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가을의 끝자락이다.
지난 주말 단풍과 은행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외부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오며 가며 눈에 띄는 하늘과 단풍의 사진을 담았다.
작년 단풍은 하나도 예쁘지가 않아서 아쉬웠는데 올해는 그보다는 나은 것 같다.
초록에서 빨강까지 여러 색으로 변화하는 잎파리를 보는 일이 즐겁다.






그러고 보니 11월 하고도 1/3이 지났다.

운동하고 책 읽고 좀 돌아다니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훅 간다.

THE AFFAIR 책은 며칠 전 집에 도착했다. 
근데 1차로 두께에 놀라고... 1장은 그럭저럭 읽을 만했는데 어려운 단어들이 뒤에 왠지 쭉 나열될 것 같은 느낌.
다행히 <파시즘> 읽기는 다음달로 미뤄지기는 했으나 이 책도 두께 때문에 이번 달 내로 읽기는 무리일 것 같다.
리차일드 처음 읽는데 원서라니 너무 겁없이 도전한 것 같기도 한...;;;















최근에는 한국사 민주주의 시리즈를 읽었다. 마지막 3권도 오늘로서 다 읽게 된다.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한국사를 민주주의라는 주제 하에 정리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예상했던 부분인데 한국은 짧은 시간 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정치, 경제, 사회가 변화하였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일어설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러고 보면 뜨거움이 때론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느 부분에 취약한지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얼마 전 중국에 갔을 때 서점에서 사고 싶었던 책이 있었는데 구하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아쉬웠다. 이 책만 없거나 있다고 해도 책 상태가 좋지 않아서 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짐 무게를 생각한 것이 있기도 했지만...

이 책은 국내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인기 작가의 대표작이라 이곳에서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검색해보니 역시 있었다.

타오바오 등의 직구로도 구할 수 있으나 배송비나 통관 등을 생각하면 그게 그거라... 이 책을 사는 김에 중국의 택배 기사 이야기를 다룬 책도 함께 샀다.


그리고... 

자우림 12집이 나와서 샀다. 어느덧 정규 12집이라니... 

늘 그렇듯 타이틀곡은 대중적이라서 내 취향에는 수록곡이 훨 좋다!

내일이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음반은 소장용, 이미 음원으로 어제부터 듣기 시작했다^^












입동은 지났으나 아직까지는 그래도 가을인 듯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5-11-1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어페어 1장이 읽을만 하셨다면 문제 없으실 겁니다! 중간중간 어려운 묘사가 나오긴 하는데 첫부분이 젤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저도 아직 읽는 중입니다만.
자우림이 12집이 나왔군요?! 얼마전 자우림을 모르는 서른살 직원을 만나서 충격받았는데 ㅜㅜ

거리의화가 2025-11-11 16:25   좋아요 0 | URL
아... 그나마 다행이군요. 1장 처음부터 흥미진진하더라구요. 리처를 묘사하는 부분에선 빵 터지기도 했습니다!ㅋㅋ
자우림은 연식이 오래되긴 했지만 락페스티벌이나 기타 공연 등에 꾸준히 출연을 하는지라 젊은 팬층도 은근 많더라구요. 스물다섯스물하나가 드라마 ost로 쓰이면서 더 알려진 것도 있고요. 지난 번에 저희 동네 와서 공연했을 때 10, 20대들이 열광적으로 노래를 따라부르는 것 보고 놀랬더랬습니다. 이번 앨범도 들을수록 좋네요.

책읽는나무 2025-11-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우림 벌써 12집이 나왔군요?
대단한 자우림!^^
그리고 어페어 원서 읽으시는 화가 님도 대단하시구요. 파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5-11-11 16:26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벌써 12집! 가수의 연식만큼 팬도 나이가 들고 있지만 그래서 더 뜻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꾸준히 앨범을 내주어 감사할 따름이죠.
사실 잭리처 책을 처음 읽는지라 뭐가 뭔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욕심 안 부리고 천천히 저만의 속도로 읽어보려구요. 감사합니다^^
 

<어른에게 드리는 글>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주시오.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사자주 이야기를 하여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은 때맞춰 하도록 하여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하게 하여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주시오. - P124

3·1운동 시기 지하 신문은 대안언론의 역할을 했다. 사설을 통해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고, 기사를 통해 국내외의 3.1운동 소식을 알 - P135

