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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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없이는 쓸 수 없을 것 같지만, 최대한 직접적인 스포는 자제했습니다.)

인생...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제된 회상 체의 문제는 도리어 더 무겁게 제 감정을 쿵쿵 치더군요. 특히 유칭과 펑샤의 대목에서는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면서 마음이 뜯겨나가는 듯 했습니다.

저자는 이 소설을 조금은 색다른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듣는 회상 형식입니다. 

놀고 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는 이 소설의 '나'는 지방을 떠돌다가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납니다. 삶을 달관한 듯한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푸구이의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수십년의 이야기를 더운 여름날 석양무렵까지 듣게 됩니다.

작가는 그렇게 이 소설의 이야기를 '회상'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달관한 모습으로 나름 유쾌하게 소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밭을 갈던 그 노인의 이야기는 고난과 슬픔, 그리고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난에 유익이 있다고도 합니다. 전 고난에 원래는 유익 따위란 없다고 봅니다. 고생고생 해서 고난의 시기를 거쳐 나오고나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면 안되니까, 뭐라도 건져야 하니까, 그래서 굳이 뭔가 하나 붙잡는 것을 가지고 '유익'이라고 표현할 뿐이지요. 표현 상 '유익'이지, 실질적으로는 그런건 없다입니다. 고난을 겪지 않고서 얻을 수 있었다면 제일 좋겠지요. )

푸구이 노인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정말 악인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국민당군의 중대장,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한 의사 정도. 이 건은 절대 용서가 안되었겠지요. 

도박에 온 재산을 날리고온 푸구이를 보는 가족들의 태도는 생각보다 온화합니다. 정말 그랬을지는 독자 입장에서 한 번 의심해 볼만도 합니다. ^^ 어찌되었건 푸구이 노인은 회상을 통해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 온화하고 관대하게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양아치 건달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 한가지 사례로 자신의 온 재산을 속임수 도박으로 채간 룽얼에 대해서도 나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마 그 이후에 룽얼이 결국 죽게 되는 것으로 인해 감정이 많이 정리된 상태에서 회상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난해 진 뒤에도 스스로의 참을성 없는 성격, 쉽게 화를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푸구이 자신의 성격은 그대로 묘사를 하지만, 자녀와 아내를 묘사할 때에는 그저 아름답게만 묘사합니다. 

펑샤, 푸구이의 딸입니다. 펑샤라는 이름을 쓰기만 해도 마음 가득 슬픔이 올라오는 군요. 
읽는 독자들도 마음이 이리 찢어지는데...

자전, 이런 현모양처가 어디 있습니까...

유칭, 달리기를 잘하던 소년

얼시, 가장 완벽한 사위... 자신의 부족함을 통해 도리어 펑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행운아.

쿠건, 가난해서 잘 먹지 못했던 아이...

ㅠㅠ

이름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수십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독자도 푸구이의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부족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펑샤와 유칭을 보고, 
죄지은 남편의 마음으로 자전을 보고, 
사위가 고맙기만한 장인의 마음으로 얼시를 보고, 
혼자 남은 손주가 불쌍한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쿠건을 보고. 
그 모든 시선의 관점에 어느새 독자도 같이 서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회상이다 보니까, 부드럽고 온화하게 흘러갑니다. 격한 감정의 순간에도 문체는 그 톤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뭔가에 사로잡힌 듯, 그렇게 푸구이의 회상에 빠져들어갑니다. 수십년의 이야기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4장이 끝나는 부분, 문득 주변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관점이 변화했음이 느껴집니다. 퇴근길에 읽으면서 집에 도착하면 딸아이를 꼭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아주면서 눈물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놀고 먹는 좋은 직업을 얻었다는 이 소설의 화자도 그러한 모양입니다.

"내 맞은편에 앚은 이 노인은 이런 어조로 십여 년 전에 죽은 아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음 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마치 풀 한 포기가 바람에 흔들거리듯, 나는 평화로운 마음이저 멀리서 꿈틀대는 걸 보았다. 

사람들이 떠나간 들판은 막힘없이 널찍하게 펼쳐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광활하고,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이 석양 속에서 물처럼 빛살을 출렁였다."

소설의 화자가 노인을 만날 무렵,  푸구이가 여러 다른 이름들로 누굴 부르는지 의아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 노인이 다시 그 이름들을 부르며 소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유칭과 얼시는 한 묘를 갈았고, 자전과 펑샤는 칠 할에서 팔 할 정도 갈았고, 쿠건은 아직 어려서 반 묘를 갈았단다...." 

