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도네시아에서 행해지는 벌목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공급사슬을 알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공급사슬 모델이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볼 수 있는 장소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친 일본의 건설 호황기 동안 일본인들은 베니어판 시공틀을 만들기 위해 인도네시아산 목재를 수입했다. 그러나 정작 인도네시아의 나무를 벌목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일반적인 일본 무역회사는 일본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지침대로 목재를 자르는 타국회사에 대출, 기술 지원, 무역 협약을 제공했다. 이러한 방식은 일본의 무역업자들에게 이로운 점이 많았다. - P212

첫째,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일본 사업가들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겪는 정치적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부자일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정부의 더욱 무자비한 정책에 기꺼이 협조하고자 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감을 사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폭동의 목표물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무역업자들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에게 선금을주는 방법으로 그러한 난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 대신에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장군들과 흥정하며 위험을 감수했다. 둘째,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초국적 이동을 활성화할 수있었다. 일본인 무역업자들은 이미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령 보르네오 산림의 상당 부분을 파괴한 후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그들은새로운 나라에 적응하기보다는 각 지역에서 그들과 일할 의향이있는 대리인들을 그저 데려오는 정도의 역량밖에 없었다. 사실 일본 무역업자들에게서 자금을 조달받는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벌목꾼들은 인도네시아의 나무를 벨 수 있었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 - P212

었다. 셋째, 공급사슬 배열 장치를 이용하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면서 일본의 무역 기준을 적용할 수 있었다. 목표물을찾아다니는 환경주의자들은 여러 별 볼 일 없는 회사들만 찾아낼수 있었는데, 그중 다수가 인도네시아 회사였고 일본 회사는 그숲에 없었다. 넷째, 공급사슬 배열 장치들은 불법 벌목을 여러 하청 중 하나로 수용했는데, 이는 환경 규제에 의해 보호되는 나무를 벌목하는 것이었다. 불법 벌목꾼은 목재를 더 큰 계약 회사에팔았고, 그 계약 회사는 다시 일본에 팔았다. 어느 누구도 책임질필요가 없다. 그리고 심지어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무역을 모델로한 공급사슬의 위계 구조를 구축해 국내 베니어판 사업을 시작한 후에도 나무는 너무 쌌다! 벌목꾼, 나무, 또는 산림 지역 거주민의 목숨이나 생계를 고려하지 않고도 목재 생산 비용을 산정할수 있었다. - P213

동남아시아에서의 벌목은 일본 무역 회사들 덕택에 가능해졌다. 그들은 다른 상품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바빴다.‘ 어떻게 이러한 제도가 발전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위의 공급사슬 방식이 등장한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돌아가보자. 일본에서 출발한 첫 번째 전후 공급사슬의 일부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인한국과의 연결을 활용했다. 그 당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나라였고, 모든 국가가 자국의 제품을 수출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 P213

목적지였다. 그러한 미국은 일본산 수입 상품에 엄격한 할당량 제도를 적용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캐스틀리 Robert Castley는 일본이 미국의 수입 할당량 제한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한국의 경제 건설을도왔는지 설명한다." 일본의 무역업자들은 경공업을 한국으로 이전함으로써 미국에 좀 더 많은 상품을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본의 직접 투자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래서일본은 캐스틀리가 ‘내놓기 putting-out‘ 방식이라고 부른 것을 도입했다. "그 방식은 상인(또는 기업)이 하청업체가 상품을 생산하거나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대출, 신용, 기계류 또는 장비를 조달하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상인(또는 기업)이 멀리 떨어진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캐스틀리는 이 전략에서 무역업자와 은행가가 갖는 권력에 대해 언급한다. "일본인 상인, 기업은해외 공급자와 장기 계약을 체결하고 자원 개발에 자주 자금을대출해주었다." 그는 이러한 확장 방식을 통해 일본은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 P214

내놓기 시스템은 수익성이 더 적은 제조업과 낡은 산업 기술을 한국으로 이전하면서 일본의 비즈니스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나중에 일본인 지지자들에 의해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이미지로 우아하게 포장된 이 모델‘에 따르면, 한국의 비즈니스는 혁신에 관한 한 항상 일본의 한 단계 밑에 위치할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한국인이 자신들의 구식 제조업 분야를 동남아시아의 더 가난한 국가들로 이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한국이 일본이 이룬 혁신을 두 번째로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전진하며 날아갈 것이었다. 한국의 엘리트 계층은 일본 자본(그중 일부는 전후 배상금으로 한국에 전달되었다)의혜택을 받는 것에 기뻐했다. 그 결과로 얻은 사업 네트워크는 일본이 통제하는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이 담당하는사업을 포함해, 일본에서 자본의 초국적 확장을 위한 모델을 형성했다. - P215

