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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슈퍼마켓에 출근한 사이먼 신부 : 슈퍼마켓 점원이 된 신부님의 달콤 쌉쌀한 인생 이야기 - 슈퍼마켓 점원이 된 신부님의 달콤 쌉쌀한 인생 이야기
사이먼 파크 지음, 전행선 옮김 / 이덴슬리벨 / 2015년 6월
평점 :
저자, 사이먼 파크는 무려 20년 동안이나 영국 국교회의 신부였다고 한다. (영국 국교회 또는 영국 성공회는 카톨릭이 아니라, 개신교이다. ) 그는 그렇게 신부로서, 성직자로서 20년동안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신부직을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선다. 왜 그만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는 않는다. 막연한 짐작을 할 수 있을 뿐.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모험은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교회를 떠날 시기였던 것이다. (중략) 내 결정의 근간에는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기자신을 위한 존재가 되기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향한 분노.'
즉, 신앙 자체에 대한 회의였다기 보다, 제도화된 교회, 권력화 된 성직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본문 중에 그가 27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하니, 신부직을 그만 둔 나이는 47세 정도이고, 슈퍼마켓에서 3년을 일했다고 하니, 50세까지 매장직원으로 일한 셈이다. 저자의 이러한 독특한 배경은 40대 중반의 내게 특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20년 동안 신부를 해왔던 그에게 쉽게 문을 열어 주는 직장은 흔치 않았다. 결국 그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의 매장 직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이 에세이는 3년간 슈퍼마켓에서 일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모아 31개의 챕터로 정리한 결과이다. 개점 시간으로 시작하는 이 에세이는 폐점 시간으로 끝난다.
20년 동안 성직자로서 살아오면서, 세상을 간접적으로만 접해 왔을 그에게 슈퍼마켓과 같은 삶의 현장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는 이 자전적 에세이에서 신부직을 떠난 뒤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슈퍼마켓에서 일할 때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를 힘들게도 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꾸미려 하지 않고 도리어 연약함을 드러낸다. 강한 척, 지혜로운 척하지 않고 힘들 때는 힘든 대로, 불안할 때는 불안한대로, 불만이 덮칠 때, 짜증이 날 때 또한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한 꾸밈없는 모습을 읽어가다가 어느샌가 나타나는 펀치라인은 읽는 이의 감정을 즐겁게 흔들어 댄다.
슈퍼마켓 직원으로서 시작한 새로운 삶에는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타난다. 태어난 나라, 언어, 피부색, 종교들 조차 다양하다. 사피, 개리, 캐스파, 윈스턴, 브라이언, 모하메드, 페이스, 로즈메리, 토드, 스타브, 로티, 피노키오, 소니, 브린, 마닉, 콩 등. 성격들도 너무나 다양하다. 개성이 강한 그들이 서로 부딪혀 가며 슈퍼마켓이란 공간 안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낸다.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들처럼 이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기도 한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면서 저자 사이먼 신부는 끝까지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물론 저자에게도 감정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되지만, 저자는 때로 그것을 극복하고 한 걸음 더 그들을 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 특유의 삶에 대한 통찰이 나오는 대목이 주로 이런 대목이다.
수도 없이 이력서를 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아 불안감에 빠진 자신을 성찰하면서,
'일단 나쁜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충격을 이겨내면 내적 자아는 회복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다. (중략) 누구든 현실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매우 심오하고도 개인적인 진실이 될 것이다. 스스로 소망하는 자신이 아니라 진실된 자신에 관해서. 즉, 우리는 끊임 없이 희망적이며 행복한 사람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만일 당신이 진실이라는 양식으로 내면을 채워간다면 실로 비범한 내적 자원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슈퍼마켓에 출근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 나면서는,
'나는 평소보다 훨씬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에 깨어나고 싶다. 그래, 좀 더 경이로운 마음으로. (중략) 천재성이란 하루가 당신을 힘겹게 만들 때 오히려 희망을 거머쥐는 능력에 있다. 그것도 가능한 즉시.'
슈퍼마켓에서 진상 고객을 상대한 뒤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을 부여잡으며,
'나는 훌륭한 분노를 좋아한다. 훌륭한 분노는 근사하다. 반짝이게 광을 낸 은처럼 분노도 아름다울 수 있다. 자아로부터 분리된 분노는 가장 멋진 것이 될 수 있다. 간디가 보여주었듯이 소유주나 지휘자가 없는 분노는 자신의 존재를 정화하고 드러내고, 결점을 보완하는 투명한 힘이 된다.'
