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 - 세계의 시간,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시리즈의 마지막 3권은 ‘세계’를 다룬다. 1권에서는 물질활동, 일상의 ‘소비’에 주목했고, 2권에서는 그 상위인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3권은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세계의 시간은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 상층구조는 아래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의 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 세계의 시간이 모든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 P17


세계경제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시장을 형성한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이 말은 사실 어색하고 프랑스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예전에 내가 독일어의 ‘벨트비르트샤프트[Weltwirtschaft]의 번역어를 찾을 때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나은 표현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는 우선 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가리킨다. - P26


3권의 내용은 우리가 대부분 세계사에서 배우는 경제사의 궤적의 흐름을 보여준다. 시장과 자본의 흐름을 바탕으로 한 ‘경제’의 영역이다. 경제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 문화 등과 엮여서 돌아간다. 그렇기에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세계 경제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그 시기의 경제만이 아닌, 사회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 

다만 여기에서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보편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브로델은 세계 지도의 나라들 중 유럽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부각되어 떠올라 빛을 본 국가가 있다면 그 이면에는 착취 당하는 국가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세계(또는 세계경제) 차원의 분업은 매번 동등한 파트너 사이에서 조화롭고수정 가능한 협약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결정한 종속관계의 연쇄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불평등 교역은 세계의 불평등을 낳고 반대로 세계의 불평등은 끈질기게 교역을 창출한다. 불평등 교역과 세계의 불평등, 이 두 가지는 모두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현실이다. 경제라는 카드놀이에서는 다른 것보다 더 나은 패들이 언제나 존재했으며 때로는 속임수가 개재되기도 했다. 어떤 활동은 다른 활동들보다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 - P62


서유럽은 북쪽과 남쪽으로 지리적으로 구분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다른 모습으로 대비되었다. 하나는 지중해를 둘러싼 이탈리아와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남유럽 세계, 다른 하나는 원시적 모습에 가까웠던 북유럽의 세계다. 

13세기 두 세계는 샹파뉴 정기시를 통해 물품 교역이 이루어졌다. 


14세기 서유럽이 불황을 겪는 와중에도 이탈리아 도시들의 교역은 여전히 활발했다. 이 중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 중 승리한 것은 베네치아다. 어째서 승리했는가.


베네치아의 경제적 풍토는 따라서 아주 독특했다. 상업활동은 전반적으로 대단히 활력이 넘쳤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소규모 사업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장기간 지속되는 회사인 콤파니아(compagnia) 몇몇이 등장하기는 했으나, 피렌체식의 거대주의는 결코 이곳에서 적합한 토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부이든 도시귀족 엘리트이든 피렌체에서처럼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는 안전한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찍이 유복한 삶에 푹 빠진 상업활동은 이미 검증된 전통적인 방법에만 만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래의 성격 역시 하나의 원인이 된다. 베네치아에서 상업은 무엇보다도 레반트 무역을 의미했다.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는 상업이므로 베네치아의 거대한 화폐자본이 여기에 투입되어서 시리아로 갤리 선단이 떠나고 나면 도시 내에 현찰이 문자 그대로 바닥나는 정도였다. 이것은 나중에 서인도로 선단이 떠난 후에 세비야에서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했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은 제법 빠른편이어서 6개월 혹은 1년 정도면 회수되었다. 그래서 선박의 왕복이 이 도시의 모든 활동에 리듬을 부여했다. - P183


베네치아는 비교적 안전했고 지리적 상황이 더 유리했다. 베네치아의 석호를 나오면 아드리아 해로 들어가게 되지만 이곳은 여전히 자국 내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비해서 제노바는 도시를 빠져나오면 티레니아 해로 들어가는데 이 바다는 너무 넓어서 효과적으로 감시하기가 어려웠고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오리엔트 방향의 교역로에 섬들이 연이어 있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또 베네치아는 독일 및 중유럽 지역과 연결되어 면화, 후추, 향신료, 은 등의 공급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16세기 초부터 쇠퇴하게 되었는데 1500년 이후부터 안트베르펜이 베네치아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연안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면서 세계를 확장시킨 것이다. 

포르투갈의 해상항로가 열린 이후 안트베르펜으로 직접 후추가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1508년 포르투갈 국왕이 상관을 세우는데 그곳은 인도 상관의 안트베르펜 지사였다. 후추와 향신료를 찾는 고객이 포르투갈의 해상을 통해  가능해져서 더는 베네치아의 상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또 1520~1530년대 아메리카산 은과 스페인 상품이 안트베르펜의 경기를 활성화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발루아 가문 간의 전쟁 이후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맺어지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발트 방면에서 통상이 재개되자 한자 동맹이 다시 기지개를 켰다. 


