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세 번째 장편소설의 초고를 마쳐놓고 여행 가방을 쌌다.


나 좀 쉬려고요. 좀 지쳤거든요.


이런 마음이 드는 순간, 먼지 앉은 벽장문이 열리며 몇 개의 문장이 선율처럼 떠올랐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낮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의 문장들이 벽장 속에서 떠오르는 날, 여행을 준비한다. 나는 키득거리며 빨강 여행 가방과 남색 여행 가방 중 어느 - P4

걸 가져갈까, 이런 사소한 생각을 하며 커피콩을 간다. 나 자신에게쪽지를 남기듯 다시,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남,


나이 드는 것이 참 좋다, 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사람들이가진 저마다의 예쁜 구석이 잘 보여서 좋고 몰아붙여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비교적 잘 감각할 수 있게 되어서 좋다. 청춘의 시절에는 자주 속았다. 사랑도 분노도 절망도 바닥까지 몰아가야만 직성이 풀리고 고통스러워도 그래야만 진짜라고 생각했다. 진이 빠질때까지 울며 뛰며 소리치며 스스로를 닦달했다. 스스로 경계 지어놓은 진짜와 진짜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아 그것들을 판독하기에만도 늘 시간이 모자랐다. - P5

하긴, 청춘은 그래야만 또한 청춘이려니 이제 청춘의 시절이 지나자 내가 가진 에너지를 조율하게 된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힘이 어느 만큼인지 보이기 시작하고 그걸 충전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 예전엔 어딜 가든 나를 꽁꽁 싸매놓은 채 뜨거운 돌을 밟듯이 발을 재게 디디며 낯선 것들을 탐험했다. 일종의 대결의지를 가지고서 그 낯섦들을 내 것으로 경험하고 느껴야 한다는 기묘한 소유 의지가 있었다고 할까. 지금은 살짝 힘이 빠진 상태를 낯 - P5

선 시간과 공간에게 무람없이 들키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무언가 얻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허술하게 짐을 싸고 그냥훌쩍 떠난다. 다만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 좀 쉬려고요. 좀 지쳤거든요. 일단 쉬고 다시 잘 살아볼게요.
알았어요. 좀 쉬고 다시 잘 사랑해볼게요.
삶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다행이다.
조금씩, 병아리 눈물 만큼일지라도, 조금 조금씩,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은 거다. 산다는 게 영 녹록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갸륵한 수고, 아, 좋은 날이다. - P5

선 시간과 공간에게 무람없이 들키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자에서 무언가 얻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허술하게 짐을 싸고. 그냥훌쩍 떠난다. 다만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 좀 쉬려고요. 좀 지쳤거든요. 일단 쉬고 다시 잘 살아볼게요.
알았어요. 좀 쉬고 다시 잘 사랑해볼게요.


삶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다행이다.
조금씩, 병아리 눈물 만큼일지라도, 조금 조금씩,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은 거다. 산다는 게 영 녹록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갸륵한 수고. 아, 좋은 날이다. - P6

그랬다. 나는 개개인의 삶이 자신의 내면의 풍요에 맞춰져 있고, 사회의 전체 분위기가 개인의 행복감을 훼방하지 않는 그런 공간 속으로 들어가 몸과 마음을 쉬고 싶었다. 행복에 감염되고 싶었다고 할까. 우리 사회 전체의 차갑고 딱딱한 절망, 어떤 무기력의 상태라고나 해야 하는, 무거운 매연처럼 내려앉은 이 차가운 절망으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깨울까. 이런 절실함이 내게 있었다. 행복의 감각이 깨어 있을 때라야만 우리는 꿈꾸기를 지속할 수 있다. 무엇이 정말 행복한 상태인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묻지 않게 될 때 꿈도 끝난다. 꿈 없이 행복 없이, 인생은 뭐란 말인가. - P7

