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예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 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양측을 오가는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서방에 추파를 던지면서도 모스크바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푸틴이 그를 용인한 것은 여기까지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대규모 무역협정에 서명을 앞두고 조만간 유럽연합 회원 가입으로 이어질지 모를 상황이 되자 푸틴은 나사를 조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일종의 레드 라인 (red line, 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푸틴은 야누코비치를 압박하는 한편으로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자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과의 협상을 깨고 모스크바 쪽과 협정을 맺으려 했다. 결국 이 행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몰고 갔다.
독일과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했다. 특히 독일쪽에서는 전前 세계 복싱 챔피언이었다가 정치가로 변신한 비탈리 클리츠코를 내세웠다. 서방 측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민주 세력을 육성하고 자금을 대면서 지식인 사회와 경제계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수도 키예프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번져갔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동부에서는 대통령을 지지하는친정부 성향의 주민들이 몰려나왔다. 지난날 옛폴란드 영토였던 서부 리비프 같은 도시에서는 친러시아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2014년 2월 중순에 이르자 리비프를 비롯한 여타의 도회 지역들에더 이상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키예프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들이 발생하자 2월 22일,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급히 피신했다. 이어 친서방파와 파시스트파가 주축을 이루는 반러시아 파벌들이 우크라이나 정권을 장악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푸틴 대통령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일단 러시아어를 쓰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크림 반도를 합병하는 수밖에 없었다. 2014년 4월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었던 크림 반도는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정하는 주민투표에서 90퍼센트 이상이 찬성을 함에 따라 러시아에의 합병을 결정했다. 또한 러시아에게는 무엇보다 크림 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항을 손에 넣는 것이 절실했다.
P137~139










미국은 유럽에 공을 들인다. 또한 나토에 공을 들이면서도 때로 미국의 국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행동에 옮길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게 러시아는 대체로 유럽의 문제 가운데 하나다. 물론 그렇다고 감시의 끈을 늦추진 않겠지만. - P76

이제 남은 것은 중국이다. 떠오르는 중국 말이다.
분석가들이 지난 10년에 대해 쓴 것을 보면 대다수가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며 세계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1장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본 이유로 인해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적어도1세기는 걸릴 거라고 본다.
경제로만 보면 중국은 미국에 견줄 만큼 성장했지만, 그리고 그 덕분에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과 주빈석의 한 자리를 사들일 수 있었지만, 군사력과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미국에 수십 년은 뒤처져 있다.
그 수십 년을 미국은 자국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데 쓸 것이다. 물론 그 간격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듯하지만 - P76

한 예를 들어보겠다. 워싱턴 정부는 적대국인 시리아에서 벌어지는인권 유린 상황에 분개하면서 자국의 입장을 크게 떠들어대는데 반해 정작 바레인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잠잠하다. 바레인 정부의 허락하에 이곳에 정박 중인 미국 제5함대가 이를 덮어버린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원조는 미얀마 정부에게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사는 것인데 여기에는 곧 중국 정부의 접근을 거절하기를바라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 이 사례는 미국이 애매한 위치에 있는 특수한 경우인데 그 이유는 미얀마 정부가 최근에야 바깥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데다 베이징 정부가 일찌감치 이곳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 P77

하지만 일본, 태국, 베트남,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타 국가들의 경우 미국은 일찌감치 문을 열고 있다. 이나라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이웃에 불안해하며 워싱턴과 관계 맺기를열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나라들 또한 제각기 이런저런 문제로 엮여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중국의 패권 아래차례로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통된 인식이 있는 한 그 문제들은 크게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 P77

 어떤 한 지역을 향한 회귀가 반드시 다른 지역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어느 쪽 발에 얼마만큼 더 힘을 실어주느냐의 문제다.
미국 정부의 대외전략 전문가들 중 다수는 21세기 역사는 아시아와태평양이 주도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이 지역에 거주한다. 특히 인도까지 포함하면 2050년경에는 이지역이 세계 경제 생산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 P78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에 개입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국이 점점더 많은 시간과 돈을 이 지역에 투자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한 예로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 해병대 기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적대행위가 발생했을 때 그들을 구하러 미군이 온다는 점을 우방국들이 확신하도록 제한적인 군사 행동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중국이 일본의 구축함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고 치자. 이는 향후 더 큰 군사 행동으로발전할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 해군도 중국 해군을 향해경고 사격을 하거나 혹은 직접 조준사격을 가하는 것으로 만일의 경우 전쟁까지 감수하겠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한국을 향해 발포를 하면 한국이 맞대응을 하지만 현재 미국은 그러지않는다. 대신 미국은 군대의 경계 태세를 높이는 것 같은 공식적인 방식으로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북한을 향해경고 사격을 가한 다음 직접 발사를 할 것이다. 이는 선전포고 없이도전쟁으로 확대되는 과정이다.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P78

흔히 분석가들은 주눅이 들거나 체면이 손상당하는 것을 기피하는 일부 문화권의 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비단 아랍이나 동아시아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물론 이 두 문화권에서 그 점이 유독 선명하게 부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정책 전략가들은 다른 강대국 못지않게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영어에도 이런 사고를 깊이 담고 있는 두 격언이 있다. "1인치를 주면 1마일을 얻을 것이다."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0년에 한 말로 오늘날 주요 정치 어록에 들어간 "말은 부드럽게 하되 힘을 과시하라!"이다.
금세기에 치명적인 게임은 향후 중국과 미국, 그리고 그 지역 다른국가들이 체면을 잃지 않고 서로 분노와 원망의 우물을 깊이 파는 법없이 위기를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 P79

21세기에 태평양에서는 강대국들 간에 이뤄야 할 타협들이 점점더 많아지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들에게 분쟁 지역 내로 들어오기 전에 통지할 것을 요구하며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중국과 일부러 통지하지 않고 비행을 강행하는 미국 간의 타협 여부가 초기 사례로 부각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방공식별구역을 지정하고 쟁점화하면서 얻은 게 있다. 또 미국은이를 준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얻은 것이 있다. 결국은 기나긴 게임이 될 것이다. - P80

중국은 자국의 상품들이 전 세계로 전달되는 항로 대부분의 경비를 미국이 담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영향력이 중국에 지나치게 근접하지 않는 선에서의 얘기다.
물론 논쟁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때로 민족주의를 국민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측은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다만 서로의 입장을 잘못 해석하거나 지나친 도박을 걸 경우 사태는 위험해진다.
이 경우에도 발화점은 있다. 미국과 대만이 맺은 조약에 따르면, 중국이 자국의 23번째 성으로 주장하는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은 개입하게 되어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을 촉발할 임계점은 미국이 대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경우나 대만의 독립선언이다. 그러나 아직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이 지역의 수평선에서 중국군이 쳐들어오는 장면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 P81

미국 제5함대는 바레인에 있는 기지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것도 콘크리트 블록의 한 조각이어서 미국은 섣불리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카타르의 원유가 미국의 불빛을 밝히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데 더 이상필요하지 않게 됐을 때 미국 국민과 의회는 물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바레인에 기지가 필요한가?" 만약 대답이 단지 "이란을 견제하기위해서"라고만 하면 이는 논쟁을 불식시키기엔 역부족이다. 특히 이란의 핵 보유 문제를 두고 테헤란 정부와 협상하려는 오바마 대통령을 두고 보면 더 그렇다. - P82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정책은 파나마운하의 개방을 연장하고, 파나마 운하의 대안으로 떠오른 니카라과 운하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브라질이 세력을 키워 카리브 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를 대비해 지속적으로 주시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놓고 중국과 경쟁하겠지만 쿠바에서만큼은 카스트로 사후 내지 공산당 이후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려고 갖은 공을 들이고 있다. 쿠바와 플로리다의 근접성,
(비록 혼합된 것이지만) 역사적 관계, 그리고 중국의 실용주의로 볼 때 미국이 새로운 쿠바에서 반드시 지배 세력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프리카에서도 미국은 천연자원을 찾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중국이 선점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주의자들과의 싸움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도 지상에서9천 미터 이상을 넘지 않는 선에서 지나친 개입은 피하려고 한다. - P83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미국은 약소국들과 부족들의 정신력과 지구력을 과소평가한 감이 있다. 물리적 보안과 통합이라는 자국의 역사 때문인지 미국은 자신들의 민주적이고합리적인 논쟁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수니파와 시아파, 쿠르드족, 아랍, 또는 무슬림이 됐든 기독교도가 됐든, 타협과 각고의 노력, 심지어 투표를 통해 인간 본연의 뿌리 깊은 타인에 대한 역사적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은 사람들이 하나로 통합되고싶어 한다고 전제한다. 사실 많은 이들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경험적으로 떨어져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데도 말이다. 이는 인류의슬픈 현실이지만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역사에서 자주 드러났던불행한 진실이기도 하다. 미국의 행동들은 당장은 진실을 밑바닥에감춘 채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젖힌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이 현실이 일부 교만한 유럽 외교관들이 믿고 싶은 대로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을 나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할 수 있다."와 "고칠 수 있다."는 입장을 더욱 견지하는데 이생각이 늘 맞아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P84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이 나라는 이제 에너지 자급자족마저 - P84

이룰 참이다. 여전히 탁월한 경제 대국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나토국가들의 방위비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국방력 증강과 발전에 투입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인구는 유럽이나 일본처럼 고령화하지 않았다. 201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25퍼센트가이민을 갈 경우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 미국을 꼽았다. 같은 해, 상하이 대학은 전문가들이 뽑은 세계 최고의 대학 20개를 발표했는데 그가운데 17개 대학이 미국에 있다. 
프로이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세기도 훨씬 전에 이중의 의미가 담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은 바보들과 주정뱅이들, 그리고 미국에게 특별한 섭리를 베푸신다."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 P85

근대 세계는 좋든 나쁘든 유럽으로부터 나왔다. 이 광대한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전초 기지는 계몽주의를 탄생시켰고 이는 산업혁명의모태가 되어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는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고마워하거나 혹은 비난할 수 있다. 유럽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말이다.
걸프 만이 키워준 <기후의 축복>을 받은 이 지역은 대규모 경작에적합한 강수량과 생육에 좋은 토양을 지녔다. 이 같은 조건은 이 지역 인구가 느는 데 일조했다. 한여름은 물론이고 사시사철 일할 수 있으니 인구가 느는 건 당연하다. 겨울 또한 실질적으로 덤을 제공했다.
기온은 실내에서 일할 수 있을 만큼 온화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골칫거리 오염원인 세균들이 살 수 없을 만큼 춥기 때문이다. - P90

서유럽에는 진정한 의미의 사막이 없다. 빙하는 일부 북쪽 지역에한정돼 있는데다 지진이나 화산, 대규모 홍수 또한 드물다. 하천들은길고 평탄해서 선박을 띄워 교역하기가 좋았다. 여러 바다나 대양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들은 서쪽, 북쪽, 남쪽의 연안지대로 흘러가면서 천연 항구를 여럿 만들었다.
알프스의 눈사태로 고립되었다거나 홍수로 넘친 다뉴브 강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접하다 보면 실상 유럽의 <지리적 축복>도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지구상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볼 때 유럽이 상대적으로 축복받은 곳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최초로 산업화된 민족 국가들이 세워지고 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을 수행케 한 요인들이 되었다. - P91

그렇다면 왜 이 지역에 유독 많은 민족 국가들이 존재하는가? 유럽전체를 놓고 볼 때 눈에 띄게 많은 산맥과 강, 계곡들을 보면 이내 납득이 간다. 미국은 하나의 지배 언어와 문화 덕분에 발전이 빠를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에 적극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한 덕분에 거대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반면 유럽은 기본적으로 천 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성장해온데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리적, 언어적으로 분리돼 있다. - P91

일례로 이베리아 반도의 다양한 민족들은 피레네 산맥 때문에 프랑 - P91

스 쪽으로의 진입을 방해받았고 따라서 수천 년의 세월을 두고 차츰안으로 모여들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형성했다. 그런데 오늘날카탈루냐 지역의 독립 요구가 점점 높아가는 스페인조차 완전한 통일 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또 프랑스도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 라인강, 대서양 같은 천연 방벽으로 인해 형성된 나라다.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 강을 제외하면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왜 유럽에 상대적으로 소규모 국가들이 많은지 이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다수 강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떤 면에선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저마다 권리에 따라 경제적 영향권을 형성했다. 이런 양상은 각 하천 유역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여기서 성장한 일부 도시가 수도들이 되었다. - P92

그 길이가 2,858킬로미터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다뉴브 강은 이를 적절히 보여주는 사례다. 다뉴브 강은 독일의 블랙 포리스트(BlackForest, 독일 남서부 삼림지대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흘러 흑해로 간다.
이 여정을 거치는 동안 무려 18개 나라에 영향을 주는 다뉴브 연안은그 자체로 천연 국경을 형성한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그리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국경선이 그것들이다. 2천 년도 훨씬 전에 다뉴브 유역은 로마 제국국경의 일부였다가 이후 중세에 들어와서 주요 교역로로 정착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수도들인 비엔나,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부다페스트 그리고 베오그라드(세르비아의 수도)가 다뉴브유역에 탄생했다. 한편 이 경로는 서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제국인 오스 - P92

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천연 국경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각 민족들이 부상하더니 마침내민족 국가들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다뉴브 지역의 지리, 특히 최남단의 지리를 보면 북유럽평원의 큰 나라들에 비해 왜 유독 이지역에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들이 많은지 수긍이 간다. - P93

서유럽 국가들은 일부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훨씬 부유하다. 북쪽이남쪽보다 일찍 산업화를 이룬 덕분에 경제적인 성공도 그만큼 크게이루었다. 서유럽 국가들 상당수가 유럽의 심장부를 이루는데 이 덕분에 교역 라인을 지속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이는 곧 한 부자 이웃이또 다른 이웃과 교역을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와 달리 스페인은교역을 하려면 피레네 산맥을 넘거나 아니면 포르투갈과 북아프리카같은 제한된 시장을 바라봐야만 했다 - P94

북쪽 국가들의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그 나라들을 보다 높은수준의 번영으로 끌어올린 반면, 남쪽에는 그곳의 지배적인 가톨릭정서가 그 지역을 퇴보시켰다는 이론은 이견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나 또한 바이에른 지방의 뮌헨을 방문할 때마다 이 이론을 새삼 떠올린다. 차를 몰고 가다 BMW, 알리안츠생명, 지멘스 본사의 휘황찬란한 사옥들을 지나치다 보면 어찌 그 이론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독일 인구의 34퍼센트가 가톨릭 신자이고, 특히 바이에른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지역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편향성이 남유럽 지역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인들이 일을 더하고 세금을 더 내야한다는 주장에 딱히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P94

북유럽평원 지역에 속한 나라들 가운데 지리적 이점을 가장 많이누리는 나라는 뭐니 뭐니 해도 프랑스일 것이다. 유럽에서 북쪽과 남쪽을 전부 아우르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국은 프랑스 말고는 없다.
프랑스에서 서유럽에 면한 지역에는 광대하고 비옥한 대지가 펼쳐져있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강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 서쪽으로 쭉 흘러가다 대서양에 이르는 강이 있는가 하면(센강), 남쪽을 흐르는 론 강은 지중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지리적 특징은 상대적으로 평탄한 지형과 어우러져 특히 나폴레옹 시대부터 지역 통합을 이루고 권력을중앙으로 모으는 데 적합했다. - P95

물론 현재의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고 믿을 만한 이유들이없지는 않다. 그러나 갈등의 잠재적 거품들이 수면 아래서 보글보글피어오르고 있다. 게다가 유럽인들과 러시아인들 간의 긴장은 언제갈등을 유발할지 모른다. 그 적절한 예가 역사와 지리적 형태 바꾸기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폴란드의 대외정책이다. 현재 폴란드는 평화를 구가하고 있고 이제는 3천8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한, 유럽연합 내에서도 대체로 큰 국가로 자리 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리적으로도 폴란드는 대형 국가군에 속하며 철의 장막 뒤에서모습을 드러낸 뒤로 경제 규모 또한 두 배나 늘었다. 그런데도 미래의안위를 도모하는 데에 여전히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북유럽평원의 통로는 북으로는 폴란드의 발트해 연안과 남으로는카르파티아 산맥의 초입 사이, 즉 가장 좁은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군의 편에서 보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지점은 없다.
또 공격자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로 진격하기 전에 병력을 바짝 집결할 수 있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 P100

독일과 러시아의 지리적위치에 결부된 폴란드인들의 경험으로 인해 바르샤바 정부가 이들 나라와 자연스레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없는건 당연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독일을 유럽연합과 나토의 틀 안에 묶어두기를 원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목격한 폴란드인들은 코앞에 있는 러시아에 대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공포를 떠올렸다. 수세기동안 폴란드는 밀물과 썰물처럼 러시아가 제 땅에 드나드는 것을 보아왔다. 소비에트 제국 말미에 마지막 썰물이 빠져나간뒤이 나라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과의 균형추로서 영국과 폴란드와의 관계는1939년의 뼈아픈 배신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회복되었다. 당시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로부터 침공을 당할 시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막상 공격이 시작되자 독일의 전격전(기습 공격)에 대한 응답은 교착전, 소위 앉은뱅이 전쟁이었다. 영국과프랑스 양동맹국은 독일이 폴란드를 삼키는 동안 팔짱을 낀 채 마지노선 뒤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쓰라린 기억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확고한 편이다. 물론 1989년 새로이 해방된 폴란드가찾아 나선 주요 동맹국은 미국이지만. - P101

