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세

그늘진 말들이 와서
가만히 안아주었네
빨리 늙고 싶은 마음들이 함께
차가운 맹지에 숨어들었네
끝내 묻지 않고 묻어둘 수도 없는
침묵은 다 벗은 상처의 끝물이었네
서로를 베어물면 햇볕마저 시고 떫었네
누구라도 먼저 져버리길
애타게 기다리지 않고
이미 전생에서 버림받은 말들로
사랑을 나누며 잠이 들었네
바람꽃 앞에 내던진 시간,
늘어진 속옷처럼 놓아버린 마음들이
꽃자리에 머물렀네, 저만치
떠올릴 때마다 새벽 가등이 꺼지네
어스름 속으로 푸르게 돌아보면
짓다 말고 버리고 온 집이 한채,
그 자리에 선 채로 늙고 있네 - P65

그믐달


우주로 열렸다 닫히는 문,

그대의 눈 - P94

곡우


쏟은 꽃잎을 담을 수가 없었다

라면 두 박스를 쌓아놓고
자취방에 숨어 잠만 잤다

가랑비 그치는가, 서툴게
때를 놓친 꽃들이 서둘러 갔다

먼 데까지 실비가 내린다 - P98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서


미당(堂)의 아리따운 처제는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범 김관식과 결혼했다지
술독에 빠진 남편을 찾아헤맬 때 그녀는
관식아! 관식아아! 판자촌 떠나가라 외쳤다지
마치 저녁밥 차려놓고 부르는 애 이름처럼
기억나는가, 달빛 환할수록 더 가난한 골목들
가진 것 없는 우리도 탕진하자
취생몽사 관식이처럼 몰락해버리자
맞짱 뜨려면 이 정부 아니면 장면(張勉) 급은 상대해야지
그렇게 싸우자 관식이처럼 망해버리자
취해서만 호기롭던 청춘이 허기질 때마다
그도 함께 마셔주었지
수십년 전에 요절한 젊음이 마치
오래된 술친구처럼 마주 앉아서

출판사 직원이 되어 편집용 시집을 뒤적이는데
갈피 사이에서 툭 떨어지는 흰 봉투
남태령 산동네에서 발신한 편지가 와 있었다 - P99

이십년 전 사월 어느날 너와 나의 숙취를 
동봉해서
"귀사에서 펴낸 「다시 광야에』(증보판)에도 누락된
김관식 시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전문을 보내드립니다"
정지신호를 무시한 죽음이 너를 앞세우고
십년이 흐르고 또 누군가 곁을 떠난 뒤에도
여린 마음과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혈서 쓴 지문 필름이 돌고 돌아 세월은 가고
똥으로 오줌으로 위조(僞造)된 역사(歷史)는 굴러내리고**
그 역사가 또다시 조작되고 미화되는 지금도
이 똥밭 이승의 한 갈피에 살아 있었다

산동네가 전원마을 부촌으로 바뀌고
갓난쟁이 너의 딸들이 입학하고 졸업하고
짝을 만나 아이를 낳는 그 순간에도
내가 죽고 또 천지와 꽃들이 폭삭 망하는 날에도
도움이 될까 하는, 너의 마음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중얼중얼 나는 마신다 - P100

배꽃 피면서 벚꽃 무너지는 자리에
주저앉자던 약속은 또 기억하는가
소심하고 걱정 많은 눈망울로 남은 벗이여
자꾸 없는 듯 희미하게 있지만 말고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 딱 한잔만 받아주거라
서른몇살 ‘피투성이 낙화(落花)‘로 갔을지라도
흔들리는 이 봄밤의 꽃잎처럼 잠시만
제발 잠시만 앉았다가 가거라



김관식 ‘완전범죄형의 범죄‘ 앞에서」(『66 연간한국시집』, 휘문출판사 1966) 변형 인용.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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