그렇게 매일 같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 노인은 그 세월들을 살아온 거네요. 그러니, 그 오래 전 일들을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게 당연하겠지요. 매일 같이 그 과거의 한 조각을 붙잡고 회상하면서 그 기억으로 퇴행하기 보다, 그 기억들로 인해 도리어 힘을 얻고서 자신에게 닥쳐왔던 고난이 준 고통을 초월하여 오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달관의 경지에 올라선 게 아닐까 합니다.

3개나 되는 서문 중 두번째 서문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 '살아간다는 것'이란 말이 가지는 힘은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 문장이 확 다가왔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가지는 그러한 의미는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어떤 책에서 충격적으로 한 번 접한 적이 있고, 그 이후 종종 제 사고를 지배하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또 이 작품이 "눈물의 넓고 풍부함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 문장은 절반만 동의하고 싶은 문장입니다. 왜 그러한지를 저자가 서문에 쓴 바로 다음 문장과 이어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의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것 까지도 이야기 한다. 독자는 바로 이러한 순간에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 절망이란 존재의 여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 스스로를 그 절망에 내어주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겁니다. 작가의 표현은 작가가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까지 내포하게 되는 듯 합니다. 춘성은 절망으로 인해 자살했습니다. 스스로 절망을 표현하고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언뜻 봐서는 모순입니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절망이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는 것, 내가 내 마음을 절망에 내어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만, 그 이외의 다른 것들도 위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위에 얹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역자 해설에서 역자가 춘성의 이야기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부분이 이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충격적으로 접하게 한 책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전태일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용기를 잃고 절망의 변두리에서 방항하게 됩니다. 서울의 어떤 길가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팔려는 짐을 잔뜩 지고 만원 버스를 타기 위해 애쓰던 어떤 아주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삶의 의지 앞에 전태일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힘을 내어 일어서게 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가지는 힘은 결국 '삶에의 의지'인 것 같습니다. 절망의 낭떠러지 끝에서도 꽉 붙잡고 버티는 삶'이 가지는 그 힘. 하지만, 전태일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그 '삶의 의지'라는 의미 위에 자신의 다른 의미를 얹었습니다. 

  푸구이는 젊은 날의 방탕한 삶에서 돌아온 뒤로 끔찍하게 가족을 위합니다. 때로 지나치게 화를 내서 가족들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만, 푸구이의 삶은 가족을 위한 헌신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자전도 유칭도 펑샤도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이러한 모습이 저절로 포함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펑샤와 얼시의 사랑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이 역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다 포괄되지 않는 또다른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전은 풀리지 않는 원한에도 불구하고 춘성을 격려합니다. 고통 가운데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 거죠. 용서는 아직 멀었을 지라도, 공감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춘성은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 위에 이미 많은 의미를 얹고 살아간다고 보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지지하는 기반이면서, 그 모든 것을 추동하는 힘이기도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고난과 고통을 버텨내는 힘은 그렇게 서로 헌신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서로 공감의 범위가 작지 않은 이웃들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이 작품은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살아간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미로 표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는 시점에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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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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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The Great Transformation 입니다. 하지만 번역 제목이 더 인상적입니다.  '축의 시대'.


저자는 머릿말에서 우리가 이 시대에서 겪고 있는 많은 난관 뒤에는 더 깊은 정신적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전례 없는 규모로 폭력이 분출했던 20세기'를 겪으며 저자가 목격한 바는 '우리가 서로 해치고 상처를 내는 능력은 경제적, 과학적 진보에 뒤처지지 않고 함께 발전해 왔다는 것'과 '인간 존중의 마음을 키우도록 도와주어야 할 종교조차 종종 이 시대의 폭력과 절망을 반영 하는 듯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이런 진단을 내린 뒤에 저자가 눈을 돌린 것은 과거의 역사 중에서 특히 '축의 시대'입니다. 저자는 카를 야스퍼스를 인용하며, '축의 시대'를 정의합니다. 기원전 900년 경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이후 계속 해서 인류의 정신의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다고 하며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축을 이룬다 하여 '축의 시대'라 한다고 합니다.


