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토지소유의 확대와 부계거주의 결혼, 그리고 가족 유형의 지속과 국가의 한 자녀 정책 사이의 모순에서 나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노년에 자녀에게 의존해야 하는 대다수 농민은 아들을 원한다. 아들이가계를 잇고, 계속 마을에 남기 때문이다. 딸은 다른 마을에 사는 다른 가족과 결혼하는데, 이는 인도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딸을 원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한 자녀 규범을 따르는 이들에게 정부가 보상을 하는 정책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농민이라면, 사적 소유의 토지를 더 갖기를, 도시인이라면 더 많은 방, 더 많은 학교와 보건 시설,
더 근대적인 시설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토지를 많이 갖게 되면 일할 노동력은 적어진다. 정부의 강압적 정책과 결합된 이런 모순, 정당의 완전한 통제 아래에 있는장려책과 벌칙의 상호작용, 더욱 강화되는 신가부장적 태도와 관계등이 모든 면에서 여성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고, 이는 여아낙태가 무섭게 증가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 P272

‘그들의 여성과 ‘우리‘ 여성에 대해 이렇게 모순되게 가치를 적용하는 배경에 자리한 논리는 우리가 식민지 초기 단계에서 보았던 것과동일하다. 자본은 식민지에서 여성을 가장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식민지 여성은 ‘자유노동자‘로 규정될 수가 없다. 그러나이렇게 생산된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서는 소비가 전문인 중심지 여성이 필요하다. 소비 혹은 상품의 구매 없이는 자본이 실현될 수없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여성이 소비자로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자본의 주된 전략의 하나가 된다. 소비노동‘(Bridges and Weinbaum, 1978)은 따라서 부유한 국가에서 크게 커지고 있다. 또한 ‘소비노동‘은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 여성의 자유 시간을 더욱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  - P273

컴퓨터와 로봇이인간 노동력을 대규모로 대신하면서, 이 소비노동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다. 몇 년 전만해도, 가정주부는 상품을 고르고, 가격을 비교하고 계산대에서 돈을 지불하고, 상품을 집으로 옮기고, 모두 풀어보고, 보관하고, 포장재를 처분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제 여성은 카운터에서 돈을 지불할 수 있기 전에 상품을 직접 바구니에 넣고, 무게를 달고, 컴퓨터에 가격을 입력하고, 가격표를 그녀의 상품에 부착해야 한다. 계산대에서 소비자에게 돈을 받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필수적인 작업을소비자가 직접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신용카드로만 구매하거나 가정 컴퓨터를 통해서 구매를 할 경우에는 이 일마저 없어질 수 있다. - P274

가정주부는 저개발국가에서도 과개발 국가에서도, ‘자유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이런 과도기에 있는 자본에게 적합한 노동력이다(v.
Werlhof, 1983). 서구의 소비자 가정주부가 자본의 실현 비용을 낮추기 위해 무보수 노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면, 식민지의 생산자 가정주부는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무보수 노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 두 범주의 여성은 ‘근대‘ 여성, 즉 ‘좋은‘ 여성 이데올로기의 조종을 더욱 크게 받을 뿐 아니라, 제3세계의 출산통제에서 이미 잘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직접적인 강제수단의 지배도 더욱 크게 받고 있다. - P275

자본을 위한 여성의 생산노동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새로운 전략은 노동유연성의 슬로건 아래 더욱 확대되고 있다. 얼마 전 인도여성이 경험한 것처럼, 여성은 이제 공식부문에서 밀려날 뿐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조직화되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생산관계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다시 통합되고 있다. 그 형식은 파트타임 일자리에서부터 계약제 노동, 재택근무, 무보수의 이웃 노동까지 다양하다. 제3세계 노동을 분해했던 이중모델이 산업화된 국가에도 점점 더 많이재도입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제3세계 여성을 자본주의적발전에 통합시키고 있는 방식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노동을 재조직하는 모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275

두 여성징단 사이의 실재적이고 구조적인 유사성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되고 있다.
서구 소비자가정주부에게는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백인을 낳으라고 하고, 식민지 생산자가정주부‘에게는 더 값싼 상품을 더 많이생산하고 더 많은 흑인을 낳는 것은 멈추라고 한다. 오늘날 서구에서부는 인종주의의 새로운 바람은 이런 모순에, 그리고 부유한 국가의주변인이 결국은 모두 제3세계 국가의 여성처럼 소모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 P276

페미니스트가 자본축적을 위한 가내노동의 기능을 발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중 일부는 일찍이 1978년에 서구 가정주부의생산 관계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농민 생산자의생산관계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v. Werlhof, 1978;Bennholdt-Thomsen, 1981; Mies, 1980).
양쪽의 생산관계는 보통은 제대로 된 자본주의의 ‘외곽에 있다고여겨진다. 이를 정통 맑스주의자들은 ‘전자본주의‘, ‘반*봉건제‘, ‘소부르주아‘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자급 생산자라고 부른다. 이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들은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기초, 보이지도 않고 임금도 받지 않는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 - P277

농업생산 과정의 일부는, 가난한 지역에서도, 환금작물과 시장 생산에 맞추어져 있고, 일정한 정도의 근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쿨리-계급의 여성은 뒤처지고 궁핍해졌다. 전동 펌프를 비롯한여러 기계가 도입되면서 쿨리-계급의 남성은 일자리를 잃었다. 많은이들이 마을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그저 빈둥거렸다. 여성이 나서서가족이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마을의 전통적인 장인인 카스트도 공산품이 도입되면서 직업을 잃어, 그들의 여성 또한 농업노동자가 되어 얼마 안 되는 일자리를 놓고 전통적인 쿨리 여성과 경쟁을 하게 되었고, 임금은 더욱 낮아졌다. - P280

토지없고 가난한 인도 여성의 노동과 우유가 빨려 나가가는 이런과정, 오웰식의 신어 전통에서 흥건하게 되는 것은 도시이고, 진액이빨려나가는 것은 촌락과 여성이다) 우유홍수작전‘이라고 불리는 과정에 대한 분석은 인도에서 자본주의 우유 생산에 연루되어 있는 가난한 여성에 대한 극도의 착취와 유럽 공공시장에서 우유의 과대생산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짧게라도 살펴보아야 온전한 분석이 될수 있을 것이다. 수백 가지의 치즈, 요구르트, 우유제품, 크림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 혹은 프랑스 가정주부가 아바마와 같은 여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반적인 서구 소비자가정주부는 ‘우유홍수작전‘ 이전에는 인도의 마을에서 생산된 우유가 그 마을에서도 소비되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이제 인도산 우유가 도시로 수출된다. 서구의 소비자 가정주부는 아바마에 대한 착취가 유럽 공공시장에서 바다처럼 널려 있는 우유와 산처럼 쌓여 있는 버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우유홍수작전‘이 시작된 이유이다. - P285

전자산업의 아시아 여성은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이어져있는 세계적 조립라인에 위치해 있다. 이 조립라인 위에서 아시아 여성은 가장 단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건강에 해로운 일을 한다. 이들은 현미경을 통해 작은 칩을 갖고 있는머리카락처럼 가는 와이어들을 들여다보면서 일일이 용접하여 하나의 통합된 회로로 만들어야 한다. 이 전자부품들은 새로운 컴퓨터와자동장치에게 지시를 내리는 실제 ‘두뇌‘들이다. 미국과 일본의 기업은심리적 조정 방식과 직접적인 강제 방식을 결합하여 노동력을 교묘하게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 공장들에서 노동조합 활동이금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말레이시아에서, 여성이 노동조합에가입한 것이 알려지면, 해고된다. - P293

 ‘비물질 상품‘ 생산의 새로운 트렌드, 우리 시장은 물질 상품으로 이미 넘쳐나고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트렌드를 고려해보면, 제3세계 여성의 몸을 산업화된 국가로 수출하는 무역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할수 있다. 이와 함께 이 시장에서 성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이고 가학적인 경향도 더 커질 것이다. 인종주의는 초기 식민주의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이 산업의 부분으로 한 몫을 해왔다. ‘흑인‘ 혹은 ‘황인‘ 여성이 점점 더 선호되었던 것은 이국적인 성적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사디즘과 폭력의 대상으로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디오 산업은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번성하는데, 그 여성 중 다수는 유색인 여성이다. 여성에 대한 고문과 폭력에 대한 금기는 유색여성과 관련해서 제일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백인 여성도 백인 남성의 성적 학대에 대한 누를 수 없는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점점 더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 P303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국제노동분업을 바라보려며 항상 동전의 양면을 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지구 양쪽의 여성은세계 시장에 의해, 그리고 국내자본과 국제자본에 의해, 구분되어 있으면서 또 실제로는 연결되어 있다. 이 구분에서는 여성을 한 편에서는 제3세계의 보이지 않는 생산자로, 다른 한 편에서는 개별화되어있고 잘 보이는, 그러나 의존적인 소비자(가정주부)로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체적인 전략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이데올로기, 즉 여성을 기본적으로가정주부이자 성적인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에 기초해 있다. 여성을 계급과 식민주의에 따라 구조적으로 구분하는 것과 결합된 이런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없다면, 이런 전략은 자본에 그리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여성이 산업화된 국가에서 시장의 확대를 위해 점점 더 성 - P305

적 대상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시장들은 정체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전략에서 남성은 ‘자본의 에이전트‘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Mies, 1982). 그러나 이런 역할은 국제노동분업에서 지역과 인종뿐 아니라 계급에 따라서도 구분되어야 한다. 백인 남성 유력자 혹은 자본가만이 아니라 백인 남성 약자 혹은 노동자도 자신의 여성과 제3세계의 여성을 착취하는 것을 통해 이득을 본다.
황인 혹은 흑인 남성 유력자만이 아니라 흑인 혹은 황인 남성 약자도
‘자신의‘ 여성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득을 본다. 백인여성 유력자와 약자 또한 식민지의 브라운 흑인 남성과 여성 약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이득을 공유한다. 발전의 상징인 진짜 서구 가정주부의 지위를 갈망하는, 그리고 제3세계 자본주의의 추동자로 보이는 식민지의 브라운혹은 흑인 여성 유력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 P306

그러나 남성과 대조적으로, 여성은, 백인이든 흑인이든 간에, 점점 더 자신의 인간적 존엄과 삶을 지키기보다는 창녀가 되거나 가정주부가 되는 ‘영광‘을 택하도록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제3세계의 가난한 여성(영세농이나 주변화된 도시여성)을 밑바닥에 놓은 신국제질서라고 불리는 이 통합된 착취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부유한 국가의 여성에게 객관적으로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제3세계의 가난한 여성은 산업화된 국가의 여성에게도 ‘미래의 이미지‘(
Werlhof, 1983)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래는 제3세계 자매에게 적용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과 방법으로, 즉 새로운 비공식 부문에서 ‘보이지 않게 노동하고, 생계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팔면서 발전 속으로통합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여성 사이에서도 이미 시작되었다. - P306

