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다 지구에 있는데 나 혼자 지구 바깥에, 우주에 있는 느낌이 들어" 너를 만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말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빨래를 널다가도 멍하니 서 있게 돼. 이름에 진실되다는 의미의 한자어가 들어 있어 이렇게 사는가보다고, ‘거짓 가(假)‘자가 들어간 이름이었다면 조금 다르게 살지 않았겠냐고 무심한 듯 말하던 너. 오래 준비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아 속상했을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내내 나의 마음도 빗물에 오래 담가 둔 이불처럼 눅진하고 무거웠어. - P180

홀로 우주에 있을 너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누군가의 상심과 좌절에 무엇을 보태거나 덜어내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나는 네가 쥐고 있는 단어가 추방, 박탈, 탈락, 소외감 같은 단어가 아니길 바라지만 우주는 너무 거대하고 공허하고 추운 공간이니까. 그곳에서 너의 시간이 어떤 속도로 흐르는지 알지 못하니까. 희망, 긍정, 열정, 목표 같은 단어들을 억지로발에 묶어 지구로 끌어당기고 싶지도 않으니까. 네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거나 아무 상관없는 소리만늘어놓게 되는 것 같다. - P181

그래서 편지를 써. 거긴 위험한 곳이니 하루빨리돌아와야 한다는 이야기 같은 건 안 해. 그저 네가 그곳에서 숨 쉬기 불편하지 않게 산소통이라도 가득채워주고 싶은 마음일 뿐. 그래도 내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행일 때가 있어.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이야기를 계속 찾게 된다는 것이 사실은 오늘도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시작했어. <굴〉(《프란 - P181

츠 카프카》, 현대문학, 2020)이라는 카프카 소설에 관한이야기야. 다른 대표작들에 비해서는 생소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흥미로운 점이 많은 소설이었어. 카프카가 죽기 바로 전에 쓴 소설이라고도 하고 미완성이라는 말도 있지. 이쯤 되면 스토리를 맛깔스럽게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가 참 난감해. 왜냐하면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거든. 땅속에굴을 파는 ‘나‘가 있어. 그게 다야. 시작부터 끝까지굴속에서 굴만 파다 끝나. 스토리를 따라 읽어야 하는 소설이 있고 구조 자체가 곧 메시지인 소설이 있잖아. 이 소설은 말하자면 후자에 속하는 듯해.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봐야 하는 소설. - P182

재미있었냐고? 그럴 리가. 사건이랄 것도, 돋보이는 캐릭터나 인상적인 대화랄 것도 없는 소설이었는걸. 굴속에서 혼잣말하고, 있지도 않은 침입자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그런 두려움 속에서 또 굴을 파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여름인지 겨울인지도 모르겠는 소설에 대고 재미를 운운할 수는 없지. 단편치고 - P182

는 길이도 꽤 긴 편인데, 몇 장을 건너뛰고 읽어도 계속 굴속에서 굴만 파고 있는 거야. 진전되지 않는, 공회전하는 듯한 느낌이 어찌나 답답하던지. 미궁에빠진 기분이었어. 폐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아마 못읽을지도 몰라.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더라니까? 같은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응?
여기 아까 읽은 거 같은데?) 어찌어찌 완독을 하고 나니간신히 비상구 밖으로 빠져나온 기분이 들더라. 소설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책을 덮으면 어쨌든 사라지는 세계라는 게 실제로도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을 실컷 맞았어.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었는데도말이야 - P183

굴속 같은 현실을 반영한 알레고리로 이 소설을이해하는 건 너무 뻔한 독해 같아. 이렇게 암담한 게현실이지, 아무렴. 그런 닳고 닳은 말을 하려고 꺼낸이야기도 아니고. 내게 흥미로웠던 건 그 소설에 등장하는 ‘벼락닫이‘라는 표현이었어. 세상으로부터단절된 주인공에게 연상된 창문의 형태가 바로 그 - P183

벼락닫이였거든.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더라. ‘위짝은 붙박이고 아래짝만 오르내려 여닫는 창문‘을 일컫는 말이래. 같은 뜻으로 ‘들창‘이라는 우리말도 있는데 벼락닫이라는 옛말이 훨씬 인상적인 것 같아.
어쩌다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벼락처럼 닫히는 문.
문은 문이 난관이 따르는 문. 절반만 허락된 문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창문은 그 정도일 뿐이라는 말이었을까. - P184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굴속이든 바닷속이든 우주이든, 인간에겐 누구나 창문이 필요한 것 같아. 각자가 필요로 하는 창의 모양이나 크기도 제각각이겠지. 언젠가 시에도 쓴 것처럼, 나는 내 영혼이문도 창도 없는 새하얀 방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자주 해. 내가 영영 잃어버린 것들, 다시는 돌아올 수없는 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소환되는 공간이야. 마치 너의 우주처럼 말이야. 거길 떠나고 싶었는데 안 되더라.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오게되더라고.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 이제 더 이상 - P184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지 않고 그냥 거기, 그 방의 "흰 벽에 빛이 가득한 창문을 그리기로(면벽의 유령》,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갇혀 있어도, 천국이 아니어도 지워지면 그만일 창문이더라도, 내가 분명히그렸고 그 과정이 진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생각.
<굴>의 주인공에게 연상된 문처럼, 제아무리 굴속물속 마음속이라 해도 창을 내는 일이 불가능한 건아니잖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질적, 물리적인 창문이기도 하지만 존재론적이고 심리적인 창문일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 어쩌면 벼락닫이를 통한 환기는불완전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 P185

위짝은 붙박이니까 실질적으로 열리는 문은 아래쪽, 즉 절반에 불과할 테고, 혹 고정 핀이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캄캄하게 닫혀버릴 수도 있겠지. 그렇더라도 그 방식이 최선인순간이 있었겠지? 그런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주에 적합한 창은 어떤 방식일까? 궁금하다. 다 - P185

음에 만나면 네가 꿈꾸는 창문의 구체적인 형상과여닫는 방식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 그리고 이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난 네 이름이 참 좋아. 이름에거짓이 없어서 도망갈 구석이 하나도 없는, 전부이고 전체여야 하는 그런 진실함이 온통 너여서.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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