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래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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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었는데 결국 읽고 있는 책에 언급되어서 읽었다.

외국 소설을 읽을 때면 매번 등장 인물이 많아서 힘들고, 인물들 이름이 어려우니 되돌아가서 자꾸 읽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인물 관계도 복잡해서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한 건데 하다 보면 완독을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이렇게까지 힘들게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 소설은 이야기도 비교적 짧고 등장 인물들도 많지 않아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독자들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유람선에 있던 사람들이 말로라는 선원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작가는 콩고강을 운항하는 기선의 선장으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체험이 소설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작가의 체험과 극중 화자인 말로의 이야기가 동일시될 수는 없겠으나 어느 정도는 따오고 일정 부분 허구를 덧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쪽 끝에는 일곱 가지 무지개색으로 표시된 크고 번질거리는 지도가 한 장 놓여 있더군.
붉은색이 차지하는 면적이 아주 넓었는데, 그곳은 언제 보아도 우리를 흐뭇하게 하지.
거기서는 어떤 실질적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야.
파란색 지역도 꽤 넓었고 녹색 지역 약간에 귤색도 보이더군.
그리고 동해안의 자줏빛 지역은 명랑한 발전의 선구자들이 그 좋다는 라거 맥주를 마시고 있는 곳을 가리켰어.
그러나 나는 그런 색이 칠해져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게 아니었지.
노란색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어. 그곳은 지도의 한복판에 있었어. 바로 거기에 그 강이 마치 뱀처럼 매혹적으로 무시무시하게 놓여 있었지.

19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자원에 탐을 내고 꽂으면 깃발이 되는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였다고.

말로는 아프리카의 벨기에령 콩고에서 기선 선장으로 취직한 후 콩고강 상류의 오지까지 배를 몰고 가는 과정에서 온갖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콩고에 도착하여 자신이 그렸던 모습과 다른 현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다 주재원 커츠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그 목적을 위해서 일명 흐린 눈 처리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실상 커츠는 현지의 주재원들에게 칭송을 받았을지 몰라도 현지의 원주민을 착취하고 코끼리의 상아를 약탈하는 데 몰두하는 인물이었다.
현지 회사 지배인은 그가 상도덕을 무시하고 일명 선(?)을 넘자 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 정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로는 커츠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점차 궁금해한다.

사실 커츠의 타락한 도덕성의 진면목을 보고 나는 종국에는 말로가 그를 욕하거나 갈등이 폭발해서 부딪치는 장면이 나올 거라 예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말로는 몸이 약해져 배 위에서 ˝무서워!˝를 외친 후 죽게 되는데 말로는 그런 그의 모습이 삶에 대한 후회를 표시하는 동시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았다.
말로가 그에게서 일정 정도 연민을 느낀 것은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어떠한 감정적 발로가 아니였다고 보인다.

한때 커츠의 소유물이었던 것이 모두 내 손에서 빠져나갔어. 그의 영혼, 그의 육신, 그의 주재소, 그의 계획, 그의 상아, 그의 필생의 과업 같은 것 말이네.
남은 것이라고는 그에 대한 기억과 그의 약혼녀뿐이었어. 말하자면 나는 그런 것들마저 과거로 넘기고 싶었던 걸세.
나는 아직 내게 남아 있던 그의 잔재를 인간의 공동 운명에서 마지막 경지라고 할 수 있는 망각의 세계로 손수 넘겨주고 싶었던 거야.
나는 내 처사를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진실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히 몰랐으니까.
아마도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커츠에게 충실하자든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여러 면모에 도사리고 있는 기이한 필요성 중 하나를 수행해야겠다는 충동이었을 테지.

이처럼 말로는 커츠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약탈하는 것이 정당한가 인종주의는 옳은가 라는 단순한 질문과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당시 아프리카로 내려간 유럽인들이 모두 현지 주민을 약탈하는 등 제국주의적 행동을 했을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적어도 선의나 호의를 갖고 접근한 사람들도 있었을테니.

