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령마루의 까마귀
현기영
서호부락 밖, 모래바람 부는 일주도로에 사람들이 작업반별로 무더기무더기 모여앉아 인원점호를 받는다. 서호 본고장 부락민들과 이곳에 정처를 둔 노형 피난민들로 된 성담 쌓는 울력꾼들이다. 세찬 갯바람이 굵은 생소금을 낮에다 뿌리는 듯 얼얼하다. 민보단 사람 넷이 죽창을 옆구리에 낀 채 바람에 종잇장 펄럭대는 손때 묻은 공책을 들여다보며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또 턱짓으로 대가리 수를 헤아리기도 한다. 까마귀 오순경은 저만치 떨어져서 길가 밭담 위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대고 앉아 점호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저 순경이 먼빛으로 설핏 보이기만 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뒷목에 칼날이 닿는 듯 썰렁한 한기가 일어나는 귀리집이다. 저번날 소까이 지역에 들어갔다 오다가 들켰을 때 저 작자는 지서로 끌고 가 닛뽄도 칼날을 뒷목에다 대고 무섭게 닦달해댔다. "이 에미나이야! 바른대로 정 대지 못하가서? 너이 서방이 있는 산이 어드메야?" - P73
길가 밭의 푸릿푸릿 싹난 청보리를 쪼아먹는 까마귀 한 마리가 순경이 앉은 밭담 위로 푸릉 날아올라 아그작아그작 방정맞게 걸어다닌다. 저 순경 옷이 어쩌면 저렇게 까마귀 날갯죽지 색을 닮았을까. 게다가 바람에 날아갈세라, 턱끈까지 내려매고 눈썹 위로 푹 눌러쓴 모자 차양도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하다. 그러니 서호 본고장 사람들이나 노형 피난민들이 저 오순경을 까마귀 오가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까마귀 오순경이 메고 있는 총대엔 어서 점호를 끝내라고 태극기가 조급하게 펄럭인다. 흰 광목천 바탕에 청홍 색깔이 아주 뚜렷하다. 새것인 모양이다. 며칠 전만 해도 일본기 히노마루 붉은 원의 반쪽에다 검은 먹칠 바르고 네 귀엔 짝을 그려넣어 만든 헐어빠진 기를 달고나오더니 어느새 새걸로 개비했나? 진작 그럴 거지. 섬사람들이 뒷전에서 얼마나 쑤군쑤군 욕을 했는데. "물건 아낄 게 따로 있지, 발쎄 갈기갈기 찢어발기든가 불태워 없애부려야 마땅헌 일본기를 가지고 대한민국기를 맹글다니, 저것들은 밸도 소가지도 없는가?" "아이고, 쟈이들이 어떤 것들이라고 속창지를 차릴 것고 일본놈 치질 똥고망 핥으며해먹던 것들인디. 같은 섬 동포 갑죽 벗기기를 흉년에 송깃대 벗기듯하던 것들이 새나라 경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오죽헐 거여? 일본기로 태극기를 맹그는 거나 일본순사 출신을 대한민국 경찰로 맹그는 거나 매한가지가 아니냔 말이여!" - P74
칼칼한 모래바람에 휩싸인 채 잠시 길을 따라 걷다가 보리밭으로 들어선다. 말이 보리밭이지 한 달 넘게 하루에 두 번씩 울력꾼들이 왔다갔다하는 통에 밭 한가운데로 아주 번듯한 신작로가 나버렸다. 가슴높이로 둘러쳐져 있던 밭담이란 밭담은 죄다 허물어다 성 쌓는 데 써버려서 이 신작로는 아무 거칠 것 없이 쭉 뻗어나가 있다. 울력꾼들은 이제 성담을 끼고 도령마루 쪽으로 걸어간다. 어른 키의 두 배 높이는 실히 됨직한 성담을 올려다보고, 또 성담 따라 끝간데까지 눈길을 보내어, 성이 멀리 도령마루 위로 가물가물 기어오르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귀리집은 새삼 놀란다. 한 달 새에 저렇게 많이 일을 했나? 고생도 되게 하긴 했지. 손끝이 닳아 조막손이 되는가 싶었지. 특히 왼손은 흉측하기가 말이 아니다. 한 번 찍힌 돌에 검지는 손톱이 빠지고 중지는 가운데 뼈마디에 흉한 혹이 생겼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지긋지긋한 역사가 모두 끝난단다. 이제는 설마 울력 나오라는 말이 다시는 없겠지. - P75
바람결이 꽤 차다. 밭 경계선마다 둘러쳐져 바람막이가 되던 밭담이 죄다 없어졌으니 바람은 아무 거칠 것 없이 마구 휙휙 불어제친다. 귀리집은 바람이 불어오는 왼편 귀뺨을 머릿수건으로 잘 단도리한다. 등에 진 마른 솔가지 짐이 바람에 부스럭거린다. 울력꾼들은 여편네들과 열두서너 살짜리 어린것들이 대부분이고 어른 남자라곤 벌초한 봉분처럼 머리가 민둥한 중늙은이들이고 젊은축들은 별반 보이지 않는다. 개중에는 파뿌리 머리칼을 정수리에 옹쳐맨 상투짜리 일흔 넘어 뵈는 노인네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별안간 쌀쌀해진 날씨에 빡빡 깎은 머리빡이 시렸던지 낡은 중절모나 도리우찌, 개가죽감투, 또 하도 헐어서 죽은 까마귀 날갯죽지같이 몰골이 흉한 남바위를쓰고 나온 노인들도 더러 있는데, 이들은 묻지 않아도 서호 본고장 사람들이 틀림없으리라. 불탄 우리 노형마을에서 소까이되어온 사람들이 어느 경황에 저런 방한모를 챙겨 가져올까 말이다. - P76