안트베르펜은 하나의 어음이 여러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유통되다가 어음을 처음 발행했던 사람 자신이 다른 채권의 지불용으로 받게 될 때 어음은 사라진다는 ‘소환’이라는 제도를 통해 채권자들이 마지막 채무자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했다. 이는 기존의 환어음이나 은행 체제 바깥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유연한 체제로 편리성과 효율성을 둘 다 잡았다. 이 제도는 추후에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에서도 통용되었다. 


안트베르펜 이후에는 제노바가 잠시 유럽의 경제를 책임 지게 된다. 

제노바는 제약적인 지리 조건 때문에 언제나 망을 보며 살아야 했다. 별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시에 각별히 신중해야 했다. (…) 제노바는 언제든지 방향을 바꾸고 또 그때마다 필요한 변화를 수용했다. 외부세계를 독점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그곳을 조직했다가 그곳이 살아가기에 불편하거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렸다. - P223

제노바의 부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에 기대는 것보다 더 큰 정도로 이탈리아 자체의 부에 근거하고 있었다. 피아첸차 정기시라는 강력한 체제를 통해서 이탈리아 도시들의 부는 제노바로 이끌려 갔다. 제노바인인든 타지인이든 소액 대출자가 아주 적은 보상만을 받고 그들이 저축한 돈을 은행업자에게 맡겼다. 이렇게 스페인의 재정과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는 항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P231


암스테르담은 중간자적 위치에 있다. 과거의 베네치아, 안트베르펜, 제노바 같은 도시 경제의 중심 시스템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근대국가 경제 시스템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좁은 국토와 부족한 자연자원으로 곡물 반 이상을 수입해야 했고 인구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살기 위해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기본적인 어업을 기반으로 저렴한 조선비용으로 해운업을 성장시켜나갔다. 


늦어도 1550년경 이후에는 네덜란드의 화물선들이 북유럽과 스페인 및 폴그투갈 사이의 해상무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에 거래소가 개장되었고 보험국이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국가 속의 국가로 독립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의 사업에 대해서 독점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네덜란드는 1650~1660년대쯤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동인도 회사의 도움으로 아시아 시장에서 포르투갈의 힘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1696년을 전후한 30-40년 동안에 동인도회사의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유럽에서 후추의 우월성이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은 1670년부터 잠재적으로 보이던 현상이다. 이외의 보상으로서 고급 향신료들이 중요한지위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나아졌으며, 비단류나 면직류 염색을 한 것이든 아니든와 같은 인도의 직물이 갈수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또 차, 커피, 라카, 중국 도자기 등의 새로운 상품들이 등장했다. 또 과거의 유통로와 시장에서 고장이 일어났고, 이 회사가 많이 이용하던 순환로에 틈새가 벌어졌다.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때로는 옛 체제가 계속 살아남는 것이 새로운 적응을 방해하고는 한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차 무역의 확대 그리고 각국 상인들에게 중국이 개방된 일일 것이다. 1698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재빨리 직교역(즉, 현찰교역)에 뛰어든 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기존의 방식을고집했다. 즉, 후추와 약간의 계피 그리고 산탈 목재, 산호 등을 사러 바타비아에 오는 정크선들에서 중국 상품을 구매하는 데에 익숙했기 때문에 현찰에 의존하는 일 없이 상품을 통해서 거래하는 간접교역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면화, 은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아편을 주고 차를 구하는 벵골-중국사이의 연결이 영국에 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그동안 이 회사의 성공에 큰도움을 주던 코로만델 해안이 인도 내의 전쟁으로 인해서 황폐해진 것이 큰타격을 가했다. - P306~307


프랑스 리옹과 파리는 전국 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도시들이다. 사실 세계 경제사에서 프랑스의 힘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는데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성장은 두드러졌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국민총생산은 영국보다 두 배 이상 컸다. 강물을 이용한 운하와 내륙 도로의 도로망이 수송에 유리함을 제공했으니 프랑스 전국시장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영국은 7년전쟁과 베르사유 조약을 거치며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국가로 부상한다. 