보고서의 주장은 이렇게 시작되. 우리 백인들의 발전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네들 야만인에게는 마땅히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하느님 같은 힘을 과시하면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등의 내용이 바로 그거야.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의지를 행사하기만 해도 실제로 무한한 이익을 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바로 여기서부터 그의 어조는 고양되어 나를 사로잡기 시작하더군. 보고서의 맺음말은 화려했어.
위엄 있는 선의를 가지고 그 거대한 이국적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어.
그 구절을 읽으니까 나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더군.

그러나 이는 정확히 제국주의적 시각이며 화자인 말로의 생각과 행동에도 은연 중에 드러난다.
야만을 문명화하겠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은 제국주의가 어떤 귀결로 끝이 날지 당연하겠지만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로 들어왔을까? 우리가 그 말 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까? 말을 할 줄 모르고 아마 귀까지 먹었을 그 세계가 실로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했어. 그 세계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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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에게는 성서, 십자군, 이슬람,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 등이 끝없이 의식되지 않을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선구자들이었음과 동시에, 동양화된 동양, 곧 오리엔탈리즘의 학자들이 만들어 낸 동양도 통과해야 하는 시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억제 현상으로 오리엔탈리스트 저술이,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공적인 요구에 의해 과도하게 제약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 P296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스스로의 동양적인 소재를끊임없이 수정하여, 그것을 스스로의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사업의 특수구조 속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흡수했다. 그러나 이는 동양이 그들 작품에서 부수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레인(그의 작품을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부끄러움도 없이 차용하고 있다),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르낭, 사시와 같은 저술가들과는 대조적으로-그들의 동양은,
파악되고 착복되고 환원되고 기호화된다고 하기보다는 가능성으로 가득한 광대한 장소로 거기에서 살고, 미와 상상을 위하여 이용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작품의 구조가 자율적 심미적 • 개인적인 사실로서문제되었을 뿐, 어떻게 하면 희망대로 동양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그것을 생생하게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그들의 자아는결코 동양을 흡수, 동화하지 못했고, 또 동양을 동양에 관한 기록이나 - P318

텍스트 의존적인 지식(요컨대 공식의 오리엔탈리즘)과 완전히 동일시한 적도 없었다. - P319

르낭과 사시 그리고 레인과 같은 초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역할은 자신들의 작업과 동양의 쌍방에 대하여 무대장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뒤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학술적인 사람이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든 간에 이 무대를 철저히 지켰다. 나아가 그 뒤에 와서는 무대가 경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경영이라는 게임을 위하여 개인보다 제도를 설정하고 정부를 개입시키는 쪽이 훨씬 낫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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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에게는 성서, 십자군, 이슬람,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 등이 끝없이 의식되지 않을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선구자들이었음과 동시에, 동양화된 동양, 곧 오리엔탈리즘의 학자들이 만들어 낸 동양도 통과해야 하는 시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억제 현상으로 오리엔탈리스트 저술이,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공적인 요구에 의해 과도하게 제약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 P296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스스로의 동양적인 소재를끊임없이 수정하여, 그것을 스스로의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사업의 특수구조 속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흡수했다. 그러나 이는 동양이 그들 작품에서 부수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레인(그의 작품을 네르발과 플로베르는 부끄러움도 없이 차용하고 있다),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르낭, 사시와 같은 저술가들과는 대조적으로-그들의 동양은,
파악되고 착복되고 환원되고 기호화된다고 하기보다는 가능성으로 가득한 광대한 장소로 거기에서 살고, 미와 상상을 위하여 이용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작품의 구조가 자율적 심미적 • 개인적인 사실로서문제되었을 뿐, 어떻게 하면 희망대로 동양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그것을 생생하게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그들의 자아는결코 동양을 흡수, 동화하지 못했고, 또 동양을 동양에 관한 기록이나 - P318

