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30주기 시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일월 삼일, 새해를 맞아 봉녕사에 갔어요. 마침 음력으로 섣달 초하루더군요.

   대웅전 앞 배롱나무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어요.

 

 

 

 

 

  여우길을 걸어서 (월드컵 경기장을 만들기 전에 산이 있었는데 그곳이 '여우골'이었단 생각이 나더군요. 거기 물이 맛있어서 약수터로 물 뜨러 다녔던 기억까지도. 그래서 아마도 여우길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답니다.)

  광교 호수공원까지 3킬로쯤 되는 것 같았어요.

  호호 깔깔거리며 모터보트를 타던 원천유원지는 반쯤은 사라지고 부자동네의 핫플로 남았네요. 무섭다 무섭다고 죽을 듯 비명을 지르며 바이킹을 타던 자리는 어디쯤일지 감도 오지 않았어요. 익숙한 곳인데도 낯선 곳이 자꾸 늘어나고 있어요.

 

 

 

 

 

 

 

 

 

 

 

 호수를 한 바퀴 돌면 저렇게 잘 만들어 논 인공암장도 만날 수 있지요. 오후 햇살에 더욱 근사해 보였어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암벽 타는 이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네요. 아, 코로나19 시절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익숙해지지 않은 외관을 가진 유명 백화점 앞 나무들의 비현실적인 색감이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주었어요.

 

 

 

  

 

    올해 쓰기로 한 다이어리는 몇 해 동안 가지고 있던 '기형도 30주기 기념 필사 노트'입니다. "입속의 검은 잎' 시집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짙은 회색의 양장 노트가 좋아서 뭘 쓸까 고민하다가 2022년 육십인 올해의 다이어리로 정했다지요. 첫 장의 시는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인데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없는 한미르 문학마당에 '길 위에서'를 만든지도 20년이 되었네요. 저도 '길 위에서 꽤 중얼거리며 살아왔구나' 싶습니다. '길 위에서'와 함께 20년,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많이 성장했다고 자평합니다. 어느 때는 중얼거림, 어느 때는 주절거림, 어느 때는 웅얼거림의 쓰기였지만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위였고 제 안으로 들어오는 길 위이기도 했지요. 또박또박, 기형도를 필사하면서 2022년의 몇 날을 지내보았습니다. 머리 더부룩한 청년 기형도가 말 걸어오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별 것도 없지만 그냥 이렇게 기록을 남겨봅니다.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 시 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