자신의 돈을 도둑질 당해서 잃어버린 후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자책하는 동료를 위로하며,
'사람들은 종종 신뢰라는 것이 열망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잇는 것이라도 되는 양,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도덕심을 그러모으기 라도 해야 하는 듯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신뢰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누군가 삶에 크나큰 은혜를 베풀 때 우리는 그를 신뢰하게 된다.'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를 떠올리면서,
'여기는 엘살바도르가 아니다. (중략) 여기는 그저 영국 런던에서 형편없이 운영되는 슈퍼마켓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모두 어딘가에서는 나름의 지도자이고, 세상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란 없다. 지도자로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간에 지금 우리에게는 선택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31개 장 중 앞의 6개 장에서만도 이런 통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냥 교과서를 읊어내리는 상투어구가 아니라, 직접 겪은 현실에 뿌리내린 그러한 통찰.
신부로서의 20년, 매장직원으로서의 3년. 그래서 그는 이제 과거의 그와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떻게 성장했을까.
그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뭔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폐점 시간에 슈퍼마켓의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그 다음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내일도 무대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페이스, 캐스파, 브라이언, 윈스턴, 개리, 로즈메리, 토드, 로티, 모하메드, 마닉 등등, 모든 영광스러운 배역들과 함께. 우리는 내일도 일찍 일어나 다시 시작할 것이다. 사뮈엘 베케트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그리고 더 잘 실패할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구성원들, 장점 보다는 단점이 많아 보이는, 도저히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들을 자신의 삶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끌어 안으려는 것 같다. 꼭 뭔가를 잘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뭔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살아가는 그 과정 자체를 함께 하는 구성원으로서.
책을 한 번만 읽고 끝내기에는 아까와서 두번째 읽기를 시작하며 서문을 다시 읽으니, 처음 읽었을 때는 무심코 지나갔던 구절들이 마음에 와서 딱 박힌다.
'행복한 3년이었고, 심지어 병가 한 번 내지 않았다. 그 천국 같은 날들을 어찌 하루라도 놓치길 바라겠는가?'
라는 말로 서문을 시작한 그는 아래와 같은 말로 서문을 마무리 한다.
'사피, 개리, 캐스파, 윈스턴, 브라이언, 모하케드, 페이스, 로즈메리, 토드, 스타브, 로티, 피노키오, 소니, 브린, 마닉, 콩, 그 외에도 나와 함께 선반을 정리하고 계산대를 지켰던 모든 동료.
그 시절, 참으로 많이 행복했습니다, 친구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 다사다난했던 3년이 행복했다고 회고하는 그. 알고 보니, 서문이 결론이었다.
'만약 그곳에 행복을 끌어들인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반면 절망을 불러들인다면 절망하게 될 것이다.' 라고 그 자신이 책 가운데에서 말했듯이, 행복을 끌어 들였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걸 이룬 것으로 보인다. 슈퍼마켓에서 새로이 부딪힌 일들, 사람들을 신부로서의 20년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으로 겪어 나가는 동안 그는 주변의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르게 된다. 본사 청문회에 호출당한 부매니저가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 등은, 결국 그가 그의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그 모습이 그가 신부직을 떠날 때 바라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 뿌리박은 신앙. 온실의 화초 같은 신부직을 떠나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히길 원했던 것 아니었을까. 물론 이는 나의 짐작이다. 그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다.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영국식 표현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자상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영어와 한국어의 언어적 차이로 인해, 영어로 읽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 문장들은 많았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순전히 언어의 차이로 인해서.
익숙한 일상을 꿰뚫는 깊은 통찰이 있지만,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유머로 넘쳐난다.
그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다가온다. 슈퍼마켓이니까.
기억하고 싶은 한 문장, '천재성이란 하루가 당신을 힘겹게 만들 때 오히려 희망을 거머쥐는 능력에 있다. 그것도 가능한 즉시.'
나와 같은 40대에게는 특히 강추하는 책이다.
(2015.08.01)
(이책의 별점은 4점입니다. 별점 5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급을 위해서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