불탄 집터에 가면 그래도 타다 남은 양식이 있을 텐데..... 마을엔 아직도 양식이 있었다. 산폭도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땅속이나 작박(돌무더기) 속에다 숨겨놓은 고구마며 좁쌀 섬이 있는 것이다. 귀리집도 정지바닥에 땅을 파고 쌀독을 묻어놓고 있었다. 지척이 천리라던가. 오리 밖에 고향을 두고도 못 가는 신세가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내 것을 내가 못 먹다니! 안으면 미어질 듯 뼈가래가 앙상한 젖아기를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노형 집터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어나 온몸이 덜덜 떨리곤 했다. 밀기울범벅 먹고 젖이 나올 리가 없었다. 풀주머니 쥐어짜듯, 두 손으로 아프게 젖을 쥐어짜도 그저 젖꼭지 끝에 이슬 슴슴 맺히듯 할 뿐이었다. 젖배 곯은 아기는 노상 칭얼거렸다. 맥없이 칭얼거릴 뿐 한번 되바라지게 소리내어 울지도 못했다. 울 힘이 없는 거였다. 거떻게 죽어가는 젖꼭지를 빨아댈 힘도 없었다. 모진 목숨딸깍딸깍 딸꾹질처럼 이어가다 끝내 죽어버린 아기…… 아기가 죽은후부터는 단 한 번도 온전히 조밥을 해먹어본 적이 없었다. 돼지사료인밀기울에다 고구마를 쑹덩쑹덩 썰어넣어 범벅을 만들어 먹는다. 범벅도 소금이 귀해 바닷물로 간을 맞춘다. - P83
이런, 내가 몹쓸 년이다. 빌어먹을 년이다. 여기서 순원이 아방을 찾다니. 그이가 이렇게 쉽사리 죽었을 리가 없지. 그러나 그게 아니다. 포개진 시체를 끌어내다가 "저걸 보게" 하고 영순이 어멍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다행히 다른 시체 밑에 들어가 있어서 까마귀 부리에 쪼이지 않은 채 온전한 얼굴, 구레나룻이 사뭇 자라얼굴을 반쯤 덮고 있지만, 그건 깔축없이 순원이 아방이다. 가슴이 터질 듯 뛴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저 구뎅이에 들어가면 후제 시첼 영영 못 찾앙(찾고) 말아......" 영순이 어멍도 초조한 목소리로 걱정한다. "저 밭담 뒤에 숨겨야 하키여." 귀리집은 얼른 머릿수건을 풀어 시체의 얼굴을 싼다. 영순이 어멍도자기 머릿수건을 풀어서 내준다. "까마귀가 얼굴 못 해치게 하젠 허민 더 많이 싸야 헐 거여." 둘은 시체를 맞들고 담가에 얹어놓은 다음 주위를 살핀다. 마침 까마귀 오는 이쪽을 등진 채 돌막을 깔고 앉아 도령마루 쪽을 바라보고 있다. 다른 여편네들도 모두 제 일에 열중이다. 두 사람은 담가를 들고 일부러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밭담으로 향한다. 밭담 밑에 담가를 잠시놓고 다시 주위를 살핀다. 까마귀 오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이번엔 모자를 벗고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이다. 귀리집이 눈짓한다. 둘은 힘껏 담가를 쳐올려 시체를 담 밖으로 내던진다. - P110
이는 우리가 도심지의 사무실이나 다방에서 흔히 보았던 ‘딱새와 찍새‘ 의 활동에 대한 관찰이 일반적인 인상에서 뭔가 다른 것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동맥」도 비슷한 관점과 입장으로 그려진 작품이지만 그맘때의 장시간 노동과 혹독한 노동조건, 그리고 저임금에 갖가지 불합리한 착취의 현실을 배경으로 깔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공이결국은 어떻게 타락의 시궁창으로 떨어지게 되는가를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 짧지만 일화가 대단히 많은 이 단편에서 작가는 못다 한 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지옥도처럼 묘사된 서울 거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에게도 하소할 수 없는 세 소녀들만의 따뜻한 연대감은 이른 봄의 들풀처럼 굳세지만 씁쓸하다. 그리고 그것이 임금이든 이자든 화대가 되었거나 수술비가 되었거나 작가의 정확하고 꼼꼼한 돈계산에 대하여 경탄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본의 냉혹한 그늘을 힐끗 일별하게 되는 것이다. - P154
성벽
조선작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우리 둑방동네에서 개서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개를 훔치고, 훔친 개를 잡아서 보신탕집에 넘기는 일로 우리 세 식구(아버지와 나, 그리고 열여덟 살짜리 누나 이렇게 세 식구다)의생계를 삼아온 아버지니까, 그런 별명이 전혀 연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다가 아버지에게는 개하고 그렇고 그런 일까지 있었다는 알쏭달쏭한 소문도 나돌고 있으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개서방이라는 이름은 꼭 맞아떨어지는 별명이 아닐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개하고 진짜로 그따위 엉터리없는 장난을 저질렀는지 어쨌는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소문은 우리 둑방동네에 파다하게 퍼져버려서 심지어는 나까지도 싸잡아, 저 녀석도 혹시 개의 니노지에서 생겨난 자식이 아닐지 몰라, 하고 도매금으로 몰아때리는 사람까지도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니기미, 또 그렇다 해서 저들이 나를 어쩔 것인가.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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