이 긴장감은 저 위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뻗어 올라간다.
덴마크는 이미 나토에 가입했고, 최근 스웨덴에서는 근 2세기 동안이어온 중립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을 촉발한 계기는 2013년 한밤중에 러시아 제트기들이 스웨덴에 모의 폭탄을 투하한 사건이었다. 당시 스웨덴 방공망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제트기들의 출현을 감지하는 데 실패했다. 정작 러시아 전투기들의 궤적을 감시하고 영공을 지킨 측은 덴마크였다. 하지만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서는 나토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이 여전히 우세하다. 이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모스크바는 스웨덴이든 핀란드든 어느 쪽이든 나토에 가입할 경우 응분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 P103

앞서 봤듯이 프랑스는 유럽의 기후와 교역로 그리고 천연 국경선의수혜를 가장 많이 누리는 최적의 위치를 점한 나라다. 하지만 프랑스는 현재 독일 땅이 된 북유럽평원의 평야지대로 인해 지리적으로 완전히 보호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독일이 단일 국가가 아닐 때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러시아에서도 꽤 멀고,
몽골 유목민들과도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영국과는 해협이가로막고 있다. 이는 곧 전면적인 공격 시도나 프랑스 전 국토에 대한점령 시도는 격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모스크바 턱밑까지 치고 들어가 세력을 과시할 수 있었을 정도로 유럽대륙에서는 막강한 나라였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고 말았다. - P104

독일이 처한 지리적 위치라는 딜레마와 호전성은 흔히 독일 문제로알려진 상황을 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 이후 실제로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을 뒤로하고 유럽이 이에 대한 해답으로 삼은 것은 유럽 땅에서 유일한 압도적인 세력, 즉 나토 설립을 주도하고 향후 유럽연합의 태동을 가능케 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거였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러나 미군에 의해 보장받은 안전으로 유럽인들은 경이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바로 서로를 믿으라는 요구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 P106

유럽연합의 설립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하도록 서로를 꼭 끌어안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생각은 멋지게 들어맞았고 이윽고 세계 최대의 경제권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리적 공간이 태어났다.
무엇보다 이 국면은 1945년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 한때 그토록 두려워했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게 된 독일에게 보탬이 되었다.
독일은 유럽 최고의 제조업 국가 자리에 올랐다. 독일은 평원 너머로 군대를 보내는 대신, 일류를 상징하는 <메이드 인 저머니 Made inGermany〉 상표를 붙인 상품들을 보낸다.  - P106

독일은 선량한 유럽 국가로 남아 있기로 했다. 독일인들은 유럽이분열되면 자신들에 대한 해묵은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들 것이라는 걸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특히나 현재로선 8천만 명의 인구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인구로 보나 경제 규모로 보나 가장 큰 유럽 국가이니 더욱 그렇다. 실패한 유럽연합은 독일 경제에도 좋을 것이 없다.
세계 3위의 수출 대국인 독일로서는 가장 가까운 시장이 보호주의로인해 분해되는 것이 반갑지 않다. 2015년 여름에 그리스를 두고 벌어진 골치 아픈 논쟁 이후 유로존 국가들이 진정한 재정 연합을 이루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독일이 이끌어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이제껏 유럽에서 볼 수 없었던 회원국들 간의 예산 공유 같은주권들을 일정 수준 단일 체제 안에 모으는 형태가 요구될 것이다. 만약 이 작업이 진행된다면 여전히 독일이 통솔하는 연방화한 유럽 국가들과 나머지 국가들로 구성된 이른바 <서로 상반된 경제 양상이 동 - P108

거하는 유럽>의 윤곽이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그 역사가 채 150년이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민족 국가는 유럽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강대국이 되었다. 특히 경제 부문에서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독일은 나긋나긋한 목소리 한편으로 유로화라는무기를 내세우며 으름장을 놓는다. 전 유럽대륙은 독일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독일은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대외정책에서만은 얌전하기 그지없다. 가끔은 아예 실력 행사 자체를 혐오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는 여전히 독일에 드리워져 있다. 미국과서유럽은 소련의 위협 때문에 결국은 독일의 재무장을 용인해 주려했다. 하지만 독일은 거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무장을 했으며 그나마 갖고 있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조차 꺼린다. 독일은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약한 역할만을 담당했으며 리비아 사태 때는 아예 뒤로 물러앉아 있었다. - P109

대서양을 마주보는 대륙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술수들을 지켜보는영국은 때론 유럽 대륙에 발을 들이밀기도 하고 때론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택하면서 향후 유럽에서 자기들보다 더 강한세력이 부상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하기야 아쟁쿠르 전투와 워털루 전투 또는 발라클라바 전투의 주인공이 영국이었던 만큼 유럽 외교가에서도 이를 부인키는 어려울 것이다.
영국은 할 수만 있다면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독일 동맹 사이에끼어들려고 한다. 만약 이 시도가 실패하면 영국이 동의하지 않는 사안에 반대하고 나설 만한 보다 작은 나라들과의 동맹을 모색한다. - P110

현재도 영국인에게는 <위대함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기억에 따르면 세계가 그렇게 되길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영국은 그것을 해야 할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여전히 많은 영국인들에게 설득력을 지닌다. 영국은 유럽 가운데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유럽 바깥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해결해야 할 숙제다.
영국을 유럽연합의 바깥쪽으로 자꾸 내모는 두 가지 쟁점은 서로연결돼 있다. 그것은 바로 <주권>과 <이민자 문제다. 일부 유럽 통합회의론자들의 지지를 받는 반유럽연합 정서는 유럽연합이 정하는엄청난 분량의 법률과 그 내용에 반발한다. 하지만 회원국들간의 합의의 일부이므로 영국도 이를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 P112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몰려오는 경제적 이민과 난민의 물결 속에서영국에 오기를 희망하는 이민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반유럽연합 정서 또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영국인들은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이 더 많은 이민자들을 영국으로 보내려 한다고 믿고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은 최근 유럽이 겪고 있는 경기 침체로 인해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 영향은 대륙 전체에 걸쳐 우파 정당의 약진등 범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연합이라는 구조도 약화시킨다.
유럽의 전통적인 백인 인구는 점점 고령화되어 가는 추세다. 현재인구 추계가 다수의 노인 인구가 상부를 차지하고 이들을 돌보거나세금을 내는 젊은이들은 적은 역삼각형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빠르게 변해가는 세계를 보는 영국 토박이 주민들의 반이민 정서 기세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P113

유럽인들은 이제 방위 비용을 진지하게 다시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쓸 돈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라 그들은 어려운 결정에 직면해 있다. 이 결정을 놓고 토론을 벌이던 그들은 묵혀두었던 지도를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외교관들과 군사 전략가들은 샤를마뉴, 나폴레옹, 히틀러, 소련의 위협은 사라졌을망정 북유럽평원과 카르파티아 산맥 그리고 북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역사학자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 VS. 유럽 Of Paradise and Power』에서,
서유럽인들은 낙원에서 살고 있지만 일단 그들이 권력의 세계로 이동하고 나면 더 이상 그 낙원의 법칙에 따라 운영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로존 위기가 진정되면서 우리는 낙원을 둘러보게 된다.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불과수십 년 만에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는지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지리는 인류가 〈지리의 법칙>을 극복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그 법칙들이 우리를 이길 거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속하는 영토로서 지역적으로 연속하는 영토를 여전히 두고 있다. - P116

1998년에 헬무트 콜이 독일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했던 경고도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마지막 세대의 총리로서 그는 전쟁이 초래한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012년콜은 독일의 최대 일간지인 <빌트Bild>에 기고한 글에서, 재정 위기를겪는 현재의 유럽 지도자들 세대가 전후 유럽인에게 맡겨진 <서로간의 신뢰>라는 실험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여전히 낮은 건 사실이라고썼다.
"특히 전쟁 시절을 겪어보지 않고 현재의 위기를 맞은 이들은 유럽의 통합이 무슨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유럽은지난 65년 이상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누려왔다. 비록 우리 앞에는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와 난관이 있지만 해답은 그것밖에 없다. 평화 말이다." - P117

러시아는 넓다. 가장 넓다. 아니 넓다 못해 광활하다. 면적이 무려 1천7백9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며, 표준시간대 time zone 또한 무려 11개나 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나라다. 이 나라의 숲과 호수, 얼어붙은 툰드라, 스텝, 타이가, 산맥 또한 마찬가지로 넓다. 이 어마어마한규모는 오래도록 우리의 집단의식에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가도 러시아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러시안 베어 Russian Bear가산다.
그러고 보면 이 광활한 나라의 상징이 곰이라는 것은 순전한 우연이 아니다. 이 땅에 웅크리고 앉은 곰은 겨울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그러나 험악하게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곰이라는 러시아 단어가 있지만 정작 러시아 사람들은 이 짐승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꺼린다. 그 이름에 내포된 어두운 부분을 두려워해서다.  - P122

이 곰의 속내를 알아내고픈 작가들이 흔히 인용하는 유명한 말이있다. 1939년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를 관찰하고 나서 이런말을 했다. "러시아라는 <수수께끼>는 <미스터리>라는 포장지로 여러겹 싸매져서 <불가사의 > 안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제대로 완성되려면 몇 마디 더 덧붙여져야 한다. "하지만 열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의 국익이다." 이 말을 한 지 7년 뒤에 처칠은 이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로 본인의 답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확신하건대, 강인함만큼 러시아인들이 경외하는 것은 없으며 나약함보다 경시하는 것은 없다. 특히 군사력에서 말이다."
처칠의 말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라는 망토를 두르고 있으면서 안으로는 국익 추구라는 권위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현 러시아 정권에도 여전히 해당된다. - P123

러시아 입장에서 이는 <양날의 칼>이다. 폴란드는 러시아가 군대를이동시켜야 할 때는 상대적으로 좁은 통로지만, 반대로 적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시킨다. 그런데 V자가 넓어지기 시작하는지점부터 러시아 국경까지 거리는 장장 3천2백 킬로미터가 넘는다.
게다가 모스크바와 그 너머는 평지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대군이라해도 전선 전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어찌 보면 이 전략적 깊이 덕분에 이 방향으로부터정복당해본 적이 없다. 만에 하나 모스크바로 접근해 온다 해도 적군은 이미 길어질 대로 길어진 보급로를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1812년에 나폴레옹이 그랬고 1941년에는 히틀러가 이 실수를 되풀이했다. - P124

연방 붕괴 이후 러시아는 나토에 가입하지 않기로 약속한 나라들과협력을 다지는 한편으로 나토의 접근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1999년의 체코공화국에 이어 헝가리와 폴란드, 2004년에는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가 그리고 2009년에는 알바니아까지 나토에 가입한다. 이에 대해 나토는나토대로 나토에 가입하지 않기로 했다는 약속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느 강대국들처럼 러시아도 향후 100년 안에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1세기 전만 해도 미국의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겨우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폴란드와 발트 해 국가들에 버젓이 주둔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또한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가 있은 지 고작 15년이 지난 2004년 무렵에 러시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이 나토나 유럽연합에 가입하리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 P126

러시아는 무역을 장려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면서 유럽의 맹주들 가운데 하나로 세력을 키워갔다. 이제 보다 안전해지고 강력해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 발트해 국가들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육로는 물론이고 발트해 방면의 침략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러시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를 에워싸는 거대한고리가 형성되었다. 이 고리는 북극에서 시작한다. 이어 발트 해 지역으로 내려와서 우크라이나를 지나고 카르파티아 산맥, 흑해, 캅카스산맥과 카스피해, 우랄 산맥을 두루 돌아 다시 북극권 한계선까지 뻗어 올라간다.
20세기에 공산주의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을 결성했다. "만국의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 뒤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제국 그 자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뒤에도 러시아는 태평양부터 베를린까지, 북극에서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이르기까지 확장을꾀했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미국에 대적할 만한 명실상부한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 P129

20세기 후반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돈을 쏟아 부었기만 했지인민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 복마전 경제와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의 패배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러시아 제국의 유럽 경계선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서 종결됐고 공산주의 이전과 비슷해진 형태로위축되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반反공산주의 무슬림 게릴라들을 소탕하려는 당시 아프간 공산정권의 지지하에 이뤄졌지만 정작 아프간 국민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희열을 알게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그랬듯이 이는 만일의 사태를 막기위해 그 지역의 통제를 공고히 하려는 모스크바 정권의 의도일 뿐이었다. - P133

대양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부동항의 부재>는 늘 러시아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북유럽평원만큼이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러시아는 지리적 약점을 지녔지만 그나마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에 더 약한 나라로의 추락만은 모면했다.
일찍이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남긴이유도 납득이 간다.
"할 수 있다면 콘스탄티노플과 인도로 가까이 접근하라. 누가 되든 그곳을 통치하는 자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꾸준히 싸움을 도발하라. 터키뿐 아니라 페르시아에서도! 할 수있는 한 페르시아 만 멀리 침투할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인도의 안까지도 깊숙이 들어가라." - P134

붕괴된 소비에트 연방은 15개 국가들로 나뉘어졌다. 소비에트 이념이 지리에게 복수의 일격을 당한 뒤 보다 논리적인 지도가 등장했다.
이 지도는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분리되는지, 어떻게 저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켰는지를 산과 강과 호수와 바다를 통해 알려준다. 그런데 이 지리적 법칙에도 예외가 있으니 바로 타지키스탄처럼 이른바 이름이 <스탄>으로 끝나는 국가 집단이다. 이들의국경선은 스탈린에 의해 치밀하게 그어졌다. 이를 통해 스탈린은 거대한 소수 민족 집단을 다른 지역으로 유입시킴으로써 각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 P135

혹시 우리가 외교관이나 군사 전략가들처럼 긴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었던 국가들, 그리고 바르샤바조약의군사동맹 이전의 일부 국가들에게 기대를 걸어볼 만한 게 여전히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들 국가들은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립 성향, 친서방 그룹, 그리고 친러시아 진영이다.
먼저 중립 성향의 국가들로는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꼽을 수 있다. 이 나라들에는 러시아나 서방과 손을 잡을 명분이 별로 없다.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안보나 무역을위해 굳이 어느 편의 신세를 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친러시아 진영에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벨로루시, 그리고 아르메니아를 넣을 수 있다.  - P135

다음은 친서방 성향의 국가들로, 지난 시절 바르샤바조약 체제의 일원이었다가 현재는 나토나 유럽연합에 가입한 나라들이다.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체코공화국, 불가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 가운데 많은 나라들이 소비에트 압제 시절 큰 고통을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나라들 외에 조지아, 우크라이나, 몰도바를 더할 수 있는데 이들은 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을 원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와의 지리적 인접성도 그렇거니와 러시아 군대나 친러시아 군대가 그들 나라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만 나토에 가입하더라도 즉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노선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던 2013년 무렵, 모스크바가 이 문제에 유독 심하게 몰입했던 것도 이 같은 현실을 설명해 준다. - P136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예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 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 P137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양측을 오가는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서방에 추파를 던지면서도 모스크바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푸틴이 그를 용인한 것은 여기까지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대규모 무역협정에 서명을 앞두고조만간 유럽연합 회원 가입으로 이어질지 모를 상황이 되자 푸틴은나사를 조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 P137

일종의 레드 라인 (red line, 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푸틴은 야누코비치를 압박하는 한편으로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자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과의 협상을 깨고 모스크바 쪽과 협정을 맺으려 했다. 결국 이 행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몰고 갔다.
독일과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했다. 특히 독일쪽에서는 전前 세계 복싱 챔피언이었다가 정치가로 변신한 비탈리 클리츠코를 내세웠다. 서방 측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민주 세력을 육성하고 자금을 대면서 지식인 사회와 경제계를 자기들 편으로끌어들이려 했다. - P1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삶의 모든 것은지리에서 시작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스스로를 일컬어 러시아 정교회의 열렬한 후원자이면서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매일밤 잠들기 전, 신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우크라이나에 산맥을 펼쳐두지 않으셨나이까?"
만약 신이 우크라이나에 산악지대를 펼쳐두었다면 건너편 세력들이 북유럽평원 North European Plain이라는 드넓은 평지를 넘어 그처럼꾸준히 러시아 땅을 침략하고픈 유혹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푸틴이라도 달리 선택할 게 없다. 서쪽으로 펼쳐진 평지를 관리하는 정도밖에는. 그리고 이런 사정은 크든 작든 간에 어느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지리적 특성>은 지도자들에게 훨씬 적은 선택지만 주고 이를 조정하고 관리할 여지 또한 생각보다 훨씬 적게 남 - P8

겨둔다. 아테네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바빌로니아, 혹은 그 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는지도자의 사명은 고지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 의해 형성돼 왔다. 전쟁, 권력, 정치는 물론이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 사는 인간이 거둔 사회적 발전은 지리적 특성에 따라 이뤄졌다. 물론 현대의 기술이 정신적, 물리적 거리를 어느 정도는 줄여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게 있다. 지구라는 행성의 70억 인구에게 주어진선택들은 늘 우리를 제약하는 강과 산, 사막과 호수, 그리고 바다에의해 어느 정도는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고, 일하고, 자녀를 길러내는 땅이 중요하다. - P9