여성이 ‘개발로 통합되는‘ 혹은 전지구적 차원의 자본축적 과정아래 종속되는 다양한 생산관계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건 간에, 한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통합은 그들이 ‘자유‘ 임금노동자 혹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발기구들이 남발하는 미사여구처럼, ‘자유‘ 기업가가 된 것도 아니다. ‘진짜‘ 가정주부도 아니다. 앞에서 묘사한 모든 생산관계, 노동관계의 공통된 특징은 여성이 착취 혹은 극한의 착취를 당하는 과정에서 구조적인 혹은 직접적인 폭력과 강제가사용된다는 점이다.
비정기적으로 농업노동을 하는 인도 여성은 자본주의적 농장 때문에 자신에게 일과 소득을 보장해주었던 전통적인 마을의 규범이 깨져나가는 것을 목도했다. 여성이 법적인 최저임금을 요구할 경우 그들은 더욱 더 직접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 P308

토지개혁을 통해 합법적으로 할당받은 토지를 개간하려하면 약자였던 농민 여성은 강간을 당하고, 그들의 오두막이 불탔다. 그녀의 남편은 구타를 당했다. 남성은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되기보다는 점점 더 부채가 많은 노동자가 되어갔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인도의 축산업에서 가난한 농촌 여성은 우유 생산과 관련한 모든 노동을 억지로해야 했다. 그러나 축산업으로 생긴 소득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우유에서 나온 소득의 50%는 융자해 준 은행으로 자동 입금되었다.
이들 여성의 노동력은 이미 은행과 국가 소유의 축산업개발회사에게담보로 잡혀 있는 셈이어서, 이 여성들은 자신이 번 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우유 소득의 나머지는 남편이 전유한다. 자본을 축적하는기구들이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편하게 여성 노동력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 P309

제3세계와 제1세계 성산업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잔혹행위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조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이런 생산관계가만연한 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형태의 노예노동이다.
폭력과 억압에 기초한 이런 모든 생산관계에서 우리는 남성(아버지, 형제, 남편, 포주, 아들), 가부장적 가족, 국가, 자본가 기업 사이의상호작용을 볼 수 있다.
모든 여성노동관계에 만연한 이런 사례와 폭력과 억압의 현실을바라보면 이것이 이렇게 필수적인 것인지, 혹은 이런 폭력을 다른, 좀더 우연적 원인을 통해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질 - P310

에 달하기에 앞서 나는 최근 제3세계의 패스트에 의해 알려지게 된 여성에 대한 몇 가지 폭력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로 인도의 상황에 대해 집중하려고 한다. 인도에서는 1970년대 말 이래 베이버스트 단체가 여성에 대한 공공연하고 특별한 폭력에 대해 반대하는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결혼지참금에 대한 과도한 요구 지불금을 충분히 가져오지 않은 신부에 대한 살해, 성별감식을 통한 내내 여아 살해 등과 증가하는 강간, 성폭력, 성적 잔혹행위 등에 반대하는 운동이시작되었다. - P311

그러나 1978-1980년 사이 상황은 변화했다. 봄베이, 델리, 하이네라바드 등 대도시에서 신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은 여성단체들이 결혼지참금을 충분히 가지오지 않은 신부에 대한 살해와 강간에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여성에 대한 폭력이 멀리있는 시골에서만이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분명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 역시 갈수록 커지는 지참금에 대한 요구 때문에 강간, 성희롱, 특히 성적 학대와 그런과정에서 결국 발생하게 되는 살해의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것을 이제는 깨달아야 했다. - P312

여아낙태는 일찍이 1974년부터 인도인구정책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파이 박사가 옹호하기 시작했다(Balasubrahmanyan, 1982:1725). 그러나 인도 ‘인구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아낙태를 주장한 것이 남성 의사나 과학자만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에 적용하는 쿠마르DharmaKumar와 같은 여성도 있다. 경제학자 바르단은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여성에게 적대적이게 된 것은 농업에서 여성의 경제참여가 변화하면서 나타난 직접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는데(Bardhan,1983), 이런 주장에 대해 쿠마르는 이렇게 썼다. - P323

그러나 왜 이런 경제 논리를 더 철저하게 적용하지 않는가? 임신계획에서 성감별은 여성의 공급을 줄일 것이다. 그들은 좀 더 가치 있는존재로 여겨질 것이고,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이며, 더 오래 살게될 것이다. 우리는 여아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고, 인도 전역에서 그 값을 평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을 갖고 있다. 카스트, 지역,
종교 등 다양한 장벽이 여성의 이동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북부지역에서 결혼지참금이 하락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Kumar, 1983:63). - P323

그녀는 양수천자와 여아낙태가 여아 신생아에 대한 살해보다 훨씬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옹호했다. ‘여아 신생아를 살해하거나 여아를 학대하는 것보다는 여아낙태가 나은 것 아닌가? 여성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만한 어떤 대안이 있는가?(Kumar, 1983:64).
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암울한 여성혐오적인 표현은 여성 스스로가 체화시켜 이를 다른 여성에게 적대적으로 표현한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쿠마르가 위에서 한 조언 같은 암울한 표현은 다시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관계는 언급도 되지 않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변화노력을 옹호한것도 없다. 여성 스스로 절명하게 하는 것만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어있다. 이는 우리에게 빈민을 섬멸함으로서 빈곤을 퇴치하는 것을 제안한 인구통제기구의 논리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는 그보다 더 끔찍하다. 여성이 여성 살해를 최종 해결책으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24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투라의 사건은 한 사례일 뿐이다. 이 한 사건을 끄집어내는것은 모든 강간사건의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강간법을 문제 삼는 것이다. 왜유죄판결이 그렇게도 드문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도 형법 아래에서는 강간을 증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현실에 없는 것인 양 눈감아왔던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지금이 강간 문제를본격적으로 대면해야 할 때가 아닌가?
강간은 항상, 어느 곳에서나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때가 아닌가? 모든 여성은, 노소에 관계없이, 매력이 있든 없든, ‘멋지든‘ ‘멋지지 않든, 부자든 가난하든,
잠재적 피해자라는 것을 아는가? 당신이 마투라가 아니고, 문맹의 농장 노동자가 아니고, 강간을 당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인가. 이 국가의 마투라들은 이중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이며, 정의가 소수의 특권인 국가에서 억압받는 부문에 이미 속해있다. 여성은 개인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 강간 테러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집단강간은 힘을 과시하는 하나의 무기로 자주 사용된다. 사례를 찾기 위해 멀리 볼 필요도 없다. ‘1974년 철도파업 철도노동자 아내들에게 일어난 일을 잊었는가? 찬디가르, 보즈푸르, 아그라의 달리트 여성들에게 벌어졌던 일은? 혹은 알리가르의 잠세드푸르의무슬림 여성에게, 그리고 거의 모든 지역 반란에서 일어났던 일은? 인도군대가 미조와네팔리 여성들에게 저지른 일은?
- P329

당신 앞에 있는 현실을 깨닫기 위해 강간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이미 알고 모든 여성이 아는 거 아닌가? 영화를 보면 생생한 강간 장면과 관객의 야유와 휘파람을 부르는 장면들이 당신을 불쾌하게 한다. 길을 걸을 때, 버스와 기차를 타고 갈 때끝 조롱하고 비웃는 소리를 무시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이 당신의 몸을 더돕는다. 당신이 부탁한 것인가? 당신이 유혹한 것인가?
만약 내일 강간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당신은 남성이고, 당신의 자매, 딸혹은 어머니가 강간을 당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 주변에 흩어져있는 이야기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강간은 여성이 부탁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하는점을 알게 된다. 봄베이에서 한 해 보고되는 8백 건의 사건 중 하나가 되어 내가 강간당했다고말할 것인가 왜냐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문어는 8천 건의 사건 중 하나가 될 것인가 신고되는사진보다 묻히는 사건이 10 12배에 달한다.
그렇다. 참여자 숫자에 안전이 있고, 그것이 힘이다. 이제 바꾸어 나가자 참여하라 강간이 만연한 현실을 직면하고,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하자 :) 사건에 대한 재심을 즉각 시작하라. 2) 강간법을 개정하라.
우리가 시작하면, 상황은 바뀔 수 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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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어머니 없이는, 어머니 대지 없이는 어떤 가부장제도 존재할 수 없다(Ehrenreich/English, 1979:7~8). 자본주의가 대규모의 정복과 식민지 강탈에 기초하여 세계체제로 발전하고, 세계시장이 등장하면서(Wallerstein, 1974), 새로운 가부장은 착취하고싶은 대상을 외부화하거나 혹은 외부로 축출할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는 더 이상 경제나 사회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았다. 식민지는 ‘문명화된 사회의 밖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유럽 정복자와 침략자가 ‘침투한 그 ‘처녀지‘와 같이, 이들 토지와 주민도 ‘자연으로 여겨졌다. 이들은 야생의 야만적인 자연으로, 남성 문명인의 착취와 이용을 기다리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 P176

가부장과 자연 사이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이원성, 혹은 양극화를 통해 마침내 철저하고 영구적으로 파괴적인 힘을 발전시킬 수 있게되었다. 이제 과학과 기술은 남성이 자신을 여성에게서 만이 아니라자연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생산력이 되었다.
머천트는 유기체로서의 자연을 파괴한 것 - 그리고 근대과학과기술이 발전하면서, 남성 과학자가 새로운 고위 성직자로 성장한 것은 약 4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전개되었던 마녀사냥 기간 동안 여성에 대한 폭력적 공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나란히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 P177

근대 유럽 가부장은 처음에는 아메리카, 후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볼리비아, 멕시코, 페루의 광산에서 금과 은을, 다른영토에서 ‘원자재‘와 사치품을 추출해내면서 유럽 어머니 대지로부터자신을 독립시켰다. 한편 이들은 마녀와 함께 여성의 피임과 출산통제에 대한 지식을 박탈해가면서, 노동력 생산 면에서 유럽여성에게 의존했던 것에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또한 아프리카의 남성과 여성을 노예제 아래로 종속시켜서 아메리카와 카리브의 대농장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 P177