1980년대 ‘주주들의 혁명을 일으킨 사회운동가들은 미국이 유지한 힘이 쇠퇴한 것이라고 자신들이 해석한 것에 반응했다. 그들은 힘을 회복하기 위해 기업을 전문 경영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이 되찾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들은 기업을 사서 자산을 뺀 후 되팔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이르자 그들의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하여 ‘기업 담보 차입 매수의 급진적인 성향이 ‘기업 인수 합병‘의 주요 투자 전략이 되었다. 기업이 가장 이윤이 남는 분야만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팔아버렸기에 그 기업에 한때 속했던 대부분의 사업은 멀리 떨어진 공급자들과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급사슬과 구제 축적의 특정한 형식에 몰두하는 방식이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우세한 유형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이 전략은 투자자에게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20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의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 전략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비즈니스 세계에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부였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진화 과정을 통해 도달한 첨단기술인 것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이러한 과정으로 밀어 넣기에 바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미국식 전략을일본에 강요하는 데 진척을 보였다. - P217

1985년이 되자 미국의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 상황으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플라자합의 Plaza Accord‘라는 국제 협약을 고안해냈다. 달러화의 가치는 낮춰졌고 엔화의 가치는 올라갔다. 1988년이 되자 엔화의 가치는 달러화보다 거의 두 배 가깝게 높아졌다. 일본 소비자는 송이버섯을 포함해 거의 모든 외국 제품을 살 수 있었다. 민족적 자부심이 높아졌다. 이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제품의 가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일본 회사가 상품을 수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일본 회사들은 더 많은 생산 공정을 해외로 옮기면서 그러한상황에 대응했다.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있는 그들의 공급자들또한 통화 가치의 변화에 타격을 받았고 똑같이 반응했다. 공급사슬은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두 명의 미국인 사회학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P219

아시아 사업체들은 입력 계수 factor inputs의 달러 가치가 갑작스럽게 상승한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그리고 생산한 제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해 미국 소매업자와의 계약을 유지하고자 했기에 재중국 본빨리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대만 경공업의 대부분은... 중국 본토로 ...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 이주했다. 일본의 수출 지향...적인 산업의 대부분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게다가 토요타, 혼다, 소니와 같은 기업들은 미국에 사업체를 설립했다. 한국의사업체 또한 노동집약적 공정을 라틴아메리카와 중앙 유럽의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로 옮겼다. 새로운 사업체가 설립된 각 지역에서 낮은 가격의 공급자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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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하라가 ‘몸을 헐어‘ 사막이 된 것이라면, 붉은 사하라 시편들은 ‘마음을 헐어‘ 이룩한 시의 모래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코끼리 같은 허기‘가 기다리는 사막에서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낙타 젖을 먹이는 어미처럼 대지모신大地母神에 접신된 시인은 ‘이 세상 강물이 달지 않느냐‘고 노래하며 달디단 시의 ‘검은젖‘을 꺼내 목마른 세상에 물리려 한다. 인간의 원형적 세계로 눈길을 돌리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확장된 의식을 보여주는 김수우의 시편들은 고독과 적막, 슬픔의 유전인자를 감춘 채 무어인 전사의 ‘붉은 팔뚝‘을 그리워하면서 야성과 신성이 살아 소용돌이치는 시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그 진경의 내부엔
‘핏빛 산맥‘과 황야를 건너는 발바닥이 있고, 사하라처럼 뜨거운 시의 심장에서 솟구친 ‘장엄한 영혼의 춤‘이 있다. 고진하(시인)

김수우 시인의 행로는 오랫동안 사하라 사막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그의 시 속에서 붉은 모래가 날리고 입 속에 그 모래들이 서걱서걱 씹힌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걷는 시인의 시는 우리들에게 푸른 바다가 변한 ‘붉은 사하라‘를 선물하고, 우리는 그 사막을 베개처럼 베고 누워 다시 숨쉬는 바다를 꿈꾼다. 더 이상 사막으로 가는 길을 묻지 마라. 이미 그곳 ‘서쪽 정거장‘에 우리를 다시 사막으로 데리고 갈낙타가 기다리고 있으니.
정일근(시인)