유목 문화에서 차차 농경 문화로 옮겨갈 무렵, 빠르게 진행된 도시화, 차곡차곡 증가하는 부와 늘어가는 인구는 그 이전 시대보다 더한 폭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전쟁과 대규모 살상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던 많은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그 이전까지 막연하게 가져왔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신념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에 기반한 통치질서가 세워지기까지, 그리고 그 봉건제가 다시 무너지고 전국 시대를 거쳐 진에 의해 통일되기까지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제자백가로 알려진 다양한 사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주나라의 예전을 발전적으로 재해석해서 다시 세우려는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묵자, 장자, 노자, 맹자 등 다양한 사상들이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가 체제를 효율적으로 정립하게 만든 법가의 정치철학이 진으로 하여금 천하를 통일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도시 국가인 폴리스들끼리의 국지적인 경쟁적 발전 단계에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라는 국제적인 격변에 휩쓸렸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이해하게 하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에우리피데스 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비극은 고난에 직면한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깊은 공감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고,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어지는 합리적, 철학적 사고는 그리스가 페르시아 침략이라는 전대 미문의 고난에 접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대응방안을 빠르고 신속하게 채택하게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변방인 유다에서 야훼 신앙은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침공으로 인한 포로기를 겪으며 새롭게 재해석되고 발전했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하라파 문명과 마우리아 왕조를 겪으면서 자신을 깊게 성찰하는 전통이 세워졌고,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하여, 불교를 일구어 냈습니다.


이러한 각 지역에서의 사상적 발전은 도덕성, 자비, 비폭력에의 추구를 공통적인 강조점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축의 시대의 희망이고, 그 시대 영성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일들의 배경과 그 전개를 10개장에 걸쳐서 설명합니다. 1~3장까지는 축의 시대의 배경이 되는 기원전 1600년경 부터 700년경까지를 다루고, 4~9장까지는 축의 시대인 기원전 700년경부터 220년경까지를 다룹니다.


마지막 10장에서는 '축의 시대의 귀환'이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200년경 이후의 시대에 축의 시대의 유산이 제국의 성립, 또는 해체라는 새로운 변화의 상황에서 어떻게 재발견되었는지를 얘기합니다.


중국에서는 한 제국이 성립되고 통치철학으로서의 장점을 가진 유가가 중심적인 사상이 되었지만, 다른 사상들도 폭넓게 수용되었습니다.


마우리아 왕조가 해체된 인도의 불교 전통에서는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가 탄생했습니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피난처, 세상의 빛, 세상의 구원 수단의 안내자'가 되기로 하려한 사람들로 축의 시대의 오래된 이상을 새로운 형식으로 번역한 존재였다 합니다.


유대교는 로마의 지배라는 변화된 상황에서 새롭게 개화하였다 합니다. 바리사이파는 유대교의 축의 시대에서 가장 포용력있고 진보적인 영성을 발전시켰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랍비 힐렐은 토라 전체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했습니다. "당신 자신에게 가증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시오. 그게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 주석일 뿐이오. 가서 그것을 공부하시오." 당시 유대교에서 토라의 본질은 이러한 황금률이었습니다.


유대교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 역시 이타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중요한 순종의 규범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 비움과 사랑이 기독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랑은 자만심으로 부풀어 올라 자기에 대한 과장된 관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이고, 자기를 잊는 것이고, 끝없이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축의 시대의 마지막 개화가 서기 7세기의 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전통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 태도를 강조했으나 오늘날의 모습은 그러한 전통과 멀어진 모습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원전 200년 이후의 주요한 흐름으로 유가를 중심으로 한 사상체계의 안정적 정립, 불교의 갱신, 랍비 유대교로의 변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탄생을 열거하면서 축의 시대가 새롭게 귀환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10장의 마지막 소챕터에서 오늘의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큰 공포와 고통의 시기에 살고 있다. 축의 시대는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고난과 직면하라고 가르쳤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현자들이라면, 우리의 고통이 곪아서 폭력, 불관용, 증오로 터지도록 놓아두는 대신, 그것을 건설적으로 이용하려는 영웅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유다의 예레미야는 추방당한 유대인들에게 원한에 휘둘리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으며, 그리스인은 불과 몇 년 전에 그들의 도시를 유린했던 페르시아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비극 서사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 그들은 상아탑에서 명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 살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허와 심연을 의식했다. 이 현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감이 단지 유익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자비와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은 최선의 정책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과학과 기술의 천재들의 시대지만, 축의 시대는 영적 천재들의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암 치료법을 찾아내는데 쏟아붓는 것 만큼이나 많은 창조적 에너지를 인류의 영적 불안의 치료법을 찾는데 쏟아 부었습니다


