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잡지 에피에 실린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인터뷰‘를 읽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을 인터뷰한다는 걸까, 우주인 이소연을 한국 최초로 인터뷰한다는 걸까 궁금했다. 아직 우리나라의 우주인은 한 사람뿐이다. 유일무이한 ‘우주인 이소연‘ 앞에 ‘한국 최초‘가 붙는 것은, 외동딸을 두고 ‘우리집 장녀‘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색했다. 앞으로 우주 공간에 나가는 한국인은 더 많아질 테니까. 언젠가 우리 인류는더 먼 우주로 나아갈 테니까. 흥부네와 같은 자녀계획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외동딸이 미래의 장녀일 수 있으니 ‘한국최초 우주인 이소연‘이 어불성설은 아니다. - P97

인터뷰 제목만큼이나 본문도 쉽사리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우주 비행 십년 만에 우주 체류 당시의 일기를 공개한다는 편집자의 소개글을 읽고 그것부터 보려고 책장을 팔락팔락 넘겼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B6보다 작은 아담한 판형의 잡지이기는 해도 서른 쪽이 훌쩍 넘는 상당한 분량의 인터뷰였다. 일기를 스캔해서 실은 게 아니라 본문에 직접 활자로 옮긴 건가 하며 첫 장부터 다시 한번 넘겨보다가그 일기라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잡지에 실린 삽화라고 여기고 무심히 넘겼던 그림이 열흘간의 우주 비행 동안 쓴 일기였다.
알아보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포켓 사이즈 다이어리의 위클리 페이지 두 장이었으니까. ‘고도원의 아침편지‘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보였다. 왼쪽에는 좋은 글귀와 삽화가 들어 있고, 오른쪽 페이지가 일주일에 해당하는 일곱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이어리‘라고 부르는제품이 맞지만, 그 안에 적힌 것은 일기라기보다는 메모에불과했다. 발사 당일의 기록을 제외하면 많아야 서너 가지, 그날의 할 일이나 짤막한 소감이 몇 단어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 몇 줄짜리 메모가 ‘우주 일기‘의 전부였고, 그 소박한 다이어리는 그의 우주 비행에 ‘초과로‘ 허락된 개인 물품이었다. 우주인 이소연에게는 너무 큰 일기장이었다. 그에 - P98

게 주어진 자유시간으로는 위클리 다이어리의 좁은 칸도 다채울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이소연은 원래 예비 우주인이었다. 한국 최초로 우주를
비행할 사람으로 결정된 사람은 체격도 좋고 퍽 용맹해 보여서 나중에 우주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해도 될 법한 남자, 고산이었다.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과 직장을 다닌 수재에다 아마추어 복싱선수였을 정도로 체력도 좋아 높은 경쟁률을 뚫고 우주인으로 선발되었다. 그 옆에 여성 후보가 함께하는 것은 국민들 보시기에 참 좋았다. 우주인 선발 과정이 남녀차별 없이 공정했고, 그것이 달라진 한국 사회를 반영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비행을 앞두고 갑자기 우주인이 바뀔 때까지는.
우주인이 사용할 물품은 이미 화물로 보내진 뒤였다고 한다. 그나마도 가져갈 수 있는 개인 물품 허용량은 미처 다싣지 못한 실험 장비와, 우주인 프로젝트 도중에 명칭이 바뀐 주관 부처의 로고 패치와 스티커 등등으로 꽉꽉 채워졌다. 그 바람에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동안 이소연은 고산이미리 보내두었던, 체격도 성별도 다른 사람의 옷을 입어야했다. 물품 목록을 작성하던 러시아 측 담당자가 이 사실을알고 안타까웠는지 ‘이 안에 담으면 무조건 실어주겠다‘며슬쩍 건네주었다는 지퍼백 하나. 그 안에 급히 담은 다이어 - P99

