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여덟 가지 답변의 역사
김진엽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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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예술에 대한 여덟 가지 답변의 역사> 시작합니다.

여덟 가지 미학적 입장? 비평이론?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미술에 친숙한 학생이라면 중3, 그렇지 않다면 고등학생이 읽기에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 이하라면 형식주의 비평이론을 소개하는 3장부터는 어렵다고 느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미학적 파산”입니다. 제가 만든 단어는 아니고, 최근에 본 칼럼 하나를 통해 우리가 미학을 알면 좋은 이유를 말해볼까 하는데요.


요새 종편을 비롯해 방송가에서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는데요. 7월 6일자 한국일보에 <성인 가요의 미학적 파산>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구글에 "미학적 파산" 치시면 제일 위에 나와요. 최근 부는 트로트 열풍의 중심에 있는 노래, 각종 종편에서 열린 트로트 경연방송에서 나오는 노래가 예술적으로 비평할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노래라는 건데요. 유치함을 솔직함으로 포장하고, 아무런 예술적 장치 없이 그저 감정을 쏟아내기만 할 뿐이라는 게 글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한 편으론 공감이 갔어요. 트로트를 더 이상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없고, 그러다보니 멜로디나 리듬 같은 형식도 그렇고 노래가 드러내는 감정도 그렇고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게끔 만드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트로트는 주로 어른들이 듣는 노래라서 "성인가요"라고 부르는데, <무조건> 같은 노래가 성인의 사랑이라는 생각은 잘 안들거든요. 신경쓰고 고려할 거 많은 어른의 삶에서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건너서 사랑을 향해 달려갈" 여유가 정말 있을까요?

물론 많은 분들께서 반론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좋은 점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사람이 많이 들으면 그게 훌륭한거지. 저는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 예술적으로 훌륭한 노래, 이거 세 개가 다 다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그 노래를 좋아해도 되는 이유, 사람들이 그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 그 노래가 예술적으로 훌륭한 이유 모두를 가려낼 수 있는 감각을 갖는 게 바람직하겠죠.

이 책에서 다루는 비평이론, 미학, 이런 것들은 제일 마지막 부분인 "예술적으로 훌륭한 이유"를 생각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일종의 도구들이에요. 또,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향유하도록 설득하는 데에도 써먹을 수 있는 지적 도구죠. 또, 다른 사람들이 내 감식안을 의심하게 하지 않도록 "미학적으로 파산한" 작품을 피해가게 해주는 데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예술이론, 비평이론, 미학 같은 걸 공부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추천해드리는 콘텐츠는 “진중권”입니다. 시사칼럼니스트로서의 진중권이 아닌 미학연구자, 미학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진중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사칼럼니스트로서의 명성 때문에 커뮤니케이터로서의 능력이 가려진다고 생각해요. 쉬운 개념은 쉽게, 어려운 개념은 적당히 어렵게, 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고 위트있게 글로 풀어내는 솜씨가 대단하죠. 우리나라에 미학 분야에서 이만한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습니다. 활동 기간이 길다보니 책을 엄청 많이 써서 뭘 이야기해야 하나 싶은데, 한번 죽 늘어놔 볼게요. 이제는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른 <미학 오디세이>라든가, 심화버전인 <현대미학강의>도 좋고요. 본격적으로 통사에 도전한 <서양미술사>도 썼고, 개별 그림에 대한 칼럼을 모은 <앙겔루스 노부스>나 <미학스캔들> 같은 책도 있고요. 인터뷰 모음인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이나 <진중권이 사랑한 호모 무지쿠스>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볼 수 있습니다. 최근작인 <감각의 역사>도 꽤 두툼하지만 “감각”이라는 관점에서 철학의 역사를 훑어보는 좋은 시도인 것 같아서 관심과 기대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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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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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체공녀 강주룡> 시작합니다.

