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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의심스러운 싸움 열린책들 세계문학 60
존 스타인벡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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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포도'라는 소설과 영화로 내게 기억되는 작가지만, 정작 '분노의 포도'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본 기억도 없고.

다만 20세기 초 미국의 일반 서민의 삶을 매우 건조하게 그려낸 작가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어 읽게 되었다. 오래 전에 구매해놓은 열린책들 세계문학 오픈파트너 이북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었다.

3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사과 과수원 농장주들과 그들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에 파업으로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캘리포니아 어느 지역의 금력과 권력을 독점하는 소수의 농장주들은 총과 법을 앞세워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너뜨리려 하고, 그에 대해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든 저항하려 하지만, 사실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이 파업이 시작되고, 조직화되는데 기여한 사람은 맥이라는 열성 공산당원과 이 파업으로 공산당 활동에 처음 합류하게 되는 짐이다. 초기에 소개 되는 짐의 성장 배경과 가족사는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먹먹하다. 그런 배경이라면, 정말 아무 잃을 것이 없다라는 생각으로 임하겠구나 싶었다. 반면 맥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는 끝까지 그 과거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기에 그의 생각과 행동 또한 짐과는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짐의 말과 행동은 이해가 가지만, 맥의 말과 행동은 조금 낯설고 새롭게 느껴진다.

이 소설은 얼핏 보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농장주들을 비판하는 것으로만 보일 수 있다. 분명 그러한 면을 포함하지만, 또한 맥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 활동 또한 섬뜩하게 느껴지게 된다. 농장주들의 폭력이 잔인하고 섬뜩할 만큼, 맥의 사고 또한 냉혹하기 이를데 없다.

개개인의 생명과 행복에 대한 존중을 각자 자기들의 목적보다 후순위에 놓는다는 점에서 맥과 농장주들은 극과 극에서 묘한 공통점을 드러낸다. 그러한 사고 방식을 통해 이루게 되는 체제는 결국 마찬가지라는 말을 스타인벡은 하고 싶었던 걸까?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결함인 전체주의, 집단주의의 씨앗을 맥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개인의 생명을 집단의 이익보다 후순위에 놓은 결과로, 결국 '집단'을 상징하는 일부 권력층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독재체제로 변했던 스탈린 정권과 북한 정권의 모습이 맥의 - 생각보다 낯설지 않은 - 말과 행동에서 느껴져 온다.

그렇다고 농장주들이 대표하는 체제의 모습 또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결국 공산주의나 20세기 초의 자본주의나 다수의 희생위에 소수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이란 점에서는 묘한 일치점 가지는 것이 아닐런지.

이 소설은 발표되었을 때 좌우 양쪽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당했다 한다. 좌나 우나 각자 충분히 불편해할만한 모습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현실적이었던 것이라니. 30년대라면 스탈린의 잔혹한 독재가 세계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던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의심스러운 싸움' 이란 제목은 그만큼 의미심장한다.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그 싸움을 위해서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인가.

이 소설은 사실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 듯 하다. 그냥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마음 아프다. 마지막 결론은 그만큼 많은 걸 보여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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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의 안토니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5
윌라 캐더 지음, 전경자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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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토니아 (My Antonia)> - 윌라 캐더 (Willa Cather)

<나의 안토니아> 라는 소설은 열린책들 세계문학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전혀 모르던 작가의 전혀 모르는 작품이었습니다. 미국의 지방주의 작가라고 하는데, ‘지방주의’는 또 무엇인지 싶었습니다. 앞의 소개글을 보니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출간 연도는 1918년. 비슷한 무렵이라 생각되는 <순수의 시대>는 찾아보니 1920년, <위대한 개츠비>는 1925년입니다. <순수의 시대>나 <위대한 개츠비>는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방주의’라는게 대략 무엇인지 감이 잡히기도 합니다.

 

역시 원어로 읽을 수 있으면 원어로 읽는게 좋습니다.

이 책을 우리말 버젼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출간 연도를 보니, 아마존 킨들로 원서 무료버전이 있을 것 같아서 찾아보니 있더군요. Audible의 오디오 북도 $2.99밖에 안해서 바로 구매해서 원서를 들으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못 따라가겠더군요. 대평원을 배경으로 한 농촌의 삶이다 보니 모르는 단어들이 많아서 읽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윌라 캐더가 문장을 길게 끌고 가지 않는 스타일이라서 그나마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폴 오스터 같이 호흡이 긴 문장을 많이 쓰는 작가의 책들은 쉽지 않더군요.

우리말 버젼을 읽을 때는 그냥 무심코 지나갔던 문장이 영어로 읽으니 새롭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래는 앞의 인트로 부분에 나옵니다.


밀과 옥수수에 파묻힌 작은 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날씨라고는 온 세상이 눈부신 하늘 아래 녹색으로 파도치고 억센 잡초와 추수를 기다리는 농작물의 색깔과 냄새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불타는 여름, 주위가 온통 회색 철판처럼 벌거벗은 데다 눈은 거의 내리지 않고 바람만 매섭게 휘몰아치는 겨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We were talking about what it is like to spend one’s childhood in little towns like these, buried in wheat and corn, under stimulating extremes of climate:
burning summers when the world lies green and billowy beneath a brilliant sky, when one is fairly stifled in vegetation, in the color and smell of strong weeds and heavy harvests;
blustery winters with little snow, when the whole country is stripped bare and gray as sheet-iron.


영문장은 위와 같이 ‘b’라는 글자로 시작되는 주요 구절들이 댓구를 이루는 느낌입니다. burning summers와 blustery winters가 댓구를 이루며 대조가 되고, 그 뒤의 묘사들도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말 번역이 정확하게 같은 뜻인데도, 댓구와 대조의 느낌이 잘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애시당초 번역이 어려운 문장입니다. 일단 영어 버젼을 더 우선적으로 읽어나갔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악하거나 미워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암브로쉬나 쉬메르다 부인 같은 경우 좀 얄밉기도 합니다. 그런데, 악인이라할 정도는 아닙니다. 인색할 뿐입니다. 암브로쉬는 자기 누이 안토니아에게 큰 선물을 하기도 하지요. 악인이 등장하지도 않고 특별히 사건도 없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는지 모르게 읽힙니다. 미국 서부개척의 최전선에서 힘겹게 수십년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이웃을 돕고 베풀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조금 이상화 되어 있는게 아닌지 의심이 순간 떠오를때면, 그 의심이 합리적인 건지, 아니면 내가 사는 이 나라의 일상의 모습들과는 사뭇 달라서 그런 건 아닌지 싶더군요.

 

서로 어울려 이루어 내는 일상의 에피소드가 하나하나 모여 각자의 삶으로 축적되어 갑니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짐 버든, 안토니아 쉬메르다, 레나 린가르드 등은, 그 이전에 없던, 듣도보다 못한, 독특하며 새로운 일들을 겪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삶이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 겪을 수 있는 일들, 우리 주변에서도 유사한 일들을 발견할 수 있는 일들을 겪고 헤쳐나아갑니다.

힘겹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 순간순간의 모습이 현대의 한국에 사는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더 무겁고 아프게 다가오는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읽다가 주변을 보기가 민망해질 정도로 확 울컥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작가는 그저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그렇게 그들의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모여 각자의 인생으로 축적되는 모습을 이 소설은 담담하지만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늘 변함없이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는 대평원을 배경으로 주요 등장인물의 삶을 묵직하게 완성해 나갑니다.

