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 사람과 동물의 윤리적 공존을 위하여
셸리 케이건 지음, 김후 옮김 / 안타레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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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먼저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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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전 메일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책인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만든 편집자께서 보내주신 글이었다. 알라딘에 올려놓은 리뷰(https://blog.aladin.co.kr/russell85/9832471)를 보았으며, 셸리 케이건의 새 번역서를 출간했다는 소식도 적혀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신간을 배송하겠다는 제안도 함께 들어있었다.


공짜로 생기는 물건을 좋아하는 나는 탈모인이다. 돌이켜 생각하지 않고 그 제안을 덥석 물었다. 아마 내 머리카락이 또 몇 개는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리뷰를 쓰느라 머리가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두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셸리 케이건은 윤리학자다. 책 제목은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How to Count Animals, more or less)>다. 이 둘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 동물윤리에 관한 책이다.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다룬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렵다 싶지만, 무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육과정에도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이 분야는 시민의 교양이기도 하다.


동물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길에 나가면 “애완”견을 흔히 볼 수 있고, 고양이를 섬기는 집사도 많다. 반면 돼지와 소와 닭은 거의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오고, 쥐는 징그러우니 "구제"하고, 앵앵거리는 모기는 서슴없이 때려잡는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이런 실제 삶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대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한다. 이렇게 대우하는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이론을 동원해 대상에 서로 다른 도덕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는 이런 태도를 "계층주의"라고 부른다.


그가 생각하기에 실제 삶을 무시하는 윤리 이론은 반드시 실패한다. 행위를 지시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를 명령하는 "실천적 모순"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낳는 의견의 한 전형은 인간과 동물에게 같은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단일주의"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대우만큼 동물도 대우받아야 하고,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그런 대우가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면 그 제도가 동물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단일주의"라는 단어로 우리가 흔히 아는 동물권 옹호론자들을 가리키려 한다. "고통은 다 같은 고통"이니 동물의 고통도 인간만큼 고려돼야 한다는 피터 싱어나, 권리를 부여하는 근거를 인간의 시선에서 생각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톰 레건 같은 사람들 말이다. 케이건은 이들의 단일주의가 각자의 윤리 이론(공리주의, 의무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순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전형은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모두 도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인데, 사실은 도덕적 지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전세계 수천만의 애견인과 애묘인과 그 밖에 수많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무지막지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단계는 아니다. 지금은 17세기가 아니니까.


계층주의를 정당화하는 전략은 도덕적 입장과 도덕적 지위를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개체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개나 돼지처럼 도덕적으로 대우받아야 하거나, 돌이나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도덕적으로 대우받지 않아도 된다. 전자는 도덕적 입장을 갖고, 후자는 도덕적 입장을 갖지 않는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돌이나 플라스틱 장난감도 도덕적 입장을 갖는다고 간주하지만, 케이건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도덕적 지위는 개체가 “어떤 방식으로” 대우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그 개체를 대우하는 행위방식에 따라 구성된다. 그러나 케이건은 이런 단순한 상대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도덕적 지위에 내재적 특성이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반적 조건” 아래서 “도덕적 삶”을 더 정교하고 풍성하게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이런 내재적 특성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른바 “정신적”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부분 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이 정신적 능력을 구성하는 여타의 특성 또한 내재적 특성에 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이건은 도덕적 입장과 도덕적 지위를 분리하지 못하는 데서 단일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오류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에게 도덕적 입장은 on/off지만 도덕적 지위는 스펙트럼이다. 하지만 이 둘을 동일시하면 “모든 개체에게 동등한 도덕적 지위가 부여된다”(단일주의)거나 “인간 이외의 존재에겐 도덕적 입장이 없다”(인간중심주의)고 생각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계층주의를 정당화하는 두번째 전략은 개체를 도덕적 지위의 계층을 구별하는 단위로 삼는 것이다. 이른 동물의 복지나 권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물권 옹호론자들의 “종차별주의”라는 공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은 대체로 비슷한 특성을 지녀 비슷한 “도덕적” 능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종 자체를 도덕적 대우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동물보다 못한 인간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문제를 낳는다.


