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곳이 집 디아스포라 역사가 왕겅우 회고록 2
왕겅우.왕마거릿 지음, 김기협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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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중엽까지 중국행을 늦춘 덕분에 두 가지 혜택이 내게 돌아왔다. 받아놓은 졸업증서가 싱가포르의 새 대학 지원을 위한 자격을 충족해주었다. ‘비상사태’란 이름의 반영 항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나처럼 현지 출생도 아니고 국적도 없는 중국인의 신분은 입학 자격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아버지도 말라야가 자리잡아 살 곳이라는 생각을 점차 받아들이셨다. 지역 중국인 중 타이완의 중화민국 지지자들과 베이징의 신중국 지지자들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부모님은 마음속으로 예상하면서 내가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기를 바라신 것 같다. - P18

앞선 회고록 1권 후기에서 왕겅우의 싱가포르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었다. 싱가포르로 가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상황이었다. 나뉘어진 정치적 선택지 속에서 한쪽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말라야 현지의 정치적 혼란도 한몫 했다. 말라야 연방이 말라야 공산당이 독립을 위해 세운 말라야 민족해방군을 상대로 비상사태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가 입학한 말라야 대학은 영국인 관리의 행정을 도울 현지인을 훈련하기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 곳이었다. 일종의 제국 시민을 키우기 위한 곳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영국식 교육에는 익숙하면서도 현지 동남아시아 시스템과 역사를 이해에 대한 인식력은 약했다. 왕겅우는 말라야 출생이 아니었기에 특히나 정치 활동 참여, 반제국주의 발언 등에 조심해야 했다. 말라야 대학은 입학 때 전공을 고르지 않고 3년 간 통합으로 공부하다가 학위를 받은 후 최종적으로 전공을 고르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말라야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를 써서 지방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창작에 한계를 느껴 문학의 길은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을 느낀 것이 아닐까. 외국인이 외국 문학의 길을 택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라야 연방 지역 사회를 둘러싸고 민족, 계급 등 다양한 이해 충돌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말레이 공산당이 해산된 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싱가포르와 말라야 연맹 간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싱가포르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공부해야 했다.
1950년 마리아 헤르토흐 폭동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이렇다. 마리아 헤르토흐의 네덜란드인 가톨릭교도 아버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하고 있다가 1942년 일본 점령 때 포로수용소에 들어갔다. 유라시아 혼혈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갈 때 마리아를 한 말레이 여인에게 맡겼다. 그 여인은 마리아를 딸로 입양하고 자기 고향 트렝가누에 데리고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아의 아버지가 딸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가 양모를 찾아 싱가포르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이곳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영국인 판사는 마리아가 네덜란드인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말레이 양모가 항소에서 이겨 풀려난 어린 마리아를 말레인 총각과 결혼시켰다. 네덜란드인 아버지가 재항소를 통해 결국 마리아의 양육권을 확보했다. … 판사는 마리아가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수녀원에서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슬림 사회에서는 마리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하는 것 아니냐는 감정적 반응이 나왔다. 마리아가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로 가라는 판결이 나오자 폭동이 시작된 것이다(P82~83). 군중은 유럽인만 보면 싸움을 걸었다.
그는 이 사태를 통해서 싱가포르의 현실과 제국주의가 종식된 후 탈식민, 신민족국가 건설의 험난함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학생회 일을 통해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느꼈다. 그가 문학을 접고 역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어떤 종류의 배타주의에도 반대하겠다는 내면적 변화와 정치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열망이 생긴 결과였다.

그는 영문학 학도인 마거릿을 만나게 되었다.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베다 림이라는 사람 덕분에 배움의 기회를 얻어 대학 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녀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니 공통적 관심사가 있기도 했다.
마거릿 덕분에 전에 별로 생각지 않던 ‘사랑’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또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나도 사랑 노래를 많이 알고 그 말을 멋대로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 말을 쓰는 방법이나 함축하는 의미는 확실히 안 적이 없었다. 마거릿을 만나면서 그 말이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일어난 변화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수수께끼다. 사랑이란 소리 없이 자라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내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 가정, 자유와 관계가 크다는 것만 안다(P132).

