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立秋)
신새벽에 요사채 방문 열고 밖에 섰다
승복 한 벌 가을비에 젖고 있다
두 철째 묵언중인 젊은 납자(衲子)
가슴에 다 마르지 못한 것들 저리 많았는가
속살 베이도록 단단히 풀기 먹였는데
잠시 고개 돌리면
이 산중에서도 젖고 또 젖었다
두어라, 서둘러 걷을 일 없다
빳빳이 세웠던 풀기 다 빠져야
곧추선 허리 풀린다
그리운 이름 한 사발쯤 가슴으로 젖어야
이 겨울, 다시 눈 푸르게 넘기지 않으련
비 들이친다 문 닫아라! - P10
새벽별
외로움도 오래되면 온몸 따스히 데워주는 것인지, 홀로 뽑아낸 거미줄 같은 길이 달빛에 하얗게 내려앉는 밤이면, 가슴에 그토록 사무쳤던 사람 아니 죽어도 용서할수 없을 것만 같던 사람…… 사람들, 하나씩 쓸쓸한 길을 따라 내게 찾아와, 벚나무 아래 삐걱이는 평상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목젖을 적시는 묵은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기도 하다가, 붉은 홍시 위로 가을비 번져오는 신새벽,오줌누러 뛰어가면 오돌오돌 떠는 어깨 뒤를, 어느결엔가 당신은 다가와 꿈결인 듯 나를 감싸안기도 합니다.…… -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