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6
박소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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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의 최선

                      박소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다

   많이 힘들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를 건네기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믿지 않는다

   슬픔을 응원하는 사람들

   힘을 내요 조금 더, 더, 더

   슬플 수 있도록

   웃는 사람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서로의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 같은 걸 떼어주면서

   난롯가에 붙어 앉아 불을 쬔다

   연한 김이 서린 유리 벽, 바깥

   실금처럼 스케치된 겨울의 풍경

   뭐 해요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면

   그냥요

   얼버무리고 말겠지만 슬픔은

   혼자 서 있다 코트를 여미고 빈 주머니를 더듬거리면서

   뒤돌아 먼 곳을 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눈발이 나부끼자마자 사라지는

   空中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차고 투명한 손이

   인사하듯

   슬픔의 물크러진 뺨을 할퀴고 간다

                             시집 [있다]중에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 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박소란 시인의 [있다]는 '핀' 시리즈의 서른여섯 번째 책이고 '핀'시리즈의 부연 설명을 현대문학은 저렇게 덧붙여 놓았다. 가로의 폭이 약간은 짧은. 양장본이라서 이 짧음은 조금 더 비중을 차지해 많이 짧은 듯 여겨지기도 한다. 손에 잡히는 작은 사이즈이긴 하지만 두께감이 있다. 나는 시집의 양장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짐이 가득한 가방에 무게를 더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딱딱한 질감이 책과 나의 관계를 멀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박소란'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결코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박소란'이었기에 아무 조건 없이 구매했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확인하는 한 방법이었다. 일반적인 시집 보다 수록 시는 작아서 아쉬웠고 흑백의 정물수채화는 묘하게도 시와 겉도는 느낌이 강렬했다.

   그래도 '박.소.란' 읽고 나면 수런수런 한 슬픔의 기운들이 묻고 묻는 가운데 '혼자 서있다'. 슬그머니 '코트를 여미고 빈 주머니를 더듬거리면서' 십일월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산은, 나무들은 생애 처음 만나는 듯한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담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문득 '아무도 없어요?' 소리치고 싶은 외로움에 치를 떠는 밤들, '슬픔의 물크러진 뺨이 할퀴고 간다'. '인사하듯' 시인에게 악수를 건네고 싶은 11월의 절반, '실금처럼 스케치된 겨울의 풍경'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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