이런 ‘발전‘의 법칙은 언제나 모순적인 것이지, 점진적인 것이 아니다. 일부의 발전은 다른 쪽의 퇴보를 의미한다. 일부의 ‘진화‘는 다른 이들에게 ‘퇴화‘를 의미한다. 일부의 ‘인간화는 다른 이들의 ‘비인간화‘를 의미한다. 일부의 생산력 발전은 다른이들의 저발전과 퇴보를 의미한다. 일부의 발전은 다른 이들의 추락을의미한다. 일부의 부는 다른 이들의 빈곤을 의미한다. 한 방향으로의발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약탈적이고 가부장적인생산양식은 상호적이지 않고 착취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모두를 위한 전반적인 진보, ‘통화침투(낙수효과)‘를 통한 발전, 모두를 위한 발전은 가능하지 않다.
엥겔스는 진보와 퇴보 사이의 이런 대립적인 관계를 사유재산의등장과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 때문이라고 했다.  - P178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이, 지배계급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회 전체에게도 좋은 것이 되어야한다"(Engels, 1976:333).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 전략의 논리적 결함이다. 모순적이고 착취적인 관계에서, 착취자의 특권이 모두의 특권이 될 수는 없다. 중심부의 부가 식민지 착취에 기초한 것이라면, 식민지는 자신도 식민지를 갖지 않는 이상 부를 획득할 수 없다. 남성의 해방이 여성의 종속에 기초한 것이라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할 수 없다. 여기에는타인을 착취할 권리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을 위한 페미니스트의 전략은 이런 퇴보적 진보의 관계들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남성의여성에 대한 착취, 남성의 자연에 대한 착취, 식민주의자의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착취,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를 모두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착취가 일부 사람들의 전진(발전,
진화, 진보, 인간화 등)을 위한 조건으로 남아있는 한, 페미니스트는해방 혹은 ‘사회주의‘를 말할 수 없다. - P179

마녀사냥이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단순히 새로운자본주의 세력에 직면하면서 쇠퇴한 구질서가 낳은 것이거나 시대를초월한 남성 가학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여성의 반란에 대해 새로운남성 지배 계급이 내놓은 반응으로 보인다. ‘쫓겨난‘ 가난한 여성, 즉, 생계수단과 기술을 박탈당한 이들은, 박탈한 이들에게 맞서 싸웠다.
마녀는 ‘마녀의 안식일에 주기적으로 만나는 조직된 분파였으며,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이 모여 주인과 농노가 없는 새로운 자유로운 사회를 이미 연습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 여성이 마녀임을 부인하면서 다른 모든 혐의를 부인해도, 그녀는 고문을 받고 결국은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마녀재판은 꼼꼼하고 용의주도한 법적 과정을 따랐다. 개신교 국가들에는 교회 밖에 마녀재판을 전담하는 위원회와 판무관이 있었다. 사제는 법정과 계속협력했고, 판사에게 영향을 미쳤다. - P188

산파를 마녀로 기소하고 화형에 처하는 것은 근대 과학의 등장과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의술이 전문직이 되었고, 의학이 ‘자연과학‘으로발전했으며, 과학과 근대 경제가 발달했다. 마녀사냥꾼의 고문실은 실험실이었다. 이곳에서 인간의 몸, 주로 여성 몸의 조직, 구조, 내성 등을 탐구했다. 근대 의학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남성 헤게모니는 부서지고, 망가지고, 찢기고, 훼손되다가 마침내 화형을 당한 수백만 여성의몸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는 계획적인 분업을 통해 조직적인 마녀 대학살과 테러를 진행했다. 교회에서 파견된 이들은 마녀를 식별해내고, 신학적논리를 제공하면서 심문을 주도했다. 국가의 ‘세속 부대‘는 고문을 수행하고 마지막으로 마녀를 장작더미 위에서 처형하는 일을 했다.
마녀의 처형은 근대 사회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지, 통념대로, 비합리적인 ‘어두운‘ 중세의 유물 때문은 아니었다.  - P192

여성과 자연에 대한 이 새로운 과학적이고 가부장적인 지배를 통해 이득을 본 계급은 발전하고 있던 개신교, 상인 자본가 계급, 광업기업가, 의류업계 자본가 등 이었다. 이 계급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능력에 대해 갖고 있던 자율성을 와해시키고 여성들이 더 많은 노동자를 낳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비슷하게 자연도 이 계급이 착취하여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거대한 저장소로 바꾸어 버렸다.
따라서 교회, 국가, 신흥 자본가 계급, 근대 과학자는 협력하여 여성과 자연을 폭력적으로 종속시켰다. 19세기의 연약한 빅토리아 여성은 이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조해낸 여성적 자연상을 따라 폭력적 수단을 통해 만들어낸 산물이다(Ehrenreich, English, 1979). - P202

이들 대농장주의 동력은 카리브제도에서 프랑스인 혹은 영국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득을 올리는 것이다. 스톨러는 여성에 대한네덜란드 식민지 정책의 변동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이동력이라고말한다. 식민지 기록에 따르면, ‘결혼 관계, 질병, 성매매, 노동 분규 등의 문제는 수익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첫 10년 동안기혼 노동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큰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결혼 관계를 취득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Stoler, 1982:97).
확실히, 여성을 창녀로 만드는 것이 값싼 방법이었다. 그러나 결국북부 수마트라 여성 노동자의 거의 절반이 성병에 걸려 회사 비용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하게 되자, 농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결혼을 장려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되었다. 이것이 1920년대와 3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첫 단계에서 이주 여성은 대농장에서 모든 힘든 일들을 충분히해냈다. 그러나 이들이 가정주부가 되어감에 따라 여성 주민은 농장의 임금노동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 P218

네덜란드 식민주의자의 경우, 이윤을 창출한다는 철저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자신의 고국에 있는 ‘문명화된 여성과 수마트라의
‘야만적‘ 여성에 대한 모순적인 가치관과 정책이 이윤을 보장해주는최고의 메커니즘을 이루었다. 두 집단의 여성에게 정 반대로 대조되는두 가지 가치관을 적용했지만, 이것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성매매는 여성을 창녀로 모집하는 것이 더 이상 이득이 되지 않을 때에만 공론화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네덜란드 가정주부의 등장을 주목해야 한다. ‘고국에서 가족과 가정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 것은 네덜란드 식민지의 농장 노동자 사이에서 가족과 가정을 파괴한 것과 그저 일시적으로 겹쳤던 것이 아니라, 인과 관계로연결되어 있었다. - P219

많은 경우, 농장 경영자는 스스로 법을 정하여 완고하게 저항하는 여성을 잔인하게 벌주었다. 헤레로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카리브제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여성은 식민화 과정에서 무력한 희생자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식민지 생산관계 내에서 자신의 상대적인 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그 힘을 자신의 입장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독일 농장 경영자의 말에서 주목할 점은 출산파업을 한 것은 헤레로 여성인데, 농장 경영자는 헤레로인(남성)만을 언급한다. 그들의 보고서에서도 식민지의 백인 남성은 종속민 여성이 매우 주체적이고 주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모든 ‘원주민‘은 ‘야만인‘이고 야생의 자연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야만적인 것은 ‘원주민‘ 여성이었다. - P225

가정성과 개인화 경향은 19세기와 20세기 자본주의중심부에서 좋은 여성, 즉 어머니와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되는 데 확실히 큰 영향을 미쳤다. 가정이 여성의 영역, 소비와 ‘사랑‘의 사적인 영역이 되면서, 남성이 지배하는 생산과 축적의 영역에서 배제된 은신처가 되었다. 다음에는, ‘사랑‘과 소비에 주로 관심이 있고, 남성 ‘부양자에게 의존적이고 가정화되고 개인적 소유가 된 여성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이 어떻게 보편화되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이런 여성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처음에는 제대로 된부르주아 사이에서, 이후에는 이른바 소부르주아로, 그리고 마침내 노동계급 혹은 프롤레타리아까지 점차로 확대되었다. - P232

모두 알다시피, 여성과 어린이가 초기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상당규모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값싸고 가장 다루기 쉬운 노동력이었다. 어떤 노동자도 그토록 착취당하지는 않았다. 자본가는 아이가 있는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임금도 마다않고 일할 것임을 잘알았다. 자본가에게 여성은 남성보다 문제가 덜 되었다. 직인 협회나길드부터 내려온 조직화의 전통을 가진 기술직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아직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 노동력은 저렴했다. 노동조직에서 여성은 일찍이 내쳐졌고, 아직 새로운 조직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협상력도 갖지 못했다. 자본가에게는 여성을 고용하는 것이 더이득이 되고 또 덜 위험했다. (1830년 무렵)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고상업 자본주의가 쇠퇴하면서, 여성과 아동 노동에 대한 지나친 착취가 문제가 되었다. 과로와 경악할만한 노동 조건 때문에 건강을 해친여성은 건강한 자녀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강한 노동자와 군인을 키워낼 수도 없었다. 19세기 동안 몇 차례의 전쟁을 겪고나서야 인류는이런 사태를 깨닫게 되었다. - P235

자본축적과정에서 가사노동의 기능은 페미니스트가 최근 광범하게 논의해왔다. 여기서 이 부분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가정주부는자본가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외부화, 혹은 외부영역화한 것이라는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여성 노동이 자연자원처럼, 공기나 물처럼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가정주부는 이 숨은 노동자의 완전한 원자화와 파괴를의미한다. 이는 여성의 정치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의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정주부와 임금노동 부양자의 관계는 자유롭지 않은 노동자가 ‘자유‘ 프롤레타리아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자유‘는 가정주부의 자유롭지않음에 기초해 있다.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여성의 가정주부화에기초해 있다. - P245

따라서 힘이 약한 백인 남성도 자신의 식민지‘, 즉 가족과 가정에길들여진 가정주부를 갖게 되었다.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마침내 ‘문명화된 시민의 지위에 오르고, ‘문화국가의 온전한 구성원이 된것이 그 표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장에는 같은 계급 여성의 종속과가정주부라는 희생이 필요했다. 부르주아 법이 노동계급까지 확대되는 것은 무산자 가정에서도 남성이 지배자이자 주인이 된다는 것을의미했다.
식민화와 가정주부의 두 과정이 밀접하게 인과관계로 연결되어있다고 하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외부 식민지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
전에는 직접 식민지를 통해, 현재는 새로운 국제노동분업을 통한 착취가 없이는 남성 부양자가 부양하는 핵가족과 여성이라는 ‘내부 식민지‘가 수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 P245

구 국제분업은 식민지 혹은 식민지에서 원료를 생산하고, 이원료가 유럽과 미국, 나중에는 일본 등 산업화된 국가로 수송되고, 공산품으로 바뀌어 산업화된 국가들 자체에서 판매되거나 수출되는 것을의미했다. 이 국제분업 초기에 기계를 통해 생산된 상품, 특히 모두 기계로 제작한 직물이 강제로 식민지 시장에 던져지기도 했다. 그럴 경우, 공산품 직물이 더 저렴하기 때문에 지역 고유의 직물업이 몰락하게 되었다. 인도 직물산업이 영국의 공산품 의류가 들어오면서 파괴된것은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예이다(Dutt, 1970). - P248

