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변하셨어요. 표정에 마음의 일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분이 자주 우십니다. 당신의 눈물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얼른 고개를 돌리지요. 가장 많이 고갤 돌려야 하는 상대가 나랍니다. 다른 가족들이 직장일에 아이들 돌보는 일에 바쁜 탓으로 아무래도 아버지 곁에 자주 있게되는 사람은 단출한 나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가 울 적이면 나는 그저들고 있던 물주전자를 내려놓거나, 괜히 소형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거나 그럽니다. 우는 사람 곁에 있기는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힘이들지요. 더구나 우는 사람이 아버지이다보니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번아버지의 눈물을 보건마는 그때마다 매번 당혹스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내가 허둥거리면 아버지는 이제는 주무시는 척하십니다. 얕게 콧소리조차 내시지요. 방금 울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세잠이 들겠는가만 나는 아버지가 잠드셨다는 걸 잘 안다는 듯이 조심조심하는 태가 역력하게 발소리를 죽이며 문을 가만히 여닫고서 병실 바깥으로 나오곤 합니다. - P19
남동생의 종아리를 쪼아서 피를 내곤 하던 사나운 장닭을 눈 깜박할 새에 잡아올려 목을 비틀 때 아버지 팔뚝에 불끈 치솟던 힘줄도 기억합니다. 큰오빠에게 먹일 오리의 생피를 얻기 위해 희뿌연 새벽에 오리 정수리에 칼을 내리치던 모습도요. 원체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아아, 소리를 뽑아올리실 적의 아버지의 젊은 날들을 기억하지요. 3월 삼짇날 연자 날아들고호점은 편편 나무나무 속잎 나 가지꽃 피었다 춘몽을 떨쳐 먼산은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층층 매사니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주루루루루루루 저 골 물이 퀄퀄 열의 열두 골 물이 한테로 합수처 천방져 지방져 월턱져 구부져 방울이 버큼져 건넌 병풍석에다 아주 쾅쾅 마주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어디메로 가잔 말 아마도 네로구나 요런 경치가 또 있나-아버지의 탄력 있는 젊은 목에서뿜어올려지던 그 소리들, 부친이 당신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있는 소리를 누르고 이 누추한 삶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건 쑥쑥 발목이 굵어지고 있는 우리 형제들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렇게 좋아하던 낡은 가죽 북을 선반에 올려놓았던 건 자식들 앞에선 오로지 현재와 미래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서였겠지요. 그럴 적마저도 탄탄했던 부친의 어깨였는데, 문득 지난 생애의 자취를 한몫에 싹, 문질러버리고 울고 계시는겁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느냐? 하시면서요. - P20
칠 년 전이면 오빠가 지금의 제 나이였네요.
어쩌면 그때 그도 지금의 나처럼 처음으로 근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요? 삶이 가져다주는 것 중엔 우리가물리쳐볼 수 없는 절대의 상실이 있다는 것을 그도 그때 처음으로 인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질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눈물이 고이는까닭도 그것일까요? 혹시 오빤 그때 중환자실의 아버질 두고서 옛날의아버지, 그의 종아리에 그토록 모진 회초리질을 하던 부친의 건강한 팔뚝을 그리워한 건 아니었을지요. 생각해보면 부친과 늘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십수 년 전에 이 도시로 떠나온 후론 아버진 시골에 우린이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슨 상징처럼요. 언제나 그곳에 계시는 분이었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