부항뜬 봄


저고리 속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키운 것일까 불빛에드러난 무수한 등비늘, 피멍자국 겹겹 너울진 어머니의 칠순 등짝에 또 부항을 뜬다 그날 이후 양푼마다 빨랫감마다 물고기가 파닥이고 칫솔통에도 동백화분에도 어머니의 비늘이 묻어났다

밀물진 햇살 따라 몰래 솟구치는 중이었을까 아침 대문간에서 물끄러미 하늘 바라던 어머니, 흰 머리칼은 수만갈래 파닥임으로 파도쳤다 그때 실러캔스° 한 마리 반짝, 지느러미를 치며 바람을 타고 오른다 싱싱하게 물오르는아지랑이 나이테

봄, 케토톱을 붙인 바다가 낳은, 일흔 번째
새봄이었다

°실러캔스: 고생대부터 현재까지 생존하는 물고기

저력


태풍이 지나간 숲
풀벌레 울음 가득, 차오른다
숙일대로 숙였던 풀잎들이
낮을대로 낮게 웅크렸던 베짱이며 철써기들이
다시금 나무를, 나무의 어둠을 일으키는 소리.
한번 더 숲을, 숲의 뒷벽을 세우는 소리
고요하다
투명하다
앙금 진한 울음이 별을 띄운다
폭풍에 떠밀린 수천 톤 유조선 위로 별이 맵다
흔들어보아야 알게 되는
낮은,
힘.

꽃이 지네



몰래 스며드는 귀엣말
그래, 그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깜박인다, 쌀푸대에, 눈빛을 쓸어담는다, 나사를 푼다, 살아간다, 알전구 하나, 켠다, 하늘과 지붕의 경계境界를, 빗질한다. 목구멍으로, 죽음이 침넘어간다, 열리는 무덤, 경계經界를 지운다, 푸대를 푼다, 물소리 걸어간다, 무늬도마뱀 태어난다, 맨손이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단추를 푼다, 반점이 많은 시간의 살결, 알전구 흔들린다, 또 살아간다, 또 나사를 푼다, 밥주걱에 붙은 북두칠성, 깜박인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그래, 그래,
바람이 꽃을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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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의자도 거울도 전부 사막이다.
집도 절도 붉은 모래다.
무수한 나사로 조여진 문명 속에서
마주치는 원형의 세계, 그 굳건한 적막에
하루하루 아득하다. 막막하다.

고생대의 숲이 지금도 살아 분열하고 있는
사하라는 가장 치열한 생명의 땅이며, 오늘 내 삶의 현실이다.
말의 틈새기로 먼지처럼 분열하는
몸과 꿈의 뜨거운 분신들이
아프고 그립고 고맙다.
때문인지 이 시집엔 발끝을 세우는 것들이 많다.


이천오년, 가을옷을 꺼내며
수우헌에서

聖발바닥


사하라의 노을을 넘다가
신발을 벗고 동쪽을 향해
무릎 꿇는다
모래비탈에 입맞추며 기도하는
흰옷 입은 모슬렘 사내
왜 엎드린 사람의 키가 더 클까
위대한 건 신이 아니라
모래로 빚어진 나그네다
흙먼지에 수만큼 갈라진 聖발바닥
옷자락 날리며 핏빛 산맥을 다시 걸어가는
모래만 내짚는 모랫덩이의
맨꿈, 맨뒤꿈치
그 삼억만년 퇴적된.

낙타의 젖이 달다


결혼을 앞둔 딸의 단지에
어미는 낙타젖을 따른다°
이는 세상의 강물이니 다 마셔야 한다
코끼리 같은 허기가 기다리리니
저 펄럭이는 사막을 안아야 하리니
딸아, 이것을 다 마셔야 한다
사람이 네게로 흘러오리니
사람이 네게서 넘쳐나리니
일곱 살에 색칠했던 하늘, 한뼘한뼘 완성되어
말라깽이 가슴도 젖살이 오르리라
낙타등에 올라탄 언덕을 보아라
야자나무가 키우는 낮달을 보아라
이 세상 강물이 달지 않느냐

어미 젖가슴에서 쏟아진 사막
딸의 앞자락 속으로 감겨든다


•사하라 모리타니에서는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낙타젖을 먹여 살을 찌우는 전통이 있다.

