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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평점 :
따뜻한 기록
"우연히 아주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난 어느 친구의 수첩을 보게 되면서
나는 한참 동안 따뜻했다.
캐나다 기차에서 만난 앙투완
그의 수첩 속 달력 칸칸에는 베토벤, 존 레넌, 고흐. 아인슈타인.......
이런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태어난 건, 우연의 힘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므로 기억될 가치가 적지만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았고 그렇게 떠나는 것은
인류에게 더없이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충분하므로
일일이 그 날짜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따뜻한 건,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어서 가치가 적다고 생각되는 건
아직, 끝나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병률 산문집 -- 끌림 (랜덤하우스 중앙) 중에서--
미황사에 머무는 동안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 '끌림'의 구절들과 사진들이 문득문득 떠올랐어.
단청을 칠하지 않은 대웅전 뒤로 달마산을 올려다 볼 때,
다 기억하지는 않았지만 옮겨적은 저 내용말고도 티벳의 속담이라는
"내일과 다음 생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도 그랬어.
읽는 동안, 책이 주는 온기로 정신을 놓아버리고 이방의 어느 곳을 떠돌기까지 했지.
가끔 어느 사진들은, 어느 문장들은 서늘하게 기억되고는 했는데 그런 순간이 그랬어.
돌아와서 다시 '끌림' 을 읽었어.
'끌림' 속에는 그의 시 "사랑의 역사"가 있고 짜르의 음악이 있어.
저마다 각각의 것들이 내게는 한꺼번에 찾아오고는 해.
글은 참으로 따뜻한 기록이야.
풍경이 걸린 창으로 바람의 성긴 손이 얼굴을 만지고 지나갔어.
나, 이 바람 때문에 여기 온 것 맞나봐.
불두화, 달랑 두 송이만 남아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
저렇게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무슨 꿍꿍이 중일까?
설마 멀리서 달려온 나를 골탕먹일 궁리를 하는 건 아닐 테지.
골탕은 무슨? 아마도 작별의 키스를 나누는 것이리라 믿기로했어.
안녕, 여름아.
후원에서 보는 대웅전 쪽이야.
저녁 공양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띵가띵가 방향을 바꿔가면서 달마산과 미황사를 바라봤어.
절정을 넘어가는 푸름이 애틋해.
구월이야.
어찌 구월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늦은 저녁에는 왼쪽에 보이는 요사채에서 주지스님이 차를 만들어주셨는데
그 방안에는 장르 구분 없는 책이 가득해. 역시 '아름다운 집'도 있었어.
오늘, 이 절집에서 머무는 사람은 넷.
처음 만나는 이십대에서 오십대까지 여자들의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사는 얘기,
스님의 말씀에 시간은 훌쩍 10시가 지나갔지.
함께하지 못하는 바람은 문짝을 확확 잡아채면서 심술을 부렸지만
쏜살같이 달려온 별들이 끔벅끔벅 바람을 달랬지.
묵었던 방의 문을 열어놓고 마당에 가만가만 내리는 햇살 한 줌 훔쳐다 엽서를 썼어.
바람 흔적 가득한 그 엽서 말이야.
산이 부르는 소리 이끌려 나무들, 풀들, 바위들 함께 놀다 왔지. 바람이 달디 달았어.
삐뚤빼뚤 서툰 글씨같던 바위산의 품은 넉넉하고 깊었어.
점심 공양때 먹은 열무쌈의 알싸하고 달큼한 맛, 입 안에 오래 남는 향,
혼자여서 더 익숙한 것들로 편안한 시간.
마루에 놓아두고 떠나왔어.
달이 뜨면 다시 갈까?
미황사에서 토말 가는 길 어디쯤이야.
바다처럼 보이지만 실은 저수지이고 갈대도 벼도 토실토실해.
진작 사진을 찍어야 하는 곳이 있었는데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놓쳐버리고 잠시 쉬는 중에 찍었지.
뜨거운 시간이라 들에는 일하시는 분들도 없었어.
다행이야.
어쩐지 민망하고 까칠까칠한 기분, 곁을 지날 때마다 그렇거든.
어깨 넘어 넘겨다보는 마당에는 참깨, 들깨, 고추가 자세 각각인데도 다정해 보여.
키운 이가 다정했던 것일까.
깻단처럼 머리 맞대고 살아가는 늙은 부부의 모습을 본 듯해. 토방 위 신발 두 켤레.
바다야.
땅 끝이야.
상징성만으로도 숨막히는 그리움을 간직한 곳.
땅. 끝.
모든 것의 출발일 수도 있는 끝.
그래, 여기 다시 왔어.
바닷물이 투명해.
저기 저 배는 노화도 행이야.
오래 잊을 수 없는 할머니 한 분, 배에 타고 계셔.
버스에서 앞 자리에 지갑을 떨어뜨리고 내리셨어. 챙겨야 할 짐이 많아서 지갑은 놓친거지.
지갑도 짐도 들어다 드렸어.
얼마나 고마워하시는지 당연한 일이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장하게 느껴질 지경이었어.
결국 배에서 다시 내려 귤을 주고 총총 가시네.
'하는 일 다 잘될 거'라는 덕담을 몇 번 하셨는지 몰라.
오래 전, 보길도 행 배를 기다리면서 노화도에서 사먹던 튀김 집 아주머니셨을까?
맞잡은 거친 손이 아주 따뜻해서 잠깐, 엄마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어.
모든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 오는 곳, 여기는 이 땅의 끝이야.
한 발짝도 더 이상 내디딜 수 없는 곳.
그러나 마음 먼저 내달려 어디까지나 갈 수 있는 곳이지.
이 친구 스물 넷.
이번 여름 학기에 졸업을 하고 한달 간 계속 된 sbs, pd 시험에 실패했대.
다음 mbc 시험까지 일주일의 시간, 무작정 떠나온 여행의 막바지에서 지쳐있었어.
같은 방에서 하루를 묵은 인연으로 땅 끝으로 따라 나섰어.
떠나올 때의 의기소침, 울분, 여자여서 무조건 손해본다는 피해의식, 연줄이 없다는 먹먹한 불안이 많이 가라 앉았다고, 미황사에 와서 나를 만나게 되어 고맙다는 어린 친구.
mbc에서 떨어지면 또 kbs, 기다리고 있다는 첩첩의 관문을 그녀, 무사히 넘을 수 있을 것이야.
넘지 못한다해도 다른 곳에서 pd인 그녀의 이름을 만나리라 믿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향해 묵묵히 오래 달릴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많은 길들을 잃고 많은 길 앞에서 좌절하겠지만 길이 있다는 소중함, 땅 끝의 시간을 기억하겠지.
권도연 화이팅!!!
파도는 바다가 전해주는 따뜻한 기록이야.
바다는 하루에 파도를 칠십만 번 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어.
들리지.
살아있다고 살아있다고 사소함으로도 살아있다고 전해 주는 소리.
보이지.
살아가는 거라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거라고, 포말로 보여지는 글자들.
그래, 여기는 땅 끝이야.
아니, 여기서부터 바다의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