 

결국 안토니아였습니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짐 버든은 대도시에서 대기업의 법률 고문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인생을 이루게 됩니다. Black Hawk에서 같이 청년기를 보냈던 레나 린가르드와 티나 소더볼은 역시 대도시에서 자기만의 성공을 이룹니다. 하지만, 대도시에서의 그들의 성공에 대해서 작가는 살짝 의문스러운 방점을 찍어 놓습니다. 하지만 네브래스카의 고향에 머물렀던 안토니아의 삶에는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결말은 ‘돌아옴’과 ‘공유하는 추억’ 이었습니다.

결말에서의 짐 버든의 상태를 굳이 정의하라면, 약간은 회한이 남은 듯하긴 하지만, 행복해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기쁨, 슬픔 등이 어우러진 풍성한 과거의 추억 그자체와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그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보입니다. 짐 버든에게는 그 사람이 안토니아였죠. 이 작품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레나와 티니에게도 안토니아는 그런 사람이었으리라 싶습니다.

 

배경으로서의 대평원은 그냥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안토니아의 삶이 풍성할 수 있었던 것,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이 작품은 은연 중에 그녀가 대평원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부모를 잃고 멀리 왔던 짐 버든의 아픈 마음은 초반에 아래와 같이 묘사됩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을 등지고 세상 끄트머리를 지나 인간의 관할 지역 밖에 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낯익은 산등성이가 눈에 띄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기는 그때가 난생처음이었다.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오직 둥그런 하늘뿐이었다. 죽은 엄마 아빠가 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엄마 아빠는 지금도 시냇가 아래쪽에 있는 양 우리나 산등성이 목초지로 이어지는 하얀 길가에서 나를 찾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엄마 아빠의 영혼까지도 뒤에 남겨 놓고 떠나왔던 것이다. 마차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목적지를 향하여 덜커덩거리면서 달려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 고향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않고 끝없이 계속 달려가기만 했더라도 나로서는 안타까울 것이 없었으리라. 눈앞에 보이는 땅덩이와 하늘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는 지워지고 사라져 버리는 느낌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모든 일이 나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리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I had the feeling that the world was left behind, that we had got over the edge of it, and were outside man’s jurisdiction. I had never before looked up at the sky when there was not a familiar mountain ridge against it. But this was the complete dome of heaven, all there was of it. I did not believe that my dead father and mother were watching me from up there; they would still be looking for me at the sheep-fold down by the creek, or along the white road that led to the mountain pastures. I had left even their spirits behind me. The wagon jolted on, carrying me I knew not whither. I don’t think I was homesick. If we never arrived anywhere, it did not matter. Between that earth and that sky I felt erased, blotted out. I did not say my prayers that night: here, I felt, what would be would be.


부모를 잃고 동부에서 서부의 낯선 동네로 멀리 와야 했던 어린 짐 버든의 마음이 아프게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그런 짐의 마음이 처음으로 치유되기 시작한 것은 대평원에서 였습니다.


나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호박처럼 나는 태양 아래 누워서 햇볕을 즐기는 존재였을 뿐이며 그 이상의 것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행복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우리가 죽어서 태양이나 공기, 선이나 지식 같은 완전한 존재의 일부가 되었을 때의 기분이 그러하리라. 어쨌거나 내가 느낀 것은 행복이었다. 완전하고도 위대한 것 속으로 융해되었을 때의 기분이었다. 그러한 행복이 우리를 찾아올 때는 마치 수면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I kept as still as I could. Nothing happened. I did not expect anything to happen. I was something that lay under the sun and felt it, like the pumpkins, and I did not want to be anything more. I was entirely happy. Perhaps we feel like that when we die and become a part of something entire, whether it is sun and air, or goodness and knowledge. At any rate, that is happiness; to be dissolved into something complete and great. When it comes to one, it comes as naturally as sleep.


인간의 존재를 왜소하게 만드는 거대한 대평원의 아름다움이 어린 짐 버든의 마음을 채운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 같은 그 이야기는 내 마음속 깊이 새겨져서 해바라기가 일렬로 늘어선 길은 언제나 나에게는 자유로 향하는 길로 여겨진다.

Nevertheless, that legend has stuck in my mind, and sunflower-bordered roads always seem to me the roads to freedom.


몰몬교의 박해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나온 글입니다. 자유를 찾아 먼 길을 떠나야 했던 그들의 발자취가 ‘자유로 향하는 길’로 남아 있는 대평원을 바라보는 어린 짐 버든의 마음이 느껴져 옵니다. 대평원이 주는 해방감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의 아픔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좀 지나서 이런 장면도 나오지요. 대평원에서의 인상적인 기억의 한 조각입니다.


안토니아의 머리카락 속에서 거처를 정한 나약한 음유 시인이 갈라진 음성으로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우리 세 사람은 다정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쉬메르다 씨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슬픔과 만물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순간 그의 미소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해가 지자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흙냄새와 마른 풀 냄새가 강하게 밀려왔다. 안토니아는 자기 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갔고 나는 윗옷 단추를 채우고 그림자와 함께 집으로 달음질쳤다.

We stood there in friendly silence, while the feeble minstrel sheltered in Antonia’s hair went on with its scratchy chirp. The old man’s smile, as he listened, was so full of sadness, of pity for things, that I never afterward forgot it. As the sun sank there came a sudden coolness and the strong smell of earth and drying grass. Antonia and her father went off hand in hand, and I buttoned up my jacket and raced my shadow home.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나서 이 문단을 다시 읽으니,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파옵니다. 이런 모든 아름다움과 슬픔과 아픔에 직면하면서 헤쳐 나온 삶의 변함없는 배경이었던 대평원은 20대 후반의 짐 버든의 마음에도 묵직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가 대도시에서 살고 있을 지언정.


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올 즈음엔 태양이 서쪽 끄트머리에 거대한 황금 공처럼 걸려 있었다. 태양이 그렇게 걸려 있는데 동쪽에서는 수레바퀴만큼이나 커다란 달이 파리한 은빛에 장밋빛 줄이 쳐 있는 비누 거품처럼 여린 모습으로 떠올랐다. 한 5분 동안, 아니, 한 10분 동안 두 개의 거대한 빛 덩어리들이 반듯한 대지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양쪽 끄트머리에 기댄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특이한 빛 아래에서 작은 나무 한 그루, 밀알 한 톨, 해바라기 한 줄기, 산 위에 쌓인 눈 덩어리 하나하나가 모두 선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밭이랑과 흙덩이들까지도 선명하게 윤곽을 내보이는 듯싶었다. 나는 대지의 힘을, 저녁이면 저 들판에서 우러나오는 엄숙한 마력을 느꼈다. 다시 한 번 어린 소년이 될 수 있으면, 그리고 나의 삶이 바로 저기서 끝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As we walked homeward across the fields, the sun dropped and lay like a great golden globe in the low west. While it hung there, the moon rose in the east, as big as a cart-wheel, pale silver and streaked with rose colour, thin as a bubble or a ghost-moon. For five, perhaps ten minutes, the two luminaries confronted each other across the level land, resting on opposite edges of the world. In that singular light every little tree and shock of wheat, every sunflower stalk and clump of snow-on-the-mountain, drew itself up high and pointed; the very clods and furrows in the fields seemed to stand up sharply. I felt the old pull of the earth, the solemn magic that comes out of those fields at nightfall. I wished I could be a little boy again, and that my way could end there.