리고 이를 왜곡하는 <매일신보》를 규탄했다. 또 국내외의 임시정부 수립소식을 알려 만세시위 확산을 북돋웠다. 지하 신문 발간 운동은 곧 언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또한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언론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일본 내의 목소리조차 무시해온 조선총독부에대한 일대 가격이었다. - P136

1924년 6월 20일에 열린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는 언론인 최초의 언론 자유 투쟁이었다. 그해 4월 2일 박춘금을 비롯한 각파유지연맹원들 - P141

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이사 김성수를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각파유지연맹은 1924년 3월 25일에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12개 친일단체가 모여 결성한 연합체였다. 각파유지연맹은 창립총회에서 독립사상과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총독부를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3월 30일자와 4월 2일자 사설은 각파유지연맹 결성 과정을 밝히고, 각파유지연맹이 ‘총독정치의 선전기관이며 이를 좇는 자들의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각파유지연맹이 송진우와 김성수를 협박했던 것이다. 각파유지연맹원들은 두 사람에게 <동아일보> 사설과 같은 주장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송진우는 사담(私談)이라는 문구를 넣어 각서를 썼고,
김성수는 개인 돈 3000원을 주기로 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 P142

낮고 가난하고 뒤떨어지고약하고 천하고 굽실대는 자는 누구였던가? 아아, 우리 백정이 아닌가? 그런데 이와 같은 비극에 대하여 사회의 태도는 어떠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압박과 멸시만을 하였도다. 이 사회에서 우리의 연혁을 아는가? 모르는가? 결코천대를 받을 우리가 아니다. 직업의 구별이 있다고 하면 짐승의 생명을 뺏는자 우리 백정뿐만이 아닌가 하노라. 본사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적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2000만의 1인이라. - P151

조선총독부는1932년 말부터 ‘백정의 해방은 형평운동보다 계급운동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형평사 해소를 조종하는 동시에 적화운동을 위한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100여 명의 급진파를 검거했다. 형평청년 전위동맹사건이 그것이다. 급진파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온건파였다. 이제 형평사는 온건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리고 형평사는 1935년친일융화를 표방하는 대동회로 개편되었다. 스스로 생존권을 찾아나서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결국 식민권력에 포섭된 것이다. - P159

일찍이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시에 내가 설립에 관한 용무로 도쿄에 갔을때 구보다(保) 추밀원 고문관에게 호출되어 대학 설립에 관한 여러 가지이야기를 나누었던 바, 그는 조선에는 법과대학이 필요 없지 않은가? 오히려그보다는 농과대학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민립대학 설치 운동이 꽤 맹렬하여 기부금 모집을 시작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선교사들도 사립대학 설립의 계획이 있었으며이들 대학은 주로 법률·정치·경제 등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관계상 이때만약 관립의 법과대학을 세우지 않으면 조선에서 법률·정치·경제 등의 최고교육은 이들 사학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당시 민족운동을 볼 때 이는심히 위험시되는 것이라고 답변하여 이해를 얻었던 일도 있다. -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30년 봄까지 이어진 광주학생운동에는 전국 13도에서 280여 개 학교가 참여했다. 참가 학생은 연인원 5만 4000명에 달했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 학생은 8만9000명이었다.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은1642명이었다. 시위 주동자 혹은 가담자로 퇴학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은 2330명에 달했다. 1929년 12월에는 일본에서,
1930년 1월부터는 중국 관내와 만주, 연해주, 미국 등지에서 한인 사회가 나서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집회를 열었다. 203·1운동으로 첫 등장한 학생세력은 6.10 만세운동에 이어 전국적인학생시위로 발전한 광주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대중시위의 선봉대였다. 맹휴를 통해 다진 결속감을 바탕으로 한대중 동원은 압도적이었다. - P83