이 가운데 다른 것보다 유독 중요한 지리적 요소가 따로 있는 것은아니다. 사막이라고 산악지대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강도정글만큼이나 중요하다.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들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는 지배적인 요소들에 포함된다.
넓게 말하면, 지정학 geopolitics은 지리적 요인들을 통해 국제적 현안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산맥 같은 천연의 장애물이나 하천망의 연결 같은 물리적 지형뿐 아니라 기후, 인구 통계, 문화지역, 그리고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성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요인들은 정치, 군사 전략부터 시작해서 언어, 교역, 종교 등을 포괄하는 인류의 사회적 발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명의 여러 국면에 중대한 충격을 가할 수도 있다. - P9

실제로 역사를 다룬 저술이나 오늘날 국제문제를 다룬 보고서들에서 자주 도외시되는 것이 바로 국내외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물리적 현실이다. 확실히 지리학은 <무엇〉 못지않게 <왜>라는 질문의 근간을 이룬다. 중국과 인도를 예로 들어보자. 엄청난 인구를 보유한 이두 대국은 상당히 긴 국경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치나 문화는 공통점이 많지 않다. 물론 이 두 공룡 국가들 간에 몇 차례마찰이 있었던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다만 1962년에 국경 분쟁으로 근 한 달간 지속됐던 전쟁 이후로 두 나라는 부딪힌 적이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두 나라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데 있다. 군대가 히말라야를 관통하거나 넘어서 진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현대 기술이 좀더 정교해지면서 이 장애물을 정복할 방도도 나오고는 있지만 이 물리적 장벽은 여전히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을 막는 억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과 인도는 서로에 대한 감시는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대외정책은 주로 다른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한 나라나 국제 정세에는 개개의 지도자들의 성향과 이념, 기술 말고도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영향은 일시적이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어도 힌두쿠시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이 만들어낸물리적 장애물, 우기에서 비롯된 난관들, 천연자원이나 식량자원에대한 제한적인 접근 등은 피할 수가 없다. 결국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지리적 요소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는다. - P10

코소보(세르비아의 자치주로 있다가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의 이바르강River Ibar이야말로 최적의 사례다. 1389년에 벌어진 코소보폴레 전투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 지배를 공고히 했다. 전투는 코소보 중북부에 위치한 도시 미트로비차를 흐르는 이바르 강 근처에서 벌어졌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 말레시하산악지대에서 내려왔고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이바르 강 뒤로 점점밀려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이 지역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의 차지가 되었다. 20세기로 넘어가서도 대략 이바르 강을 경계로 뚜렷한 민족적, 종교적 구분이 잔존했다. 그러다가 1999년, 나토군의 공습 지원을 받으면서 코소보 민족 해방군이 진격하자 세르비아군은 이바르 강을 건너 퇴각했다. 그러자 그 지역에 남아 있던 세르비아계 대다수가 이내 그들에게 가세했다. 현재 이바르 강은 코소보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일부 국가들에게는 사실상의 국경으로받아들여지고 있다. - P11

이미 미군 전투기들은 카불로 진출할 통로를 트기 위해 마자르에샤리프 동부의 춥고 먼지 풀풀 날리는 평원과 언덕에 있는 탈레반과알카에다 진지들에 폭격을 퍼붓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나자 북부동맹군이 남부로 이동할 채비를 갖추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때 상황이돌변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모래폭풍이 몰려와서 주변을 온통 누런색으로 물들여 버렸다. 폭풍의 최정상에서도 몇 미터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의 최첨단 위성 기술도 이 척박한 땅의 기후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이었다. 부시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는 물론 북부동맹의 지상군 부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저 손을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사방을 뒤덮었던 모래가 이제는 모든 것을 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비는 어찌나 세차게 쏟아지는지 우리가 머물고 있던 오두막이통째로 진흙에 녹아내린 것 같았다. 날은 개었지만 남쪽으로의 진격은 〈지리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정지되었다. 한니발도, 손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인정했던, 이른바 <지리의 법칙>은 이렇듯 현대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 P13

시리아가 전면적인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한 언덕에서서 하마 시의 남쪽 계곡을 조망하고 있었다. 저 멀리 작은 마을 하나가 불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곁에 있던 시리아 친구들이포탄이 날아오고 있는 지점을 가리켰다. 작은 마을로부터 약 1.6킬로미터쯤 떨어진 보다 큰 마을이었다.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만약 한쪽편이 다른 편 사람들을 계곡 바깥쪽으로 밀어낼 수만 있다면 계곡을통해 이 나라의 유일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다른 지역과 연결될 수있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만약 시리아가 원상회복이 안 될 경우 이길은 향후 작은 자치주를 설립할 만한 인접 영토를 확보하는 데 요긴할 거라고 덧붙였다. 이전 같았으면 불길에 휩싸인 작은 마을만 보았을 테지만 이제는 그것이 상징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볼 수 있게 된 나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현실이 정치 현실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 P14

먼저 중국의 경우, 국제적인 해군력 없이는 패권국이 되기 어려운현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드넓은 땅을 평정하느라 혼돈의 4천 년을 써버린 중국은 이제는 막강한 대양 해군력을 구축해 해양 강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남중국해를 비롯해 여러 해협에서 치르고 있는영유권 분쟁은 <해상 수송로>에 대한 그들의 집착을 보여준다. 러시아는 이 나라에 미치는 북극의 영향부터 시작해서 왜 이 나라가 진정한 강대국이 되기 어려운지 그 지리적 제약 조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러시아는 한마디로 지리에게 <복수의 일격>을 당했다고 볼수 있다. 미국을 다룬 장에서는 주요 지역들에서 자국의 영토를 확장했던 기민한 결정들과 어떻게 그 나라가 오늘날 두 대양을 아우르는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지리적 측면에서 조명해볼것이다. 미국은 특히 다른 어느 곳보다 기후와 <지리의 축복>을 많이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 P15

인류 역사에서 지리적 특성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는 것은 한편으론 암울한 세계관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자연이 인간보다 훨씬 강한 존재여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반감을 표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인류사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현대 기술이 철옹성처럼 단단한 지리의 법칙을 깨트리고 있음을 안다. 현대의 기술은 일부 지리적 장애물들의 위 또는 아래를 관통하는 길을 찾아냈다. 미국인들은 이제 미주리 주부터 이라크 모술까지 급유를 위해 착륙하지 않고도 단번에 폭격 임무를 수행하는 비행기를 만들어 냈다. 이는 항공모함(전투단)까지 더해지면 굳이 동맹국이나 식민지 없이도 단독으로 범세계적인전개를 시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미국이 인도양에 있는 영국령 디에고 가르시아 섬에 공군 기지를 건설하거나 바레인에 - P17

있는 항구에 영구적으로 접근할 수만있다면 더많은선택지를 얻는셈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인터넷이 그랬던 것처럼 공군력이 다른 방식으로 이 법칙을 바꾸고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리는, 그리고 어떻게 각 나라들이 각자의지리적 특성 안에서 형성돼 왔는가의 역사는 오늘날은 물론 미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라크와 시리아 간의 분쟁이 지리적 법칙을 무시한 유럽 식민 세력의 무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중국의 티베트 점령은 오히려 지리의 법칙에 순응한 것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조차 이 지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또 가장 최근에 초강대국들이 대치하는 세력 투사 행위 (해상 기지, 즉 교두보 확보를 위해 해상 전력을일시에 진입시키는 일종의 상륙 작전 행위)들도 자연 혹은 신이 부여한 법칙들을 완화시키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법칙들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논의는 세계 초강대국이자 강력한 해양 대국을 꿈꾸는 중국부터 시작하겠다. 그들은 현재끊임없이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거대한 당사자다. - P18

2006년 10월, 1천 피트급 미국 항공모함 키티 호크Kitty Hawk 호가 이끄는 초대형 항공모함 대대가 일본 남부와 대만 사이에 있는 동중국해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해군잠수함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미 항공모함 군단 사이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보통 그 사이즈의 미국 항공모함이 이동할 때는 대략 12대의 다른전함들이 에워싸고 공중은 물론 잠수함의 엄호도 따른다. 중국의 송클래스 Song-class 잠수함은 동력이 전기라 매우 조용할지는 모르지만그럼에도 이 행동은 마치 펩시콜라의 경영자가 코카콜라 사 회의장책상 밑에 숨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몰래 엿듣다가 벌떡 일어선 거나마찬가지인 사태였다. - P22

현재 한족은 중국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면서 중국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의 언어는 만다린어, 광둥어 및 다른여러 지방 언어들로 나뉘지만 민족적으로 하나로 묶여지며 정치적차원에서도 심장부를 지키려는 지정학적 욕구를 통해 하나로 묶여있다. 북부에서 유래한 만다린어는 현재까지 정부는 물론 국영 방송과 학교에서 사용하는 주요 언어다. 만다린어는 문자로 썼을 때는 광둥어나 여타 다른 언어들과 같은데 다만 발음할 때는 현저히 달라진다.
북중국평원은 정치, 문화, 인구, 그리고 결정적으로 농업의 중심지다. 이 지역에 무려 10억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 면적은 3억 2천2백만 명이 사는 미국의 절반 크기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 심장부의지형이 정착과 농경생활에 적합했던 관계로 초기 한족 왕조들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민족들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용맹한 유목민 전사들을 보유한 몽골은 항상 두려운 존재였다. - P25

한일각의 기대와는 달리,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와 마오쩌둥이이끄는 공산당 군대는 1949년까지 중국 땅의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결국 공산군에 패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했다. 그 해 베이징라디오 방송국은 이렇게 발표했다.
"인민해방군은 모든 중국 영토를 해방시킬 것이다. 여기에는 티베트와 신장, 하이난, 그리고 대만도 포함된다."
마오쩌둥은 기존의 그 어떤 왕조도 성공한 적이 없는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달성했다. 그는 내몽골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몽골 내에서 베이징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951년에는 한족 땅이 아니었던 또 다른 광활한 지역 티베트를합병했다. 그러자 중국 학생들의 교과서에는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까지 확대된 중국의 지도가 실리기 시작했다. 중국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오는 이 확대된 중국의 영토를 수호하고 인민의삶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의 주도권을 공고히 다지는 데 나머지 생의대부분을 바쳤다. 그러나 이 정책은 한편으로 바깥 세계와의 단절을불러왔다. 특히 연안 지역과 멀리 떨어진 지역은 여전히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물론 통합은 지속되었다. - P29

이렇게 하여 티베트에 도달한다. 여기서 중국에게 티베트가 왜 중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히말라야 산맥은 중국-인도 국경을 내달리다 하강해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 걸쳐 있는 카라코람 산맥이 된다. 히말라야는 중국에게는 훌륭한 <천연의 만리장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도의 뉴델리 쪽에서 봤을 때는 <인도판만리장성>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 인구를 보유한 두 나라는 히말라야를 가운데 두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나라는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중국은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주를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고, 인도 측은 중국이 자국의 악사이친을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히말라야라는 천연의 장벽 꼭대기에서 상대편을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다 하더라도 일련의 대규모 산악전으로까지 번졌던 1962년의 무력 분쟁을 재현하는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음을 양측은 알고 있다. 긴장이 여전히 상존하는 한 양측은 신중하게 이 상황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 P33

인도가 티벳트 고원의 통제권을 얻으면 중국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전초기지를 확보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곧 중국의 주요 강인 황허, 양쯔, 그리고 메콩 강의 수원이 있는 티베트의 통제권을 얻는 거나 다름없다.
티베트를 <중국의 급수탑>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에 버금가는 물을 사용하지만 인구는 다섯 배나 많은 중국으로서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사실 관건은, 인도가 중국의 강물 공급을 중단시키고 싶은가가 아니라 과연 인도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가이다. 수세기에 걸쳐 중국은이런 일만은 절대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해왔다. 배우 리처드 기어와자유티베트운동Free Tibet Campaign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부당한점령을 줄곧 규탄해 왔고 이제는 한족의 티베트 정착 정책에 대해서도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티베트 독립운동 단체, 할리우드 스타들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과의 싸움은 그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하다.
- P34

리처드 기어가 됐든 오바마 대통령이 됐든, 서구인들이 티베트 문제를 거론하면 중국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위험하다거나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것도 아닌데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중국인들은 티베트 문제를 인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보다는 <지정학적 안보>의 틀에서 본다. 중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중국의 안보를 침해하려 한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중국의 안보가 저해된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티베트에서 한족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난다고 해도 인구학과 지정학이 티베트 독립에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 P34

정확한 수치를 얻기는 힘들지만 자유티베트운동에 따르면, 오늘날보다 넓은 티베트 문화권에서 티베트인은 이미 소수로 전락했다고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공식적인 티베트 자치구에서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티베트인이라고 말한다. 사실 양측의 주장 모두 과장된측면이 있지만 중국 정부가 좀 더 과장하고 있다는 근거는 있다. 중국정부가 밝힌 수치에는 거주민으로 등록하지 않고 있는 한족 이주민수가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티베트 도시 지역을 점유하고있는 이들이 주로 한족이라는 것은 거리만 걸어 다녀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만주와 내몽골, 신장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만주족과 몽골인, 그리고 위구르족이었다. 그러나 이 세 지역의 대다수도 중국계한족이 점하고 있거나 적어도 다수에 근접해 가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라고 예외가 아니다. - P36

마지막으로 시곗바늘은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주로 산악 지형을 이룬 키르기스스탄을 돌아 카자흐스탄과 마주보는 국경에 도달한다. 뒤를 돌아 북쪽의 몽골로 이어지는 지역을 보면 이곳이 과거 중앙아시아 지역의 왕국들과 세계를 잇는 육상 무역의 다리 역할을 했던 고대의 실크로드임을 알 수 있다. 이론상으로만 보면 산맥과 사막사이에 낀 이곳은 중국 방위에서 허약한 지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심장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카자흐스탄이 중국을 위협할 입장도 아니고 러시아 또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 카자흐스탄 국경의 남동부는 평온할 틈이 없는 반semi 자치구인중국령 신장 지구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터키어와 비슷한 언어를쓰는 위구르족이다. 신장 지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까지 합해 무려 8개국에 이른다.
예나 지금이나 신장 지역은 잠잠할 날이 없다. 위구르족은 1930년 - P37

대와 1940년대 두 번이나 동투르키스탄Fast Turkestan이라는 이름으로독립국가를 선포한 적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목격했고 그 결과로 <스탄으로 끝나는 소비에트 시절의 이웃들이 주권 국가로 재탄생한 것도 지켜보았다. 티베트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받은이들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외치고 있다.
2009년, 이 지역에 대규모 민족 분규가 발발해서 2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지역에 대한 베이징의 대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둘째 그 지역에돈을 쏟아 붓기, 셋째 꾸준히 한족 노동자들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불길을 방관하기에는 중국에게 신장 지구는 전략적으로 몹시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8개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그래서중국 심장부의 완충지 역할을 하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다량의 원유가 매장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 핵무기 실험장도 이곳에 있다. - P38

그러나 중국이 이 땅을 포기할 리 없다.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신장에서도 독립으로 향한 창문은 닫혀가고 있다. 두 지역 모두 완충지이며 한 곳은 육상 무역의 주요 통로다. 또한 중요한 것이 비록 소득수준은 낮지만 두 지역 모두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해서 대량 실업을 막으려는 중국 정부에게는 상품의 생산지이자 시장으로도 기능한다는점이다. 만약 이 정책이 실패해서 이들 지역에서 주민들의 소요가 확산되기라도 하면 이 사태는 공산당 지배와 중국의 통합에 심각한 위18-45협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개인의 권리에 반대한다.
자유로운 선거권이 주어지면 한족의 단결은 깨어질지 모른다. 더 나아가 지방과 도시 간에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 P39

공산당 간부들과 인민들 간에 체결된 계약은 현세대에게는 유효하다. "우리가 당신들을 잘살게 해줄 테니 당신들도 우리를 따르라."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는 한 이 계약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발전이 멈추거나 상황이 역전될 경우 이 계약은 종료된다. 부패와 무능에 반발해 현재에도 종종 일어나는 시위와 분노의 수위는 당과 인민 간의 계약이 깨졌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가늠케 하는 표본이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또 다른 골칫거리가 있다. 바로 그 많은 인구를먹여 살리는 능력이다. 중국 농림부에 따르면현경작지의 40퍼센트가 오염됐거나 나무를 솎아낸 토양이라고 한다.
중국은 곤경에 직면하고 있다. 근대화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산업화를 멈출수 없지만 이 과정에서 정작 식량 생산이 위협받고 있다.
중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 P41

드넓은 땅을 평정하느라 혼돈의 4천 년을 써버린 중국은 이제는 대양 해군력을 구축하고 있다. 지역 해군이 영해를 순시하고 대양 해군은 대양을 순시한다. 현재의 경제 발전 속도를 감안해 보면, 중국이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해상 수송력을 자랑하는 미 해군에 필적할만한 능력을 갖추려면 30년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중단기적으로 보면 현재 중국이 해군력을 구축하고 군사들을 훈련, 교육시키고 있는 중이니 중국 해군이 대양에서 경쟁자들과 맞닥뜨릴 일이 머지않아 있을 걸로 보인다. 특히 중국과 미 해군 사이에 벌어질수 있는 충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금세기 강대국 외교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지금 중국의 젊은 해군 병사들은 우크라이나의 고물 집적소에서 건진 중고 항공모함에서 훈련을 받는다.  - P42