나는 지상에서 신비가 사라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경험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신비는 예술과 과학의 근본을 이루는 진정한 모태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확실한 길만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결코 우주를 맑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아름다웠던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이런 태도를 나는 사랑한다 내가 아인슈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놀라운 법칙을 발견해낸 천재과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주와 지구의 신비 앞에 엎드려 탄성을지를 줄 안 아름다운 몽상가이기 때문이다. 신비를 잃으면서 인간이라는 종의 타락은 가속화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또한 지나친 신비주의도 경계하는 사람이다. 어느 시대건 지나치게 배타적인 종교나 오컬티즘은 인간의 미혹에 봉사해온 혐의가 크다. 특히나 나는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생각하 - P14

는 ‘절대‘의 세계에 대한 본질적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가진 우주관은 범신론에 가깝고, 다양다색의 진리가 자연스럽게 창조, 수용되는 사회일수록 평화의 구현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쪽이다. 세상 만물 모든 것 속에 신성함의 씨앗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속에 부처도 예수도 성모 마리아도, 크리슈나도 존귀한 가능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 P15

오로빌에 도착해 보름 동안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놀았다. 메모나 간단한 일기조차 쓰지 않았다. 단 한 글자도 쓰거나 읽지 않고 보름 동안이나 놀아본 것은 드문 일이다. 나는 오로빌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숲길에서 여러 번 길을 잃었고 사는 일이 길을 잃는일이기도 하듯이), 오가며 마주친 많은 사람들과 따뜻한 미소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슬슬 뭔가 쓰고 싶어지기 시작한 거다. 노트북을 무릎에 안고 커서가 홀로 깜빡이는 무한한 공포의 시간 속으로 여행을하고 싶어지는, 여행지 속의 또 다른 여행, 이른바 글쟁이의 지병이 도진 거다.


사실 작가에게 여행이란 문학하는 행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문학은 꿈이다. 여행은 꿈을 충동한다. 문학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자기 고백과도 같다. 포기하고 싶은 순 - P17

간이 많지만 끝내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다시 들끓는, 문학은결국,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결국은인간학인 문학의 운명을 나는 사랑한다. 여행 역시 인간학의 공부가 지속되는 학교이니, 이 에세이도 그렇게 나의 학교 외딴 교실 한칸에서 자란 셈.


그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며 살았지만 여행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모든 여행은 시와 소설로 전이되어 몸 바꾸기를 하기에 특별히 - P18

여행 에세이라는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로빌을 여행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똑같은 욕망을 욕망하게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욕망의 획일성이 오로빌에 와서 더욱 아파진 까닭이다. 갈수록 현란해지는 이 시절에 우리의 삶의 방식은 점점 더다채로워지는 게 아니라 왜 더 획일적이 되어 가는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게 된 걸까.
지금 우리 사회는 주체의 과잉이 문제라기보다 주체의 실종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휘황한 거리에는 ‘나‘라는 광고 문구가 넘치건만 왜갈수록 나를 잃어버리며 산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나의 실종에 불안하면서도 남들 사는 대로 살지 않으면 또 다른 불안이 엄습하는기이한 닫힌 회로, 출구 없는 일상의 쳇바퀴로부터 어떻게 ‘나‘를 찾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삶의 풍경을 만들며사는 이들을 훔쳐보고 싶었다고 할까. 굳이 말하자면 이 여행 에세이는 ‘약간 건강한 의도를 가진‘ 훔쳐보기의 소산일 수 있겠다. 이훔쳐보기를 통해 우리의 삶에 몇 개의 새로운 창문이 더 생기고 열려서 기존의 사회가 강요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삶과 행복도 가능하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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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
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
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
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

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지구의 시간.
해지자 비가 내린다.
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
잠시 겹쳐진 우리는
잠시의 기억으로도 퍽 괜찮다.

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
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하는
이런 시간이 좋아.
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

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

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
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야.
알게 될 날이야.
축복해.

허공


수천수만 번의 벼락도
나를 멍들게 할 수 없다

비어 있으므로

나는 자유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는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해라, 지시를 기다려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오만과 무능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 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됨과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살아 있어라, 산 자들이 숙제를 다할 때까지.

