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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스웨덴에 사는 90넘은 도리스의 이야기입니다. 현재 시점의 도리스는 많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죽음을 예감하는 그는 여동생의 손녀인 제인에게 남기는 형식으로 자기 수첩에 기록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90년이 넘는 삷의 기간 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기억이 남는 사람들이겠지요. 좋았던 관계도 있고, 끔찍했던 관계도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같이 마음 깊숙히 아픔으로 남은 관계도 있고, 앨런이나 예스타 같이 평생을 두고 기억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다음에 '사망'으로 나옵니다. 처음 그 '사망'이란는 문구를 봤을 때 철렁했습니다. 그 '사망'이라는 문구는 그 이후로 계속 나옵니다. 나올 때 마다 철렁 합니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문구는 아니었습니다. 각 캐릭터마다 저마다의 기쁨과 아픔이 있는, 각자의 삶이 있는 구체적인 사람인데,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갑니다. 때로는 사고로, 때로는 병으로. 

지금 주변의 사람들을 이런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을까요? 결국 이렇게 모두의 이름에 '사망'이란 코멘트가 달릴 건데. 이 책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그렇게 직면하게 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공감의 문명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연민으로 서로를 돕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번창하기 위해 벌이는 서로의 분투를 계속 축하함으로써 우리가 일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공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순간임을 잠시라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계 비용 제로 사회 16장]

우리가 일시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결국 우리 주변사람들과 보냈던 즐거운 순간들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서로에게 감사하고, 아끼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누리는게 그런 행복이겠지요. 

현실의 도리스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쇠약해져 있습니다. 결국 그는 넘어지게 되고, 뼈가 부러져서 입원하게 됩니다. 

책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현실의 도리스의 삶을 보면서, 과거의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90이 넘는 삶을 산다는게 어떤 것인가 차차 깨달아 갑니다. 내 몸은 점점 약해지면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지는데, 내 주변의 소중했던 사람들은 하나씩 세상을 떠나서 이제 남은 사람도 얼마 없습니다. 도리스의 경우는 이제 제인과 그 가족들만 남았지요.

대략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책을 읽으며, 2차 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과 혼란의 시대와 그 이후의 평화의 시대를 그 스웨덴 여인과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픈 마음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이 책의 결말부는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히 억지스러운 '신파'입니다. 뭐 이런 우연의 일치가.. 어떻게 두 사람 모두 90살 때까지 건강 잃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을 수 있나요. 다른 소설이라면 이런 결말부 설정은 짜증이나 분노를 이끌어 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쯤 오면, '뭐 이런 '신파'도 좋다. 어차피 픽션인데, 픽션에라도 이런 결말을 바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을 간직해온 사람이 주는 감동이 이런 거구나'라는 그 간접 체험을 위해서라면, 뭐 좋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리얼라이프는 때로는 이보다 더 한 우연의 일치와 신파도 보여주지 않던가요.

지난 12월에 제 친할머님이 돌아겼습니다. 1918년 10월생이시니 102년을 넘게 사셨네요. 할머님의 외로움과 고통이 이러한 것이라고 짐작하던 바가 도리스의 경우와 비슷했습니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무너져 가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미 세상을 떴습니다. 너무 외롭죠. 아들딸이나 손자손녀가 채울 수 없는 삶의 자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부분이 과거에 다 묻혔습니다. 

1947년, 할머님 나이 만 29세라는 젊은 때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남은 세 남매를 온전히 키워내기까지 1947년 이후의 할머님 삶이 어떠했을지 풍요의 시대에 자라난 저로서는 짐작조차할 수 없습니다. 이 풍요의 시대의 기초를 놓으신 할머니 세대의 삶을 저부터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뒤늦을 깨달음이 몰려왔습니다. 뼈저린 아픔으로 몰려왔습니다.

도리스의 수첩에 등장하는 첫 인물은 도리스의 아버지였습니다. 왜 저는 할머님의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할머님의 어머님은 어렸을 때 많이 뵈었었지만, 그 분의 삶의 이야기는 잘 모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많이 물어보고 기록으로 남겼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뒤늦은 회한으로 남더군요.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던 이 책이 그런 의미에서 쉽지 않았습니다만,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또다른 통찰을 얻은 것 같아서 소중한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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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하늘의 물레 환상문학전집 33
어슐러 K. 르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어슐러 르 귄의 책은 처음이었습니다.
어스시 시리즈도 구해 놓고 언젠가 읽으리라 소장만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 <하늘의 물레>는 뭔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듯 했습니다.