그러나 1970년대에 유럽, 미국, 일본의 대기업과 다국적기업의 경영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경기호황의 시기가 끝나고 있음을알게 되었다. 그동안 계속되는 경제 성장은 산업화된 국가의 국민에게 하나의 도그마로 홍보되었고, 국민은 이를 당연시했는데, 이제 그런 시대가 끝나게 된 것이다. 경영자들은 만약 이 경기 후퇴가 일시적위기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시대 전반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세계경제체제, 혹은 국제노동분업을 바꾸어 지속적인 성장이자본주의 국가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절박했다.  - P249

이 새로운 모델은 노동집약적인, 즉 노동비가 주로 많이 드는 생산과정은 식민지로, 이른바 개발도상국, 혹은 제3세계 등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공장 전체를이 국가들로 옮겨서 임금이 낮은 제3세계의 노동자가 서구의 대중을위한 공산품 소비재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개발도상국의농업에 신기술을 도입하여 근대화하고, 이를 통해 부유한 국가로 수출될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도록 했다(Fröbel et al, 1980).
제3세계 국가의 이런 부분적 산업화로 자유무역지대이거나 자유생산지대 혹은 세계시장공장들에 세워진 산업에 대해 제3세계 국가가 큰통제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한국, 싱가포르,
멕시코, 스리랑카, 태국 등에 자리한 공장은 대개 미국, 독일, 일본의 다국적 기업이었다. 특히 옮겨간 산업의 생산과정은 여전히 노동집약적이어서, 아직 높은 수준으로 합리화되지 않은 분야였다.  - P249

말레이시아에 있는 미국 반도체 회사인 인텔의 인사담당관은 이렇게말한다. ‘우리가 소녀들을 고용하는 것은 이들이 에너지가 좀 덜 들고,
좀 더 규율이 있으며, 다루기 쉽기 때문이다‘(Grossman, 1979; 2). 제3세계투자의 아이티 지부는 독일 투자자를 유인하기 위해 아름다운아이티 여성을 보여주는 홍보물을 만들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넣었다. ‘당신의 독일 마르크를 불려줄 더 많은 노동력이 여기 있다. 미화1달러만 있으면, 여성은 당신을 위해 8시간 동안 즐겁게 일할 것이다.
그녀의 수백 명의 친구도 그렇게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Fröbel et al,
1977:528, 영어번역은 저자).
이 광고에는 성차별주의가 분명하게 깔려 있다. 정부가 포주처럼젊은 여성을 외국 투자자에게 제공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실,
성매매는 관광산업의 일부일 뿐 아니라, 제3세계 국가에서 기업운영계획의 일부이기도 하다. - P257

여성을 개발에 포함시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여성을 이른바 소득을유발하는 활동, 즉 시장지향적인 생산으로 진입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이 자신의 자급 생산을 확대하는 것, 토지에 대해 더 많은권한을 갖도록 노력하고, 좀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옷 등 자신의 소비를 위해 좀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발 전략에서 소득은 현금 소득을 의미한다. 현금 소득은 여성이 시장에 팔 수 있는 것을 생산할 때에만 발생할 수 있다. 제3세계 가난한 여성 사이에서 구매력이 낮기 때문에, 그들은 구매력이 있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생산해야 한다. 구매력 있는 이들은 자국의 도시나 서구에서 산다. 여성노동을 개발에 포함시키는 전략은 수출 혹은 시장지향적 생산으로 향하게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제3세계 여성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구매할 수 있는 것을 생산하게 된다. - P259

이 전략의 또 다른 특징은 제3세계 여성을 노동자가 아니라 가정주부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으로 규정된다. 가정주부 이데올로기와 핵가족 모델이 진보의 표식으로 보편화되면서 여성이 하는 모든 노동, 그것이 공식 부문이든 비공식부문이든 간에, 여성의 모든 노동을 보조적 일, 여성의 소득을 이른바 주된 부양자‘ 남편의 소득을 보조하는 소득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가정주부의 경제 논리를 통해 노동력 비용이 크게 줄었다. 이것이 국제자본과 그 대변인이 오늘날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전략은, 앞서 본 것처럼,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와 20세기에 처 - P259

음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가정주부는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를만들어 내기 위한 필수적인 보완제였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노동자가
‘일하지 않는‘ 가정주부를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통해) 감당할 수 있었던 반면에, 제3세계 남성 다수는 가정주부가 ‘일하지 않고 집에 머무를 수 있게 해줄 만한 지위를 절대 가질 수 없었다. 여성을 위해 소득을 유발하는 전략을 쓴다는 것은 제3세계 여성 대다수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이미지에 기초한 발상이다. 카리브제도에서는 남성 부양자 가장이 없는 가구가 전체의 3분의 1 이상이다(Reddock, 1984 참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특히 시골 지역에서 여성 가장의 가구, 여성이 경제를 책임지는 가구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Youssef/Hetler, 1984). 그 이유로 수출을 위한 환금작물 생산으로의 변화, 농업의 기계화, 가난한 사람 중토지 상실한 사람이 증가하면서 생긴 토지보유시스템의 변화 등을 들수 있다.  - P260

생산자로서의 여성과 어머니이자 소비자로서의 여성을 분리하는것은 또 다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신국제분업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다. 부유한 산업화된 국가에서 여성은 점점 더 ‘공식적 분야‘에서 쫓겨나면서, 주로 가족을 연상시키는 존재가 된다. 여성이 남편과 자녀를 위한 ‘재생산‘ 노동을 하고 소비하는 것이 그들의 ‘타고난‘
운명이 된다. 이에 반해 제3세계 여성의 소비자와 출산자로서의 역할은 바람직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소모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60년대 말부터 서구의 정부들, 특히 미국과 유엔조직들, 그리고 비정부기구들까지 내놓은 선언문을 살펴보면, 제3세계 여성을 잠재적인 ‘번식자‘ 와 소비자로 보는 것은 전 세계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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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는다. 매번 새롭고 다양해서 해마다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벌써 14회라니 그 무섭다는 중2의 나이가 되었네.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정선임작가의 요카타‘가 좋았다. 무엇보다 잘 읽혔고, (읽기 어려운 소설들이 많아지고 있다.) 무겁게 끌고 가지 않으면서 여운이 깊다.

흑점의 배경이 검붉은 빛에서 노을빛으로, 그리고 복숭앗빛으로 점차 옅어진다.
외출복을 입은 채 이부자리도 없이 누워 있다. 두 시간 전 일어나 집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성당에 다녀왔다. 미사를 빼놓지 않고, 기도를 오래 드리는 내가 다들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겠지만엘리사벳 수녀의 끈질긴 권유에도 세례는 받지 않았다. 깨어 있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곳이어서 성당을 좋아한다. 이렇게 눈꺼풀 안쪽을 들여다보다 설핏 잠이 들기도 한다. 낱말 공부를 하다가도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으면 진이 나를 흔들어 깨우곤 한다. 눈꺼풀 안쪽의 색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본적은 없다. 아버지, 순덕이와 정순이, 남편들, 그리고 진에게도, 동이 완전히 트자 흑점은 더 선명해진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점에서 시작되어 길게 늘어진 검은 실처럼 움직인다. 마치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누군가의 그림자 같다. - P205

고개를 돌리다 진이 벽에 오려붙여놓은 신문기사를 본다. 모르는 글자를 건너뛰어 ‘서연화‘ 이름 석 자를 찾는다. 이름 옆 괄호안 ‘100‘이라는 숫자를 쳐다본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웃고 있다. 방안에 거울을 두지 않은 지 오래다. 내 모습을 볼 기회가 없어서인지 사진은 볼 때마다 낯설다. 작은 사진인데도 눈가와입가에 주름이 선명하다. 바닷바람을 맞아 까맣게 탄 얼굴은 검버섯으로 뒤덮였다. 하얗게 센 머리,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굽은 등. 정말 영락없이 백 살의 노파다.
백 살이나 아흔여섯 살이나 그게 그거지. - P208

"바다는 똑같겠지. 바다는 변하질 않으니까. 그죠?"
이 말에도 굳이 대꾸하지 않는다. 라면을 다 먹고 고말순이 돌아간 뒤 다시 목욕탕 의자에 앉아 미역 줄기를 찢는다. 난센스 퀴즈 코너가 끝나면 진행자는 상식이나 역사 문제를 내곤 한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해 준비한 퀴즈입니다. 대표적인 신여성이죠. 나혜석거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1번 수원, 2번 부산,
3번 인천, 4번 밀양 정답을 아시는 분은 지금 문자를 보내주세요."
본래는 별 관심 없이 흘려듣지만 인천과 여성이라는 말에 귀를기울인다. 정답은 1번 수원이었다. 진행자는 답에 대한 설명과 함께 나혜석의 생애를 들려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죽었지만 파리며 독일이며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다녔다.
후지타의 서재 한쪽 벽면에 붙어 있던, 다다미 넉장 반 정도크기의 커다란 세계지도가 떠오른다. 후지타는 자신의 고향 나가사키의 위치를 알려주며 붉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뒤로 나는서재에 들어갈 때면 한반도와 나가사키 사이에 놓인 한 뼘 정도의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바다 너머의 끝도 없는 바다들을. - P213

과거의 기억은 짙은 해무가 낀 것처럼 부옇다. 머릿속에서는인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진처럼 윤곽만이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촉감으로, 냄새로, 통증 같은 것으로 몸이 선명하게 기억하는순간이 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도시락을 건네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른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발갛게 달아올라있던 볼의 열기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낮이었고 주위가 너무 환해 빨리 땅거미가 져 어두워졌으면 했던 마음도 갑자기 뺨이 불타듯 뜨거워져 손을 대본다. 다듬지 않은 미역처럼 거칠고 해삼처럼 흐물흐물하다. - P224

이상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석 줄짜리 시였다. 가운데 부분이 기억나질 않았다. 유독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닳아 있는 책 한 권을 찾아내 펼쳤다. 후지타가 자주 읽던 시집이었다. 종이 위 검은 점과 선의 행렬로만 보이는 그것들의 의미를 끝내 알지 못했다. 몰래 성경을 숨겨놨던 후지타는 전쟁이 길어질 무렵,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주 기도했다. 후지타가 재산을 처분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동네에 퍼져 있었다. 그의 기도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면서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날은 조금이었고, 마침 낙지를 잡기에 좋은 물때였다.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양동이를 들고 개펄로 나갔다. 개펄을마구 헤집으며 바지락을 했고, 낙지와 게와 같이 살아 있는 것들로 양동이를 가득 채웠다. 그러다 모두 쏟아버리고, 꿈틀거리는 낙지와 도망가는 게들을 지켜봤다. - P228