지옥에서 보낸 두 철


보았네

보았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보다,의 지옥

인간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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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쓰기에 내 삶을 바쳤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내게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묻는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그들이무언가를 비밀스럽게, 어렵게 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를 가르쳐줄 수는 없다. 그 과정과 구상이 내안에서 무르익어 표출될 때까지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쓰는 방법도 정확히는 모른다. 글쓰기는 문장 안에서 호흡할줄 아는 것이다. 독자가 필수적인 일종의 대위법 안에서, 나의리듬뿐만 아니라 독자 자신의 리듬에도 적응하면서 나와 함께서두르지 않고 호흡할 수 있도록 문장만큼이나 행간 사이에도약간의 침묵을 둘 필요가 있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문장이 숨 쉬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 연습해왔다. 미리 계획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열다섯 살에는 돈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 P958

준비 과정이 길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상 과정이 빠르게 이뤄지기도 하니까. 내 준비 과정은 호흡하는 것을 배우고, 몇몇 사람이 문체라 부르고 나는 "자연적인 문체"라 부르는 내 글쓰기 방식을 스스로 배신하지 않는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내 교열자가 내 글의 단어를, 구두 - P958

점을 바꾸지 않는 것에 감사한다. 내 교열자는 악센트 부호를 넣는 것이 전부인데, 그건 내가 계속 빠트리기 때문이다. 브라질리아에서 온 한 청년이 리우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나를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전화상으로 이해한 바에 의하면, 그는나를 만나서 내가 그에게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는지 말해주길원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랑 만나기로 약속한 일요일, 나는 점심을 먹고 유감스럽게도 잠이 들었고, 그 청년은 떠나버렸다. 미안해요. 언젠가 나를 다시 찾아주세요. 그러나 지금 당장 그에게말할 수 있는 건 브라질에서 책을 써서 받는 수입으로 생활하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방법은 기자가 되는 것과 다른 소소한 일을 하는 것이다. 소소한 일을 더하면 경제적으로 합당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수입에 간신히 도달할 수 있다.
거기에 이런 일들을 다 하면서 문학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내야 한다. - P959

주디스 역시 연극을 좋아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 자기를소개하면서 극장에서 예술가로 일하고 싶고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대부분은 조롱했다. 모두가 경험이 없는 순진한 이젊은 여자 앞에서 자연히 다른 것을 상상했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직업도 없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거리를 떠도는 일뿐이었다.
결국 누군가- 어떤 남자였다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 데려갔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가엾게 여기길. 주디스는 곧 아기를 낳을 예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았던 이 이야기는 끝난다.
버지니아 울프는 묻는다. "누가 여성의 몸에 갇힌 시인의 뜨겁고 맹렬한 심장을 평가할 수 있는가?" - P968

베른


눈앞에서 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목격한 이방인은 어쩌면 신비를 밝힐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위스의 풍경은 아름다움의 증거를 너무 많이 제시하니까. 첫인상은 가벼워 보이지만, 그다음에는 불가해한 느낌이 뒤따른다. 엽서 같다. 그러나 조금씩 그 부동의 상태가, 그 균형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본다. 무감각하고 조용한 공간이다. 그러나 금방 쓰러질 것 같은 벽들이 집들과 교회들을 한데그러모으는 이 마을에는 일종의 단호한, 내부 지향적인 집중이있다. 탑들과 골목길들과 뾰족뾰족한 아치들과 침묵이 있는 이도시에서 악마는 알프스산맥 너머로 추방되었을 것이다. 악마없는 도시에는 혼란스러운 평화, 개혁의 기치 아래서 가혹하게형성된 삶의 흔적, 느린 정복의 표시들, 완고하고 고통스러우며지속적인 광택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P1012

악마를 멀리 붙들어두려는 결의인가? 청결에 대한 너무도 스위스다운 욕망에서 배어나는 이 완고함, 땅 위에 공기의 투명함을 복제하려는 욕망, 준엄한 윤곽의 산이 지시하는 명확한 법칙에 대한 순종, 치명적으로 불순하고 무질서한 인간적인 것을 제물로 바치려는 의지, 질서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도덕적 필연이다. 질서는 스위스 사람이 스위스에서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다. 스위스 밖에서 스위스 사람은 그가 추방한악마로 인해 놀라고 방향을 잃는다.
거리에는 표정을 아끼는 고행자의 얼굴들이 있다. 그 평온하고 무거운 표정에는 맹신의 힘을 연상시키는 조용한 힘이 있다.
누군가 스위스는 군인이 아니라 전사라고 말했다. 스위스가 전사라면, 스위스 여자는 여전사다. 강인하고 굳건하고 강한, 어떤희생에 바쳐지는 존재. 그녀는 대성당에서 열린 콘서트에 있다. - P1013

