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그 만남이 인상적이었다. 이문구와 내가 어느 술 취한 밤에 손님이 다 가버린 목로술집에 앉아 ‘글쟁이란 천업이다‘ 또는 ‘이담에 다 때려치우고 풍 맞아 손 떨릴 무렵에 송기원이나 이시영이나 아랫것들이 찾아오면 시치미 떼고, 이들 여직도 문학 같은 거 허구 댕기냐?" 해주고 싶다던 농담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스스로 ‘글동네와 거리두기‘를 오랜 기간 선택했던 때가 있어서 이러한 내면을 좀 아는 척하고싶다. ‘문학‘은 목숨 바쳐서 할 건 아니다. 글이란 언제나 때려치울 수있고 다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그리움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내색 않고 참기란 더더욱 힘든 일이다. 생업을 바꾸고 모른 척하는 일 또한 보통 내공으로는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형편이 괜찮다면 그냥 은거하여 가만히 앉아 책 읽고, 음악 듣고, 징징대거나 시달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늙어가는 것 또한 복 받은 팔자다. - P188

그는 언제나 ‘열외‘에 서서 어떤 작가도 다가서지 않았던 ‘독특한 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표현은 창녀, 때밀이.
펌프, 개백정, 호스티스, 도둑, 알코올중독자 등의 등장인물들도 그랬지만 작가가 어떠한 윤리적 선택이나 제시라든가 판단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이야깃거리를 툭 내던지고 말 뿐이라는 데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최서해의 소설이 극단적이고 비참한 삶의 장면들을 헤집어 보여주는 것과 어떤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조선작의 소설들은 같은 장면인데도 지나치게 비참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묘한 활기와 낙천적 분위기로 흘러간다. 어떤 평자는 ‘소재주의의 위험‘
과 ‘줄거리 위주의 서술‘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를 ‘풍자‘와
‘체험의 우화적 처리‘로 보았다. 이를테면 버스 차장을 하다가 한길에떨어져 차에 치여 외팔이가 되고 창녀로 전락한 ‘영자‘의 이야기도 작가의 체험에서 변형된 이야기였다. 그 무렵에 김승옥이 시나리오로 각색해서 「영자의 전성시대」를 영화화한다고 조선작과 어울려 다닐 적에 조선작이 내게 실토한 적이 있다. ‘영자‘의 실제 모델이 있다는 것이다. - P189

조선작의 단편소설 「성벽」은 1973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당시 서울 변두리에 번성했던 판자촌과 일대의 부랑자들을 그리고있는데,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더럽고 추잡한 일상이 무슨 놀이라도 벌여놓은 것처럼 활기차고 시끌벅적하다. 여기서 지문과 대화에 걸핏하면 나오는 은어나 패담의 사용은 이른바 ‘자기 계급‘만의 언어로써 서로의 동질감과 다른 자들과의 구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상소리와 패담은 세상에서 쫓겨났거나 소외된 징표로서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 저들만의 독립된 보금자리임을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보통시민들에게는 일생에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하는 불행의 순간을 연거푸 당할 적에도 상소리 한마디 날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청을 부린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하층민을 그리는 문체가 기묘한 활기와 낙천적분위기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밤마다 - P190

술타령으로 늘어졌고, 가출해버린 누나를 찾아다니다 쩔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나‘가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신나게 악을 쓰며 ‘둑방동네아이들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노래‘를 불러댄다.

청계천 다리 밑에, 따라라라 라라라라
개떡 같은 집을 짓고, 따라라라 라라라라
귀신 같은 마누라와ㅡ
쥐약 먹고 죽고 싶네요ㅡ - P191

나는 개도둑인 아버지와 공장에 다니는 누나와 둑방동네에 산다. 누나는 개도둑질과 술로 나날을 보내는 아버지를 못 견뎌 가출하고 아버지는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어버린다. ‘나‘는 탱보네 자전거포에서 일해주며 아버지를 수발하다가, 누나가 사창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 개서방은 개를 잡아다 불에 그슬리곤 하던 둑방위의 모래밭까지 기어가 죽는다. 아침까지 아버지 시체는 거기 그대로 버려져 있었는데 동네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공사가 시작된다. 내일이면 청량리에서 제천 가는 고속전철이 달리게 되는데 그 개통식에 ‘아주 높은 사람‘이 타고 둑방동네의 건널목을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더럽고 추잡하며 헐벗은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동네가 그런 어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며 어디선가 인부들이 까맣게몰려들어 삽시간에 건널목을 중심으로 양편에 높다란 합판 담장을 친다. 공사중에 아버지의 시체가 발견되지만 인부들은 재수 옴 붙었다며세 번씩 침을 뱉고 모래를 깊이 파고 그 속에 묻어버린다. 저녁 무렵이되자 건널목에서 바라보이는 동네는 완전히 가려지고, 그들로서는 이 - P191

제까지 가져본 적이 없는 그네들끼리의 정다운 울타리를 얻은 셈이 되었다.
인부들은 밤까지 그 높은 성벽에 줄을 맞춰 전등불을 밝히고 합판 위에 페인트를 칠한다. 구린내를 풍기며 언제나 도도하게 괴어 있던 냇물에 썩은 널빤지와 녹슨 함석이나 찢어진 루핑 따위로 연이어진 판잣집의 그림자가 아니라, 줄지은 전등불이 밝히고 있는, 아름다운 색깔로말끔히 도장된 아스라한 성벽이 영롱하게 떠 있다.

다시 읽어도 앞뒤 짜임새가 꼭 맞아떨어지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파리 잡아먹고 시치미를 뚝 떼는 두꺼비처럼 노련한 조선작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른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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