리의 우월함을 찾는 데서 그치기 마련이다.
실상은 그와 다르다. 
헷은 신중한 문체와 탁월한 학식, 인물 각각에 대한 섬세한 묘사, 경제계와 제도에 대한 명쾌한 논의를 통해 당대의 사건을 오늘날 우리에게 끌어온다.

* 티머시 스나이더, 역사학자, 
《피에 젖은 땅》 저자


빠져든다.
남의 나라 역사서가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싶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꼭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구나 싶은 이 느낌은 또 뭐지.





경찰은 몇 주 동안 준비했다. 모두 합해 1만3천 명에서 1만 4천 명 정도의경찰관을 베를린 거리에 배치하려고 한다. 이 중 일부는 다른 도시에서지원 온 경찰관이다.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카를 제베링Carl Severing은 훗날
"독일 어딘가에서 정적이 총에 맞거나 두들겨 맞거나 칼에 찔리지 않은날이 거의 없었다"라고 한탄한다. 막스 퓌르스트라는 이름의 젊은 목수이자 좌파 운동가가 말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라는 표현이 아마딱 맞을 것이다. 
온갖 위협과 긴장감이 넘쳤지만, 그날은 아주 조용히 시작된다. 아침에몇몇 소규모 집단이 노동자 계층이 사는 동네에 모여 베를린 중심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멀리 가지 않아 경찰이 그들을 모두 막는다. 그렇지만시간이 지나가면서 경찰과 시위 참가자들의 충돌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경찰은 먼저 경찰봉을 휘두른다. 그다음 경고사격을 한다. - P113

1929년 5월 1일, 오월절이다.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언론이 이날을 "피의5월 Blutmai"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봐도 선량한 시민에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휘두른 날이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베를린에서 가장 가난하고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찰의 태도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경찰은 노이쾰른과 베딩 같은 지역을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범죄자들과공산주의자들의 온상으로 여기며 두 곳을 구별 못할 때도 있다. 《시카고데일리 뉴스 Chicago Daily News>의 베를린 특파원은 "우린 온상 전체를 뿌리뽑고 싶다. 완전히 다르게 공격을 퍼붓고 싶지만, 허용되지 않는다"라는이 지역들에 대한 경찰의 과격 발언을 보도하면서 논조를 잡는다. - P115

1929년, 공산당은 전통인 노동절 시위를 벌이겠다고 우긴다. 노동절 행진 금지를 고집하던 사회민주당 당국이 당황한다면 더욱 좋다. 공산당 매체들은 노동절 시위를 준비하면서 비난을 퍼붓는다. 사회민주당이 "프로이센에서 독재정권을 세우려고 한다"라고 공산당은 주장한다. 공산당은 정치 집회에 대해 똑같은 입장이었던 황제의 관료와 사회민주당을 비교하기 좋아한다.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에는 선전을 위한 시체가 필요하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시체는 아주 많다. 5월 1일에 대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자와 시위자 중 9명이 사망하고, 63명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 경찰 25명도부상을 당했다. 이후 이틀 동안 폭력은 더 심해진다. 경찰 때문에 5월 3일까지 3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98명이 부상당하고, 1천 명이 훨씬 넘는사람들이 체포된다. 경찰도 4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망자는 없다. 경찰 한 명이 총상을 입었지만, 자기가 쏜 총에 맞아서다. 10 언론인 카를 폰오시에츠키 Carl von Osietzky의 말대로 피의 5월에 죽은 사람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벌인 전쟁"의 희생자다.
공산당과 나치의 싸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싸움, 경찰에 저항하는노동자들..…. 1929년쯤에는 온갖 극렬한 분열로 독일 사회가 산산조각이나고 있다. - P117

로마니쉐 카페는 대단하거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베를린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이러한 이유로 ‘과대망상증 카페‘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평등하게 만나지는 않았다. 언론인 마테오 퀸츠Matheo Quinz 는 그 카페를 "수영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다란웅덩이와 수영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웅덩이가 있는 수영장"으로 비유했다. 어떤 손님을 카페의 어느 쪽으로 안내할지는 수위가 판단했다. 큰 웅덩이에는 영화감독과 배우, 광고 책임자, 몇몇 특별히 성공한 예술가들이 모였다. 작은 웅덩이에는 작가와 기자, 나머지 예술가, 정치운동가, 탈무드 학자들이 모였다. 더 많은 무리로 나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미술상 알프레트 플레히타임 AlfredFlechtheim이 한쪽에서 좌중을 이끌고, 탈무드 학자들도 자연스럽게 따로모였다.  - P118

다양한 작은 무리와 패거리들이 서로 별로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모인다. 오직 기자 에곤 에르빈 키슈Egon Erwin Kisch가 ‘이 자리 저 자리 다니면서 흥미진진한 대화를 동시에 나누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모든신문을 읽으면서 모든 여자를 지켜보기까지 했다. 
로마니슈 카페는 또한 콧대 높은 곳으로도 유명했다. 수위가 모르는 예술가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한 잔만 시켜도 온종일 머물수 있는 손님은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몇몇뿐이었다. 대부분은빨리 계산을 치르고 떠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사학자 에릭 웨이츠Eric Weitz는 그 카페를 "활기 넘치고, 민주적이고, 분주하고, 이리저리 나뉘고, 분열을 초래하고, 끼리끼리만 이야기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와 사회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 P118

정치, 종교, 사회 계층, 지역에 따라 점점 더 타협할 가능성 없이 극심해진 분열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징이었다. 여러 해 동안 동독 정보기관의대외정보국 국장을 지낸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는 1920년대에 적극적인 공산주의자 집안의 아들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았다. 볼프는 당시 우파와 좌파의 정치 싸움은 "집단 패싸움과 같았고, 나치는 "우리 가족과완전히, 종족조차도 다르게 느꼈다고 여러 해가 지난 후 회고했다. 15바이마르 공화국이 결국 히틀러의 독재정권에 무릎 꿇었기 때문에 바이마르의 민주주의자와 반민주주의자 사이의 분열에 초점을 맞추는 게자연스럽다. 의심할 여지 없이 베를린 정치인들에게는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사이 분열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나라 전체로 보면 훨씬 더 복잡하다. 당시에는 여론조사가 없었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독일 유권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공화국의 수많은 정당을 지지했던 다양한 집단과 지역에 대해서는 잘 밝혀져 있다. - P119

바이마르 공화국의 매우 중대한 분열은 ‘정치적 교화‘와 관련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만든 용어로, 사람들이 이웃·동료·교회·동호회·신문이나 다른 매체 같은 사회적 배경의 영향을 받아 투표할 때가 많다는 뜻이다. 일단 정치적 교파화가 되면 유권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집단을 절대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교파를 이루는 성당이나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서 사회화되는 일과 비슷하다.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교화‘된 진영이 세 곳 있었다. 사회주의 진영(기본적으로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 가톨릭 진영 (중앙당과 바이에른 지방의 자매당인 바이에른인민당), 신교도 중산층 진영 (보수적인 국가인민당, 자유주의자인 독일민주당과 독일인민당 그리고 소상공인당 같은 다양한 비주류 집단)이었다. 16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최고조였는데도(정권 교체가 너무 - P119

잦아 14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만 정부가 21번, 총리가 13명 새로 들어섰다), 진영은1919년부터 1933년까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각진영의 폭이 넓어서 그 안에 민주적인 부류도 있고, 반민주적인 부류도 있었다. 유권자들의 표는 보통 각 진영 안에서 움직였다. 진영을 바꿔서 투표하지는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독립사회민주당, 그다음에는공산당에 유권자를 빼앗겼다. 그러나 (1919년에 이례적으로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득표율은 전체의 35~40%라는 예측 가능한범위로 자리 잡았다. 가톨릭 진영의 표는 15% 안팎으로, 더 좁은 범위에서 움직였다. 나치는 사실 득표율이 30% 후반에서 40% 초반에 이르러 사회주의 진영보다 약간 앞서는 신교도 중산층 진영을 장악하면서 상당히많은 표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1925년에 "우리는 코를 움켜쥐고 가톨릭과 마르크스주의 의원들과 맞서면서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라고 추종자에게 말하면서 독일 정치의 기본 요소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 P120

히틀러의 나치는 이미 사회주의 진영으로 ‘교화‘된 유권자 무리를 1932년까지는 잘 끌어들이지 못했다. 가톨릭 진영의 유권자도 별로 끌어오지 못했다. 나치가 1932년과 1933년 선거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둘 때도 두 진영에는 별로 파고들지 못했다. 18세 진영이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는 사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사회가 얼마나 뿌리 깊게 분열됐는지를 또다시 잘 보여준다. 하지만 뭔가다른 점도 보여준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진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처음 진영에 발을 들인 사회화 과정이 공식적인 정치 이념만큼, 아마 그보다 더 표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가톨릭 신자들은 중앙당이나바이에른인민당에 표를 던졌다. 그게 가톨릭 신자로서 적절한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사회 계층에 충성하려고 - P120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했다. 그리고 나치는 중산층 신교도들이이미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세계관에 맞는 청사진을 내놓았기 때문에 성공했다.
독일 정치에서 ‘교화‘ 같은 분열은 농촌과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에 사는 사람과 살지 않는 사람의 구분으로 더 증폭되었다.
우리가 떠올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은 거의 베를린과 관련된이미지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그림, 쿠르트 바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가함께 만든 오페라, 에리히 멘델존의 건축,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에등장하는 카바레 가수 샐리 볼스, 크고 개방적인 동성애자 공동체 그리고온갖 성적 실험 말이다. 하지만 1925년에 독일인 6250만 명 중 4백만 명만베를린에 살았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농촌 사회, 주민이 2천 명을 넘지 않는 마을에서 살았다. 베를린 밖 주민들의 삶은 베를린의 초현대적인삶과 엄청나게 달랐다.  - P121

20세기 초중반의 도시에서는 오늘날 우리 생각보다 계층 차이가 더 뚜렷했다. 또 사회 계층에 대한 유럽인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인과다르다. 미국인은 보통 소득으로 계층을 구분한다. 유럽인은 계층을 주위환경, 장래성, 경제 형편 등 훨씬 더 복잡한 문제로 여긴다. 노동자 계층은시장에 자기 노동력만 내놓는 사람이지만, 중산층은 수입과 상관없이 사업을 하거나 변호사나 의사처럼 독립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옷차림, 말씨, 키와 조지 오웰이 인상적으로 묘사했듯) 냄새로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이 금방 구별되었다. 이러한 도시 사회 구조는결국 한쪽은 노동자 계층 정당, 다른 한쪽은 중산층 정당으로 분명하게나뉘는 현대 도시 정치를 낳았다.
농촌 마을에는 도시 같은 사회 구조가 없었다. 대신 역사학자 셸리 바라 - P121

노스키Shelley Baranowski가 ‘농촌 신화‘라고 부르는 게 있었다. 농사는 가장고귀한 일이고, 전원생활은 건강에 좋고, 진정성 있고, 사회적 안정과 조화와 평화를 만든다는 신화다. 농촌 신화의 바탕에는 분명 위계질서, 특히 귀족 영주와 농업 노동자 사이 위계질서가 있다. 목사, 교사 같은 전문직은 중간 계층이었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으로 위계질서의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위계질서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를 알았고, 자기의무와 책임감도 알았다. 아무래도 ‘반대편‘이 있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유지할 수 있었다. 도시는 적이었다. 바라노스키의 표현에 따르면, 도시는 "공화주의·다원주의·기계화·미국화·파벌주의·교육 실험·도덕적 타락이 팽배하고, 특히 남녀 사이의 적절한 경계가 무너진 곳"이었다.  - P122

종교적 믿음은 농촌의 정체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시골에서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도시보다 훨씬 강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해 떨어져 나가자 신교도가 많은 동프로이센에서 신교도의 정체성이 더욱 강해졌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프로이센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신교도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더 커졌다.
농촌 사람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회민주당의 득세는 도시 노동자 계층이 전쟁 전보다 더 많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정부가 농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려고 더큰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었다. 수출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자 관세 인하를 위한 무역협정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면 농촌사람들 입장에서는 수입 식품의 관세와 농산물 가격이 높을수록 이익이 커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폴란드에서 농산물을 수입한다는 1929년 무역협정에 농촌 지역은 격분했고, 절대 비준될 수 없었다. 1927년과 1928년에 이미 떨어지 - P122