이상했다. 살아서 자꾸만 움직이는 것이.
양동이를 던지고 개펄에 털썩 주저앉아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노을빛을 닮은 눈꺼풀 안을 들여다보면서 흑점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개펄에서 걸어나오다 뒤를 돌아보니 푹푹 빠지며 걸어왔던 발자국도, 흉하게 파헤쳐진 자리와 들쑤셔진 자국도 사라져 있었다. 밀물이 밀려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죽은 것들도, 살아 있는 것들도 바다는 휩쓸어갔다. - P228

서재에 있던 책들은 남김없이 내다팔았고, 그후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바다가 데려간 것은 잊었고 내어준 것을 팔아 살았다. 가끔 이름이 불릴 때마다 구멍에 숨어 있다 잡혀 나온 게들처럼 당황했다. 하지만 또다시 구멍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다행이었지. 요카타, 요카타.
만조다. 물이 들어오고 있다. 보행로 위에서 관광객 하나가 새우깡 봉지를 뜯어 마구 뿌리자 갈매기떼가 몰려온다. 새우깡은바닷물로 낙하하기 전에 갈매기 입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벼운 습자지 한 장 같은 오늘을 서둘러 뜯어내고 아침을 기다리고 싶다. 내일이면 오이소박이는 좀더 익어 맛있을 것이다. 해가 지기전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다시 눈을 감고 그림자를 쫓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 P229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익숙한 장소에서도 방향을헷갈릴 때가 많은데 혼자 여행을 간다는 건 당연히 길을 잃겠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또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우왕좌왕하다가 목적지가 아니었던 곳에 도착할 테니. 다만 알고 있는 것은 다음에도기꺼이 길을 잃고 싶다는 거다. 쓰지 말걸 후회도 하다가 결국에는 소설을 써서 다행이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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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이름을 갖는다. 들판에서 밀의 환상을 봤던 소년은 이오시프 소볼레프스카였다. 그는 굶어 죽었다. 1933년, 기근에 시달리던우크라이나에서 어머니와 다섯 형제와 함께. 그때 살아남은 그의 형제 하나는 1937년,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죽었다. 오직 한 사람, 여동생 한나만이 끝까지 살아서 그와 그의 희망을 들려준다. 스타니스와프 비가노프스키라는 청년은 자신의 체포된 처, 마리아와 반드시재회하리라 내다봤다. "지하에서 말이야." 그들은 1937년 레닌그라드에서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총살되었다. 자기 결혼반지에 대해 쓴 폴란드 장교는 아담 솔스키였다. 그의 일기는 그가 1940년에 총살된 카틴 숲이 파헤쳐졌을 때 그의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다. 아마 결혼반지도 숨겼을 테지만, 그를 쏴 죽인 병사들이 뒤져서 챙겨갔을 것이다.
1941년, 포위와 굶주림의 레닌그라드에서 간단한 일기를 남긴 열한 - P670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타냐 사비체바였다. 그녀의 누이 중 한 사람은얼어붙은 라도가 호를 건너 살아남았다. 타냐와 그 밖의 가족 전부는 죽었다. 1942년 벨라루스의 죽음의 구덩이에서 아빠에게 편지를썼던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는 유니타비시니아츠카야였다. 그녀옆에서 편지를 썼던 그녀의 어머니는 즐라타였다. 모녀 모두 목숨을잃었다. 유니타의 편지 마지막 구절은 "이제 진짜 마지막 작별 인사예요. 입맞춤을, 끝없는 입맞춤을 보내요"였다.
모든 죽음은 숫자가 되었다. 이오시프에서 유니타의 죽음 사이에 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블러드랜드에 1400만 명 이상의 피를 뿌렸다. 살육은 스탈린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내린 지령에 따른 정치 프레임으로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300만명 이상의 목숨이 거둬졌다. 그리고 1937년과 1938년, 스탈린의 대공포가 이어졌다.  - P671

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둘을 떼어놓고 비교하기보다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식으로 비교하는 게 필수적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1951년에 시도하고, 두 체제를 "전체주의"라는 이름 아래하나로 합쳐 봤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그녀에게 "잉여인간"이라는관념을 일깨워주었다. 홀로코스트 역사의 개척자인 라울 힐베르크는나중에 그녀에게 관료 국가가 20세기에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제거했던지를 보여주었다. 아렌트는 현대의 잉여인간에 대한 지워지지 않을 상을 제시했으니, 대중사회를 박살내고, 진보와 행복의 이야기 가운데 죽음이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런 상이 떠오른다고 했다. 학살의 시대에 대한 아렌트의 오래 남는 상을 풀이하면 이랬다. 사람들(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이 서서히 인간성을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먼저 대중사회의 익명성 속에서, 다음에는 집단수용소에서 이것은 강력한 이미지이며, 나치와 소련의 학살을 역사적으로 비교하기 전에 정확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 P672

그러나 집단수용소에서의 살육이라는 이 두드러진 예는 아렌트의 현대사회 개념과는 큰 관련이 없다. 그녀의 분석은 우리의 주의를 베를린과 모스크바로, 즉 전체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멀리 떨어진 국가들의 수도로 돌리며, 각각 그 시민들에게 벌인 짓에 주목하도록 한다. 그러나 소련 전쟁포로들은 두 가지 체제의 상호작용 때문에죽었다. 아렌트의 전체주의론은 현대 대중 산업사회 내의 비인간화에 주목할 뿐,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권력 열망이 역사적으로 중첩되었을 때의 효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 병사의 결정적 순간은 그들이 붙잡혔을 때였다. 그때 그들은 소련 상급 장교와 내무인민위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일군과 친위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그들의 운명을 한 현대사회의 진보적 소외 현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것은 두 세력의 충돌, 소련 영토에서 펼쳐진 독일의 범죄적 정책의 산물이었다. - P673

1941년 하반기에 겨우 며칠 만에, 독일은 동유럽 유대인들을 대량 사살했는데 그 숫자는 그들의 집단수용소에서죽어간 숫자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가스실은 집단수용소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안락사" 프로그램을 위해 의료 살인 시설로 쓰려던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동부의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가스차량이 등장했고, 헤움노에서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땅의 유대인 학살에 가스 차량이 쓰였다. 그다음이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의 영구 가스 시설이었다. 가스실은 점령된 소련 땅에서 유대인 대량학살 정책을 위해 쓰이는 한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서 - P674

그러나 의도적인 대량학살 프로그램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살인 공장과는 달리). 비록 일부 유대인이 정치범으로 수용소형을 선고받고, 또 일부는 노동자로서 그곳에 가긴 했지만, 집단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유대인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들은살아남은 유대인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집단수용소가 유명해진또 다른 이유다. 그들은 수용소에 대해 설명했다. 오래 일하다가 끝내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 끝 무렵에 들어와 바로 해방된 사람들이. 유럽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독일의 정책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라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아우슈비츠 등지의구덩이, 가스 차량, 살인 공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아렌트가 본 대로, 아우슈비츠는 산업적인 집단수용소와 살인 공장의 보기 드문 조합체였다.  - P675

이 수용소는 처음에는 폴란드인을 수용했고, 다음에는 소련의 전쟁포로들을, 그러고 나서 유대인과 집시들을 수용했다. 살인 공장이 기능에 추가된 뒤, 일부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은 노역을 위해 분류되고, 지칠 때까지 일하고, 가스실로 갔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는 아렌트가 주장한, 죽음으로 끝나는 진보적 소외의 이미지에 걸맞을 수도 있다. 그것은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쓴 글들과도 구색이 맞았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 등등의 글과 그러나 그런 체험담들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런 체험은 홀로코스트의 일반 진행 과정을 포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조차 그랬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죽었고, 수용소 내부 생활을 전혀 해보지 못했다.  - P676

그 수용소에서 가스실로의 이동은 아우슈비츠 복합 시설의 역사에서 적은 부분만 차지했기에, 이를놓고 홀로코스트의 대량학살의 일반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분명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주요 장소이기는 하다. 학살된 유대인의 대략 여섯 명 중 한 명이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살인 공장은 마지막으로 가동했던 살인 공장이며,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최고 수준까지 발휘한 시설도 아니었다. 가장효율적인 총살 부대나 아사 정책이 사람들을 더 빠르게 죽일 수 있었다. 트레블린카도 아우슈비츠보다 처리 속도가 빨랐다. 아우슈비츠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유대인 집단인 폴란드 유대인과 소련 유대인을 학살하는 주된 장소도 아니었다. 독일 점령 상태에서 대부분의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주요 살인 공장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당한 상태였다. - P676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시설이 1943년 봄에 자리잡았을 때,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 이상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다시 보자면, 소련과 나치 체제의 손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된 수없이 많은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은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가동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끝장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밖에 안 되었다.