우리말 번역에서는 ‘대지의 힘’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문장에는 ‘old’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대지의 힘이 아니라, 그가 과거에 익히 느끼고 있었던 ‘바로 그것’ 이라는 의미에서 ‘the old’란 구절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안토니아도 짐 버든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도시에서는 뭔가 불안하고 뭔가 빠진 듯했지만, 다시 대평원으로 돌아오니 새롭게 힘이 솟아났다고.

그렇게 대평원은 주요 등장인물의 삶에서 주요한 배경이 되면서,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로서 각자의 삶에 풍요로운 안정감을 부여하는 존재로 격상이 됩니다.

대체 그 대평원의 아름다움, 그 힘은 무엇일까요.


네브래스카 주는 미국의 거의 정가운데에 위치한 주입니다. 정말 시골 중의 시골이라는 느낌이 확 옵니다. 가장 큰 도시인 Lincoln도 작은 소도시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는 사람도 적은 이 동네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한 소설이 있다니. 윌라 캐더는 그 지방에서는 엄청난 인물로 여겨지겠구나 싶었습니다. 작중의 Black Hawk라는 타운은 실제로는 Red Cloud라는 곳이며, 이 마을을 통과하는 하이웨이에는 윌라 캐더의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윌라 캐더가 안토니아의 모델로 삼았다는 작가의 지인이 실제로 살았던 집이 Red Cloud 인근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문득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점?

뭐 전혀 비판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줄줄이 사탕으로 비판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실제로 윌라 캐더의 1931년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많은 찬사도 받았지만, 상당히 가혹한 평들도 있었다 합니다. 그 평들에 윌라 캐더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고 묵직한 마스터피스라는 생각입니다. 읽으면서 <스토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안토니아>가 조금 더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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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이 하나 있더군요. 그냥 실수라는 생각입니다~

짐 버든하고 여길 뛰어다니면서 놀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이 위에 있으면 우리 아버지가 서 계시던 자리를 정확히 찍어 낼 수 있어요. 어떤 때는 내가 아주 오래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이번 가을은 하루하루를 그냥 즐기고 있는 거예요.
It seems such a little while ago when Jim Burden and I was playing all over this country. Up here I can pick out the very places where my father used to stand. Sometimes I feel like I’m not going to live very long, so I’m just enjoying every day of this fall.”

 

(제게 인상깊었던 문장을 골랐습니다. 상당히 많습니다. 책을 안 읽으신 분들은 재미 없으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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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말씀이, 주님께서는 훅스가 행한 이 같은 선행을 일일이 기억하시고 훅스 자신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에서 훅스를 보호하고 구해 주셨다고 했다.
Grandmother told him she was sure the Lord had remembered these things to his credit, and had helped him out of many a scrape when he didn’t realize that he was being protected by Providence.


얼마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얼굴들이었던가! 거칠고 난폭하다는 그 자체가 오히려 그들을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앞에 내걸고 상대방이 근접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예법이라는 것을 따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세상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이라고는 자신들의 억센 주먹뿐이었다.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는 떠돌이 노동자로 이미 낙착 지어진 오토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이들을 그 얼마나 사랑했던가!
As I remember them, what unprotected faces they were; their very roughness and violence made them defenceless. These boys had no practised manner behind which they could retreat and hold people at a distance. They had only their hard fists to batter at the world with. Otto was already one of those drifting, case-hardened labourers who never marry or have children of their own. Yet he was so fond of children!


죽은 이의 혼을 위로해 주려는 마음에서 바로 그 자리에 무덤을 파게 했던 미신이 왠지 나는 싫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못지않게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차마 측량된 경계선대로 도로를 내지 못하고 무덤을 약간 비켜 나간 그 마음씨와, 해가 진 후 덜거덕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들이 지나는 그 부드러운 흙길이었다. 피곤한 몸으로 그 나무 십자가 곁을 지나가는 마부라면 그 밑에서 잠들어 있는 이에게 평온한 안식을 기원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리라.
I loved the dim superstition, the propitiatory intent, that had put the grave there; and still more I loved the spirit that could not carry out the sentence—the error from the surveyed lines, the clemency of the soft earth roads along which the home-coming wagons rattled after sunset. Never a tired driver passed the wooden cross, I am sure, without wishing well to the sleeper.

제이크와 오토는 마지막까지 우리 집안일을 거들어 주었다. 블랙 호크까지 이삿짐을 날라 주었고 새집에 양탄자를 깔아 주고 할머니를 위해서 부엌에 선반과 찬장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를 떠나기가 정말 싫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 버렸다. 그 두 사람은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이 우리를 보살펴 주었으며 이 세상에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고 간 사람들이었다. 나한테는 친형 같은 존재들이었다.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자신들의 말씨까지도 조심했고 나한테 깊은 애정을 보여 주었던 고마운 어른들이었다.
Jake and Otto served us to the last. They moved us into town, put down the carpets in our new house, made shelves and cupboards for grandmother’s kitchen, and seemed loath to leave us. But at last they went, without warning. Those two fellows had been faithful to us through sun and storm, had given us things that cannot be bought in any market in the world. With me they had been like older brothers; had restrained their speech and manners out of care for me, and given me so much good comradeship.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기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하얀 침대를 준비해 놓고 아이들이 그 속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기를 좋아했다. 거만한 사람들을 비웃었고 불행한 사람들은 지체 없이 도와주었다. 두 사람 모두 지나치게 섬세하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활기차고 명랑하며 삶을 즐길 줄 알았다.
They liked to prepare rich, hearty food and to see people eat it; to make up soft white beds and to see youngsters asleep in them. They ridiculed conceited people and were quick to help unfortunate ones. Deep down in each of them there was a kind of hearty joviality, a relish of life, not over-delicate, but very invigorating.


황야를 일구는 일을 도우며 자란 맏딸들은 삶에서, 빈곤에서,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안토니아처럼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들어 세상을 배우게 되었다.
The older girls, who helped to break up the wild sod, learned so much from life, from poverty, from their mothers and grandmothers; they had all, like Antonia, been early awakened and made observant by coming at a tender age from an old country to a new.

집안 식구들 간의 이러한 결속으로 인해 우리 지방에 정착한 외국인 농부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튼튼한 기반을 잡게 되었다. 부친이 빚을 다 갚고 나면 딸들은 대개의 경우 같은 국적의 이웃 남자들과 결혼했다. 한때 블랙 호크에 와서 부엌일을 했던 시골 처녀들이 오늘날은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자손들은 예전에 그들이 하녀로 일하면서 모셨던 부인네들의 자녀들보다 더 잘살고 있다.

One result of this family solidarity was that the foreign farmers in our county were the first to become prosperous. After the fathers were out of debt, the daughters married the sons of neighbours—usually of like nationality—and the girls who once worked in Black Hawk kitchens are to-day managing big farms and fine families of their own; their children are better off than the children of the town women they used to serve.