고 있던 세계의 농산물 가격이 갑자기 더 빨리 폭락했다. 어떤 농민은 세금을 내지 못했고, 어떤 농민은 파산했다. 
1차 세계대전은 다른 면에서도 농촌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총,비행기와 현대전에 필요한 온갖 무기들을 생산하려면 수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국내에 남아 있어야 했다. 다른 모든 유럽 군대처럼 독일 군대는도시보다 농촌 지역에서 신병을 더 많이 모았고, 이는 농촌 청년들이 죽어가는 일을 맡았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도시를 향한 농촌 지역의 분노는점점 커졌다(무엇보다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던 지식인이나 전쟁으로 폭리를 취한 사람들의 본거지로 여기는 베를린에 대한 분노가 컸다). 베를린의 문화예술적인 실험은 보수적인 농촌사람들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다. 대도시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베를린은 중요한 산업 중심지였고, 아에게나 지멘스 같은 거대한 전자제품 제조업체 그리고 기계·직물과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체들의 본거지였다.  - P123

19세기에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 나라에서 그랬듯 많은 독일인은 공장을 악마로 생각하고, 농경 생활을 동경했다. 베를린은 독일의 금융 중심지이기도 했고, 은행과 증권거래소는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베를린의 사회 구성은 다른 지역과 완전히 달랐다. 베를린은 독일에서유대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독일 전체에서 유대인의 비율은 1%였지만, 베를린은 7% 정도로 훨씬 높았다. 베를린은 공업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산업노동자들의 본거지였고, 산업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거의 모든 선거에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함께 베를린에서 절반이 넘는 표를 얻었다. 나치나 다른 우파 정당들은 베를린을 "붉은 베를 - P123

린"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대다수 독일인에게 베를린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싫어하는 점을 모두 모아놓은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베를린에 대한 반대는 곧 바이마르 질서에 대한 반대를 의미했다. 바이에른의 작가 루트비히 토마LudwigThoma 는 "베를린은 독일이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베를린은 타락했고, 갈리치엔갈리치아 지방의 독일어 명칭의 오물로 더럽혀졌다" 라고 말했다. 폴란드 갈리치아 지방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가 정말 많았기 때문에 갈리치엔사람‘은 유대인을 부르는 은어였다. 비슷한 이유로 보수 언론인 빌헬름슈타펠Wilhelm Stapel은 베를린을 "공화국의 시궁창"이라고 불렀다. 그는
"너무 많은 슬라브인과 통제받지 않는 너무 많은 동유럽 유대인들이 베를린 사람들에 뒤섞였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언짢은 혼합‘이 베를린의 특징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 P124

의 특징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슈타펠은 이민자들이 들여왔다고 생각하는 "무례한 독선과 끊임없이 낄낄거리며 비꼬는 말과, 지방을 베를린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식인의 오만을 싫어했다. 베를린을 치유할 약은 무엇일까? 칸트와 괴테 같은 독일의 문화 전통일 수도 있고, 루터교의 ‘단호한 의지‘일 수도 있다. 슈타펠은 독일 전원 지역의 농부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농촌과 교회가 베를린에 갖는 반감에는 대도시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탐색을 못마땅해하는 부분도 컸다. 그저 내숭 떠는 게 아니었다. 뭔가 더뿌리 깊은 원인이 있었다. 독일 신교도들이 보기에는 남성 중심의 가족이사회 질서의 핵심이었다. 아버지는 집안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생활도 다스려야 했다. 남성 중심에서 벗어난 성적 관계나 가족 구조는 모두 정치·사회권력의 근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어떤 베를린 시민들은 우월감을 보이거나 시골에 사는 동포를 경멸하 - P124

기까지 했다. 시인이자 어린이책 작가인 에리히 캐스트너 Erich Kastner는시골에서 와서 베를린의 분주하고 국제적인 포츠담 광장(무엇보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신호등이 설치된 곳)에 압도된 관광객이 차에 치일‘ 때까지 ‘온갖 잘못‘을 저지르며 ‘고통스럽게 웃는 장면을 상상했다. 언론인 쿠르트투홀스키 Kurt Tucholsky는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포메른 교외에 살고 구닥다리 옷을 입은 교양 없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서‘ 어두움 속에 사는 지방에 베를린의 빛을 비추자고 베를린사람들에게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전망했다. 투홀스키는 "여러 민주적인 신문이나 예술가, 자유주의 단체들의 명성은 사실 실제 능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썼다. ‘반작용의 힘이미 존재했고, 더 교묘하게, 무엇보다 별로 정중하지 않게 휘두르는)‘은 ‘주식 시장과 상인 계층‘의 지원을 받아 조용히 작동했다.  - P125

농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쓴 빌헬름 슈타펠이 맞았다. 1928년, 독일 농업을 강타한 경제 위기 가운데 급진적인 농촌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스스로 란트폴크 Landvolk, 시골 사람라고 부르면서 프로이센 북부의 농촌 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시작한 저항운동은 북부와 동부의 농촌전체로 퍼졌다. 란트폴크는 수입 농산물에 관세를 새로 부과하고, 쉽게대출받을 수 있게 하고, (주로 도시가 혜택을 받던 사회 복지를 줄이라고 요구했다. 저항운동은 정치적으로 극우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부 건물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테러리스트 전략을 사용했다. 1929년, 저항 세력은증오하는 공화국과 베를린에 대한 궁극적이고 상징적인 공격으로 국회의사당에 폭탄을 터뜨렸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나치가란트폴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나치는 곧 농민 유권자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 P125

독일의 정치적 분열에서 유대인에 대한 독일 기독교인의 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도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정치적 우파의 특징이었다. 역사학자 슐라미트 볼코프 Shulamit Volkov가 쓴 대로 반유대주의는 사람들의 여러 믿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인 ‘문화코드‘였다. 여러 믿음 중 가장 중요한 건 독일 민족주의였지만, 권력 숭배, 남자다움과 정력 중시, 엘리트주의,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도 있었다.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또 도시를싫어하고 시골을 좋아했다. 상업적이기보다 군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있었고 군사적인 예법을 중시해서,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를 반대하기 쉬웠다.  - P126

정치에서 반유대주의는 포퓰리즘 경향이 강했다. 반유대주의 때문에 농민이 곡물상에 맞서고, 소상공인이 백화점에 맞섰다는 주장도 있다. 반유대주의는 엘리트주의, 자본주의, 현대화에 반대했다.
반면 반대쪽 끝에서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은 민주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 평화주의, 페미니즘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전쟁 전에 사회민주당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이 반유대주의는 "바보들의 사회주의"라고 선언했던 게 가장 유명한 사례다. 그와 같은 사람은 많았다. 역사학자 테어도어 몸젠Theodor Mommsen은 반유대주의가 유대인뿐 아니라 ‘교육, 자유와 인간애‘를 증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지지자였던 철학자 테어도어 레싱 Theodor Lessing은 여성과 - P126

유대인은 똑같이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1910년에썼다. 반유대주의는 1918년 이후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문화코드로 활용하면서 점점 더 뚜렷해졌다. 전쟁 전 독일에서는 지역 사회나 특정 업계 안에서의 위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폭발하곤 했다. 그러나 1918년 이후에는나라 전체의 위기(패전, 혁명, 내란, 초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가 많아서 반유대주의도 더 심해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구조는 어쩔수없이 독일에 사는 유대인에게유리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는 포퓰리즘이기 때문에 전쟁 전의 독일제국 시절에는 약간 권위주의적이던 연방주가 반유대주의를 반대하는 편이었고, 정당의 힘이 강하지 않아 반유대주의 운동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산당도 때때로 어떤 당 못지않게 반유대주의 발언을했지만, 보통 반유대주의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전유물이자 특징이었다. 요즘 미국에서 낙태 문제에 대한 태도로 민주당인지 공화당인지 구분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대다수 사람에게는 반유대주의 편인지 아닌지가 결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의 상징성때문에 이쪽 혹은 저쪽을 선택해야 했다.  - P127

독일에서는 대기업과 군대가 강력한 두 집단이었다.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민주당이 아무 권력도 갖지 못하도록 몰아내고 싶었다. 이는 사실 법을 만들고 내각을 구성하는 국회의 문을 닫거나 최소한 힘을 제한할길을 찾는다는 의미였다. 기업가와 군인들은 보다 권위주의적인 통치를원했다. 대기업은 국가의 중재 제도로 대부분 시행되는 임금 인상 합의에점점 더 신경이 거슬렸다. 군대는 사회민주당이 군비 지출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려고 해서 화가 났다.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와 대기업 모두 새로운 단계의 정치 활동으로 전환했다. 이익집단을 만들고,동조하는 정당들을 끌어들이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흔들 합법적인 전략을 찾았다. 러시아이러한 모든 반정부 활동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좋은‘ 시절 동안, 정확히는 좋은 시절에 대처하면서 새로운 해결책, 새로운 강도로 시작되었다. - P129

이 문제는 이념적인, 거의 철학적인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민주적이든 반민주적이든 바이마르 공화국의 모든 진영은 하나같이 타협을 막는강렬한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인민당은 국익을 위해 1920년대에 몇 차례 국회에서 자신들의 이념과 정반대인 정책을 지지했다. 그런 태도라면 국가인민당은 민주적인 공화국을 점차 받아들여야 했다. 로카르노 조약 시기에는 잠시 그렇게 되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적인 정치인들은 국가인민당의 폭넓은 시야를 칭찬하기보다 "등뼈가 부러졌다"라고조롱했고, "이런 일 이후에도 민족주의자 유권자들이 (국가인민당에 남는다면 어떤 정당도 그런 유권자를 가졌다고 (국가인민당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 P130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아돌프 히틀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다른 면에주목하면서 똑같은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최신 교훈, 즉 총력전에 대한교훈이었다. 그러한 교훈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금융시장 붕괴가 대공황을 불러일으켰고, 대공황이 히틀러를 자극해 독일의 민주주의가 막을 내렸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사실 대공황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지 감소, 나치의 정치적 성공 사이의 인과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또한 모든 일이 월스트리트 금융시장이 붕괴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 P143

슈트레제만이 사망하고, 후겐베르크가 세력을 얻고, 농촌의 불만이 점점 더 커지고, 코민테른이 ‘제3시기‘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고, 기업가가 좌절감을 느끼고, 군대가 공화국 때문에 제약을 받고, 주의회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나치가 처음으로 많은 표를 얻는등 1928년과 1929년에 벌어진 일들은 독일이 전후의 세계 공동체에서 확실히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고, 이는 또한 민주주의에 등을 돌린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1920년대 말에는 독일 경제 상황도 최악이었다.
1929년 이전부터 각 분야에서 점점 심각해지던 몇몇 경제·금융 문제가한데 모였다.
문제 중 하나는 농민들의 저항을 불붙였던 전 세계 농산물 가격 하락이었다. 독일 동부의 많은 지역 (슐레지엔, 포메른, 프로이센)과 북부와 서부, 특 - P143

히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니더작센 지방은 대부분 농촌이었고, 1920년대 중반부터 큰 고통을 받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농민들은 그 문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아, 유권자들이 먼저 매우 강렬하게 공화국에 등돌린 지방이었다는 게 우연이 아니었다. 1932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어떤 지역에서는 유권자의 80%가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다음 요인으로 산업 생산성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을 많이 활용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합리화‘ (오늘날 우리는 ‘자동화‘라고 부른다)를들 수 있다. 보통 그렇듯 생산성을 개선하면 고용이 줄어든다. 합리화가몇몇 산업에만 집중되었지만, 그 몇몇이 주요 산업이었고, 실업 문제가심각했다. 1922년에서 1928년 사이에 루르 지역의 광부 수가 33% 줄어들었다. 금속과 자동차 제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 P144