여기 한반도에서 부유하게 살다가 몰락해 간도로 이주한 한 가족이 있습니다. 이 집 딸의 이름은 두루 주 자에 용 룡 자를 쓰는 여성, 강주룡입니다. 스무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하다, 아들 전빈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가정을 꾸리게 만들려는 옆동네 어느 집안에 팔리듯 시집을 갑니다. 하지만 다행히 전빈은 잘생기고 꽤 괜찮은 사람이었고, 둘 모두가 독립군에 가담하죠. 하지만 유일한 여성 일원이었던 주룡에 대한 수군거림을 이기지 못해 둘은 다투었고, 그 길로 주룡은 홀로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전빈은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하고, 시집에선 주룡을 팔자가 사나워 남편 잡아먹은 며느리라며 비난하고, 친정아버지는 그런 주룡을 감싸주진 못할 망정 더 어려워진 집안의 경제사정을 핑계삼아 소작할 밭을 떼어준 늙고 부유한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려 합니다. 분노한 주룡은 평양으로 탈출해 고무신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죠.

주룡은 아는 사람 하나 없지만 평양에서의 삶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번 돈으로 먹고 자고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세계에 불어닥친 불황의 늪이 조선에도 찾아오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평양의 공장지대에서도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라는 요구사항을 걸고 파업에 돌입하는 노동자들의 대열에 들어서며, 주룡은 자신과 동료들이 겪은 부당함을 온몸으로 외치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단식이었습니다.

1930년대 평양 공장지대의 여성 노조위원장, 을밀대 고공 단식농성의 주인공인 강주룡의 삶을 그려내 여성서사와 노동소설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문제작,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체공녀 강주룡>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여성의 노동”입니다. 이 책에서 강주룡의 삶을 통해 이 시기에 여성의 노동이 무시당하는 방식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주룡이 간도에 살던 시절을 생각해보죠. 흔히 여성은 집안일만 한다고 여겨지지만, 오히려 이런 관점이야말로 산업화 이후의 시선에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농촌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한데, 여성은 주요 수입원인 농업노동에 전면적으로 개입합니다. 밭을 고르고, 먹거나 판매 가능한 형태로 농산물을 다듬고, 농기구를 수선하고, 텃밭을 가꿔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등등. 여기에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 집안일은 덤입니다. 즉, 단지 이른바 “재생산”이라는 영역에만 종사하지 않고, “생산”에도 종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은 논밭 농사일은 남성들만 한다는 우리의 “이미지”와 그다지 일치하지 않죠.

남자들은 오히려 농번기에 바짝 일하고, 그게 1년 수입 전체를 책임지는 일이니 나머지 일은 “아녀자”가 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결혼이라는 행사는 딸 보내는 집 쪽에서 “먹을 게 부족한 상황에서 입을 던다”는 의미보다는 아들 가진 집 쪽에서 “무급 노동 인원을 한 명 얻는다” 쪽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 결혼의 조건으로 남성이 여성의 집에 돈을 얹어주는 건,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노비 거래쯤으로 이해하는 게 크게 무리는 아니다 싶습니다. 그 점을 이 소설 속에서 주룡도 너무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건 주룡이 평양에 간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주룡처럼 자기 한 몸을 건사하기도 하고, 딸로서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기도 하며, 결혼한 여성들은 가정경제 전체를 책임지기도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조신하게 집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가서 일을 한다는 핀잔을 듣지만 동시에 집안의 남자 형제가 다른 걸 신경쓰지 않고 편안하게 공부해서 출세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이 딸들이 벌어오는 돈이 필요하죠. 이렇게 도움을 받은 남자형제들이 출세한 뒤에는, “걔가 공부 잘해서 그런거지 너네가 한 게 뭐 있냐”며 자매들의 경제적 지원과 희생이 지워집니다. 결혼한 여성들은 출산의 압박을 받는데, 아이를 낳은 뒤엔 그 누구도 육아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요구 속에서 여성 노동력의 가격은 최저 생계유지 비용 이하로 내려갑니다. 노동의 필요성 때문에 공급은 넘쳐나고 그 누구도 여기에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벌이는 파업은 이 지점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닙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 요구인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연대, 즉 자매애를 표출하는 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여성의 노동의 공을 지워버리는 현실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면, 강주룡의 이야기는 단순히 일제시대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역사적 거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추천하는 콘텐츠는 <전태일 기념관>입니다. 소라기둥에서 청계천변을 따라 15분정도 걸어내려가면 있습니다. 전태일이 일하던 동대문 평화시장에 약간 못간 지점입니다. 산책하다가 우연히 알게 돼 들른 곳인데요. 층별로 상설 전시실과 기획 전시실로 나뉩니다. 상설전시실은 전태일의 육필 원고, 1970년대 당시 피복공업계의 현실을 알아볼 수 있는 시설물 등을 타임라인을 따라서 볼 수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등 노동/사회문제 관련 책을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도서열람실도 있어요. 1970년대 피복공업계 역시 실제 최전선에는 여공들이 많았던 만큼, 강주룡이 어떤 환경에서 일했을지 추정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획 전시실은 주기적으로 노동 관련 예술작품을 전시합니다. 주변 완전 시내 한복판이라 주변 건물들이 워낙 크고 웅장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작고 아담하게? 초라하게? 보이는 면이 없진 않은데, 청계천을 산책하시다가 발견하신다면 한 번 들어가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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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0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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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집: 지금 쳐다보지 마> 시작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 여름을 보낼 단 한 권의 소설로 추천드립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숭고”입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입니다. 우선 소개해주신 최쌤에게 감사드리고. 정말 속도를 올려서 페이지가 죽죽 넘어가는데도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고, 항상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기다리고. 금방 읽을 수 있는 소설로서 미덕은 다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단편집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지”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실린 작품이 우리에게 어떤 으스스함을 안겨주는 요인이죠.