「아, 난 우리 아빠가 네 연설을 들으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 하면서 앉아 있었어.」 안토니아가 내 외투 깃을 잡았다. 「네 연설을 들으니까 왠지 자꾸 아빠 생각이 났어!」
「토니, 난 그 연설문을 쓰면서 줄곧 너네 아빠를 생각했어. 그건 너네 아빠한테 바친 연설이었어.」
안토니아는 나를 껴안았다. 토니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흰옷이 가물가물 작아지며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만큼 나의 마음을 깊이 흔들어 놓은 성공은 그 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Oh, I just sat there and wished my papa could hear you! Jim’—Antonia took hold of my coat lapels—’ there was something in your speech that made me think so about my papa!’ ‘I thought about your papa when I wrote my speech, Tony,’ I said. ‘I dedicated it to him.’ She threw her arms around me, and her dear face was all wet with tears.
I stood watching their white dresses glimmer smaller and smaller down the sidewalk as they went away. I have had no other success that pulled at my heartstrings like that one.

붉은 햇덩어리 밑부분이 지평선을 등지고 있는 높은 벌판에 내려앉는 순간 갑자기 검은색의 거대한 형체가 태양 표면에 나타났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살을 찌푸려 가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고지 농장 어느 밭에 쟁기 한 자루가 땅에 꽂힌 채로 있었고 태양이 바로 그 쟁기 뒤로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태양을 마주 보며 멀리 있던 그 쟁기는 수평으로 햇빛을 받아 확대되어 태양의 둥그런 원형 속에 정확하게 들어가 있었다. 쟁기 손잡이, 부리, 보습 날이 달아오른 쇳덩이 같은 뻘건 햇덩어리 위에 시커멓게 나타났다. 엄청난 크기로 태양 위에 그려 놓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Presently we saw a curious thing: There were no clouds, the sun was going down in a limpid, gold-washed sky. Just as the lower edge of the red disk rested on the high fields against the horizon, a great black figure suddenly appeared on the face of the sun. We sprang to our feet, straining our eyes toward it. In a moment we realized what it was. On some upland farm, a plough had been left standing in the field. The sun was sinking just behind it. Magnified across the distance by the horizontal light, it stood out against the sun, was exactly contained within the circle of the disk; the handles, the tongue, the share—black against the molten red. There it was, heroic in size, a picture writing on the sun.


나는 인간과 무관한 문제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몰두할 수가 없었다. 정신적인 기쁨을 경험할 때는 즉시 그 옛날 살던 벌거벗은 땅과 그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가 있었다. 클레릭 교수가 내 눈앞에 가져다 보여 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나의 마음은 나에게서 벗어나 어느덧 나의 무한히 작은 과거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과 장소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태양에 비쳤던 쟁기처럼 보다 더 힘차고 단순해진 모습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새로운 매력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지니고 있던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I could never lose myself for long among impersonal things. Mental excitement was apt to send me with a rush back to my own naked land and the figures scattered upon it. While I was in the very act of yearning toward the new forms that Cleric brought up before me, my mind plunged away from me, and I suddenly found myself thinking of the places and people of my own infinitesimal past. They stood out strengthened and simplified now, like the image of the plough against the sun. They were all I had for an answer to the new appeal.


베르길리우스가 브린디 시에서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는 분명히 그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 클레릭 교수의 말이었다. 「아이네이스」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비감한 사실을 직면하고, 신들과 인간들의 형상으로 가득 찬 그 위대한 캔버스를 미완성으로 세상에 남아 있게 하느니 차라리 불살라 없애 버리라고 명령한 후, 그의 마음은 쟁기와 이랑이 짝을 이루듯 자신의 펜과 물체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원의 노래」의 아름다운 구절들로 되돌아가 있었을 것이며, 한 선량한 인간이 가슴 가득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나는 나의 나라로 시의 여신을 모셔 온 최초의 사람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Cleric said he thought Virgil, when he was dying at Brindisi, must have remembered that passage. After he had faced the bitter fact that he was to leave the ‘Aeneid’ unfinished, and had decreed that the great canvas, crowded with figures of gods and men, should be burned rather than survive him unperfected, then his mind must have gone back to the perfect utterance of the ‘Georgics,’ where the pen was fitted to the matter as the plough is to the furrow; and he must have said to himself, with the thankfulness of a good man, ‘I was the first to bring the Muse into my country.’

우리 학생들은 위대한 감정의 날개에 접해 보았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조용히 교실을 나왔지만,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만큼 클레릭 교수를 친히 알고 있던 사람은 아마 나 혼자뿐이었으리라. 저녁에 책을 들여다보며 앉아 있노라면 눈앞에 펼쳐 놓은 페이지 위로 클레릭 교수의 열정에 넘친 음성이 울려 나오는 듯했다. 나에게 그토록 자주 들려주던 뉴잉글랜드의 바위 많은 그 특별한 지역이 혹시 그분의 <나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We left the classroom quietly, conscious that we had been brushed by the wing of a great feeling, though perhaps I alone knew Cleric intimately enough to guess what that feeling was. In the evening, as I sat staring at my book, the fervour of his voice stirred through the quantities on the page before me. I was wondering whether that particular rocky strip of New England coast about which he had so often told me was Cleric’s patria. B


레나가 그들 모두를 나에게 다시 데려다 주었다. 전에는 전혀 생각도 못 했으나 이 처녀들과 베르길리우스의 시와의 관계가 문득 떠올랐다. 이들 같은 처녀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라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실은 나에게 지극히 소중한 것이어서 혹시라도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봐 가슴 깊이 간직했다.
Lena had brought them all back to me. It came over me, as it had never done before, the relation between girls like those and the poetry of Virgil. If there were no girls like them in the world, there would be no poetry. I understood that clearly, for the first time. This revelation seemed to me inestimably precious. I clung to it as if it might suddenly vanish.


한때 낡은 토담집이 있던 자리에는 목조집과 작은 과수원과 커다란 붉은색 헛간이 들어서 있었다. 모든 변화는 행복한 아이들, 만족한 여인네들, 자신의 삶에서 행운의 결실을 얻은 남자들 등을 의미했다. 바람 부는 봄철과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철이 오고 가면서 저 고원 지대를 기름진 땅으로 만들었으며, 저 대지 속으로 흘러 들어간 인간의 모든 노고가 이제 결실을 맺어 기름진 밭이 길게 줄지어 뻗어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아름답고도 조화롭게 보였다. 그것은 마치 위대한 인물이나 위대한 사상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것과도 같았다.
There were wooden houses where the old sod dwellings used to be, and little orchards, and big red barns; all this meant happy children, contented women, and men who saw their lives coming to a fortunate issue. The windy springs and the blazing summers, one after another, had enriched and mellowed that flat tableland; all the human effort that had gone into it was coming back in long, sweeping lines of fertility. The changes seemed beautiful and harmonious to me; it was like watching the growth of a great man or of a great idea.


「안토니아, 내가 여길 떠난 후로 난 이 지방에 사는 다른 누구보다도 네 생각을 많이 했어. 내 애인이든지 아내든지, 아니면 내 어머니든지 누나든지, 어쨌든 한 남자에게 아주 소중한 여인으로 난 너를 생각하고 싶어. 너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 나의 온갖 취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네 영향을 받고 있어. 넌 정말 나의 한 부분이야.」
I told her I knew she would. ‘Do you know, Antonia, since I’ve been away, I think of you more often than of anyone else in this part of the world. I’d have liked to have you for a sweetheart, or a wife, or my mother or my sister—anything that a woman can be to a man. The idea of you is a part of my mind; you influence my likes and dislikes, all my tastes, hundreds of times when I don’t realize it. You really are a part of me.’