어느 정도 이러한 이유로 1928년 중반이 되자 독일의 실업자가 130만명에 이르렀다. 1년 후에는 150만 명으로 늘었다. 실업자들에게 실업급여를 줘야 하니 정부는 세금을 더 거둬들일 방법을 찾거나 다른 부분에서예산을 줄여야 했다. 뮐러 정부는 누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지 합의하지못했고,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 정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독일을 위기로 몰아넣은 건 무엇보다 재정 문제였다.
독일을 불경기로 몰아넣은 건 1929년의 월스트리트 붕괴가 아니라 1928년 월스트리트의 상승장이었다. 독일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비자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단기인 외채에 크게 의존했다. 그런데 전세계의 자본이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뉴욕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독일은 자본이 부족해졌다. 
이것이 새로 취임하는 총리가 맞이한 상황이었다. - P144

그래서 유럽은 완전히 다른 미래로 접어들었다. 브뤼닝 총리는 민족주의 열풍이 치솟고, 주의회 선거에서 나치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경고 신호로 알아차리고 조금 더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선거를 미뤄야 했다. 그러나 브뤼닝은 1930년 가을에 선거를 치렀고, 이후 그 일로 계속 심한 비난을 받았다. 이전에 총리를 지냈고 1930년에는 독일의 중앙은행 총재였던 한스 루터처럼 충실한 지지자는 훗날 브뤼닝이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몰랐고, 날벼락 같은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브뤼닝 자신은 나치 득표율이 전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1944년에 썼다.
그러나 당시 실제로 그렇게 예측했다기보다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더 통찰력 있어 보이려고 한 말일 수도 있다. 사망 후인 1970년에 출간된 회고록에서 브뤼닝은 불황이 4년 동안 계속 이어지겠다고 예상했고, 강력한 - P152

조처를 할 권한을 원했다고 썼다. 1브뤼닝과 함께 전략을 세운 슐라이허 역시 방심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를 사회민주당을 상대할 우파 정당 정도로 보면서 우려하지 않았다. 그는몇 년 후 빈센츠 뮐러에게 "히틀러에 대한 내 전략은 기본적으로 우리가1918년과 1919년에 군대 최고사령부에서 혁명 세력에 대처했던 전략과같네"라고 설명했다. 1918 년 전략은 ‘사회민주당을 끌어들여 급진적인부분을 제거하고,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한다‘는 전략을 뜻했다.
나치는 사회민주당과 달리 민족주의자이자 군국주의자였다. 슐라이허는나치의 그런 점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군인으로서 나치의 돌격대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뮐러에게 "특히 돌격대에는 좋은 점이 많다고 믿었네. 군대는 예비군 확보를 위해 돌격대에 관심이 많았지"라고 말했다. 슐라이허는 나치 득표율이 높아지는 일을 두려워하기보다 환영했다.  - P153

이후 2년 반 동안 펼쳐진 독일 정치에서 나치를 끌어들이려는 슐라이허의 노력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 슐라이허는 독일을 더 권위주의적으로 개조하고 싶었다. 또한 권위주의 국가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추종자를 모으기 위해 히틀러와 나치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이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려면 매우 교묘히 움직여야 했다.
슐라이허는 나치가 조금이라도 진짜 힘을 가지기 바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언제나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는 게 슐라이허의 전략이었다.
가능하면 나치를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활용할 수 없다면 내쫓을 준비를했다. 아마도 자기 꾐수에 자기가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것 같다. - P153

베를린 북부, 가난하고 음침한 동네의 어두운 밤, 노동자들이 사는 라이니켄도르프 지역 동부, 빌케 거리와 쇤홀처 길의 모퉁이 근처에 많지 않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다. ‘일곱 다리‘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북부철도의 육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서쪽에는 금속 울타리가 펠제네크 주말농장이자 형편없는 오두막들이 모인 곳을 가른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실직자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공산주의 신문 《디로테파네Die Rote Fabne, 붉은 깃발>의 표현대로 "끝을 내모는 경제 위기와 자동화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 P157

요한 바누셔란 남자와 그의 처제는 빌케 거리에서 서둘러 걷고 있다.
고요한 밤이어서 발소리만 크게 들린다. 그들은 펠제네크 주말농장에 있는 바누셔의 집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여덟 명에서 열 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두 사람을 위협한다. 제복이 금지돼 일반인 복장이지만, 분명 나치 돌격대원들이다. 남자들이 바누셔를 둘러싼다. "그 사람이야. 우리가 지금 그를 잡았어"라고 누군가 말한다. "공산당원 맞아. 여기 살고있잖아. 공산당원이지"라고 다른 사람이 말한다. 세번째 남자가 "증거확인했어?"라고 묻는다. 대원들을 이끄는 헤르만 슈르는 "네가 클렘케지?"라고 묻는다. 누군가 바누셔가 코르덴 바지를 입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코트를 벗긴다. 돌격대원들은 무기로 사용하려고 벨트를 푼다. 하지만바누셔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다. 위험한 순간은 금방 지나간 - P157

다. "꺼져, 가자"라고 슈르는 부하들에게 말한다. 
외모나 옷차림이 요한 바누셔와 상당히 비슷한 프리츠 클렘케는 얼굴이 말쑥한 젊은 남성이다. 클렘케는 열흘 전 라이니켄도르프에 있는 직업소개소에서 몇몇 돌격대원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바로 어제, 빈터거리 근처에서 공산당원들과 나치가 다시 싸움을 벌였다. 이번에는 형사고발이 기다렸다. 나치는 복수에 나선다. 1932년 1월 16일 새벽이다.
돌격대원은 이틀 후에 다시 그곳으로 온다.
베를린 북부의 몇몇 돌격대원 부대, 모두 합해 200명 정도가 1월 18일저녁에 바이트만슬루스트 지역의 베르크쉴로스라는 식당에 모여 친목을다진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의 지도자 베르너 슐체Werner Schulze가 일어서더니 부하들에게 연설한다. 그는 "우리는 오늘 작은 일을 하나 더 할 것"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펠제네크로 곧장 행진하라고 명령한다. "공산당원을 만나면 누구든 죽여버린다." - P158

펠제네크는 베를린 라이니켄도르프의 236군데 주말농장 중 하나다. 평상시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일요일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장미 덤불을 가꾸던 자그마한 땅들이 있는 곳이다. 1932년 1월은 평상시가 아니다.
이제 실직자들이 이곳에서 생활한다. 나무판자나 마분지로 지은 판잣집에서 와들와들 떨면서 지낸다. 놀랍게도 슐체가 이끄는 돌격대원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펠제네크로 행진한다. 더욱더 놀랍게도 돌격대원들이 주말농장에 도착하자 호위하던 경찰이 사라진다. 나치는 ‘사격선‘으로 알려진 공격 대형을 갖춘다.
돌격대원들은 찾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다. 몇몇 나치 당원이 어떻게 프리츠 클렘케를 쇠막대로 때려눕혔는지 하인리히 빌보크라는 18세 돌격대원이 훗날 설명한다. 안경을 쓴 키 큰 남자가 코트 깃으로 얼굴을 가린 - P158

채 갑자기 나타나더니 다른 사람들을 밀어젖힌다. 그는 의식을 잃은 클렘케의 등을 권총으로 쏜다. 총알이 클렘케의 심장을 관통하고, 클렘케는곧장 사망한다. 이젠 나치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한다. 주말농장 근처 어두운 거리에서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공산당의 준군사조직인 ‘반파시스트 행동‘의 누군가가 에른스트 슈바르츠라는 돌격대원을 칼로 찔러 죽인다. 슈바르츠는 58세로, 돌격대가 되기에는 무척 나이가 많은 미술 교사였다.
1932년 겨울은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져 있다. 불황이심각할 때 나타나는 정치의 모습은 이렇다. - P159

독일을 걱정한 사람들은 독일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선거 결과를 보고 불안해진 외국 투자가들이 독일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면서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한 달 만에 8억 라이히스마르크(1930년 환율로 1억 9천만 달러 정도, 오늘날에는 28억 달러)의 외국 자본이 독일에서 빠져나갔다. 국제 시장에서 독일의 유가증권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했고, 중앙은행이 금보유고의 절반을 잃었다. 그래서 금리를 5%(뉴욕은 2%, 런던은 3%)로 올릴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떨어지고 있어서 실제로 돈을 빌리는 비용은 12%로 올라갔다. 이미 경기 침체를 겪는 상황이어서 더욱 심각했다. 독일 경제는 더 깊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그와 슈트레제만이 이루려고 애썼던일들의 잔해를 뒤적였다. 히틀러가 선거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브리앙의 반응은 1년 전 슈트레제만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 비슷했다. 그는 자신을 "나치의 첫 번째 희생자"라고 불렀다. 
왜 나치가 그렇게 많은 표를 얻었을까? 나치는 유권자들에게 무엇을약속했고, 유권자들은 나치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았을까? - P162

나치 운동을 이해하려면 정치의 기본적인 요인을 이해해야 한다. 나치는정당이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를 포함해 모든 정치인처럼 그들 역시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치 공간으로 옮겨갔고, 자신들이 끌어들인 지지자에 맞춰 계획을 바꿔나갔다. 나치의 이념과 목표는 언제나 의도적으로 모호했고, 항상 바뀌었다. 히틀러는 1920년에 큰소리로 팡파르를 울 - P162

리면서 25가지 주장이 들어간 나치 강령을 발표했고, 이러한 주장들은바뀌지 않는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러더니 히틀러는 이 주장들을 버렵기 때문에, 그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 한 일들은 강령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15그렇지만 나치가 초창기에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였는지 이해하려면25개 조항에 담긴 주장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일부는 민족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주장들이다. 나치는 ‘민족자결권‘을 바탕으로 "더 위대한 독일에서 모든 독일인이 하나가 되자"
라고 주장했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폴란드·프랑스·벨기에에 ‘빼앗긴‘ 땅들을 회복하자는 뜻이었다.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연합국과 오스트리아 사이 강화조약)을 폐지하고, 평화 협상에서 승전국들에 빼앗긴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되찾아야한다는 요구였다. - P163

다른 주장들은 성격이 달랐다. 자본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 복지를 지향하는 게 나치가 초기에 내세운 이념의 핵심이었다. 나치는전쟁으로 폭리를 취하는 일을 금지하려고 했고, 대기업과 백화점의 국유화와 대기업의 이익 분배, 조건이 좋은 노령연금, 가난한 아이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 보장(국가가 교육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체조와 스포츠를 의무화하는 법률 제정, 그리고 청소년의 체력 단련과 관련 있는모든 조직 지원을 요구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성명서의 세 번째 주요 주제였는데, 이는 같은 민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쉽게 변질했다. 7조에서는 "시민의 생계를 보장하는 게 국가의 주요 의무다. 국민 전체를 부양할수 없다는 게 입증되면 외국인을 독일에서 내쫓아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 P163

뒤이어 8조에서는 이민자를 향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국외 추방을 하자고 했다. "독일인이 아니면 누구든 더 이상 이민을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독일인이 아니면서 1914년 8월 2일 이후에 독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 지체 없이 독일에서 추방할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나치는 주로 유대인이 이주해 올 것을 걱정했다. 1차 세계대전 때문에유대인 약 8만 명이 대부분 이전 러시아 제국령에서 피난을 왔다. 1922년에는 들어오는 난민이 줄어들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절대 동쪽 국경을 빈틈없이 통제할 수 없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계속 남았다. 이른바 ‘동유럽 유대인Ostjuden‘은 일찌감치 독일에 정착해서 동화된 유대인과는 문화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1923년 베데커 여행안내서의 베를린 편에도 동유럽 유대인의 존재가 넌지시 표현되어 있다. 안내서 집필자는 "주로 동유럽에서 잔뜩 몰려온 외국인들이 쉽게 눈에 띄면서 황실의 찬란함은 사라졌다" 라고 한탄했다. 전쟁과 혁명에 시달리면서 이미 달아올랐던 반유대주의를 난민들이 더욱 불붙였다. - P164

그러니 나치 강령에서 반유대주의가 뚜렷했던 게 놀랍지 않다. 4조에서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 삼단논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포만 시민이될 수 있다. 종교와 상관없이 독일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만 동포가 될 수있다. 그러니 유대인은 동포가 될 수 없다."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종교와거의 관련 없다고 나치는 생각했다. 유대인으로 분류된 사람은 개종해도자신의 신분을 바꿀 수 없었다. 가족이 대를 이어 독일에서 살아왔어도,
독일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어도, 기독교로 개종했어도, 1차 세계대전때 참호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어도, 유대인은 나치 제국의 시민이 될 수없었다.
계속해서 나치 강령은 이러한 주장의 몇 가지 다른 의미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 P164

5조에서 "시민이 아니면 독일에서 그저 손님으로만 살 수 있다.그리고 외국인 체류자 법률을 따라야 한다"라고 했다. 시민만 공직에서일할 수 있다. 모든 시민에게는 ‘평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물론 이러한 평등은 나치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모두 독일에서 내보낸 다음에야 이룰 수 있다. 실제로 권력을 잡자 나치는 정적, 신체적·정신적 장애인, 상습범, 여호와의증인, 집시, 동성애자 등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집단들을 더 추가한다. 
강령에서는 어느 주장을 다른 주장들보다 몇 배 더 길게 강조했는지 아주 잘 드러났다. 23조에는 반유대주의와 언론과 선전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이 뒤섞여 있다. - P165

우리는 국제적·정치적 거짓말 그리고 언론을 통해 그러한 거짓말을 퍼뜨리는 행동에 대해 법적 투쟁을 요구한다. 독일적인 신문의 창간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요구한다.