리를 십여 년 뒤의 내가 보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소연을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선발된 우주인이 갑자기 교체된 것도 당황스러운데다가, 여성 우주인이 앞으로 나서게 되는 것을 고까워하는 시선이 더해졌다. 여성 우주인이 남성 우주인 옆에 후보로 있다가 역사적인 발사의•순간에 손뼉 치며 환호해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보기좋은 그림이었다. 고산이 이소연으로 교체된 사건은, 남자의 자리를 여자가 대신한다는 충격으로 퍼져나갔다. 이소연이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생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주정거장에서의 실험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전문가라는 점은 쉽게 무시되었다. 많은 사람이 놓쳤지만, 우주인 프로젝트의 명목상 목적은 우주정거장에서의 과학 실험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우주 실험을 수행할 사람이 마침 학계에서 과학 하던 사람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이 행운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우주정거장에서는 지구에서보다 얼굴이 붓는다. 다리 쪽으로 피를 잡아당겨주는 중력이 없는데도 심장은 지구에서의 제 역할을 다하려 하기 때문이다. 여성 우주인의 잔뜩 부은 얼굴을 두고 외모를 비하하는 댓글이 기사마다 달렸다. 이소연은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열여덟 가지의 실험을 수행 - P100

해냈고,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실험을 두고는 몇 날을 고민했다. 러시아 측에서 실험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요청할 정도로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런 일을 새내기 우주인이완수해낸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목소리 높여 칭찬해주지 않았다.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올 때, 귀환 모듈의 결함으로 죽을 뻔했던 일이 한국 우주인의 영웅담으로 두고두고 인구에회자되는 일도 없었다. 이소연이 탄 귀환 캡슐은 궤도를 이탈했고, 화염에 휩싸이는 바람에 통신조차 끊어진 채, 거의수직으로 카자흐스탄의 평원에 메다꽂혔다. 예상 지점에서수백 킬로미터나 벗어난 곳에 불시착했다. 당황한 그곳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귀환캡슐에서 탈출하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수 시간 동안 동료와 의지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극적인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로 지겹도록 재생산되는 대신누구도 넘겨보지 않은 책장처럼 홀로 바래갈 뿐이었다.
우주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소연은 수백차례의 대중강연과 인터뷰를 하며 애초 계약했던 의무기간의 갑절 되는 동안 우주인으로서의 소임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주인 프로젝트는 일회성 사업이었고, 앞으로도 우주인 이소연이 할 만한 일은 11일간의 비행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우주에서 돌아온 후 4년간 그랬듯이. 그렇다고 몇년 만에 다시 DNA를 다루는 공학박사 이소연의 길로 돌아 - P101

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나가는 분야다. 수년간 손놓았던 사람이 다시 그 급류 속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물살을 타는 일이 어디 쉬울까. 우주인 이소연이 할수 있을 후속 프로젝트가 마련될 길은 요원해 보였다. 고민끝에 휴직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자 이번에는 ‘먹튀‘라는비난이 쏟아졌다. 그곳에서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했을 때도, 휴직 기간이 만료되고 마침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퇴사했을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공립‘과학고등학교를 나와 ‘국립‘ 한국과학기술원을 졸업한 경력까지 문제가 되었다. ‘그 여자‘를 고등학교 때부터 박사과정까지 국가 세금으로 키워준 것이 괘씸하단다. 강연료를 챙기면서출장비까지 받았으니 구상권이라도 청구해야 한다고 한다. 정말 그래야 할까?
규정 위반으로 우주 비행에 참여하지 못한 고산도 연구원과의 의무계약기간을 마친 뒤 미국에 갔다. 역시 우주인으로서의 정체성과는 별 접점이 없는 분야로 유학길을 떠났지만,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지금은 3D프린터를 만드는 회사의 대표로 있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에 사람들은 격려와응원을 보낸다. 그의 도전 정신과 마침내 성취해내는 모습에 칭찬을 보낸다. 우주인 프로젝트에 들어갔다는 260억이니 300억이니 하는 ‘혈세‘를 뱉어내라던가, ‘우주 개척의 가 - P102

치와 비전을 스스로 확고한 신념으로 만들어 제2, 제3의 우주인이 배출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라‘는 요구는 하지않는다. ‘국가 차원의 후속 지원이 없다는 이유로 뱀 허물벗듯 우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벗어던졌다‘는 비난은 오롯이이소연의 차지였다.
2007년 이소연과 고산을 함께 인터뷰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아직 둘 중 누가 ‘소유즈‘에 탑승할지 결정되지 않은 시점의 기사였다. 당시 미혼의 박사과정생이던 이소연에게 기자는 ‘골드미스‘라는 단어를 꺼냈다. 우주에서는 노화가 빨리 진행된다는데, 여성이니 피부 문제에 신경쓰이겠다고 했다. 우주에서 생리가 시작되면 어떻게 하느냐고도 물었다. 우주가 상당히 춥다더라는 기자의 우려 섞인 질문에는 고산의 대답만이 기사에 실렸다. - P103