주인공이나 주요 캐릭터에게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게 왜 벌어지는지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그 원인을 알 때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그 대상에게 해를 입어서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그걸 충분히 탐구할만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알아야 하지만 알 수 없고, 다가가야 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그런 대상에게서 인간은 독특한 미적 쾌감을 느낍니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적극적으로 이 쾌감을 일으키는 작품을 만들어왔고, 그래서 이 쾌감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름이 붙어있었습니다. 바로 “숭고”입니다. 아주 많은 학자가 숭고에 대해서 논의해왔는데, 이걸 “앎”과 이어서 논의한 사람으로는 버크와 칸트가 대표적입니다.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비슷하니 엮어서 잠깐 소개를 해보도록 하죠.

버크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서 숭고의 기원은 공포라고 말합니다. 버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대면하면 쾌락을 느끼고 반대로 해를 끼칠 것 같은 존재를 대면하면 불쾌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런 위해 가능성을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시각적 기준이 바로 크기인데요. 그래서 작은 것을 보면서 느끼는 쾌락은 귀여움 내지는 아름다움, 커다란 것을 보며 느끼는 불쾌가 공포라고 합니다. 커다랗긴 한데 나에게 아직은 해를 끼치지 않은 상황에서 느끼는 공포가 바로 숭고인데요. 이 숭고를 느끼는 상황을 버크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눕니다. 커다랗다는 건 알았는데 그로부터 해는 입지 않은 상황과, 커다란 것인지 아닌지 자체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숭고가 “앎”과 연결됩니다.

이 논의에서 영향을 받은 칸트는 자기 철학 체계에 버크의 논의를 집어넣습니다. 인간에겐 사물을 이해하는 체계인 이해력(오성)이 있습니다. 바깥의 사물이 이해력을 통해 우리가 아는 세계로 탈바꿈한다는 게 칸트의 생각입니다. 우리 눈 앞에 있다, 떠올린다, 그건 이미 이해력을 통과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대한 예외가 있는데, 바로 사물이 너무 커서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입니다. 이때 우리의 이해력은 사물을 세계로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사물 전체를 완전히 세계로 번역하지 못하죠. 이런 "알지 못함"의 상황을 칸트는 숭고라고 하는데, 칸트 자신이 드는 예로는 큰 산이나 폭포 같은 것이 숭고를 일으키는 대상이라고 하네요. 물론 어떤 식으로든 이런 상황을 창출해내기만 하면 우리는 숭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버크와 칸트는 숭고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미학적 쾌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걸 쾌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어떤 느낌적 느낌 같은 것이죠. 이 개념은 특히 청취자 여러분이 미술관을 가셨을 때, 대체 작가가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을 때, "나는 이 작품으로부터 숭고미를 느꼈어"라고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습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추천해드리는 콘텐츠는 김지운 감독의 2002년 영화 <장화, 홍련>입니다. 공포나 미스테리, 이런 쪽은 글로 보는 것만큼이나 영상으로 보는 게 재미가 쏠쏠하죠.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잘 만들어진 미스터리 공포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의 역사에 남을 걸작을 꼽으라면 이 작품은 꼭 들어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제목과는 달리 장화 홍련 설화와는 별 관련이 없고, 밝혀지지 않은 내용을 중심으로 관람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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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 사람과 동물의 윤리적 공존을 위하여
셸리 케이건 지음, 김후 옮김 / 안타레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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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먼저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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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전 메일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책인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만든 편집자께서 보내주신 글이었다. 알라딘에 올려놓은 리뷰(https://blog.aladin.co.kr/russell85/9832471)를 보았으며, 셸리 케이건의 새 번역서를 출간했다는 소식도 적혀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신간을 배송하겠다는 제안도 함께 들어있었다.