아마도, 아렌트의 말처럼, 나치와 소련의 대량학살은 현대사회에내재된 뭔가 심층적인 어두움의 상징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현대성이나 그 밖의 무엇무엇에 대해 그런 이론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확실히 팩트체크를 해야 한다. - P677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블러드랜드에 대하여 말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유럽의 대량학살 시대에 대해서는 이론이 실제를 넘어서고, 오해가 두드러진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참으로 많은 지식을 가졌던, 그러나 그 범위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2차 문건에 한정된)와 달리, 우리는 이런 ‘이론에 지식을 맞추는 일‘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죽은 이들의 숫자는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어떤 경우에는 좀더 정확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지만, 적어도 두 체제의 파괴성을 파악하기에는 넘칠 만큼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이나 전쟁포로를 죽이는 정책으로, 나치 독일은 블러드랜드에서 약 1000만 명을 학살했다(그리고 다른 지역까지 합하면 총 1100만명) - P677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블러드랜드에서 400만 명 이상을 죽였다(총 600만 명), 기근, 인종 청소, 수용소 장기 재소 등으로 빚어진 죽음(예측 가능했던까지 치면, 스탈린에게 죽은 숫자는 아마도900만 명, 나치는 1200만 명으로까지 늘어난다. 아무래도 이렇게 큰숫자는 완전히 정확하게 셀 수는 없다. 또한 적어도 수백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희생자로서, 두 체제 모두의 희생물이 되었다.
나치와 스탈린주의자들의 손길 모두가 가장 많이 닿은 곳은 바로 블러드랜드였다. 오늘날의 지명대로 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연방의 서쪽 변방, 폴란드의 대부분, 발트 삼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나치와 소련의 힘이, 그리고 악의가 서로 겹치고 얽힌 땅이었다. 블러드랜드가 중요한 까닭은 희생자의 대부분이 그 땅 출신이라는 데만 있지 않으며, 다른 곳 출신자의 살육정책에도 그 땅이 중심지 노릇을 했다는 데 있기도 하다.  - P678

예를 들면독일은 54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그중 400만 명 이상이 블러드랜드 출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폴란드, 소련,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계 유대인이었다. 그 밖의 유대인들은 다른 동유럽 국가에서 왔었다. 블러드랜드 밖에서 온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은 헝가리유대인이었는데, 블러드랜드의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다.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도 본다면, 이곳에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동유럽 유대인은 거의 90퍼센트가 된다. 좀더 소규모 유대인 집단은 서유럽과 남유럽에서 끌려와 블러드랜드에서 죽었다.
유대인 희생자들처럼, 비유대인 희생자들도 블러드랜드 태생이거나 그곳에 끌려와 죽은 사람들이었다. 전쟁포로수용소와 레닌그라드 및 다른 도시들에서, 독일은 4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굶겨 죽였다. - P678

고의적 기근의 결과 죽어간 사람의 대부분(전부는 아닐지라도)은 블러드랜드 태생이었다. 아마 그외지역 출신의 숫자는 100만 명에 이를것이고, 그 대부분은 러시아계였을 것이다. 스탈린의 대량학살 정책의 희생자들은 소련 전역에서 골고루 나왔으니, 역사상 가장 큰 국가를 샅샅이 훑듯 했다. 그렇다 해도, 스탈린의 철권이 가장 강력하게꽂힌 곳은 소련의 서쪽 변경지대, 다시 말해 블러드랜드였다. 소련은 집단화 과정에서 500만 명 이상을 굶겨 죽였는데, 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소련은 1937년에서 1938년의 대공포 시기에 68만1691명의 학살을 기록했는데, 그 다수가 폴란드계 소련인과 우크라이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서부 소련 거주자였고, 따라서 블러드랜드 거주자였다.  - P679

아렌트와 그로스만을 함께 보면, 두 가지 간단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첫째, 나치 독일과 소련의 합당한 비교는 그 범죄들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희생자들, 집행자들, 방관자들, 지도자들을포함한 모든 범죄 관련자의 인간성을 어떻게 봤는지를 따져야만 한다. 죽음은 해답이 아니라 주제다. 그것은 소란의 실마리가 되리라. 결코 만족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은 확실한 실제보다 말잔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생은 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반대가 차라리 말이 되기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정치적, 지적, 문학적, 심리학적으로 대량학살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로는 뭐가 있는가?‘ 그런 끝맺음은 잘못된 화음이다. 백조의 노래를 빙자한 사이렌의 노래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라야 한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 - P682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서, 유토피아는 비전으로 제시되고, 현실과타협되고, 대량학살로 실행되었다. 1932년에는 스탈린이, 1941년에는히틀러가 그렇게 했다. 스탈린의 유토피아는 주에서 12주 동안 소련을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것은 그와 같은 시간에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큰 거짓말의 힘을 빌려 실행에 옮겨졌다. 심지어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조차 멈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체는 정책의 견실함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은둘 다 특정 형태의 폭군 정치를 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두고 적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는 자신들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또는 바람직하다고입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두 사람 다 유토피아를 뒤바꾼 형태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대량학살 정책을 ‘실질적인 승리‘로 대신 내세웠다. - P683

집단화도 ‘마지막 해결책‘도, 무오류의 존재라고 내세워진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집단화가 우크라이나에서 저항과 굶주림을 불러오자, 스탈린은 부농,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독일군이모스크바에서 차단되고,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부농,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이 소련체제 건설이 지연되는 죄를 뒤집어썼듯이, 유대인들은 소련 체제 파괴의 실패가 빚어진 죄를 뒤집어썼다. 스탈린은 집단화를 선택하고, 히틀러는 전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동료에게 그런 선택 - P683

의 결과 빚어진 최악의 상황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일은 훨씬더 손쉬웠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기근과 부농 및 소수 민족의 대량 총살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원래의 비전을 뒤틀었다. 히틀러 역시모든 유대인의 사살과 가스 학살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비전을 바꿨다. 집단화가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뒤, 스탈린은 그것이 계급투쟁의승리를 의미한다며 엉뚱한 의미 부여를 했다. 유대인들이 총탄과 독가스에 죽어갈 때, 히틀러는 그것이 전쟁 목표 그 자체를 달성한 것이라고 어느 때보다 더 명확히 선언했다. 전쟁에 지면서, 히틀러는 유대인 대량학살이야말로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 P684

스탈린은 유토피아를 재정립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탈린주의 자체가 목표 수정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추동했던 유럽 혁명에서, 그 혁명이 불발하자 소련의 방어로 후퇴한 것이었다. 1920년, 붉은 군대가 공산주의를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실패하자, 스탈린은 ‘후퇴 계획‘을 마련했다. ‘일국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를 하나의나라, 소련에서 완성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이 재앙을 가져오자, 그는 수백만 명을 의도적으로 굶어 죽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정책 추진 과정의 일환이라 설명하고, 그 덕으로 무서운 국부이자 정치국의 지배자라는 위상을 굳혔다. 1937년에서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를 부농과 소수 민족 박멸에 내세운 뒤, 그는 그것이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1941년 붉은 군대의 퇴각 후, 그러고 나서 결국1945년에 승리한 뒤, 그는 러시아 민족주의에 기댔다.  - P684

히틀러에게도 그런 유토피아론 재창작 능력이 있었다. 굶주림 계획으로 수천만 명이 죽고, 일반 계획으로 굶주림 또는 강제이주의 결과수백만 명이 또 죽었다. 전쟁이 그의 사고를 크게 바꾸게 된 이상, 그런 일들은 나치가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부른 것의 일환으로 치부되었다. 전쟁에 이겨서 유대인 문제를 해소하기를 기다리기보다, 히틀러는 절멸 정책 자체를 전쟁 도중에 추진하기로 했다. 1941년 7월, 유대인 학살은 뚜렷한 결과가 없는 전쟁 한 달 뒤에 격화되었으며, 1941년12월 모스크바가 함락을 면한 다음에도 그리되었다. 특정 유대인들을 죽이는 정책은 본래 군사적 필요성이라는 말로 뒷받침되었고, 정치적, 경제적 기획과 일부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상황이 변하고 정치, 경제 기획들이 포기 또는 지연을 겪으면서 학살의 범위와규모는 급증했고, 유대인 말살 그 자체가 히틀러의 목표가 되었다. - P685

마지막 해결책의 마지막 판은 스탈린의 즉흥적 변조가 그랬듯 히틀러나 그의 체제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합리적 계획의한 단계라기보다 미학적 비전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원래의 정당화는 언제나 유대인들의 우주적인 음모가 있으며 그것이 게르만의 미덕과 정면 충돌한다는 반유대주의 주문으로바뀌었다. 스탈린에게, 정치 갈등은 언제나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히틀러와 거의 정반대였다. 히틀러가 공화국을 혁명적 식민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반면, 스탈린은 혁명 마르크스주의의 시를 지속 가능한 일상의 정치로 번역했다. 스탈린의 계급투쟁은 언제나 소련 국가 노선으로서 일반에 표시되었다.  - P685

나치와 소련 체제의 비슷함을 두말없이 받아들인다면, 그 차이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보게 된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자유주의와민주주의에 적대한다. 두 정치 체제 모두, ‘당‘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뒤집혀 있다. 인정된 규칙에 따라 권력을 추구하는 여러 집단 가운데 하나를 의미하기보다, 그 규칙 자체를 정하는 유일한 집단이 된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모두 일당 독재국가였다. 나치나 소련이나 당이이데올로기와 사회 규범 제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나라였다. 그정치 이론은 국외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경제 엘리트는 특정집단이 잉여적이며 유해하다고 확신했다. 두 정부 모두, 경제기획자들은 농촌 지역에 필요 이상의 주민들이 거주한다고 봤다. 스탈린주의적 집단화는 잉여 농민들을 농촌에서 도시나 강제수용소로 보내 노동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들이 굶어 죽는다?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식민화 계획은 수천만 명의 인위적 기근과 강제이주를 추진했다. - P686

소련과 나치의 정치경제는 모두 사회 집단과 그들이 산출하는 자원을 통제하는 집단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1930년부터 스탈린의 농촌 대개혁 수단이던 집단농장은 1941년부터 독일 점령군 당국에 의해 활용되었다. 점령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소련의 도시들은 새로운 집단 구역, 즉 게토를 설치했다. 도시의 유대인 거주 게토는 비록 처음에는 이주를 앞두고 대기토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유대인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쓰였다. 명목상 유대인 자치기구인 유대인 평의회는 보통 "기부금" 징수와 강제노동 조직에 의존했다. 게토나 집단농장이나 지역민에 의해 운영되었다. 나치도 소련도 대규모의 노동집약수용소를 운영했다. 히틀러는할 수 있었다면 소련 수용소를 유대인과 그 밖의 명백한 적들을 관리 착취하기 위해 써먹었겠지만, 그러기에는 독일군이 소련 땅을 충분히 점령하지 못했다 - P687

스탈린도 히틀러 못지않게 재산 몰수와 인종 청소를 입에 올렸다. 그러나 민족 말살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당위성은 언제나 소련 국가의 수호나 사회주의의 진흥에 연결되어 있었다. 스탈린주의에서 대량학살이란 사회주의의 성공적인 방어를 의미하거나 사회주의의 완성을 의미했다. 그 자체로 정치적 승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스탈린주의는 자체 식민화의 기획이었고, 상황이 허락되면 대외로 확장되는것이었다. 반면 나치의 식민주의는 빠르고 완전한 대 동부 제국의 정복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으며, 전쟁 이전의 독일보다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제국 운영에 앞서 수천만 명의 민간인을없애버려야 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독일은 대체로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소련은 보통 소련 국민을 학살했다. 소련 체제는 소련이 전쟁 중이 아닐 때 가장 살인적이었다. - P688

반면 나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겨우 수천 명의 사람을 죽였다. 정복 전쟁 중에는 역사상 그 어느 국가보다 더 빠르게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그 단위의 희생자를 낸 경우만 볼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비교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두 체제의 맛을 모두 봐야 했던유럽의 수억 명의 사람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 P688