이 두 가지 전략 위에서 케이건은 동물에 대한 대우를 결정하는 다른 이론(전략)보다 자기 아이디어가 우월하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 입증 방식은 주로 동물윤리 분야에서 이미 등장한 여러 입장이 특정한 상황(대체로 우리가 발생할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는 있는 정도의 상황)에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논의 뒤에는 자신의 “계층주의” 아이디어의 경우엔 받아들일만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기 아이디어가 더 포괄적이면서도 동시에 정합적일 수 있다는 걸 드러내려 한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겐 이 부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다.)


이 전략이 성공적인지는 읽는 사람이 각자 판단할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케이건이 비판하는 “단일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를 비판자의 시선에서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긴 했다. 그럼에도 단일주의자의 시각에서 몇 가지 의아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첫째는, 계층주의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이론이긴 해도 무엇을 하라고 이야기해주진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단일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단일주의의 이론적 구조와 논의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결론으로서의 메시지는 매우 명쾌하다.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지 않아야 한다면, 동물도 괴롭히고 죽이지 말아라.” 하지만 계층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개는 죽여선 안 된다? 새우는 잡아죽여서 먹어도 된다? 돌고래를 유흥거리로 이용해선 안 된다면 햄스터도 안 되는 건가?


물론 케이건 스스로 이런 점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계층을 어떻게 나눌 것이며 그에 따른 대우의 수준이 어때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가로서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마냥 유보하고 있기엔, 동물에게 벌어지는 일은 인간에 대한 대우라는 관점에서 봤을 땐 극단적으로 나쁜 일이라는 게 문제다. 죽여서 먹고(축산), 온갖 실험의 대상으로 삼고(동물실험), 자유를 박탈한다(동물원 등). 과연 도덕적 지위를 계층적으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나누면, 어느 단계의 동물에겐 이런 부분을 허용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둘째는 케이건 스스로도 인정하는 “정상적 편차”의 문제다. 이것은 도덕적 지위의 계층의 단위가 개체로 설정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다. 도덕적 삶을 풍성하고 정교하게 구성하는 능력은 종 뿐만 아니라 개체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다. 때로 이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하기도 하다. 당장 아이와 어른 사이의 차이가 있고, 현재에 급급한 성향을 가진 어른도 있지만 미래를 알차게 설계하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 어른도 있다.


케이건의 “계층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대우가 달라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책의 끝부분에서 “너무 복잡하게” 계층을 나누지 않는 “제한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궁색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이론이 “직관적”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지만 이처럼 핵심적인 뼈대가 21세기의 관점에서 반직관적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런 개체주의의 관점을 채택한 여러 종류의 차별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우리가, 이런 관점을 다시 불러들어야 할지는 꽤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노예, 장애인, 인종에 대한 차별은 그들이 종으로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인간이긴 하지만, “인간”으로서 대우받아야 하는 어떤 집단이 가진 특성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개체주의와 계층주의의 결합의 결과였다는 말이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서 노예의 투표권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남부의 백인 정치가는 남부 지역의 투표인단의 규모를 키워 정치적으로 북부를 찍어누르기 위해 “노예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반면 북부의 백인 정치가들은 이런 남부 정치가들을 향해 “사람 취급도 안해주면서 투표할 때만 투표권을 주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하며,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면 북부의 투표인단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어지기 때문에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 두 집단이 박터지게 부딪힌 결과, 노예 1인에게는 3/5표의 투표권을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정교하고 새로운 논의의 지평과 관점을 열어준 것과는 별개로, 케이건의 계층주의는 내게 이런 종류의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타협처럼 보인다는 점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재미있는 독서였으되, 다소 혼란스럽고 맥빠지는 결론이라는 점이 못내 아쉽다. 물론 이것은 내가 단일주의자여서 그런 것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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