황금률은 축의 시대에 새롭게 발견된 '개인'들에게 '내가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이 타인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과제가 이런 통찰을 발젼시켜, 여기에 전지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인이 이미 알고 있었듯이, 여기에는 간단한 답이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합니다. 종교가 우리의 부서진 세계에 빛을 가져오게 하려면, 맹자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사라진 마음, 우리의 모든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자비의 정신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고 하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각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각 지역에서의 역사를 시대별로 지역별로 나누어 기술한다기 보다, 같은 시대에 각 지역에서 어떤 흐름들이 있었는지를 차례차례 조망하는 방식의 기술이어서 그 시대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네 개 지역에서의 수백년에 걸친 영적, 종교적 통찰의 결과가 결국 '네 자신이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수렴된다는 것은 놀랍고도 감동적인 결론이었습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공감의 시대'가 되어갈 거라고 얘기합니다.  SNS의 도래와 같은 기술적, 문화적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더 잘알게 돕게 되므로 '공감'은 이전 시대 보다 조금 더 쉬어질거라 합니다.


반면에 저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끼리 더욱 각박해져가는 모습은 이미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난민에 대해서 보다 더 엄격해지고,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한 오늘의 현실은 '공감'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도 보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남겨진 선택지는 두가지 극단의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이 책아 우리에게 주는 통찰은 축의 시대가 남긴 정신적, 영적 경험과 지식의 기반 위에서 공감의 실천을 하는 것이 결국 우리 시대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희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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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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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황윤영, 푸른책들

이 책은 총 2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단편집입니다. 지난 6월에 커트 보니것의 <세상이 잠든 동안>을 읽었던 지라, 이 작가의 작품이, 특히 단편집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세상이 잠든 동안> 에서 보다 전반적으로 50년대에서 6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의 분위기를 더 잘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50~60년대의 상황을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조금 더 잘 이해가 되는 단편들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국가들과의 냉전 체제가 굳어지던 시기인 50년~60년대인지라, 인류를 종말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과학기술의 오남용에 대한 두려움, 공산주의의 과도한 평등주의에 대한 거부감, 과도한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감 등이 배어 있는 단편들이 있었습니다.

짧은 단편이지만,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생생합니다. 전혀 다른 시간대와 장소의 사람들인데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 그만큼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며, 인간 본성의 측면들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됩니다. 


커트 보니것은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에 있었다고 합니다. 드레스덴. 

독일의 약 8개월에 걸친 런던 대공습때 약 4만여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에서는 단 3일만에 2만5천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거대한 화염폭풍이 몰아쳐서 일단 산소부족으로 기절했다고들 하니, 얼마나 끔찍했을지. 그의 반전 의식은 그때 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문명의 산물과 그 미래에 대한 시니컬한 관점도 그렇구요.

25개의 단편에 대한 느낌을 간략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이걸 적으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았을까 순위를 매겨보려 했으나 포기했습니다. 25개중 대부분의 작품들이 묵직하게 뭔가를 느끼게 하고, 그러면서 씁쓸한 유머를 느끼게 하는 수작들입니다.


1. 내가 사는 곳: 읽으면서 케이프 코드란 곳이 어딘지 구글맵으로 들여다 보았습니다. 참 희안한 지형이더군요. 초승달 모양으로 바다로 돌출된 반도였습니다. 그 동네가 어떤 곳인지 가벼운 유머코드를 섞어서 묘사하고 있네요.

2. 해리슨 버저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사회를 그리는 (굳이 분류하자면) SF소설입니다. 과도한 평등주의가 가져올 페해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였습니다. 결말은 쇼킹하네요...

3.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 주요 등장인물이 좀 과도하게 정형화된 느낌은 있지만, 이 또한 의도적인 설정인 것 같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아픔과 단점을 보완하게 되는 과정이 참신하게 그려져 있네요. 희곡 작품들을 그렇게 활용하다니...이 단편의 제목으로 사용된 대사가 초반부와 종결부에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졀묘했습니다.

4.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역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린 소설입니다. 의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하고, 인구가 과도하게 증가한 미래의 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5. 영원으로의 긴 산책: 두 남녀가 오랫만에 만나는 짧은 순간을 그린 단편입니다. 조금씩 변화해 가는 감정의 묘사가 압권입니다. 로맨틱 단편의 끝판왕이랄까요~

6. 포스터의 포트폴리오: 이 역시 인간성의 한 단면일까요?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더 중요하다는...

7. 유혹하는 아가씨: 1956년에 여성에게 이 정도의 발언권을 준 것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을까요? 시대를 감안하고 보지 않으면 조금 구닥다리 같이 보이는 구석도 없지 않아 있네요.

