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제국이 종교 반란 집단과 지역 군벌의 손에 무너진 이후 400년 역사는 소홀하게 다루어진다. 이렇듯 이 시대를 부차적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이 시대에 대한 합의된 명칭이 없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중국인 역사학자들은 왕조별로 시대를 구분하는 전통에 따라 이 시대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라고 부른다. 반면 서구 학자들은 ‘분열의 시대(the Age of Disunion)‘ 혹은 ‘초기 중세(the Early Medieval period)‘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자는 중국이 단일한 정권 아래 통일되어야 정상이라고 상정하는 것이고, 후자는 중국 역사에 서양사의 시대 구분을 덧씌우는 것이다. 나름의 한계는 있겠지만 나는 중국식 명칭을 수정하여 이 시대를 - P17

‘남북조‘라고 부르려 한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위진남북조‘라는 중국식 용어보다 간결하게 이 시대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남북조‘라는 용어는 후한 멸망 이후 4세기 동안, 중국 정치세계가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반영한다.
‘남과 북‘이라는 틀을 선호하는 두 번째 더 중요한 이유는 남북의 지리적 구분과 관련한 주요 변화들이 여러 면에서 이 시대의 역사적 의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한족 인구 상당수가 북에서 남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남중국의 낯선 자연환경 및 이민족들과 조우하였다. - P18

북중국을수복하겠다는 열망과 그 열망을 실행에 옮긴 북벌은 무장과 강남의 전형적 문화 엘리트 사이에 긴장 국면을 형성했다. 문예와종교가 복잡하게 어우러져 강남의 독특한 엘리트 문화를 만들어낸 풍토는 북중국의 고전적인 문화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지역 전통 및 권력과 맞물린 것이었다. 무장과 문화 엘리트 사이의 긴장관계는 동진·남조의 군사적 약세를 이해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동진·남조에서는조정의 권력이라는 것이 군사적 능력의 양보다는 시문詩文이나 원림 설계 능력의 발휘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결국 강남에서 개창된남중국의 새로운 문화는 북중국의 군사화한 문명에 대하여 스스로를지켜낼 수 없었고, 당 초기에 이르면 이 지역 가문들은 부차적 위치로내려앉고 만다. - P64

한 제국은 유목 부족 세력을 제국 군사력으로 통합하기 위해 국경내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황하 유역에서는 점차중국 문화와 비중국 문화가 서로 뒤섞였다. - P30

귀족의 시대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기 동안 황제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덕분에 일부 가문이 조정과 지방에서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 어떤 가문도 몇 세대이상 조정을 지배할 수는 없었지만, 일부 가문은 수세기 동안 상당한영향력을 유지하였고 사회지배층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운명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가문이 중국에서의 높은 지위에 대한개념을 바꾸었고, 그리하여 사회지배층과 조정 간의 관계를 영원히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 P69

원래 서진에서는 사마씨 종실의 입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실 왕들을 각 지역에 군사권을 가진 도독으로 임명했는데, 이들이 중앙에서 벌어지는 사태에반기를 든 것이다. 그후 10년 동안 종실 왕 가운데 한사람이 주도권을장악하였다가 경쟁자들이 연합하여 그를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가 또다시 다른 왕들이 그를 무너뜨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정은 권위를 상실하고 군벌이 할거하였으며, 진 왕조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 기반이 파괴되었다. - P110

관중 지역과북중국 평원 지대는 4세기 내내 어지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명명한 이민족국가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저족 출신 군주인 부견堅이 황하 유역을 잠시 통일하기는 했지만 383년 그의 남중국 정복 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다시 분열기가 이어졌다. 이 분열 - P113

은 60여 년 후에 발부위가 재통일을 완수할 때까지지속되었다. - P114

진의 창업주인 무제 사마염은 한 제국 초기의 정책을 모방하여 265년에 27명의 황족을 왕으로 봉하였다. 각각의 봉국은 크지 않아서 5천에12만 호 정도 규모였고 그들이 양성하도록 허가받은 사병의 규모는5천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290년이 되면 6명의 강력한 왕들이 가장 인구가 많은 주의 중심지에 도독으로 임명되어 수만에 이르는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290년 이후에는 도독이 주의 자사를 겸직할 수있게 되었다. 이는 군정과 민정의 권한을 통합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작은 왕국을 만든 셈이었다.
이 정책은 대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왕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진의 군사 자원은 고갈되었고 진의 지배 아래 있던 이민족 세력이 자신들 왕조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 P133

