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게임 오정희
꼭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잖아. 밥물이 끓어 넘친 자국을 처음에는 젖은 행주로, 다음에는 마른 행주로 꼼꼼히 문지르며 나는 새삼마루와 부엌을 훤히 튼, 소위 입식 구조라는 것을 원망하는 시늉으로등을 보이는 불안을 무마하려 애썼다. 그래도 가스레인지 주변의, 점점이 뿌려진 몇 점의 얼룩은 여전히 희미한 자국으로 남았다. 아마 지난겨울 아버지가 약을 끓이다가 부주의로 흘린 자국일 것이다. 승검초의뿌리와 비단개구리, 검은콩과 두꺼비 기름을 넣고 불 위에 얹어 갈색의거품이 끓어오를 즈음 꿀을 넣고 천천히 휘저어 검은 묵처럼 만든 그것을 겨우내 장복하며 아버지는, 피가 맑아지고 변비가 없어진단다라고말했었다. 내의 바람으로 군용 항고에 콜타르처럼 꺼떻게 엉기는 액체를 긴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아버지는 영락없이 중세의 연금술사였다. - P321
병원에서 호송차가 왔을 때 어머니는 식탁 아래로 기어들었다. 아가 난 싫어, 무서워, 날 데려가지 못하게 해줘. 호송인들에게 반짝 들리워나가며 내가 안 보일 때까지 고개를 비틀어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왜웃어. 왜 웃어. 심한 짓을 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모르는 소리야.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니. 넌 아직 어렸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어. 갓난애도 그렇게 없애지 않았니? 넌 마치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게 모두내 탓이라는 투로구나. 잘 보살펴드릴 수도 있었어요. 외려 네 엄마에겐 그곳이 편한 곳이야. 친구들도 있고 가족이란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너부터도 내심 네 엄마를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된다는걸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니? 그전에 번번이 네 혼담이 깨지던것도 어미 탓이라고 원망했을걸.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버지는 화투장 뒷면에 가로질린 금을 손톱으로 긁어 지우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다. - P335
오빠는 어딜 가 있을까요. 그 녀석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아버지는버럭 화를 내었다. 그 녀석이 생기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어. 아버지는 둘이서 하는 화투놀이가 셋이서 하는 것보다 재미가 덜하다는 것 때문에 오빠의 부재를 노여워하는 걸까. 더러운 게임이야. 오빠가 어느 날 갑자기 식탁을 떨치고 일어나 팽팽하게 당겨진 줄의 한끝을놓아버렸을 때 삼각 구도는 깨지고 아버지와 나는 균형을 잃은 힘의 반동으로 형편없이 비틀거렸다. 나도 오빠처럼 훌쩍 나가버릴 수가 있을까. 침몰하는 선체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결사적으로 탈출하듯 그렇게 달아나버릴 수 있을까. 나는매조를 먹을까 칠띠를 깨뜨릴까에 긴장되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좁고 긴 얼굴, 매처럼 구부러진 코끝은 볼의 살이 빠짐에 따라 더욱 길게 늘어져 보였다. 아가, 날 데려가다오. 여긴무섭고 쓸쓸하단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화투는 아버지의 손에서 내 손으로 옮겨갔다. - P337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책으로만 만나던 김동리, 서정주 등의 강의를 들으면서 몇 편의 소설을 써보았지만 작가의 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스무 살의 환상, 스무 살의절망에 사로잡혀 발밑을 보고 다녔다. 이학년 가을학기부터 그녀는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고 진로를 결정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절에 가서 중이 되든가 고아원에서 밥 짓는 보모가 되든가 아니면 땅장사를 해서 돈을 벌든가, 하여튼 무엇이든 결정을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쓰고 던져버린 초고를 찾아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그녀를작가로 만들어준 「완구점 여인」이었다. 오정희는 그때부터 사실상의 습작기가 시작되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한 해에 두어 편씩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그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소설을 쓰겠다는 말뿐으로‘ 일생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잡지사에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에 어렵게 어렵게 적응해가던 1974년에는 한 해 동안 한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글을 못 쓰는 괴로움, 열등감도 컸지만 글을 쓰 - P348
는 두려움, 빈 원고지의 공포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오정희에 대하여 「넉넉함과 깐깐함」이라는 기록을 남긴 소설가 윤후명의 글에도 나오지만, 쓰는 두려움과 자신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추스름과 안간힘으로 쓴 것이 「목련초였고, 그저 내게는 쓸 수 있었다는 것만이 중요해요‘라고 말할 정도로 결혼은 이 여성작가에게 창작적 위기의 시초였다. 윤후명의 말에 의하면 작품이 머릿속에 들었을 때 오정희는 재처럼 말이 없고 눈에는 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잠재우고 한밤중에 그녀는 공책을 펴놓고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아서 연금술사처럼 한 획씩 또박또박 썼다. - P349
‘가부장적 질서‘는 한국 중산층의 가족사를 결정짓는 이데올로기다. 전쟁과 근대화의 변동을 겪어나가면서 여성들은 남자들과는 달리 무서운 괴물로 변한 일상에 의하여 서서히 상처받고 무너져갔다. 그것은 종종 남자들에게는 억척스레 새끼들과 더불어 살아간 ‘어머니라는 여성영웅‘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다. 느닷없는 낯선 사내와의 정사 장면과스스로 창녀처럼 돈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나‘의 고독한 저항에소름이 돋으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끝 장면에서 아기를 재우는 이층여자의 발소리가 이어지고 모성은 조난당한 배의 마스트에서 구조 요청을 하는 헝겊 쪼가리가 되어버린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연필심을 날카롭게 깎아 들고 이 소설을 쓰던 그 무렵의 오정희를 문득 떠올려본다. ‘가부장제의 감옥‘으로부터 꾀어내려는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를 그녀는 무수히 귓전으로 들어왔으리라. 아, 참으로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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