텍스트 의존적인 지식(요컨대 공식의 오리엔탈리즘)과 완전히 동일시한 적도 없었다. - P319

르낭과 사시 그리고 레인과 같은 초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역할은 자신들의 작업과 동양의 쌍방에 대하여 무대장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뒤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학술적인 사람이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든 간에 이 무대를 철저히 지켰다. 나아가 그 뒤에 와서는 무대가 경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경영이라는 게임을 위하여 개인보다 제도를 설정하고 정부를 개입시키는 쪽이 훨씬 낫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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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에티카 - 전쟁·철학·아우슈비츠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고은미 옮김 / 소명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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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기억’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닌 항상 현재의 문제이다. 과거의 폭력의 기억이 지금 질문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기억이 지금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 P4

한동안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질문과 회의가 오갔던 시기가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현상인데 그것은 기록에 의거하거나 누군가의 증언에 의해서 대신해서 말하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100% 진실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은 쓰는 사람의 의견에 따라 재단될 따름이고 증언도 보는 사람의 눈과 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에서다(착각했거나 사후 편집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럼 기억과 추모는 무의미한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지하에 묻혀 있어 생존자들이 사라져서 어딘가에서 끌어올려지지 않으면 문제 제기조차할 수 없는 사건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장은 위에서도 볼 수 있듯 기억은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루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세계철학사> 4권을 읽으면서였는데 우선은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추가적으로 한나 아렌트와 헤겔, 레비나스의 입장에 대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 제기가 궁금하기 따름이기도 했다. 읽기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뒷부분에는 일본의 근대 사상과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도 들어 있어 내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저자는 아렌트, 헤겔, 레비나스 등의 입장에 대하여 대부분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일부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3부의 세 번째 장에서 ‘망각의 구멍’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녀는 강제수용소 및 절멸수용소의 현실을 통해 ‘계속 생각해 나가야’만 하는 가장 ‘두려운 것’을 인지했다. 수백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량학살이 한쪽에서의 인종투쟁과 다른 한쪽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전제 아래 강철 같은 엄격함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혹은 대량생산적으로” 집행되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이 저 두려움의 중심에 있음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조차 없다. … 동시에 또한 “희생자의 흔적도 없는 소멸이 전체주의 체제에 있어 얼마만큼이나 중요했는지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 P12, P13

‘망각의 구멍’이라는 번역어가 어색하다는 것은 넘어가기로 하자. 망각의 구멍은 소멸한 존재들이 쓸모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완전히 지워서 존재한 적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렌트가 말한 바는 저자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아렌트의 후기 저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망각의 구멍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정도로 완벽하지 않다.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세계에는 인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완전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 한 사람은 살아남아 보아왔던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 P20

앞선 저작에서는 인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일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앞선 주장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을 꺼내놓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반드시 누군가 한 사람은 살아남아 보아왔던 일을 이야기’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증언 자체가 ‘역사’가 될 수 있을지 아닐지는 결코 보증될 수 없다. ‘완전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아렌트의 발언은 «전체주의의 기원» 의 인식으로부터 명백히 후퇴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P25)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저자의 말도 납득은 가지만 아렌트가 입장을 변화시켰던 배경에 대해서도 이해는 간다(그녀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고 사람의 입장이 어떻게 대쪽 같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그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고 그린 악인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히려 우둔한 광대였다고 그녀가 고백하자 이야기를 들은 대중들은 그렇다면 누구나 아이히만과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냐며 비난을 퍼부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저작은 출간되었으나 히브리어로 번역되지도 못했고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책을 출간하느냐 물었을 때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정의만은 영원히”라는 격언으로 대답했다.