광야


비쩍 마른 염소를 치는
빼빼 야윈 아이에게
사하라는 한 벌 남루한 옷일 뿐이니
그 옷을 입고
염소는 아이처럼 웃는다
아이는 염소처럼 달린다

둘 다 발꿈치가 단단하다

뿌리


사막에서는 소문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 막막한 신의 등짝에서는
뿌리가 몸통의 두 배라는
바오밥나무가 자랍니다
하늘을 본다는 건
제 넓이 두 배의 침묵 위에 서는 일,
제 키 두 배의 고요를 키우는 일임을 알아
바오밥은 바람이 먼데서 실어온 말까지
그냥, 삼킵니다, 깊은 데로,
깊은 데로 발목만 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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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부산에서 태어나,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서부 아프리카의 사하라, 스페인 카나리아 섬에서 십여 년 머물렀고, 대전에서 십 년 가까이 지내면서 문학지기들을 사귀었다. 틈틈이 여행길에 오르며 사진을 좋아한다. 이십 년 만에 귀향, 부산 원도심에 인문학 북카페 <백년어서원>을 열고 너그러운 사람들과 퐁당거리고 있다. 
고지식함과 결벽증으로 여러 사람 괴롭히는 이상주의자.
 시집 『길의 길」.『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젯밥과 화분』, 산문집 『씨앗을 지키는 새『백년어』 『유쾌한 달팽이, 「참죽나무 서랍」, 「쿠바, 춤추는 악어』가 있으며 
사진에세이집으로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밑 푸른 바다』, 『당신은 나의 기적입니다>가 있다. 2005년에 부산작가상을 수상하였다.

항도 부산에는 김수우 시인이 운영하는 인문학 카페 <百年魚>서원이있다. 거긴 백 마리의 나무 물고기가 제각기 한자로 된 외자 이름을달고 있다. 그들은 옛집에서 해체된 목재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어림잡아나무로 백 년, 한옥 목재로 백 년을 살았던 전생을 지녔다. 폐목재로널브러져 있다가 물고기로 환생해서 백 년은 더 살 붙이들이다. "나무는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릭의 힘으로 살아가듯"(「몰락을읽다), 이 목어(木魚)들도 최선을 다해 자랄 것이다. 자리도 꼭 낡고,
작아지는 쪽으로 자라면서 천천히 ‘몰락‘해갈 것이다.
이 시집은 "우리는 아직, 슬픔이 부족하다"고 읊조리는 생명체들이
‘몰락‘으로 치닫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경전‘이다.
몰락은 바닥을 지향하는 속성을 지녔다. 바닥도 땅바닥이 아닌 속 모를바다의 밑바닥으로 치닫는, 그야말로 몰락(沒落)하는 삶의 기록이다.
몰락과 단절에서 이어지는 죽음, 혹은 오감에서 감지할 수 없는 사라짐에대한 기록과 동시에 부상(上)과 소생, 혹은 첫 호흡에서 거듭나는 여리고순한 것들의 첫 나타남에 대한 기록이다. 앞의 기록은 현실이고 뒤의기록은 미래거나 시원이다. 시원은 지금 없고 미래는 아직 없다. 그래서시인은 "배고플 때 눈물 날 때 헤어질 때도 신발코만 내려다보"「절감둥어운다. 폐목재에서 물고기들을 불러내듯이 폐허의 삶에서 시들을 건져올리며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나가고 있다. 새로운 경전이 생겨난 씨와날이다.
안상학 (시인)

시인의 말


비겁한 슬픔과 모순들이 나를 키우고 있었다. 꾸물꾸물민망한 날들이 구렁이처럼 제 꼬리를 말고 또 말았다. 막막하고 먹먹한 날들을 계속 삼켰다. 아프다 말하는 것도 사치였다. 세월호 이후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지만,
도무지 말이 안되는 날들 속에서 나는 자꾸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었다.