중국은 점점 더 많은 선박들을 자국의 연안뿐 아니라 태평양으로내보내고 있다. 미국도 이 점을 모르지 않는다. 또 중국 해군이 육상기지를 기반으로 한 대함미사일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언젠가는 미 해군이나 그 동맹국들이 남중국해를 통해,
아니 중국해라 이름 붙여진 모든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이 두 배로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동안 중국의 우주 탐사 기술도 발전을 거듭해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감시할 수 있게 될것이다.
이제 육상 국경 주변에서 동쪽과 남쪽,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남서쪽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이곳 바다 밑에서 중국은 잠수함을타고 따라잡기 게임을 펼치고 있다. 미국 항모전단에 바짝 다가와 수면 위로 불쑥 올라올 수는 있겠지만 현재 중국의 잠수함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적의 잠수함을 사냥하기에는 지나치게 소음이 크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 중국군은 대잠함정 (적의 잠수함에 대한 초계, 수색, 공격을 주 임무로 하는 함정)을 도입하는 한편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수중 센서망을 구축하느라 분주하다. - P41

인도양과 벵골 만의 항구들은 중국의 미래를 공고히 다지는 보다큰 계획의 일부분이다. 중국은 미얀마 서부 해안부터 시작해서 벵골만을 지나 중국 남서부로 들어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 이는 에너지 공급량의 거의 80퍼센트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것에 불안을 느낀 베이징 정부가 그 의존도를 줄여보려고 고안해낸방법이다. 중국이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얼마간 이해되는 것은 2010년 미얀마 군사정권이 조금씩 바깥 세계를 향해 문호를개방하기 시작했을 때 이 나라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나라들 가운데 중국이 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미얀마와 잽싸게 우호 관계를 수립했고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미얀마 정부에 개인적인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이들 나라가 미얀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중국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중국은 지구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게임에서선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미얀마 정부를 신뢰하는한 워싱턴은 미얀마를 수호하는 한편 언제고 중국을 이곳에서 밀어낼 수 있다. - P52

중국은 케냐에도 항구를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앙골라에는 철도를, 에티오피아에는 수력 발전용 댐 건설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은 광물과 귀금속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기업들과 노동자들도 세계 곳곳에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군대도 슬그머니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큰 힘에는 큰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중국은 오직 미국만이 전 세계의 치안을 담당 - P52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면 언젠가는 중국도 행동에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중국 노동자들, 다수가 연루된 자연재해나 테러 또는 인질 사건이 발생한다면 중국 정부도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응하려면 전진기지라든지 적어도 중국군이 그 나라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승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족히 1천만 명은 되는 중국인들이 전세계에 퍼져 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거대한 중국인 노동자 단지까지 형성돼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향후 10년 내에 좀 더 기민해지고자 안간힘을 쓸 것이다.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중국 정부는 피해 현장에 인민군 부대를 투입해서 그럭저럭 복구를 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군대를이동시킬 수는 있지만 군수품은 쉽지 않다. 신속하게 해외로 이동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도전이다. - P53

는 것은 훨씬그러나 이런 국면 또한 바뀔 것이다. 전 세계와 상대하는 중국은 인권 문제로 인해 주눅이 들거나 외교적, 경제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중국은 확고한 국경과 중국 본토와 1천 킬로미터 떨어진 제1선이라는 끈을 꼭 쥔 채 당당하게 세계를 누비고 있다. 만약 일본이나미국과의 마찰을 피할 수만 있다면 중국에게 유일한 위험은 중국 자신밖에 없다.
중국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14억 가지는 된다. 또한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없는 이유도 14억 가지는 된다.
1930년대에 미국에 몰아친 대공황 같은 사태가 중국에서도 발생한다면 중국은 수십 년은 후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라는 틀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중국은 만들지 않는다. - P53

위치.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만약 당신이 복권에 당첨돼서 살고싶은 나라에 땅을 사고 싶다고 해보자. 부동산 중개인이 가장 먼저 소개해 주는 곳은 바로 미합중국이리라.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엉터리 기사를 언급했지만,
그라면 미합중국이 종말을 맞을 거라는 과장된 기사에 대해서도 할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멋진 동네다. 경치도 좋고 인공 폭포도 몇 개 있다. 교통망도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그렇다면 이웃들은? 이웃들 또한 하나같이훌륭해서 전혀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공간을 좀 더 세부적으로 쪼개본다면 그 가치는심각하게 하락하고 만다. 특히 임차인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임대료도 저마다 다른 통화로 지불한다. 하지만 한 가정만 - P58

rninCK D을 위한 집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미국에는 50개 주가 있지만 오히려 28개 주권 국가들의 모임인 유럽연합은 결코 이루지 못할 방식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대다수유럽연합 국가들은 미국의 주들보다 훨씬 강하고 분명한 민족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 사람을 예로 들면, 그는 첫째가 프랑스인이요 유럽인은 그 다음이다. 유럽이라는 개념에 그다지 헌신하지 않는프랑스 사람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반면 미국인은 유럽인과는달리 합중국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 현상은 미국의 지리적 특성과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 P59

프랑스는 골치 아픈 주인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해결책은 전쟁이 아니었다.
1803년, 미합중국은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가 있는 루이지애나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사들였다. 이 지역은 멕시코 만에서 시작해서북서쪽으로 로키 산맥의 미시시피 강 지류들의 상류까지 뻗어 있다.
이 땅의 면적은 오늘날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통일 독일을 합친 넓이와 맞먹는다. 신생 미합중국은 이 땅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의 유역을 기반으로 번영으로 가는 길을 닦는다.
1천5백만 달러짜리 서명 하나로 1803년에 미국은 루이지애나를 구입하여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이는 곧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내륙수로 수송권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애덤스는 이렇게 썼다.
"미합중국이 투자 대비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일은 이제껏 없었다."
거대한 미시시피 유역에는 전 세계 다른 하천들에 비해 훨씬 긴 가 - P63

항수로들이 많다. 수원이 산악지대에 있지도 않으며, 그토록 광대한거리를 가로질러 대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만큼 차분하게 흐르는 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풍부한 유역 수계의 공급을 받는 미시시피강은 미니애폴리스 부근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약 2,897킬로미터를흘러 멕시코만에서 끝난다. 이렇듯 강들은 큰 항구로 이어지며, 수상기를 이용한 운반은 예나 지금이나 육로 운송보다 훨씬 싸게 들어 당시 한창 상승일로이던 교역을 위한 천연 수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미국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깊이를 확보함과 동시에 방대하고 비옥한 토지, 그리고 사업을 펼치기에 적합한 대서양 항구들이라는 대안을 얻었다. 또한 동부 해안을 새 영토와 연결해 주는 동서 루트를 확보했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계는 인구 밀도가 희박한 지역들을 서로 묶어주면서 단일 통합체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 P64

당시 신생 국가는 거인, 다시 말해 대륙의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점차 서쪽으로 전진하면서도 남쪽을 호시탐탐 엿본 것은 물론 〈왕관에 박힌 보석>인 미시시피의 수호에도 신경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14년, 영국은 물러갔고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포기했다. 이제스페인 사람들만 내보내면 됐다. 그리고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느라 이미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미국이 세미놀족을 스페인령인 플로리다까지 밀어내자 스페인 본국은 머지않아 정착민 물결이 밀려오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1819년, 스페인은 플로리다뿐 아니라 덤으로 꽤 넓은 토지까지 미합중국에 넘겼다. - P64

루이지애나 구입은 미국 입장에서는 심장부를 얻은 격이었다. 그런데 1819년에 맺은 대륙횡단조약도 거의 이에 버금가는 가치를 안겼다. 스페인은 미국이 현재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의 경계인 북위 42도선 위인 극서부 지역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했다. 반면 스페인은 그 아래인 미국 영토의 서쪽을 지배한다는 계약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미합중국은 <태평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즈음 대다수 미국인들은 1819년에 플로리다를 얻은 것을 가장큰 승리로 여겼지만 당시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태평양 방향의 경계선을 획득한 것이 우리 역사에 위대한 시대를 열게 한다."
그런데 스페인어 사용자들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멕시코였다. - P65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그 위협은 제거됐다. 그리고 1962년소련과의 분쟁에서는 소련이 마지못해 굴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위협은 제거됐다. 현재 특별히 쿠바를 지원하는 강대국은 없는 상황이고, 쿠바 또한 문화적으로나 어쩌면 정치적으로도 점차 미국의 영향권 아래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14년 말, 미국과 쿠바의국교정상화가 선언됐다.)미국은 신속히 움직였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을 확보함으로써 카리브 해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하와이의 퍼시픽 아일랜드를 합병해서 자국의 서부 해안으로의 안전한 접근을 도모했다. 또한1903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배타적인 권한을 보장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무역 붐이 일어났다.
이 시기야말로 미국에게는 세계무대로 나선 것 이상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전 세계를 향해 무력시위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 P70

1949년 워싱턴 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NATO의 창설을주도했다. 이로써 미국은 독일에 잔류하는 서방 군사력의 지휘권을효과적으로 넘겨받았다. 나토의 민간인 수장은 일년은 벨기에가, 다음해엔 영국이 맡게 되지만 군 사령관은 늘 미국인이 맡는다. 지금까지도 나토의 가장 큰 화력 부대는 미국이다.
조약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나토의 최고사령관은 궁극적으로 워싱턴의 입장과 일치해야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수에즈 운하위기 때 운하 지역 점령을 풀라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고 말았던 경험을 통해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결국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한 나토 가입 국가들은 우선 워싱턴에 묻지 않고서는 해군 전략을 수립,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토 창립 멤버인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영국, 이탈리아도 자국의기지에 대한 미국의 권한과 접근을 보장해 줌으로써 미국은 태평양뿐 아니라 북대서양과 지중해의 패권까지 쥐게 되었다. 1951년,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와 동맹을 맺고 남반구에도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 후에는 북쪽으로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 P73

1991년, 소련이 해체하자 러시아의 위협이 걷혀지는 것으로 보였다. 소련의 붕괴는 무능한 경제, 과잉 군비 확장, 강제 노동 수용소들과 농업 부문의 몰락, 국비 지원 트랙터의 과잉 생산 같은 계획경제에서 비롯된 산적한 문제들을 푸는 것에 실패한 데 따른 결과였다. 최근에 나타나는 러시아의 반발은 미국 측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지배력에 위협을 가할 정도는 아니다. 2014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를 "지역 강국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은 쓸데없이 자극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러시아의 <지리적 감옥의 창살>은 지금까지도 견고하다. 러시아에게는전 세계의 해상 항로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부동항이 여전히 부족하고 전시에 발트 해와 북해 또는 흑해와 지중해를 경유하여 대서양으로 진출할 군사 능력 또한 부족하다. - P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회의사당이 불탔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불이 났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10대 때부터 공산당 운동가였던 리나 하고 Lina Hag의 말이다. 리나는남편도 공산당 청년 모임에서 만났다.
화요일 오후 리나의 아파트 문 앞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회색 모자를 쓴두 사람이 나타난다. ‘악랄한 입과 노르스름한 얼굴도 점점 더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차갑고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경관들은 서두른다. "그들은 내가 점심거리를 불 위에 올려놓았고, 아기를 돌보고 있어서 꼼짝도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리나는 훗날 회고한다. 그들은 상관하지않는다. 경찰들은 리나의 딸을 이웃에 맡긴 후 옷걸이에서 그의 코트를벗겨서 던졌다. 그들은 "가자! 서둘러!"라고 말한다. 리나는 그 경찰들이새 주인들에게 ‘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죄수들로 감옥을 채워야 한다. 리나의 말대로, "역사상 가장 피를 덜 흘린‘ 혁명에는 희생물이 필요하다."
1933년 2월 28일이다. 전날 밤에는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다.
"계단을 내려갈 때 아파트 여기저기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닫지만, 소리가 들린다." 거리로 나서자 갑자기 정말 추워진다. 리나는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낀다. 창문마다 그를지켜보고 있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라고 썼다. 경관들은 리나를 고테스첼 교도소로 데려가 독방에 감금한다. - P283

그들은 리나의 남편을 이미 체포했다. 남편 알프레트 하그Alfred Haag는뷔르템베르크 주의회의 공산당 의원이다. 28세의 최연소 의원이다. 리나는 남편을 외국으로 도피시키려고 했지만, 남편은 거절했다. "내가 돌볼노동자들을 두고 떠나? 이제?"라며 남편은 아내의 제안을 거절했다. 새벽 다섯 시에 돌격대원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장롱을 열어젖히고, 옷들을 꺼내서 집어던지고, 서랍을 뒤집어놓고, 책상을 샅샅이 뒤졌다"라고 리나는 기억했다. 그들은 사실 특별히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난폭한 행동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돌격대원들이 알프레트를 데려가려고 준비할 때 리나는 남편에게 "당신은 의원이잖아요!"라고 말했다. 돌격대원 중 한 명이 비웃었다. 그는
"의원이라니, 너네도 들었어?"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어서 하그 부부에게 "너네는 빨갱이잖아! 너희 쓰레기 같은 범죄 조직은 이제 깨끗이처리될 거야!"라고 외쳤다. - P284

리나는 창가에서 돌격대원들이 알프레트를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격대원들이 남편을 때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봤다. 리나는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도록 딸을 창가에서떼어놓아야 했다.
리나는 크리스마스 특사 때 풀려난다. 알프레트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다. 정치범들끼리 정보를 주고받고, 리나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게슈타포가 리나의 옛 친구를 뜨겁게 달아오른 난로에 밀어붙여 죽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프레트 소식도 듣는다. 알프레트는 오베러 쿠베르크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도 체포되기 전과 똑같이 용기 있게 행동했다. 그가 나치 깃발에 경례하지 않겠다고 하자 교도관들은 그를 잔인하게 - P284

다렸다. 교도관들의 강요로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나는 노동자들에게거짓말하고, 그들을 배신했습니다!"라고 외치며 언덕을 기어올라야 했던적도 있다. 알프레트의 얼굴은 피범벅이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
리나 하그가 체포된 지 몇 주 후 돌격대원들이 마리아 얀코프스키 Mariabeamski의 현관에 들이닥친다. 얀코프스키는 베를린 쾨페니크 구의회의사회민주당 의원이다. 돌격대원들은 얀코프스키를 쾨페니크 본부로 데리고 간다. 그곳의 뜰에서 돌격대원들은 옷을 벗기고 나무판에 눕힌다.
그 후 검정-빨강-금색의 공화국 국기로 덮은 다음 2시간 동안 채찍, 곤봉과 쇠막대기로 마구 때린다. 때리면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노동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고, 국기를 "검정-빨강-똥"이라고 말하라고 한다.
그들은 "네가 실직 노동자들을 속였지? 불매운동을 할 나치 관련 기업 목록을 준비했지?"라고 물었다. 얀코프스키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마다 괴롭히는 사람 중 한 명이 그의 얼굴을 낡은 넝마 조각들 사이로 밀어넣었다.
- P285

얀코프스키는 훗날 "최소한 백 대 이상 맞은 후 난 나무판에서 떨어졌다. 그들이 나를 다시 끌어올린 후 얼굴을 너무 심하게 때려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돌격대원들은 "무엇보다 독일"이라는 구절이 들어간 독일 국가를 부르라고 한다. 1922년 이후 공식적인 국가가되었지만, 훨씬 오랫동안 국가인민당을 상징하는 노래였다.
돌격대원들은 사회민주당을 떠나고, 다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매주 목요일마다 나치 사무실에 보고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도록 얀코프스키에게 강요한다. 그 후 갑자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라고 그는 훗날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에게 물 한잔과 옷을 준다. 돌격대 지휘자는 부하 한 명에게 "숙녀를 밖으로 모셔다드려라"라고 명령하고, 정중하 - P285

게 인사한다. 돌격대원들은 얀코프스키를 거리에 두고 간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그는 간신히 살아남고, 평생 구타후유증으로 고생한다. 그리고 화재 사건 직후 자신이 체포되었던 사실을해외 언론에 알린다. 나치는 ‘잔혹 행위를 거짓 유포한 혐의로 얀코프스키를 기소한다. 2이것이 나치가 "전국 봉기"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1932년 8월에는 잔혹한 포템파 살인사건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았었다. 이제 1933년봄이 되자 돌격대원들은 법적인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
리나 하그는 "눈길을 돌리는게 낫다.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독일에서 그렇게 많은 걸 보는 일은 좋지 않다"라고 쓴다. - P286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경찰을 장악한 게 무슨의미인지 곧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1933년 2월 초부터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평화주의자, 지식인과 언론인, 예술가, 인권운동가와 그들의 언론 등 나치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겨냥해 법적 조치를 하거나 경찰을 동원하는 일들이 꾸준히 일어났다. 2월4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경찰이 정치 집회를 해산하고, 단체 결성을 금지하고, 언론을 폐쇄하는 광범위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법령에 서명했다. - P286

2월27일의 국회의사당 화재가 그렇게 중요해졌다. 히틀러 정부는 총선거를 다시 치르기 엿새 전에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일어난 화재가 테러범의 방화이자 공산주의자 폭동의 서막이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 아침, 비상사태를 이용해 공식적으로는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 비공식적으로는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알려진 긴급명령을 내각이 통과시키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긴급명령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 우편과 전보의 비밀유지, 무단으로 수색·체포구금되지 않을 자유를 단번에 없애버리면서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국회의사당이 불타는 순간부터정부는 전국에서 수천 명을 체포하면서 반대파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은 12년에 걸친 히틀러 독재정권의 법적 토대가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 긴급명령을 히틀러 제국의 헌법이라고 불렀다.  - P287