란즈만 감독의 영화 «쇼아»를 바탕으로 펠먼은 ⌜증언의 시대에=클로드 란즈만의 <쇼아>⌟라는 글을 썼다. 이 영화는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증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2차 세계대전 절멸수용소에 있었던 이들은 절대로 증언해서는 안되도록 강요받았기에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은 영화 앞에서 증언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나치는 떠나면서 그들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려고 했다. 영화의 화면은 수용소가 없어지고 빈 공터가 되어서 평화롭기만 한 광경이라 더 기묘하게 느껴진다.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보면서 자연스레 나는 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렌트는 European mankind의 위기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렌트에게 “서양의 몰락”이란 ‘유럽이라는 여러 민족들의 가족”이 붕괴되면서 ‘인종사회’화되는데 이는 유럽의 아프리카화로서 표상된다. 여기서 민족이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정치적 조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이 문장만 봐서는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인종 망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학자는 바로 그런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자신의 연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인종주의 광신자는 이 경악을 초월해 있다고 자칭하기 때문에, 나아가 온갖 종류의 인종사상에 정당한 싸움을 거는 사람은 인종사상이란 대개 아무런 현실적 경험의 기초도 갖지 않는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보다 조셉 콘래드의 이야기 ⌜암흑의 핵심⌟ 쪽이 역사, 정치, 비교민족학의 저작들보다 인종 망상에 대한 경험의 배경을 밝히기에 더 적절할 것이다(P107). 과연 그런가. 저자는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고 있다. 주인공이 만난 아프리카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적 표상의 근거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신의 상처는 상흔을 남기지 않고 아문다”고 헤겔은 잘라 말했다.
«정신현상학» 6장 정신의 마지막, ‘악과 용서’의 논의이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모든 실재’로서의 이성의 자기 확신이 ‘진리’로까지 고양되고, “자기 자신을 세계로서, 또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행위도, 그 어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도 역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부정성의 기억-역사의 상흔-은 정신의 힘을 통해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아렌트의 주장과 맥락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저자의 의견을 짐작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그 상처가 아물고, 양자 사이에 화해와 유화가 성립되는 일이 가능한가.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고 그 의도나 부정성의 기억을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피해자의 상처가 너무 깊다면 용서란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레비나스는 더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신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물론 헤겔도 ‘인간의 온갖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정신에 반하는 죄만은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공적 역사에 의해 부당하게 박탈당한 개인의 생의 의미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정의’를 손에 넣을 수 있는가(P169)에 대하여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은 ‘나’를 응시하고 고발하는 존재로 심판은 나에게 내려지기 때문에 나는 교환불가능한 존재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타자를 위한 변호의 책임으로부터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타인은 자신의 비참함 가운에서도 이미 제3자에 봉사한다. 타인의 증인인 나는 증인의 증인이다. ‘나’가 그 ‘증인’인 ‘타인’은 ‘제3자’를 변호한다. 이 구조 속에 공적 공간에 울려 퍼지는 증인들의 목소리는 변호가 가능해진다.
다만 ‘자아의 유일성은 번식성(부계)에 의해 성취된다’고 말하고 ‘아버지의 공통성이 있는 한 모든 인간은 형제이다’는 입장을 취하기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저자는 ‘번식성’이라는 ‘무한의 시간’은 ‘증언’의 무한반복가능성에 한정해야 하는 하나의 경우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한 증언’은 아버지의 공통성을 넘어, 모성까지도 초월해야 한다고 말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하이데거와 <유대인>»의 일본어판 서문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은 없다⌟에서 ‘교토학파’의 ‘정치철학’-이른바 ‘세계사의 철학’-을 언급하면서, 대동아전쟁에서 ‘유럽 근대’를 초극할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그 학파 안에 실제로는 ‘유럽적인 형이상학적 모티프의 회귀’가 확정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 P199
근대 세계는 유럽풍 일색으로 빈틈없이 필하려는 세계였다. 이는 유럽 근대의 원리가 공리적 이지적이었던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도의적 세계원리는 그러한 것과 다르며, 각 민족 본연의 우수함을 살리고 서로 다름의 근저에서 깊숙한 통일성을 실현하려는 작용이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한 구성에 존재하는 것이 ‘자리를 얻는 일’이며, 그러한 구성을 만드는 것이 ‘자리를 얻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 점에 있어 비로소 일본적 세계가 일본을 지도적 중심으로 삼으면서, 각 민족 제각각이 자리를 얻어 진실한 공영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 P237~238
교토 철학은 세계사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기본이다. 이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고야마 이와오는 일본이 세계사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체의 독자성에서 찾아야 한다 말한다. 또 교토학파는 유럽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각 민족 각 국가가 제각기 그 자리를 얻음으로써 세계사에서 자기 자리를 위치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으로의 회귀가 되고 말았다. 일본의 철학적 내셔널리즘의 논리의 시작이다.