내용은 가볍지만은 않네요.

꿈을 꾸고 나면 그 꿈의 내용대로 주변의 세계가 바뀌어 있게 되는 주인공.

그 능력을 알고 좋은 뜻으로 이용하려 하는 정신과 의사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라 '좋은 뜻'이 있을 수 없다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에 자신의 의지를 여러가지 논리로 관쳘하려는 의사

주인공이 만나게 된 운명의 그녀는 주인공을 다음과 같이 바라보게 됩니다.

무한한 가능성, 구속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조각되지 않은 존재의 한계 없고 절대적인 완전성이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이면서, 모든 것인 존재. 요컨대 그녀는 그를 그렇게 보았고, 그러한 통찰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그의 힘이었다. 그는 그녀가 지금껏 알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결말은 주인공만큼 '강하지'못했던 의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주인공만큼 강하지 못했던 거죠. 작가의 관점에서.

여러가지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어슐러 르 귄은 역시 다른 작품들이 기대가 되게하는 작가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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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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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황윤영, 푸른책들

이 책은 총 2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단편집입니다. 지난 6월에 커트 보니것의 <세상이 잠든 동안>을 읽었던 지라, 이 작가의 작품이, 특히 단편집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세상이 잠든 동안> 에서 보다 전반적으로 50년대에서 6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의 분위기를 더 잘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50~60년대의 상황을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조금 더 잘 이해가 되는 단편들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국가들과의 냉전 체제가 굳어지던 시기인 50년~60년대인지라, 인류를 종말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과학기술의 오남용에 대한 두려움, 공산주의의 과도한 평등주의에 대한 거부감, 과도한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감 등이 배어 있는 단편들이 있었습니다.

짧은 단편이지만,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생생합니다. 전혀 다른 시간대와 장소의 사람들인데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 그만큼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며, 인간 본성의 측면들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됩니다. 


커트 보니것은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에 있었다고 합니다. 드레스덴. 

독일의 약 8개월에 걸친 런던 대공습때 약 4만여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에서는 단 3일만에 2만5천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거대한 화염폭풍이 몰아쳐서 일단 산소부족으로 기절했다고들 하니, 얼마나 끔찍했을지. 그의 반전 의식은 그때 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문명의 산물과 그 미래에 대한 시니컬한 관점도 그렇구요.

25개의 단편에 대한 느낌을 간략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이걸 적으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았을까 순위를 매겨보려 했으나 포기했습니다. 25개중 대부분의 작품들이 묵직하게 뭔가를 느끼게 하고, 그러면서 씁쓸한 유머를 느끼게 하는 수작들입니다.


1. 내가 사는 곳: 읽으면서 케이프 코드란 곳이 어딘지 구글맵으로 들여다 보았습니다. 참 희안한 지형이더군요. 초승달 모양으로 바다로 돌출된 반도였습니다. 그 동네가 어떤 곳인지 가벼운 유머코드를 섞어서 묘사하고 있네요.

2. 해리슨 버저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사회를 그리는 (굳이 분류하자면) SF소설입니다. 과도한 평등주의가 가져올 페해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였습니다. 결말은 쇼킹하네요...

3.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 주요 등장인물이 좀 과도하게 정형화된 느낌은 있지만, 이 또한 의도적인 설정인 것 같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아픔과 단점을 보완하게 되는 과정이 참신하게 그려져 있네요. 희곡 작품들을 그렇게 활용하다니...이 단편의 제목으로 사용된 대사가 초반부와 종결부에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졀묘했습니다.

4.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역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린 소설입니다. 의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하고, 인구가 과도하게 증가한 미래의 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5. 영원으로의 긴 산책: 두 남녀가 오랫만에 만나는 짧은 순간을 그린 단편입니다. 조금씩 변화해 가는 감정의 묘사가 압권입니다. 로맨틱 단편의 끝판왕이랄까요~

6. 포스터의 포트폴리오: 이 역시 인간성의 한 단면일까요?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더 중요하다는...