판데르 뤼버가 혼자 행동한 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음모에서 희생양이된게 거의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음모였을까? 공범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고,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33년 2월의 상황에서 나치가 아니면 누가 경찰이 찾을지도 모르는(아니면 적어도 찾고 싶어 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여러 공범자를 국회의사당에 드나들게 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식적인 논쟁 말고도 나치 돌격대의 특정 집단이 범인이라는몇몇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1933년에 나치의 비밀경찰 간부였던 루돌프 딜스와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Hans Bernd Gisevius는 돌격대원이었던 한스 게오르크 게베어 Hans GeorgGewehr가 국회의사당 화재의 주범이었다고 증언했다. 게베어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1933년에 그는 돌격대원들 중 방화 전문가로 유명했다. 게베어는 국회의사당에 불이 났던 밤에 어디에 있었는지에 관해 일관성도 신뢰성도 없는 말을 했다.  - P289

한편 돌격대원들은 불을 질렀든 아니든 화재 사건 후 며칠과 몇 주 동안마음껏 폭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폭력, 그리고 그러한 폭력 때문에 생긴공포가 반대파를 억누르고 새로운 정권에 대한 지지를 단단히 확보하는데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그게 집권하기 오래전부터 나치가 생각했던 일이었다. 1932년 8월에 히틀러와 힌덴부르크가 만난 직후, 펜 정부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에르빈 플랑크는 브뤼닝 정부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헤르만 핀더 Hermann Prinder에게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 나치가 돌격대를 국회로 보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퓐더는 이를 기록하며 "그뿐 아니다. 헬도르프 백작(베를린 돌격대 지휘관)은 돌격대를 며칠 동안 풀어놓으면 명단에 기록한 5천 명 정도의 반대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를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썼다. 또한 백작의 말이 사실인지 의심하며 "나는 분명 나치의그러한 행동을 그냥 넘기지 않겠다"라고 썼다. 팬더가 서술한 일들은 국회의사당 화재 이후 실제로 벌어졌다. - P290

결국 나치에게 필요했고, 나치가 계획해 온 계기를 국회의사당 화재가제공했다. 공산주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 나타났기 때문에 나치가 돌격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폭력 행위가 나타나면 공산주의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게 나치의 전략이었다. 그러려면 적당히 부정직하고 언론조작을 잘해야 했다. 괴벨스의 주된 임무였다.
괴벨스는 1933년 11월의 마리뉘스 판데르 뤼버 재판에서 증언하면서나치가 공산당원의 폭력에 대처했다고 설명하는 사례를 잘 보여줬다. 괴벨스는 1930년에 호르스트 베셀Horst Wessel이라는 나치 돌격대원이 살해당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공산당원이었던 노동자들을 전향하게 해서나치로 많이 데리고 왔던 나치 운동가를 겨냥한 계획적인 암살이라고 했다. - P294

그 시대 독일에는 여론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독일인이 나치의 선전을 받아들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에 따르면, 이미 나치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선전을 믿었고, 나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브라운슈바이크에 살던 한여성은 3월 초에 네덜란드에 사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치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외국 언론에 이야기해서 사회민주당언론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서 "더는 놀랄 필요도 없어.
외국 언론은 언제나 나치에 대한 그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니까"라고 썼다.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얼마나 사랑하고, 찬양하고, 숭배하는지 어떤 외국인도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 P295

괴벨스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히틀러나루덴도르프와 달리, 다른 종류의 정치 선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상업광고를 본떠서 정치 선전을 했다. 괴벨스는 광고가 간단하면서도 어느정도 잠재의식에 파고드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소비자에게영향을 주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귀에 쏙 들어오고 기억하기 쉬운 구호가 정말 중요했다. 괴벨스는 뭐든 금방 배우는사람이었다. 히틀러의 이미지를 포장하고 선전하는 기술은 당대 최고의상업광고에 맞먹을 만큼 세련되거나 더 뛰어났다. 23 히틀러가 괴벨스를새로 만든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 임명하자 독일의 광고 전문가들은(일거리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실망하기도 했지만,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그들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규모로 광고를 해서광고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보여줬다. 광고 전문가들은 괴벨스도 자신들처럼 광고 전문가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 P296

1차 세계대전 경험 때문에 더욱 비합리성을 받아들이게 되기도 했다.
그 전쟁에는 합리적인 면이 하나도 없었다. 기관총의 포화 속으로 천천히걸어 들어간 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희생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전쟁에서 얻을 수 있었던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4년 내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원초적인 증오를 강조하는 선전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의도적인 부정직성, 대중의 비합리성에 대한 걱정, 그러면서도 이러한 비합리성에 빠져들고 싶은 욕망 등이 모든 걸 모두 이용했다.
나치가 역사를 해석하는 열쇠로 인종을 강조하고, 모든 문제의 해답을 인종에서 찾았던 사고방식은 전쟁 전의 비합리성 그리고 전쟁 때의 폭력에서 자라났다. 인종에 대한 나치의 사고방식은 대놓고 반지성적이었다.
"피 끓는 생각"이 나치의 좌우명이었다. - P298

합리성에 대한 거부는 나치 운동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우파 대부분이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서구 자유자본주의에 대한 거부와 맞물릴때가 많았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은 독일 ‘문화‘를 찬양하면서 자신이 깎아내리던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자본주의 ‘문명‘과 비교했다. 그는 나중에 마음을 바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보수 성향 민족주의 작가 에트가어 율리우스 융은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은 "1789년에 거둔 승리의 상징"이었다고 경멸하듯이 썼다.
1789년에 거둔 승리는 다시 말해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의미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계몽주의 운동으로 인해 뒤늦게 유럽 한복판에 등장했다", 독일인은 "전통, 혈통과 역사 정신으로 계몽주의 운동에 반대해야 한다고 융은 말했다."
당대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한 사람들은 나치가 비합리성에 호소하면서어떻게 이득을 얻었는지 잘 알았다. 훗날 미국에서 경영관리 전문가로 유명해진 피터 드러커 Peter Drucker 도 예리한 관찰자였다.  - P299

드러커는 역사학자들이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계속 알아내려고 애쓰는 몇몇 나치즘 요소를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나치와 파시즘의 주장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도 잃어버린 분위기에서자라났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회문제에도 건설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어서 나치 사상은 그저 모든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상반되는 것을 모두 반대하기까지 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신앙심이깊은 사람과 무신론자를 모두 반대하고,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모두 반대하고, 무엇보다 유대주의를 반대했다.
이를 특별히 예리하게 관찰한 드러커는 사람들이 나치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데도 나치즘이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에 적대적인 언론, 적대적인 영화계, 적대적인 교회와 적대적인 정부가 나치의세력이 커지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 P300

나치의 거짓말, 나치가 하는말의 모순 그리고 나치가 얼마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하는 일은 또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 지치지 않고 알려줬다"라면서, "만약 나치의 약속이 합리적이라고 믿어야 나치 당원이 될 수 있었다면 아무도 나치당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분명하게 내렸다. 28드러커는 나치 선동가의 말을 듣고는 그 말이 나치 사상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농민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곳에서 그가 선언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빵값이 내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빵값이 오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빵값이 변하지 않기도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사회주의(나치)의 빵값을 바란다‘라고 선언했다."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는 분노와 증오가 만족스러운 사회 발전을 결 - P300

코 이뤄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치는 이러한 식의 비합리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즘은 "기적을 통해서만 과제를 이룰 수 있었다. 높은 빵값, 낮은 빵값, 변하지 않는 빵값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은 이것들과는 다르고,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이성을 벗어나는 어떤 빵값에 있었다"라고 드러커는 말했다. 그 결과, 빈곤층과 소외계층을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워온 독일인이 대중의 민주주의 역량에 가장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 선거에서 나치가 처음으로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을 때 프로이센주총리 오토 브라운은 민주주의 사상이 실패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갑자기어깨에 얹힌 책임감을 감당할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상당히 많은 독일인"에게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 P301

1933년 초, 노련한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변호사인 볼프강 하이네 Wolfgang Heine는 친구 카를 제베링에게 편지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노동자 계급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가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 같다"라고 썼다. 제베링은 답장에서 "말할 것도없다"라면서 동의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정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진권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에른스트 톨러 Ernst Toller는 1933년에 추방당한 후 완성한 우울한 자서전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이성에 지쳤다. 생각하고 성찰하는 일에 지쳤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성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통찰력과 지식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 의문스러워 했다." 관찰력이 뛰어난 정치 전문 기자 콘라트 하이덴 역시 독자들이 나치가얼마나 진실을 외면하는지를 파악하게 하고 나치의 거짓말에 잘 대응하게 이끌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했다.  - P301

히틀러가 실제로 의회 토론에 참여한 건 이날뿐이었다. 사회민주당 대오토 벨스 Otto Wels 는 일어나 반대 의견을 말했다. 나치의 돌격대원들과 친위대원들이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협박하고, 많은 좌파 의원들이 이미투옥되어 구타와 고문, 죽임까지 당하는 상황에서 벨스는 유창하고 감동적일 뿐 아니라 용기 넘치는 연설을 했다. "상대가 우리의 명예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언젠가 나치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갈것이며, 전 세계적인 비극에도 우리의 명예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면서, "자유와 생명은 뺏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명예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치의 정치 깡패들이 조롱하면서 비웃고, 큰소리로 욕설과 협박을 퍼붓는 가운데 벨스는 히틀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수권법도 영원불멸한 신념을 파괴할 힘을 당신에게 주진 못합니다... 우리는 박해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우리 나라의 우리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들의 확고한 신념, 애국심은 칭송을 받아 마땅합니다. 끝까지 신념을 지키는 용기, 굳건한 믿음이 더 밝은 미래를 보장합니다"라고 연설을 마무리했다.  - P309

그날 늦게 투표를 했고, 사회민주당 외의 모든 정당은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14년 동안 공화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중앙당 그리고 오랜 자유주의 정당인 독일인민당과 독일민주당이 모두 나치의 기세와 위협 앞에서 그들의 원칙을 버렸다.
하인리히 브뤼닝은 2차 세계대전 후 그와 몇몇 독일 국회의원들이 수권법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수권법의 지속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하면서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빼앗은 시민의 자유를 되돌려주는 법률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었다.
포츠담의 날에 가르니존 교회 행사 직전, 국가인민당의 원내 대표 에른스트 오베르포렌이 브뤼닝에게 이 계획을 이야기했고, 다음 날에는 오베르포렌의 친구 오토 슈미트 하노버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와 저녁을 먹을때 브뤼닝을 초대했다.  - P310

브뤼닝은 수권법이 2차 심사에 부쳐져서야 이를 깨달았다. "모든의석 뒤에 나치 친위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슈미트 하노버가 지나가면서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브뤼닝은 회고했다. 슈미트 하노버는전날 밤 모임이 누설되었고,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으며, 법률 개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권법의 진짜 의미는 국회가 히틀러 정부에 4년 동안 입법권을 준다는것보다는,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권력을 휘두를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이 히틀러를 견제하던 보장책 중하나가 단번에 사라졌다. 이후 넉 달 동안 법치주의와 자유 같은 다른 보장책들도 대부분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히틀러의 권력은 거침없이 강화되었다. - P311

대도시 베를린은 거의 완전히 박살났고, 독일 대부분을 외국 군대가점령했고, 독일인 수백만 명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1933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총통님!"이라는 몬케의 말은 진지했다. 히틀러도 동의하는 듯했다. 그리고 놀라운이유를 댔다. 1년 반만에 너무 빨리 권력을 잡아서 옛 체제가 아직 너무많이 남아 있었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가 아직 살아있을 때 권력을 잡았고, 기성 보수주의자들과 협상해야 했다. "여기저기에서 타협해야만 했지"라고 그는 불평했다. 믿을 수 없는 관리들을 많이임명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정보가 자주 밖으로 새어 나갔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또 하머슈타인-에쿠오르트 슐라이허 그리고 사실 "이러한해충들 주변의 모든 패거리"에 "인정사정없이 책임을 물을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권 18개월 후에는 자신의 태도가 훨씬 너그러워졌고, 어쨌든 독일의 경제·정치 상황이 크게 좋아지고 있었다고 했다. 히틀러는 "너무 친절했던 걸 나중에 후회했지"라고 말했다.
재임 초기에 대한 그 자신의 평가(친절해서 잘못되었다는)는 완전히 틀렸다. 총리가 된 후 18개월 동안 히틀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기성 보수 세력이었다. 그들만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권력의 지렛대를 조절해서 히틀러를 총리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만이 히틀러를 제거할수도 있었다. 51기성 보수 세력, 그리고 히틀러 모두 이 사실을 알았다. - P313

히틀러를 지키는 ‘총통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부대원들이 보르지궁을 장악한다. 힘러의 친구로 게슈타포 고위 관리인 안톤 둔케른이 지휘하는 부대다. 친위대 정보 조직인 보안대(SD)의 사복 장교도 그곳에 있다. 베를린보안대 우두머리인 헤르만 베렌츠가 지휘한다. 친위대원들은 외부와 연결된 전화선을 모두 끊어버린 후 사무실 문마다 무장 경비병을 배치한다. "
파펜의 직원들은 조심스럽고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받아들인다. 헤르베르트 폰 보제는 "오늘 우리 모두 딱 걸렸는데"라고 동료들에게 썰렁하고 으스스한 농담을 한다. 다른 직원은 무력 저항은 하지 말자고 하면서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의연히 버티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인리히 힘러가 직접 습격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제는 "좋은 조짐이 아니다"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동료들을 안심시키려고 태연한 척하지만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아차린다. 보제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동료들에게 서류 가방, 도장이 새겨진 반지, 지폐 조금 등 자기 물건을 건넨다. - P319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얻자 융은 갑자기 신념을 바꿨다.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융이 보기에 나치는 그저교육받지 않은 대중의 의견이 세상에 달리 표출되었을 뿐이었다. 융은 폭력적이고, 법을 무시하고, 정직하지 않고, 반지성적이고, 기독교 원리를무시하는 나치를 경멸했다. 또 자신이 《열등한 자들의 지배》라는 제목의유명한 책을 쓴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13 어느 날에는 사회민주주의자 기자에게 "이제 사회민주주의자 누구하고도 팔짱을 끼고 싶다" 라고 말했다. 융이 1933년 2월에 친구 루돌프 페헬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가장주목할 만하다. 루돌프 페헬은 《도이체 룬트샤우Deutsche Rundschau, 독일 전망》이라는 지식인층 대상 보수 성향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융은 "이 사람이권력을 잡은 데는 우리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 우리가 그를 제거해야해"라고 썼다.  - P323

사실 융의 생각은 1929년 정도부터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의 소수자 권리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방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1924년에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융이 유럽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킬 방법으로 새로운 형태의 유럽연방을 구상했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랍다. 15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꿈꾼 유럽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융은 하나의 정치 연합체가 아니라 연방국가가 모인 연방 형태의 유럽을 구상했던 것 같다. 16그러나 융의 저돌적인 성격이나 낡은 사고방식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나치가 너무 제멋대로이고, 너무 대중적이라는 생각 때문에도 나치를 싫어했다. 또 기독교가 독일과 유럽 정치를 구성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생각했다. 융은 나치의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했지만 생각이 진보 - P323

적으로 바뀐 건 전혀 아니었다. 유대계 독일인이 탄압받는 건 그들 자신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융은 철강왕의 재정 지원을 받는 사람으로서 정치적인 글을 쓸 때 기업가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항상 신경을 썼다. 그러나 나치를 비판할 때는 두려움 없이 공격하고, 대놓고 빈정거릴때가 많았다. 17 1933년 6월, 그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친구 에트문트 포르슈바흐Edmund Forschbach는 베네딕토회인 마리아 라흐 수도원에서 열린 가톨릭 학술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나치의 전체주의 방식 그리고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을 없애버린 방식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융은 모든 정당이 없어져야 한다면 왜 나치는 없어지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제 정당들이 사라진 나라에서분명 나치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나치 지도자가 "저녀석을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보내야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 - P324

부총리실 집단의 계획대로 되려면 파펜이 곧장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연락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머무는 노이데크 집을 급히 찾지 않도록 설득했다. 부총리실 참모들은스스로 좌절감에 빠져 있었지만, 파펜부총리는 히틀러의 말을 고분고분들으면서 더는 연설 내용을 퍼뜨리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명령하기까지했다. 그다음 파펜은 며칠 동안 베를린을 비웠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을만나러 동쪽으로 간게 아니었다. 북쪽의 킬과 함부르크를 거쳐 베스트팔렌에서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실수를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던 파펜이 1934년 6월의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정했다. 그러나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만났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P339