사실 더 다루고 싶은 내용들(국민국가, 인종주의 등)이 많은데 내용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려고 한다. 마침 러시아 내전을 읽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더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다. 폭력과 기억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일 것 같다.

모든 폭력, ‘근절’의 폭력, ‘세계’의 외부에 있는 절멸이든 ‘세계’ 그 자체의 절멸이든, 일반적으로 절멸의 폭력, ‘인간이 기억할 수 있고 모종의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 세계’라 불리는 것의 창설 자체가 이미 ‘근절’의 폭력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멸의 폭력의 망각과 은폐에 의해 자기를 ‘법’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 그 자체의 폭력, ‘법’ 그 자체의 폭력, ‘벽’을 만들어 ‘경계선’으로 ‘에워싸는’ 것 그 자체의 폭력, ‘법’으로서 작용하는 기억 그 자체의 폭력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세계에는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 ‘기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억’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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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늪지대에 상륙해 숲을 거쳐 행진한 끝에 한 기지에 이르러 야만적인 습속이, 그것도 아주 철저히 야만적인 습속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꼈을 걸세. 숲속에서, 정글 속에서 그리고 야성적인 인간의 가슴속에서 격동하는 황야의 신비로운 생명을 모두 느꼈을 거야. 그런 신비의 의미를 이해할 도리야 물론 없지. 전혀 이해되지 않고 그래서 역겹기까지 한 것들의 한가운데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그 신비에는 매혹적인 면도 있어서 결국 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지. 말하자면 그건 역겨움이 주는 매혹이야. 점점 깊어지는 후회, 도망치고 싶어 못 견디는 마음, 어찌할 도리가 없는 혐오감, 굴복, 증오심 같은 걸 상상해 보게나."

그들은 그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손에 잡히는 것을 다 움켜잡았을 뿐이야. 그것은 폭력적인 강도 행위요, 대규모로 자행되는 흉측한 살인 행위에 불과했는데,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 행위에 덤벼들었어. 그것은 일종의 암흑 세계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나 아주 적합한 행위지. 이 세계의 정복이라는 것이 대부분 우리와는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약간 낮은 사람들에게 자행하는 약탈 행위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 행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아름답지 않아. 그런 꼴사나운 행위를 대속(代贖)해 주는 것은 이념밖에 없어. 그 행위 이면에 숨은 이념이지. 감상적인 구실이 아니라 이념이라야 해. 그리고 그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지. 이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하며 제물(祭物)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이거든

한쪽 끝에는 일곱 가지 무지개색으로 표시된 크고 번질거리는 지도가 한 장 놓여 있더군.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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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지하는 면적이 아주 넓었는데, 그곳은 언제 보아도 우리를 흐뭇하게 하지. 거기서는 어떤 실질적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야. 파란색 지역도 꽤 넓었고 녹색 지역 약간에 귤색도 보이더군. 그리고 동해안의 자줏빛 지역은 명랑한 발전의 선구자들이 그 좋다는 라거 맥주를 마시고 있는 곳을 가리켰어. 그러나 나는 그런 색이 칠해져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게 아니었지. 노란색
10)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어. 그곳은 지도의 한복판에 있었어. 바로 거기에 그 강이 마치 뱀처럼 매혹적으로 무시무시하게 놓여 있었지.