믿음이 가득 찬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넌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또 난 널 그토록 실망시켰는데.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짐, 그런 걸 생각하면 참 신기하지? 우리가 어렸을 때 서로 알게 된 게 정말 기뻐. 내 어린 딸이 빨리 자라서 우리가 함께 놀던 이야기들을 그 애한테 모두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어. 옛날 생각을 할 땐 항상 날 기억하겠지, 그치? 모든 사람들이 다 옛날 생각들을 할 거야. 가장 행복한 사람들까지도.」
She turned her bright, believing eyes to me, and the tears came up in them slowly, ‘How can it be like that, when you know so many people, and when I’ve disappointed you so? Ain’t it wonderful, Jim, how much people can mean to each other? I’m so glad we had each other when we were little. I can’t wait till my little girl’s old enough to tell her about all the things we used to do. You’ll always remember me when you think about old times, won’t you? And I guess everybody thinks about old times, even the happiest people.’


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올 즈음엔 태양이 서쪽 끄트머리에 거대한 황금 공처럼 걸려 있었다. 태양이 그렇게 걸려 있는데 동쪽에서는 수레바퀴만큼이나 커다란 달이 파리한 은빛에 장밋빛 줄이 쳐 있는 비누 거품처럼 여린 모습으로 떠올랐다. 한 5분 동안, 아니, 한 10분 동안 두 개의 거대한 빛 덩어리들이 반듯한 대지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양쪽 끄트머리에 기댄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특이한 빛 아래에서 작은 나무 한 그루, 밀알 한 톨, 해바라기 한 줄기, 산 위에 쌓인 눈 덩어리 하나하나가 모두 선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밭이랑과 흙덩이들까지도 선명하게 윤곽을 내보이는 듯싶었다. 나는 대지의 힘을, 저녁이면 저 들판에서 우러나오는 엄숙한 마력을 느꼈다. 다시 한 번 어린 소년이 될 수 있으면, 그리고 나의 삶이 바로 저기서 끝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As we walked homeward across the fields, the sun dropped and lay like a great golden globe in the low west. While it hung there, the moon rose in the east, as big as a cart-wheel, pale silver and streaked with rose colour, thin as a bubble or a ghost-moon. For five, perhaps ten minutes, the two luminaries confronted each other across the level land, resting on opposite edges of the world. In that singular light every little tree and shock of wheat, every sunflower stalk and clump of snow-on-the-mountain, drew itself up high and pointed; the very clods and furrows in the fields seemed to stand up sharply. I felt the old pull of the earth, the solemn magic that comes out of those fields at nightfall. I wished I could be a little boy again, and that my way could end there.


우리 두 사람의 길이 갈라지는 밭 끄트머리에 이르러 나는 안토니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이 한때 얼마나 억세고 다정스러웠던가를 새삼 느끼면서, 그리고 그 손이 나를 위해 해주었던 수많은 착한 일들을 떠올리면서 햇볕으로 갈색이 된 두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서 영원히 내 곁에 간직할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보였다. 뭇 여인들의 얼굴들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에서 가장 친근하고 가장 생생한 얼굴로 나의 기억의 바닥에 남아 있을 그 얼굴을.
We reached the edge of the field, where our ways parted. I took her hands and held them against my breast, feeling once more how strong and warm and good they were, those brown hands, and remembering how many kind things they had done for me. I held them now a long while, over my heart. About us it was growing darker and darker, and I had to look hard to see her.


「난 돌아올 거야.」 부드럽게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나는 진정으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가슴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넌 여기 있다고. 우리 아버지처럼. 그러니까 난 외롭지 않을 거야. 그 낯익은 길을 홀로 걸어오면서 나는 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풀 속에서 서로 속살거리고 깔깔거리며, 그 옛날 우리 둘의 그림자들이 우리를 따라왔듯이 내 곁을 따라 달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I’ll come back,’ I said earnestly, through the soft, intrusive darkness. ‘Perhaps you will’—I felt rather than saw her smile. ‘But even if you don’t, you’re here, like my father. So I won’t be lonesome.’ As I went back alone over that familiar road, I could almost believe that a boy and girl ran along beside me, as our shadows used to do, laughing and whispering to each other in the grass.

그녀는 우리 모두가 보편적인 진리라고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태고로부터 이어 오는 인간의 자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었다.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었다. 이제는 고생으로 찌든 여인이고 이미 아름다운 젊은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아직도 상상의 날개에 불을 붙여 주는 신비한 힘이 있었으며, 평범한 것들 속에서도 의미를 보여 주는 눈짓 하나 혹은 몸짓 하나로 상대방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She lent herself to immemorial human attitudes which we recognize by instinct as universal and true. I had not been mistaken. She was a battered woman now, not a lovely girl; but she still had that something which fires the imagination, could still stop one’s breath for a moment by a look or gesture that somehow revealed the meaning in common things.

가슴속의 강렬한 힘과 지칠 줄 모르고 아낌없이 베푸는 관대한 마음씨가 모두 그녀의 육신에서 나왔던 것이다. 안토니아의 아이들이 모두 의젓하고 곧게 자라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마치 초창기 종족들의 창시자처럼 그녀는 생명의 풍요로운 광산이었다.
All the strong things of her heart came out in her body, that had been so tireless in serving generous emotions. It was no wonder that her sons stood tall and straight. She was a rich mine of life, like the founders of early races.


이 길은 그 옛날, 그날 밤, 안토니아와 내가 블랙 호크에서 기차를 내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궁금해하며 밀짚 위에 누워 마차를 타고 지나가던 바로 그 길이었다
This was the road over which Antonia and I came on that night when we got off the train at Black Hawk and were bedded down in the straw, wondering children, being taken we knew not whither.


나는 비로소 나 자신으로 되돌아온 기분이 들었으며, 한 인간의 경험의 범주가 그 얼마나 작은 원을 그리고 있는지 깨달은 느낌이었다. 안토니아와 나에게 이 길은 운명의 길이었으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앞날을 미리 결정해 주었던, 어린 시절의 온갖 시간들을 가져다준 길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바로 이 길이 우리를 다시 연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든, 우리는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그 소중한 과거를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
I had the sense of coming home to myself, and of having found out what a little circle man’s experience is. For Antonia and for me, this had been the road of Destiny; had taken us to those early accidents of fortune which predetermined for us all that we can ever be. Now I understood that the same road was to bring us together again. Whatever we had missed, we possessed together the precious, the incommunicabl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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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도끼'랍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인데, 카프카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야.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 1904년 1월 카프카

이 책은 총 8강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장 하나하나는 저자의 강의를 받아 적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장의 내용은 저자가 읽은 책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좋은 책들에 대한 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후기의 깊이가 상당합니다.