7. 유혹하는 아가씨: 1956년에 여성에게 이 정도의 발언권을 준 것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을까요? 시대를 감안하고 보지 않으면 조금 구닥다리 같이 보이는 구석도 없지 않아 있네요.

8. 모두 왕의 말들: 소름끼치는 체크 게임이었습니다. 그 안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었기에 더욱 그랬었는지도 모르지요. 게임에 묘사된 아시아 본토는 베트남인 듯 합니다. 베트남은 야만적으로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신사적으로 그리는 것은 무언가 불편한 점은 있네요.

9. 톰 에디슨의 털복숭이 개: 발상이 신선하면서도 유머감각이 넘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SF로 분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커트 보니것에게도 이런 입담 강한 재담가로서의 면모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10. 새 사전: 이 단편은 소설이 아니라, 평론인 것 같습니다. 당시의 세상에 대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얘기들을 들려주지만, 영어에 관심이 없다면 지루할 것 같습니다.

11. 옆집: 하나의 타운하우스에서 두 가정이 사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다가구 주택이 워낙 흔하고, 아파트 생활이 일상이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듀플렉스 등의 다가구 주택은 가난의 상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50년대에는 그게 가난도 아니었겠지요.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그러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그린 듯합니다. 절묘하게 꼬여버린 소년의 처지가 막판에 웃음을 주네요.

12. 한결 위풍당당한 저택: 끝없는 허영, 그리고 환상. 거의 돈키호테를 연상시키는 정도 였습니다.

13. 하이애니포스트 이야기: 케네디 시절의 이야기네요. 민주당의 젊은 지도자 케네디에 대해서,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빙 둘러서 하고 있습니다

14. 난민: 전쟁 고아라고 불러야 할 어떤 소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전쟁으로 단련되었을 강심장의 군인들의 여린 마음도... 울고... 저도 읽다가 울컥했습니다.

15.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초능력을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작가의 반전의식이 얼마나 강렬한지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단편의 출간연도가 1950년이라는 것도 참... 의미심장하네요.

16. 유피오의 문제: 과학 기술이 마약이 될 때, 그리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또다른 인간의 욕망을 그린 소설입니다.

17. 당신의 소중한 아내와 아들에게로 돌아가: 이 단편에서 최종 승자는 결국 몇 마디 대사도 나오지 않던 ‘그녀’ 인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을 품어 안는 강력한 멘탈에서 나오는 유머의 소유자인 그녀.

18. 공장의 사슴: 거대한 공장은 미국의 산업화를 상징하지만, 또 그만큼 비인간적인 조직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인공이나 사슴이나 그 공장에서는 얼른 도망치는게 살 길이었겠지요.

19. 거짓말: 미국이 학벌에 대해서는 우리보다는 유연하긴 하지만, 특정 학교 출신이냐 아니냐는 뭐..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들이 초반에는 속물스럽고 어리석게 보여도 마지막에는 그래도 합리적이긴 하네요. 애를 잡지 않는 걸 봐서도...

20. 입을 준비가 되지 않은: 특이한 형태의 신인류의 얘기입니다. 이건 무슨 안드로이드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고... 유체이탈한 양서인이라니... 

21. 아무도 다룰 수 없던 아이: 상처 입은 어린 소년을 다시 거둬들이는 얘기는 흔한 소재이긴 합니다. 다만 그 과정, 그 방식이 어떠하냐는 것일 텐데요. 이 단편에서 나타난 방식은 저로서는 생경합니다. 예상했던 바와 전혀 달랐습니다. 대략... “이제 헬름홀츠는 사람들과 그들의 보물들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문장과 그 이후 주인공의 액션에서 단서가 좀 있을 듯 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야. 너나 나나 우리는 허공을 딛고 있는 것이야. 그럴 수록 자신을 사랑하고...’ 이런 얘기가 아닌가 싶네요.