원산노동연합회는 결성 직후부터 1927년까지 3년 동안 26건의 파업 - P92

을 주도하여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미리 자금을 모아 파업기금을 준비했고 소비조합과 노동병원, 노동자 이발부를 설치하여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했다. 산하 조합마다 구제부를 두어회원 노동자들의 상호부조 활동에 힘썼으며, 회원이 사고를 당해 작업을못하거나 병에 걸리는 경우 생활비를 지원했다. 그러므로 원산의 노동자들은 다투어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조합에 가입하려고 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이러한 강력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단체교섭을 확보함으로써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아가 원산노동연합회가 주체가 되어 지역 내 모든 화주들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시도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해 화주들에게 노임표 조회를 요구했다. - P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시대의 건널목, 19세기 한국사의 재발견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구입해온 책을 기반으로 알라딘이 추천하는 책들을 간혹 볼 때가 있다. 그렇게 얻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한국사 3부작 중 첫 권인데 시리즈가 올해 초 완간되었다고 하여 3권 다 구비했었다.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거의 다 완독했고 파시즘을 읽게 된 김에 이 시리즈를 읽어보면 좋겠다 생각하여 읽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최선이고 정답이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적 시각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특히나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는 양분화되어 소수당의 목소리는 묻히고 있는데다 그마저 다수당도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현실상 내가 가진 의견이 국회에 반영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정작 중요하게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그걸 외면하는 국회나 정부에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민주주의가 차선책으로라도 가장 나은 대안일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대중 운동의 한 정점이었던 3.1 운동 이전까지 정치체제의 변혁 과정에 대한 역사를 다룬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치기를 지나 일제강점기가 될 때까지 짧은 시간에 조선은 압축적인 정치 변혁 과정이 이루어졌다. 신분제의 해체와 더불어 서양 근대 개념이 수용되면서 민중은 억압되어 있던 불만의 목소리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목차를 구성하여 내용을 정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인민, 자치, 정의, 문명, 도시, 권리, 독립 말이다. 인민, 자치, 정의, 권리는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라면 문명은 조선이 왕조 국가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지식인이) 먼저 수용해야 할 키워드였다. 도시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결과이고 독립은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과 민중이 함께 외친 함성이었다.

‘인민‘은 19세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피지배층을 뜻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정치적 주체라는 의미로 변화되었으며 소외 계층이 인민화되는 과정을 수반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소외 계층이라면 노비, 여성, 백정이라고 할 수 있다.
1801년 공노비가 해방되고 1894년 사노비까지 노비 해방이 되었으나 신분적 차별의 뿌리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독립협회는 노비제 잔재 청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학은 여성과 남성은 다 같은 종교인이며 과부의 재혼을 허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독교와 독립협회는 여성을 위한 교육과 계몽 운동을 벌였다. 찬양회는 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 기치를 내걸었으며 여기에 독립협회도 함께 가담하여 활동을 해 나갔다.
백정은 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었고 동학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백정을 위한 목소리는 형평사 조직 후 모욕 호칭이나 교육 차별을 금지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갔다.

‘자치‘는 대안 공동체적 개념이다. 천주교는 학문(서학)으로 수용되었다가 이후 종교로 수용, 확대되었다. 천주교는 자치공동체로서 교우촌(하느님을 따르는 친구들의 모임)을 만들고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만들어 팔며 공동노동/분배하는 조직을 시도했다.
동학은 천주교의 인간존엄적 평등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조선 고유의 습속은 거스르면 안된다는 교리로 시작하였다. 최제우는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라고 했으며 최시형은 ‘모든 사람, 사물, 사건에 하느님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빈부귀천 뿐 아니라 사물, 사건에도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 놀랍다. 이들은 개인 수양이자 마음 공부를 가장 중요시했다. 자치공동체는 접주제(종교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포주제(정치, 군사 공동체)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였다.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으로 대중들을 종교 운동 안에 끌어들였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종교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시기에 맞게 독립과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의정회, 전도사회, 소년회 등의 조직을 꾸려 활동했다. 특히 천도교소년회는 경어를 사용하고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의‘는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투명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인민의 노력이었다. 삼정의 문란,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농민들은 생존권이 흔들렸고 이에 억눌렸던 설움이 봉기로 나타났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수많은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민란 중심 세력은 빈농이었으나 유지층과 지식인, 수공업자, 노비, 유랑민, 날품팔이 등도 동조했다고 하면 나라가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 이해가 갈 만하다. 정부에서 삼정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도리어 폐해가 심해지자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은 토지평균분작, 노비제와 천민 차별의 철폐, 청춘 과부의 재혼 허용, 지역과 문벌을 타파한 인재 등용을 강조하며 대의를 제시했다. 반봉건에서 시작한 전쟁은 청일전쟁을 전후로 반외세까지 더해진다.

