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만남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떠남과 만남



  구본형의 산문집, 이 책을 참 좋아한다. 그 책 속의 길을 따라서 남도의 많은 길들을 달팽이처럼 걸었고 팔영산, 천관산들을 따라 올라보았다. 그처럼 한 달간 이어지는 일정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구간별로 끊어서 구석구석 그와 같게, 혹은 다르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낙안읍성에서는 책 속의 내용처럼 액자로 걸린 봄 풍경을 넋을 빼고 오래 바라보았던가. 깃발 나부끼는 성루에 앉아 푸르른 보리밭을 바라보며 엽서를 쓰던 몇  해전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해진다. 바닷물결처럼 넘실대던 청청한 보리밭....... 여전히 선물하기를 즐기지만 책 속처럼 여행하기를 멈춰버린 요즈음, 그 책을 읽으며 여행적금이라도 부어야겠다는 지인의 문자를 받고 갑자기 아주 오래전, 그 책을 만나기 이전에 다녀온 홍도가 불쑥 그립다.

 

  오래 시내에서만 맴돌던 후배랑 여행사 팩키지 상품으로 떠났던 여행. (그때 계속 특집기사로 실리던 홍도, 흑산도 여행 홍보는 두어 번 기회를 놓친 내게는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결국 저지르게 만든 계기는 ‘언제 여행 한번 같이 가자’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우리 두 사람이 스케쥴을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일이면 쉬는 일을 하는 그 친구와 휴일이면 더 바쁜 내가 같이 움직일 시간을 확보한 것으로 어디로든 떠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휴일에 대한 모독이었으니....... 여행이라고는 수학여행이 전부인 후배는 얼마나 흥분하고 기대를 하던지 재미없을까 잔뜩 긴장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목포까지 기차로, 다시 페리호로 여행의 요소를 고루 갖춘 매력적인 코스임이 분명했지만 바다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뭍사람의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리 멀미약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배 얼굴은 말라가는 탱자빛깔이었다. 홍도를 먼저 가려던 계획이 흑산도로 변경될 만큼 바다의 사정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예리항은 섬 분위기 물씬했고 눅진하고 습한 바람을 타고 유람선으로 돌아본 흑산도의 해무는 그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몽환이었다. 무진의 안개가 이렇겠다고 자연스럽게 연상했다.

  지금은 많이 돌아왔다는 홍어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다행이다로 위안삼고 (-_-;; 어쩔 것이냐. 엄두도 못내게 비싼 것을....) 가리비에 기울인 보해소주와 함께 흑산도의 하룻밤은 무기력하게 지나갔다. 일정조절로 자산어보의 바다를 예리항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는 걸로 그치고 만 것이다. 아마도 다시는 하게 될 것 같지 않은 팩키지 여행, 정작 자유롭고 싶을 때는 자유시간이 없고 무료할 때는 널널한 자유시간에다가 숙소배정에 걸리는 시간들은 성질 더러운 우리를 기함시키기 충분했다.

  그리고 홍도....... 구본형은 구멍섬이라 칭했던가, 원추리 꽃으로 치장한 섬의 부두는 시멘트 덩어리였지만 물빛은 가을이었다.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보여준다는 가을 물빛........ 사실 전형적인 뭍사람인 나는 그 색감 차이를 모른다. 설명에 그저 그런갑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중에 홀로 아는 척 써먹을 뿐이다. 혹자는 이런 잘난 척에 넘어가서 참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성공한 셈인가. ((_ _) 아차차~~~ 또 곁길로 샜다.)

  홍도는 아주 먼 바다에 있는 섬이었고, 섬에 있다는 것으로 우리는 묘한 고립감과 동시에 더 끈끈한 유대감에 그동안의 세월 십여 년보다 단 하루에 더욱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바닷장어 아나고 구이는 그동안 무진장 비웠던 진로, 빨간 뚜껑과 달리 우리 입맛에는 좀 달큼한 느낌이 남는 보해를 몇 병씩 비우게 만들었다. (그때 보해소주, 보드카처럼 투명한 케이스였던 술 이름을 모르겠다. 지금은 잎새인 것이 확실한데. -_-;; 지금의 진로가 참이슬로 대표되듯이 그때는 빨간 뚜껑에 새겨진 두꺼비가 그랬다.