남초사회에서 자리잡은 여성 과학자는 언제나 호기심과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떤 성향이실까, 연구 스타일은 어떨까, 강의는 어떻게 하실까, 요즘은 주로 뭘 연구하실까. 그런 게 궁금했다. 그런데 내게돌아온 대답은 "글쎄요. 애가 아프다고 학교 안 오실 때도있고 그래요"였다. 내가 보기에는 정년을 앞두고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자신의 대학원생들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멋진 교수님인데, 고작 그런 시선이라니. 그것도 아직 젊은대학원생의 시야가 그렇게 구태의연하다니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부모 중 하나가 가사와 양육을 도맡거나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조부모 등 친척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아이 하나 키워내기가 이렇게 어려운 사회. 그래, 현실이 그렇다고 백번인정한다. 그게 현실이지만, 그게 여자들의 ‘문제‘로 인식되는 건 슬프다. 직장에서는 그토록 프로페셔널해야 한다면서, 가정에서의 의무는 가벼이 보는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여성들이 남성 위주의 문화에 적응해나가듯이, ‘직장맘‘들이 "애는?"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하듯이, 그들도 여성들, ‘직장맘‘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고민해보면 좋겠다. - P108

이소연 박사는 한동안 대중 앞에 나서지 않다가 아주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 최초의, 그리고 한국 최고의우주인인 그를 한껏 응원한다. 우리는 우주인 이소연이 지상 훈련에서, 우주 실전에서, 그리고 우주에 다녀온 뒤에 겪은 모든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가 무슨 실험을 했는지 하나라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신비롭고 놀라운 우주 이야기부터 그에 못지않게 놀라운 과학정책 이야기까지, 오직 이소연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 그 교훈을 얻으려고우리는 그를 우주정거장으로 보냈던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직업을 바꿨다는 이유로 그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싶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세금을 ‘먹튀‘하려는 자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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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라니. 내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았다고는 해도, 늦게까지 집에도 못 들어가고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즐기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그가 건넨 인사는 아주 적절했다. 그는 이 연구원에서 오래 일해온 게 틀림없다. 적어도 신입 직원은 아닐 것이다. 내가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보면,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이직했지만 내 생활 패턴에는별다른 변화가 없다. 전부터 공동연구하던 팀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연구실의 경위도 좌표가 바뀌었을 뿐, 같은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좇고 있다. 그러고 보니 대학원생 시절에도 이런 종류의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교내 천문대 입구좁은 공간에 앉아 계시던 경비원께서는 출입하는 이들에게 늘상 인사를 해주셨고, 천문대로 올라오는 비탈길에 쌓이는봄의 벚꽃잎과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을 쓸어주셨다. 경비원을 보안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바람이 분 뒤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런 인사를 이직 후 다시 하게 되었다. - P74

또다른 중요한 일은 교육이다.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내가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연구 윤리니 직장 내 성희롱이니 보안이니 실험실 안전이니 하는 다양한 주제의 교육이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직장 다니고 월급 받는 것은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며 묵묵히 교육에 참석한다.
나의 고용 상태는 내가 참여할 연구 과제가 있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여러 연구자가 공동참여하는 큰 과제일 때도있고, 내가 연구 책임자이자 유일한 참여 연구원인 1인 과제일 때도 있다. 과제 기간은 몇 개월짜리에서 십여 년까지다양하지만 대개 3~5년 정도다. 과제가 끝나면 계약직 연구원인 나의 고용 기간도 끝난다는 뜻이므로, 과제가 끝나 - P75