영국의 전체 경제공간은 런던이라는 최정점에 복종한다. 정치적인 중앙집권, 영국 국왕의 권력, 상업활동의 집중 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져서 수도 런던의 위대함을 만들었다. 반대로 이 위대함이 이번에는 자기가 지배하는 공간을 조직하는 힘이 되며 이곳에 행정망과 시장망의 다양한 연결을 창출한다. 그라스는 보급영역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런던이 파리보다 한 세기 이상앞서 있다고 주장했다. 런던에 우위를 가져온 요인 중에는 런던의 항구활동이 대단히 활발하다는 점(런던의 항구는 적게 잡아도 영국 전체 교역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했다)도 작용했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사치와 낭비곧문화적 창조와도 연결된다의 거대한 기생적 기구로서 파리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런던이 일찍부터 수출입을 거의 독점한 결과 영국 전체의 생산 및 재분배망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다양한 지역들에 대해서 런던이라는 수도는 일종의 조차장(場)이었다. 모든 것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가 국내로든지 국외로든지 다시 배분되어 나갔다. - P511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취하게 된 힘은 단지 팽창하는 영국 시장의 상승 또는 조직화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물질적 풍성함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사실 활기 넘치던 18세기에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이 풍성함을 누렸다). 그것은 영국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근대적인 해결책들을 취하도록 만든 일련의 기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파운드 스털링 화라는 근대적인 화폐, 근대적인 방향으로 형성되고 변형되던 은행제도, 그리고 장기채 또는 영구채라는 안정성 속에 닻을 내린 공채 경험적으로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걸작품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 마지막 것은 되돌아보건대 영국의 경제가 건강하다는 최고의 표시였다. 이른바 영국의 재정혁명으로부터 탄생한 이 솜씨 좋은 체제는 영구히 지불되는 공채이자를 규칙적으로 지불했다. 이자지불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파운드 스털링 화의 가치를 계속 유지한 것만큼이나 특출한 묘기에 속한다. - P526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던 지배와 저항의 흐름도 살펴본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러시아, 튀르키예, 아시아를 살펴본다. 아메리카, 아시아, 러시아 등은 특히나 한반도와 더 밀접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인지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그런데 20세기 미국이 강자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이 챕터는 안 쓰여졌을까라는 삐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근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업화는 개발, 발전을 낳았지만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지금은 양면성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시간이 제법 흐른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과 자본의 가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가속화되어 부익부빈익빈의 불평등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언제까지 가게 될까 의문을 품으며 오늘도 월급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은 노동의 가치가 노동자에게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회 전체가 산업생활 방식을 향해서 움직여간다는 의미의 산업주의(industrialisme)라는 말이 산업혁명이라는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농업 우위의 사회로부터 산업생산 우위의 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심대한 움직임이다-산업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분명하다. 산업혁명은 말하자면 산업화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근대화라는 말은 산업화보다도 더 넓은 뜻을 가진다. "산업발전만이 근대경제의 전부가 아니다. " 성장은 더더욱 넓은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역사의 총체성을 포함한다. - P8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찻집 - 茶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0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문학으로 희곡 작품은 처음 읽게 되었는데 참 인상적이었고 재미나게 읽었다.

청말 시기부터 중국 항일전쟁 이후 미군이 들어와 있을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1막의 배경은 청말 원명원이 서양 세력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이러다 청나라 망하는 것 아니야?’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혼란스럽던 때였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언제끌려갈지 모를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해야 한다는 ‘유신’의 입장으로 갈려 있었다.

2막의 배경은 원세개가 죽고 난 뒤 온갖 군벌들이 할거하며 내전을 일으키던 때다. 이 때도 ‘개량(개혁)’을 해야 하느냐 ‘보수’를 내세워야 하느냐로 갈등이 심화될 때다. 내전으로 민심은 흉흉해지고 공포와 두려움, 불안감이 팽배하다. 양분으로 나뉘어진 시기에 적당히 시류를 타는 이들이 이런 혼란한 시기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회색분자는 안 좋은 늬앙스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오래 살아남을지도…

3막의 배경은 항일전쟁 이후 미군이 북경에 들어오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충돌이 있던 때다.
반동으로 몰리면 재산이 몰수되거나(사실 갖다 붙이기 나름인 ‘반동’이지만) 잡혀가서 처형되기도 하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주인공인 왕이발이 경영하던 유태찻집은 시류에 맞게 계속 찻집을 변화시켜갔다. 그런데 그 끝은 참.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못할 것은 없을 것이다. 살다 보면 싫은 소리도 해야 할 때가 있고 반대로 그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네!’라는 이야기를 되뇌이게 되기도 한다.