ⓐ 독일어로 발행하는 신문의 기자와 기고자는 모두 독일인이어야 한다.
ⓑ 비독일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정부의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야한다. 이러한 신문은 독일어로 인쇄될 수 없다.
ⓒ 비독일인이 독일 신문의 지분을 보유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영향을 끼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된다.

이러한 법을 어기면 관련 신문사의 문을 닫고, 독일인이 아닌 관련자를즉각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 P165

공익을 침해하는 신문은 금지해야 한다. 국민 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예술과 문학 사조에 대해서는 법정 투쟁을 벌이고, 이러한 요구를어기는 문화행사는 탄압할 것을 요구한다. 


이 강령만 보아도 나치가 통치하는 제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없겠다는사실을 알 수 있다. 나치를 향한 어떠한 반대도 ‘비독일인‘의 활동, 따라서 ‘공익‘을 침해하는 활동으로 여기리라는 게 너무 분명했다.
다양한 영역을 다루는 주장도,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주장도 있었다(예를 들어 19조는 독일인 대부분이 거의 관심도 없는 로마법 적용에 반대한다는 주장이었다. 정치 단체가 주장하고 약속하는 일과 유권자가 반응하는 일은 별개다. 어떤 주장이 독일 유권자들의 마음을 울렸을까?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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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에베르트의 동료인 필리프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은 국회의사당 발코니 위에 서서 "공화국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친다. 샤이데만은훗날 그저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 외침을 독일이 사실상 민주공화국이 되었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인다.
국회의사당에서 동쪽으로 8백여 미터 떨어진 왕궁에서는 급진적인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독일이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선언한다. 이때가되자 빌헬름 2세가 드디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다.
늦은 오후, 막스 대공은 에베르트와 마지막 회의를 벌인다. 이번에는 에베르트가 대공에게 일종의 섭정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막스 대공은 "당신이 독립당(사회민주당보다 더 급진적인 독립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기 직전이라는 걸 압니다. 난 독립당과는 함께 일할 수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회의 자리를 나서면서 막스 대공은 고개를 돌리더니 "에베르트 - P47

씨, 독일제국을 당신이 지켜주세요!"라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
에베르트는 "아들 둘이 이 제국을 위해 죽었습니다"라고 침통하게 대답한다. 1918년 11월 9일이다.
이틀 후, 독일 정치인들과 연합군 장교들이 협상한 휴전협정의 효력이발생한다. 1차 세계대전은 끝난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패전을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로 받아들인다. 전투에서 독가스 공격을 받은 후 베를린에서북동쪽으로 1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포메른의 작은 마을인 파제발크의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한 부상병도 마찬가지다.
"모두 헛수고였다. 모든 희생과 손실, 2백만 명의 아까운 죽음이 허사가되었다. 조국을 형편없는 범죄자 무리 손에 넘기려고 병사들이 싸웠다는말인가?" 어머니 장례식 이후 운 적이 없던 젊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병동에 돌아와 "빠개질 것 같은 머리를 담요와 베개 사이에" 묻는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 일병이다. - P48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이마르 공화국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이 사실 1차세계대전과 관련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사상자가 그렇게 많이 발생한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 4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독일 병사 170만 명이 사망했다. 러시아를 - P48

제외하면 독일의 전사자가 제일 많았다. 여성을 포함해 민간인들이 군수산업 같은 전시 노동에 그렇게 많이 동원된 적도 없었다. 전쟁 중이었기때문에 국가는 어느 때보다 많은 노동과 희생을 국민에게 요구했다. 그래서 계속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게 중요했다. 새로운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국가가 전쟁을 ‘팔수‘ 있는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졌다. 주로 갈등의 의미나 적의 본질에 관해 대체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면서전쟁의 필요성을 선전했다. 전시 선전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 국민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여름부터 1918 년 늦가을까지 질질 끌었다. 그중간쯤인 1916년 말을 앞두고 현실적으로 결정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모두 전쟁 비용이 예상보다 너무 많이 들고, 국내 사정이 점점 더 불안해져서 깜짝 놀랐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완전히 승리하거나 교착 상태를 인정하고 평화 협상을 해야만 했다. 승리하려면 빛을 더 많이 지고, 사상자가 더 많아져도 상관하지 않고, ‘국내 전선‘
이라고 불린 후방 국민에게 노동과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몇 배 더 노력해야 했다. - P49

아무리 무자비한 지도자라도 현대 총력전의 기본 요소를 바꿀 수는 없었다. 총력전을 하려면 모든 시민의 노동이나 전투력이 필요했다. 따라서시민들에게 국가를 상대로 협상할 수 있는 힘이 전례 없이 생겼고, 국가는 승리 후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고 더욱더 과장되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조약의 신성함, 그리고 독일이 공격한 ‘작고 용감한 벨기에‘를 보호해야 한다고만 이야기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신성한 조약을 위해 수십만 명의 청년에게 죽으라고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1918년, 로이드 조지 총리는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과 함께 ‘국제연맹‘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싸움을 "전쟁을 끝내려는 전쟁" (영국의 과학소설 작가이자 사회평론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가 처음 한 말)이라고 표현했다. - P50

전쟁 때의 다른 상황들을 보면 미래가 더 불길하게 보였다. 독일 정부는승리하면 제국이 새롭게 위엄을 보인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의 서쪽 땅을 더 많이 차지해 유럽의 지배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18년에 러시아가 전쟁을 중단하고, 독일이 지금의 폴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면서 그 약속은 잠시 현실이 되었다. 1917년에 새로 결성된 독일조국당(조국당)은 독일이 국내의 온건파를 무너뜨리고, 유럽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고, 인도의 문 앞까지 가면서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언론재벌로 조국당 당원이었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주류 기성 우익 정당인 국가인민당을 이끌게 된다. 뮌헨의 도구제작자이자 자물쇠 제조공이던 안톤 드렉슬러 Anton Drexler 역시 조국당 당원이었다. 드렉슬러는 1919년, 조국당의 비전을 되살리기 위해 독일노동자당이라는 당을 설립했다. 다음 해, 젊은 참전용사인 아돌프 히틀러가들어온 후 독일노동자당은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나치라고 불린 당이다 - P51

그래도 정치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었다. 1917년 7월, 가장 민주적이고 합치면 제국의회 의석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세 정당(사회민주당, 독일민주당, 중앙당)이 합병이나 강제 배상금 없는 평화 협상에찬성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를구속할 수는 없었지만, 겁줄 수는 있었다. 제국의회의 과반수가 곧 독일인 과반수의 생각을 대변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장군은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조국당 결성을 준비했다. 그들은 또한 정부를 책임지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Theobald von Bethmann-Hollweg 총리를 해임했다. 제멋대로인 제국의회의 민주주의자들을 다루기에는 너무 약하다고판단해서였다. - P52

1918 년 가을, 독일 군대는 유럽 여기저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전히벨기에 대부분과 프랑스 북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동유럽의 드넓은땅도 지배하고 있었다. 반면 적군이 점령한 독일 영토는 전혀 없었다. 2차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항공기와 폭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연합군의공군이 독일 도시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독일 언론은 전쟁 중에검열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에 승전보와 희망적인 약속밖에는 실을 수가없었다. 민간인 중 지식이 풍부하거나 통찰력이 탁월했던 사람만 독일이패배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한 사람들 눈에도 지도자들이 너무 갑자기 휴전을 요청했다. 독일인 대부분이 독일이 왜 패배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당연했다. - P53

20세 이상의 모든 남녀가 최소 4년마다 선거로 의원을 뽑아 국회를 구성하는 게 새로운 헌법의 핵심이었다. 선거의 놀랍고 혁신적인 요소는 비례대표제였다. 비례대표제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하원의원 선거처럼 유권자들이 각 지역의 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게 아니라, 각 정당의 후보 목록을 보고 정당에 투표한다. 그러면 각 정당은 국민에게서 표를 얻는 비율만큼 의석수를 얻는다. 13오늘날 유럽에서는 비례대표제가 흔하다. 독일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유권자의 선택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의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비례대표제의 장점이다. 반면 영미의 선거 같은 다수대표제는 40% 정도의 표를 얻을 수 있거나, 득표율이 특별히 높은 지역이 따로 있는 정당에 아주 유리하다. 반대로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득표율을 보이는 정당에는 불리하다.
보통 두 정당이 싸우는 미국의 국회의원 선거조차 의석수가 득표율을 반영하지 않을 때가 많다. 비례대표제의 단점은 군소정당을 포함해 수많은정당의 의원들로 의회가 구성되어 정부가 불안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 문제로 심하게 골치를 앓았다. - P57

1919년 11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이 패배한 원인을 조사하려고 만든 국회 위원회의 청문회에 함께 출석했다. 두 사람은 모두 군복을 입지 않았다. 군복을 입고 나타나면 증언을 들을 국회의원에게 지나친 존경을 보여줄까 봐 그랬다고 그들은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게오르크고타인Georg Gothein이라는 위원회 위원장이 힌덴부르크에게 질문하려고했지만, 힌덴부르크는 그를 무시하고 루덴도르프가 초안을 작성한 성명서를 읽었다. 고타인이 이를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힌덴부르크는 차분하게 계속 읽었다. "적이 병력이나 군수물자 모두 우월했지만, 우리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그런데 정당들의 각기 다른 당리당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의지가 금방 무너졌다. 붕괴는 불가피해졌고, 혁명으로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힌덴부르크의 성명서는 "독일 군대는 등을 찔렸다"라는, 오랫동안 기억될 말로끝을 맺었다.  - P66

군대의 최고사령부는 전쟁에 패배한 책임은 민주주의자들에게 있고,
베르사유 조약은 민주주의자들이 군대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등을 찌른)결과라는 개념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말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그러한 개념을받아들였다. 민주주의자들은 역사학자 제프리 버헤이 Jeffrey Verhey 박사가썼듯이, "이성적인 사람들이 엄청난 불합리성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불신"으로 대응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어쨌든국내 세력에 등을 찔려 패전했다고 믿었다. 그게 합리적인 생각인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이념이나 세계관과 맞았고,
어쩌면 그들의 심리적인 욕구와 맞을지도 몰랐다. 독일인들은 그러한 생각을 믿고 싶었다.
전쟁에 왜 패배했는지 그리고 전후 협상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전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던 점이 독일이 처음 경험한 민주주의의근본적인 문제였다. 전쟁 결과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원, 병력과 해군력이 풍부했던 연합군이 독일을 제압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전후 세계를 좌지우지했다.  - P67

전체주의 사회는 루덴도르프가 딱 원한 사회였다. 만약 후방 국민의 규율이무너지는 바람에 독일이 전쟁에서 졌다면,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질 수 없도록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게 나라를 위한 첫 번째 과제였다. 그러려면 반대 의견을 무자비하게 짓밟아야 한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군복무를 하든 전쟁 준비를 위해 모든 국민을 어떤 식으로든 동원해야 했다. 사상 통제와 효과적인 선전은 필수적이었다. 독재국가만이 이 모든일을 할 수 있었고, 그러니 전후의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독일이 결코 선택해서는 안될 제도였다.
루덴도르프의 참모였던 막스 바우어는 "통치한다는 것은 지배한다는뜻이다"라고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321920년대 초, 루덴도르프는 파제발크 병원에서 부상병으로 전쟁을 마쳐야 했던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하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P69