지도자와 체제의 비교는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수억 명의 유럽인은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을 곱씹어야 했다. 그 체제들이 뭔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치명적 운명을 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1933년 초 독일의 실직 노동자들에게는 정말 중대했다. 사회민주당, 공산당, 나치당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말이다. 또한 같은 시간대에 굶어 죽어가고 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도중대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독일의 침공이 그들의 구원이 되지 않을까 꿈꾸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의 유럽 정치인들도 그랬다. 스탈린의 인민전선에 가입할까 말까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딜레마는 당시 폴란드에서 더 두드러졌다. 당시 폴란드 외교관들은 강력한 이웃인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게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인지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 P689

1939년에 독일과 소련이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폴란드 장교들은 어느 쪽에 항복할지를 선택해야 했고, 폴란드 유대인들(그리고 그 밖의 폴란드 국민)은 어느 점령지역으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일부 소련 전쟁포로들은 전쟁포로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위험 앞에서 독일군에 협력하는 문제를 놓고고심해야 했다. 벨라루스의 젊은이들은 소련 빨치산이 되느냐, 독일경찰이 되느냐를 고민해야 했다(결국 둘 중 하나로 취급되어 탄압받게 되지만). 1942년 민스크 유대인들은 게토에 남아 있느냐, 숲으로 달아나 소련 빨치산을 찾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1944년 폴란드 국내군 지휘관들은 독일군에게서 바르샤바를 자신들 스스로 해방시킬지, 아니면 소련군이 오기를 기다릴지 선택해야 했다. - P689

1933년 우크라이나 기근의 생존자 대부분은 훗날 독일의 점령을 겪었다. 1941년 독일의 수용소에서 아사를 면한 생존자 대부분은 스탈린의 소련으로 돌아갔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서 유럽에 남은 대부분도 공산 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결정적 시기에 유럽의 결정적 지역에 살았던 이 유럽인들은 싫어도 체제 비교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두 체제를 국외자의 입장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체제들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겹치고 섞이는 상황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나치와 소련 정권은 때로는 동맹자였다. 폴란드를 동시에 침공했을 때처럼. 또 때로는 적으로서 서로 통할 수 있는 목표를 가졌다. 1944년스탈린이 바르샤바 봉기자들을 돕지 않기로 하고, 그리하여 독일군이 훗날 공산정권에 저항하게 될 사람들을 없애도록 했던 것처럼. 이것이 바로 프랑수아 퓌레가 "적대적 공모belligerent complicity"라고 불렀던 관계다.  - P690

유럽의 대량학살이 멈추고 수십 년이 지나자, 책임은 대부분 "부역자들의 발밑에 놓였다. 부역의 고전적 예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경찰 노릇을 했던 소련인들로, 그들의 임무 중에는 유대인 학살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이데올로기적 이유에서 부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극소수만이 뭔가 정치적 목표를 얼마간 띠고 그 일을 했다. 물론 일부 부역자는 점령 국가에 대해 정치적 동질감을 느끼긴 했다. 가령 소련의 점령에서 탈출했던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그들에게 1941년 리투아니아 해방을 가져다줬다고 봤다. - P698

점령기에 우크라이나 또는 벨라루스에서 독일 경찰로 일한 사람들 자신은 체제에서 거의 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그들은 아주 밑바닥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유대인이 그들 밑이었고, 당연하게도 경찰이 되지 않은 일반 국민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친위대원, 당원, 병사, 독일인 경찰들에 비하면 자기 행동을 존중받지 못할 만큼 하찮았다. 이런 형태의 현지인 부역은 다만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는 의미 말고는 별게 없었다. 유대인을 쏘는 데 주저한 독일인은 그리 심각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경찰에 들어가지 않거나 대원을 그만둔현지인들은 반대로 독일인들에게는 전혀 해당 없는 대가를 각오해야했다. 굶주림, 강제이주, 강제노동 등등. 독일의 부역 제의를 받아들인소련군 포로는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독일 경찰을 위해 일한 소련 농민은 집에 남아서 수확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우리 가족은굶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소극적 기회주의였다. 이미 고약한 개인의 삶이 더 고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 P699

게토의 유대인 경찰은 소극적 기회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포함해 누구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
소련 체제에서는 ‘부역자‘를 정의하기가 더 어렵다. 독일과 달리, 소련은 전시보다 평화시에 훨씬 더 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그리고 점령한 땅을 소련의 정식 영토로 병합하거나 그 형식적인 주권을 인정하기까지 오래 점령 상태에 두지 않았다. 말하자면, 소련의 그러한 정책은 "운동"과 "전쟁"으로 제시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은 그들의 동료 시민들을 굶겨 죽이도록 신호를 받았다.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내놓으라는 것이 "부역"이라고 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체제가 이웃끼리 학살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사례가아닐 수 없었다. 굶주림은 추잡하고, 야만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됐다. - P700

공산당원과 지역 공무원들은 그들이 잘 아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거나, 죽도록 몰아가야만 했다. 아렌트는 집단화 과정의 기근을 도덕적 소외의 시작으로 봤다. 강력한 현대 국가 앞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무력함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모든사람이 (식량 징수와 소비 모두에 있어서) 그 기근에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도덕적 통일성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체제를 따르는 까닭이 단지 스스로 선호하는 이데 - P700

올로기 때문이었다면 부역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블러드랜드에서 나치 부역자의 다수는 소련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 동쪽 지역, 민족 자결이 처음에는 소련, 다음에는독일의 지배에 밀려났던 그곳에서 일부 사람은 전에 소련에 부역했던 바로 그 이유로 독일에 부역했다. 소련 점령이 독일 점령으로 바뀌자, 소련군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은 독일 경찰로 탈바꿈했다. 1939년에서 1941년까지 소련에 부역했던 현지인들은 유대인을 죽임으로써나치의 눈에 죄인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빨치산 대원들은 앞서 독일과 소련에 모두 부역한 경력이 있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종종 별것 아닌 이유로 젊은이들이 소련 빨치산이 되거나 독일 경찰이 되거나로 갈렸다. 공산주의 학습을 받은 옛 소련 병사들이 독일의 살인 공장에서 일했다. 인종주의세뇌가 된 홀로코스트 일꾼들이 소련 빨치산에 들어갔다. - P701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버린 사람들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그 정치경제적 연관자 가운데 적절한 적용 시기나 열성파들이 없는이데올로기는 대량학살의 도덕적 해석이 된다. 말하자면 살해하는사람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범죄자를 단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는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는 편리하다. 경제의 중요성과 정치의 복잡성을 무시해버리고, 그런 요인들이 사실상 역사의 죄인들이자 나중에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할 자들과 매한가지라고 치부해버리면 더편안할 수 있다. 더 유혹적이 될 만한 것은, 적어도 오늘날 서구인들 - P701

에게는, 희생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들이 블러드랜드의범죄자와 방관자들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희생자와 자기 자신의 동일시는스스로는 범죄자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살인 엔진을 시동한 트레블린카의 직원은 나와 다르다. 방아쇠를 당긴 내무인민위원회 대원도 나와는 다른 인간이다. 그런 이들은 나와 같은 사람을 죽이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그런 희생자와의 동일시가 더 많은 지식을주게 될지, 또는 그러한 살육자와의 분리가 윤리적으로 타당한 태도인지는 불분명하다. 역사를 도덕으로 치환하는 일이 그 누군가에게라도 도덕적인 일이 될 것인가? 확실하지 않다. - P702

사람의 주관적인 피해자 의식은 한도가 없어 보이며, 스스로 희생자라 믿는 사람은 대단히 폭력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경찰관 한 사람은 벨라루스의 모길료프에서 아기들을 쏴 죽였다. 소련군이라면 자기 아이들을 쏴 죽일 거라고 상상한 결과였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든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 P703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703

나치와 소련을 비인간이라고 치부하거나 역사적 이해를 넘어선다고 보는 일은 그들이 놓은 도덕적 덫에 걸리는 것이다. 더 안전한 선택은 그들이 왜 대량학살을 벌였는지 그 동기를 이해하고, 아무리 그것이 말도 안 되게 느껴진다 해도 그들에게는 말이 되었음을 아는 일이다. 하인리히 힘러는 100명의, 또는 500명의, 또는 1000명의 시체가 줄줄이 쌓여 있는 걸 보는 게 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의의미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스스로의 영혼의 순수함을 희생하는 일이며, 따라서 그런 희생은 살인자를 더 높은 도덕적 수준으로끌어올린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어떤 식의 헌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무리 극단적이라 해도, 나치의 가치가 우리와 전혀 동떨어지지는 않았음을 그 표현은 알려준다. 즉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미화하는 것이다.  - P704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양심이 아돌프 히틀러라는이름을 가졌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지도자로 받아들인 독일인들에게, 믿음이란 매우 소중했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은 그렇게 잘못 뽑기도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들의 믿음의 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악은 선에 의존한다는 간디의 말이 있다. 모여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헌신과 믿음이 있다고 당시의 독일인들을 선량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임을 알려줄 근거는 된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들은 윤리적인 사고를 했다. 비록 무시무시한 착오를 저질렀지만 말이다.
스탈린주의 역시 정치뿐 아니라 도덕 체계였다. ‘무죄냐, 유죄냐‘는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도덕적 사고는 도처에 있었다. 어느 젊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원은 굶주린 사람들에게서 곡물 - P704

을 빼앗는 일이 옳다고,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승리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믿고 싶었기 때문에 믿었다." 그에게는 도덕 감각이 있었다. 비록 잘못되었지만 마르가레테 부버노이만이 카라간다의 굴라크에 있을 때, 동료 재소자가 그녀에게 "달걀을 깨지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은 대기근과 대공포가 빚은 희생이 정의롭고 안전한 소련국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토록 희생자의 규모가컸던 것은 그만큼 희망도 강력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량학살에 대한 낭만적 정당화도, 당장의 악이 미래의 선이 되리라는 이야기도, 완전히 틀린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아마 훨씬 더 나으리라. 아니면 더 온건한 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 P705

큰 고통이 큰 진보와 연관되리라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적 마조히즘이다. 말하자면 고통이 있음을 내재된 또는 곧 도래할 선의 징조로 아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스스로 풀어내는 것은 미신적 사디즘이다. 내가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내게 계시된 더 높은 차원의 목표에 부응하는 거라고 여기는것이다. 스탈린이 정치국을 대표하고 정치국은 중앙위원회를, 중앙위원회는 공산당을,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노동계급은 역사를 대표했으므로, 스탈린은 무엇이 역사적으로 필요한지에 대해 주장할 특권이있었다. 그런 지위는 그가 스스로에게 모든 책임을 면제해주고, 그의실패를 다른 이들에게 미룰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기근이 일정한 유형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바람직한 유형이나, 바람직해야 할 유형이냐이다. - P705

