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18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순분이가 다니던 야학은 일요일엔 예배를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탔다. 네시쯤이나 되었을까, 버스가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멈추어 섰다.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내리는 바람에 순분이도 따라 내렸다.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이미 부근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찼다. 금남로와 소방서 쪽에서 군중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순분은 군중들과 섞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쓰라린 눈을 가까스로 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날뛰고 있었다(나중에 그들이 공수특전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 P17
공수특전단들은 무조건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내질렀다. 그들과 맞닿아 있던 군중들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손을 뻗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누군가가순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골목길로 내달리다가 앞사람을 좇아건물 속으로 숨어들었다. 서너 명이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창밖으로군용 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멈추어 서자 이미 포승으로묶은 사람들을 차에다 던져 올렸다. 올라온 즉시 옷을 찢어대더니 등뒤를 개머리판으로 계속 난타했다. 어떤 공수특전단원은 대검으로 청년의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어서 트럭 위에 던졌다. 노인 하나가 끌려가는 청년을 뒤따르며 손을 저었다. 공수특전단은 한 손에 청년의 발을 잡은 채로 대검으로 노인을 내리쳤다. 노인은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다. 시뻘건 칼날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트럭 안은 던져진 시체들로 가득 들어찼다. 트럭이 움직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P17
동시에 총소리가 계엄군의 서치라이트를 박살내었다. 주위는 다시캄캄해졌다. 동지들과 더불어 김두칠은 방아쇠를 당겼다.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그들의 자동화기가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일시에퍼부어왔다. 김두칠은 달려오는 수많은 군홧발을 보았다.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하나가 날아와 김두칠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은폐물 뒤로 나동그라졌다. 동지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군홧발은 마치대지를 뒤흔드는 것같이 은폐물 위를 넘어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김두칠은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고 애써보았다. 가까스로 손 한쪽을 은폐물 위에 올려놓았다. 온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총을 은폐물위에 올려놓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군홧발이 몰려들고 있었다. 여러 발의 총탄이 천지를 흔들었다. 김두칠은 은폐물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총은 가슴께에 품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이 먼 곳을 응시하였다. 두 눈은군홧발을 넘어, 탱크와 장갑차를 넘어, 쭉 뻗은 시가지를 넘어 먼 곳 고향산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입속에서 나오는 마지막 부르짖음이 총성과 군홧발 소리에 묻혀버렸다. - P61
당시 여덟 살 외동아들이 걸려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그때 만난 노동자들의 그 선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 죽음을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 꽃피던 동지애∙∙∙∙∙∙ 홍희윤에게 그것은 평생을 안고 살아갈 자산이 됐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역사의식에 눈을 떴다. 이후 홍희윤은 두 차례나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협박을 당했다. 1980년 5월항쟁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 때 송백회의 자금책으로 몰려경찰에 시달렸다. 결국 그해 송백회는 겉으로 해체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여성노동자들과 구속자 지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엔 황석영의 평양 방문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려던 안기부에서 닦달했다. 홍희윤은 인터뷰를 지독히 싫어한다. ‘나는 한 일이 없어. 그냥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야.‘ 수줍게 손사래를 칠 뿐이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한 소녀 같은 열정과,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어느 5월 그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쓴 글이 바로 1988년 ‘작가 홍희담‘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은 5월 도청에서 살아 숨쉬었던 모든 노동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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