공짜로 생기는 물건을 좋아하는 나는 탈모인이다. 돌이켜 생각하지 않고 그 제안을 덥석 물었다. 아마 내 머리카락이 또 몇 개는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리뷰를 쓰느라 머리가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두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셸리 케이건은 윤리학자다. 책 제목은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How to Count Animals, more or less)>다. 이 둘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 동물윤리에 관한 책이다.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다룬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렵다 싶지만, 무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육과정에도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이 분야는 시민의 교양이기도 하다.


동물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길에 나가면 “애완”견을 흔히 볼 수 있고, 고양이를 섬기는 집사도 많다. 반면 돼지와 소와 닭은 거의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오고, 쥐는 징그러우니 "구제"하고, 앵앵거리는 모기는 서슴없이 때려잡는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이런 실제 삶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대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한다. 이렇게 대우하는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이론을 동원해 대상에 서로 다른 도덕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는 이런 태도를 "계층주의"라고 부른다.


그가 생각하기에 실제 삶을 무시하는 윤리 이론은 반드시 실패한다. 행위를 지시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를 명령하는 "실천적 모순"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낳는 의견의 한 전형은 인간과 동물에게 같은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단일주의"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대우만큼 동물도 대우받아야 하고,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그런 대우가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면 그 제도가 동물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단일주의"라는 단어로 우리가 흔히 아는 동물권 옹호론자들을 가리키려 한다. "고통은 다 같은 고통"이니 동물의 고통도 인간만큼 고려돼야 한다는 피터 싱어나, 권리를 부여하는 근거를 인간의 시선에서 생각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톰 레건 같은 사람들 말이다. 케이건은 이들의 단일주의가 각자의 윤리 이론(공리주의, 의무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순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전형은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모두 도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인데, 사실은 도덕적 지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전세계 수천만의 애견인과 애묘인과 그 밖에 수많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무지막지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단계는 아니다. 지금은 17세기가 아니니까.


계층주의를 정당화하는 전략은 도덕적 입장과 도덕적 지위를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개체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개나 돼지처럼 도덕적으로 대우받아야 하거나, 돌이나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도덕적으로 대우받지 않아도 된다. 전자는 도덕적 입장을 갖고, 후자는 도덕적 입장을 갖지 않는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돌이나 플라스틱 장난감도 도덕적 입장을 갖는다고 간주하지만, 케이건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도덕적 지위는 개체가 “어떤 방식으로” 대우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그 개체를 대우하는 행위방식에 따라 구성된다. 그러나 케이건은 이런 단순한 상대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도덕적 지위에 내재적 특성이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반적 조건” 아래서 “도덕적 삶”을 더 정교하고 풍성하게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이런 내재적 특성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른바 “정신적”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부분 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이 정신적 능력을 구성하는 여타의 특성 또한 내재적 특성에 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이건은 도덕적 입장과 도덕적 지위를 분리하지 못하는 데서 단일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오류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에게 도덕적 입장은 on/off지만 도덕적 지위는 스펙트럼이다. 하지만 이 둘을 동일시하면 “모든 개체에게 동등한 도덕적 지위가 부여된다”(단일주의)거나 “인간 이외의 존재에겐 도덕적 입장이 없다”(인간중심주의)고 생각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계층주의를 정당화하는 두번째 전략은 개체를 도덕적 지위의 계층을 구별하는 단위로 삼는 것이다. 이른 동물의 복지나 권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물권 옹호론자들의 “종차별주의”라는 공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은 대체로 비슷한 특성을 지녀 비슷한 “도덕적” 능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종 자체를 도덕적 대우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동물보다 못한 인간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문제를 낳는다.