마거릿은 역사학 공부를 위해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당시 영국 식민지인으로서는 영국으로 가는 유학이 최고의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양 등지에서 쑨원과 혁명 동지들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료 조사를 위해 홍콩으로 출장을 떠난다. 홍콩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정치 활동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중심지인 만큼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영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필리핀, 실론, 인도 등지를 여행하며 중국인의 위치를 이해하게 된다. 원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으나 10세기 중국 오대사 연구로 주제를 변경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와 관련 직접 자료가 부족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 초기 기록을 통해 남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게 된 만큼 인도양에서 기원한 문명에 중국 교역이 뒤섞이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일었다.

영국으로 떠나오고 1년쯤 뒤 마거릿이 영국으로 공부를 위해 왔다(영국으로 오기 전 두 사람은 약혼만 한 상태). 그러나 학교의 위치가 서로 달라 주말마다 만나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활에 지쳐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부모가 잠시 런던에 왔을 때 두 사람은 결혼 예식을 올렸다. 케임브리지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뒤 파리에서 첫 아이를 힘들게 낳았다. 아이가 태어날 때 탯줄이 엄마 목에 칭칭 감겨 있어 한동안 격리되어 지낸 통에 왕겅우는 아이와 그녀를 바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1957년 말라야 연방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싱가포르로 돌아온 뒤 부부는 바로 일을 시작했으나 얼마 후 일 때문에 쿠알라룸푸르로 가게 되었다. 그는 남양 화교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며 동남아시아에서의 화교에 대한 위치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강연도 호평을 받으며 책으로 출판까지 되었다고.
그무렵 미소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동남아시아에까지 관심을 뻗쳤고 동남아시아판 나토인 시토(SEATO)를 조직한다. 그는 1960년 미국 아시아 관련 연구소를 둘러보고자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연구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거릿은 미국의 영어 교육기관을 시찰해달라는 요청으로 미국 대학을 돌아본다. 그는 1961년 1년간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소아스에서 명나라 초기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한다. 1962년에는 말라야 대학에 돌아와 문학부 학과장을 맡았다.

1963년 말레이시아 통합에 반대하는 수카르노 콘프론타시 폭력이 시작되었다. 말레이시아는 국제 승인을 위해 유엔에 도움을 청했다. 싱가포르에 잔혹한 폭동이 일어나자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는 공식 협상에 돌입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 결국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합에서 떨어져 나오고 인도네시아 PKI는 파괴되었다.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은 진격했고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 벌어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상황은 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그가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최규하 주말레이시아 한국대사 덕분이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이기백, 김준엽과 만남을 가지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그때 중국 관련 연구를 집중해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세운 일이었다.

1968년 이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말레이시아가 고향과 다를 바가 없다. 자기 집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더는 현대 중국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되었다. 중국사 연구를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행히 마거릿도 부모님도 그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얼마 후 돌아오려 했으나 1969년 쿠알라룸푸르에 폭동으로 국가 비상 상태가 발생하자 귀환을 미루었다(그 사이 그의 아버지는 1972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18년 간 그곳에서 삶이 이어졌다.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1996년 싱가포르로 이주해 24년째 살고 있다 한다. 마거릿은 2020년 세상을 떠났다.
‘있는 곳이 집’이라는 제목은 그의 삶(의 경험)을 그대로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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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잘하는 할조는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 옛날 무사들은 모자 위에 할조 2마리의 꼬리를 좌우양쪽으로 꽂아 전장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전 - P101

국시대에 초(楚)나라 사람 하나가 깊은 산에 은거하면서도 할조의 깃털을 모자에 꽂고 호를 ‘관자‘라고 하여 그 명성이 멀리까지전해졌다고 한다. - P102

청요산은 황제가 비밀리에 지상세계에 두고 있는 도읍이다. 이 산의 북쪽으로는 황하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는 가운데 야생거위들이 떼 지어 나는 것이보인다. 산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선저가 보인다. 선저는 우(禹)의 아버지 곤이 누런 곰으로 변했던 곳으로, 달팽이와 소라가 많이 산다. 신 무라(巫羅)가 청요산을 관리하는데, 무라는 사람얼굴을 하고 있으나 몸에는 표범 무늬가 있고 가는 허리에 이는 하얗다. 무라가 차고 있는 금은 귀고리는 짤랑거리면서 옥이 부딪힐 때 나는 소리를 낸다. 이산은 여자가 살기에 적합하다. - P104

