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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18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스포 없이는 쓸 수 없을 것 같지만, 최대한 직접적인 스포는 자제했습니다.)
인생...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제된 회상 체의 문제는 도리어 더 무겁게 제 감정을 쿵쿵 치더군요. 특히 유칭과 펑샤의 대목에서는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면서 마음이 뜯겨나가는 듯 했습니다.
저자는 이 소설을 조금은 색다른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듣는 회상 형식입니다.
놀고 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는 이 소설의 '나'는 지방을 떠돌다가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납니다. 삶을 달관한 듯한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푸구이의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수십년의 이야기를 더운 여름날 석양무렵까지 듣게 됩니다.
작가는 그렇게 이 소설의 이야기를 '회상'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달관한 모습으로 나름 유쾌하게 소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밭을 갈던 그 노인의 이야기는 고난과 슬픔, 그리고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난에 유익이 있다고도 합니다. 전 고난에 원래는 유익 따위란 없다고 봅니다. 고생고생 해서 고난의 시기를 거쳐 나오고나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면 안되니까, 뭐라도 건져야 하니까, 그래서 굳이 뭔가 하나 붙잡는 것을 가지고 '유익'이라고 표현할 뿐이지요. 표현 상 '유익'이지, 실질적으로는 그런건 없다입니다. 고난을 겪지 않고서 얻을 수 있었다면 제일 좋겠지요. )
푸구이 노인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정말 악인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국민당군의 중대장,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한 의사 정도. 이 건은 절대 용서가 안되었겠지요.
도박에 온 재산을 날리고온 푸구이를 보는 가족들의 태도는 생각보다 온화합니다. 정말 그랬을지는 독자 입장에서 한 번 의심해 볼만도 합니다. ^^ 어찌되었건 푸구이 노인은 회상을 통해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 온화하고 관대하게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양아치 건달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 한가지 사례로 자신의 온 재산을 속임수 도박으로 채간 룽얼에 대해서도 나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마 그 이후에 룽얼이 결국 죽게 되는 것으로 인해 감정이 많이 정리된 상태에서 회상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난해 진 뒤에도 스스로의 참을성 없는 성격, 쉽게 화를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푸구이 자신의 성격은 그대로 묘사를 하지만, 자녀와 아내를 묘사할 때에는 그저 아름답게만 묘사합니다.
펑샤, 푸구이의 딸입니다. 펑샤라는 이름을 쓰기만 해도 마음 가득 슬픔이 올라오는 군요.
읽는 독자들도 마음이 이리 찢어지는데...
자전, 이런 현모양처가 어디 있습니까...
유칭, 달리기를 잘하던 소년
얼시, 가장 완벽한 사위... 자신의 부족함을 통해 도리어 펑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행운아.
쿠건, 가난해서 잘 먹지 못했던 아이...
ㅠㅠ
이름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수십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독자도 푸구이의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부족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펑샤와 유칭을 보고,
죄지은 남편의 마음으로 자전을 보고,
사위가 고맙기만한 장인의 마음으로 얼시를 보고,
혼자 남은 손주가 불쌍한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쿠건을 보고.
그 모든 시선의 관점에 어느새 독자도 같이 서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회상이다 보니까, 부드럽고 온화하게 흘러갑니다. 격한 감정의 순간에도 문체는 그 톤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뭔가에 사로잡힌 듯, 그렇게 푸구이의 회상에 빠져들어갑니다. 수십년의 이야기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4장이 끝나는 부분, 문득 주변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관점이 변화했음이 느껴집니다. 퇴근길에 읽으면서 집에 도착하면 딸아이를 꼭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아주면서 눈물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놀고 먹는 좋은 직업을 얻었다는 이 소설의 화자도 그러한 모양입니다.
"내 맞은편에 앚은 이 노인은 이런 어조로 십여 년 전에 죽은 아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음 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마치 풀 한 포기가 바람에 흔들거리듯, 나는 평화로운 마음이저 멀리서 꿈틀대는 걸 보았다.
사람들이 떠나간 들판은 막힘없이 널찍하게 펼쳐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광활하고,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이 석양 속에서 물처럼 빛살을 출렁였다."
소설의 화자가 노인을 만날 무렵, 푸구이가 여러 다른 이름들로 누굴 부르는지 의아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 노인이 다시 그 이름들을 부르며 소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유칭과 얼시는 한 묘를 갈았고, 자전과 펑샤는 칠 할에서 팔 할 정도 갈았고, 쿠건은 아직 어려서 반 묘를 갈았단다...."
그렇게 매일 같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 노인은 그 세월들을 살아온 거네요. 그러니, 그 오래 전 일들을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게 당연하겠지요. 매일 같이 그 과거의 한 조각을 붙잡고 회상하면서 그 기억으로 퇴행하기 보다, 그 기억들로 인해 도리어 힘을 얻고서 자신에게 닥쳐왔던 고난이 준 고통을 초월하여 오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달관의 경지에 올라선 게 아닐까 합니다.
3개나 되는 서문 중 두번째 서문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 '살아간다는 것'이란 말이 가지는 힘은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 문장이 확 다가왔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가지는 그러한 의미는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어떤 책에서 충격적으로 한 번 접한 적이 있고, 그 이후 종종 제 사고를 지배하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또 이 작품이 "눈물의 넓고 풍부함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 문장은 절반만 동의하고 싶은 문장입니다. 왜 그러한지를 저자가 서문에 쓴 바로 다음 문장과 이어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의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것 까지도 이야기 한다. 독자는 바로 이러한 순간에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 절망이란 존재의 여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 스스로를 그 절망에 내어주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겁니다. 작가의 표현은 작가가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까지 내포하게 되는 듯 합니다. 춘성은 절망으로 인해 자살했습니다. 스스로 절망을 표현하고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언뜻 봐서는 모순입니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절망이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는 것, 내가 내 마음을 절망에 내어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만, 그 이외의 다른 것들도 위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위에 얹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역자 해설에서 역자가 춘성의 이야기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부분이 이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충격적으로 접하게 한 책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전태일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용기를 잃고 절망의 변두리에서 방항하게 됩니다. 서울의 어떤 길가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팔려는 짐을 잔뜩 지고 만원 버스를 타기 위해 애쓰던 어떤 아주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삶의 의지 앞에 전태일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힘을 내어 일어서게 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가지는 힘은 결국 '삶에의 의지'인 것 같습니다. 절망의 낭떠러지 끝에서도 꽉 붙잡고 버티는 삶'이 가지는 그 힘. 하지만, 전태일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그 '삶의 의지'라는 의미 위에 자신의 다른 의미를 얹었습니다.
푸구이는 젊은 날의 방탕한 삶에서 돌아온 뒤로 끔찍하게 가족을 위합니다. 때로 지나치게 화를 내서 가족들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만, 푸구이의 삶은 가족을 위한 헌신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자전도 유칭도 펑샤도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이러한 모습이 저절로 포함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펑샤와 얼시의 사랑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이 역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다 포괄되지 않는 또다른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전은 풀리지 않는 원한에도 불구하고 춘성을 격려합니다. 고통 가운데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 거죠. 용서는 아직 멀었을 지라도, 공감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춘성은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 위에 이미 많은 의미를 얹고 살아간다고 보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지지하는 기반이면서, 그 모든 것을 추동하는 힘이기도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고난과 고통을 버텨내는 힘은 그렇게 서로 헌신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서로 공감의 범위가 작지 않은 이웃들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이 작품은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살아간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미로 표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는 시점에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