나치의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가 쓴 소책자가 도마에 오를 때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당원을 새로 모집하기 위해 나치 이념을 간단히 소개하는 소책자다. 소책자에는 나치가 선거로 권력을 잡을 수 없으면 "그때 우리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의회를 완전히 쫓아내고독일인의 주먹과 독일인의 두뇌로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약속하는내용이 들어 있다. 히틀러의 정당이 합법적이라면 정당의 선전 책임자가어떻게 그런 글을 쓰고 또 공식적으로 발간할 수 있었을까? 오전에 히틀러는 정당이 그 소책자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면서 질문을 회피한다. 하지만 리텐이 점심시간 동안 괴벨스의 집회 그리고 당의 모든 책방에서 아직 그 소책자를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히틀러가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히틀러는 설명하지 못한다. - P75

아돌프 히틀러는 줄곧 거짓말을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어떻게 할 계획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것이 아돌프히틀러의 본질적인 역설이다.
우리는 히틀러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그 역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변호사이자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총독을 지낸한스 프랑크 Hans Frank는 1920년에 히틀러 연설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사람은 자신이 완전히 믿지 않으면 남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이다"라고 느꼈다고 기억했다.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기자이자 중요한 히틀러 전기를 처음으로 썼던 콘라트 하이덴Konrad Heiden은 뮌헨에서 기자로 일할 때 히틀러 연설을 여러 차례 지켜봤다. "연설이절정에 이르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매혹된다. 그리고 순수한 진실을 이야기하든 거짓말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는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표현하 - P77

면서 말한다...… 거짓말을 할 때조차 진정성이 넘쳐흘렀다"라고 하이덴은 기록했다. 한편 히틀러 정권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Lutz Schwerin von Krosigk 백작은 "그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정직하지 않았다. … 내 생각에 그는 거짓말이 너무 몸에 배어서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더는 깨달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자신이 정직하지 않다고 놀랄 만큼 솔직하게 말했다. 정치적 메시지는 정직하지 않을수록 좋다고 히틀러는 썼다.
그에 따르면 정치인은 작고 사소한 거짓말을 할 때 실패한다. 작은 거짓말은 쉽게 들키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큰 거짓말‘을 하는 게 훨씬 낫다. 왜 그럴까? "큰 거짓말 안에는 언제나 뭔가 신뢰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많은 사람이 머리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더 쉽게 무너질 수 있어서다. 그들 마음속 원초적인 단순함 때문에 작은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더 넘어가기 쉽다. 그들 자신이 때때로 작은 거짓말은 하지만, 수치스러워서 너무 큰 거짓말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히틀러는 설명했다. - P79

"국민 대부분은 게으르고 겁쟁이다" 라고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썼다. 관세나 조세 규모 혹은 외국과 조약을 맺은 자세한 내용에 관한 복잡한 메시지로 국민과 소통하려고 애써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하려고, 박식하고 무미건조한 정책 강의를 늘어놓는 게 바로 ‘부르주아지(중산층 자유주의자)‘ 정치인들이 실수하는 점이다. 평범한 사람은 복잡한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보통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려면 메시지가 간단해야 한다. 지적이지 않고 감정적이어야 한다(증오심이 잘 먹힌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는게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 P79

물론 이러한 일들로 모든 독일인이 우익으로 전향하지는 않았다. 독일민주주의가 이미 실패할 운명이었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민주주의와 전후 질서에 대한 환멸이 퍼지기 시작했다. 1920년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그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은 39%에서 21%로거의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사회민주당에 등을 돌린 유권자들은 대체로독립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으로 옮겨갔고, 자유주의를 내세운 독일민주당에 표를 던졌던 유권자들은 더 우파인 독일인민당과 훨씬 더 우파인국가인민당으로 옮겨갔다.
f독일인에게 전쟁 경험은 히틀러가 빈에서 보낸 시간과 정말 비슷하게작용했다. 계속 오락가락 바뀌던 의미가 나중에 벌어진 일로 인해 규정된다. 1919년에는 혁명과 강화조약의 조건 때문에 전쟁 경험에 더 암울하고분열적인 의미가 생긴다. - P92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오스틴 체임벌린 Austen Chamberlain은 훗날슈트레제만과 브리앙을 "피투성이 폐허에서평화의 신전을 다시 건설하려고 노력했던 위대한 독일인과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묘사했다. 슈트레제만은 자신과 브리앙이 인간적으로 통한다는 점을 알아차렸고,
정치적으로도 똑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도 알았다. 국내의 강경한민족주의자들의 구미에 맞게 화해해야 한다는 과제였다. 슈트레제만은1926년에 한 회의를 한 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브리앙은 우리 대화를 프랑스식 표현으로 묘사했다. ‘우리 영혼이 흰 산 위의 눈처럼 하얗다‘라고 말했다"라고 썼다. 슈트레제만과 브리앙은 와인 네 병을 나눠 마시면서 다섯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슈트레제만은 "우리 둘 다 빙하들을 극복해야 해"라고 덧붙였다. 브리앙에게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로 그의 맞수였던 레몽 푸앵카레Raynond Poincaré가 빙하였다. 브리앙은 주로 레몽 푸앵카레 총리 밑에서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슈트레제만에게는특히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빙하였다.  - P104

슈트레제만 시대가 히틀러에게는 힘든 시기였다. 자신을 정치적 굴욕과 경제적 어려움의 희생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게 히틀러의 가장 큰 재능이었다. 히틀러 스스로 그 일에 분노를 느꼈기 때문에 그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위태로운 시기에 강한 정치인이었다. 시대에 맞춰 자신의 어조를 조절할 수 없었다. 공화국이 1923년의 끔찍했던 상황에서 점차 회복되던 1925년 12월에도 히틀러는 "독일이붕괴하고 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년이 지난 때에 그는 뮌헨 청중에게 "우리는 점점 더 침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26년 4월, 그는 "쇠약해진 산업 분야에서 실업자가1200만 명에 이릅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해 어느 때에도 실업자가200만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로카르노 정신‘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도 - P108

히틀러는 계속 국제 문제로 독일인이 고통을 겪는다고 주장했다. 도스 플랜과 로카르노 조약은 그저 독일의 굴욕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라고, 슈트레제만은 반역자일 뿐이라고 그는말했다. 777비어홀 폭동이 실패하면서 히틀러는 경찰·군대와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손을 잡아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헌법을 지키고 선거에서 이기면서 공화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그는 그때 이미 기성 보수 세력을 속인 후 뒤집어엎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후겐베르크와 손잡고 영 플랜에 맞서는 게 첫 번째 단계로효과적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위해서는 독일이 1929년 가을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빠져야 했다. 다행히도 그렇게 될 조짐이 보였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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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치를 갈아엎을 수 있다면‘
‘권력을 지킬 수만 있다면‘

분노와 오판이 부른
민주주의위기를 되짚으며

국민은 ㅡ 어쩌다 나치를 택했고,
우파 정치인은 ㅡ 왜 히틀러와 손잡았고,
시대는 ㅡ 어떻게 민주주의의 죽음을 맞이했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번지는 오늘날
그 오래된 물음에 새롭게 답하다




베를린의 쌀쌀한 겨울 저녁 9시가 조금 지나자 무슨 일이 벌어질 조짐이보이기 시작한다. 신학생 한스 플뢰터는 운터 덴 린덴의 주립도서관에서저녁 공부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지나가니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플뢰터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순찰하는 경찰관 카를 부베르트에게 알린다. 그렇게 시민의 의무를다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 Volkischer Beobachter, 국민의 감시자》의 식자공 베르너 탈러 역시 부베르트에게 다가간다. 두 사람은 국회의사당에 가까이다가가 1층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다가 내부에서 누군가 손전등을 들고있는 모습을 어렴풋이 본다. 부베르트는 손전등 불빛을 향해 권총을 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 P23

심상치 않은 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검은 코트를 입고 군화같은 부츠를신은 청년이 9시 15분에 브란덴부르크 문경찰서에 나타나 국회의사당에불이 났다고 알린다. 경찰은 시간과 내용을 조심스럽게 기록한다. 다만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깜빡 잊고 그 청년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그가 누구인지는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다. 몇분 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의 둥근 유리 지붕 너머로 타오르는 불길이 뚜렷하게 보인다. 9시 27분, 본회의장이 폭발한다. 소방관과 경찰은 국회의사당 심장부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화재와 맞닥뜨린다. - P23

그보다 2분 전, 경찰은 불타는 본회의장 근처 복도에 숨은 수상한 청년을 체포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청년은 네덜란드 레이던 출신의 24세 석공 마리뉘스 판데르 뤼버Marinus van der Lubbe다. 웃통을 벗은 채 땀을 뻘뻘흘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방화범이라고 선뜻 자백한다. 아무도 그가혼자 방화를 저지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소방대원들은 건물 주위의 소화전뿐 아니라 근처 강에서도 물을 끌어와 불을 끄려고 서두른다. 불타는 건물을 둘러싸고 소방 호스의 물을 뿜는다. 소방 호스를 제대로 사용한 덕에 75분 만에 불을 끈다. 부동불이 아직 번지고 있을 때, 독일 정치지도자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속속 도착한다. 맨 먼저, 나치 당원으로 프로이센주의 내무부 장관인 헤르만 괴링 Hermann Göring이 온다. 몇 분 후 총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돌프 히틀러와 최고의 선전 전문가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 가 검은색 메르세데스 리무진에서 내린다. 세련되고 귀족적인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도 도착한다. 늘 그렇듯 깔끔한 차림으로, 침착한 모습이다. - P24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인 32세의 잘생긴 루돌프 딜스Rudolf Diels는 운터 데린덴의 우아한 카페 크란츨러에서 데이트하다(훗날 딜스는 "가장 경찰답지않은 만남"‘이었다고 표현한다) 소식을 듣는다. 딜스는 가까스로 제시간에 도착해 히틀러가 길게 늘어놓는 열변을 들었다고 한다. sersele히틀러는 누가 불을 질렀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발코니에 서서 불타는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는 히틀러의 얼굴을 타오르는 불빛이 조명처럼 비춘다. 히틀러는 "이제 자비란 없다...… 공산당 임원을 보는 대로 쏴죽이자. 공산당 의원들을 바로 오늘 밤에 교수형으로 처단해야 한다!"라고 분노에 차서 말한다.
괴링은 히틀러의 바람을 담은 공식 보도자료를 곧장 내놓는다. 괴링은 - P24

국회의사당이 얼마나 심하게 피해를 봤는지 설명한 후 그 화재를 "이제까지 독일에서 벌어진 가장 무시무시한 볼셰비키 테러"이자 "피비린내나는 폭동과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공식 보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도 동시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시작한다. 자정도 되기 전 《비너 알게마이네 차이퉁 Wiener Allgemeine Zeitung,
빈 신문>의 베를린 특파원이자 오스트리아인 기자인 빌리 프리샤우어 WilliFrischauer가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보로 보낸다. "히틀러 내각에게서 청부받은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리사우어는 아마도 이 ‘청부업자들‘이 국회의장 관저와 국회의사당을 연결하는 지하도를 통해 국회의사당에 침입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장은 헤르만 괴링이다.  - P25

기자들은 범행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정부는 사람들을 체포한다. 소방관들이 화재와 싸우는 동안에 별개의 두 집단이 진행하는 체포가 이미 시작된다. 명단을 공들여 준비한 베를린 경찰은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 성직자, 변호사, 예술가, 작가 등 나치에 적대적일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하기 시작한다. 경찰은 용의자들을 알렉산더 광장의 경찰 본부로 불러들여 경찰 조서에 이름을 올린다. 모든 과정이 정당하고 공식적이다.
동시에 베를린의 나치 돌격대원들도 자체적으로 체포 작전을 벌인다.
돌격대원들도 명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체포자들을 공식적으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체포자를 버려진 지하실, 창고, 심지어 급수탑에까지 데려가서 갖가지 방법으로 때리고 고문한다. 죽이는 경우도 많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 사람들은 그 장소들을 "야만적인 강제수용소"라고 부른다. - P25