지금 우리의 추념 문화는 기억이 당연히 살육을 방지한다는 식이다. 그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이 죽었다면, 그들이 뭔가 자명한 가치때문에 죽었을 것이고 그것은 쉽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적절한 정치적 기억으로 갈무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자명한가치는 국가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수백만 명의 희생자는 소련이 위대한 조국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또는 미국이 선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했다는 식이다. 유럽은 평화주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폴란드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전설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영웅을 가져야 했다. 벨라루스는 그 국민의 미덕을 증명해야했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의 운명을 실현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국가 정치와 국민 심리에 어느 정도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음에도,
나중에 만들어 붙인 정당화다. 그리고 진실된 기억과는 거리가 멀다.
죽은 사람들은 기억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억할 힘이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판단한다. 나중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정한다. - P706

의미가 살육 행위에서 나온다면, 문제는 더 많은살육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아마도 역사의 목적이 나온다. 죽은 이의 숫자를 세는 것과그 계속적인 재해석 사이 어딘가에 대량학살의 역사만이 숫자와 기억을 통합할 수 있다. 역사 없이는 기억은 사적인 것으로 된다. 오늘날에는 개별 국가의 것으로 된다. 한편 죽은 이의 숫자는 공적인 것으로 된다. 국제적인 순교 행동, 복수 성전의 경쟁판에서 도구로 쓰인다. 기억은 나의 것이며 나는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숫자는 객관적이며 나는 좋든 싫든 그 숫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식의 사고방식은 내셔널리스트들이 한 팔로는 스스로를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이웃을 후려갈기도록 해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고 또 공산주의가 끝장난 뒤, 블러드랜드 전역(그리고 그 너머의내셔널리스트들은 희생자의 숫자를 부풀리고, 그에 따라 스스로를무구한 존재로 포장하는 데 맛이 들렸다. - P707

12년, 두 체제 동안 1400만 명이 의도적 살육을 당했다. 지금은 이에 대해 우리가 통달은 못할망정 조금이라도 알기 시작할 때다. 과장된 숫자를 반복하며, 유럽인들은 그들의 문화에 수백만 명의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을 집어넣고 있다. 불행히도, 그런 유령은 완전히 무력하다. 서로 경쟁적인 순교자 신화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순교자를 내세운 제국주의martyrological imperialism일 뿐이다. 1990년대의 유고내전은 부분적으로 세르비아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민족의희생자 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인식한 데서 비롯됐다.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은 억눌려지면, 공포스러운 상황이 찾아온다.


죽은 자가 과연 어느 누구에게든 소속되는 것일까? 독일인에게 살육된 400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 가운데 약 30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이 300만 명의 유대인 모두는 폴란드인으로 치부되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그들 중 다수는 스스로를 폴란드인이라 굳게 믿었다. 유대인으로 죽은 사람들이 스스로 유대인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 죽었다. - P714

또 이런 유대인 100만 명 이상은 스스로를 소련 국민이라 여기며죽었다. 전쟁 초기에 소련이 병합한 폴란드 절반의 땅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100만 명 가운데 다수가 살았던 땅은 지금 독립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속해 있다.
코벨 시너고의 벽에 엄마에게 보내는 글을 긁어 썼던 유대인 소녀, 그녀는 역사상 폴란드인일까, 소련인일까, 이스라엘인일까, 우크라이나인일까? 그녀는 폴란드어로 글을 썼다. 그날 시너고그의 다른 유대인들은 이디시어로 썼다. 디나 프로니체바의 유대인 어머니는 어떨까? 키예프(지금은 독립 우크라이나의 수도인)의 바비야르에서 도망치라고 딸에게 러시아어로 말한 그녀는? 코벨과 키예프의 유대인 대부분은, 동유럽 유대인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도, 폴란드인도,
우크라이나인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이 과연 정말로 이스라엘이나, 폴란드나, 우크라이나나, 아니면 소련을 위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715

그들은 유대인이었으며, 폴란드 또는 소련의 국민이었다. 그들의 이웃은 우크라이나 또는 폴란드 또는 러시아계 주민이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네 나라에 소속되어 있었다. 적어도 이 네 나라의 역사가 따로따로 떼어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다. 역사란 각 개인은 환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 P715

이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령 정확한 숫자를손에 넣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이상을 고려해야 한다. 정확한 숫자가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각각의 사망 기록은 하나의 독특한 삶에 대해 그 존재를 제시하지만, 내용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대규모 학살에심층 조사를 실시한 경우는 홀로코스트로, 57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그 가운데 540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숫자도, 다른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추상적인 ‘570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나의 570만 배‘로 여겨져야 한다. 그것은 뭐랄까, 한 사람의 유대인이 570만 번 죽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 P716

셀수 없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도브시아 카간은 코벨 시너고그에 있던 소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 코벨에서 죽은, 우크라이나에서 죽은, 동유럽에서 죽은, 유럽에서 죽은 모든 유대인은 독특한 삶의 소유자였다.
기억의 문화는 어림수를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에 대한기억은 그 수가 어림수가 아닐 때, 다시 말해서 마지막 단위가 0이아닐 때 쉬워진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의 경우, 트레블린카에 78만863명의 서로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아마 쉬워질 것이다.
그 마지막 3명은 가스실에 들어간 뒤 옷이 한데 뭉쳐져 수거된 타마라 빌렌베르크와 이타 빌렌베르크 자매, 그리고 가스실에 들어가기 - P716

전 그녀의 머리를 깎는 남자와 부여잡고 울었던 루트도르프만이 될수 있다. 아니면 바비야에서 사살된 3만3761명의 유대인 가운데마지막이 되는 한 명을 상상해보자. 가령 디나 프로니체바의 어머니를! 비록 그곳에서 사살된 모든 유대인 하나하나가 곧 하나하나이지만 말이다.
블러드랜드의 대량학살의 역사에서, 기억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포함해야만 한다. 포위 속에서 굶어 죽은 100만 명의(100만 배의 하나의) 레닌그라드 시민들 각각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군에게 살해된 310만 명의 (310만 배의 하나의) 소련 전쟁포로 각각,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소련 체제 아래 굶어 죽어야 했던 330만 명의(330만 배의 하나의) 우크라이나 농민 각각도 이들의 숫자를 완전히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들을 나타내고 있다. 무시무시한 선택을 해야 했던 농민 가족, 구덩이에서 서로의 몸을 덥혀주려 애쓰던 포로들, 레닌그라드에서 가족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 타냐 사비체바 같은 아이들. - P717

1937년에서 1938년, 스탈린의 대공포 시기에 사살된 68만1692명 각각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두 명은 마리아 유리에비치와 스타니스와프 비가노프스키일 수 있다. "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랐던 부부 말이다. 1940년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사살된 2만1892명의 폴란드 포로들도 저마다의 삶이 있었다. 마지막 두 명은 자신의 딸을 꿈에 봤던 아버지, 도비에슬라우 야쿠보비치와 총탄이 자신의 머리를 꿰뚫던 날 자신의 결혼반지에 대해 글을 남긴 남편, 아담 솔스키일 수 있다. - P717

나치와 소련 체제는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단지 추정치가 되어버렸고, 나머지 일부는 우리의 정밀한 추계를 통해 복원될 수 있다. 우리 학자들로서는 이 숫자들을 찾고, 이를 통해 일정한 전망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우리로서는, 그런 숫자들을 사람들로 돌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그럴 수 없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은 단지 우리의 세상을 마구 뜯어고쳤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마저 개조했다는 뜻이 되리라. - P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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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너희들의 아버지인 내가 후에 너희들에게 어떻게 비친 것인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마 내가 지금 여기서 사라져 간 시대를 비웃고 연민하듯 너희들도 나의 케케묵은 마음가짐을 비웃고 연민할지 모른다. 나는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너희들은 나를 발판으로 삼아 높고, 멀리나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몹시 쓸쓸하다. 우리들은 그저 이렇게 말만 하며 태연히 있을 수 있을까? 너희들과 나는 피의 맛을 본 짐승처럼 사랑을 맛보았다. 가자,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쓸쓸함을 제거하기 위해 일하자.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다. 영원히 사랑한다. 이것은 어버이로서 너희들에게 보답을 받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나의 감사를 받아달라는 것뿐.
죽어 넘어진 어미를 먹어 치우면서 힘을 기르는 사자 새끼처럼 힘차고 용감하게 나를 떨쳐버리고 인생의 길로나아가거라..
내 일생이 아무리 실패작이더라도, 내가 아무리 유혹을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의 발자취에 불순한어떤 것을 너희들이 발견할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 꼭 그렇게 하겠다. 너희들은 내가 죽어 넘어진 곳에서 새로운 - P182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를 너희들은 나의 발자취에서 어렴풋이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아, 불행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을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의 여정에 오르거라. 앞길은 멀다. 그리고 어둡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거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앞에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가거라. 용감하게, 아이들아! (1919)
- 루쉰의 산문 <아이들에게> - P183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 이 모든 소리들이 녹아 코가 되고 얼굴이 되려면심장이 되고 가슴이 되려면 잠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 것일까 잠의 힘찬 부력에 못 이겨 아기는 더 이상 숨지 못하고 탯줄이 끊어지도록 떠올라 물결따라 마냥 흔들리고있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
김기택의 시 <태아의 잠 1〉 부분 - P187

관계 역전의 상태에서 가정의 달 5월을 맞았고 ‘어버이날‘ 카드에는 예의 그 칭찬 메시지가 가득했다. 큰 상을 한 번 받았더니 카드 형식은 시시했다. 나는 딸의 사랑을 간구하는 가엾은 엄마가 되어, 요새 왜 그거 ‘좋은 부모상‘ 안주냐고 묻고 말았다. 물어보면서도 상 이름이 그렇게 진부하지 않았는데 싶어갸웃했는데 "아, 자식사랑상?" 한다. 딸아이는 요즘 자기가 소홀했다며 곧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제는 귀갓길에 딸에게 전화가 왔다. 학교 수업 준비물로 1.5리터 물병이 필요하니사 오란다. 알았다니까 "그럼 나는 그동안 자식사랑상을 준비할게" 한다. 현관문을 열자 딸아이가 돌고래처럼 솟구쳐 오른다. "엄마한테 상장을 안 준지 6개월이나 됐더라." 삐뚤삐뚤 손글씨 대신 의젓한 명조체로 만든 ‘5월 자식사랑상‘. "위 어른은여섯 달 동안 항상 자식을 위해 많고 많은 노력을 하고, 항상 친절히 대했음으로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 P190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김행숙의 시 <다정함의 세계>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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