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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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산

                                         김태정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진달래 향기에 깊이 취했던 것도 아닌데 등산객들의 발자국 어지러운 샛길, 길이 너무 많아 차라리 길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걸까요 길 안팎에서 한나절을 헤매었습니다 바람 속 무성한 시누대 숲은 좀처럼 길을 열어주지 않고 해묵은 낙엽들은 밑에서 아프게 바스라지는데

   손바닥에 잔금이 이리도 많은 걸 보니 너도 잔근심이 많겠구나, 겨울 실가지처럼 무수한 손금에서 삶의 비밀을 뒤적이듯 봄산 난마처럼 얽혀 있는 샛길에서 길을 찾듯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습니다 곧을 태 곧을 정, 까짓거 대나무처럼만 살면 될 거 아닌가 뜻도 모르는 채 내 이름 석자에 온 생을 맡겼습니다 곧고 곧아라 삶도 사랑도, 내 이름대로만 살면 될 거 아닌가 겁도 없이

   봄도 아직 이른 봄이라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진달래 낯빛 핏기 없이 질려 있는데 시누대는 제 울음만큼 한매듭씩 자라나는데 내 몸이 내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나는 자주 휘청거리곤 했지요 대나무붙이들아 늬들도 과분하게 주어진 이름들이 부끄러워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거니?

손바닥의 잔금만큼 사소한 근심들이 거미줄 치던 세월, 시누대 그 고통의 생장점이 스스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듯 슬픔이 나를 팽창시켰고 나는 어느덧 손금 위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좋을 나이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길을 찾아헤매는 내 발자국이 길 위에 길을 보태었다는 걸,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중에서

 

 

 

 

 

 

   봄 산에서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며칠 헤매고 다녔습니다.

   난마처럼 얽혀있는 샛길은 모른 척 반듯한 등산로만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하냥 걷고 걸었습니다. 삼십칠 년 더하기 이십 년을 여전히 이름 속에서 헤매는 발걸음이 아득해서 걷고 또 걸었습니다.

맑은 산, 언제쯤 이름에 값하는 생애를 살게 될까요. 곧고 곧게 삶을 사랑하고 살다간 김태정 시인의 생애를 생각하다가 괜한 나무 부리에 발길이 채이기도 했고 몇 해전 산불에 그대로 멈춰버린 생애를 지키는 나무들의 검은 팔이 연둣빛 몽실몽실한 숲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나무들의 경고 무시하고 다시 며칠 전 산불로 검은 흉터로 변해버린 능선은 섬뜩했습니다. 연두의 행렬 중에 나타난 검은색은 낯설었습니다. 아직도 불내 가득합니다. 잔불이 남아있나 살피는 분주한 장화들에 죄송했습니다. 숲 하나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숲에 물푸레나무도 있었을 테지요. 더욱 아득해져 봄 산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사람이 지나는 길은 왜 점점 황폐해지는지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요? 이래저래 봄 산은 아름답고도 처절합니다. 진달래는 시나브로 지고 있고 여린 분홍 색감의 철쭉들이 화마와 무관하게 몽오리몽오리 수줍게 몸을 틔우고 있습니다.

   시속의 화자보다 20년을 더 살아온 생애와 이름에 얽힌 생애의 길이 길 위에 길을 보태는 걸음걸음에 얹어졌습니다. 하루 만에 아기 연두는 소년이 되어버렸더니 며칠이 지나자 숲은 제 그림자를 끌고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자태로 늠름합니다. 나는 아직도 잔 손금 위에서 서성서성 길을 잃고 마는데 말이지요. 봄 산은 벌써 신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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