22. 유인 미사일: 미소의 냉전 체제가 강화되어 가던 무렵인 1958년에 나온 소설입니다. 우주인이 되어야 했던 소련의 어떤 젊은 과학자의 이야기, 미국의 어떤 젊은 비행사의 이야기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그리고 그와 지극히 닮은 국가우선주의는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개인’이 존중받지 않는 ‘집단’은 모두를 위한 집단이 아니라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명분에 불과합니다. 커트 보니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들로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반전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23. 에피칵: 인공지능이 인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따라할 거라는 상상은 이전부터 많이 했었습니다. 20세기초의 공상과학 영화에도 그런 주제들이 있었던 것 같구요.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의 HAL도 그 예중 하나지요. 여기 또 하나의 사례가 있었네요. 이 인공지능도 인간을 능가하는 시적 재능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공감능력까지 갖추었네요. 

24. 아담: 네히트만 집안에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부부에게 찾아온 한 생명. 자기만의 일에 바쁜 세상은 그 감격을 알아주지 않지만, 작가는 그 아기가 ‘아담’이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시작, 풍요에의 약속을 담지한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25.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 극도로 발달한 의학 기술과 그로 인한 인간의 수명 연장. 수명만 연장되는 것 뿐 아니라 늙는 것도 늦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끝이 없는 인간의 욕심은 이런 세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상상해 보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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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 속에서
조 월튼 지음, 김민혜 옮김 / 아작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들 속에서 - 조 월튼/김민혜/아작

책을 통해, 책으로 연결된 만남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소녀의 이야기
특히 SF를 통해서... 특이한 설정이지만, 맘이 많이 와 닿는 것은... 
저도 SF/환타지 애독자여서 일 겁니다. 


마법과 요정.. 마치 정말 있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난 꽃들이 녹아서 없어지고 잔물결들이 퍼져나가고, 공장은 무너져 폐허가 되고,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무들과 담쟁이덩굴이 거길 뒤덮고, 웅덩이는 진짜 물로 변하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웅덩이 물을 마시고, 이윽고 요정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거길 궁전으로 삼을 줄 알았어.” 


아래는 너무나 동의가 되는 문장이네요. 전 책 쓰는 건 포기지만.. 그런 책은 여전히 읽고 싶습니다.

세상엔 끔찍한 일들이 있고,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엔 위대한 책들도 있다. 어른이 되면, 너무 따뜻하진 않은 날 긴 의자에 앉아 읽을 수 있는 책, 읽으면서 여기가 어딘지 몇 시인지 완전히 잊고 자기 머릿속 생각보단 책 속에 더 빠지게 되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다. 딜레이니나 하인라인이나 르 귄의 작품 같은 책을 쓰고 싶다. 


아래의 문장.. 너무 확 들어옵니다. SF뿐 아니라, 모든 문학이 다 그렇지만, SF는 특히나 더 상상력을 자극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더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SF에 대해 항상 좋아해 온 점들 중 하나는, SF를 보면 여러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을 여러 각도에서 보게 된다는 거다. 


소녀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꿋꿋하게 이겨내려 합니다. 그래서 

장미 그림에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란 교훈이 적혀 있다. 사실 난 이 말이 꽤 맘에 든다. 숨 쉬는 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톨킨의 책들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반지의 제왕》을 읽는다는 것은 그곳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사막에서 마법의 샘을 발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안엔 모든 것이 있다. (‘욕망만 빼고’라고 다니엘은 말했다. 하지만 ‘뱀 혓바닥’이 있다.) 《반지의 제왕》은 영혼을 위한 오아시스이다. 지금도 난 언제라도 가운데 땅으로 물러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책에 어찌 감히 무언가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70년대에 영국 시골에서는 어른들도 포함된 북클럽에서 15세 소년이 모임도 인도합니다. 그것도 '잘'

휴는 모임을 굉장히 잘 이끌었고, 화제가 빗나가면 부드럽게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소녀는 자신의 전제를 때론 재검토하고 다른 각도로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고모들이 사악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지? 왜 난 그렇게 가정하지? 어쩌면 약간의 마법만 뺀다면 고모들은 딱 보이는 그대로일 수도 있고, 나에 대해서도 빤한 것들만 빼곤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다. 어쩌면 고모들이 원하는 건 날 착한 조카로 만드는 게 다일지도 모른다. 