이 두 가지 전략 위에서 케이건은 동물에 대한 대우를 결정하는 다른 이론(전략)보다 자기 아이디어가 우월하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 입증 방식은 주로 동물윤리 분야에서 이미 등장한 여러 입장이 특정한 상황(대체로 우리가 발생할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는 있는 정도의 상황)에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논의 뒤에는 자신의 “계층주의” 아이디어의 경우엔 받아들일만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기 아이디어가 더 포괄적이면서도 동시에 정합적일 수 있다는 걸 드러내려 한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겐 이 부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다.)


이 전략이 성공적인지는 읽는 사람이 각자 판단할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케이건이 비판하는 “단일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를 비판자의 시선에서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긴 했다. 그럼에도 단일주의자의 시각에서 몇 가지 의아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첫째는, 계층주의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이론이긴 해도 무엇을 하라고 이야기해주진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단일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단일주의의 이론적 구조와 논의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결론으로서의 메시지는 매우 명쾌하다.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지 않아야 한다면, 동물도 괴롭히고 죽이지 말아라.” 하지만 계층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개는 죽여선 안 된다? 새우는 잡아죽여서 먹어도 된다? 돌고래를 유흥거리로 이용해선 안 된다면 햄스터도 안 되는 건가?


물론 케이건 스스로 이런 점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계층을 어떻게 나눌 것이며 그에 따른 대우의 수준이 어때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가로서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마냥 유보하고 있기엔, 동물에게 벌어지는 일은 인간에 대한 대우라는 관점에서 봤을 땐 극단적으로 나쁜 일이라는 게 문제다. 죽여서 먹고(축산), 온갖 실험의 대상으로 삼고(동물실험), 자유를 박탈한다(동물원 등). 과연 도덕적 지위를 계층적으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나누면, 어느 단계의 동물에겐 이런 부분을 허용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둘째는 케이건 스스로도 인정하는 “정상적 편차”의 문제다. 이것은 도덕적 지위의 계층의 단위가 개체로 설정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다. 도덕적 삶을 풍성하고 정교하게 구성하는 능력은 종 뿐만 아니라 개체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다. 때로 이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하기도 하다. 당장 아이와 어른 사이의 차이가 있고, 현재에 급급한 성향을 가진 어른도 있지만 미래를 알차게 설계하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 어른도 있다.


케이건의 “계층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대우가 달라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책의 끝부분에서 “너무 복잡하게” 계층을 나누지 않는 “제한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궁색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이론이 “직관적”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지만 이처럼 핵심적인 뼈대가 21세기의 관점에서 반직관적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런 개체주의의 관점을 채택한 여러 종류의 차별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우리가, 이런 관점을 다시 불러들어야 할지는 꽤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노예, 장애인, 인종에 대한 차별은 그들이 종으로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인간이긴 하지만, “인간”으로서 대우받아야 하는 어떤 집단이 가진 특성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개체주의와 계층주의의 결합의 결과였다는 말이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서 노예의 투표권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남부의 백인 정치가는 남부 지역의 투표인단의 규모를 키워 정치적으로 북부를 찍어누르기 위해 “노예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반면 북부의 백인 정치가들은 이런 남부 정치가들을 향해 “사람 취급도 안해주면서 투표할 때만 투표권을 주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하며,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면 북부의 투표인단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어지기 때문에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 두 집단이 박터지게 부딪힌 결과, 노예 1인에게는 3/5표의 투표권을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정교하고 새로운 논의의 지평과 관점을 열어준 것과는 별개로, 케이건의 계층주의는 내게 이런 종류의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타협처럼 보인다는 점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재미있는 독서였으되, 다소 혼란스럽고 맥빠지는 결론이라는 점이 못내 아쉽다. 물론 이것은 내가 단일주의자여서 그런 것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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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독서 동아리 - 책이 금지된 시대, 만화로 보는 1980년대
김현숙.라이언 에스트라다 지음, 고형주 그림 / 이데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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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비밀 독서 동아리> 시작합니다.