420 년 유송 왕조의 건립은 동진·남조의 역사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 제국이 무너진 이후 황제의 조정은 2세기 동안 몰락해왔다. 자신들의 특권과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 조정을 필요로 했던 유력 가문들이 지탱해오기는 했으나, 중앙권력은남중국에서는 유력 가문들에 의해, 북중국에서는 단명한 이민족 국가들에 의해 파편화되면서 이미 쇠퇴한 상태였다. 그런데 징집된 사람,
피난민 중 자원한 사람, 유력 가문의 힘을 키우기 위한 세습 병사 등이 - P146

모인 직업군인의 군대가 403년의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평민인 유유가 420 년에 황제가 되자 황실과 유력 가문들 사이의 힘의 균형에 근본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후 두 세기 동안 유송, 제 양진의 남조는 한미 출신의 군인들이 다스렸고, 이들은 점차 유력가문들을 제치고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들 군인 황제는 지방에서는 현지 유력 가문들의 세력과 권위를 부정하지 못했고 기가에 대한 그들의 세습적 권리를 계속 인정하였다. 조정은 심지어 그들의 언행과 예술 활동을 모방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유력 가문의사회적 우위를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군인 황제들은 유력가문들로부터 권력의 토대가 되는 세 가지, 즉 군사력, 행정권한, 재부를 박탈하였다. - P147

황하 유역 중부와 서부 지역에서 흥기한 군사 국가들과 중국 동북지역의 국가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전자는 근본적으로 약탈을통해 생존한 유목 군대였고, 이에 비해 후자인 동북 지역의 선비 모용 - P154

부는 반정주민이들의 생활 형태에는 삼림 촌락, 농업 촌으로락, 유목 야영의 방식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지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이점을 누렸고, 복합적 성격을 띤 경제활동과 중국과의 정기적 교역관계 덕분에 유목군대와 중국식 행정을능숙하게 혼합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이 시기의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동북 지역(현재의 만주 남부와 하북북부)은 연이라는 이름을공유하는 선비족의 네 국가(전연燕, 후연後, 남연南, 北燕)가 연속하며 통치하는 다른 세계로 남아 있었다. 멀리 서북쪽의 감숙 회랑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명칭에 일관성이 있는 국가들이 등장했으나정치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이 지역은 원래 진의 한 주로 남아있었는데 이후 이곳에 모두 양이라는 이름을 쓰는 한족과 이민족의혼성국가가 다섯 개 등장한 것이다(전량前凉, 후량後 남서涼, 북량北凉). - P155

도시는 남북조 시대 동안에 세 가지 주요한 발전을 이루며 계속 변화하였다. 첫째, 중국이 분열되고 남쪽으로 양자강 유역까지 확장되자 각기 다른 현지의 지리 및 문화와 결합된 지역 수도들이 등장하였다. 특히 남중국의 경우에 지리환경이나 문화는 북중국과 확연하게 - P175

달랐다. 둘째, 지배층을 규정하는 새로운 문학적·문화적 양식이 출현하면서 이러한 활동을 위해 도시 내에 새로운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게되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북중국의 도시뿐 아니라 특히 남중국의 도시에서 전원의 별장과 더불어 출현한 준공공 장소인 원이었다. 셋째, 불교와 같은 교단 종교가 번성함으로써 새로운 공공장소의 성격을 지니는 사찰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과 도시 설계가등장하였다. - P176

위진남북조 시대 농촌 사회는 이전 사회 특징들을 계승하였으나 또한 중요한 변화를 겪기도 하였다. 첫째로 이 시대에는 중국 사회를 지탱한 작물과 기술에 있어서 몇 가지 혁신이 있었다(혹은 이전부터의 전통이 처음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들 작물 대부분은 중국 문명이 남쪽으로 팽창한 사실, 그리고 그에 따라남방작물이 도입되고 더 많이 재배된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둘째로 농촌 지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조직이 나타났다. 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력 가문이 지배하는 장원이 보편적이었으나 방치된 토지가 특히 북중국에서 국가의 직접적 소유와 관리 아래 놓이게되었다. 국가는 이들 토지 및 토지에 딸린 농민들을 직접 경제 생산에이용했을 뿐 아니라 고위관료와 점차 성장하는 불교 교단에 수여하기도 하였다. 북중국에서 질서가 붕괴되고 자위의 필요성이 커지자 새 - P233

로운 형태의 향촌 사회가 형성되었고, 이는 지방 공동체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반면 양자강 남쪽에서는 문인들이 전원으로물러나서 전근대 최초로 전원과 농촌의 생활에 대한 글을 썼다. - P234