100년 전의 중국을 무대로 한 극의 내용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이 많다.

“나랏일은 이야기하지 맙시다.” 라는 찻집의 글은 꼴도 보기 싫은 요즘의 정치를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밥 먹여주는 이에게 충성을 바치자!“라는 말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그저 밥 먹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해서 공감이 갔다.

”우리 이 예술이 몇 년만 더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거지!“ 라는 말에서는 오래된 것은 무조건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폐기하는 인식에 대한 세태 풍자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는 비단 예술 뿐 아니라 구식 건물을 부수고 아파트나 주상 복합건물을 짓는 대한민국이 생각나서 씁쓸함이 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 교환의 세계,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로델은 마르크 블로크가 제안한 ‘장기 지속’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15~18세기에 걸쳐 다양한 공간을 배경에서 일어난 경제 활동을 역사적으로 비교한다. 거기에서 그는 하위에 존재한 일상의 교환 경제와 상위의 고차원의 경제가 구분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대립이 존재한다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두 층에는 각기 다른 사람과 경제 활동가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상위에는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하위에는 일상 생활에 존재하는 경제 활동(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물질생활’, 非경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 간의 비율은 물질생활이 훨씬 더 크게 자리하는 구조이다. 


다만 ‘자본주의’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이후, 그러니까 20세기 이후나 되어야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15’~18세기에 진정한 시장 경제의 영역과 반대의 내용을 가진 이 영역에 대해서도 그것을 가리키는 특별한 말로 거부하기 힘든 말이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논쟁이 있음에도 일부러 피할 필요가 없다고도 이야기한다. 궁금증을 가지면서 이 권을 읽기 시작했다.


1권이 아래 층인 ‘물질문명’과 일상 생활의 소비에 대해서 다루었다면 2권은 상위 층인 자본주의 활동에 대해서 다룬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교환 활동이 존재한다. 교환 활동은 시장 경제의 초기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장 경제는 늘 균형을 고집하고 어쩌다 균형에서 벗어나더라도 곧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하나의 총체를 이루지만, 동시에 변화와 혁신의 영역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유통권이라고 지칭했는데, 나는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P23).


18세기가 되면 상점이 유럽의 도시를 비롯하여 시골 구석까지 생겨난다. 어느 곳에서나 상품 분배가 크게 늘어났고, 상점과 정기시(상설 시장)를 통해 교환이 가속화되었으며, 서비스업이 증가했다. 어느 한 곳에 상점 수가 늘다가 거리를 장악하여 포화되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경제의 전반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 행상 같은 떠돌이 상인이 아니라 고정된 가게에서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인구가 증가하였다. 게다가 물건만이 아니라 연극 등 볼 거리가 덧붙여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또한 상점들은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신용 거래(외상)를 기꺼이 감수했다. 상인은 그에게 빚진 사람들과 그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 것이다. 물론 잘못되면 파산으로 가기도 했다.

17세기에는 주식 투자가 등장했다. 이 때도 일부 사람들은 거래소를 “바람장사”로 부르거나 ‘투기’ 등으로 비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물) 화폐는 교환 기능을 모두 처리하기에는 불충분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상품-화폐-다른 모든 상품이 반영되며 측정되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표시-화폐를 의미한다. 유럽의 대도시는 13세기부터 환어음(lettre de change)이 등장했고 공채나 은행 증권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거래소는 지폐와 금속화폐 간에 전환 등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으로 자리했다.


이제 생산 영역에 대해서 다루려면 자본과 자본가, 자본주의의 개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세 개념은 거의 순서대로 만들어졌다. 

자본은 12-13세기경 등장했는데 이 때는 자금, 상품 스톡, 많은 금액의 돈, 혹은 이자를 가져오는 돈이라는 뜻이었다가 점차 회사나 상인의 화폐 자본을 뜻하게 된다. 이 중 자금(빌려준 돈 중 자본은 포기하고 이자만을 받는 상태에 이른 것)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가장 많이 쓰였다고 한다. 18세기가 되면 자본이라는 단어가 점차 다른 단어를 압도하게 된다. 포르보네는 이미 “생산자본”이라는 말을 썼고 케네는 “모든 자본은 생산수단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에서도 이 말이 비유적인 이미지로 쓰이고 있었다. 예컨대 볼테르가 죽기 몇 달 전인 1778년 2월에 트롱생 박사가 정확히 진단한 것처럼 “볼테르 씨는 파리에 온 이래 그의 재능이라는 자본을 소진시키면서 살고 있었으며” 친구들은 “그가 그 자본의 소득만으로 살기를 바랐다”고 말하는 식이다. 20년 뒤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에서 전쟁 중일 때 한 러시아 영사는 혁명 프랑스의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프랑스는 ‘자기 자본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지만’ 적국들은 단지 ‘그들의 수입만 가지고’ 전쟁을 한다!” 이 명철한 판단 속에서 자본의 뜻은 한 국가의 재산이나 부를 바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P323). 