새처럼 자유롭게 나는 선인이 오대 선산을 오가며 친구를 방문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오대 선산은 뿌리가 없는 탓에 풍파를 만나면 물결 따라끊임없이 흔들흔들 움직였던 것이다. 황제는 북신, 우경, 진조 등 여러 선인들에게 이 일을 잘 해결하도록 청했다. 우경과 진조는 15마리의 거대한 바다거북을 보내 물 밑에서 오대 선산을 머리로 이고 있도록 했다. 거북들이 3마리씩 한 조가 되어 차례로 순번을 서며받쳤더니 오대 선산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P120

후예는 유궁국의 국왕이다. 후예는 농민의 아들로 천신 예의 양궁술을 흠모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활쏘기를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을 ‘예‘라고지었고 나중에 국왕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후예‘라고 높여 부른 것이다. - P140

황산은 안휘성 남부 황산시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산으로 청익강 상류의발원지다. 남북으로 약 40km 정도, 동서로 약 30km 정도 되는데 중국에서 가장유명한 관광지의 하나다. 황산에는 3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연화봉, 광명정, 천도봉이다. 풍경이 수려하고 기이한 소나무와 괴석(怪石), 운해(雲海), 온천으로 유명하여 ‘황산사절로 불린다. 명대의 저명한 여행가 서하객(徐霞客)은 "세상에 안휘의 황산만한 것이 없다. 황산에 오르면 천하에 다른 산은 안 보이니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황산은 주요한 풍경 명승지로 세계자연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이곳의 특산품으로는 황산모봉차(黃山毛峰茶)와 영지버섯이 있다. - P143

월궁(月宮)으로 도망간 항아는 결코 기괴한 생물로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월궁의 차가움은 그녀가 전에 상상할 수도 없던 것이었으며, 그 안에는 약을 짓찧고 있는 토끼와 계수나무뿐 다른 아무 것도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겨우 ‘학선(學仙)으로 죄를 지은 벌로 월궁으로 와서계수나무를 베어야 하는 오강(吳剛)이 더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계수나무는 오강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오강이 나무를 베자마자 난 상처를 바로 아물게 해버렸다. 오강이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나무는 절대 넘어지지 않았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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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아닌 곳에서 디아스포라 역사가 왕겅우 회고록 1
왕겅우 지음, 김기협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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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대부분을 역사 공부에 바쳐온 한 사람으로서 나는 ‘과거’에 매혹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 자신이 보려 애쓰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언제나 위압적일 정도로 거대한 세계였다. 사람들의 삶에 관해 읽을 때라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것은 거창한 교훈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과거’에 대한 내 이해가 매우 치우쳐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서 있던 무대는 유럽식 역사관과 유교식 자기 수양 정신 양쪽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 P11~12

