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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적 떼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55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평점 :
<2015.3.14>
실러라는 이름이 제게 낯설지 않았던 것은 그가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에 들어가는 환희의 송가의 저자이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외에는 그의 작품을 접해 본 기억이 없네요.
제가 기억하는 그는 희곡을 쓰는 극작가라기 보다는 시인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희곡은 일상적인 소설이나 연극의 대사라기 보다는 뭔가 서사시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대사 하나하나가 서사시 같은 느낌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테니슨의 '이녹 아든'이란 서사시를, 지루함을 참고 꾸역꾸역 읽었던 때의 느낌이랄까요.
플롯은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지극히 평면적입니다.
사건의 전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인지 뭔가 터무니 없고,
마지막의 극적인 변화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결말은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실러의 목적은 그 부분을 제대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빠른 장면 전환과 대화를 통해 극을 긴장감 있게 구성해 나가는 그런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저 삶의 비참한 상황 가운데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연극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최대한 담아내려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인상적이었던 대사들 가운데, 특히 4막에서 카를의 긴 독백이 기억에 남더군요.
어째서 페릴루스는 나를 황소로 만들어, 뱃속의 뜨거운 불로 사람들을 불태우게 만들었단 말인가.
(권총을 장전한다)
시간과 영원은 단 한순간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내 뒤에서 삶의 감옥문을 잠그고 내 앞에서 영원한 밤의 안식처 문을 여는 잔인한 열쇠여, 나에게 말해다오! 오, 어디로, 어디로 나를 데려갈 것인지 제발 말해 다오! 지금껏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데려갈 것이냐! 자, 보아라! 그 광경 앞에서 인간의 정신은 축 늘어지고, 유한한 것의 활기는 사그라지고, 감각의 경박한 원숭이, 즉 환상은 쉽게 남의 말을 믿는 우리에게 기이한 허깨비를 보여준다.
아니, 아니다! 사나이 대장부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름 없는 내세여!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나는 다만 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내 자아를 데려갈 수 있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외부의 사물들은 다만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내 하늘이고 내 지옥이다.
네가 외면한 곳, 삭막한 잿더미에 뒤덮이고 고독한 밤과 영원한 황야만이 펼쳐지는 곳을 나에게 남겨줄 것이야? 그러면 나는 침묵의 황무지를 환상으로 채우고, 혼란스러운 비참한 광경을 분석하는 여유를 영원히 누릴 것이다. 아니면 끊임없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새로운 불행의 현장을 통해서 나를 한 단계 한 단계 파괴할 것이야? 내세에서 엮어지는 생명의 끈은 현세의 것처럼 쉽게 자를 수 없는 것이더냐?
너는 나를 그 무엇으로도 만들 수 없다. 나에게서 이 자유를 앗아 갈 수 없다.
(권총을 장전하던 손길을 문득 멈춘다.)
지금의 고통스러운 삶이 무서워서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단 말이야? 불행에게 승리를 넘겨 주어야 한단 말이야? 아니! 나는 참고 견디련다!
(권총을 훌쩍 내던진다)
내 자존심이 고통을 이겨 내리라! 기어이 뜻을 이루고 말리라.
소리내어 말해지는 대사이지만, 사실은 혼자만의 상념이겠지요. 어찌 보면 이 또한 '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당당함은 무엇일까요. 잔혹한 운명 앞에 홀로 단독자로 서겠다는 이 당당함은.
최근의 소설에서 이런 당당함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문득 김훈의 이순신이 생각나긴 하네요.) 어찌 보면, 이런 모습은 18,19세기의 계몽주의,모더니즘 시대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단독자로 서는 당당함만 있으면 뭘하나 싶습니다. 결국 잔혹하게 얽힌 운명의 힘 앞에서 주변 사람도 파멸시키고, 자신도 파멸해 갈 뿐인데요.
1782년에 독일 만하임에서 연극으로 초연된 이 작품은 엄청난 호응을 가져왔고, 1792년 파리에서도 대 성공이었다 합니다. 르네상스에서 종교개혁으로, 절대주의 왕정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몇백년 간의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통과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전쟁, 살인, 폭력 등이 일상화된 지 몇 백년, 그 가운데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요.
삶의 비극적 현실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기어이 뜻을 이루고 말리라'는 카를의 모습은 오래 전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주인공이 죽음 앞에서 '자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유'는 그렇게 도피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오랜 평화의 시대를 살아오다 보니,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 조차 잊은지 오래지만, 또한 그만큼 스스로 직면해야 하는 현실에 무감각해지기도 한 것 같습니다.
알고보니 도피의 삶은 아니었는지, 알고보니, '자유'가 아니라 '예종'의 삶은 아니었는지 질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세월호 1주기를 한 달 남겨둔 2015년 3월이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