8. 모두 왕의 말들: 소름끼치는 체크 게임이었습니다. 그 안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었기에 더욱 그랬었는지도 모르지요. 게임에 묘사된 아시아 본토는 베트남인 듯 합니다. 베트남은 야만적으로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신사적으로 그리는 것은 무언가 불편한 점은 있네요.

9. 톰 에디슨의 털복숭이 개: 발상이 신선하면서도 유머감각이 넘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SF로 분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커트 보니것에게도 이런 입담 강한 재담가로서의 면모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10. 새 사전: 이 단편은 소설이 아니라, 평론인 것 같습니다. 당시의 세상에 대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얘기들을 들려주지만, 영어에 관심이 없다면 지루할 것 같습니다.

11. 옆집: 하나의 타운하우스에서 두 가정이 사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다가구 주택이 워낙 흔하고, 아파트 생활이 일상이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듀플렉스 등의 다가구 주택은 가난의 상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50년대에는 그게 가난도 아니었겠지요.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그러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그린 듯합니다. 절묘하게 꼬여버린 소년의 처지가 막판에 웃음을 주네요.

12. 한결 위풍당당한 저택: 끝없는 허영, 그리고 환상. 거의 돈키호테를 연상시키는 정도 였습니다.

13. 하이애니포스트 이야기: 케네디 시절의 이야기네요. 민주당의 젊은 지도자 케네디에 대해서,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빙 둘러서 하고 있습니다

14. 난민: 전쟁 고아라고 불러야 할 어떤 소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전쟁으로 단련되었을 강심장의 군인들의 여린 마음도... 울고... 저도 읽다가 울컥했습니다.

15.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초능력을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작가의 반전의식이 얼마나 강렬한지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단편의 출간연도가 1950년이라는 것도 참... 의미심장하네요.

16. 유피오의 문제: 과학 기술이 마약이 될 때, 그리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또다른 인간의 욕망을 그린 소설입니다.

17. 당신의 소중한 아내와 아들에게로 돌아가: 이 단편에서 최종 승자는 결국 몇 마디 대사도 나오지 않던 ‘그녀’ 인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을 품어 안는 강력한 멘탈에서 나오는 유머의 소유자인 그녀.

18. 공장의 사슴: 거대한 공장은 미국의 산업화를 상징하지만, 또 그만큼 비인간적인 조직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인공이나 사슴이나 그 공장에서는 얼른 도망치는게 살 길이었겠지요.

19. 거짓말: 미국이 학벌에 대해서는 우리보다는 유연하긴 하지만, 특정 학교 출신이냐 아니냐는 뭐..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들이 초반에는 속물스럽고 어리석게 보여도 마지막에는 그래도 합리적이긴 하네요. 애를 잡지 않는 걸 봐서도...

20. 입을 준비가 되지 않은: 특이한 형태의 신인류의 얘기입니다. 이건 무슨 안드로이드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고... 유체이탈한 양서인이라니... 

21. 아무도 다룰 수 없던 아이: 상처 입은 어린 소년을 다시 거둬들이는 얘기는 흔한 소재이긴 합니다. 다만 그 과정, 그 방식이 어떠하냐는 것일 텐데요. 이 단편에서 나타난 방식은 저로서는 생경합니다. 예상했던 바와 전혀 달랐습니다. 대략... “이제 헬름홀츠는 사람들과 그들의 보물들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문장과 그 이후 주인공의 액션에서 단서가 좀 있을 듯 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야. 너나 나나 우리는 허공을 딛고 있는 것이야. 그럴 수록 자신을 사랑하고...’ 이런 얘기가 아닌가 싶네요.

22. 유인 미사일: 미소의 냉전 체제가 강화되어 가던 무렵인 1958년에 나온 소설입니다. 우주인이 되어야 했던 소련의 어떤 젊은 과학자의 이야기, 미국의 어떤 젊은 비행사의 이야기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그리고 그와 지극히 닮은 국가우선주의는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개인’이 존중받지 않는 ‘집단’은 모두를 위한 집단이 아니라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명분에 불과합니다. 커트 보니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들로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반전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23. 에피칵: 인공지능이 인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따라할 거라는 상상은 이전부터 많이 했었습니다. 20세기초의 공상과학 영화에도 그런 주제들이 있었던 것 같구요.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의 HAL도 그 예중 하나지요. 여기 또 하나의 사례가 있었네요. 이 인공지능도 인간을 능가하는 시적 재능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공감능력까지 갖추었네요. 