현재와 미래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과거를 보는 것만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과거를 어떤 방향과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에도 거시적 세계의 관점에 매몰되 정작 역사 속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그들의 생각에는 소홀하다. 저자는 자신(과 부모)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읽히고자 이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한 가족의 역사가 비단 개인의 역사만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가 1949년 싱가포르의 말라야 대학으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어머니가 들려준 50년 간의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어머니는 5살 때부터 그에게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외아들이어서 각별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부모는 그가 중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잊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시 흐름에 맞춰 존 듀이의 자유주의 교육 학습법을 전수받아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중국 육조 시대 전통 문학에 늘 관심을 가졌다. 이후 그는 인도네시아 자바에 있는 수라바야 화교 학교에서 교장직에 초빙을 받아 가게 된다. 경제적 자립 기반을 찾자 그는 고향인 타이저우에 와서 부모가 골라준 여인과 결혼한 뒤 수라바야에 돌아와 가정을 꾸렸고, 저자는 1930년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그때 하필 불어닥친 대공황의 흐름으로 학교가 재정난을 겪게 되어 아버지는 1년 만에 사직하고 그곳에서 가까운 이포라는 곳에 중국인 학교들을 관리하는 부장학사 직을 맡게 되어 옮기게 된다. 저자는 19년 간 이포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태어난 곳은 수라바야지만 마음 속 고향이자 여러 감정이 오가는 곳은 이포(말레이시아 북부의 도시로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방도시)였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가족이 이포에서 살고 싶어서 19년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세 식구는 끊임없이 중국으로 가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반복된 시도에도 대내외적 상황에 주저않아 끝내 갈 수 없었다. 저자의 가족 뿐 아니라 중국인들은 인도네시아에 이주해서도 전통 문화를 고수하려 했기에 현지인들과 자주 충돌했다 한다. 저자도 영어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편으론 세살 때부터 한자를 배우며 고전 한문 교육을 배웠다. 중국어 어휘를 늘리기 위해서 중국어 학원까지 다녔다고. 그곳 환경은 사원과 모스크가 있고 관청에서는 영어를 쓰지만 길에서는 말레이어, 사적으로는 광둥어를 쓰는 복합적인 환경이었다. 과연 중국이 중국을 떠나 망명한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다른 중국인들은 자기들만의 단체와 사찰이 있고 축제와 사회활동을 정기적으로 조직했다. 아이들 중 몇몇은 국민당 입대를 위해 자원하러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 가족은 이포에 임시로 살고 있었기에 언제고 떠난다는 생각으로 방위 성금 모금 행사 외에는 참여하지 않고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전쟁의 암운은 더욱 짙어만 갔다. 1941년 이포에서도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는 곳이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에 집을 떠나 벌목장, 동굴 등 포격을 피해 한동안 도망을 다녔다. 다행히 얼마 후 지인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다. 당시는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중국인 학살하고 공개처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때였다. 3년 간 그는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경험을 하며 실력을 쌓는다. 이포에서 살던 때와는 다르게 그는 그곳에서 많은 중국인과 부딪쳐야 했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광둥어가 늘었다. 아무튼 사건도 많고 네 차례 이사를 할 정도로 이동도 잦은 시기였다. 그래도 그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일본 당국에 의해 원래 직장에서 교육 일을 맡게 되면서 그가 3년 반 동안 도서관 책의 정리 목록 작성 일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영어 소설을 읽으며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이사한 가족의 집에서 라디오 영어 방송 뉴스를 듣고 아침 식사 때 전쟁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이것으로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과거의 고전 한문 공부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공부 방식으로 성장하는 경험을 얻게 된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은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중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등 졸업장이 있어야 했던 관계로 1947년 6월이 되어서야 상하이로 향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만난 가족은 정말이지 대가족이었다. 가족이 많은 만큼 다양한 친척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대고모의 남편은 베이징대학 도서관장을 역임했고 고궁박물원에서 고미술을 담당했다(1949년 타이완에 갈 고미술 밀반출을 도와달라는 유혹을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사촌 중에는 한국전쟁에 위생병으로 참전한 이도 있다. 타이완 진먼다오에서 군복무시 공산당을 막는 부대에 있었던 친척도 있다. 역사가 드라마틱하다보니 이렇게나 역사적 현장에서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다.
이후 가족은 난징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는 줄곧 국민당 정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1912년 혁명에 회의를 품으며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는다. 그런 생각을 품게 된데는 당시 난징정부의 행태가 큰 몫을 했다. 충칭에서 옮겨온 난징 정부는 계속되는 내전에 기아,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48년 화폐 개혁이었다. 당시 돈으로 300만 위안이 금원위안이 되었고 금화, 달러, 금괴를 금원권으로 바꾸라는 강제 명령이 내려오자 혼란과 공포가 가중되었다. 정부에 대한 실망이 깊어지고 있을 때 장제스가 미국에 의지해 공산당을 적대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몰려든 학생들의 행진에 진압 명령을 내렸다. 기마경찰대가 투입되어 강제 해산에 나서자 몇몇 학생들이 다쳤다(그는 다행히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2주 후 농성대회에는 반정부활동 탄압을 위해 국민당 청년부에서 보낸 깡패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는 대학생이 되었다. 400명의 신입생 중 한 명이 된 것. 그가 들어간 중앙대학 수업은 수준이 높았고 교수진도 훌륭했다. 특히 쑨원의 삼민주의에 대한 강의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전까지 부모님에게 듣거나 중국의 고전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고국에 대해서 현재적 질문을 품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통해 혁명이 전통적 혁명과 어떻게 다른지, 중국인에게 민족이란 어떤 의미인지,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개념, 중국에서 공화국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지, 중국은 자본주의로 나아가야 할 지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할 지 등등을 고민해보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된 데다 계속되는 내전과 불안정한 상황으로 말라야로 돌아갈 결정을 내린다. 그는 그곳에 남아 2학년 진학을 위해 1948년 10월 난징으로 향했다. 그러나 11월 초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가 격파되고 베이징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가능한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난징이 최후의 전장이 될 것을 염려한 부모의 불안과 걱정에 이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이포도 민족해방군과의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비상사태로 말라야 전역의 중국인 학교에 정치적 압력이 거세지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그였기에 아버지는 그의 계속된 학업을 위해 싱가포르 대학에 진학하라고 등을 떠민다. 문제는 그곳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더는 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앞날을 계획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그가 싱가포르로 떠나기 직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정말이지 드라마틱하지 않나. 혼돈의 역사적 배경 속에 그의 삶의 이정표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책에는 언급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사건,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비단 한 가족의 역사로만 읽힐 수가 없는 것 같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가 가정을 꾸리고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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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은 황하의 수신으로 빙이(夷)라고도 하고 풍이(馮夷)라고도 한다. <구가(九). 하백》에 따르면, 하백은 풍류를즐기는 바람둥이다. ‘물고기 비늘로 만든집과 용 저택, 자줏빛 조개 궁궐과 붉은궁전에 사시는 영령께서 어찌 물 속에서만 지내시겠나.‘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하백은 물론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는 민간 전설에서 해마다 신부를맞아들이면서 영원한 환락을 누리고 있다. - P63