다음 날, 게슈타포가 융을 체포하고 그의 아파트를 뒤졌다. 게슈타포는 웅이 파펜의 마르부르크 연설문을 썼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연설문 원고료로 파펜이 융에게 얼마를 줘야 할지 말다툼하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였다. 파펜은 융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스트팔렌에서 날아와 융을 풀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괴링도 파펜을 만나주려고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파펜이 "그의 융 선생 때문에 " 자신을 만나려고한다고 로젠베르크에게 경멸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히틀러 자신이 직접명령해서 융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게슈타포의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는 융이 왕정 복귀를 주장하는 ‘오스트리아의 왕정복고주의자‘ 집단과 관련되었다는 몇몇 유죄 입증 자료를 찾아냈다고파펜에게 말했다.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하지만, 융은 며칠 안에 풀려날 것이라고 힘러는 약속했다.  - P343

히틀러는 총통 겸 총리‘라는 공식 직함을 얻었다. 모든 군인과 공무원은 히틀러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이제 히틀러가 독재통치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그를통제하거나 길들이려는 노력은 모두 완전히 실패했다. 제도적인 기반이있어야 정치적으로 제대로 맞설 수 있다. 1934년 늦여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당, 노동조합, 국회, 내각, 연방주와 돌격대 모두 힘을잃었다. 군대만 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대 규모를 늘리기만 하면 장교와 병사들은 만족했다. 1934년 8월부터 시곗바늘이 전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영국과 미국을 물리치고, 독일이 동유럽에서 거대한 땅을 차지하면서 경제 강국이 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렇다고 융과 보제의 희생이 모조리 헛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희생을본보기로 저항세력이 계속 나타났다. 1938년에 비슷한 집단(군대와 보수파정치인들)에서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발퀴레 작전으로 이어졌다. - P347

"무슨 일이 있어도 계획대로 쿠데타를 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쿠데타를 시도해야 한다. 실제로 성공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일 저항운동 조직이 세계와 역사 앞에서 목숨을 걸고 결정적인 시도를 했다는 게 중요하다. 다른 모든 건 상관없다"라고 트레스코는 말했다."
융과 보제도 슈타우펜베르크, 트레스코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확실히 결함이 있는 영웅이었다. 자신이 속한 계층, 배경과 시대의 편견에서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고, 목숨을 잃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히틀러를 집권하게 했다는 죄책감을 갚았다. 암흑의 시대에 목숨을 걸었던그들의 용기 덕분에 독일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도덕적 토대를 가지게되었다. - P348

언론인들은 종종 복잡한 정치 과정을 간단한 공식으로 줄이려고 한다. 그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선거‘나 ‘항의 투표현 정치에 불만을 표하기 위해 비주류후보에게 던지는 표‘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왜 무너지고,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 간단한공식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나치 운동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겪은 유럽의 각종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에는 유럽 전역, 특히 패전한 나라들(패전한 것처럼 느꼈던 이탈리아에서도)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편 나치가 그 시대에 잘 맞기는했지만, 1932년까지도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후 히틀러가 그렇게 권력을 - P348

차지하리라고 미리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 사람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는 데는 분노와 증오만큼, 계산착오와 근시안이 많은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나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지점을 살폈다. 패전의 충격 가운데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전쟁에 대한 특정 이야기를 믿었다. 명백하게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필요해서였다. 독일인 대부분은 1914년 8월의 태양 아래 나라가 멋지게 하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배신과 비겁함 때문에(등을 찔려서) 1918년 11월의 차가운 빗속에서 패전했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나치는 8월과 11월을 끊임없이 대조하면서, 11월의 반역을 물리치면 하나되었던 8월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약속했다. 국민이 과거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이상으로 중요하다. - P349

지는 과거가 실세.
사실 독일은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압도적인 경제력에 기진맥진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서구의 세계 질서에 적응할지, 저항할지가 독일인에게던져진 질문이었다. 독일의 안과 밖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세계에 통합되고 이웃 국가와 평화롭게 지내는 독일이 곧 민주적인 독일이다. 세계를 향해 날을 세우는 독일은 전례 없이무자비한 독재국가가 된다.
초인플레이션 그리고 히틀러의 1923년 11월 비어홀 폭동 시도로 최고조에 올랐던 5년간의 정치·경제 위기를 겪은 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돌아왔다. 용기 있고 능수능란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같은 정치인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슈트 - P349

레제만은 국내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독일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가 극복해야 할장애물이었다.
독일의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반민주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기업은 노조를 약하게 만들고, 국가가 관리하는 임금 중재 제도를 없애고 싶었다. 군대는 무기 구매 비용을 더 확보하고 싶었다. 농부들은 독일 농업을 집단 파산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하는 농산물 수입과 무역 협상을 중단시키고 싶었다. 불만의 뿌리는 같았다. 세계에서 독일의 위치가 1차 세계대전 패배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경제력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군대·농부들은 똑같은 해결책을 들먹였다. 독일의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국제 협력을 좋아하고, 민주주의·노동자·도시를 수호하는)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이는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민주주의를 끝내고, 농부·군인·대기업 경영자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 기반을 찾는다는 뜻이었다. - P350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른 종류의 분노와 증오로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독일 국민은 온갖 이유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종교, 성 정체성과 도덕의 전통을 깨뜨리는 대도시가 싫었다.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특히 동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 후에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을 보고 불안해졌다. 기독교와 가톨릭 집단 모두 전쟁과 혁명으로 인한스트레스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심해졌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불만이 특히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신교도들 사이에서 합쳐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너무 유대인과 가톨릭의 세력이 강하고, 너무 현대적이고, 너무 도시적이고, 결국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했다고 느꼈다. 반유대주의 같은 문화코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한 불만을 실제 이상으로 표현한다. 반유 - P350

대주의 때문에 독일의 민주주의가 끝장나거나 히틀러가 등장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몹시싫어하는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비판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18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뒤집으려고 했던 집단 중 히틀러 같은 인물이통치하는,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독재정부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각자의 문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또한 반대 세력과 타협하는 게 죽도록 싫었다. 나치가 불만세력, 특히 농촌 지역신교도의 분노를 가장 잘 포섭한다는 걸 증명하면서 정치 방정식이 바뀌었다. 1929년 이후의 어느 정도 세력 있는 반민주연합에 히틀러와 나치가 빠진 적이 없었다. - P351

그들의 관심사는 유권자의 과반수 표는커녕 최다 득표도 이끌어낼 수 없어서였다. 반면 히틀러는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군대를 재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 독일의 보수적인 정치 엘리트는 점점 더 히틀러와 협력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히틀러와 나치 운동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지 않으면자신들이 자기 이익을 너무 많이 포기해야 했다.
장검의 밤은 히틀러를 향해 주류 정치인들이 추파를 보낸 일의 결말이었다. 후겐베르크에서 브뤼닝, 펜과 슐라이허, 융과 보제까지 보수주의자들은 차례차례 허를 찔리고, 밀려났다. 그들은 적잖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배신당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대한 지휘관이자 통합의 주역으로서의 명망을 지키면서 우파 민족주의 정부를만들겠다는 대단히 중요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결국, 힌덴부르크 - P351

는 한때 ‘보헤미아 졸병‘이라며 무시했던 히틀러에게 사로잡혔다. 그러고는 히틀러가 1930년대 초의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고, 자신의 명망을 지켜줬다고 믿으면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사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총리로 임명하는 바람에 자신이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지키려고 했던 명망을 분명히 그리고 영원히 망쳐버렸다.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종말은 갈수록 배타적인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였다. 바이마르에서의 민주주의 종말을 이국적인 나치 깃발,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돌격대원들의 행진과 분리해 바라보자. 갑자기 모든 게 가깝고 친숙해 보인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 정치가들은 대체로 교활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순진한 면이 있었다.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P352

문명국가에서는 히틀러에게 투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그의 재임 기간이 짧고, 힘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은 법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데다 문화적인 나라였다. 독일 정부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독일 국민을 야만적으로만들 수 있었을까? 유대계 독일인은 독일에 깊이 동화되었고, 애국심이넘쳤다. 많은 유대계 독일인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져도 고향인 독일을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독일인이고 독일인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  라고 빅토르 클렘퍼러Victor Klemperer는 일기에 썼다. 그는 유대교 랍비의 아들이자 1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로 독일에 머무르기로 했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트레블링카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바비 야르 학살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마지막 몇 달 동안 이뤄진 죽음의 행진을 1933년에 상상 - P352

할 수 있었던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진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통 몰랐기 때문에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나중에 태어난우리에게는 당시 독일인보다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들의 사례를참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 P3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32년에는 정치가 ‘대중적‘이 되었지만, 아직 방송을 잘 이용하지는않는다. 정치인들이 라디오 방송을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잘 활용하는 사람은 아직 거의 없다. 그들은 집회에서 소리치듯 라디오 마이크에 소리를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의 메시지를 영화와 음반을 통해 퍼뜨리는 실험을 하고 있지만 이 방법들은 아직은 새롭다. 신문과 집회로는 이미 나치 지지자가 된 사람들을 만날 수있다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포스터가 필요하다. 1932년 초,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우리의 전쟁은 주로 포스터와 연설로 치러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많은 포스터가 놀랍도록 비슷해 보인다. 웃옷을 입지 않고 주걱턱인 근육질 노동자가 손목에 묶인 쇠사슬을 끊는다. "인제 그만!"이라는 글도적혀 있다.  - P207

또 다른 정치 포스터에서는 웃옷을 입지 않은 주걱턱 근육질 노동자가 칼을 들고 있다. 노동자는그 칼로 "나치 독재"라고 표시된 머리 셋 달린 뱀을 벤다. 중앙당의 자매당인 바이에른인민당의 포스터다. 또 다른 정치 포스터에도 반쯤 벗은 근육질 노동자가 등장한다.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심한 고통을느끼고 있다. 갈고리 십자가 모양으로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에 그리스도처럼 묶여 있다. 그리고 "하켄크로이츠 제국의 노동자"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사회민주당의 포스터다. 자유주의 성향의 독일국가당독일민주당의 후신은 일부만 벗은 게 아니라 완전히 벗은 근육질 남자를 등장시켜차별화했다. 독일인민당은 최소한 허리에 천은 둘렀다. 스프여성이 등장할 때는 옷을 모두 입고 있다. 얌전한 옷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묶고, 꿈꾸는 듯 눈을 반짝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오른팔을 올리고, 독일국가당과 함께 하는 "통합, 진보와 국가 공동체" 의 미래를 바라본다.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단호해 보이는 두 여성 중 한 명은 미래를 생각하며 웃는다. 나머지 한 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우리 여성"은 민족사회주의당(나치)에 투표하고 있다고 말한다. - P208

브뤼닝은 사실 선거 후 몇 개월 동안 사회민주당에 의존했다. 그가 불황을 이기려고 활용하는 어떤 긴급명령이든 사실 국회의 과반수 투표로 뒤집힐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이 ‘관용‘이라고 부르는 방침으로 보뤼닝 정부를 거듭거듭 지원했다. 브뤼닝의 정책으로 노동자 계급은 끔찍한 실업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당은 브뤼닝이 아무리못마땅해도 히틀러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브뤼닝이 물러나면 히틀러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고, 히틀러는 최악이 되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더라도 ‘관용‘은 고통스러운 방침이었다. 때문에 사회민주당 핵심 지지자 중 많은 수가 화가나고 환멸을 느꼈다. - P210

슐라이허는 나치와 협력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유권자들이 왜 나치를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점이 한 가지 이유였다. 나치의 지지 기반은 불안정해서 정부 압력이나 지속적인 반대만으로도 흩어진다고 슐라이허는 생각했다. 또 대다수 나치 지지자가 사실공산주의자이고, 나치가 해체되면 공산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걱정되는 점은 공산당이 너무 강력해져 제어할 수 없게 되는 일이다. 많은 나치 당원이 공산주의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모스크바‘가 오래전에깨닫고, 그들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고 슐라이허는 의심했다.
또 다른 이유는 슐라이허가 히틀러를 완전히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1939년 전에는 수많은 독일인과 세계 정치인들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했다. 1931년 10월에 두 차례 만났지만, 슐라이허가 히틀러를 개인적으로만나도 평가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첫 만남 후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연설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흥미로운 남자"라고만 개인적으로 기록했다. 슐라이허가 나치 지도자에 대해 유일하게 고민한 점은 그가 자신의계획대로 움직일 것인지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당선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을 보여줘 그를 유인해야 한다."  - P211

군대식 사고방식을 가진 브뤼닝은 자신을 힌덴부르크 대통령 부하로여겼고, 어느 정도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자기 정부의 각료들을 우파로 바꾸고, 자신이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이전에 국가인민당 소속이었지만 후겐베르크의 극단주의에 반대해서 당을 떠났던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가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이미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던 빌헬름그뢰너 장군이 내무부 장관을 겸했다. 그러나 나치는 물론이고, 후겐베르크와 국가인민당의 주요 인물들은 계속 브뤼닝 정부를 반대했다. 브뤼닝은 여전히 국회에서 사회민주당에 의존했고, 따라서 우파가 보기에 프로이센의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슐라이허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좌절감도 커졌다. 16브뤼닝의 엉뚱한 충성심은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바람에 총리 자리에서 빨리 물러나게 되었다. - P215

힌덴부르크는 은혜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선거 결과로 브뤼닝을 비난했다. 힌덴부르크는 조금이지만 선거운동을 해야 했고 두 차례나 선거를치러야 했다며, 히틀러나 후겐베르크가 아니라 브뤼닝을 비난했다. 힌덴부르크의 불만은 계속 쌓였다. 실직자들을 동프로이센의 파산한 농촌사유지에 정착시키는 방안이 불경기를 이겨내기 위한 브뤼닝의 구상 중 하나였다. 힌덴부르크가 동프로이센 노이데크의 할아버지 집에서 지냈던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귀족 지주들은 그 구상을 정말 싫어했다. 힌덴부르크와 가까운 사람들은 브뤼닝 총리를 "농업 볼셰비키"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한편 1932년 봄에는 아마도 정치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돌격대 금지 문제도 있었다. - P219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독일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점점 더 심해지는 정치폭력은 대부분 나치 돌격대가 벌인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했던 1932년 3월과 4월에 돌격대는 비상대책반을 소집했고, 히틀러가 승리하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돌격대를 금지하는 안은 정말 타당했다.
하지만 이는 나치, 특히 돌격대를 이용하려는 슐라이허의 바람, 그리고그의 목적과 맞지 않았다. 슐라이허의 생각은 사건에 따라 오락가락했지만, 1932년 4월에는 돌격대를 금지하면 나치가 순교자처럼 보이게 되고,
다가오는 주의회 선거에 나쁜 영향을 줘서, 힌덴부르크의 평판이 나빠질것으로 예상했다.  - P219

슐라이허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5월 2일 저녁에 브뤼닝과 개인적으로만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브뤼닝은 특유의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무신경한 태도로 슐라이허가 계속 뒤에서 조종할 수만은 없다고 설득하려고 했다. 슐라이허가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서서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말했다. 그리고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브뤼닝이몇 달 더 총리 자리를 지킨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슐라이허가 자신과의 대화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느낀다는 사실을 브뤼닝은 알아차렸다. 브뤼닝보다 인간관계에 능숙한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다. 슐라이허가 간 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을 알던 브뤼닝은 "앉아 있는 슐라이허 장군의 얼굴은 잿빛과누런색을 오갔고, 피곤하고 거의 아파 보였다. 몇 분 후 그는 흥분해서 나를 쏘아보았다. 누구든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몇 년 동안 그 얼굴의 특징을 보아온 사람이라면 ‘이제 끝났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 P220

슐라이허와 나치는 함께 모의하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원하는 일들이 있었다. 돌격대 금지를 무효로만들고, 브뤼닝과 그뢰너, 프로이센의 브라운-제베링 정부를 무너뜨리는일이었다. 33슐라이허가 상처 입은 감정과 브뤼닝과 그뢰너에게 복수하려는 욕망때문에 어떻게 그렇게 나치와 합의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않다. 또한 실질적인 우익 정부를 세우려는 좀 더 장기적인 전략과도 들어맞는 합의였다. 그들의 합의가 독일 민주주의에는 재앙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두 달 동안 모든 게 그들의 합의대로 진행됐다. - P222

1932년 4월 말, 브뤼닝과 그뢰너는 "날씨가 눈부신 날에 차를 타고 라인강을 따라 " 달리면서 보통 때보다 더 길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가졌다. 달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브뤼닝의 마지막 기대는 하나씩 무너졌다. 그뢰너는 슐라이허가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뢰너는 슐라이허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경력을 쌓도록 어떻게 도왔는지 이야기하면서 "슐라이허를아들처럼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34Ne브뤼닝은 그뢰너에게 전쟁 때 최고사령부에서 일한 경험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그뢰너는 힌덴부르크에 관해 이야기했다. 1919년 여름부터힌덴부르크의 인격에 ‘심한 의구심‘을 가졌다고 그뢰너는 말했다. 군대가 계속 독일을 지킬 수 있다고 힌덴부르크가 약속하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않으려고 했다.  - P222

파펜은 군대를 떠나 정치계에 들어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파펜은중앙당에 들어갔고, 1921년에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념적으로는 국가인민당이 더 잘 맞았지만, 그는 국가인민당이 너무 신교도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했다. 독일 정치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였다. 파펜은 첫 의원 임기 중 연설을 많이 했고, 이후10년 동안 때때로 여러 고위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중앙당의 주요기관지인 《게르마니아Germania)의 대주주가 되었지만, 파펜은 점점 더 자신의 당에서 고립되었다. 당의 규율을 자주 어겼고, 1925년 대통령 선거때에는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와 대결하는 힌덴부르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파펜은 다시 한번 힌덴부르크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1932년까지 파펜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라기보다 그저 연줄이 좋은 사람일 뿐이었다. 50파펜은 어느 모로 보나 귀족이었다. 온화하고, 세련되고, 항상 우아한옷차림이었다. 분위기가 세속적인 데다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프랑스어도 능통했다. 어느 면에서든 카리스마가 없고 진지한 브뤼닝과는 정반대였다. - P227

