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채경

천문학자, 행성과학자.
현재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과학탐사본부 행성탐사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달, 화성, 소행성 등 태양계 천체로 향하는 국내외 우주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탐사를 기획하는 일에도 함께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과학산문」 등이 있고, 우아한 우주, 우주생물학』(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 P-1

연주시차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매년 한 바퀴씩 돌면서, 이쪽 끝에 있을 때와 반대쪽 끝에 있을 때 별의 위치가약간 다르게 보인다. 마치 왼쪽 눈만 뜨고 볼 때와 오른쪽눈만 뜨고 볼 때 책상 위 물건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처럼말이다. 대신 멀리 있는 산이나 건물의 위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별도 마찬가지다. 멀리 있으면 지구가 6개월에 한 번씩 오른쪽 왼쪽에서 본다고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것같지만, 가까이 있는 별은 위치가 달라 보인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차가 클수록 가까운 별이다. 지구가 일 년 동안 더큰 원을 그리며 돈다면 별의 연주시차는 더 클 것이다. 거리와 각도, 시차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옴싹 달라붙어서, 모두가 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애쓰며 점 두 개를 칠판에 찍고는 돌아서서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 무미건조한 중년아저씨의 눈에서 반짝, 소년이 지나갔다. 술이나 산해진미도 아니고, 복권 당첨도 아닌데. 하다못해 아름다운 ‘연주씨‘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연주시차. 지난 십몇 년 동안 한해에 예닐곱 반에서 똑같은 설명을 했을 텐데 어째서 연주시차 따위가 저 사람을 그리 즐겁게 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일 년 뒤, 나는 지구과학 경시대회에 나가서 어쭙잖은 상을 탔다. - P11

대학에 들어갔더니 그런 귀여운 교수님들이 또 있었다. 퇴임을 목전에 둔 할아버지 교수님께 기본천문학 강의를 들였다. 우리나라 천문학자 1세대에 속하는 분인데, 그 연세에도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셔서 천문학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 무관이라고 해도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런 장수 같은 사람이 칠판에 별을 그릴 때면 어찌나 작고 예쁘고 단정하게 그리는지. 나는 교수님이 별을 그릴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속으로 쿡쿡 웃었다. 칠판에 별을 그릴 일은 자주 있었다. 중요한 부분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보이는 그대로 별을 논하니까 별. 성단을 논하니까 또 별.
귀엽기로는 내 지도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대학원생 제자들과 회의를 하셨다. 이공계 대학원에서흔히 ‘랩 미팅‘이라고 부르는 이 회의는 그야말로 대학원 생활의 꽃이다. ‘꽃 같다‘는 말이 중의적으로 쓰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하지 않겠다. 회의 준비로 이틀 전부터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하루 전날은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수식의 오타나 그래프와 씨름을 하다가, 살벌한 회의 끝에는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허덕이다보면 다시 다음 회의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흔한 대학원 생활이다. 그런데 내가 있던 연구실은 좀 달랐다.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각자 얼마나 멍청한 일을 했는지 보고를 마치면 교수님은 - P12

씩 웃으며 당신께서 일주일 동안 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셨다. 목성이나 토성의 관측자료를 얻은 것에서부터, 동료 학자 누구와 어떤 이메일을 주고받았으며, 행성 대기 모델 계산 코드를 어떻게 개선했는지에 대해서, 마치 일주일동안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즐거워하며 랩 미팅의마지막 발표를 장식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사용해온 당신의 모델을 육십이 넘도록 끊임없이 바꾸고 고치고 손보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토록 즐겁게.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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