24. 아담: 네히트만 집안에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부부에게 찾아온 한 생명. 자기만의 일에 바쁜 세상은 그 감격을 알아주지 않지만, 작가는 그 아기가 ‘아담’이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시작, 풍요에의 약속을 담지한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25.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 극도로 발달한 의학 기술과 그로 인한 인간의 수명 연장. 수명만 연장되는 것 뿐 아니라 늙는 것도 늦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끝이 없는 인간의 욕심은 이런 세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상상해 보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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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 5개의 시선으로 읽는 유전자가위와 합성생물학
김응빈 외 지음, 송기원 엮음 / 동아시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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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김응빈, 김종우, 방연상, 송기원, 이삼열 지음, 송기원 엮음

2010년 5월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크레이그 벤터(Craig Ven ter)는 ‘화학적 합성 유전체에 의해 제어되는 세균 세포의 창조’라는 제목의 논문을 <사이언스>에 발표합니다. 이 논문은 합성된 유전체 정보에 의해 유지되는 생명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미코플라스마 미코이데스라고 하는 동물의 장 속에 기생하는 세균이었습니다. 이 세균은 가장 적은 수의 유전자 수 (약 530개 정도)를 가지고 있고, 100만 쌍의 DNA를 유전 정보로 갖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생명체라고 합니다. 크레이그 벤터의 연구팀은 유전자 데이터 베이스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 세균의 모든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뒤 다른 종의 세균에 이식시킵니다. 그 종이 갖고 있던 원래의 유전체는 미리 제거된 상태였습니다. 이 다른 종의 세균 세포는 인간이 합성한 유전체만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세균은 자기 복제에 의한 재생산과 대사 등 정상적인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크레이그 벤터는 이를 Syn 1.0 이라 호칭하고, 자신들이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2016년 3월 크레이그 벤터의 연구팀은 Syn 1.0 유전체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고 유전자를 채 500개도 갖지 않은 생명체 Syn 2.0을 만들었다고 <사이언스>에 발표합니다. 즉 이 생명체는 지구 상에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 중 유전자 수가 가장 적은 생명체로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체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이끈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2003년도에 종료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생물학자로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이란 새로운 개념을 처음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인공 유전체를 합성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유전체 조작이 가능해진 것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에 의해 유전체를 조작하는 것이 정확하고 빠르면서 비용도 저렴해졌기 때문이라 합니다.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세분화 되면서 많은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합성생물학도 아직 뚜렷하게 정립된 개념은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생명윤리 연구자문위원회에서 정의한 합성생물학이란 ‘ 기존 생명체를 모방하거나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 생명체를 제작 및 합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의 제작 및 합성의 개념을 생명체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의 기술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균 세포의 창조’라 이름지었습니다. 그동안 종교의 영역이었던 ‘생명의 창조’라는 개념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고온 셈입니다. 그의 세균 세포 합성을 ‘창조’라 호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연구가 보여준 것은 이전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아닐지라도 ‘점진적인 창조’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대상도 세균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점차 복잡한 생명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멸종 동물을 재생하거나 인간 유전체를 합성해 작동방식을 실험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존의 생명체에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이 새로운 생명체를 설계하고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명과학 발전은 우리의 삶과 사회기반 및 가치관 자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어 보입니다. 정부는 연구를 장려하면서도 그와 수반되는 시스템 구축에는 매우 취약한 방식을 선택했다 합니다. NGO들은 과학적 내용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없이 반대하는 입장을 택했으며, 연구 결과에 수반되는 좀 더 근본적인 사회 변화 등은 등한시한 채 주로 ‘먹어서 안전한가’ 등 단순하고 소모적 문제에 머물러 있습니다. 종교계는 생명 과학의 발전에 관심이 없으며, 변화의 내용과 속도를 불감한 채 마치 중세와 비슷하게 여전히 과학과의 담쌓기가 종교를 지켜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이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변화하고 있는 생명과학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중에게 전달하고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시작합니다.