1933년 2월 27일 월요일이다. 그날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밤, 독일 민주주의의 마지막 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국회의사당이 불탄 시기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된 지 정확히 4주가 지난 때였다. 히틀러는 헌법상 합법적으로, 심지어 민주적인 방식으로 총리가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는 1932년 두 차례 선거에서 표를가장 많이 얻고 국회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하면서 독일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1933년 1월 말, 육군원수 출신 대통령으로 신망이 높던85세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가 마지못해, 하지만 적절한방식으로 히틀러에게 총리를 맡아 내각을 구성하라고 요청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방부, 외교부 등 핵심 부처 장관을 자신이 지명하겠다고했다. 1932년에 잠시 총리를 지낸 프란츠 폰파펜이 히틀러 밑에서 부총리를 맡는다는 조건 역시 거래의 일부였다. 독실한 루터교도인 힌덴부르크는 가톨릭 신자인 파펜을 종교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어쨌든파펜의 후견인이었다. - P26

노련한 사람들의 눈에도 1월 30일 취임한 히틀러 총리의 정치적 위상은미약해 보였다. 미약하도록 ‘계획된‘ 자리였다. 히틀러 이전 세 명의 총리가 그랬듯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핵심 측근 몇몇이 히틀러를 총리 자리에 앉혔다. 측근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히틀러의 선동가적인 재능과 추종자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간판 역할을 할 히틀러 같은 인물이 없으면 자신들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는 선거에서 극소수의지지밖에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측근들은 히틀러를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까? 그들은 파펜 부총리와 힌덴부르크 대통령 같이 지도자 교육을 받은 귀족이자 지휘 경험이 풍부한 육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반면 히틀러는 보잘것없는 오스트리아 세관원의 이름 없는 아들이었고,
정식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모국어인 독일어로 말할 때조차 문법을실수했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서부전선에서 4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복무했지만, 일병Gefreiter 이상으로 계급이 올라간 적이 없었다.  - P27

이는 독일 정치계 전체의 관점과 놀랄 만큼 똑같았다. 펜은 히틀러에대해 "우리가 그를 고용"했다며, "몇 달 안에 우리가 그를 궁지로 몰아넣어 삐걱거리게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기록했다. 당시 무소속이던 민족주의자 정치인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Gottfried Treviranus 는 자신이 아는모든 사람이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군대, 헌법에 짓눌려 기진맥진할 것"
이라고 예상했다고 몇 년 후에 기록했다.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Vorwarts, 전진》의 편집장 프리드리히 슈탐퍼Friedrich Stampfer는 외국 특파원에게 "으르렁거리는 이 고릴라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습니까"라고 물으면서 히틀러 내각은 3주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덧붙였다. 막스 퓌르스트Max Furst라는 이름의 젊은 목수이자 가구 제작자(그의 정치 성향은 극좌였다. 또한 그의 룸메이트인 급진 사회주의자 변호사 한스리텐은 2년 전 베를린 법정에서 히틀러를 반대신문해서 유명해졌다)는 "아마 파펜내각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 P28

그러나 히틀러는 총리가 된 첫 몇 주부터 파펜 내각보다 더 큰 우려를안겼다. 폭력 사태가 더 많아졌는데, 새 내각이 경찰력으로 집단 모집한나치 돌격대원들이 벌인 게 적지 않았다. 야당 신문은 문을 닫고, 정치 행사는 폐지되었다. 나치 외 정치집단은 조금이라도 정치 활동을 하는 게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렇다 해도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바꾼 건 국회의사당 화재였다.
히틀러 내각은 화재 다음 날 오전 11시에 모였다. 독일 내무부 장관 프리크는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이라는 비공식명으로 계속 불린, ‘국민과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문서를 내밀었다. 국회의사 - P29

당 화재가 곧 공산주의자 폭동의 시작 징조라는 히틀러의 주장을 그대로담은 법령이었다. 국가를 지키려면 비상대권국가의 위급 상황에서 대통령이 특별한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했다. 이 법령으로 독일 헌법이 보장한시민의 자유는 정지됐다. 정권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된다고 여기면 누구든 재판 없이 합법적으로 가두고,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사실상 없애고, 우편과 전보를 함부로 뜯어보고 아무 때나 무단 수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연방의 어떤 주정부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필요한 조처를 하지 않으면" 독일 정부가 대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각은 법안에 찬성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그날 늦게 서명하면서 법령이 효력을 얻었다  - P30

유명한 법학자 에른스트 프렝켈Ernst Fraenkel의 표현대로 국회의사당화재 법령은 히틀러 제국의 ‘헌장‘이었다. 모든 체포와 강제 추방, 강제수용소,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법령때문에 나치가 독일의 연방제를 폐지하고, 연방의 모든 주를 지배할 수있었다. 국회의사당 화재와 그 법령은 1933년에 독일에서 산 대부분 사람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경험이 풍부한 베를린 기자인 발터 키아울렌Walter Kianulcho 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신이 태어난 베를린에 관해애달픈 마음을 담아 쓴 책에서 "처음에는 국회의사당과 책들이 불타고,
곧이어 유대교 회당이 불탔다. 그다음 독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가 불타기 시작했다..."라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 P30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어떻게 히틀러와 나치가 자라났는지를 생각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게 괴로울 수도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분명 인류 문명에서 한 정점을 보여줬다.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은 최첨단의 현대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비례대표제 선거제, 그리고 남녀평등을 포함해 인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조항을 빈틈없이 갖춘 헌법이었다. 사회·정치운동가들은 훨씬 더 많은 요구를 하면서 투쟁해 상당히많이 얻어냈다. 독일은 동성애자의 권리 운동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벌어지는 곳이었다. 또한 급진 페미니즘 운동의 본고장이었다. 여성들은투표권을 얻은 후 낙태의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 사형제 반대 운동도 아주 성공적으로 펼쳐져서, 실질적으로는 사형제가 폐지되었다. 근로자들은 하루에 8시간만 일하면서 임금을 모두 받는 권리를 공화국 초기에 얻어냈다. 독일의 관용과 개방성에 이끌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계속 이주해 왔다. - P31

당시 독일은 정치와 사회운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도 세계를 이끌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부터 "내게 그림을 그리겠다는 아들이 있으면 파리가 아니라 뮌헨으로 보내 교육할 것"이라고친구에게 말했다. 독일 표현주의와 신사실주의 화가들(에른스트 루트비히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에밀 놀데 Emil Nolde,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오토 딕스 Otto Dix)은 당대에서 가장 흥미롭고 논란거리가 되는 작품을 창작하고 있었다.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공부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음악에 관해서라면 뛰어난 오케스트 - P31

라, 합주단과 독주자들이 독일처럼 많은 나라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파울 힌데미트 Paul Hindemith의 어려운 고전음악 작품이든,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와 쿠르트 바일 KurtWell이 협력해 만든 흥미진진하고 현대적인 음악극이든, 독일인들이 예술의 새 미래를 열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어땠을까? 베를린은 제2의 할리우드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프리츠 랑Frite Lang, 게오르그 빌헬름 파스트G.W. Pabst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F. W. Murnau 같은 감독들은 미국보다 예술 수준이 높은 작품을 내놓았다. 알프레트 되블린 Alfred Döblin,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생애 후반기에 독일에서 살았다)와 토마스만ThomasMann,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형제 같은 작가들을 보면 문학에서도 독일이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32

과학과 학문으로 쌓은 명성은 따라갈 만한 나라가 없었다. 1920년대에는 독일에서 쓴 논문이 세계 물리학 학술지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베를린대학의 교수였고, 그의 친구인 노벨상 수상 화학자 프리츠 하버 Frite Haber 가 베를린 달렘 근교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다. 독일이 화학과 제약 같은 산업에서 세계를 이끌고, 미국 자동차와 양이 아니라 질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이유는 아마도 독일의 과학과 대학의 수준이 탁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독일은 오랫동안 ‘시인과 사상가의 고장‘이라고 자부했는데, 1920년대에는 그 자부심이 더욱 치솟는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토록앞서가고, 창의적이고, 엄청나게 현대적인 민주주의에서 인류 역사상 윤리적으로 가장 사악한 정권이 자라났다. 히틀러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창조성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파괴했다. 그때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 P32

도 아쉬워하는 독일인이 많다. 출판인볼프 옵스트지들러Wolf Jobst Siedler는 2000년에 "우물쭈물한 독일인은 더 이상 유럽을 위협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한다" 14 라고 한탄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아직도 골똘히 생각한다. 드높은 문명에서그런 끔찍한 야만성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뿌리 깊은 믿음과직관이 혼란에 빠지는 것 같다.
인류 역사상 모든 정권 중 히틀러 정권은 최소한 한가지 면에서 유일무이하다. 진지한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히틀러 정권은 결점을 상쇄하는 점이 전혀 없는 재앙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정권은 이제까지 없었다. 스탈린이 다스리던 소련조차 미심쩍기는 하지만, 히틀러 정권과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33

다만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히틀러 정권이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하는점까지만이다. 히틀러 정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역사에 대한 일종의로르샤흐 심리 검사좌우 대칭 얼룩을 보여주고 연상과 반응을 살피는 심리 검사와 같다. 무엇이든 우리가 가장 최악이라고 믿는 정치적 특징을 히틀러 정권에투사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모두가똑같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히틀러 정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할 때도 그런 식의 투사가 영향을 준다.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분석이 서로 정반대일 때도 많다.
1933년 독일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너무민주적이었던 게 문제였을까? 나치즘이 등장한 건 권력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일인이 시민으로 해야 할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나치 당원들은 과거에 빠져 있었는가, 아니면 위험할 정도로 앞서나갔나?  - P33

1933년부터 일찍이 역사학자, 철학자, 법률학자, 심리학자, 정치인, 예술가, 작가, 음악가, 사회비판적 코미디언과 여러 분야 사람들이 히틀러의 등장을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들은 갖가지 대답을 내놓았다. 대부분은 솔깃한 대답이다. 왜 또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갈까? 아직도 할 말이 있을까?
이 질문에 몇 가지 답이 있다.
먼저, 역사 지식은 천천히 퇴적물처럼 쌓인다. 항상 새로운 퇴적층이 덧붙여진다. 20세기 독일 역사는 더 그렇다. 수많은 주요 자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기록보관소, 특히 동독과 소련에 너무 오랫동안 보관되었다.
냉전이 끝나자 볼 수 있는 자료가 많아져 나치 시대에 관해 상당히 많은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새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있다. - P34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냉전이 끝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teal capitalism 가 드디어 승리했다고 마음껏 즐거워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세계화‘와 자극적인 우파 포퓰리즘을 더 걱정한다. 1989~1991년에 활짝 핀 꽃봉오리는 시들었고, 냉전후세계 질서는 더욱더 불안정해졌다. 우리는 세계 곳곳의 난민 문제로괴로워하고 있고, 난민 문제가 정치적 문제를 얼마나 불러올지 잘 안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테러리즘이 세계 곳곳에서 한복판을 차지하는 모습을 봐왔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시대가 여러 면에서 1990년대보다는 1930년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35

1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나치는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나치 지도자와 행동대원들이 전쟁 중 참호에서 싸웠고, 폭력에 너무 익숙해져서 민간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게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실제 전투 경험이 아니었다. 독일인이 전쟁의 시작과 끝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게 되었는지가 정말 중요했다. 1914년 8월과 1918년 11월, 눈부신 여름과 잿빛 늦가을, 열광적인 단결과 쓰라린 분열, 승리를 꿈꾸던 때와 끔찍하게 패배한 현실이전쟁의 시작과 끝이었다. 이 개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구석구석에 퍼졌고, 독일인이 자신들의 정치 생활을 생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모든 질문의 답을 1차 세계대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 P36

이 지점에서는 인물들 개개인이 중요해진다. 1930년 이후 독일의 정지는 점점 더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국회에서 의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해법안을 통과시키고,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게 불가능했다. 민주주의 체제를 가장 심하게 파괴하는 나치와 공산당이 1932년 중반까지 국회에서의석을 제일 많이 차지했다. 나치와 공산당의 정치적 입장은 서로 정반대여서 함께 협력할 수는 없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총리들은 국회를 무시했다. 대통령과 총리들은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한 비상대권을 활용해 긴급명령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소수 지도자가 권력을 비정상적으로 휘두를 수 있었고, 지도자들의 사적인 목표와 개성이 훨씬 더중요하게 작용했다는 뜻이다. 배우였다. 또 자신의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847년에 태어난, 구시대 인물이었다. 프로이센귀족 출신에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이었고, 독실한 개신교도여서가톨릭을 깊이 불신하고, 사회민주당을 혐오했다. 그는 헌법에 근거해 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다. 1925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부터는 독일의 영웅이자 통합자라는 자신의 명망을 유지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을정치적으로 우경화할 방법만 찾았다. - P37

