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라니. 내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았다고는 해도, 늦게까지 집에도 못 들어가고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즐기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그가 건넨 인사는 아주 적절했다. 그는 이 연구원에서 오래 일해온 게 틀림없다. 적어도 신입 직원은 아닐 것이다. 내가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보면,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이직했지만 내 생활 패턴에는별다른 변화가 없다. 전부터 공동연구하던 팀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연구실의 경위도 좌표가 바뀌었을 뿐, 같은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좇고 있다. 그러고 보니 대학원생 시절에도 이런 종류의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교내 천문대 입구좁은 공간에 앉아 계시던 경비원께서는 출입하는 이들에게 늘상 인사를 해주셨고, 천문대로 올라오는 비탈길에 쌓이는봄의 벚꽃잎과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을 쓸어주셨다. 경비원을 보안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바람이 분 뒤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런 인사를 이직 후 다시 하게 되었다. - P74

또다른 중요한 일은 교육이다.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내가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연구 윤리니 직장 내 성희롱이니 보안이니 실험실 안전이니 하는 다양한 주제의 교육이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직장 다니고 월급 받는 것은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며 묵묵히 교육에 참석한다.
나의 고용 상태는 내가 참여할 연구 과제가 있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여러 연구자가 공동참여하는 큰 과제일 때도있고, 내가 연구 책임자이자 유일한 참여 연구원인 1인 과제일 때도 있다. 과제 기간은 몇 개월짜리에서 십여 년까지다양하지만 대개 3~5년 정도다. 과제가 끝나면 계약직 연구원인 나의 고용 기간도 끝난다는 뜻이므로, 과제가 끝나 - P75

기 전에 미리미리 다음 과제 혹은 다음 직장을 알아봐야 한다. 과제 제안서나 자기소개서, 연구 계획서를 쓰고, 그간의연구 실적을 모아서 양식에 맞게 입력하고 증빙 자료를 만드는 일, 졸업 증명서와 성적 증명서를 새로 발급받는 일은아주 지겹지만 ‘먹고사니즘‘과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좌우할 수 있는 신성한 작업이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과학 공부는 아니지만 과학자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해야 하는 부수적인 일들, 중요도는 낮지만 마감을 넘겨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일들을 좀 해치웠나 싶으면 이번에는 손님이 찾아온다. 우연히 근처에 볼일이 있어 온 김에 들렀다며 선후배들이 깜짝 방문하기도 하고, 행성과학을 전공하고싶다는 학부생이 진로 고민을 들고 찾아오기도 한다. 같은팀에 있는 대학원생이 하소연을 하러 오면 열심히 들어주고맞장구쳐준다. 내가 괴로울 때 그들이 그렇게 해주었듯이, 곪아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약해지려는 마음을 서로 달래주는 품앗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상담도 잦다. 또래 중에 일찍 결혼한 편이기도 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이를낳고 키우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다. 평소 왕래가 잦지 않던 동료가 어느 날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조심스레 불러 세운다면, 기혼자 혹은 부모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물으려는 참이다. 이 또한 누군가의 인생에 관한 신성한 논의다. - P76

그 모든 일은 일과 시간 중에 일어난다. 중요도는 낮지만마감 시간 내에 마쳐야 했던 일이 다 끝나고 방문객들도 돌아가고 나면, 그제야 연구 주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된다. 전화도 오지 않고,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발길도 조용해진다. 공부에 빠져들기 딱 좋은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대학원생들은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머물러 있는경우가 많다. 나도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다 버스가 끊긴 길을 걷고 또 걸어 집에 들어간적도, 아예 조금 더 기다렸다 새벽 첫차를 탄 적도 많다. 그러나 이제는 돌봐야 할 자식들이 있으니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해야만 한다. 이제 막 집중을 좀 해보려는데 집에 갈시간이라는 알람이 울리면 선뜻 손놓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정말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각이 되기 직전에야 닥치는 대로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들고 뛰쳐나간다. 생각해보면 뛰쳐나가지 않은 날이 드물다. 왜 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야 일어서는지, 엄마는 늘 뛰어다닌다. - P77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하나의 문제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의심하고, 그 답을 구하려 애쓰며, 답을 찾은 뒤에도 과연 답이 하나뿐인지또다른 측면에서의 답은 없는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머리로는 안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있던 시간의 대부분은 내가 방금 한 일과 조금 전에 한 일과 한참 전에 한 일을 의심하는데 썼으니 몸으로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내게 ‘과학자‘라는 이름표를 달아 연구실 밖으로 나오게하자마자 어설픈 확신의 말을 의심도 없이 내뱉다니.
방송을 보니 다행히 내 인터뷰는 정말 짧게 나왔다. 유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설명한 부분도, 백 퍼센트 운운한 부분도 모두 편집되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내 분량이 끝나는 걸보고 나니 갑자기 소화가 잘되는 것 같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잔뜩 먹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쿡 웃으며 자조했다. ‘백 퍼센트라고? 웃기시네. 멀쩡한 과학자가 되려면 난아직 멀었구나."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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