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게 아니라 선택은 인류의 오랜 숙제였다. 세계가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간 인류가 해왔던 선택의 결과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당신과 내가 지금 이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있다. 삶은 선택,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던 햄릿부터 인생에는 간 길과 가지않은 길, 두 길이 있노라 노래한 로버트 프로스트,〈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선택을피해 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선택에 능한 사람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라도.
- P188

그때 구직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다 결론 내리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해 시를 썼고, 숱한 탈락과 경제적곤궁 속에서도 그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문을열면 낯선 곳이었고 아 여기가 아니구나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읽고 쓰는 자로 살아가는 삶을. 무엇보다 시를.
선택은 테니스 경기가 아니어서 아무리 좋은 라켓으로 공을 쳐 넘긴들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공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지고 또 던져도, 사라진 공은 사라진 공일 뿐이다. 결혼을 결심하고, 이사할 집을 고르고, 반려 화분을 들이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친구를 보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탈 것인가 비행기를탈 것인가를 고민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누구나 라켓을 든 혼자다. 언제나 밤은 쉽게도 왔고. - P190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더 파괴되거나 그나마 덜 파괴되는 쪽, 최악과 차악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괜찮다. 내게는 시가 있으니까. 시는 파괴의 잔해들, 파쇄되고 폐기된 시간을 그러모으는 손으로 쓰이니까.
우는 손이 슬픔을 알아보고 쓰다듬는다. 악몽에 시달리는 손이 빛을 뒤적인다. 열매를 위해서 적화했던 순간들을, 손은 전부 기억한다. - P192

평소 꽤나 건강한 편이라고, 못먹는 음식이나 알레르기 같은 건 없다고 자신해왔는데 이럴 수가. 서른여섯 해나 데리고 산 몸뚱이인데도 나는 나를 참 모르는구나 싶었다.
불쑥 머리를 스치는 문장이 있었다. 몇 년 전에쓴 〈비롯〉이라는 시의 한 구절, "보드라울 줄 알고겁 없이 만진 복숭아 때문에 / 벌겋게 부어오르는손이 있다는 것 / 그건 조심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손의 주인도 알지 못하는 시간의 일이라는 것"이라는 문장이었다(《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현대문학, 2019).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우리가 흔히 미래라고부르는 시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혼자 상상하며 써 내려간 문장이었는데 그 문장을 이런 식으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복숭아가 마로 바뀌었을 뿐 부어오른 손은 시에만 존재하는 상상의 손이 아니라 진짜 내 손이었던 것이다. - P194

그런데 정말 그럴까. 묘실은 멀리에, 육체적 죽음 이후에만 가능해지는 공간일까. 묘실이 한 존재의 죽음을 담는 그릇이라면, 산 자에게도 얼마든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린 매일매일 이별하고 매일매일 죽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일력을 떼어내듯 자정이 되면 나를 한 겹씩 벗겨내고, 벗겨낸 만큼단출해진 영혼으로 또 하루를 맞이하는 존재들이니까. 투명한 허물을 담아놓는 옷장, 어제의 허물과 마주 앉아 밥 먹는 식탁, 허물 위로 허물이 쌓여가는 침대.… 그렇게 무한 증식하는 나의 작은 죽음들, 허물들의 거처인 내 작은방, 현관을 나서면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골목들, 나의 반경, 이 좁디좁은 세계가 전부묘실인 것은 아닐까. - P200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작고 푸른 구슬, 희미한 얼룩, 오래전 잊힌 무덤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아직 사람이 살아요. 가망 없어 보이지만 숨겨진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메이데이, 메이데이, 난파 구조신호를 보내며 발굴을 기다리는 섬.
내가 쓸 수 있는 건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같은 삶으로부터 기인한 문장이다. 이 거대하고도 비좁은 묘실에서 보물인 줄도 모르는 보물들과 종종거리며 살아가는 이야기.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반찬삼아 갓 지은 밥 앞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는 이야기.
고고학자나 철학자의 사유보다는 허무맹랑하겠지만 그래도 이따금 정해진 선로를 이탈해 우주 바깥으로 상상적 여행을 떠나게 하는 시의 이야기. - P201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이런 마음을 더 크게 품고있다.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나만의 ‘도량형‘을 가질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 헥타르, 그램, 마일, 톤, 미터..… 세상엔 수많은 단위들이있다. 하지만 그런 도량형들로 우리 마음의 길이, 부피, 무게를 재기에는 역부족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수치화가 아니라 형태화에 관여한다. 이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측량하고 자신만의 시각과 목소리로 변환해내는 작업. 한 시인의 개성이란 그가 어떤도량형을 가졌는지에 달려 있대도 과언이 아니다.
감정이든 풍경이든 시간이든 일단 뭔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을 계측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강보에 싸야 하는 아이를 포일이나 사포로 휘감아 내민다고 생각해보라.  - P251