괴물화된 문명 속에서 나도 병든 괴물이었으리라. 다행스럽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낡은 책상에서 ‘몰락‘이라는 단어가 새움처럼 돋아났다. 모든 몰락은 ‘이상‘과 ‘심연‘을 가지고 있었다. 또 몰락은 온 힘으로 생명을 품고 있는 겨울숲 또는 혁명과 닮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얼마나아름답게 몰락했던 걸까. 그 몰락에서 무수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도 영웅들은 열심히 몰락 중이니.

죽어서 빛나는, 죽어서 살아 있는 세계가 바로 시(詩)임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흔쾌히 몰락할 수 있

을까. 가난한 어머니처럼. 전구를 넣고 양말을 꿰매던 늙고못생긴, 어깨 굽은 어머니 말이다. 이상과 심연 사이엔 대지가 있고, 그 대지엔 사랑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모두 메타포로 빛난다. 이제부터 천천히, 다시 사랑을 배울참이다.

내려가는 길. 깜깜한 데로 내려가는 나선형 긴긴 계단을자주 본다. 지옥인 듯 무섭다. 하지만 그 끝자리에 하얀 민들레가 흔들리고 있다. 그 본래 소박하고 위대한 그 눈부심.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착각이다. 울어야 복이 온다.
따뜻한 눈물이 가장 큰 선물이다. 신은 가장 어두운 지하에산다. 오래오래 우리를 기다린다. 시(詩)처럼,

물속 사원


나물다발 속
돈나물꽃 한 줄 묻어왔다

노란 꽃부리 기특해
유리잔에 담았더니 이튿날부터 먼 안부인 듯 내리는 실뿌리
아침저녁 풍경(風磬) 선율인가 했더니

꽃질 무렵 뿌리에서 깨어나는 잎, 잎들

점, 점, 점 번지는 푸른 눈망울 사이로 아득히 수미산 가는 길
초록 만장 나부낀다

매일 백팔배 할 곳이 생겼다 - P43

아직


층계참에 흩어진 호랑나비 날개
넘어진 하늘, 아직 찬란하다

어머니는 운동화 필통 주름치마를 외상으로 사주었다 늘 그랬다 아직도 꿈속에서 외상값을 갚는 어머니, 초등학교 입학식 히말라야시다 옆에서 호랑무늬를 달고 있다 꿈속 운동화가 아직 새 것이듯 엄마 날개는 아직 젊다 젊다

오래 전 잃어버린 단추, 오래 전 사라진 제단, 그 오래 전 닫힌 덧문, 언제나 희미한 암호, 동해남부선이 자귀나무가 되었다는 소문, 불규칙한 이별들, 이끼가 된 진실, 수천 생에서 죽을 때마다 새잎 틔우던 것들, 것들, 호랑무늬가 진하다 아직

먼지로 돌아가는 날개의 힘 - P75

소리 비늘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음성
아득한 원시 북소리로 울린다
괜스레 눈물 괸다.
그가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 먼데서 도착한 안부들이다
모든 길은 기도(祈禱)가 만들어냈으니
물소리도 망치 소리도 원래 기도였으니
새 울음이 만든 구불텅한 하늘을 걷고 걸어
마침내 귀에 닿는,
나를 지상의 모퉁이에 살아 있도록 그려내는
저 숟가락 같은 발언들

몇 이랑 텃밭 푯돌이 되어
메마른 분수대를 지키는 마디풀 되어
문턱에서 마르는 아기 운동화가 되어
허공에 다리를 놓는 노인의 늙은 하모니카가 되어 - P94

두런거린다
보이지 않는 소리 비늘이 서로의 빛깔을 만들고 있으니

당신도 나도 원래
아즈텍에서 태양신을 낳던 여신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 또 출발했으리라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목청에
까닭 없이 감동한다
그 안부로 살아갈 것이기에, 다시 걸어갈 것이기에 - P95

꽃잎 감염


올해 처음 핀 거라며 선물 받은 라일락 꽃잎 네 개

보랏빛 마스카라 깜박인다 보라바람 풀럭인다

도시락에 놓은 한 잎 놓으니 괜히 겨드랑이가 가렵다

국어사전에 끼워 넣은 한 잎, 중독된 단어들이 풋풋해진다

엽서에 부친 한 잎, 문딩아, 고맙다, 친구가 키득거린다

송도 앞바다에 한 잎 띄운다, 온 세상이 한참 가렵겠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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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길


잊혀진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숭고한 영혼들의
용감한 몰락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시와 삶에 빚지는 일, 더 뻔뻔해져도 될까. - P9