  우리가 같이 회사를 다닌 몇 해동안 잡아먹은 두꺼비 숫자를 모으면 그럴듯한 집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란 썰렁한 농담을 둘은 요즘도 주고받는다. 사실 술값보다 안주 값이 더 대단했을 것인데. 아, 안주 없다면 술은 대체 무슨 맛일까? 지독하도록 쓰기만 할 것이다. 왜 그리 술맛 땡기게 하는 사건, 사고가 많던 이십대였는지....... 날마다 비분강개로 날 새는 줄 모르던 그때의 젊음이 그리운 시절이 올까? 아직은 아니다. 이십대는 너무 추레하고도 비통에 찬 나날이었다는 생각에서 아직 자유롭지 않다. 다 버리고, 다 털고 나면 정말 철이 들었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ㅋㅋ~)

  짠바람이 코를 간질이는 바다를 지척에 두고 마시는 탓일까? 술이 들어갈수록 더욱 명료한 의식은 그립지도 않았던 그리운 것들을 불러 세우기에 더할 나위없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쓸데없이 처연해져서 오래전에 공염불이 되어버린 버린 옛사람과 바다에 같이 가자던 약속 따위가 다 떠올랐다. 달랑 전철 삯으로 수원에서 구로, 구로에서 인천행 전철로 갈아타고 물어물어 찾아간 월미도....... 그 화려한 곳을 아무 곳에도 들어가지 못 하고 찬 바람 속에 떠있는 거대한 군함을 보면서 훗날을 기약했던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웠던 시절, 한 곳으로만 흘러가는 마음을 방치해두면 얼마나 적막한 곳까지 흘러가버리는 것일까?) 하필이면 둘의 숙소로 배정받은 곳은 터무니없게도 단체용, 삼사십 명은 거뜬히 자겠다싶은 휑한 방에서 전화 통화 중에 잠들어버린 후배 곁에 이불을 펴고 누워있자니 한데나 다름없이 바람이 불어댔다. 덜컹덜컹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 후두둑 비까지 몰고 오는 듯 하더니 이윽고 파도소리까지 데불고 나타났다. 처음엔 이러다 여기 고립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밤바다가 무서움보다는 유혹으로 불렀다. 습기를 잔뜩 담은 눅눅한 바람이 우엉우엉 울어대는 포구에는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빠르게 구름이 몰려가는 하늘바다에 빼곡하던 별....... (별에서도 바다 냄새가 났다고 쓰는 순간, 문장은 얼마나 가식적이 되고 마는가!) 

  홍도를 생각할 때마다 이러저러한 다른 설명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떠오르는 것은 방파제 끝에서 몇 시간이고 나를 사로잡던 별이 가득한 밤바다와 해상관광 중에 배에서 먹은, 어부가 직접 떠준 착착 감기던 막회 맛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김건모의 미련........ 혼자 방파제를 걷던 그 밤 함께 있어준 노래. 홍도를 생각하면 미련의 멜로디가 떠오르는지 미련을 들으면 홍도가 기억나는지 잘 모르겠다.  

  바람이 뒤숭숭하게 불어대던 오늘 하루, 귀에 감겨오는 미련을 듣는다. 피아노 건반으로 파도소리도 따라 나온다. (그 시절은 잠이 많질 않았는데 이제는 졸립다. 어쩔 수없이 나이 탓인가. 졸려서 감기는 눈으로 쓰고있다. 빨리 마치고 싶다. -_-;;)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후배랑 꼭 같이 가기로 한 제주는 벌써 몇 년째 유보 상태다. 아직 비행기도 못타봤다는 푸념도 여전히 유효한 불쌍한 친구^^* (여전히 홍도 이야기를 시작하면 눈을 반짝이면서 너무 좋았다고 입맛을 다신다.) 이제는 둘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게 다닐 수 있는 여행 노하우가 생겼는데 언제쯤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까? 꼭 지키고 싶은데.......

  그러나 무수하게 남발하는 약속들 속에 마음과 달리 지키지 못한 약속이 어디 그뿐이랴. 내일 하루치의 삶을 위해 에라 잠이나 자야겠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다면, 건강하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면, 지킬 수 없는 약속도 없을 것이니 지금은 그저 마음으로 떠남과 만남을 반복한다.


 

 2005. 3. 7.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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