1918년 이후 독일인이 직면한 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의 2백만 명에 가까운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에서 졌고, 폭넓게 지지받지 못한 혁명이 일어났고, 불공평해 보이는 강화조약을 맺었고, 사회와기술이 엄청나게 변화하면서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음모론에 빠져들었다. 그저 군사적으로 패배한 게 아니라 내부의 적에등을 찔려서 패전했다거나,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자본주의자·유대인 프리메이슨 집단에 위협받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당대 다른 독일 정치인과 달리 히틀러는 이러한 현실 도피를 대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현실을 혐오하면서 정치를 경멸하게 되었다. 그보다 뭔가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를 원하게 되었다. 결코 이룰 수 없는 바람이다.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현장(거래, 청탁, 타협이 필요한)을 가까이에서 보면 별로 유쾌하지 않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 P40

각 집단의분명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수많은 정당은 권력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가능하면 타협하고 협상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정부가 금방금방 바뀐다. 14년 동안 21번이나 바뀌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모든 정당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공통점이 있고, 타협할 수 있고,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1930년대까지는 독일 사회가 점점 더 심하게 분열하면서 그러한 정신이 거의 남지 않았다. 공화국을 두둔하면 그저 부패한 체제를 두둔하는사람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통합과 부흥을 부르짖으면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게 보일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인종차별주의 이론가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Chamberlain 이 자신을 "정치인과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평가하자 감격했 - P40

다. 18 나치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체제‘라는 암호로 불렀다. ‘체제‘를 경멸하면 하늘이 내린 지도자가 나라를 막막한 처지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믿기 쉬웠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호소했다. 물론 모두에게호소하지는 않았다. 독일 사회의 분열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히틀러는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많은 독일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1933년 이후 나치가 한 일들은 모두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미리 보여준일들이었다. 예리하게 관찰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있었다.
소설가 프리드리히 프란츠 폰 운루Friedrich Franz von Unruh는 《프랑크푸르터차이퉁 Frankfurter Zeitung》 (프랑크푸르트 뉴스) 신문에 실어서 호평을 받은 연재 글에서 "독재정권이 들어서서 국회를 해산하고, 지적인 자유를 모두파괴하고, 인플레이션, 테러, 내란이 시작될 것" 1"이라고 썼다. "히틀러는 전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20 라고 관찰력이 뛰어난 자유주의 정치인 테오도어 호이스 Theodor Heuss가 덧붙였다. 호이스는나치가 비합리성을 받아들인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운루는 한 가지만틀렸다. 단호하게 반대했던 수백만 명이 히틀러 집권을 환영할 것이라는사실은 몰랐다. 불행하게도 이 때문에 바이마르공화국은 곤경에 처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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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2-10 15: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년 5월에 읽기 시작했다가
접어둔 이 책을 오늘부터 다
시 읽기 시작했네요.

부제인 <민주주의의 죽음>
이 절절하게 다가 오네요.
 


저 엄청난 절대악의 현상은 평범성,
즉 생각하기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하기의 무능에서 비롯된다.

그는 노인이었고 전통적인 유대인의 창 없는 모자를쓰고 있었고, 작고 아주 약해 보였으며, 듬성듬성 난 흰머리와 수염을길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이름은 유명했으며, 사람들은 검찰 측이 왜 그와 더불어 그 그림을 시작하기를원했는지 이해했다. 그는 1938년 11월 7일에 17세의 나이로 파리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 걸어 들어가 3등 서기관인 젊은 참사관 에른스트폰 라트를 총으로 살해한 헤르셀 그린즈의 아버지 진델 그린즈판이었다. 이 암살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학살극, 즉 최종 해결책의 사실상 서곡인 이른바 11월 9일의 유리의 밤을 촉발시켰는데, 이 일이 일어난 것과 아이히만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린즈의 행위의 동기에대해서는 명료하게 밝혀진 적이 없었는데, 검찰이 함께 법정에 세운 그의 형은 이상할 정도로 이 점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은 그린즈판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던 약 1만 7000명의 폴란드계 유대인을1938년 10월의 마지막 며칠 동안 독일 영토에서 추방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고 법정은 당연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일반에게 알려지고 있다. 헤르셀 그린스판은 학교를 끝까지 다닐 - P317

수 없었던 정신병자였고, 수년 동안 파리와 브뤼셀에 있는 학교의 문을두드려보았지만 두 곳 모두에서 쫓겨났다. 그를 재판한 프랑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는 동성애 관계에 대한 혼란스런 이야기를 도입했고, 그를 인도받은 독일인들은 그를 결코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았다는 소문이 있다. 마치 형법을 위반한 유대인은남겨두었다는 ‘아우슈비츠의 역설‘을 입증하는 것처럼.) 폰 라트는 상당히 부적합한 희생자였다. 그는 자신의 반 나치스적 견해와 유대인에대한 동정심 때문에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의 동성애 이야기는 아마도 게슈타포가 조작한 것 같다. 그린즈판은 파리에 있던 게슈타포 요원들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사용된 도구로 행동했을 수 있다. 게슈타포는 일석이조(독일에서 대량학살을 일으킬 구실을 만들고 동시에나치 정권의 반대자를 제거하는 것)를 노렸을 수 있는데, 그들은 이 두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즉 폰 라트를 유대인 소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동성애자라고 중상하면서 동시에 그를 ‘세계 유대인‘의 희생자요 순교자로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 P318

그게 어찌 된 간에 1938년 가을에 폴란드 정부가 독일에 있는 모든폴란드계 유대인 거주자들이 10월 29일부로 국적을 상실할 것이라고포고한 것은 사실이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독일 정부가 이들 유대인을 폴란드로 추방하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한때문이었던 것 같다. 진델 그린즈판과 같은 사람이 그러한 포고가 있었다는 것을 과연 알기라도 했을까 하는 점은 단순한 의심 이상의 것이다. 그는 1911년에 25세의 젊은이로 독일로 가서 하노버에 잡화점을열었고, 거기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덟 자녀를 낳았다. 1938년 파국이다가왔을 때 그는 독일에서 27년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서류를 변경하여 귀화를신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 검찰이 그에게 한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말을 아껴가며 윤색하지 않고 분명히 그리고 확실하게 말했다. - P318

"1938년 10월 27일, 목요일 밤 8시에 경찰이 와서 우리들에게 7번지역 (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신은 바로 되돌아 올 수 있으니 여권 외에는 아무것도 지참하지 말고 오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린스판은 자신의 가족, 아들과 딸과 아내와 함께 갔다. 그가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부는 앉고 일부는 서서 울고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경찰은 ‘사인해, 사인해, 사인해‘ 라고 소리지르고 있었고…… 저는 사인을 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그랬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사인을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내 기억에 게르숀 질베르였던 것 같은데, 그는 구석에서 24시간 동안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연주회장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마을 전체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약 600명가량 되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금요일 밤까지 약 24시간 정도 대기했는데……맞아요. 금요일 밤까지였어요.....그러고는 그들은 우리를 경찰 트럭에 죄수를싣는 화물차에 차량 한 대당 약 20명가량을 태워 기차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 - P319

싣는 화물차에 자랑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기차로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 있는 노이벤센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도착한것은 안식일 아침 6시였습니다. 라이프치히, 쾰른, 뒤셀도르프, 에센비더펠트, 브레멘 등에서 온 기차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 2만 명가량 되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인 10월 29일이었습니다……. 국경에 닿았을 때 우리는 누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누가 10마르크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검색당했습니다. 차액은 뺏겼지요. 이것이독일 법이었습니다. 10마르크 이상은 독일 밖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것이지요. 독일인들은 ‘당신들이 올 때 그 이상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까 그 이상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폴란드 국경으로 1마일을 조금 넘게 걸어가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폴란드 영토로 몰래 들어가기를 독일인은 원했기 때문이었다. "친위대 요원들이 우리에게,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채찍질을 해댔고, 길에 - P319

피를 쏟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짐가방을 빼앗았고, 우리를아주 야만스럽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독일인들의 포악한 야수성을 처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달려! 달려!‘ 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저는 얻어맞고 도랑에 빠졌습니다. 제아들이 저를 도와주며 달려요 아빠, 달려요. 아니면 죽게 되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출입이 자유로운 국경에 도달하자…….… 여자들이 먼저 갔지요. 폴란드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요. 그들은 폴란드 장군과 우리의 서류를 검토할 몇몇 관리들을 불렀어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폴란드 시민이며, 우리가 특별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를 들여보내기로 결정났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약 6000명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데려다 주었는데, 우리는 1만 2000명이었어요. 비는 심하게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졸도할 정도였어요. 도처에서 노인들이 보였어요.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했어요. 음식은 없었고, 목요일 이후로우리는 아무것도 먹질 못했지요…"  - P320

그들은 군사기지로 끌려가 "다른 곳에는 방이 없어 마구간으로 넣어졌다. "내 생각에 그날은 폴란드에서의 둘째 날이었던 것 같아요. 첫째 날에는 빵을 실은 트럭이 포즈난에서 왔었는데 그날은 일요일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나는 프랑스로 편지를 썼지요…… 내 아들에게 ‘독일로는 편지를 더 이상 쓰지마라. 우리는 이제 즈바스진에 있다‘고 말이지요."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아마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을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무자비하고 아무 필요도 없었던 이 파괴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어리석게도 모든 사람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은 그가 법정에서 하루종일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끝없는 심리 속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곧 알게 되었다. 이이야기에는 (적어도 시처럼 변형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아니라면) 오직의로운 사람만이 소유하고 있는 마음의 있는 그대로 직접 드러나는 결백성, 영혼의 순수성을 필요로 했다. 이 이전과 이후 어느 누구도 진델 - P320

그린즈판의 빛나는 정직성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그린즈판의 증언이 극적인 순간‘을 조금이라도 닮은 어떤 것을 만들어 냈다고는 아무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몇 주일 후에 나타났는데, 그 순간은 바로 란다우 판사가 재판 진행을 정상적인형사재판 절차에 따르도록 거의 필사적인 시도를 했을 때 예기치 않게일어났다. 증언대에는 시인이자 저술가인 아바 코너가 있었는데,
그는 증언을 했다기보다는 대중들에게 익숙하게 연설을 하고 또 청중으로부터 방해받는 데 분개한 사람처럼 쉽게 방청석을 향해 연설했다.
그는 주심 재판관으로부터 간결하게 대답하도록 주문을 받았는데, 그는 여기에 대해 분명히 싫은 내색을 나타냈다. 자신의 증인을 옹호하려는 하우스너 씨는 ‘법정이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할 수 없다는말을 들었다. 이것도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처럼 약간 긴장이 조성된 무렵에 증인은 우연히 독일군 야전 하사관(Feltwebel) 안톤 슈미트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 P321

이 이름이 청중들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이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야드 바셈이 수년 전 히브리어판 『회보』에슈미트에 대한 이야기를 썼고 미국에 있는 수많은 이디시어로 된 신문에서 그 기사를 받아셨기 때문이다. 안톤 슈미트는 폴란드에서 부대 대열에서 이탈한 독일 군인들을 모으는 순찰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일을 하던 도중 그는 유대인 지하요원들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저명한 요원인 코브너 씨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위조 서류와 군 트럭을 제공하면서 유대인 유격대원들을 도와주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돈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 일은1941년 10월에서 1942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가 안톤 슈미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검찰 측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 낸 것은 코브너 씨가 아이히만의 이름을 슈미트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다고 말했기때문인데, 슈미트는 코브너 씨에게 ‘모든 것을 조정한 사람은 아이히만이라는 소문을 군대에서 들었다고 했다.)외부로부터, 즉 비유대인 세계로부터 받은 도움이 언급된 것은 이번 - P321