1강에서는 이철수라는 작가의 판화집들과 최인훈의 <광장>, 이오덕의 <나도 쓸모 있을 걸> 에서 나오는 문장들을 중심으로 '시작은 울림이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합니다. 이철수라는 작가의 이름은 처음 들어 보았고, 최인훈의 <광장>은 읽은지 20년이 넘었고, 이오덕의 책은 처음 들어 봅니다.

처음에는 잘 와 닿지 않는 짧은 싯구나 문장들이 이 저자의 해설을 거치고 나면 기가막힌 문장으로 다가오는 일을 1강 내내 계속 느꼈습니다. 사실 이 책 전체가 그렇기도 합니다.

성이 난 채 길을 가다가, 작은 풀잎들이 추위 속에서 기꺼이
바람 맞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두고 마음 풀었습니다.
- <길에서> - 이철수

삶은 실수할 적마다 패를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다.
- <광장> - 최인훈

이러한 문장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마음이 와 닿더군요. 실제 삶의 문맥에서 저런 문장들이 어떤 울림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는 깊은 통찰이 배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문학 쪽으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어서 저로서는 이 저자의 설명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2강에서는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외 몇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얘기합니다. 김훈 작가야 뭐.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감탄에 감탄...

3강에서는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우리는 사랑일까>,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 등 몇권을 얘기합니다. 저는 이 작가의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상당히 예리한 통찰력이 매섭더군요. 이 작가의 <프루스트...>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4강은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을 중심으로 자신의 읽은 책과 문장에 대한 후기를 서술합니다. 

급한 물에 떠 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이렇게 시작해 보거라

고은 시인의 이 싯구에 대해 저자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낯선 곳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거에요. 니코스 카찬차키스도 말하죠. 익숙한 것을 두려워하라고. 땅버들 씨앗 같은 삶의 태도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땅버들 씨앗들이 의도를 가지고, 이번 물살이 좀 안전하니까 이번에 타야지, 하고 가는 게 아니쟎아요. 갑자기 급한 물이 내려오면 어쪌 수 없이 쓸려가야 해요. 우리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내 마음대로 직조할 수 없어요. 시대라는게 씨줄과 내 의지라는 날줄이 맞아야 해요. 내가 아무리 날줄을 잘 세운다고 해도 씨줄이 너무 세게 밀고 들어오면 휘게 되어 있어요. 살다보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아요. 급한 물이 밀려올 때가 있어요. 그럼 타야지 어쩌겠어요. 그러고 나서 결국 어딘가에 닿았어요. 사실 나는 거기에 닿고 싶지 않았는데, 아래쪽으로 3미터쯤 더 가고 싶었는데, 그 지점에 가지 못하고 닿았단 말이죠. 그런 어쩌겠어요. 땅버들 씨앗처러 거기서 최선을 다해 싹을 틔워야죠."

이렇게 저자의 설명을 읽고 나면 결국 앞의 싯구를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읽어보게 됩니다. 그렇게 이 책은 앞으로 돌아가길 수도 없이 하면서 반복에 반복으로 읽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인용된 문장의 깊이와 숨막히는 아름다움,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통찰, 그것을 잡아내는 저자의 독해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5강을 읽으면서 놀랍기도 하면서 반가왔던 것은, 얼마전 카뮈의 <최초의 인간>의 번역자 이신 김화영 교수님의 책이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번역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는 감탄을 느끼게 했던 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번역이 잘된 책은 읽는 동안 번역자의 존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번역이 잘 안된 책은 뭔가 걸리적 거리지요. <최초의 인간>은 읽으면서 우리 말의 호흡과 문장의 뜻의 흐름이 잘 맞아들어가면서 표현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감탄 스러운 번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저서가 따로 있고, 그 저서가 이 책에 소개가 될 정도였던 거죠.

저자가 추천하는 김화영 교수님의 책은 <행복의 충격>, <바람을 담는 집>과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입니다. 이중에 뒤의 두 권을 중심으로 '지중해 문학'이란 주제로 5강을 풀어갑니다. '지중해 문학'이라 불리우는 한 범주의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알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중해 문학'의 바탕이 되는 지중해의 삶을 접한 뒤에 그에 대한 감상을 김화영 교수님이 적은 책들이 위의 세 권이라 합니다. '지중해 문학'에 대한 설명을 읽고 그 문장들을 읽으니 조금 더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만 그 이해가 없이도 문장들은 참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알제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한다

우리들 가장 아름다운 날들의 덧없는 기쁨을 맛보게 해다오...

언제나 승리하는 말없는 자연의 돌들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가 무너지고 오직 화려한 대문만 남은 이 사랑의 성은, 그리하여 마땅히 하나의 폐허인 것이다. 폐허 위에 내리는 햇볕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다. 
무슨 까닭에서인지도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분리되어 나를 엄습했따. 그것은 마치 사랑이 그렇게 하듯, 인생의 우여곡절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삶의 재난들을 무해하게 하고 그 덧없음을 착각인 것처럼 만들어주면서 내 속을 귀중한 실체로 가득 채워주었다.

김화영 교수님의 문장은 원래 이리도 아름다웠던 것이었는데, 이제사 알았네요. 

5강은 이어서 <그리스인 조르바>와 카뮈의 <이방인>을 '지중해 문학'의 관점에서 다룹니다. 전혀 다른 두 작품이 김화영 교수님의 문장들과 뜻이 통하면서 하나로 이어지더군요.

6강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룹니다.평생 네 번을 읽었다는 이 책을 이 저자가 어떻게 느꼈는지 얘기하는데, 참 깊이 공감하고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대략 십몇년 전에 읽었지만, 생각보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책이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데, 저자의 설명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그 책에 대한 기억을 하나로 꿰어 주더군요. 오래 전에 읽었을 때는 잘 모르고 읽었는데,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더군요.

7강에서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전인미답의 인생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읽으면 특히 좋은 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일종의 인생의 지도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한 여인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골목골목 세밀하게 표시된 지도처럼 보편적이 인간의 심리를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7강을 읽으면서 찾아보니, <안나 카레니나>는 제 소장 목록에 없더군요. 50년 대여에도 이 책은 없었습니다. 고민할 필요 없게 된 셈이죠.

8강은 동양미술 및 불교 사상 관련 책을 여러 권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제가 약 10여년 전에 깊은 감동으로 읽었던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도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와 손철주, 오주석, 최순우의 미술과 건축에 대한 책들이 소개 되어 있고, 프리초프 카프라와 한형조의 책들도 일부 다루고 있습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라는 제목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시작하면서, 또 이 책을 마치면서 두가지 얘기를 합니다. 하나는 '다독은 중요하지 않다' 이고 다른 하나는 '책이 얼어붙은 내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입니다. 저자는 다독 보다는 만독, 천천히 읽으며 그 책이 주는 울림을 잡아내고, 그 울림을 통해 자신의 감수성을 깨는 일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이 책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저자와 그들의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독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주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깊은 공감이되는 후기들의 잔치라고나 할까요.

요새 고영성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소개된 책을 중심으로 읽고 있는데, 얻는게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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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뇌 - 독서와 뇌, 난독증과 창조성의 은밀한 동거에 관한 이야기
매리언 울프 지음, 이희수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책 읽는 뇌>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영성 지음)에서 자주 인용이 되던 책이어서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고 나니, <책 읽는 뇌>라는 제목도 흥미를 끌게 되더군요.