화장기 없고, 냉정한 그녀는 목을 축이면서 오르간 소리와 합창단의 날카로운 목소리, 이 민족의 근엄한 기쁨에 맞는 순수한 음악을 들으며 기쁨을 살짝 드러낸다. 그녀는 의자에 완전히 기대지 않고 있다. 그녀는 약간은 근엄하고 이해하기 힘든 모습으로남아 있을 것이다. 꽉 막힌 매력 없이, 때와 장소를 아는 일종의청교도적인 우아함을 지닌 채, 하지만 허영심을 부끄러워하는옷차림에 반기를 들면서,
이 부끄러움은 봄에 극복되어 조금은 대담해진다. 환한 블라우스와 어두운색 원피스에 작은 주름 깃 장식들이 나타나며, 빛을 받아 섬세한 여성성이 돋보인다. 노인들은 정원의 자리를 차 - P1013

지한다. 그곳은 존경할 만한 노인들의 땅이다. 그들은 벤치에 앉아서 반짝이는 호수와 눈 덮인 알프스, 상냥하고 쾌활해 보이는각각의 나뭇가지를 응시한다. 그러다 여름이 온다. 미지근한 향기 속에서 선들은 더욱 선명해지고, 꽃들은 더 서둘러 난폭해지며, 바람은 결국 조금의 먼지를 일으킨다. 놀이, 놀이, 놀이-그것은 악마 없는 개화다. 가을이 오면 물 색깔이 짙어진다. 사냥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은 사냥 고기를 산다.
산, 표면, 작은 형태, 모든 것은 더 차가워진 바람 아래 태양 없이빛난다. 집이 아늑해진다. 그러고 겨울이 온다. 놀이, 놀이, 놀이.
그러나 지금은 다시 봄이다. 우리는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다. 베른의 다리 아래에 얼어붙은 강이 가볍게 달린다. 빛과 고요와신비, 그것이 내가 베른의 창문으로 본 것이다. - P1014

옮긴이의 말

‘리스펙토르‘라는 세계


"카프카가 여성이었다면, 릴케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자 브라질인이었다면, 랭보가 어머니였다면……."
작가, 엘렌 식수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수식했던 말이다. 카프카, 릴케, 랭보, 이 커다란 이름들 옆에 리스펙토르를 나란히 두어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나는 그들을 모두 지우고 남은 말들로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여성,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자 브라질인, 그리고 어머니,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가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년 동안 브라질 언론에 칼럼니스트로서 썼던 글들을 여기 모았다. 1967년에서 1973년까지 매주 토요일, 일간지 <조르나우 두 브라질>에 연재했던 칼럼들과 미출간된 글 120편 이상을 함께 실은 이 작품집은 사실상 리스펙토르 문학의 원재료라고 말할 수 있겠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삶, 글쓰기에 대한 사유, 독자와의 소통,번역가로서의 면모, 또 그가 만난 인물들까지 리스펙토르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풍경들이 이곳에 담겨 있다. - P1021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여성의 텍스트‘의 개념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엘렌 식수가 설명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엘렌 식수는 「출구」에서 "오늘날 글쓰기의 여성적 실천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실천은 결코 이론화되거나 제한되거나 코드화되거나 할 수 없을 것이기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여성적텍스트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분석하고, 명료화하는 것이 규정이라면 여성의 텍스트는 그 반대편에 있다. 분석될 수 없고, 명료화할 수 없으며, 기존의 체계로 분류할 수 없는, 남성 중심적언어와 사고체계를 전복[]하는 글. 여성의 텍스트는 존재 자체가 전복이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문학은 그 전복된 세계에 위치한다.
식수가 말하는 "자신만의 경험으로 언어를 소유하고, 변형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리스펙토르는 직관과 본능의 글쓰기를 통해 오랫동안 우리를 길들인 언어가 존 - P1022

