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래서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시집[수학자의 아침]

일 년 내내 냉장고 문에 적혀있는 시의 구절은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다.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만난 그녀의 시들은 어느새 생활 속에 있다.

여전히 코로나가 진행중인 가난하고 가여운 우리의 추석,

저 하늘이 주는 위로로 하루를 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