저자인 매리언 울프는 독특하게도, 또는 도전적으로 이 책의 들어가는 말을 '나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보통 '나는'으로 첫 문장을 시작하지는 않쟎습니까. 그러면 안된다고 배운지라.) 자기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자신이 어떤 경험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합니다. 그는 보스턴에 소재한 터프츠 대학교의 '독서와 언어 연구센터'의 책임자로서 독서와 난독증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특하게 시작한 들어가는 말의 마무리 또한 예기치 못한 문장의 인용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모두 깊은 희망과 확신으로 쓴 글이다. 생각을 걸러내고 단어를 엄선하여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고백하건대, 실로 멋진 일이었다."

뭔가 학술적인 느낌의 책의 서문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는 느낌입니다. 책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문장입니다. 결국 책의 끝까지 다 읽고나서 이 후기를 쓰면서 다시 보니, 저자가 왜 저 문장을 인용했는지 이제 확 이해가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크게 세 개의 부로 나누어 '문자의 기원이라는 아름답고, 다양하고, 변형적인 역량에 대한 찬양'을 1부에서, '독서하는 뇌와 다양한 학습 경로의 발달과 관련하여 펼쳐지는 획기적으로 새로운 조망'을 2부에서 다루고, 3부에서는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장점과 위험성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언급'하면서 책을 마무리 합니다.

1부의 제목은 '뇌가 글을 읽게 된 역사'로 문자의 발명과 이후의 발전사를 간략하게 짚으면서 서구 언어의 기초를 이루는 알파벳의 형성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1장을 시작하는 2개 문단이 많은 것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다. 인류가 독서를 발명해 낸 것은 불과 수천 년 전이다. 인간은 이 발명품을 통해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그렇게 재편성된 뇌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대시켰으며 그것이 결국 인지 발달을 바꾸어 놓았다. 독서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며 역사의 기록은 그 발명의 결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조상이 이렇듯 훌륭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뇌가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기존 구조 안에서 새로운 연결(connection)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뇌가 경험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프로세스다. 가소성(plasticity)은 뇌 구조의 핵심적 특성으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이루는 많은 것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15p)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도 가장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이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다'라는 문장이었는데, 이 책은 첫 문장이 이 문장이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보니, 저 문장이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독서는 선천적이지 않으므로 의식적으로 배워야 한다.' 이고 이 배우는 과정이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합니다.

읽다가 보니 저 문장이 의미하지 않는 바도 있습니다. '독서를 하는 능력은 유전과는 상관이 없다' 에 대해서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라고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책의 후반부에 난독증이 가족력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부분이 있어서 '독서를 하는 능력은 유전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정도로 얘기할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로 저자가 보는 현 시대에 대한 진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 입니다.

"지금은 독서하는 뇌에서 디지털 뇌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다. 따라서 독서를 하기 위해 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인간의 사고와 감성과 추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아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독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화했는지, 아이가 독서를 어떻게 학습하는지, 독서 때문에 뇌 안의 생물학적 기반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해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지적 동물의 불가사의한 복잡성을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지적 능력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지,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어떤 선책을 해야 할지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16p)

'독서하는 뇌'는 무엇일까요? '독서하는 뇌'와 그렇지 않은 '다른 뇌'가 따로 있는 걸까요? 이 책에서 저자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지적 능력을 학습하기 위해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인간 두뇌의 놀라운 능력을 독서 행위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뇌에는 인간의 진화 단계상 더 옛날에 형성되었으며 시각, 언어 등 보다 기초적인 프로세스에 사용되는 구조와 회로가 들어 있다. 뇌가 독서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이들 기존 구조와 회로를 사용해 새로운 연결을 만드는 다재 다능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뇌 속에 있는 신경세포가 새로운 연결과 경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7p)

독서를 위한 '새로운 연결'이 곧 '독서하는 뇌'를 그렇지 않은 '다른 뇌'와 달라지게 하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독서는 뇌가 가소성(plasticity)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학습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독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뇌 안에 이미 생리적, 인지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18p)

이런 뇌 안의 변화는 뇌 안의 다양한 부위 (좌뇌, 우뇌, 전두엽, 측두엽, 후두엽 등) 사이의 뉴런 연결이 형성되고 그 안의 프로레스가 자동화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뇌의 발달의 생물학적 측면은 결국 각 사람의 개인적이고 지적인 측면에 반영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과 내용은 우리가 과거에 읽은 것으로부터 형성된 식견과 연상에 기초하는 것이다. 작가인 조셉 엡스타인(Joseph Epstein)의 말마따나 "작가의 전기를 쓰려면 그가 언제 무엇을 읽었는지 상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그가 읽은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18p)

이후 저자는 우선 생물학적인 측면에서의 '독서하는 뇌'의 발달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얘기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과 같이 원래 기능하게 되어 있는 것 이상의 체계를 독서라는 행위가 요구하기 때문에,  뇌는 여러 부위의 협력체제를 뉴런(신경세포)의 연결체계를 통해서 활성화시킨다고 합니다.

"독서하는 뇌는 시각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념 및 언어 기능에 연결시키기 위해 기존에 설계되어 있던 뉴런(신경세포)의 경로를 활용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독서나 수리능력과 같은 새로운 능력을 창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자 사람의 뇌가 
첫째,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구조들을(주로 시각 및 인지 관련) 새로운 방법으로 연결하는 역량,
둘째, 정보의 패턴을 인지하기 위해 세밀하고 정확하게 특화 영역들을 형성하는 역량,
셋째, 이 영역들로부터 자동적으로 정보를 이끌어 내 연결시키는 능력,
이렇게 세 개의 정교한 설계 원리를 임의로 활용한다.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뇌의 세 가지 조직 원리가 독서의 진화, 발달 또는 실패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27p)

이런 회로와 경로들은 문자와 단어에 수백 번 노출된 다음에야 만들어지며, 난독증과 같은 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수천번 이상 노출되어야 형성된다고 합니다.

"능숙하게 독서하는 뇌는 망막을 통해 정보가 들어가면 문자들의 물리적 속성을 특화된 일련의 뉴런들러 처리하며 이 뉴런들은 문자에 대한 정보를 자동적으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다른 시각 프로세싱 영역으로 들여보낸다. 바로 그곳이 독서하는 뇌의 실질적 자동처리 능력의 핵심 영역이다. 그 안에서 시각 프로세스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하는 뇌의 모든 표상과 프로세스들이 어렵지 않게 속사포처럼 발화(rapid-fire)하는 것이다."

워낙 당연한 듯이 독서를 해왔지만, 그 안에서는 저렇게 뇌에서 많은 처리를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경이롭습니다. 예전에 책을 읽는 아이의 브레인 이미징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감탄스러웠습니다. 바로 저 문장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매우 빠르게 다양한 부위들이 활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새롭게 재편성된 뇌의 능력 중에 상당히 중요한 역량이 있습니다.