그 모든 사업이 내세우던 박애적 구실, 그들이 주고받은 말, 그들의 운영 체계, 그들이 보여 준 사업의 겉모습 같은 것들만큼 그 기색도 실감 나지 않았으니까. 실감 나는 느낌이 있었다면 그것은 상아를 구할 수 있는 거래소 근무 명령을 받고 사업 실적에 따라 일정 비율의 성과급을 벌어들였으면 하는 욕구뿐이었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서로 음모를 꾸미고 헐뜯고 미워했지만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도 절대 까닥하지 않았어. 정녕 이 세상 이치(理致)는 어떤 사람에게 말을 훔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말의 굴레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나 봐. 눈치 보지 않고 말을 훔치겠다고? 좋아. 실제로 말을 훔쳐 타고 다닐 수도 있겠지. 그러나 말을 훔치기는커녕 굴레만 쳐다봐도 가장 자비로운 성인들까지 화를 내게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야.

‘그분은 연민과 과학과 진보, 그 외에 여러 가지 것들을 전파하는 사자(使者)지요.’ 그가 갑자기 웅변조로 말하기 시작했어. ‘유럽이 우리에게 위탁한 대의명분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뭐랄까, 보다 높은 지성, 넓은 공감력, 단일한 목표 같은 것이 필요하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내가 물어보았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요.’ 그가 대답하더군. ‘어떤 사람들은 그런 글을 쓰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그처럼 특별한 분이 이곳에 온 거지요. 바로 이 점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로 들어왔을까? 우리가 그 말 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까? 말을 할 줄 모르고 아마 귀까지 먹었을 그 세계가 실로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했어. 그 세계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이 검은색의 영문 모를 광기의 가장자리에서 기선은 느린 속도로 끙끙대며 기어갔어. 그 선사 시대의 인간들이 우리를 저주하는 건지 환영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에게 기도하는 건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나. 우리는 주위로부터 차단된 채 그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마치 정신 병원에서 수용자들이 벌이는 신들린 듯한 소요를 지켜보는 성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영문을 몰라 내심 겁을 먹은 채 유령처럼 미끄러지듯이 그곳을 지나갔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세계가 우리와는 시간적으로 너무 멀어 우리가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태초의 밤, 아무런 흔적이나 기억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시대의 그 캄캄한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내게 가장 괴로웠던 건 그들 또한 비인간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거야. 그런 생각은 서서히 떠오르는 법이지. 그들은 소리지르며 깡충깡충 뛰거나 제자리에서 빙빙 돌면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그들 또한 우리처럼 인간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소동이 우리와 먼 친족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그건 흉측한 생각이지. 아무렴, 흉측한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용기 있다면 그 무섭게 솔직한 소동에 우리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맞장구치려 한다든가, 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기는 하되 그 소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희미하게 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그걸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그네들, 여인들 말이야, 그들은 내 이야기와 관련 없고 마땅히 관련 없어야 해. 우리는 여인들이 자기네 아름다운 세계에 머물러 있도록 도와야 하거든. 그래야만 우리의 세계가 좀 더 어려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러니 그 여인도 내 이야기에서는 빠져야겠네.

우리는 기선에 상아를 가득 채웠고 갑판에도 많은 상아를 쌓아 두어야 했네. 그리하여 그는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오래도록 상아 더미를 보며 즐거워할 수 있었어. 그가 그 혜택을 고맙게 여긴다는 기색이 죽는 날까지 그의 표정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가 ‘내 상아’라고 하는 소리를 자네들이 직접 들어 보았더라면 좋을 텐데. 아무렴, 나는 들을 수 있었지. 그는 ‘내 약혼녀, 내 상아, 내 주재소, 내 강, 내……’ 어쩌고 하면서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했어.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밀림이 그만 하늘에 박힌 별들을 뒤흔들 정도로 굉장한 웃음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싶어 나는 숨을 죽이곤 했지. 그는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했어. 하지만 그것은 하찮은 주장이었지.