최선(最善)


아침 영롱한 거미줄, 창틀과 깨진 화분을 잇고 있다

무한 서사를 퉁기는 외줄 우주, 명랑하다

내가 만든 커다란 먼지들이 거미줄 타고 논다 나를 본다

풀렁플렁 구르는 투명한 몽당발들

한순간, 문득, 툭,

끊어질 평생을 알아 최선으로 빛난다 칡덩굴이 아니라

절대 찰나에 끊길, 끊어져야 하는 영원을 보았기에

최선으로 빛나는, 빛나야 하는, 미치는, 미쳐야 하는

최후, 찬란한 지도 한 장 - P13

굴절의 전통


입석으로 타서 간이의자를 하나 잡았다 다행이다

매화가 번진다 그리운 이가 먼데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지난 겨울 철탑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다행과 다행 사이 다행스럽지 못한 것들이 꽃대처럼 칼금처럼 불면처럼 직립한다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되었다

성냥갑 만한 메아리도 없이 봄비는 다시 철탑으로 굴절된다

내가 가려는 바다는 통로 천정에서 거물거물 떨고 있다 - P14

팬티까지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다가 양말 벗을 때의 수치를 정직이라 부르는

네 칼날도 꽃으로 굴절될 것인가 분노란 그따위 궁리이다

오늘도 손해를 본 토마토 수레는 굴절되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니다

젖을 빨던 질문들은 철탑으로 굴절되었다 다행이다 아니다

햇빛을 탕진하는 흐린 동백, 아슬아슬하다

신호등 앞에 늙은 외투처럼 서 있는 하늘, 뒤뚱거린다

간이의자를 접는다 - P15

빗방울경전


비가 온다 잘 지냈나 익숙한 주문(呪文)처럼 내리는 비, 나도 그들을 잘 안다

과일장수 아버지는 비가 오면 다섯 살 딸을 사과박스에 뉘고 비닐을 덮어 짐자전거에 실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부터 빗방울을 사랑했다 홀로 걷는 법 함께 내려앉는 법 정직한 슬픔을 토닥토닥 배웠다

한때 빛을 키우던 지느러미들, 한때 날개를 고르던 새들

비가 오면 포장마차에 앉는다 빗방울 당도하는 소리 속에서 천천히 빗방울이 된다 단추도 되고 단춧구멍도 되던 빗방울 유리창도 되고 바다도 되던 빗방울들 남비에서 끓는다 홀로 푸는 법 함께 풀리는 법 정직한 슬픔이 보글보글 떠오른다

저주를 푼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알아보는 일이다 - P16

오래, 아무리 모질게 잊혀져 있더라도 금세 알아본다

막다른 골목 유행가도 삐걱대는 관절도 천박한 자유도 불완전한 마술도 새우깡 흘린 노숙의 자리도 싸구려 강박증도 빗방울이 된다 자박자박 낮은 발길이 된다

어떤 저주든 아름답게 풀어낼 수밖에 없는
몇 생애 내 어머니이기도 했던
홀로 걸어와 함께 내리는, 저, 이방인들
슬쩍 지나도 그림자조차 없어도 그들을 잘 안다 냄새와 그 유영이 익숙하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 P17

몰락을 읽다


구름이던 큰 나무에 구름이던 작은 새들이 앉아 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인다 아무 할 일이 없다 씹었다가 밸고 뱉었다 씹는 하느님

담벼락에 걸터앉은 젊은 햇빛이 말을 건다
난 여섯 살 소꿉동무였어 얼굴 잊은, 탱자 울타리에서 불러대던 옥희라는 이름이 간질간질 돋아난다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락의 힘으로 살아가듯

풀꽃과 어깨동무하고 한참 절룩이는데 뒤통수 닮은 진실들이 옆에서 걷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온 나무그늘이 어깨를 걷는다어깨에 작은 새들이 논다 나도 어깨가
있음을 비로소 안다 - P18

몇 번 몰락에 발가벗은 것들은 기원(起源)을 향해 자란다

큰 나무는 자라서 작은 나무가 되고 작은 나무는 자라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자라서 새가 되는 마을

질긴 하느님,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페이지, 유리창이 맑다

한참 가난해지고 나서야, 맑은 옥희 까르륵 웃고 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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