프랭크 허버트도 얘기합니다.
특히 《듄》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다. 아라키스는 정말 굉장한 세계이다. 마치 여러 문화가 섞여 있는 진짜 세계 같다. SF에서는 흔히 볼 수 없지만, 문화 충돌은 아주 흥미롭다. 프레멘을 만나러 사막에 가는 폴은 다른 문화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며, 양쪽 모두 비밀이 있다. 다니엘은 이 부분에 관해 얘기하며 아주 생기가 넘쳤고, 위스키를 한 잔 따르긴 했지만 술은 조금 홀짝이기만 했다. 물론 담배는 내내 피워댔다. 


중간중간 픽픽 웃게 만드는 유머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건 헛된 게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 미래의 언젠가를 위한 준비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제 난 절대로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이기거나 올림픽에서 달리지 못하겠지만 (“윔블던엔 한 번도 쌍둥이가 나온 적이 없었어….”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새로운 책, 기대하던 그 책을 가만히 가지고만 있는 기분이 이런 거였습니다. 
글자도 읽지 않은 완전 두꺼운 하인라인 신간을 가지고 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정말 뿌듯하다. 가만히 날 기다리는 저 책을 생각할 때마다 날아오를 것 같고 행복하다. 

그래서 읽지도 않는 책을 시쩍하면 지르나 봅니다. 단지 그 기분 때문에..ㅎㅎ


<높은 성의 사나이>와 <희년을 선포하라>는 대체 역사 관련한 리스트에서는 늘 등장하네요.
《파반》뿐 아니라 브루너의 걸작 《무수한 시간들》과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난 아직 읽지 않았다)와 워드 무어의 《희년을 선포하라》와 평행 역사란 개념 자체에 대해 토론했다. 또한 《과거 속으로》와 《타임 패트롤》과 윔이 극찬한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웨섹스의 꿈》(반드시 주문!)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책을 통해 소녀의 주변 사람들도 서로 연결됩니다.
우린 중국 식당으로 갔고, 지난번과 거의 똑같은 메뉴를 시켜 먹었다. 윔과 나는 서투르게 젓가락질을 하며 주로 실버버그에 대해 얘기했고, 이야기는 화요일 밤 《파반》 토론 때 얘기했던 모든 것으로 하염없이 탈선했다. 다니엘은 《웨섹스의 꿈》만 빼고 안 읽은 책이 없었다. 나는 다니엘과 윔이 서로에게 감명받았다는 걸 알았고, 이 점에 아주 즐거우면서 또 아주 기분이 묘했다. 다니엘이 화장실에 갔을 때 윔이 내 손을 잡았다. “난 네 아버지가 맘에 들어.” 윔은 말했다. 


소녀가 줄곧 맘에 가지고 있던 그 뭔가의 실체는 사실 '죽음'이었습니다.

죽는 문제는, 음, 정말로 죽음에 관해선, 자기가 언제라도 정말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에는 차이가 있다. 난 알고, 윔은 모른다. 그게 다다. 난 우리에게 다가오는 헤드라이트들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던 그 끔찍한 순간을 그 누구도 겪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자길 죽일 수 있는 위험한 것들이 있긴 해도 나머지는 모두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수도 있었음을 아는 그 위험한 순간은 지나쳤지만, 아직도 길을 건너고 있다 


책을 통해 길러진 사고의 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여러 각도로 보는 힘.삶의 복잡한 층위를 모호함 보다는 풍성함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힘.책을 통해 연결되어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제자리에 자리잡은 self-esteem 의 단단함.

차근 차근 형성되어 온 소녀의 이른 강점들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납니다.

마지막 장은 아름답고, 처연하지만, 저자는 그동안 비축해 온 힘을 다 풀어 놓아 강력하게 휘몰아 칩니다. 중반부의 유사한 상황에서 제대로 지탱하지도 못했던 소녀는 이제 당당하고 차분합니다. 

(이 장면의 묘사는 <앰버 연대기>의 느낌이 물씬 납니다. )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어지는 이 선언.... 