자본가라는 말은 17세기 중반에 시작된 것으로 “공채”, 동산, 또는 투자할 돈을 가진 사람 등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다 대체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여 더욱 많은 돈을 벌려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늬앙스를 가진 말로 좁혀졌다. 

자본주의는 20세기 초에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어로 정치적 단어로 등장하였다. 탁월한 역사가인 히튼은 이 용어를 단순히 배제시켜버리려고 했다. “모든 -ism이 붙는 말 중에 가장 소란스러운 것은 자본주의(capitalism)이다. 불행하게도 이 말은, 제국주의(imperialism)라는 말이 그렇듯이, 너무 많은 뜻과 정의가 섞여버린 잡탕이 되어서 이제 존경할 만한 학술용어로서는 배제해야 한다.” 뤼시앙 페브르도 이 말이 너무 남용되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그렇다고 이 말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하면 상이하고 낯설기까지 한 독립된 세계이다. “자본주의”의 정의는 나중에 발전해나올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형태와 비교할 뿐 아니라, 앞에서 말한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19세기에 가서야 등장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지난날의 경제의 이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과거 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경제를 분석하는 데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P329~331). 


자본주의는 일찍부터 유럽의 도시 뿐 아니라 시골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도시 근처의 땅을 사서 자산을 확보했다. 오늘날 돈이 있으면 토지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의 패턴이 떠오르기도 한다. 땅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 안전한 투자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농민과 영주가 활동하던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질서였다. 그것에 성공한 영국의 농촌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보였다. 첫째, 토지에 들러붙어 있던 예속성을 털어버리고 국가에 대해서는 농민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보상해주었다. 그리고 봉건적인 자격으로 소유하던 재산을 근대적인 의미의 사유재산으로 요구했다. 둘째, 계약을 통해서 토지를 자본주의적 차지농에게 임대하면 이 차지농이 자신의 책임하에 경영한다. 셋째, 프롤레타리아의 면모를 띠는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한다. 넷째, 수직적 분업이 이루어진다. 지주는 땅을 임차해주고 임대료를 받는다. 임차인은 경영자가 된다. 그리고 임금노동자가 이 분업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다(P390). 그렇지만 이런 대도시 등 몇몇 곳을 빼면 수 세기동안 대부분은 주변 지역이었다 할 수 있다. 주변지역은 영주제적이며 동시에 봉건적 성격으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럽 전체로 따지면 농업자본주의는 아주 소수를 차지했다. 


산업이라는 단어는 노동, 활동, 숙련 등 이전의 뜻과 혼동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 메뉴팩처, 공장이라는 단어와 오랫동안 경쟁하던 끝에 18세기경에 가서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에 산업은 점차 대규모 산업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에 저자는 전(前)산업이라는 용어로 앞선 세기의 활동을 지칭한다. 선구산업이란 현재 또는 가까운 과거에 자본과 이익, 노동력을 자신에게 끌어모으는 산업이며, 원칙적으로 그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주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발전을 이끌어줄 수 있는(가능성만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산업을 말한다. 과거의 경제는 사실 통합성이 부족해서, 오늘날 저개발 국가들에서처럼 흔히 분해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 경계를 넘어 이웃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전산업화 시기의 세계는 현대 산업처럼 분야 간에 차이가 생기고 또 대단히 앞선 분야가 있는, 기복이 심한 면모를 가지고있지 않았고 또 가질 수도 없었다는 점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산업은 상대적으로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 전체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어오지 못했다. 실제로 산업혁명기까지는 전산업이 결코 경제성장을 지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확실한 성장을 보이는 데다가 고장과 급정거를 겪는 경제 전체가 전산업을 지배했다. 전산업이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툭툭 끊어진 곡선을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다. - P430