재하기 이전 혹은 그 언어 너머의 세계를 향하는 방식으로 실현한다. 언어가 탄생하기 전에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감각했을까.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세계를 무엇으로 명명할까. 그의글은 이 두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시도처럼 언어를 해체하며 새로운 앎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가 가닿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남성적 세계를 깊은 당혹감에 빠뜨리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수정하도록 이끌며, 우리의 원시적 감각을 깨운다. 목소리는 지금까지 배제되고 제한된, 우리가마주한 적 없는 존재들이 있는 장소들을 가리킨다.
익숙한 이곳이 아니라 낯선 저곳, 법칙 안이 아닌 바깥, 우리를통제하는 장치들(규칙, 해설, 설명 등)이 일소되는 곳. 바로 그곳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세계이다.  - P1023

그 꿈은 일종의 슬픈 강박이었다. 꿈은 중간부터 시작됐다.
살아 있는 젤리가 있었다. 그것이 젤리의 감정이었다.
고요했다. 살아 있는 고요한 젤리는 힘겹게 테이블 위를굴러다녔다. 내려가고, 올라가고, 천천히, 넓게 퍼지지않고, 누가 그 젤리를 잡을까? 아무도 그럴 용기가 없었다.
내가 젤리를 봤을 때, 나는 내 얼굴이 반사되어 젤리의삶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것을 봤다. 나의 변형은중요했다. 나는 녹지 않고 형태만 변했다. 나도 기껏해야숨만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포 속에 욱여넣어진 나는 내사본으로부터 원초적 젤리로부터 달아나려고 했고, 테라스로 나가 마지막 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 P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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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지금 이 순간을 떠도는 행려들의 꽃핌을 위하여.
위하여,라고 기어코 쓸 수 있기 위해 수없이 발목을 삔
갸륵한 의지의 몽유를 위하여.
그리하여 찾아낸 바로 당신을 위하여.

2016년 4월
김선우

花飛,그날이 오면


길 끝에 당도한 바람으로 머리채를 묶은 후
당신 무릎에 머리를 대고 처음처럼
눕겠네 꽃의 은하에 무수한 눈부처와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
눈 속에 모두 들여야지
하늘을 보아야지
당신을 보아야지
花, 飛, 花, 飛,
내 눈동자에 마지막 담는 풍경이
흩날리는 꽃 속의 당신이길 원해서
그때쯤이면 당신도 풍경이 되길 원하네

그날이 오면
내게 필요한 건
이름 붙이지 않은 꽃나무 한 그루와
당신뿐
당신뿐
대지여

소울메이트


1

반쪽 빛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반쪽 어둠을찾아 영접하는 것이다.

영혼은 본래부터 완전하였다.


2

영혼의 혈거

그 바닥엔

우주먼지로 지어진 밥상 하나

그 위엔

먼지의 밥 한 그릇 숟가락 두 개

바라보며 나누어 먹으며 가끔 입가를 
닦아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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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소심한데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나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 소심한 영혼의 비명은 고독 속에서만 나온다. 역설적으로 영혼은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를 원한다. "자, 카를루스, 인생에서 왼손잡이가 될 거야." (내가 드루몽의 시를 제대로 인용했는지 모르겠다. 외워서 쓰는 것이다.)
그리고 월급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고문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자신이 돈으로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 아는 사람처럼 자신감이 있는 척 자기를 드러내야 할까 아니면 어설프고 과한 겸손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인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소심한 사람들의 대범함이 있다. 갑자기 대범해져서 공격하는 듯한 단호한 어조로 월급 인상을 요청하다가 금세 당황해 불편함을 느끼고, 월급 인상은 과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매우 불행해지는 것이다. - P806

