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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갈등 -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에서 살아남는 법
아만다 리플리 지음, 김동규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2년 9월
평점 :
제목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극한 갈등'. 영어 제목은 'High Conflict'네요.
부제는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에서 살아 남는 법' 입니다.
High Conflict는 책 내용 중에서는 '고도 갈등'으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고도 갈등'은 이 책에서 '좋은 갈등'과 다르다고 합니다. 갈등이 다 나쁜 건 아니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각이 다를 수 있기에 견해차로 인한 의견 불일치가 갈등으로 발전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갈등의 건강한 해결 방식은 우리가 다 함께 발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며, 그 과정 중에 스트레스와 분노를 동반하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에 이르게 하고, 일방적인 승리나 패배와는 다른 결과로 이끕니다.
반면 '고도 갈등'이란 '선과 악의 구도가 뚜렷이 형성되어 '우리'와 '그들'간의 반목으로 치닫게 된 갈등'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관계의 법칙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으며, '그들'과의 모든 관계가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된다고 합니다.
두뇌의 작동 방식도 달라진다 합니다. 점차 자기가 속한 진영, 또는 지지하는 진영의 우월성을 더 강하게 확신하게 되고, 상대방 편인 '그들'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갑니다. '그들'을 접하게 되거나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마음이 긴장되면서 분노 섞인 두려움이 밀려오게 됩니다.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우게 되고, 조금이라도 굴욕을 느끼게 되면 불에라도 덴 듯이 크게 문제 삼게 됩니다.
이런 고도 갈등 상황에 우리 자신이 빠지기도 하고, 주변의 다른 사람이나, 내가 속한 공동체나 집단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끊임없는 긴장 관계 속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도 갈등 관계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조차 그렇게 되곤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우리가 원하지 않던 상태인 '고도 갈등' 상황으로 어떻게 끌려 들어가게 되는 걸까요?
저자인 아만다 리플리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타임>지 기자 출신인 저자는 기자다운 방식으로 '고도 갈등'에 대해 취재하면서 몇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책을 내기 5년 전인 2016년에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케이스들을 찾아내고,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상황을 재구성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내용들을 끄집어 냅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케이스로 캘리포니아 해변 마을에서 일어난 갈등 상황을 차근차근 조명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게리 프리드먼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갈등 전문가였는데, 이 지역의 정치 문제에 뛰어들면서 고도 갈등에 스스로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갈등은 조용히 증폭되어가면서 결국 폭발에 이르게 됩니다. 저자는 이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하며, 처음부터 '우리'와 '그들'을 나누면서부터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저자가 두번째로 던지게 되는 질문은 '왜 어떤 갈등은 불꽃을 일으키며 폭력으로 비화하여 수세대에 걸쳐 지속되는데, 어떤 것은 갑자기 수그러 들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커티스 톨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놀랍게도 그는 시카고 갱단 두목 출신입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우상이었던 고교 농구 스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게 됩니다. 반대편 갱단의 소행이라고 짐작한 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무시무시한 복수극의 한가운데에서 수십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로 하여금 그러한 고도 갈등에서 벗어나게 한 건, 그가 자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자각과, 자신의 불운한 환경에 대해 보다 넓은 시야을 가지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갈등을 둘러싼 환경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고, 갈등 당사자와 직접 접촉하면서 짐작만 했던 속사정을 알게 되면서, 양자 구도로만 보였던 갈등이 그렇지 만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의 고도 갈등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합니다. 커티스는 시카고 갱단 사이의 농구대회를 조직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한 운동 경기를 통해서 갱단 사이의 갈등이 더 심한 폭력으로 번지지 않게끔 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세번째로 던지는 질문은, 그럼 어떻게 고도 갈등 상황을 탙출할 수 있는가 입니다. 실제로 고도 갈등 상황을 탈출하는 사람들,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타협을 하거나 자신의 신념을 굽히거나 입장을 갑자기 바꾸지는 않습니다. 다만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갖추게 된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하고, 호기심을 되살리면서 인간성을 회복시킨다고 합니다.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좋은 갈등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일지, 이런 과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질문하면서, 저자는 콜롬비아 보고타로 가서 산드라 밀레나 베라 부스토스를 만나게 됩나다. 잔혹한 콜롬비아 내전의 한가운데에서 게릴라 조직에 포함되어 있다가 합법적인 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나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네번째 질문은 '개인이 아닌 한 지역이 고도 갈등에 면역력을 지니게 된다면 어떨지' 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뉴욕의 유대인 회당의 자유주의 유대인과 함께 미시간의 보수적인 트럼프 지지자들간의 대화의 현장에 함께 합니다. 긴장감 속에 만남을 갖게 된 두 그룹은 서로의 의견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의 갈등이 고도 갈등으로 번지기 보다는 건설적인 갈등으로 남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저자가 직접 참여했던 이 케이스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뉴욕과 미시건이라는 지리적 거리로 인해 그들간의 대화는 일회성으로 끝났고, 일회성으로 인한 한계도 나타났지만, 그러한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낼 수 있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낙관적인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케이스였습니다. 실로 민주주의 24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시민들 답게 민주주의적 이상에 대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대화에 나서는 시민 하나하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고도 갈등'에 이르지 않기 위해, 또는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몇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1.속사정을 파악하라.