1983년, 현숙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국립대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합니다. 첫날부터 정문에서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마주치고,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대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잘생긴 학보사 편집장 오빠 훈의 손에 이끌려 탈춤 동아리에 가입하고 그의 소개로 독서모임에 참여했는데, 실제로 그곳은 정부에서 금서로 지정한 책을 몰래 공수해와서 읽는 동아리였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의 진실에 관한 비디오를 보고, 전단지를 만들고 시위용 화염병을 제조하고, 동아리에서 함께 읽는 다양한 책에 푹빠져 캠퍼스의 나날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을 정부가 그냥 내버려둘 리 없겠죠. 경찰과 안기부의 요원들은 교내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체포하고, 고문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동아리 선배 지후가 체포당해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을 위하여”라는 김일성의 글을 읽고 있었단 사실까지 발각돼 해체될 위기에 처하고, 주인공 현숙도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이에 맞서 동아리원들은 지후를 석방하라는 시위를 준비합니다. 동아리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는 독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까요? 저자의 직접 경험을 배경으로 1980년대 한국 대학의 풍경을 그려낸 영문 그래픽노블, 김현숙과 라이언 에스트라다의 <비밀 독서 동아리>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두 단어로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의식화’입니다. 1980년대 대학에는 탈춤반, 풍물반 등 ‘전통문화’를 잇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정부가 금서로 지정한 책을 읽는 동아리가 많았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공연도 많이 하고요. “대학에 와서 서양의 학문과 사회이론만 공부해서는 민중을 이해할 수 없고, 민중의 생활을 이해해야 우리가 그들과 함께 혁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시작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합니다. 뭐, 이렇게 하던 게 진짜 “민중문화”를 체득하는 활동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죠.

흔히 이런 동아리를 “의식화” 동아리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중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 신문과 뉴스에서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어서 “부르주아적” “반민중적” 사고에 세뇌된 정신을 털어내고 혁명을 이해하고 준비하는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는 공간?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과격하려나. 내가 알던 것과는 죄다 반대되는 것만 선배들이 알려주니까, 새로운 세상을 본 것 같고 내가 주변 친구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과정이에요.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몰입하면 한쪽 시각으로 쏠리기 쉽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 찾기도 어려워져서 친구도 잃고 그런 부작용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1980년은 형식적으로는 실질적으로든 독재자의 통치였다는 게 명백했고, 그래서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서를 지정하고 사람들을 탄압했으니, 그에 반대하는 “의식화”의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이 옳은 구석이 많았죠. 단순히 현재 정부와 그에 영합하는 사회의 꼰대들이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하고 반대해도 나름 건전한 사고방식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2020년 지금은 어떨까요? 그 때 “의식화”를 통해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사람들은 이제 50~60대로서 사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세대는 아래 세대 답게 “주류”를 싫어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죠. 요새 이른바 “보수 우파” 유튜버라고 불리는, 채널 구독자수가 막 50~60만씩 되는 사람들이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의식화”를 시도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 사람들의 서사가 1980년대의 “의식화” 과정과 비슷해보인다는 게 제 눈에는 매우 흥미로워요. “386 부모 밑에서 태어나 전교조 선생들 밑에서 좌파적 시각만 보고 배워서 생각없이 민주당 찍는 너님들에게 내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게!”가 이런 사람들의 전형적인 멘트입니다. “민주화”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어감으로 쓰는 용법이나, 정당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쫓아낸 과거의 집권자를 찬양하는 태도에는 이런 심리적 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시민의 권리를 되찾는 과정과 정치구조의 발전을 이렇게 단순하게 이해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더욱 복잡해질수록 단순함은 해악이 됩니다. 꼰대들이 입에 민주주의를 달고 산다고 해서 나의 정치적 미래를 독재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더 나은 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그에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골라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학생 청취자들에게, “너네가 모르는 새로운 걸 알려줄게”라고 누군가 다가온다면 일단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화’ 사기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스스로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교육진담 제작진 모두가 여러분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애드온 서비스,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추천하는 책은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입니다.

주인공이 속한 동아리에서 읽는 많은 “금서”들 목록을 보면서, 현재도 의미있을 만한 것을 꼽자면 이 책이 유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 고전인 존 로크의 <통치론>은 논외로 하고, 김일성의 저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냥 정치 팸플릿이고요, 이제 약간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것 같은 김지하, 중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쓰였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김정환의 시는 이제 시대적 사명을 다 한 것 같고요. 촘스키는 학자로선 훌륭하지만 정치비평가로서는 잘 모르겠고. 행정가로서의 논란이 많은 데다가 이제 그 이미지가 완전히 소진돼버린 체 게바라도 그렇고. 지금 봐도 선동적이라 약간 머뭇거려지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나, 교육학 분야의 고전이긴 하지만 라틴아메리카라는 배경 때문에 무작정 우리 교육현장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도 빼면, 남는 게 이것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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