기 전에 미리미리 다음 과제 혹은 다음 직장을 알아봐야 한다. 과제 제안서나 자기소개서, 연구 계획서를 쓰고, 그간의연구 실적을 모아서 양식에 맞게 입력하고 증빙 자료를 만드는 일, 졸업 증명서와 성적 증명서를 새로 발급받는 일은아주 지겹지만 ‘먹고사니즘‘과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좌우할 수 있는 신성한 작업이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과학 공부는 아니지만 과학자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해야 하는 부수적인 일들, 중요도는 낮지만 마감을 넘겨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일들을 좀 해치웠나 싶으면 이번에는 손님이 찾아온다. 우연히 근처에 볼일이 있어 온 김에 들렀다며 선후배들이 깜짝 방문하기도 하고, 행성과학을 전공하고싶다는 학부생이 진로 고민을 들고 찾아오기도 한다. 같은팀에 있는 대학원생이 하소연을 하러 오면 열심히 들어주고맞장구쳐준다. 내가 괴로울 때 그들이 그렇게 해주었듯이, 곪아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약해지려는 마음을 서로 달래주는 품앗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상담도 잦다. 또래 중에 일찍 결혼한 편이기도 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이를낳고 키우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다. 평소 왕래가 잦지 않던 동료가 어느 날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조심스레 불러 세운다면, 기혼자 혹은 부모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물으려는 참이다. 이 또한 누군가의 인생에 관한 신성한 논의다. - P76

그 모든 일은 일과 시간 중에 일어난다. 중요도는 낮지만마감 시간 내에 마쳐야 했던 일이 다 끝나고 방문객들도 돌아가고 나면, 그제야 연구 주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된다. 전화도 오지 않고,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발길도 조용해진다. 공부에 빠져들기 딱 좋은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대학원생들은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머물러 있는경우가 많다. 나도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다 버스가 끊긴 길을 걷고 또 걸어 집에 들어간적도, 아예 조금 더 기다렸다 새벽 첫차를 탄 적도 많다. 그러나 이제는 돌봐야 할 자식들이 있으니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해야만 한다. 이제 막 집중을 좀 해보려는데 집에 갈시간이라는 알람이 울리면 선뜻 손놓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정말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각이 되기 직전에야 닥치는 대로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들고 뛰쳐나간다. 생각해보면 뛰쳐나가지 않은 날이 드물다. 왜 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야 일어서는지, 엄마는 늘 뛰어다닌다. - P77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하나의 문제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의심하고, 그 답을 구하려 애쓰며, 답을 찾은 뒤에도 과연 답이 하나뿐인지또다른 측면에서의 답은 없는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머리로는 안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있던 시간의 대부분은 내가 방금 한 일과 조금 전에 한 일과 한참 전에 한 일을 의심하는데 썼으니 몸으로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내게 ‘과학자‘라는 이름표를 달아 연구실 밖으로 나오게하자마자 어설픈 확신의 말을 의심도 없이 내뱉다니.
방송을 보니 다행히 내 인터뷰는 정말 짧게 나왔다. 유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설명한 부분도, 백 퍼센트 운운한 부분도 모두 편집되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내 분량이 끝나는 걸보고 나니 갑자기 소화가 잘되는 것 같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잔뜩 먹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쿡 웃으며 자조했다. ‘백 퍼센트라고? 웃기시네. 멀쩡한 과학자가 되려면 난아직 멀었구나."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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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다시 새로움을 향해 떠나야 할 때,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 P31

오늘날 대학이 수행하고있는 기능이란 어리둥절한 채 성인이 되어버렸으나 실상은유예된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귀중한 스무 살 생명표를 꼭 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해 태어난 국민 중 팔 할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다음 중학교에 갔고, 중학교 다음 고등학교에 간 것과 같이 고등학교를 마쳤으니 대학에 진학할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학비보다 열 배는 비싼 등록금이요, 모두가 입어야 하는 교복 대신모두가 가져야 하는 스펙을 등에 업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젊음은 싸구려 술과 술값보다 비싼 커피와 크고 작은 성추행과 미필자조차 향유하는 선배들의 군대식 갑질, 전공과목들을 시간을 뺏는 교양 강의와 대학생다운 교양을 쌓을틈을 주지 않는 전공 강의, 토익 시험과 한국사 시험과 각종컴퓨터 자격증과 크고 작은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 경력에소모된다. 과제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제대로 된글쓰기를 연습할 기회는 별로 없다. 대신 비문으로 A4 용지다섯 장을 채워내는 끈기, 남의 것을 베끼되 표절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하는 프로그램에 걸리지 않게 몇몇 표현을 바꿔치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 비용과 시간과 어처구니없는 문화와 그 젊음은 대체 무엇을 위한 제물인가.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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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채경