이 책은 다섯 명의 저자의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공학을 공부한 두 명의 과학자와 정책을 공부한 사회과학자, 철학과 윤리학을 공부한 두 명의 신학자가 모여 2015년 부터 ‘합성 생물학’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을 모집해서 공부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연세대의 교수/연구원이며 연세대 과학기술정책전공 소속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은 각각의 과학적 내용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공부하면서 다른 전공 기반의 다른 시각에서 느꼈던 문제 의식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았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에 ‘과학적인 내용의 설명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일반 과학서적과 달리, 과학 지식에 이어 거버넌스 시스템이나 이런 과학적 변화를 수용하는 가치관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합성생물학에 대해서 우연히 알게 되었고, 찾아보다 보니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이 나온 건 2017년 4월로 벌써 1년반이나 지났습니다. 책 표지 하단에 ‘질주하는 생명과학의 혁명을 99%의 사람들은 눈치조차 못 채고 있다!’고 써 있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생명과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공 때문인지, 실제로 저도 이러한 책이 나온지 1년반이 되도록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이슈를 던지는 책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이 책은 전혀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설계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시장자본주의의 힘은 이 새로운 과학기술을 극한까지 밀어붙일 가능성이 큽니다. 적절한 정책적 대응이 전체 사회의 컨센서스에 기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끝에 도달할 모습에 대해 얼마나 낙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제기하는 이슈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좀 더 경청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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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개정판)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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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에 2차대전 발발 초기를 배경으로 한 Darkest Hours 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윈스턴 처칠을 그린 거죠. 덩케르크 직전까지의 상황입니다.
그 무렵 2차대전 당시의 영국에 대해서, 특히 초기의 영국에 대해서 여러 아티클들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하지만, 건지 섬과 저지 섬으로 구성된 채널 제도의 존재 자체는 전혀 몰랐었습니다.

이 책을 읽다가 보니, 2차대전 관련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생각나더군요., 몇 년 전에 무척이나 감명 깊게 읽었던 이언 맥큐언의 <속죄> 라던가. 그 무렵 보았던 영드 '닥터 후'에서 2차대전 중의 영국을 배경으로 했던 에피소드... 2년 쯤 전에 읽었던 2차대전 뒤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했던 <오르부아르> 등등

상황은 조금씩 달라도,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합니다.

건지 섬이라는 아름다운 풍경 속의 아름다운 사람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다른 모습으로 닥쳐온 고난, 비극...

우연챦게 모이게된 북클럽을 통해 그들은 문학을 접하고,
그 문학에 대해 나누게 되면서 새로운 우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문학을 통해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요.

깊고 풍성한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통해 새롭게 갱신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인식,
그 인식 과정이 불러 일으키는 인간의 고귀한 본성, 
새롭게 발견한 그 고귀함을 통해 고취되는 자긍심. 
그 자긍심을 통해 세상을 향해 다시 일어서게 하는 용기.
그런 서로의 모습을 통해 다져지는 연대감. 

이런 것 아니었을까요.

서간체의 장점인지, 등장인물들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던, 그 좋은 사람들, 
그 어두운 시기에 더욱 빛나던 사람들에게 닥치는 비극들이 마음을 쥐어 짜네요.

근데, 이 작가는 특유의 유머로 계속 웃게 합니다.
그래서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더 강인하고, 더 매력있게...

결말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절묘하게 직조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해 차차 알게 되고,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나타나고,
새로운 소식들,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는 그 방식, 그 순서 하나하나 
섬세하게 짜여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흡인력 있게 단숨에 읽게 만드는 놀라운 작품이네요.

이 작품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편지의 '보이스'가 거의 비슷합니다.
아마 작가의 캐릭터가 그랬나 싶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그게 거슬리기 보다는... 
이대로 좋으니 그냥 안 끝났으면 하는 바램이 더 큽니다. 
작가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으로 인해...

작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요. 

줄리엣이 쓴 칼럼이나, 전기나 이런 것들이 후속편으로 나올 수 도 있었을 텐데요. 진심으로 우리 모두의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읽으면서 번역 때문에 걸리적 거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원문과 비교를 해본 건 아니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번역도 상당하다는 느낌입니다.


하이라이트 친 것 중 일부 입니다.

**************************************
제 책이 어쩌다 건지 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는 최선의 방법은 유머’라는 옛말이 역시 틀리지 않네요.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흠뻑 젖은 채 앉아서 예전에 살던(지금은 남에게 팔린)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 그는 말을 아낄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찬탄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 바로 이겁니다.

‘지금껏 해온 것들이 그토록 사소한 일이란 말인가. 태양을 즐기고 봄의 빛을 느끼고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일을 하고 진정한 우정을 쌓은 것이?’(19세기 영국 작가 매슈 아놀드의 두 번째 시집 《에트나 신의 엠페도클레스》에 수록된 시의 일부) 

사소하지 않습니다. 저는 엘리자베스가 어디에 있건 이 구절을 마음에 새기고 있길 바랍니다.

