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처럼 내 마음속에 몇시간 떠돌다가, 그 이미지가 나타나기 전에 품었던 낭만적인 관념과 더불어 점차 하나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연상 작용으로(어떤 다른 여성적 이미지와도 완연히 구별되는) 발전했으며, 따라서 추억이 가장 잘떠오르는 바로 이런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 추억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추억이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 P98

게르망트부인이 보여 주는 이런 상이한 얼굴들의 연이은 출현 덕분에그 얼굴들은 그녀의 옷차림이라는 전체적인 틀 안에서 때로는 비좁게, 때로는 넓게 상대적인 공간을 차지했고, 내 사랑은날마다 변하는 살과 옷감의 어느 특정 부분에도 고정될 수 없었으며, 내 마음의 동요도 이처럼 그녀가 날마다 살과 옷감을고치고 거의 온통 새것으로 만들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살과 옷감을 통해 혹은 낯선 뺨이나 새로운 옷깃을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은 항상 게르망트 부인이었으니까. 이 모든 것을움직이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을, 그 적의가 날 슬프게하고 그 다가옴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인간을 나는 사랑했고, 이런 그녀의 삶을 사로잡아 거기서 그녀의 친구들을 내쫓고 싶었다. 푸른 깃털을 세우거나 불같은 안색을 보이거나 그녀가 하는 행동은 내 눈에 중요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 P102

나는 물리적 세계만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와 그 모습이 다르지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모든 현실이 우리가 직접 지각한다고 믿는 현실과 다르며, 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작용하는 관념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구성하는 현실과도다르다고 생각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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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5장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굶주린 사람들이 풀뿌리를 캐고 나뭇잎을 따고나무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정저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먹을 것을 구걸하는 피란민들의 끝없는 행렬은 너무나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 P328

이러한 모습은 가을 추수가 실패한 직후인 기근 초기에 일어났다. 더 최악의 상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장중루는 가는곳마다 절망을 봐야 했다. 청교외에는 인신매매 시장이 있었다. 장중루는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아내를 팔려고 내놓은 한 부부를만났다. 그들이 헤어져야 할 때, 아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내 바지가 당신 것보다 좋아요. 내 것을 가져가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는 당신을 팔 수 없소. 같이 죽읍시다." 사람들에게 대안이 있다면 오직이곳을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 P329

허난성의 기근은 국민당의 재정 압박에 따른 결과가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제아무리 개별적으로는 서로다른 행동을 취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비극적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다.(반대로 1958~1962년 마오쩌둥 치하 대약진 운동 시절의 기근은 최고 지도자의 방침을 바꾸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가능했고 결국에 그렇게 되었다.) 부패와 무관심, 냉담함은 하나같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장제스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영은 투기와 사재기가 "현지주민들이 국민정부를 적대시하게 만들었으며, 농촌 민심이 공산당 쪽으로돌아서는 데 일조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정적 조치로 곡물을 징발한 것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정부의 자금 확보를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정부가 항전을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곡물세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른이들은 시어도어 화이트가 목격했듯이 허난성의 들판에서 죽어가던 농민들이었다. - P336

1942년 12월 마오는 봉쇄 지역의 경제적 해결책에 대한 생각을 담은 중요한글을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인상적일 만큼 실용적이었다. "인민 경제와 공영 경제를 다 함께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냥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전까지 상당수의 현지 주민들에게 세금이 거의 부과되지 않았다. 마오는 이제 무거운 세금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대신 공산당은 농민들의 "실보다 득이 더 클 수 있도록" 수공업과 농업, 상업의 진흥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금은 확실히 무거웠다. 여기에는 농민들에 대한 주된 현물세(곡물, 짚, 양여자 - P341

털)와 일부 금납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국민당 지역에서 고통을 초래했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세심한 신경을 썼다. 비록 중산층 농민들의 부담은 한층 가중되기는 했지만 최하층 20퍼센트에 해당하는 가장 가난한 소작농들은 여전히 세금이 면제되었다. 곡물세를 내는 사람들은 1938년수확량의 1퍼센트 미만을 납부했지만 1941년에는 13.6퍼센트로 늘어났다.(그 후 몇 년 동안 다소 줄어들었다.)마오쩌둥은 자신의 정책을 인민들을끝없이 착취하는 것과 비교하면서 국민당이) 군대와 정부를 우선시하여 인민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결코 따라 해서는 안 되는 국민당의 방식이다." - P342

장제스에게는 "중국의 하인리히 힘러"라고 불리는 다이리가 있었다. 왕징웨이에게는 겉보기에는 부드럽지만 거친 폭력배 출신의 리스천이 있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에게는 인 - P347

간의 육체와 정신을 괴롭히는 데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전문가이자 소련NKVDS 수장인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 밑에서 훈련 받은 캉성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중국 전시 정권에 깊이 관여하면서 권력의 제로섬싸움을 부추겼다. 다이리와 미 정보기관의 연계는 중국 내 연합군의 작전수행에 재앙을 초래할 불확실성을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된다. 리스의 음모는 왕징웨이의 가장 충실한 심복 저우포하이가 또 다른 운명적인 결정을 내리게 했다. 이것은 일본에 부역했던 중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참이었다.
캉성은 언젠가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불리게 될 훨씬 더 거대한 공포의 구조물을 창조하게 될 것이었다. 이들은 철천지원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사람은 몸담고 있는 곳은 전혀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다. 모든 것에는 명암이있듯, 이들은 전시 여건을 이용해 현대화와 독재가 일체화된 강력한 국가 체제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 P348

중일전쟁 동안 중국에서는 SACO와 OSS 사이의 은밀한 내분이 있었다. 다이리와 군통 또한 난장판에 기여했고 심지어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다. 역기능의 상당 부분은 미국정보 조직들이 제대로 협력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 무능함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미국첩보 활동의 혼란과 불확실성은 한층 깊어졌다. 특수작전집행국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과 비밀정보국SIS, Secret Intelligence Service으로 편성된영국 정보조직은 중국 북부의 공산당과 접촉하는 것을 비롯해 중국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협력적이면서 효율적인 구조를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 P352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 궁극적으로는 일당독재의 현대적인 중국을 꿈꾸었다. 이것은 진정한 다원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목표였다. 국민당에게도 공산당에게도 근대 국가와 자유주의 국가는 서로 별개의 얘기였다.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레닌을 통해 영감을 얻었던 두 정당 모두 통치 구조의 일부로서 공포의 사용을 인정하고받아들였다. 전쟁의 재앙과 중국 내에서 갈수록 커지는 사회적 위기는 양쪽정권에서 기술적이고 관용적인 부분을 점차 벗겨냈다. 또한 폭력과 강압을선호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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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르」와 ‘고백 장면’과 라 베르마는 당시 내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실존을 의미했다.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로부터 물러난 그 실존은 그 자체로 존재하여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무리 내 눈과영혼을 크게 뜨고 깊숙이 그 안으로 꿰뚫고 들어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적은 것밖에 흡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삶은 얼마나 상쾌해 보였던가! 옷을 입거나 외출 준비를 하는순간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보내는 삶의 무의미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너머에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선하고 접근하기 힘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게 불가 - P74

능한 보다 견고한 현실인 「페드르」와 ‘라 베르마가 말하는 방식‘이 있었으니까. - P75

우리는 한 세계에서 느끼고 다른 세계에서는 생각하고명명하며, 그리하여 이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일치점을 설정할수 있지만, 그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했던 거리감이자 균열이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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