‘문명‘은 근대적 시민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개념이었다. 서양 문명관을 수용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생각에 지식인들은 서양 학문에 주목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서양 문명 담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1894년 정부에 의해 보통 교육이 시작되었고 대중들의 호응도 이어지면서 사립학교 설립 붐이 인다. 음력 시간에 길들여져 있다가 이때 서양식 시간 관념이 받아들여지면서 양력이 일상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근대에 들어와 형성된 공간이자 자발적 결사체들이 시위나 집회로 목소리를 내는 공간이었다.
독립협회는 오늘날로 말하면 민회(국회)적 기능을 정부에 요구하였는데 고종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고 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독립 협회는 매주 토론회를 열었는데 누구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지만 굳이 가입하지 않아도 토론회를 방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토론으로 결성된 의견은 독립신문 등의 매체에 실어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국권 수호를 위해 전국에 284개의 결사체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대중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 시위의 꽃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가 아닐까 한다. 정부의 폭압적 진압이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을텐데 참으로 아쉽다.

‘권리‘는 ‘인권‘과 ‘민권‘을 자각한다는 의미였다.
조선에서는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인민화와 개인화가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을 통해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본격적으로 개인이라는 개념은 20세기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리잡았다. 특권이 해체되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자주노동이라는 개념도 퍼졌다(권세 있다고 남에게 빌붙어 얻어먹으려하는 자들은 더이상 좋은 시선을 받기 어려웠다는 뜻). 한편 교과서를 통한 윤리 교육으로 자립, 근면, 공공성에 대한 가치가 교훈적으로 전파되었다. 재판소 제도 설립 등 사법권이 제도화되고 신체형, 연좌제가 폐지되는 등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지만 국권이 피탈되면서 국권과 민권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으냐는 지금도 생각해볼 문제이나 예전만큼 집단의 목소리를 내기란 어려워진 게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지방자치 제도를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박영효의 현회 제도(인민이 법을 제정하면 이것을 의회에서 논의하자)나 손병희의 향자치 제도가 그렇다. 유길준의 부민회는 비록 한성에서 시작했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근대 말 식민지 초 조선에서 민중이 권리를 자각하고 목소리를 외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활동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형태와 비슷한 단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정치 체제는 왕조 국가에서 전제군주정으로,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3.1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입헌군주제가 좀 더 대중적인 호응이 있었으나 민주공화정이 대세가 된다. 다음 권은 192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말까지를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루는 것 같다. 기대를 해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으로 1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제2조에 처음으로 주권 규정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있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그런데 1925년에 2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3조는 ‘대한민국은 광복운동 중에는 광복운동자가 전 인민을 대(代)함‘이라고 명시하고있다. 1927년에 3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약헌‘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국권은 인민에게 있음. 광복 완성 전에는국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음‘이라 하여 임시정부의 주권이 원칙적으로는 인민에게 있으나, 독립하기 전에는 독립운동가가 이를 대리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40년 4차 개헌에 따라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약헌‘ 제1조 역시 ‘대한민국 국권은 인민에게 있되, 광복 완성 전에는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다‘라고 하여 1927년의 헌법과 대동소이하다. 5차개헌에 따라 1944년에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4조 또한 ‘대한민 - P29

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음.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주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8조에서는 광복 이전에 주권을 갖는 광복운동자가 누구인지도 명확히 밝혔다. ‘조국 광복을 유일한 직업으로 인정하고 간단없이 노력하거나 또는 간접이라도 광복사업에 정력 혹은 물력의 실천 공헌이 있는 자‘가 바로 광복운동자였다.33이처럼 ‘광복운동 기간에는 광복운동에 공헌한 광복운동자만이 대한민국 전체 인민을 대신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는 조항에는 모든 인민에게주권이 있음을 전제하면서도 영토와 인민이 부재한 망명정부로서의 정체성을 반영한 ‘임시‘ 헌법으로서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 P30

임시정부의 승인외교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신탁통치가 아닌 스스로 독립국가를건설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었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는 ‘당면정책‘을발표하여 국내로 들어가서 과도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정부 역할을 할 것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거부했고, 임시정부 지도자들은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승인 문제가 헌법 체계를 갖추고 27년간명맥을 유지했던 임시정부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다. - P36

민주공화국의 의회는 본질적으로 국민 의사의 대의기관임을 헌법에 명기하되, 여건상 국내 선거가 불가능하므로 국내 원적을 기준으로 독립운동가가 해당 지역 선거권을 대행하도록 하여 의정원이 ‘임시‘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의회가 국민의 대의기구임을 입증하여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 P43

4년 넘게 존속한 신간회는 전국적으로 140여 개가 넘는 지회를 바탕으로 두고 각종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하거나 적극 개입하면서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민족주의 좌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진영이관철시킨 해소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걸었다. - P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