“쳐다볼 거야. 철창에 갇힌 동물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야. 우리와 함께 이 섬에 갇혀 있잖아. 우리가 그들과 함께 여기 갇힌 것처럼. 가자, 가서 구경해주자고.”

아들 이언이 이집트 알알라메인에서 죽었을 때(엘리의 아버지인 존과 함께 전사했지요) 조문객들이 찾아와 나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삶은 계속되는 거예요”였어요. 엉터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히 삶은 계속되지 않아요. 계속되는 건 죽음이죠. 이언은 이제 죽었고 내일도 내년에도 그 후로도 영원히 죽어 있을 테니까. 죽음에는 끝이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슬픔에는 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엄청난 슬픔이 노아의 대홍수처럼 나의 세상을 휩쓸어버렸고, 여기서 벗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그런데 벌써 물 위로 솟은 작은 섬들이 있네요. 희망? 행복? 뭐 그런 것들로 부를 수 있겠죠. 당신이 의자 위로 올라서서 부서진 건물 더미를 애써 외면한 채 반짝이는 햇빛을 받는 모습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답니다.

구멍 장식이 촘촘히 난 아주 조그만 아기용 베개, 밭일을 하다가 도시를 향해 웃음을 짓는 엘리자베스의 사진 한 장, 희미하게 재스민 향이 나는 여성용 리넨 손수건, 남자 것인 도장 반지, 그리고 작은 릴케 시집이 한 권 있었는데 가죽 표지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어. ‘엘리자베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그대에게. 크리스티안.’ 책갈피에 여러 번 접힌 쪽지가 있었어. 킷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펼쳐 읽었지. ‘아멜리아, 아기가 깨어나면 나를 대신해 뽀뽀해주세요. 6시까지 돌아올게요. 엘리자베스가. 추신, 우리 아가 발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않아요?’


제 책이 어쩌다 건지 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는 최선의 방법은 유머’라는 옛말이 역시 틀리지 않네요.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흠뻑 젖은 채 앉아서 예전에 살던(지금은 남에게 팔린)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 그는 말을 아낄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찬탄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 바로 이겁니다.

‘지금껏 해온 것들이 그토록 사소한 일이란 말인가. 태양을 즐기고 봄의 빛을 느끼고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일을 하고 진정한 우정을 쌓은 것이?’(19세기 영국 작가 매슈 아놀드의 두 번째 시집 《에트나 신의 엠페도클레스》에 수록된 시의 일부)

사소하지 않습니다. 저는 엘리자베스가 어디에 있건 이 구절을 마음에 새기고 있길 바랍니다.

"쳐다볼 거야. 철창에 갇힌 동물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야. 우리와 함께 이 섬에 갇혀 있잖아. 우리가 그들과 함께 여기 갇힌 것처럼. 가자, 가서 구경해주자고."

아들 이언이 이집트 알알라메인에서 죽었을 때(엘리의 아버지인 존과 함께 전사했지요) 조문객들이 찾아와 나를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삶은 계속되는 거예요"였어요. 엉터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히 삶은 계속되지 않아요. 계속되는 건 죽음이죠. 이언은 이제 죽었고 내일도 내년에도 그 후로도 영원히 죽어 있을 테니까. 죽음에는 끝이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슬픔에는 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엄청난 슬픔이 노아의 대홍수처럼 나의 세상을 휩쓸어버렸고, 여기서 벗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그런데 벌써 물 위로 솟은 작은 섬들이 있네요. 희망? 행복? 뭐 그런 것들로 부를 수 있겠죠. 당신이 의자 위로 올라서서 부서진 건물 더미를 애써 외면한 채 반짝이는 햇빛을 받는 모습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답니다.

구멍 장식이 촘촘히 난 아주 조그만 아기용 베개, 밭일을 하다가 도시를 향해 웃음을 짓는 엘리자베스의 사진 한 장, 희미하게 재스민 향이 나는 여성용 리넨 손수건, 남자 것인 도장 반지, 그리고 작은 릴케 시집이 한 권 있었는데 가죽 표지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어. ‘엘리자베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그대에게. 크리스티안.’ 책갈피에 여러 번 접힌 쪽지가 있었어. 킷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펼쳐 읽었지. ‘아멜리아, 아기가 깨어나면 나를 대신해 뽀뽀해주세요. 6시까지 돌아올게요. 엘리자베스가. 추신, 우리 아가 발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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