초기 진한 제국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이전 전국 시대각국을 규정하였던 지역 지리와 지역 관습에 대한 연계를 초월한 새로운 제국의 건설이었다. 종교는 초월적인 하늘의 아들이자 신성한황제 한 사람에 집중되었고, 황제의 명령으로 건설된 인공적인 수도가 국가의 중심에 자리하였다. 모든 구분하여 오래된 고전문헌에 기초한 문어를 사용했으며 관료들은 황제의 종복이 되기위해 가문과 향리를 떠나야 했다. 이러한 초기 제국의 공간적 범위는대체로 중국 문화의 범위에 의해 정해졌다. 이렇게 정치체를 문화 위에 덧씌우는 양상은 동시대 북쪽에 흉노제국이 출현하면서 더욱 심화 - P293

되었다. 중국 제국이 통치하는 ‘문명의‘ 농경민들 그리고 선우가 통치하는 ‘야만의 유목민들이라는 두 양극화된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정주 농경민과 유목민 사이를 가르는 명확한 정치적 구분은 중국 내지에 유목민이 대규모로 정착하고 중국이 이들을 정치적 혹은 군사적목적으로 채용하며 아울러 흉노제국도 무너지면서 사라졌다. - P294

중국 주변 독립국들은 관례적으로 책봉 과정을 통해 건국되었다.
책봉 과정에서 지역 수장들은 중국 조정에 선물을 보내고 왕후로서의관작과 그에 맞는 인장을 받았다. - P296

이민족과 중국인이 평등할지도 모른다는 관념, 게다가 이민족이 어쩌면 더 우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개개인 단위로서가 아니라 국가전체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중국 불교도에게 인도가 성지가 됨에 따라 인도가 세계 중심이라는 의미에서 "중국"으로 간주되고 중국은주변적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거꾸로 불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은빈번하게 외래종교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불교의 정당성을 규탄하였 - P315

다. 어느 쪽 입장이건, 불교는 중국인과 외국인의 관계뿐 아니라 중국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분수령이 되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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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의 재주에 따른 인재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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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를 다시 이루려면? 들은 바를 따르고 아는 바를 행하라고 증자가 말한 것처럼 성의(진실한 뜻)을 간직하고 행한다면 선대의 훌륭한 왕을 따르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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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리커버) - 정치인류학 논고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 이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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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통합돼 있는 모든 사회는 과거에는 야만 상태였다"고 레이날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화를 자명한 것으로 보는 주장이 문명 상태를 그대로 국가의 문명으로 마음대로 연결시켜 후자를 모든 사회의 필연적인 도착 지점으로 상정하는 학설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직도 원시인들을 야만 상태에 놓여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P235

클라스트르의 대표작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읽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몇 년도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하다니 작가의 이력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만일 불의의 사고가 없었다면 진행중인 '원시사회의 전쟁론'에 대한 연구 결과물을 비롯해서 더 많은 지적 결과물이 생산되었을텐데 말이다.

현실은 도대체 어떠한가? 자연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이는 우리 세계와, 우리 세계의 데카르트적인 어리석은 시도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다. 이 시도가 생태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이제 겨우 측정되기 시작하였다)가 아니라 주위의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 전체를 놓고 볼 때 더 이상 원시 사회가 기술적으로 낙후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원시 사회 역시 공업화된 기술 사회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바꿔 말하자면 모든 인간 집단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환경에 대해 필요한 최소한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폭력을 제외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자연 공간에 형성된 사회는 전혀 없었다. - P237

몇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다. '발전 지향', '진화', '국가', '자연 지배', 서로 모두 연관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문명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고 문명은 야만에 앞서야 하며 진화라는 논리에 의거해 판단하고 인종적으로 더 나은 것이 있다 착각해왔다. 그 정점에 결국 국가가 있다는 생각이다.
진화 주의는 과학적인가. 그렇다면 고대 사회가 진화적으로 뒤쳐져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가. 원시 사회는 국가가 없는 사회이고, 문자가 없으며, 역사가 없는 사회이고, 시장 경제가 없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를 결여된 사회로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원시 사회의 인간에게 있어서 생산 활동은 정확히 필요의 충족에 의해 측정되며 제한된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란 기본적으로 에너지의 필요이며, 생산은 소비된 에너지의 양을 원래 수준으로 채우는 것으로 한정된다. 다른 말로 하면ㅡ축제 때의 사회적 소비를 위한 재화의 생산에 있어서 -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의 양을 확립하고 결정하는 것은 자연으로서의 생명이다. 즉 일단 에너지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키고 나면 원시 사회가 그 이상의 것을 생산하도록, 달리 말하면 어떤 목적도 없는 노동을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거나 소외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그 시간을 게으름을 피우거나 놀이나 전쟁 또는 축제를 하는 데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P244