상업의 근대화로 경제 생활이 발달하면서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교환이 증가하면서 분업이 증가했다. 상인들은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고 가능한 빨리 새로운 정보를 모으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특권을 이용하여 국가나 기업과 공모하며 원거리 무역(저자는 1등 복권이라고 표현한다)을 행했고 이는 독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상사는 자본주의와 직접 연관을 가지며, 자본주의의 진화를 이끌었다. 대규모 회사(동인도 회사 등)는 자본과 국가에 동시에 관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바다가 뚫리며 후추, 향신료, 곡물, 금/은 등을 얻기 위한 무역 경쟁에 뛰어든 유럽은 세계의 계서화에 상층부를 담당하게 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특권층은 언제나 아주 소수였다. 전체 잉여는 증가하더라도 사회 상층의 소수 인구가 증가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이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배제해버리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왜냐하면 15-18세기의 경제-옛날부터 발달해온 몇몇 “중심들”로부터 시장경제와 교환경제의 승리를 통해서 공간을 정복한-역시 레닌이 19세기 말의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제시한 수직적인 구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혹은 법률상의) 독점과 경쟁이 그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바의 자본주의와 발전 중인 시장경제가 그 두개의 층이다(P802).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이 마침내 찾아서 도달하게 된 약속의 땅이며 진보의 최종적인 만개로 보였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본주의를 결코 취약하거나 일시적인 체제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죽음, 혹은 적어도 일련의 연속적인 격변이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 중이다. 어쨌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역사 발전의 최종 단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 P8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 일상생활의 구조,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질문명과 시장경제는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어느 사람, 어느 대리인, 우리가 관찰한 어느 활동이 경계의 이쪽 혹은 저쪽에 있다고 단호히 결정하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물질문명(civilisation matérielle)과 공존하기도 하고 이를 교란시키기도 하며, 또 물질문명과 모순됨으로써 오히려 물질문명을 설명해주는 경제문명(civilisation économique, 이렇게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을 물질문명과 동시에 소개해야 한다. 그렇지만 분명 그 둘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띤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경제문명과 물질문명의 두 요소로 구성된 이 복식부진화로부터 비롯되었다. 15-18세기의 물질생활은 거의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느리게 변화해온 고대 사회와 경제의 연장이다. 그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오래된 사회와 경제위에 필연적으로 그 무게를 짊어지우는 상부사회(une société supérieure)를조금씩 형성해갔다. 그리고 언제나 상부와 하부는 공존하되 그 각각이 가지는 크기의 비율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 P25~26


페르낭 브로델의 대표 저작 읽기를 이제야 제대로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어찌 보면 재밌고 또 어찌 보면 재미 없는 묘한 책이다. ‘왜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적어 놓았어?’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그래서 더 거시사를 통해 발견하지 못하는 재미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전 세계 문명의 흐름을 엿보고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자본주의의 씨앗이 될 만한 사례를 통해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어떤 기호로 읽느냐는 본인의 선택일 것이다. 나는 끌리는 주제에 좀 더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음식(음료), 가구, 집, 의복부터 기술, 화폐, 도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을 다루는데 개인적으로 특히 음식, 가구-집, 의복이 재미 있었다. 


커피가 노동 음료로 각광을 받았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하루에도 맥심 커피를  몇 잔씩 때려 넣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양 강장제로 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지금은 맥심 커피를 끊었지만 하루에 10 잔도 넘게 마시는 사람을 보면 놀라기도 했었던. 

노동자들이 해뜰 무렵에 일터에 나가면 등에 양철로 만든 통을 지고 가서 카페 오 레를 “흙으로 구운 공기 하나에 2수씩 받고” 판다. 이것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음식에서 경제성과 자양분과 향취를 발견했다. 그들은 이것이 저녁까지 버티는 힘을 준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식사를 두 번밖에 하지 않았다. - P347


그리고 포크, 젓가락, 수저 등 도구를 사용해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 생각보다 늦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도구를 사용하기 전 식사 테이블에는 냅킨이 제공되었고 물병과 대야를 이용해서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식사 때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문명의 한 기준인 것처럼 되었지만 실상 그들도 그것을 사용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다.