내가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바뀔 것이고 상상도 안 될 만큼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살 것이다. 난 살아있을 것이다. 난 내가 될 것이다. 난 내 책을 읽을 것이다. 절대로 내 책들을 물속에 버리거나 내 지팡이를 꺾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배울 것이다. 결국 나는 죽음에 이를 것이고, 죽을 것이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 혹은 천국, 혹은 그게 뭐든 사람이 죽으면 겪게 되어 있는 알 수 없는 일을 맞을 것이다. 난 죽을 것이고 썩어서 내 세포들을 다시 패턴 속에서 생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 순간 내가 어떤 행성에 있든지 간에. 

삶은 그런 것이고, 난 그렇게 살 것이다. 


마음에 쿵 하고 울려옵니다.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단순한 SF/환타지 쟝르소설이 아니라, 상당한 수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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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18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스포 없이는 쓸 수 없을 것 같지만, 최대한 직접적인 스포는 자제했습니다.)

인생...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제된 회상 체의 문제는 도리어 더 무겁게 제 감정을 쿵쿵 치더군요. 특히 유칭과 펑샤의 대목에서는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면서 마음이 뜯겨나가는 듯 했습니다.

저자는 이 소설을 조금은 색다른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듣는 회상 형식입니다. 

놀고 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는 이 소설의 '나'는 지방을 떠돌다가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납니다. 삶을 달관한 듯한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푸구이의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수십년의 이야기를 더운 여름날 석양무렵까지 듣게 됩니다.

작가는 그렇게 이 소설의 이야기를 '회상'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달관한 모습으로 나름 유쾌하게 소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밭을 갈던 그 노인의 이야기는 고난과 슬픔, 그리고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난에 유익이 있다고도 합니다. 전 고난에 원래는 유익 따위란 없다고 봅니다. 고생고생 해서 고난의 시기를 거쳐 나오고나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면 안되니까, 뭐라도 건져야 하니까, 그래서 굳이 뭔가 하나 붙잡는 것을 가지고 '유익'이라고 표현할 뿐이지요. 표현 상 '유익'이지, 실질적으로는 그런건 없다입니다. 고난을 겪지 않고서 얻을 수 있었다면 제일 좋겠지요. )

푸구이 노인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정말 악인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국민당군의 중대장,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한 의사 정도. 이 건은 절대 용서가 안되었겠지요. 

도박에 온 재산을 날리고온 푸구이를 보는 가족들의 태도는 생각보다 온화합니다. 정말 그랬을지는 독자 입장에서 한 번 의심해 볼만도 합니다. ^^ 어찌되었건 푸구이 노인은 회상을 통해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 온화하고 관대하게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양아치 건달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 한가지 사례로 자신의 온 재산을 속임수 도박으로 채간 룽얼에 대해서도 나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마 그 이후에 룽얼이 결국 죽게 되는 것으로 인해 감정이 많이 정리된 상태에서 회상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난해 진 뒤에도 스스로의 참을성 없는 성격, 쉽게 화를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푸구이 자신의 성격은 그대로 묘사를 하지만, 자녀와 아내를 묘사할 때에는 그저 아름답게만 묘사합니다. 

펑샤, 푸구이의 딸입니다. 펑샤라는 이름을 쓰기만 해도 마음 가득 슬픔이 올라오는 군요. 
읽는 독자들도 마음이 이리 찢어지는데...

자전, 이런 현모양처가 어디 있습니까...

유칭, 달리기를 잘하던 소년

얼시, 가장 완벽한 사위... 자신의 부족함을 통해 도리어 펑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행운아.

쿠건, 가난해서 잘 먹지 못했던 아이...

ㅠㅠ

이름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수십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독자도 푸구이의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부족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펑샤와 유칭을 보고, 
죄지은 남편의 마음으로 자전을 보고, 
사위가 고맙기만한 장인의 마음으로 얼시를 보고, 
혼자 남은 손주가 불쌍한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쿠건을 보고. 
그 모든 시선의 관점에 어느새 독자도 같이 서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회상이다 보니까, 부드럽고 온화하게 흘러갑니다. 격한 감정의 순간에도 문체는 그 톤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뭔가에 사로잡힌 듯, 그렇게 푸구이의 회상에 빠져들어갑니다. 수십년의 이야기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4장이 끝나는 부분, 문득 주변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관점이 변화했음이 느껴집니다. 퇴근길에 읽으면서 집에 도착하면 딸아이를 꼭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아주면서 눈물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놀고 먹는 좋은 직업을 얻었다는 이 소설의 화자도 그러한 모양입니다.