비 오는 날은 게을러진다. 글을 거의 쓸 수 없다. 지난번에는주말을 보내러 프리부르구에 갔다. 비가 왔고 여기서처럼 게으름뱅이들을 봤다. 내게는 지나친 모습이었고, 그걸 보니 잠을 자고 싶어졌다...... 완전히 젖은 게으름뱅이들이었다. 그들은 꼼짝하지 않았고 게으름에 죽어갔다. 그들에게서 동물의 냄새가났다. 거의 무색에 가까운 돌 색깔이었다.
프리부르구는 멋지다. 우리가 머물렀던 집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말, 닭, 자보치카바, 데이지, 레몬, 장미 같은 것들. 빵을 굽는 오븐도 있었다. 진짜 농장이었다. 도시는 달라 보였다. 나는버스 터미널에 가서 <조르나우 두 브라질>을 사서 드루몽의 글을 읽었다. 후추로 양념한 수제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돼지고기어깨 살로 만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토요일에 있었던 일로, 그날은 나를 위한 날이었다. 나는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너무도 현실적인 꿈을 꿨고, 일어나서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그게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배고파서 밥을 먹고 다시 잠을 잤다. 내가 꿈꿨던 것은 어떤 남자와 나였던 여자였다. 꿈속에서 나는 약속이 있었고 약속에 늦고 싶지 않았다.  - P809

자연은 모두 게으르다. 말은 계속 먹다가 지금은 운다. 귀뚜라미 소리도 들린다. 달콤한 플루트 소리도 들리는데 바흐인지 비발디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새벽 4시, 조용하다. 이제야 두꺼비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미 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피운다. 이 집에는 그림이 없다. 카부프리우에는 예를 들어 스클리아르, 주앙 엔히키, 주제 지 도미 같은 사람이 있었다. 스클리아르는 황토색을 좋아하고 주앙 엔히키는 초록색을, 주제 지 도미는노란색을 좋아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름다운 수프 그릇이 있다. 내 타자기가 그립다. 나는 타자기를 두 개 소유하고 있다. 하나는 올리베티이고 다른 하나는 올림피아인데, 나는 올리베티를선호한다. 그 타자기가 타자감이 더 단단하고 뻑뻑하기 때문이다. 나만 빼고 모두 잠이 들었다. 이곳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말굽이 있다. 배고픈 새들이 지저귄다. 여기 있는 것이 이토록 좋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내게는 심농-내가 미치게 좋아하는 작가다의 책이 한권 있는데 프랑스어로 읽는 게 더 좋지만 이곳에는 포르투갈어로 된 번역본밖에 없다. 한 문장을 인용해보겠다. ‘커다란 빛줄기가 방을 가로지르면서 가느다란 먼지들을 밝힌다. 마치 공기의 은밀한 삶을 드러내듯이." 아름답지 않은가? - P812

1972년 11월 18일


글쓰기

문장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장은 탄생한다.
- P819

나조차도 내가 써야 할 시간을 계산해보면 깜짝 놀란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고 나는 확신한다-이것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산다는 것을 뜻한다. 하루, 한주, 한 달, 한 해란 단지 시간을 쌓아나가기만 하면 된다. 한 영국인이 그 계산을 했는데, 그의 이름은 모른다.
1년은 365일이고, 8,760시간이다.
하루에 수면 시간 여덟 시간을 빼자. 이제 일주일에 5일, 하루에 여덟 시간씩 49주 동안 일한다. (최소 휴가 기간 2주에 약 7일의 휴일을 빼야 하니까.) 직장이 멀리 있는 사람들은 하루에 이동하는 데 필요한 두 시간을 빼자.
그렇게 계산하다 보면, 1년에 1930시간이 남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혹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한 1930시간. 인생은 우리가 하는 일보다 더 길다. 매 순간이 중요하다. - P819

발걸음 소리가 더 선명해진다. 더 가까워진다. 현재 아주 가까이에서 울린다. 더 가까이. 이보다 더 가깝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내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계속 다가온다. 이제는 더 다가오지 않는다. 걸음은 내 안에 있다. 걸음은 나를 지나쳐서 계속 나아갈 것인가? 그것은 나의 바람이자 나의 경의다. 거리를 어떤 감각으로 지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걸음이 가깝지 않고 무거운 것을 보아하니 이제 걸음은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걸음과함께 걷는다. 나는 가담했다. - P832