브뤼닝은 긴급명령을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였다. 의회민주주의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의회 과반수의 지지를 끝까지 받았다. 브뤼닝 내각은 이론보다 실제에서 더 민주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힌덴부르크와 슐라이허는 브뤼닝 내각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파펜 내각은 완전히 달랐다. 브뤼닝은 의회의 교착 상태에 대처하기 위해 긴급명령에 의존했지만, 펜과 슐라이허는 의회 정치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 긴급명령을 이용했다.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일기 작가 하리 케슬러 백작은 금방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브뤼닝이 물러나면서그저 "당장 의회민주주의가 멈췄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계의 위기가 높아지기도" 했다고 보았다. "아마 제3제국이란 축복을 기대해서인지" 베를린 증권거래소의 주가가 급등했다고 케슬러 백작은 냉소적으로 기록했다. - P229

1932년 7월 31일, 나치는 선거에서 이제까지 중 가장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38.3% 득표율로 국회에서 230석을 차지했다. 큰 차이로 이제 독일의최대 정당이 되었다. 두 번째로 큰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21.5% 득표율에133석으로 한참 뒤처졌다. 완전 자유선거에서 나치가 그렇게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일은 이후에도 없었다. 1931년 이후 경제 상황이 너무 나빠졌고, 외국 세력들에 휘둘리는 상황에 대한 독일 국민의 분노가 점점 더치솟고 있는 데다, 종교로 분열된 독일의 독특한 정치 구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놀랍지 않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같은 신교도 농촌 지역이 또다시 나치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했다.
선거일 밤, 독일 북부와 동부를 휩쓴 나치 돌격대의 폭력이 개시되었다.
폭력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회민주당 본부와 어느 진보적인 신문사에10여 차례 방화를 저지르면서 여섯 명을 살인하고, 지방 관리나 공산당정치인을 살인하려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돌격대의 폭력은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까지 퍼졌다.  - P233

슐라이허의 참모는 나치를 선제공격하는 일까지 포함해 내란에 대처할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간단히 기록한 메모들을 보면 나치에대한 슐라이허의 생각이 드러난다. 늘 그렇듯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
슐라이허는 "협력할까? 그렇지 않으면 싸워야 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치른 선거의 결과는 용두사미였다. 정치적 교착 상태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치는 최대 정당으로 남았지만, 득표율은37%에서 33%로 떨어졌다. 나치 지지자 중 일부가 신교도 중산층 진영에계속 머물면서 국가인민당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정치적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파펜이 슐라이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시작했다. 이 ‘신사 기수‘는명망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걸 즐겼지만, 일에는 별로 열의가 없었다.  - P243

파펜은 오트가 한 말을 힌덴부르크에게 보고했다. 또한 대통령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파펜에게 계속 총리를 맡길 수도있었다. 그 경우 파펜은 국방부 장관을 바꾸고 싶어 했다(그가 더는 슐라이허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걸 이해할 수 있다). 아니면 대통령이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할 수도 있었다.
"육군원수 출신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내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라고파펜은 몇 년 후 회고했다. 마침내 일어선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게 파펜, 내가 마음을 바꾼다면 나를 악당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렇지만난 너무 늙어서 삶의 끝자락에서 내란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폰 슐라이허 씨가 운을 시험해 보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악수했고,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뺨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굵은 눈물‘을 보았다.  - P247

여러 해 동안 정치 무대 뒤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장군은 이제 무대 앞으로 나섰다. 12월 3일, 슐라이허는 55세에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폭을 넓힌 연립정부에 자신의 운을 걸어보려고 했다.
우익의 자리를 지키면서 내란 없이 정치적인 안정을 찾으려고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하려고 했다. 그가 이용한 오트의 모의전은 파펜을 몰아내는 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효과는 곧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P248

1933년 1월 30일이다.
그날 아침 아돌프 히틀러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독일 총리로 취임했다. 이제 히틀러 추종자들이 횃불을 들고 베를린 중심부를 거쳐 행진하며 축하한다.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 그리고 조금더 엘리트층이고 검은색 제복을 입은 나치 친위대가 눈에 띈다. 그러나히틀러 총리와 함께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연립정부여서 철모단 같은 다른 우익 단체 대표들도 함께 행진하며 축하한다.
히틀러 운동에서는 독일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1914년 8월과 등을 찔린1918년 11월이라는 두 순간의 차이를 항상 강조한다. 1933년 1월은 나치입장에서 1914년 8월로 돌아간 날이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히틀러 총리관저 창문 앞을 지나가고, 라디오 방송에서 헤르만 괴링은 이런 분위기는오직 1914년과 비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 P253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우리 기억은 1914년 8월의 활기찬 시기로 되돌아간다. 그때도 오늘처럼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라고 보도한다. 나치의 괴벨스와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 같은 인물들은 그들의 ‘혁명‘이 사실 1914년 8월에시작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독일이 하나되었다는 게 히틀러 총리 취임의 의미 중 정말 중요한 요소다. 1929년 이후 브뤼닝, 슐라이허, 펜과 힌덴부르크 모두 분열된 독일우파를 통합할 방법을 찾았다. 또한 나치가 기성 정치권을 지지하도록 끌어들일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기 위해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많이 설득해야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제 옛 총리관저 창문 앞에 서서 나치 돌격대원들의 연주를 듣는다. 돌격대 악단은프로이센 병사들이 육군 원수를 찬양할 때 연주하는 전통적인 행진곡을 - P253

연주하면서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라인강의 파수꾼〉 같은애국적인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모습이 힌덴부르크가 소망해 온 국가통합이다. 1월 30일의 분위기를 보면서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 게 잘한 일이라고 안심한다. 몇 주 후 그는 딸에게 편지하면서 "사람들의 애국심이 치솟는 모습을 보니 아주 흐뭇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통합을 지켜주시길 기도한다"라고 쓴다. - P254

슐라이허의 오른팔인 오이겐 오트는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주장하라고조언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만난 슐라이허는 조언대로 했다. 슐라이허는 ‘임시정부‘ 시나리오를 제시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시나리오가 가장 그럴듯하고 헌법적으로도 큰 문제없이 권력을 유지할 방법이었는데, 왜 그 방법을 우기지 않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슐라이허는 1월 13일에베를린에서 언론인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임시정부 시나리오대로 하면과반수를 이루는 파괴적인 정당들이 계속 내각의 행정명령을 부결하면서 경제를 망칠 수 있고, 결국 정부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있었을 수 있다. 총리 시절 슐라이허와 이야기를 나눈 많은 사람은 그가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기진맥진하고, 더는 총리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기자는 1월중순에 슐라이허가 창백해 보이고, "전보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다"라고기록했다. 슐라이허는 늘 그러듯 "과대망상증이 없어서 안타깝다" 라고자신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는 체념, 심지어 안도까지 느끼며 1월말의 종말로 향했다.  - P270

1월 29일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괴링은 괴벨스에게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 프리크가 내무부 장관, 괴링이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 후겐베르크가 경제부와 농업부 장관이 될 것"이고, 새로 선거를 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할(그들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파펜 말이 맞을까? 누가 알까?"라고 말하면서 믿기지 않아 했다. 
히틀러와 측근들은 슐라이허와 국방부 관리들이 군사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사실 몇몇 관리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고 의논했지만, 슐라이허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치의 핵심 인물들은 1월 30일 새벽 다섯시까지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밤을 새웠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면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이어 히틀러가 취임 선서를 하러 대통령 집무실로 갈 시간이 되었다. - P276

1월 30일에는 히틀러의 위치가 압도적으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나치가 11명의 각료 중 세 자리만 차지했다. 히틀러 총리 외에 빌헬름프리크가 내무부 장관, 헤르만 괴링이 무임소 장관이었다. 철모단을 대표하는 프란츠 젤테 Franz Selate가 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나머지는 기성 우파인물이었다. 파펜이 부총리,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Konstantin von Neurath 가외무부 장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경제와 관련한 장관 다섯 가지 직책을 차지했다. 노이라트와 재무부 장관 슈베린 폰 크로지크, 교통부 장관파울 폰 엘츠-뤼베나흐Paul von Eltz-Ribenach와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중앙당의 눈치를 보면서 보류하는 인상을 주려고 지명을 며칠 미뤘다는 파펜과슐라이허 내각의 장관에서 유임되었다. 안정성과 지속성을 약속하는 듯했다. 독일인 대부분은 내각 안의 보수주의자들의 존재, 힌덴부르크의 권위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군대가 있으니 분명 히틀러가 함부로 행동할수 없을 것으로 믿었다. 파펜은 여느 때처럼 바보같이 확신했다. 그는 한친구에게 "우리가 그를 고용했지"라며 "몇 달 안에 궁지로 몰아넣어 꼼짝 못 하게 할거야" 라고 말했다. - P278

히틀러 집권을 걱정한 사람들이 못 보고 넘어간 것 같은 중요한 점이 한가지 있다. 프로이센 주정부를 넘어뜨린 펜의 1932년 쿠데타 때문에 프로이센의 핵심 부서가 독일 정부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을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려고 준비했다. 그렇게 하면 괴링과 나치가 중요한 권력 요소인 프로이센주의 경찰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슐라이허는 프로이센 경찰이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파펜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슐라이허의 뒤를 이은 사람들은 그렇게 주도면밀하지 않았다.
나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총리 자리가 아니었다. 총리는 그저 권력을 넓히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괴벨스는 "첫 단계! 계속 싸워야 한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다음에는 히틀러 총리 아래 보수 성향 장관들의 이름을 적었다. "이 사람들은 얼룩이야. 지워야 해." "
‘얼룩‘을 ‘지우려는‘ 나치의 욕망과 괴링이 장악한 경찰이 이후 몇 달동안 펼쳐지는 독일 역사를 판가름하는 조건이 된다. - P2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음은 저명한 경제학자 송병락 선생이 저서에서 ‘행복 경제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아홉 가지 사항이다. 한번 깊이 생각해볼일이다.


1.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하여 건설적이지 않은 비판은 하지 말라.
2. 현재의 불행, 좌절 또는 실패는 위장된 행복일 수 있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
3.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를 잘 사귀어라.
4. 자신의 강점과 특성을 잘 살리고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의공을 인정하라.
5.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개발하라.
6.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일을 균형 있게 하라.
7. 생각, 행동의 사회적 기준을 알고 자신의 경우를 판단하라.
8. 곤경에 처할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9. 도저히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자리를 피하라. P296, 297



파리의 고급 호텔에 자리를 잡은 그는 각 지점에 6~7개 언어로 편지를 써서 사업 지시를 하고 직접 돌아다니며 감독을 했다. 그러는 동안 시를 쓰고 한편으로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와 사귀어 그로부터 ‘백만장자 방랑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양편 모두에 군수물자를 팔며 큰돈을 벌었지만,
그의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인간혐오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이상주의와 비관적인 시니시즘 사이를 오갔다. "한순간에 양쪽 군대가 서로를 몰살시키는 게가능한 날이 오면 문명국들은 공포심을 느끼며 전쟁을 후회하게 될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가 하면 자기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죽으면 시체를 뜨거운 황산에 녹여버리라는 비탄조의 말을 했다. "1분 - P182

만에 시체가 녹을 겁니다. 거기에 석회를 섞으세요. 황산과 석회가 섞이면 버릴 것 하나 없는 훌륭한 비료가 되니까요."
그의 장례식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의 재산을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맡겨 노벨상을 제정했다. 그의 사후 창설된 재단은매년 물리, 화학, 의학, 문학 분야의 수상자에 더해서 평화상 수상자도 선정했다(노벨 경제학상은 1968년에 추가되어 1969년도에 첫 수상자가나왔다.
von노벨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귀족 부인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cutner(1843~1914)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 죽음의 상인이 내면에 품고 있던 이상주의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어느 날 노벨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파괴력이 너무나 엄청나서 오히려 그 때문에 더이상 전쟁이 불가능하게 되는 어떤 물질이나 총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소." 실제 그런 무기들이 속속 개발됐지만 여전히 전쟁은 지속되고 있고, 누구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큰돈을 벌고 있을 것이다.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바 있는 아인슈타인은 1945년 노벨상 수상식 만찬에서 노벨이 가공할 파괴 수단을 만든 데 대한 양심의가책으로 이 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긴 아인슈타인 자신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는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 P183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교들은세계 각지에 퍼져 있다. 타이완에서 발표된 공식통계中華民國 僑務統計에 따르면 세계의 화교는 3600만 명이 넘는다.
화교들이 아시아 각지로 이주해간 것은 대체로 남송시대인 12세기부터로 잡는다. 장사를 하기 위해 해외로 떠난 경우도 있고, 흉년이 들어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생존을 위해 나간 경우도 있다. 화교의해외 진출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계기 중 하나는 명대 초에 시행된해금정책이다. 명나라 조정은 허락 없이 바다로 나간 자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민간인의 해외 진출을 강력하게 억압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이 그렇다고 해도 몰래 해외로 빠져나간 사람들은계속해서 일본, 필리핀, 자바 섬 등지에 거류지를 형성했다. 그렇지만모국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 화교들은 늘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됐다. 예컨대 마닐라에서는 16~17세기에 약 2만~3만 명의화교들이 집단학살을 당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 P196

서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친족들 간의 상호 협력 시스템을구축하고 이를 이용해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화교들은 그들이 정착한 사회에서 소수 인종이라 하더라도 막강한경제력을 행사하곤 한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가 인구의 4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전체 경제 부문의 8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총인구의 29퍼센트가 중국계 후손이며 이들이 상장 주식의 1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화교가 말레이시아 행정 · 경영 부문의 전문 인력 중 60퍼센트나된다. 화교는 동남아시아 인구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치지만 역내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거부의 86퍼센트가 화교라고 한다. 현재 전세계에서 화교들이 운용하는 자본은 적게 잡아도 2조 달러가 넘는다. 화교는 유대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종집단ethnic group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P197

화교들은 중국인으로서의 혈연적·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현지 사회에 동화되어갔다. 역사적으로 모국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까닭에 더더욱 그들을 받아들인 사회 속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화교네트워크는 세계화 시대에 가장 유리한 조직으로 자라나게 됐다. 화교들은 대부분 여러 나라에 가족과 친척들을 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꼭 친척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화교들 간에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해서 이들의 총체적인 인적 유대와 자본력은 막강하다. 그와 동시에 이들은 지역 통치자나 관료들과 공식적·비공식적 노력을 통해 협력 관계를 맺어놓고 있다.
물론 이들의 사업 방식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사업을 공개 - P197

하지 않고 증권시장에 상장하지도 않은 채 자기네들끼리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지난 시대에는 장점일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긍정적인효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상표가 없는 기업도 많은데, 이런 태도도 앞으로 변화가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가부장적인 경영 관행이나 아들에게 소유권과 경영권을 넘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 화교 기업인들은 중국 정부와 손잡으면서 더욱 막강한 경제적 힘을 행사하게 됐다. 앞으로 더욱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될 중국, 그리고 이미 막강한 자본과 사업 능력으로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조직한 화교의 결합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P198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화약이 발명됐지만 무기로 사용되지 않았고 단지 불꽃놀이 용도로만 쓰였다고 믿고 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적어도 13세기 말 이전에 총포가 널리 쓰였고, 14세기에는 초보적이긴 하지만 많은 화포가다. 예컨대 명나라 건설 과정 중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인 1363년의 포양 호 전투에서 주원장(후일의 명나라 태조)은 군 지휘관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
"적선에 접근하면 우선 총을 쏘고 다음에 활을 쏴라."
14세기의 전투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십 문의 철제 대포는 이 시대에공성전이나 수상 전투에서 총포가 많이 사용됐다는 증거다. 다만 그다음 시대에 총과 화약이 주변 지역에 전해져서 크게 발전할 때정작 본산지인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문제다. - P227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 약 8,800명이 바스티유 앞에 운집했다.
바스티유는 원래 중세에 파리 시를 수비하는 성채로 건설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파리 시 자체가 팽창하는 바람에 이 성채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게 됐고 용도도 감옥으로 바뀌었다. 대개는 일반 범죄자들이수용됐지만, 금지된 책이나 팸플릿을 인쇄한 출판인 혹은 유명한 문인들이 갇히기도 해서, 그러지 않아도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 건물은 자유를 억압하는 전제정치의 상징이 됐다.
파리 시민들은 이곳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던 자유의 투사들을 구하고 동시에 화약과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과정에서 공격하던 시민 98명과 수비대원 1명이 죽었다. 오후에 수비대의 방어선이 뚫리고 시민들이 성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수비대가 항복을 선언했지만 흥분한 군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린치를 가했다. 그들은 바스티유 소장이었던 드로네를 시청 앞으로 끌고 가서 그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논쟁을 벌였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맞은 드로네는 - P235