중국인의 오랜 기억 속을 차지하는 염제는 신분이 셋이다. 하나는 남방 여름의 황제인 적제다. 《회남자·시칙훈》에서 ‘남방의 끝, 북호손의 밖, 전욱국을 관통해서 남으로 위화염풍의 들에 이르면 적제(赤帝)와 축융(祝融)의 관아가 1만2,000리에 이른다‘고 했다. 둘째는 신농씨로 농작물과 약초의 발명자다. 셋째는 황제와 천하를 놓고 싸운 부락 연맹의 수령이다. 사실 염제족과 황제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충돌은 바다가 침습되어 이로인해 생존지역이 줄어든 환경재해가 그원인이었다고 한다. 여와는 염제족 적계부락의 수령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여와부락은 동해안으로 옮겨갔는데 날씨가 따뜻해져 해수면이 올라가는 바람에 여와 부락은 수몰 위기에 처했으니, ‘정위새가 바다를 메운다‘는 정위전해(精衛塡海) 이야기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당시여와 부락의 생존자들은 태행산으로 옮겨와 살았으며 정위새로 분장한 채 무술의식을 치렀다. 상징적으로 나무와 돌을 동해에 던지는 행위를 통해 해수면이 내려가 아름다운 여와 부락의 수복을 기원했다. - P74

발구산에는 정위라는 새가 산다. 생김새는 까마귀를 닮았으나 머리에 무늬가 있으며 부리가 하얗고 발은 붉다. 이 새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염제의 막내딸 여와가 동해로 놀러갔다가 바다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고 정위라는 새로 변했다고 한다. 이 새는 항상 서산(西山)의 작은 가지와 자잘한 돌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운다. 정위의 아버지 염제가 바로 신농씨이자 강씨(姜氏) 부족의 수장으로, 호를 열산씨(烈氏)라 했다. 그는 소전 - P75

과 그 아내 교씨 사이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강수 유역에살다가 나중에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마침내 중원에 이르렀다. 일찍이 판천의 들에서 황제와 싸웠으나 패했다. 언젠가 하늘에서 곡식비가 내렸는데, 제가 그 곡식들을 땅에 심으니 오곡이 풍성하고 온갖 열매가 열렸다. 그것을 먹은 사람은 늙어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염제를 신령한 농군이라는 뜻으로 신농이라고 한다. 장수가 이 발구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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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국제 사회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스라엘은나크바 시기에 국제 사회가 보인 침묵과 수수방관을,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고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종족청소를 계속 사용해도 된다는 백지 수표라고 이해했다. 어쨌든 누구도 처음에 그들을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 - P100

1963년, 엄청난 위력을 지닌 친이스라엘 압력 단체인 미국 이스라엘 공보위원회(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Committee, AIPAC)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가 구축한 광범위한 정치 기구는 미국 정치인들 절대대수가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게 만드는 확실한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행정부가 이스라엘의 정책을 불편하게 느끼더라도 결코 어떤유의미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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