삶의 과정은 실수-대부분 중요한 실수들이다-용기와 게으름, 식물 같은 주목을 끌기 위한 희망과 절망, 아무 곳도 아무것도 아닌 데로 이끌리는 지속적인 감정(생각이 아니다)으로 만들어지는데, 그러다 느닷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삶의 성역과의 두렵고 고유한 접점이 된다-그 인식의 순간(깨달음과 같다)을 우리는 가장 커다란 순수함으로 우리를 이루는 순수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과정은 어려운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꽃이 만들어지는 매우 까다롭고 자연스러운 방식을 어렵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엄마, 소년이 말했다. 바다는 아름답고, 파란색에 녹색이 섞여 있으며 파도가 있어요! 바다는 모두 저절로 만들어졌어요! 누구도 바다를 만든 적은 없어요!) 엄청난 조바심은(식물이 자라는 걸 옆에서 지켜보 - P832

다가 아무런 변화도 보지 못했을 때의 조바심은) 식물과 관계된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창피한 인내심과 관계된 것이다. (식물은밤에 자란다.) 우리가 "이렇게는 1분도 못 참겠어" 또는 "저 시계공의 인내심이 나를 짜증나게 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참을성 없는 참을성이다. 그러나 식물의 참을성, 쟁기를끄는 소의 참을성은 더할 나위 없이 우직하다. - P833

한번은 누군가 내게 인생의 첫 번째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인생의 순간들에 있어서 각각 첫 번째 책이 무엇이었는지를말하고 싶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 보물을 손에 들고 있었던 감각이 거의 느껴질 정도다.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와 알라딘의 램프 이야기가 담긴 매우 얇은 책이었다. 나는 그 두 이야기를 읽고또 읽었다. 아이는 책을 한 번만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아이는 거의 외울 때까지 읽는다. 아니, 아예 달달 외우고, 처음읽는 것과 똑같은 흥분으로 다시 읽는다. 예쁜 오리들 사이에서자란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는 나중에 자라면서 비밀이 밝혀진다. 오리 새끼는 오리가 아니고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던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고, 미운 오리 새끼의고통에 나를 동일시했다 어쩌면 나는 백조였던가? - P840

알라딘의 경우에는 내가 믿었던 불가능한 세상의 끝을 향해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그 시절에 불가능은 내가 닿을 수있는 곳에 있었고,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라고 말하는 지니를 상상하면서 꿈에 빠져들었다. 나는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어느 날 지니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상상을 했다.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그러나 이후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원하는 것에 도달하려면 자신이 가진 것을 써야만 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됐다. - P840

그러다 어느 날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늑대』라는 제목의 책을고르게 됐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잭 런던 스타일의 모험소설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뒤로 갈수록 더더욱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읽었던 그 책은 모험 이야기이되 꽤나 다른 모험이었다. 열세살에서 열네 살 사이에 짧은 이야기들을 이미 써봤던 나는 헤르만 헤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를 따라 하며 긴 이야기를 쓰기시작했으니까. 내면의 여행이 나를 사로잡았다. 커다란 문학을 만났던 것이다. - P842

열다섯 살에 내가 경험했던 인생에서 나는 일을 해서 처음으로 번 돈을 들고, 돈이 있으니까 자랑스럽게 서점에 들어갔다. 서점은 내가 살고 싶은 세계였다. 나는 서점에 진열된 거의 모든 책을 뒤적였는데, 몇 줄을 읽어보다가 또 다른 책을 펼치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 책들 중 하나를 펼쳤는데 거기엔 너무도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고, 그래서 그 책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감동하여 말했다. 이 책은 나잖아! 깊은 감동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억누르면서 그 책을 샀다. 그러고 난 후에그 작가가 아주 무명이기는커녕 그 시대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캐서린 맨스필드라는 것을 알게 됐다. - P842

희망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줘야 할까?

그러나 온갖 것에 희망이 있다면 그 일은 성취된다. 그러나 희망은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희망은 이 순간이다. 어떤 희망에 - P859

는 다른 이름을 줘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은 무엇보다 기다림을의미하니까. 희망은 이미 여기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표현의 어려움

표현이 가능하도록 어쨌거나 거기 있는 뭔가를 찾는 어려움은맹목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커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커피는 말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진 않지만 감정적 해방 행위를 상징하기는 한다. 그것으로써 내가 무상으로 해방된다는 뜻이다. - P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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