개인별 포크는 약 16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베네치아에서부터 느리게 퍼져나갔다. 독일의 한 목사는 이 악마 같은 도구를 비난했다. “우리가 이 도구를 사용하기를 하느님이 원하셨다면 우리에게 왜 손가락을 주셨겠는가?” 몽테뉴가 음식을 너무 빨리 먹어서 “때로는 너무 급한 나머지 내 손가락을 깨뭅니다”라고 사과하는 것을 보면 그는 포크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 P270


중국인들은 뜨거운 물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몸이 안 좋거나 아프거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상대에게 건네는 한 마디가 있다. “多喝热水”(뜨거운 물 마셔요)!”  예전에 중국 여행을 하면 맥주조차도 시원한 것을 먹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시원한 것을 구비해 놓지만. 아무리 더워도 뜨거운 커피만 찾는 나와 비슷한 것인가. 

19세기의 한 여행자에 의하면 차 재배가 잘 되지 않는 북부 중국에서는 “하층 사람들이 차를 단지 사치품으로만 알고 있으며 부유한 사람들이 차를 마실 때와 같은 즐거움으로 뜨거운 물을 마신다. 그들은 여기에 차라는 이름을 갖다붙이고 만족한다.” - P341


(장롱과) 옷장도 18세기나 등장했다고 한다. 장롱이 최신식이었는데 옷장이 등장하면서 그 자리를 꿰찼다고 한다. 장롱 이전에는 아마도 벽장을 이용하여 물건을 보관했을 것이다. 예전에 시골집에 내려 가면 안쪽으로 벽에 공간을 내어 물건을 비치해놓던 기억이 났다.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인력과 기계 노동을 비교하는 부분에는 AI와 경쟁하게 될 인간의 노동력에 대해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의 힘만으로 따지면 그 어떤 것에 견주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미약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장점이 있으니 그것으로 타개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사람은 보잘것 없는 모터라고 하더라도 일을 하는 데에 많은 도구들을 사용하고, 또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초보적인 동력기구들을 사용함으로써 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배가시킬 수 있다. - P445


이런 소주제를 다루면서도 ‘문명’과 ‘문화’, ‘야만’이라는 화제를 꾸준히 글에 삽입해 놓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중국, 이슬람이 13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발달된 문명과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왜 유럽이 그들을 상대로 승리했나 하는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석탄이나 화포를 일찍부터 사용한 중국은 산업혁명 무렵이 되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가. 이는 수력을 이용하여 철을 이동시키고 용광로가 사용되었음이 이유라고 밝히는데 그렇게 발전을 이룬 것은 알겠지만 중국보다 왜 앞서갔는가를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중국인들은 기원전 5세기경에 이미 철의 주조를 알고 있었고, 일찍이 석탄을 사용했으며, 기원후 13세기에 코크스를 이용해서 광석을 용해했던 듯하다. 유럽은 14세기까지는 용해된 상태의 철을 얻지 못했으며, 아마도 17세기에 코크스를 사용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대체로 1780년 이후이다. 중국이 때 이르게 앞서간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다. - P495

11세기나 12세기 이후 유럽에서 수차를 사용하자 결정적인 진보가 일어났다. 숲속에 제철소를 대신해서 강변에 제철소가 들어섰다. 여러 번 가열한 철을 두드리는 망치 등을 수력으로 움직였다. 14세기 말에 용광로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 P499

서구의 장점은 “아시아 대륙의 곶” 정도에 불과한 좁은 곳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세계를 필요로 했으며,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 P545

이것도 딱히 이유는 되어 보이지 않는다. 갇혀 있는 모두가 밖으로 나간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당시 중국과 이슬람은 오늘날 우리가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진 부유한 사회였다. 그 옆의 서구는 아직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3세기부터 장기적인 긴장이 물질문명을 흥기시켰고 서구세계의 심리를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역사가들이 황금에대한 갈망, 세계에 대한 갈망, 혹은 향신료에 대한 갈망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추구가 늘 함께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인간의 노력을 경감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장악하려는 의도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실제적 발견들의 축적, 그리고 에너지원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한 커다란 흥미는 유럽이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유럽의 참모습이었으며 우월성을 약속했다. - P545~547

 

사치와 궁핍을 구분하는 것은 일차적 구분에 불과하며, 단순하고, 그 자체로는 아직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
이 모든 일이 강제적인 필요의 산물만은 아니다. 인간은 달리 어쩔 수 없으므로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 수도 있다. 유행의 급변은 이것을 "통시적으로(dia-chronique)" 이야기하고, 현재와 과거의 매 순간 세계의 대립은 이것을 "공시적으로(synchronique)"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만 사물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아니라 "사물과 말"의 영역에 있다. 이때 이 "말"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 P437~438

또 하나의 화제는 ‘사치’와 ‘궁핍’이다. 부자와 빈자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도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대도시 주변에는 소도시가 존재하고 대도시 내부에서도 중심 지역과 외곽 지역이 있기 마련이다. 중심 지역에는 시청 등 관공서와 시장, 백화점 등 시설이 자리하겠지만 외곽 지역은 빈민가와 사창가 등이 자리한다. 그래서 대도시를 볼 때는 소도시를 함께 봐야 하고 그 곳에 자리한 다양한 사람들을 봐야 한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었다. 