위엄 있는 선의(善意)를 가지고 그 거대한 이국적(異國的)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어. 그 구절을 읽으니까 나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더군. 그건 무한한 달변의 힘이었고, 말의 힘, 불타는 듯 고귀한 말의 힘이었다니까. 그 어구들의 마력적 흐름을 방해할 만한 힌트는 실제로 전무했어. 예외가 있었다면 그건 마지막 쪽 밑부분에 써 둔 일종의 메모였는데, 훗날 떨리는 손으로 갈겨썼음이 분명한 그 메모는 하나의 방안을 밝힌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지. 내용은 단순했어. 온갖 종류의 이타적(利他的) 감정에 감동적 호소를 해 오던 글의 끝부분에서 그 메모는 마치 청천벽력의 섬광처럼 휘황하고 무서운 빛으로 나를 향해 ‘모든 야만인을 말살하라!’라며 불타오르는 듯했어.

‘소총을 모두 끄집어내 일제 사격을 하는 것보다 삐익 하는 기적 소리를 한 번 울리면 더 효과가 있을 겁니다. 원주민들은 그만큼 순박하니까요.’

커츠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어조에는 의욕과 망설임이 섞여 있었는데 그게 나에게는 기이하게 느껴졌어. 커츠가 그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의 생각을 사로잡는가 하면 그의 감정까지 좌우하고 있었던 거야. ‘무슨 대답을 기대하십니까?’ 그가 소리치더군.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한 겁니다. 그분이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비쳤던 거지요. 우리가 커츠 씨를 판단할 때는 보통 사람들을 판단하듯이 할 수 없다고요. 없고말고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상아를 건져 내야 하지요. 하지만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좀 보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지요? 그의 방법이 건전치 않기 때문이랍니다.’

나는 커츠 씨를 배반하지 않았어. 그를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내 소명(召命)이었고, 비록 악몽일망정 스스로 선택한 악몽에 충실해야 한다고 내 운명에 씌어 있었던 거야. 나는 그 허깨비 같은 사람을 혼자서 상대하고 싶었어. 오늘날까지도 나는 그 체험 특유의 암흑성을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데 그 이유는 모르겠어.

인생이란 우스꽝스러운 거야.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 지울 수 없는 회한(悔恨)이나 거둬들이게 돼. 나는 죽음을 상대로 씨름해 왔어.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툼 중에서도 가장 맥 빠지는 다툼이야. 어떤 막연한 회색 공간에서 그 다툼을 하게 되는데, 발로 딛고 설 땅이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며, 구경꾼도 없고, 소란도 없고, 영광도 없고, 승리를 향한 커다란 욕구도 없고, 패배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없으며, 미지근한 회의(懷疑)로 가득한 진저리 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많은 믿음도 없고 우리의 적수인 죽음에 대한 믿음은 더더구나 없이 다투기만 하는 거야. 만약 이런 것이 궁극적 지혜의 형식이라면 인생은 우리 몇몇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돼. 나는 삶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마지막 기회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지만, 어차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 것을 알고 굴욕감을 느꼈을 뿐이야.

그 눈은 촛불을 보지 못했지만, 온 우주를 감싸 안을 듯 활짝 뜨고 있었고 암흑 속에서 고동치는 그 모든 심장 속으로 침투할 수 있을 만큼 꿰뚫고 있었어. 그는 자기 삶을 요약한 후 ‘무서워!’라는 말로 판정을 내렸던 거야. 그는 주목할 만한 사람이었어.

한때 커츠의 소유물이었던 것이 모두 내 손에서 빠져나갔어. 그의 영혼, 그의 육신, 그의 주재소, 그의 계획, 그의 상아, 그의 필생의 과업 같은 것 말이네. 남은 것이라고는 그에 대한 기억과 그의 약혼녀뿐이었어. 말하자면 나는 그런 것들마저 과거로 넘기고 싶었던 걸세. 나는 아직 내게 남아 있던 그의 잔재를 인간의 공동 운명에서 마지막 경지라고 할 수 있는 망각의 세계로 손수 넘겨주고 싶었던 거야. 나는 내 처사를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진실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히 몰랐으니까. 아마도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커츠에게 충실하자든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여러 면모에 도사리고 있는 기이한 필요성 중 하나를 수행해야겠다는 충동이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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