이 결코 처음은 아니었다. 검찰 측이 "당신은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을 증인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빈도로 판사 할레비는 증인들에게 "유대인은 어떤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 대답은 다양하고도 불확정적인 것("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반대했어요"라든가 기독교 가정으로 숨은 유대인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전체 1만 3000명 가운데 대여섯 정도)이었지만, 대체로 상황은 놀랍게도 폴란드가 다른 동부 유럽 국가들보다는 나았다.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인이 없었다는 점을 앞서 말했다.) 현재 폴란드 여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한 유대인은 전쟁 기간 동안 자기 아내가어떻게 자기와 12명의 다른 유대인을 숨겨주었는지 증언했다. 다른 사람은 전쟁 전부터 사귀어 온 한 기독교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수용소에서 이 기독교인 친구에게로 탈출하여 도움을 받았다. 이 기독교인친구는 나중에 유대인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 P322

한 증인은폴란드 지하조직이 많은 유대인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또 수천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폴란드인 가정으로 데려가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그 위험은 엄청나게 컸다. 한 폴란드인 가정은 여섯 살 난 유대인 여자아이를 입양한 이유로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모든 가족이 몰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이야기가 독일인에 대하여 들려진 처음이자 마지막 경우는 슈미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독일인을 포함한 다른 이야기들은 단지 기록으로만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특정한 명령에 사보타주함으로써 한 독일 장교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그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문제가 힘러와 보르만 사이의 서신에 언급될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으로 여겼다.
코브너가 독일 하사관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 말하는 데 걸린 몇분 동안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법정이 조용해졌다. 이것은 마치 청중들이 안톤 슈미트라는 이름의 사나이를 기리기 위해 통상적인 2분간의 묵념을 하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 2분 동안 칠흑 같 - P322

은 알 수 없는 암흑 한가운데 갑작스런 섬광이 비친 것처럼 명백히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어떤 생각(만일 이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이야기될 수 있기만 한다면, 오늘 이 법정이 이스라엘에 있건 독일에 있건 유럽 어느 곳에 있건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에 있건 상관없이, 모든것이 얼마나 완전히 달라질 것인가)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런 이야기가 곤혹스러울 만큼 부족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으며, 이이유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해왔다. 나는 이러한 이유의 요지를, 독일에서 간행된 전쟁에 대한 나름대로 성실하게 쓴 몇몇 비망록들 가운데 한 편에서 나온 표현을 빌려 말해보겠다. 러시아 전선에서 복무한독일 의무관 외과의사인 페터 밤은 『보이지 않는 국기』(UnsichtbareFlagge, 1952)에서 세바스토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말한다. 일반 병사들과 분별하기 위해 그가 ‘그밖의 사람들‘이라고 부른 친위대 이동 학살대에 의해 유대인들은 징집되었다. 이 유대인들의 품위있는 모습에 대해 이 책은 칭송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이전의 일반 우편이 있었던 감옥의 제한된 지역으로 투옥되었는데, 그 인근에는 장교 숙소가 있었고 거기에 페터 밤의 막사가 있었다. 이후 그들은 이동가스차량에 탑승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몇 분이 지나 죽었고, 운전사는즉시 시신을 시외로 운송하여 큰 웅덩이 속으로 하역했다.  - P323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만일그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진다면, 이는 오늘의 독일을 위해서, 단지 독일의 해외에서의 위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혼란스러운내면적 조건을 위해서도 실질적으로 아주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며 모든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이 지 - P324

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 지구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남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 이상의 것이 합리적으로 요구되지도 않는다. - P325

1945년 11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을 때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에 비슬리케니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아이히만의 유죄에 대한확증적인 증언을 했는데, 여기에 따라 아이히만은 사라지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수감자의 도움을 받아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뤼네부르거 하이데로 갔는데, 그곳은 함부르크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황야였다. 거기서 그의 동료 수감자 중 한 형제가 그에게 벌채 노동자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거기서 오토 헤닝거라는 이름으로 4년간 머물렀는데 아마도 거기서 그는 죽도록 지겨웠던 것 같다. 1950년 초 그는 친위대 퇴역군인들의 비밀조직인 오데사(ODESSA)와 연락하는 데 성공하여 그해 5월 오스트리아를 거쳐이탈리아로 넘어갔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한 프란체스코 신부가 그에게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망명자 여권을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주었다. 그는 7월 중순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톨릭 신자, 총각, 무국적자, 나이는 37세(실제 나이보다 일곱 살 어림)인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신분증과 노동허가를 받았다. - P330

그는 여전히 조심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의 아내에게 자신의 친필로 편지를 써서 ‘그녀의 아이들의 삼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는 여러 거친 일 (외판원, 세탁소 일, 토끼 농장의 인부)을 했으나 모두임금이 형편이 없었는데, 1952년 여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다.
(아이히만의 부인은 당시 오스트리아 주민이었지만 스위스 취리히에서독일 여권을 취득했는데, 이름은 본명을 사용했고 아이히만의 ‘이혼녀‘
라고 되어 있었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자마자 아이히만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외곽에 있는 수아레즈에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에서 처음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었는데, 처음에는 기능공으로, 나중에는 공장장으로 일했다. 넷째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그녀와 재혼했는데, 아마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실제 - P330

 그리고 1959년 아이히만의 양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리고 1년이 지나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린츠에서 발간된 신문의 부고에는 후손의 이름으로 아이히만 부인의이름이 실려 있었는데, 이는 이혼과 재혼의 모든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이었다. 1960년 초 아이히만이 체포되기 몇 달 전 그와 그의 아이들은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외곽지역에 원시적인 벽돌집 건축을 완성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곳에 아이히만의 가족은 정착했다. 그들은아주 가난했고 아이히만은 끔직한 삶을 영위했음이 분명했다. 아이들조차도 이러한 삶에 대한 보상이 되질 못했다. 그 아이들은 "교육을 받는 데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재능을 발전시킬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다."
아이히만의 유일한 보상은 자신의 정체를 이미 드러내보인 나치스광역단체 요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데 있었다. 1955년에는 이러한일이 마침내 과거 무장 친위대 요원인 네덜란드의 언론인 빌렘 S. 자센과의 인터뷰로 이어졌는데, 자센은 전쟁기간 동안 자신의 네덜란드 국적을 버리고 독일 여권을 취득한 자로 나중에 벨기에의 궐석재판에서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 P331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수수께끼는 이스라엘 정보부가 아이히만의 은신체를 어떻게 알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서 더 일찍 알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이 실제로 이러한 조사를 수년간 진행해 왔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그렇게 실제로 했는가는 미심쩍어 보인다.
그런데 체포자의 신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남기고 있지 않다.
사적인 ‘복수자들‘이 했다는 이야기는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정보부에의해 발견되었다"고 벤구리온이 1960년 5월 23일 이스라엘 국회에 보고하여 환호를 받은 것과 처음부터 배치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을 그곳에서 데려온 엘알 비행기의 주조종사인 츠비 토하르와 아르헨티나항공사의 관리인 야드 시모니를 지방법원과 항소심에 증인으로 소환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벤구리온의 선언에 대해 언급했다. 검찰총장은 수상이 ‘아이히만이 정보부에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을 인정‘했을 뿐, 그가 정부요원에 의해 납치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반박했다. - P332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 30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일터에서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차하자마자 세 사람이 그를 체포하여 1분도 채 안 걸려, 대기하던 차로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외곽에 이미 세를 얻어 놓은 집으로 데려갔다. 어떤 약물이나 밧줄, 수갑 등도 사용하지 않았고, 아이히만은 이것이 전문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으며, 어떠한 불필요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는다치지 않은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각 독일어로 "나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고 말했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 잡혔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떤 신문에서 자기를 발견하면 체포하라는 벤구리온의 명령을 읽은 적이 있다고 나중에 설명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과 그들의 죄수를 이스라엘로 데려다 줄 엘알 비행기를 기다리는 8일 동안 아이히만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이것이 이 모든 일 가운데 그가 불평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가 체포된 다음날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는 것을 서면으로진술하도록 요구받았다.  - P335

물론 그 진술서는 미리 준비된 것이었고 그가해야 할 것이라고는 그것을 베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문장으로 쓰겠다고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는 다음에 보는 것과 같은데 다만 그 첫 문장은 준비된 진술서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진술인, 나,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제 나의 진정한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에 재판을 더 이상 회피하려는 것이 불필요하게 되었음을 명백히 알게 되어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에 선언한다. 이에 따라 나는권위 있는 법정, 재판정에 서기 위해 이스라엘로 여행할 준비가 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내가 법적 자문을 받을 것을 명백히 이해했으며, [이다음부터는 미리 준비된 진술서를 베낀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 있었던 나의 공적 활동의 마지막 수년간의 사실들에 대해 어떠한 윤색함도없이 기록하여, 미래의 세대들이 그 참된 실상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는 이 선언을 위협을 받거나 어떤 밀약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내 - P335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와 같은 사실이 제게는 말하자면 마치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내면생활의 핵심 속의 한 점이 되었고, 그 주위로 많은 생각들이 결정체처럼 얽혔지요. 이것이 바로.... 수색대가제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도...... 제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도 또한 제가 이 심문이 시작될 때 서면 진술서에서…… 제자신을 공개처형하라고 제안한 이유입니다. 저는 독일의 청년들로부터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제가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은 무엇보다도 지난 전쟁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들이 한 일들에 대해 결백하기 때문이죠." ‘지난 전쟁‘을 그는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는자기 자신을 버리고 독일로 자발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 질문을그가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독일 법정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다룰 때 필요한 ‘객관성‘을 아직도 상실한 채 있다고 대답했다. - P337

1961년 6월 29일, 공판이 시작된 4월 11일에서 10주일이 지나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증거제출을 끝냈고, 세르바티우스 박사가 피고를위해 변론을 개시했다. 8월 14일, 114회의 공판이 있은 다음 모든 심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법정은 4개월 동안 휴정에 들어갔고 12월 11일에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다시 개정했다. 이틀 동안 5차례의 개정을 거듭하면서 세 판사가 244 항목으로 이루어진 판결문을 낭독했다. 검찰이주장한 ‘음모‘ 죄는 기각되었는데, 이 항목으로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들은 비록 몇몇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면소를 시키기는 했지만 15개의 기소 항목 모두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다른 죄목과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범했다. 즉 1)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상함으로써 2)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신체적인 파멸로 이끄는상황으로 몰아감으로써, 3) 그들에게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해를 끼침‘으로써, 4)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유대인 여성들의 출산을 금하고 임신을 방해함으로써 이 민족을 파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유대인에 대해범죄를 저질렀다는 4가지 기소 항목에 따라 유죄판결을 내렸다.  - P339

 그의부서는 제국의 영역으로부터 3만 명의 집시들을 ‘소개‘하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그가 세부사항들을 아주 잘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시들도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제거되기 위해 이송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는 결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12항은 리디체에서 93명의 아이들을 이송한 것과 관계되는데, 리디체는 하이드리히의 암살 후 거주민이 학살당한 체코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아이들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지막 세 항목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적‘이라고 분류된 네 개의조직 가운데 아이히만이 세 조직 (친위대, 보안대, 그리고 게슈타포)의요원인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네 번째 조직인 나치스당 고위간부조직은 언급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아이히만이 당 지도자의 일원이 아니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1940년 이전에 그가 이 조직에 든 멤버십은 경미한 위반을 이유로 제한법규(20년)에 해당되었다. - P341

이러한 범죄들이 희생자의 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개입한 사람들의 숫자의 측면에서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증가한다."
판결문 낭독 다음에는 모든 일들이 관례대로 진행되었다. 검찰 측에서 일어나 한 차례 더 사형언도를 요구하는 긴 연설을 했는데, 죄를 경감시켜줄 상황이 아니라면 사형언도는 자동적이었다. 그리고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간결하게 응답했다. 피고는 ‘국가적행위‘를 수행했으며, 그에게 일어난 일은 미래에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전 세계가 이 문제를 직면할 것이며, 아이히만은
‘희생양‘이었고, 현 정부는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국제법에 어긋나게도 그를 예루살렘 법정으로 내던졌다는 것이었다.  - P342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정의에 대한 그의 희망들은 무산되었다.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법정은 그를믿지 않았다. 법정은 그를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책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제는 책임이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해 달라고 소환할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불만을 제기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살이나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자기들을 떠나거나, 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르바티우스가한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고통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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