이 참 달게 들렸다.
Zank라는 단어는 사전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을것이다. 이런 단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세상에 없는 단어들, 살아가는 과정에서발명되고 발견되며 나만의 사전에 새로이 등재되는단어들이 더욱더 많아지기를. 시 쓰기를 업으로 하는 만큼 사전을 늘 가까이 두고 시도 때도 없이 들춰보는 형편이지만 같은 이유로 나의 언어가 사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늘 꿈꾼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단어의 문을 열어보는 쪽으로 나의 시가 움직였으면 - P256

좋겠다" (<빚진 마음의 문장>,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현대문학, 2019)라는 고백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 단어의 문을 열면 단어가 품고 있는 거대한 우주가 시작되고, 나는 우주선을 탄 듯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배면, 후면, 이면, 내면,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세계를 유영하다 보면 삶은 한껏 자유로워지고, 나의 몸도 아름다움 쪽으로 들어 올려지는 기분이다. - P257

시인이 가진 물욕이 있다면 단어에 대한 ‘점거욕‘
이 아닐까. 한 시인을 떠올리면 곧장 연상되는 시나단어, 이미지가 있다는 건 시인으로서 얼마나 복된일인지. 내게 한강 시인은(소설가 말고 시인!)은 ‘파란돌‘의 시인이고 김혜순 시인은 ‘첫‘이라는 단어를 독점한 시인이다. 허수경 시인은 ‘레몬‘의 다른 이름이고 리베카 솔닛은 ‘살구‘의 왕이다. 과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난 학기에는 학생들과 ‘과일 시편‘을써보자며 각자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기도 했었다. 너의 과일은 무엇이니. 너는 어떤 향과 맛으로 물크러지는 사람이니. 온갖 과일의 이름이 나열되는 동안, - P257

비파나 유자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은밀히 생각했었지. 사실 레몬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건 이미 허수경 시인의 것이니까.
틈만 나면 고민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는 어떤 단어가 있지? 언젠가 동료 시인과 진행한 라이브방송에서 이 화두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 없이 ‘여름‘이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무려일 년의 사분의 일을 혼자 다 해 먹겠다는 거냐고. 욕심도 많다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려나 지난 시집 제목을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으로 삼은이상 여름의 비좁은 틈새에 발가락 하나라도 걸치고있었으면 좋겠다. 어림없는 소리라면, 이제부터라도나의 단어를 열심히 찾아 나서야겠지. - P258

그러니까 이 책은, 나만의 단어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가능성을 타진해본 연습장이자 놀이터였다. 뒤척이며 애를 쓴 원고임에도 쓸 때마다 자신이 없었음을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내가 쓰는 글엔 문학이없다고, 가볍고 하찮기만 하다고 징징댄 밤도 여럿 - P258

이다. 빨리 끝이라고 적은 뒤 나를 짓누르는 모든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됐으면 싶었다. 그러나 글쓰기에 있어 요행은 없다. 투명한 피부를 가진 사람은실핏줄까지 들여다보인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그런 글이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글. 속이지 않는 글. 그러므로 말간 글. - P259

이 책의 목적이 ‘끝‘에 있었다면, 책의 끝남과 동시에 단어들도 캄캄한 땅속에 묻힐 것이다. 그러나나의 노트에는 여전히 수십 개의 단어가 적혀 있다.
심지어 매일 한두 개씩 불어난다. 단어들은 아우성친다. 나도 써줘. 내 이야기도 해줘. 왜 나는 선택해주지 않는 거야! 쓰는 자에겐 오직 ‘끗‘의 상태만 있다. 끗은 안온함이나 홀가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끗은 ‘첫‘만큼이나 위태로운 단어다. 한 끗 차이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끗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끗은 타협하지 않는다.
끗은 무시무시하고 책임이 따르는 단어다. 끗은 매듭이 아니다. 끗은 파도처럼 밀려와 순식간에 우리 - P259

를 덮치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끝을 갈망하는 이에게 끗이라는 단어를 안겨주는건 외발자전거를 탄 곡예사에게 저글링을 시키고 불붙은 훌라후프를 통과해보라는 명령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두려울 것이다. 고독하고 힘겨울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끝!‘이라 쓰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은 이제 없다. 살아 있는 한 끝은 영원히 유예된다. 끝은 죽은 자의 것. 그러니 나는 끝이 아닌 끗의자리에서, 끗과 함께, 한 끗 차이로도 완전히 뒤집히는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고싶다. 여기 이곳, 단어들이 사방에 놓여 있는 나의 작은 놀이터에서.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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