어떤 갈등이든 그 속사정을 이야기 하기 전에는 진정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힘듭니다. 어떤 이슈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의 진정한 깊은 이유가 무엇인지, 반대하는 사람의 깊은 이유가 무엇인지, 직접 들어보기 전에는 그 속사정을 알 수 없기에, 쉽게 상대방을 악마화 하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걱정과 두려움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야 합니다. 상대방의 견해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자세와 환경이 필요합니다.
2. 양자 구도를 완화하라.
'우리'와 '그들'로 나누지 말고, 의견의 차이에도 존재하는 서로 간의 공통점을 확인하면서, 사안 자체의 복잡성을 모두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3. 불쏘시개를 멀리하라.
갈등을 즐기고, 갈등을 부추기는 사람들은 늘 존재합니다. 세상을 우리와 그들, 선과 악의 구도로 명확하게 나누거나, 패배를 굴욕으로 여기도록 하는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복잡한 이야기를 기꺼이 수용하며, 정의에 대한 신념 보다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는게 좋습니다.
4.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라
갈등 상황에서 즉각적인 대응을 하기보다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는 완충장치가 필요한데,함께하는 식사, 함께하는 운동, 함께하는 놀이 등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부정적인 대화보다는 긍정적인 대화를 최소한 다섯 배 이상 하도록 해야 하며, 대화를 할 때에는 적극적인 경청을 해야합니다. 상대방의 말 뜻을 확인하면서 피드백을 주고 받는 순환적 대화여야 상대방이 존중 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갈등의 예리함이 무뎌지게 됩니다.
5.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라.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일 수록 단순한 스토리가 우리 눈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해결을 위해서는 단순함을 넘어서는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호기심을 품을 수 있고 호기심에 반응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이어야 하며,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호기심을 촉발하는 방법은 현실에 숨어 있는 모순을 찾아내어 똑똑히 드러내는 것이라 합니다. 진지한 호기심이 담긴 질문을 통해 갈등의 현장이 흥미진진한 대화로 변할 수 있다고 합니다.
1) 이 갈등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야기들은 무엇인가?
2) 상대방의 어떤 면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3)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점은 어떤 것인가?
4) 어떻게든 이 갈등이 해결된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은가?
5)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6) 이 논란과 관련하여 아직 모르는 것 중에 무엇이 가장 궁금한가?
7) 어디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8)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갈등에 이르게하는 모든 견해차이가 반드시 다 해소되지도 않고 좁혀지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얘기합니다. 단지 '고도 갈등'에서 빠져 나와 건전한 갈등으로 상황을 전환시키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당면 사안에 대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자 출신들이 쓴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기자 출신 저자들은 그들이 잘하는 방식 즉 인터뷰를 통해 상황을 케이스로 재구성해서 들려주는 방식을 주로 취하곤 하는데, 그런 형식을 취했던 책들을 읽었을 때 만족스러웠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도리어 그런 방식이 주는 강점이 드러나는 책인 것 같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실제로 겪어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떤 이론적인 접근 보다도 더 강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길등 상황에 있었던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감동적입니다. 자신이 초래한 갈등 상황을 인지하고 자신의 의견을 꺾고 자신을 반대한 상대방에게 지지표를 던지는 개리,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자각하여 오랜 복수심에서 벗어나 갱단을 탈퇴 했던 커티스, 콜롬비아 반군에 속해 있다가 딸에 대한 책임감으로, 정부의 무장해제 프로그램 참여라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온 산드라, 이들은 그런 실존적인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해 뉴욕과 미시건을 상호 방문하여 대화를 하는 미국 시민들의 모습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보게하는 케이스였습니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도 그러하지만, '고도 갈등' 양상은 많은 나라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간의 균열이 과거 그 어느 때 보다 더 벌어지고 있다는 진단은 2010년대 초반에도 나오고 있었습니다. 공화당의 뉴트 깅그리치 의원이 공화당 쪽의 극우 목소리를 강하게 내었던 것도 이제는 꽤 오래전 얘기이지요. 2016년 하반기 미국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는 그러한 균열을 더욱 드러내고, 그러한 반목과 갈등을 부추기면서 당선 되었습니다. 이제 미국은 트럼프의 과열 지지자들에 의한 내부 테러 가능성까지 얘기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 사회 환경은 고도 갈등이 빈발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부터 시작했고, 지금은 수십년 전 대비해서는 훨씬 더 나아졌다고는 할 수 있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는 방식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도 갈등'에 대한 저자의 5년간의 탐구 결과가 담긴 이 책이 전하는 얘기들은 충분히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꼭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직장 내에서도 부서간 갈등이 심한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직장은 그리 심하지는 않은데, 2012~13년 무렵에 있던 곳은 매일매일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부서간 의견 차이로 인한 갈등 상황이 빈발했었거든요.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고도 갈등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PS. 미처 알지 못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저자인 아만다 리플리는 몇 년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인 <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의 저자였습니다.
(내돈내산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