"내 맞은편에 앚은 이 노인은 이런 어조로 십여 년 전에 죽은 아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음 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마치 풀 한 포기가 바람에 흔들거리듯, 나는 평화로운 마음이저 멀리서 꿈틀대는 걸 보았다. 

사람들이 떠나간 들판은 막힘없이 널찍하게 펼쳐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광활하고,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이 석양 속에서 물처럼 빛살을 출렁였다."

소설의 화자가 노인을 만날 무렵,  푸구이가 여러 다른 이름들로 누굴 부르는지 의아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 노인이 다시 그 이름들을 부르며 소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유칭과 얼시는 한 묘를 갈았고, 자전과 펑샤는 칠 할에서 팔 할 정도 갈았고, 쿠건은 아직 어려서 반 묘를 갈았단다...." 

그렇게 매일 같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 노인은 그 세월들을 살아온 거네요. 그러니, 그 오래 전 일들을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게 당연하겠지요. 매일 같이 그 과거의 한 조각을 붙잡고 회상하면서 그 기억으로 퇴행하기 보다, 그 기억들로 인해 도리어 힘을 얻고서 자신에게 닥쳐왔던 고난이 준 고통을 초월하여 오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달관의 경지에 올라선 게 아닐까 합니다.

3개나 되는 서문 중 두번째 서문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 '살아간다는 것'이란 말이 가지는 힘은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 문장이 확 다가왔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가지는 그러한 의미는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어떤 책에서 충격적으로 한 번 접한 적이 있고, 그 이후 종종 제 사고를 지배하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또 이 작품이 "눈물의 넓고 풍부함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 문장은 절반만 동의하고 싶은 문장입니다. 왜 그러한지를 저자가 서문에 쓴 바로 다음 문장과 이어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의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것 까지도 이야기 한다. 독자는 바로 이러한 순간에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 절망이란 존재의 여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 스스로를 그 절망에 내어주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겁니다. 작가의 표현은 작가가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까지 내포하게 되는 듯 합니다. 춘성은 절망으로 인해 자살했습니다. 스스로 절망을 표현하고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언뜻 봐서는 모순입니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절망이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는 것, 내가 내 마음을 절망에 내어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만, 그 이외의 다른 것들도 위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위에 얹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역자 해설에서 역자가 춘성의 이야기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부분이 이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충격적으로 접하게 한 책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전태일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용기를 잃고 절망의 변두리에서 방항하게 됩니다. 서울의 어떤 길가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팔려는 짐을 잔뜩 지고 만원 버스를 타기 위해 애쓰던 어떤 아주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삶의 의지 앞에 전태일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힘을 내어 일어서게 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가지는 힘은 결국 '삶에의 의지'인 것 같습니다. 절망의 낭떠러지 끝에서도 꽉 붙잡고 버티는 삶'이 가지는 그 힘. 하지만, 전태일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그 '삶의 의지'라는 의미 위에 자신의 다른 의미를 얹었습니다. 

  푸구이는 젊은 날의 방탕한 삶에서 돌아온 뒤로 끔찍하게 가족을 위합니다. 때로 지나치게 화를 내서 가족들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만, 푸구이의 삶은 가족을 위한 헌신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자전도 유칭도 펑샤도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이러한 모습이 저절로 포함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펑샤와 얼시의 사랑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이 역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다 포괄되지 않는 또다른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전은 풀리지 않는 원한에도 불구하고 춘성을 격려합니다. 고통 가운데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 거죠. 용서는 아직 멀었을 지라도, 공감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춘성은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 위에 이미 많은 의미를 얹고 살아간다고 보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지지하는 기반이면서, 그 모든 것을 추동하는 힘이기도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고난과 고통을 버텨내는 힘은 그렇게 서로 헌신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서로 공감의 범위가 작지 않은 이웃들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이 작품은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살아간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미로 표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는 시점에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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