베네수엘라 아마존 유역에 사는 야노마미 인디언들과 여러 해 동안 살아온 리조는 그 사회의 성인이 하루 노동하는 시간은 모든 활동을 포함하여 3시간을 약간 넘는 정도라는 것을 조사를 통해 밝혔다. 사냥과 채집은 대개 아침 6~11시 사이에 이루어지고 그것도 매일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의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나 식량을 찾아다녀야만 하는 동물적인 상태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짧은 시간만 일하고서도 생존-아니 그 이상-을 확보하였다.
그들은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과잉을 거부하면서 필요를 충족하는 생산활동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원시 사회가 잉여를 생산하지 않고 최소한의 경제 활동으로 굴러가므로 최대의 효율을 지녔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최소한의 지배력을 행사하며(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무리한 자연의 개발로 지구상에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나. 기후 위기가 아닌가. 개발이 최고라 자부한 지구 경제와 사회에 일침을 날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국가는 사유 재산을 소유하는 사람의 대표자이자 보호자라고 한다면 이런 재산을 거부하는 원시 사회 내부는 어떻게 사회가 굴러갈 수 있었을까. 정치는 경제와 별개이다. 국가의 기원을 경제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원시 사회는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 해서,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더 낫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지나친 풍요로움을 향한 욕망을 경계하며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연대기 작가들은 부족 연합의 대추장에게 "지방의 왕"이나 "소왕"이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였다. 투피-과라니 사회의 이 심오한 변화 과정은 유럽인의 도래로 돌연 중단되었다. 그것은 만일 신세계의 발견이 예컨대 1세기 늦어졌다면 브라질 해안 지역의 인디언 부족에서 국가 형성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의미인가? 어떤 것으로도 반증할 수 없는 가설적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언제나 쉬우면서도 위험하다. 그렇지만 이 투피-과라니족의 사례에 한해서 우리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즉 투피 - 과라니 사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국가의 출현을 막은 것은 서구인의 도래가 아니라 원시사회로서의 사회 자체의 자각이었다. - P265

그렇다면 원시 사회는 부족 사회인데 그들의 구심점이 되 주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추장이라는 지위가 존재하는데 그는 수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추장은 전쟁시 필요한 지도자 자격을 제외하고 평시에는 자신의 말로 사람들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추장은 자신의 설득이 그 사회에 통하지 않으면 추장으로서의 수행 능력이 없어 위신을 지닐 수 없게 됨을 인지하고 있다. 추장의 능력은 기술적 능력, 말솜씨와 사냥 실력, 군사 행동 조직 능력으로 판단된다. 추장은 이런 기술적 범위를 넘어서서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추장은 사회 봉사직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지구상의 흐름을 가속화시킨 두 가지의 혁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신석기 혁명으로 인한 이동 사회에서 정착 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나머지는 산업 혁명이다. 신석기 혁명으로 모두 정착 사회가 되었는가. 신석기 혁명으로 일부 사회가 정착 생활로 도시와 국가가 형성되었지만 여기에는 농업으로 인한 정주 생활만을 전제한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농경 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정주 생활이 이루어지는 사례들이 얼마든지 많다. 농경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능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되며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대다수 사회의 수렵에서 농업으로의 이행과 몇몇 사회의 농업에서 수렵으로의 반대되는 이행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러한 변동이 사회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도 이루어진다는 것,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완전히 변화하는 경우에도 사회 자체는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신석기 혁명이 당시의 인간 집단의 물질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생활을 편하게 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계적으로 사회 질서의 전복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원시 사회들에 관한 한, 맑스주의자들이 경제적 하부 구조로 명명한 수준에서의 변화는 정치적 상부 구조에 "반영되어" 그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자는 물질적 기초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 P249~250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적어도 그것과 똑같은 정도의진리로서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는 국가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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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6-05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시사회의 전쟁론]이 나올 수 없었던 비극이 있었군요

노란 표지의 이 책을 여러번 넘겨 보았으면서도, 정작 그런 부분을 전혀 몰랐네요

거리의 화가님, 정리해주신 내용보니 제가 얕게 읽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05 15:07   좋아요 1 | URL
책 읽을 때 저자를 먼저 확인하거든요^^ 이 책 내고 5년 만에 돌아가셔서 안타깝더군요. 조금 더 사셨으면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알라님께 도움을 드린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