천문학자, 행성과학자.
현재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과학탐사본부 행성탐사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달, 화성, 소행성 등 태양계 천체로 향하는 국내외 우주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탐사를 기획하는 일에도 함께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과학산문」 등이 있고, 우아한 우주, 우주생물학』(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 P-1

연주시차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매년 한 바퀴씩 돌면서, 이쪽 끝에 있을 때와 반대쪽 끝에 있을 때 별의 위치가약간 다르게 보인다. 마치 왼쪽 눈만 뜨고 볼 때와 오른쪽눈만 뜨고 볼 때 책상 위 물건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처럼말이다. 대신 멀리 있는 산이나 건물의 위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별도 마찬가지다. 멀리 있으면 지구가 6개월에 한 번씩 오른쪽 왼쪽에서 본다고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것같지만, 가까이 있는 별은 위치가 달라 보인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차가 클수록 가까운 별이다. 지구가 일 년 동안 더큰 원을 그리며 돈다면 별의 연주시차는 더 클 것이다. 거리와 각도, 시차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옴싹 달라붙어서, 모두가 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애쓰며 점 두 개를 칠판에 찍고는 돌아서서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 무미건조한 중년아저씨의 눈에서 반짝, 소년이 지나갔다. 술이나 산해진미도 아니고, 복권 당첨도 아닌데. 하다못해 아름다운 ‘연주씨‘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연주시차. 지난 십몇 년 동안 한해에 예닐곱 반에서 똑같은 설명을 했을 텐데 어째서 연주시차 따위가 저 사람을 그리 즐겁게 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일 년 뒤, 나는 지구과학 경시대회에 나가서 어쭙잖은 상을 탔다. - P11

대학에 들어갔더니 그런 귀여운 교수님들이 또 있었다. 퇴임을 목전에 둔 할아버지 교수님께 기본천문학 강의를 들였다. 우리나라 천문학자 1세대에 속하는 분인데, 그 연세에도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셔서 천문학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 무관이라고 해도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런 장수 같은 사람이 칠판에 별을 그릴 때면 어찌나 작고 예쁘고 단정하게 그리는지. 나는 교수님이 별을 그릴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속으로 쿡쿡 웃었다. 칠판에 별을 그릴 일은 자주 있었다. 중요한 부분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보이는 그대로 별을 논하니까 별. 성단을 논하니까 또 별.
귀엽기로는 내 지도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대학원생 제자들과 회의를 하셨다. 이공계 대학원에서흔히 ‘랩 미팅‘이라고 부르는 이 회의는 그야말로 대학원 생활의 꽃이다. ‘꽃 같다‘는 말이 중의적으로 쓰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하지 않겠다. 회의 준비로 이틀 전부터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하루 전날은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수식의 오타나 그래프와 씨름을 하다가, 살벌한 회의 끝에는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허덕이다보면 다시 다음 회의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흔한 대학원 생활이다. 그런데 내가 있던 연구실은 좀 달랐다.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각자 얼마나 멍청한 일을 했는지 보고를 마치면 교수님은 - P12

씩 웃으며 당신께서 일주일 동안 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셨다. 목성이나 토성의 관측자료를 얻은 것에서부터, 동료 학자 누구와 어떤 이메일을 주고받았으며, 행성 대기 모델 계산 코드를 어떻게 개선했는지에 대해서, 마치 일주일동안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즐거워하며 랩 미팅의마지막 발표를 장식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사용해온 당신의 모델을 육십이 넘도록 끊임없이 바꾸고 고치고 손보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토록 즐겁게.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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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인주 크로스비에서 삶은 이어졌다. 마거릿은 전에 걸핏하면 잠을 자는 신자였던 에이버리 메이슨이 죽은 뒤로 다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설교도 여전히 진지하고 좋다는 것을 밥은 알아차렸다. 그리고 해셀벡부인은 밥에게 격주에 한 번씩 가져오던 진을 다시 물로 희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말로 크게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고, 그래서 밥은 절반보다 더 많이 희석해서 갖다주었다. 헤로인중독이었던 열쇠 가게 주인은 플로리다로 떠났다. 혹은 그렇다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비가많이 오고 쌀쌀했지만, 메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이었다. - P435

