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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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수명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이 시는 어디에도 우산을 감추고 있지 않다. 나와 너는 단지 손을 잡았을 뿐이다. '나'는 '너'의 왼쪽에서 '나'의 오른손으로 '너'의 왼손을 잡고 걷는다. 단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몸의 균형은 깨어질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비가 내 왼쪽 몸에는 내리고 오른쪽 몸에는 내리지 않은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이다. 이 시는 우리가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 기왕의 진부한 육체(세계)가 어떻게 다른 육체(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해설, 신형철}

 

    "어쩌면, 비는 내리는데 우산은 하나? '나'는 '너'의 왼편에서 함께 우산을 들고 걷습니다. 그래서 왼쪽 어깨만 젖네요. 나쁘지 않습니다. 그 순간 내 몸을 스쳐가는 어색하고 애틋한 느낌들 때문.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노는 것만 같고, 어색해서 아래만 보고 걷자니 발걸음조차 따라 어색해지고, 이런 식으로 어느덧 내 육체 전체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위는 시집에 실린 신형철의 해설이고 아래는 문예지에 수록된 시를 읽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에 있는 해설인데 약간은 다르다. 전문을 다 읽으면 많이 다르다. 시 읽기는 읽을 때의 상황이나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서 내 변덕인가 싶었는데 전문가인 신형철 선생도 그런 모양이다. 시는 읽는 사람이 누구든 읽히고 싶은 데로 읽히는 건가 싶다. [느낌의 공동체]에는 많은 시인들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시들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이수명 시인의 시집들을 바로 구매했다. 어느 노트엔가 빼곡히 필사도 했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옮겨 적은 부분은 수첩 한 권이다. 나 때문에 다치게 된 친구의 병간호로 병원의 보호자 침대에 엎드려 그 책을 필사하던 밤 풍경이 오롯하게 살아난다. 그때 난 절망에 사로잡혀있었던가. 내 다른 시선으로 피해를 본 그 친구에게 많이 미안했는데 탓하지 않는 친구 탓에 상대적으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의 여러 모습과 진정성에 생각이 많던 여름이었다. 손때묻고 낡은 [느낌의 공동체]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지금도 날궂이하는 그 친구의 발목을 생각하면 미안함이 여전히 몽글몽글해진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연일 비가 내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숲길을 통과해왔다. 비를 머금은 숲은 눅진했고, 달큼하고 상쾌한 향기가 어스름을 감싸고 있었다. 나무들의 정령이 웅크리고 있는 듯 물컹물컹한 공기가 산허리에 가득해서 어둠이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오래오래 숲길에 머물고 싶었다. 오락가락한 비에 빨래를 널었다 걷었다 하고, 종일 종종걸음을 걷고, 심장이 쪼그라들게 놀라기도 한, 하루치의 노곤함이 나무에게로 옮겨가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 숲길에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깨어나는 발자국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 시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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