"독서에는 본래의 설계 구조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는 뇌의 역량이 반영된다. 독서에는 또한 텍스트와 작가가 제시해 놓은 내용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자의 역량이 반영된다. 좋아하는 책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하루를 묘사한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으면서 당신의 뇌 시스템이 모든 종류의 정보, 즉 시각, 청각 정보 및 의미론적, 통사적, 추론적 정보를 흡수하는 동안 독자인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프루스트가 기술한 내용과 당신 자신의 생각, 개인적 식견을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앞부분에 프루스트의 글을 보여주고 독자로 하여금 읽어보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저자는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가가 제시해 놓은 내용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자의 역량.' 이를 독서의 핵심인 생성적(generative) 장점이라고 부릅니다. 디지털 텍스트의 시대에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독서의 핵심을 이부분으로 지적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지적으로, 독서는 인류로 하여금 '주어진 정보를 뛰어 넘어' 너무나도 아름답고 훌륭한 무한히 많은 사고를 창조하게 해 준다. 우리는 현재,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처리하고 이해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 본질적인 장점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 (33p)

프루스트가 독서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사고를 도출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문장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것이 사뭇 사실이라고 느껴진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욕망을 주는 것뿐인데 우리는 작가가 답을 가르쳐 주길 기대한다. 그 욕망이란 작가의 지극한 예술적 노력으로 완성된 지고의 미를 관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떠오를 수 있따. 그런데 진실은 그 누구에게서도 전수받을 수 없으며 오직 우리 스스로 창조해 내야 한다는 의미의... 법칙에 의해 그들의 지혜의 끝은 곧 우리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4p)

프루스트에 의하면 "독서의 목적이 작가의 생각을 초월해 훨씬 더 자율적, 변형적이고 결국 문서화된 텍스트와 별개인 독자적 사고로 옮겨간다는 점이다" 라고 저자는 결론 짓습니다.

그리고나서 저자는 책의 뒷 부분에서 다룰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서 1장을 마무리 합니다.

2장에서는 고대 문자의 역사와 그 문자 체계들을 사람의 뇌가 어떻게 인지하였을 지를 살펴봅니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지만, 굳이 여기서 요약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3장에서는 2장의 문자의 역사를 이어 가면서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발명'에 방점을 두어서 설명을 해나갑니다. 그리스 알파벳은 모음을 상징하는 문자를 가지는 최초의 표음 문자 체계라 합니다. 그리스 인의 이 놀라운 발명 덕분에 이 그리스어 알파벳은 대부분의 인도-유럽어 알파벳과 언어 체계의 시초가 되었다 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한글에 대해서도 거의 한페이지에 걸쳐서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 알파벳과 한글과 같이 자음과 모음 상징이 별도로 존재하는 문자 체계는 '무엇보다 글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 매우 쉽게 학습할 수 있는 문자체계' 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이들에게는 문자소와 음소가 거의 완벽한 규칙에 의해 대응되는 완벽한 알파벳이 주어졌다. 그 결과, 그 아이들은 수메르나 아카드 또는 이집트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유창한 문해 능력을 습득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범위를 벗어난 이야기지만, 고대 그리스의 아이들이 남보다 빨리 유창한 언어 능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사고가 확장되어 위대한 그리스 고전 문화가 탄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102p)

상당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는 이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놀라운 아이러니가 되는 것은 정작 고대 그리스인들은 알파벳 교육에 대해서 모호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무려 400년 동안이나 그랬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리스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도로 발달된 구어 문화가 문자 문화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고 합니다. 특히 가장 격렬하게 의문을 제기한 인물은 소크라테스 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반대의 요지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문자 언어의 불가변성
구전 문화에서는 대화를 통해 진리에 접근해갈 수 있지만, 문어는 되받아 말하지 못한다. "문어의 이러한 불가변적 침묵이 소크라테스식 교육의 핵심인 문답식 대화 프로세스를 가로막는 요소였다." (108p) 침묵 뿐 아니라 문자 언어는 오해될 수 있다는 점 역시 지적되었습니다. 오해의 결과로 인해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 알게된 것처럼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 그래서 공허한 자만심만 낳게 되는 결과를 우려했다고 합니다. 

둘째, 기억의 파괴
소크라테스는 "열심히 암기하는 프로세스만으로도 충분히 엄밀한 개인의 지식 기반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렇게 쌓은 지식은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정제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문자가 기억의 '비방(recipe)'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잠재 인자라고 결론지었다. 문자를 사용하면 문화적 기억을 보전하는 데 확실히 더 유리하지만 그보다는 개인의 기억과 지식의 검토와 구현에서 그것이 하는 역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111p) 저자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언젠가 부터 중요한 내용을 외우는 일들을 줄여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신의 어머니만 해도 방대한 양의 시문학을 외우고 있어서 언제든지 상황에 맞는 글귀를 읊으신다고 합니다. 그런 면이 부족한 자신과 그 이후 세대로 삶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자리가 감소하여 그 능력이 감퇴될 경우,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이 될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집니다. 

셋째, 언어에 대한 통제력 상실
"소크라테스가 두려워한 것은 지시그이 과인과 그로인한 결과, 즉 피상적인 이해였다. 스승의 지도를 받지 못한 독서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돌이킬 수 없는 지식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이었다"고 합니다. "글은 적절한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렇지 않은 사람 앞에서 침묵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 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서는 '신판 판도라의 상자'였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세 가지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 보면서 그 이유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함의를 살펴봅니다. 그것은 저자가 아래와 같이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독서하는 뇌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2,000년도 더 된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문자문화에 반대하며 제기한 문제들이 21세기초의 걱정거리와 거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구전 문화가 문자 문화로 바뀌면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제기하는 위험성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걱정하던 내용이나 현재의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근심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우리는 현재 매우 중요한 전환기에 놓여 있따.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문자가 디지털 및 비주얼 문화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세가지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다보면, 실제로 그 이전의 풍성한 구전 문화에 대비하여 문자 문화가 지금도 나타내는 부정적인 면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매우 깊은 통찰력으로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문자 문화의 풍성함을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문자 언어라는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과 지식은 그 당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물결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가 세운 반대 논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를 소크라테스의 그 반대 이론을 글로 기록한 제자 플라톤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적은 사실 문자로 기록된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플라톤은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맞서 싸운 상대는 언어가 가진 변화 무쌍한 역량을 우리가 검토하지 못하고 그것을 '가능한 지적 능력을 총동원하여'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115p)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겪어 가고 있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지금 던져 봐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요지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깔고 2부를 시작합니다.

2부의 제목은 '뇌가 독서를 배우는 방법'입니다. 알파벳 체계를 아이들이 어떻게 학습하게 되는지를 차근차근 밝히고 있습니다. 2부는 별도의 글로 따로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마음 깊이 새겨 두면서 읽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며 교육에 대해서 고민하는 부모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3부의 제목은 '뇌가 독서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2부에서 소개된 아이들의 단계별 읽기 학습 양태가 나타나지 않거나, 일반적인 경우보다 느리게 진행되는 아이들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러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증상을 통칭해서 '난독증' 이라고 하며, 이 난독증의 원인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바를 2부의 내용을 토대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비로소 저자는 자신의 아들이 난독증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그제서야 저는 이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써내려갔는지 공감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상세하면서도 광범위한 범위는 그 간절함의 결과였고, 모든 행간에 그 간절함이 배어 있는 책이었습니다. 진정성이 배어 있다고나 할까요.

2부는 따로 정리하기로 하고, 일단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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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 대한민국 네티즌이 열광한 KBS 화제의 칼럼!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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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 보이는 경제 현상을 간결하고 명징하게 풀이한다.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저자의 염려가 가슴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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