마음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것은 사실이고, 밥의 마음은 여전히 루시를 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고려할것이 있는데, 마음은 유기체의 한 부분일 뿐이고, 유기체의일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그 욕망이 이미 밥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 욕망은 자라났다. 마음의 욕망ㅡ그것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계속 자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으레 그렇듯 당연하게도 그것에는 불편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밥은 마거릿과 함께하는삶에서 느낀 새 희망을 붙잡았다. 밥은 건망증 증세 때문에 마거릿을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아직 별다른 일은 없었다. - P495

올리브 키터리지는 슬펐다.
그녀는 이제 아흔한 살이었고, 친구 이저벨 굿로는 점점더 잠이 늘었다. 바로 요전날에는 심지어 올리브가 신문을읽어주는 동안에도 잠들어버렸다. 그래서 올리브는 루시가전화를 걸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올리브"라고 말했을 때 기뻤다.
올리브는 아무때나 오라고 했다.
그래서 ㅡ밥이 사무실을 청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ㅡ루시가 올리브의 아파트로 왔고, 루시는ㅡ올리브가 보기에ㅡ눈부셨다. 녹색 스니커즈와 평범한 노란색 상의에 청바지를입고 있었다. 루시가 카우치에 앉아 말했다. "좋아요, 올리브ㅡ내 이야기는 이거예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슬픈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 잘못된 문장일 거예요. 하지만 이 안에는 슬픔이 담겨 있고,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이야기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말해줘요."  - P505

우선 떠오르는 대로 써보면, 밥에게는 이런 모습들이 있다. 성찰하는 유의 사람이 아닌 밥, 죄를 먹는 사람 밥,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큰 사건에 평생 붙잡혀 살아온 밥, 예순다섯 살에 사랑에 빠진 밥, 사랑하는 형수를 잃고 당장 슬픔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에 의아한 밥, 루시와 만나면서 ‘확장된 의식‘을 경험하는 밥. 하지만 그 모든 모습을 아우르면서, 이것이 밥의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 "이유가 뭔지 알아요? 당신은 여전히 밥 버지스니까요. 누구도그 사실은 뺏어갈 수 없어요." (매슈 비치의 말), "나는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요. 당신의 머리가 잘렸다고 해도당신은 여전히 - 여전히 밥일 거예요."(루시의 말) "그리고그게 가능했던 건 당신이 밥 버지스이기 때문이야." (마거릿의 말) 밥과 루시의 사랑도 그 결말은 ‘밥은 밥이다‘로 정리된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이 소설의 핵심 아닐까. 그리고 루시가 던진 이 모든 기록되지 않은 삶의 의미에 대한답이 아닐까.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인 한, 그 삶이 우리의 삶인 한, 우리는 우리라는 것. - P521

옮긴이의 말 제목인 ‘걷고 말하고 그저 행복했다‘는 이소설의 본문에서 가져왔다. 이유라면, 그저 그 문장을 만났을 때 ‘이러면 정말로 행복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작 중 하나인 『무엇이든 가능하다』(2019)의 옮긴이의 말 제목으로 썼던, 그리고 역시 그 책의 본문에서 가져왔던 ‘햇볕 속에 (함께)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행복해지는문장이었다.
그들이 이제 무르익은 노년기이거나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들었음을 고려하면 ‘걷고 말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그런 시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평범한 것이 어렵고 힘들 - P524

게 느껴지는 시기와. 그러니 우리가 평생 걷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한 일이 될 테고,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너무도 깊은 연결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삶이 기록되지 않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무소음 객차에서 옆에 앉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루시의 그 엉뚱한 사랑 이야기처럼, 일상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일렁이게 한 그런 아주 엉뚱한 이야기라도 모든 것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마지막에 루시가 올리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었듯이, 그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그런 행운은 없다. 지금자신이 너무나 외롭고 영영 그럴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정말로 어떤 것과도 아무런 연결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더라도, 우리가 우리로서 그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감각을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올리브가 올리브이기에, 루시가 루시이기에, 밥이 밥이기에 그렇듯, 우리가 우리이기에. - P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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