"그만하고 차라리 나를 죽여!"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가까이 있던 사람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흥분한 군중들이 달려들어 칼로 찔러댔고 곧 톱으로 그의 목을 잘라 머리를 창에 꽂고 거리를 행진했다.
수비대 장교 세 사람도 살해됐다.
그러나 이렇게 큰 전투를 벌여 함락한 바스티유 요새에 실제로 갇혀 있던 사람은 7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들은 자유의 순교자와는거리가 멀었다. 위조범 4명, 정신병자 2명, 그리고 행실이 부정한 귀족한 명이 전부였다. 유명한 사드 백작이 열흘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감됐는데, 만일 이 역사적인 날에 바스티유에 있다가 구출됐다면 또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질 뻔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은 논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오늘날 7월 14일은 프랑스혁명 기념일이 됐다 - P236

혁명 당시의 국왕 루이 16세에 관해서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전해진다. 그는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사유 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당시의 정세에 대해완전히 무심했다고 할 수는없지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혁명이 시작된 그날, 국왕은 일기에 딱 한 단어만 썼다.
Rien(Nothing). - P237

이는 루이 16세가 그날 사냥을 나갔는데 짐승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국왕의 편에 서서 그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던 라 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은 바스티유 함락 이틀 전인 7월 12일에 국왕을 찾아가파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경고했다. 국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자 공작이 답했다.
"전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 P237

구데리안과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1891~1944) 장군은 원래의 작전에 따라 전진을 멈추라는 독일군 지도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돌진해갔다. 결국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것은 지극히 위험한 태도였다. 실제 전격전과 가장 비슷하게 사전 준비된 소련 침공은 오히려 실패로 끝났다. 전격전은 이론적인 바탕이 없고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점에서 모델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격전 개념이 사후적으로 합리화된 것은 냉전이 극성이었던 1950년대 초에 서독 군대를 재창건하기 위해 전직 나치 장군들의 협력이 필요했던 시대 상황과 무관치 않다. 구데리안과 그의 탱크 부대는1945년 5월 10일 미군에 투항했다. 그는 미군 포로로 구류 상태에 있다가 1948년에 석방됐는데, 소련과 폴란드 쪽의 항의에도 불구하고뉘른베르크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영국에서 과거의 적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전투에 대해 분석하는 일을 자주 했고, 1950년대에는 서독 연방군 Bundeswehr 창설과 발전을 위해 일했다.
역사 해석이 경우에는 차라리 역사 왜곡은 시대 상황에 따라달라지게 마련이다. - P240

한때는 불가피한 것으로 체념하고 감내하던 폭정도 일단 그것에서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즉시 더 이상견디기 어려운 억압으로 여겨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부 폐단이 시정될경우 아직 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폐단은 더욱 참기 힘든 것으로돋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고통을 덜 받는 만큼 감수성이 더욱 예민해지는 것이다. 봉건제는 절정기에 있을 때 오히려 해체기의 경우보다 프랑스인들에게 증오감을 덜 불러일으켰다. 마찬가지로루이 16세의 사소한 권력 남용이 루이 14세의 혹독한 전제정치보다 더참기 힘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마르셰의 짧은 투옥 기간이 드라고 - P248

나드Dragonnades 사건 때보다 훨씬 엄청난 동요를 파리에서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A. 토크빌, 이용재 옮김, 구체제와 프랑스혁명, 일월서각, 1989, 220쪽.



드라고나드란 루이 14세 통치 초기인 1681년에 있었던 신교도 박해 사건이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지만 앙리 4세 때 낭트 칙령을통해 신교도들에게도 사실상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하나의 국왕 하나의 종교‘라는 원칙을 선언하고 신교도의 종교적 자유를 다시 억압했다. 그 방식이 매우 억압적이고 졸렬해서 기마부대kdragoon 병사들을 신교도 집에 기숙시켜 피롭히도록 했다. 집 주인이 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전향하든지 프랑스를 떠날 때까지 군인들이 그 집에 숙영하며 온갖 행패를 부리도 - P249

록 국가가 사주한 것이니, 있을 수 없는 학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에는 생각보다 저항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혁명기에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같은 극작품으로 유명한 보마르셰Pierre-AugustinCaron de Beaumarchais Beaunmarchais (1732~99)가 며칠 동안 투옥된 사건은엄청난 동요를 일으켰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분명 민주화와 경제성장 면에서 북한보다 훨씬 진전된 남한 사회에서 오히려 불만과 항의가 더 격렬한 것도 이런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미 많은 것을 얻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계속해서 가혹하게 억누르는 데 성공하면 장기간 체제가 지속될 수있다. 그렇지만 어쩌면 북한에서도 작은 변화가 대격변을 초래할 수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P250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경관은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며 애국자라고 강변했다. 그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고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신문 기술자‘가 맞을 것"이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라고주장했다.
미국도 다를 바 없었다. CIA가 9.11 테러 용의자들에게 고문을 가한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한 용의자에게는 무려 183차례나물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 오늘날미국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알 수 있다. - P256

부시 행정부 시절 CIA 국장이었던 마이클 헤이든은 이런 정보들이밝혀지는 것이 국가 안보를 위험하게 한다고 오바마 정권을 강력하게비난했다. 전직 CIA 국장들은 용의자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잠을 재우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은 최장 7일로 제한하며, 좁고 어두운 박스에용의자를 감금했을 경우 하루에 6시간 이상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식의 규정을 두었다며, 결코 야만적인 고문을 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세계의 패권hegemony을 차지하는 것은 단지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하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내세우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노예무역과 해적 행위로 엄청난 이익을 누리던 영국이 19세기에 스스로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더나아가서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금지시킨 것은 이 나라가 유럽의일개 강대국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제국으로 상승했다는 표시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목청껏 소리치던 미국이 야만적인 고문 행위를 옹호하고 나선 것은 이제 이 나라가 세계의 패권국가가 아니라 그저 여러 강대국 중 하나로 격이 떨어져가는 징후로 보인다. - P257

그러나 페히터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람도 적지 않다. 모두1,245 명이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했고, 그 가운데 장벽 바로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만 136명이나 된다. 장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은 마지막 사례는 1989년 2월 6일에 있었던 크리스 구프로이Chris Goulffroy 다. 죽음은 면했으나 탈출을 기도하다가 체포된 사람도6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평균 4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통일 이후 1990년에 페히터가 죽은 자리에 새로 세워진 기념물에는이런 글이 쓰여 있다.


그는 오직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er wollte nur die Freiheit. - P267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곧이어 9월 17일에 소련은 폴란드 정부가 더 이상 자국 영토를 통치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모든 외교협정도 무효화됐다고 선언한 후 곧바로 폴란드 영토를 침공했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진격해 들어간 소련의 적군은 수십만 명의 폴란드 군인과 경찰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 가운데 사회 지도자급 인사 수만 명이소련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넘겨져서 수용소에 갇혔다.
1940년 봄에 이들 가운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가장 큰 규모로 학살이 자행된 곳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이라는 숲이었기 때문에 ‘카틴 숲 학살 사건‘이 주로 거론되지만, 사실은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학살이 이루어졌다. 당시 카틴 숲에서 살해된 사람만 해도 해군제독 1명, 장군 2명, 대령 24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을 비롯해서 폴란드군의 장교 절반이 넘었고 대학교수20명, 의사 300명, 그리고 100명이 넘는 작가와 저널리스트, 수백 명 - P272

의 변호사, 엔지니어, 교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 나라의군의 핵심 멤버들과 지식인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려 한 것이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인 1943년 4월에 한 독일 병사가 거대한 시체 구덩이를 발견하고 나서야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사실을 보고받은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1897~1945)는소련을 비난하기 좋은 소재로써 카틴 숲 학살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소련은 역으로 나치독일이 학살을 자행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오랫동안 이 학살 사건이 정말로 두 악마 중 누구의 소행이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냉전 시기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상대편을 비난할 뿐이었다. 아마 1950~70년대라면 소련 사학자 중에 이것이 스탈린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과연그 사실을 발표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든다. 사실상 소련의 통제하에있었던 폴란드 역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언급할 사정은 못됐다. 폴란드 역사학계에서 카틴 사건은 금기 주제였다. - P273

소련은 전후 나치에 대한 군사재판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했다.
1945년 12월에 레닌그라드 군사법정에서 열린 7명의 독일군에 대한 재판에서 아르노 디레 Arno Diere는 자신이 카틴 숲에서 구덩이를파고 약 2만 구의 시체를 매장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기관총으로민간인을 살해한 죄로 기소됐는데,
이 자백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15년 중노동형으로 감형됐다. 이는아무리 보아도 의심이 가는 자백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자신 - P274

이 소련 쪽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허위 사실을 자백했다고 말했다.
진실이 밝혀진 것은 1989년에 소련의 역사가들이 폴란드인 학살 관련 문건을 찾아내 공개하면서다. 내무인민위원장 라브렌티 베리야가제안하고 스탈린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서명한 이 문건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여러 캠프에서 25만 700명의 폴란드인을 처형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90년에 소련은 내무인민위원회가 학살을주도했고 그동안 소련 당국이 이를 은폐하려 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2010년에 카틴 숲 학살 사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가하러 가다가비행기 사고로 폴란드 대통령 내외와 국가안보국장, 참모총장, 육·해·공군 사령관, 중앙은행 총재,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사망했다. 폴란드의 비극은 언제 끝날 것인가. - P274

라파엘 씨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가 설명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하게 보였다. ……………우리가 나중에 시간을 내어서 이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은 의견을 나누고 조금 더 자세한 사실들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언젠가 그런 기회가주어지기를 지금도 고대한다. 비록 그가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학식과경험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그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할 수는없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유토피아 공화국에는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도 도입됐으면 좋겠다고 염원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고 본다.
- 토머스 모어, 주경철 옮김, 『유토피아』, 을유문화사, 2007, 155쪽.


결국 『유토피아』라는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의 답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과연 이상적인 사회란어떠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 있다.
요즘처럼 힘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새로운 미래를꿈꾸는 능력인 것 같다. 그 꿈은 실현 불가능한 황당한 꿈이어서는안 되고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에서 출발한 지성적인 꿈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실천 의지가 따라야 한다. - P282

려운사고하고 있었으니 심란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행복‘과 비교적 유사한 기능을 했던 단어는 ‘안심‘이나
‘안락‘이라고 한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감이 잘 안잡히지만 ‘안심‘과 ‘안락‘은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와 나 자신이 안심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기준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일단 심리학자들의 충고를 참고해보도록 하자. 다음은 저명한 경제학자 송병락 선생이 저서에서 ‘행복 경제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아홉 가지 사항이다. 한번 깊이 생각해볼일이다. - P296

1.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하여 건설적이지 않은 비판은 하지 말라.
2. 현재의 불행, 좌절 또는 실패는 위장된 행복일 수 있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
3.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를 잘 사귀어라.
4. 자신의 강점과 특성을 잘 살리고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의공을 인정하라.
5.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개발하라.
6.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일을 균형 있게 하라.
7. 생각, 행동의 사회적 기준을 알고 자신의 경우를 판단하라.
8. 곤경에 처할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9. 도저히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자리를 피하라. - P297

독립국가가 되기 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실의 지배하에 있던 속주에 불과했다.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에스파냐가심한 압박을 가하자 네덜란드의 17개 주 중 북부 7개 주가 반기를 들고일어나 80년에 걸친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중 하나가 1573~74년에 있었던 전략 요충지 레이던 시의 포위 공격이었다.
에스파냐가 파견한 진압군을 이끌고 네덜란드에 들어온 알바 공은 1573년에 1차로 레이던 시를 포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다음 해 2차 포위 공격 때에는 진압군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데다가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던 시민들은 더 이상 지탱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항복을 고려했다. 이때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오늘날 이 나라의 국부로 추앙받는 오라녀공 빌렘Oranje Willem (1533~84. 흔히 영어식으로 오렌지 공이라고 부름)은 전령 비둘기를 날려 보내 석 달만 버텨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 P323

전했다. 그가 생각해낸 최후의 방책은 이 도시 상류에 위치한 제방을터뜨려 이 지역을 물바다로 만들어 진압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바다로부터 시내로 직접 선박들을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군사를 투입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레이던 시가 엄청난 피해를 입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라녀 공은 비밀리에 시민 대표들과 연락을 취하여 차후에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5월에 시작된 이반격작전은 몇 달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동안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굶어 죽었다.
마침내 1574년 10월 3일, ‘바다의 거지들Gueux de mer ‘이라는 특이한 별칭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해군이 넘치는 물을 이용해 보트를 타고 시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시내에서는 시민들이 낫을 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에스파냐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 P324

에스파냐군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국토의 많은 부분이 해수면 아래에위치한 이 나라에서 제방을 터뜨린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모든 것이진흙탕에 묻혀버린 것이다.
시에 진군한 구원군은 우선 굶주리는 시민들에게 흰 빵과 청어를제공했다. 에스파냐군은 퇴각하며 성벽 가까이에 스튜를 끓이는 커다란 솥을 남겨놓았다. 오늘날에도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일Leidens onzet(10월 3일)에는 시청에서 이 솥에다 비프스튜를 끓이고 흰빵과 청어를 무료로 나누어준다.
한편, 막대한 피해를 입은 레이던 시에 보상을 하고 싶었던 오라녀공은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시민들은 대학을 설립해달라고부탁했다. 그리하여 1575년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이 레이던 시에 설립됐다. 이것이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한 레이던 대학의 기원이다. 이대학은 흐로티위스Grotius(그로티우스, 1583~1645)와 다니엘 하인지우스 - P325

Daniel Heinsius(1580~1655) 같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출판했으며, 유럽 최고의 동양학 연구센터가 됐다.
레이던 대학과 관련된 또 한가지 의미 깊은 고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일이다. 나치는 네덜란드를 점령한 이후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생과 교사,
교수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레이던 대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서유대계의 저명한 법학 교수인 메이여르스E M. Meiers를 쫓아냈다. 그러자 1940년 11월 26일 법대 학장인 클레베링아Rudolph Pabus Cleveringa교수가 공개적으로 이 일을 비판하는 강연을 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끌려갔고, 대학은 조만간 폐쇄됐다. 다행히 클레베링아 교수는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는 레이던 대학의 모토가 ‘자유의 요새Praesidum libertatis‘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 P326

일본의 저명한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行人의책 『일본 정신의 기원』을 읽다가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했다. 그는일본 사상의 특징에 대해, 모든 외래 사상들이 일본에 들어올 때 결코억압되는 적 없이 기존의 것들과 잡거한다는 점을 든다. 불교든유교든 혹은 서구 사상이든 적당히 변조되어 신토에 포용된다는것이다.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은 결코 억압되는 일 없이 단지 공간적으로 잡거할 뿐이다. 새로운 사상은 본질적인 대결이 없는 상태에서 보존되고, 또 새로운 사상이 오면 갑자기 꺼내진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는 뭐든지있게 된다. ...... 근대 서양과 접촉하면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에서는반동적인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근대화를 이루어냈다. - P336

그는 일본이 주변부 섬나라이며, 또 한번도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을 찾는다. 역사 전체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경험이 없었고, 또 그로부터 강력한 억압과 그에 저항하는 주체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일본이그처럼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이유를 한반도의 존재로 설명한다.
중국, 몽골,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한반도가 있어 이곳에서 침입이일차적으로 저지됐다. 14세기에 중국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지역을순식간에 정복한 몽골도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에는 30년이나걸렸다. 몽골이 일본 정복을 단념한 이유는 흔히 몽골 정복군을 몰살시킨 태풍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다. 일본에서는 말하자면 신이 지켜주었다는 의미로 이를 가미카제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암만해도 문제가 있다. 그처럼 강력한 세력이라면 태풍 때문에 원정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다시 준비를 하여 재침을 시도할 수 있다.  - P337

그런데 몽골이 다시 일본을 침략하지 않은 것은 고려의 저항에 힘을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다. 고려는 결국 몽골에 지배당했지만, 다른 국가들과는달리 매우 오랜 기간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몽골로서도 다시 힘을모아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데에 힘이 부쳤던 것이다.
그 반대로 일본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대륙의 지배로 향할 때그것이 좌절된 것 역시 한반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1537~98)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명나라를정복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서구의 총포를 들여와개량한 후 수십만 정을 생산한 일본군의 화력이 당시 세계 최강이라 - P337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세력에 이처럼 강력한 화력이 더해졌으니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것이 반드시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아니었다. 사실 명나라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왜구라는 점은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해양력이 대륙을 향해 팽창하려다가 한반도에서 좌절되고 만 것이다.
단지 군사 문제만은 아니다. 일본에 원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에 의한억압이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러한 체계적인 억압이 강했던조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이민족 침략의 거듭된 경험이 ‘억압‘과 ‘주체‘를 강화해왔다. 중국에 인접해 있으면서 정치적·문화적 압박에 노출된 조선은 중국보다 오히려 더 원리적이고 체계적이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조선에 들어온 주자학이 그런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정통에서 벗어나는 경향에 대해서는 사문난적이라는 꼬리표를달아 아예 박멸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원산지보다 본래의속성이 더 강해진다고나 할까. - P338

문예비평가의 예리한 견해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의 특성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각국의 역사는 결코홀로 성립되지 않는다. 각국의 역사만 따로 떼어서 보면 많은 것을 놓치기 쉽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려 한다면 ‘우리만의 역사‘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가르쳐서 학생들이 넓은 시야를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 P3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