대도시는 그 하나만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대도시는 도시체제 전체 총량 속에 들어 있다. 대도시는 전체 도시체제를 활성화하고 전체 도시체제는 대도시를 규정한다. 18세기 말에 점진적인 도시화가 정착되어갔고 그것은 다음 세기에 더욱 가속화했다. 런던과 파리의 외면을 넘어서, 하나의 예술,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부터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이행했다. 4분의 3 이상이 농촌인 앙시앵 레짐의 세계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지고 쇠퇴한 것이다. 한편 대도시들만이 이 새로운 질서의 정착을 확고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대도시들이 이제 나타나게 되는 산업혁명에 구경꾼으로서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런던이 아니라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글래스고, 그리고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소도시들이었다. - P749


이제 1권을 읽었는데 잊어버리기 전에 2, 3권을 바로 이어서 읽을 수 있도록 해야 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4-05-0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커피는 노동 음료. 야근 음료, 밤샘 공부 음료로 마셨지만 공부는 안 했던..
맥심 커피를 끊으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저는 줄이고 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ㅎ

거리의화가 2024-05-04 21:05   좋아요 0 | URL
ㅋㅋ 맞아요^^ 맥심 커피가 없었다면 미숙했던 직장인 초기를 잘 버틸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맥심 커피 맛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끝맛이 개운하지 않기도 하고 당도 많아서 이제는 마시지 않네요.
 
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하버드 중국사
윌리엄 T. 로 지음, 기세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 제국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중국이 고립된 채 다른 세계와 교류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청 제국 시대에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 끝 사이의 관계와 상호 영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질적으로 활발해졌고, 또한 더 대립적이 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P12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의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 사실상 하버드 중국사를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앞서 캠브리지 중국사를 읽으면서 청의 초중반 역사는 가볍게 다루고 후반부를 집중한다고 여겼는데 이는 페어뱅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충격에 의한 청 제국의 근대화 담론에 의한 것이었다(유럽을 비롯한 서구 중심주의). 


청대 역사학 방법론은 시기에 따라 새로운 담론이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청대 역사학 관련하여 어떤 방법론이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1970~1980년대에는 프랑스 아날학파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사적 시각에 입각하여 명청을 왕조로 구분하지 않고 단일한 역사적 시대였다는 의미로 ’제국 후기’로 부르자고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근대’를 가기 위한 과도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중국의 역사에 적용하려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신청사적 관점으로 그 전 왕조까지와는 달리 청은 다민족 정치체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채 이질적인 민족성을 대체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한족 중심의 민족 국가를 완성하기 위해 신장, 티베트, 만주, 대만 등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는 것에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세 번째는 ‘유라시아적 전환’에 관점에 따른 것으로 17세기의 위기에 따라 금은의 유통과 기후 위기에 따른 재난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유럽의 도전과 아시아의 대응이라는 이분법에 의한 시각을 따르는 문제점이 있다.


청을 일으켜 세운 만주족을 어떻게 정의하고 분류할 수 있을까. 기존에는 종족과 같은 생물학적 범주의 개념에 따른 것이라 했지만 1980년대 들어오면서 맥락에 따른 역사, 사회, 정치적 협상의 산물로 생겨난 것으로 비중이 옮겨갔다. 개인적으로도 후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반면에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 P100~101


청은 아이신 기오로 씨족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명 조정 하에 있던 부족장 중 한 명이었으나 다른 부족과 여러 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여진어를 만들고 팔기군 체제를 만들면서 통치력을 확대해나갔고 결국 독립된 국가를 만들었다. 

청은 대운하로 화중과 화남의 곡물을 북쪽 지역으로 공급하면서 둔전 체제로 변경의 둔전병과 가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하면서 유사시 군을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상인이 가진 곡물량에 따라 소금 독점권을 부여해줌으로써 북쪽 군영 지대에 저렴한 비용에 곡물 조달이 가능하게 했다. 또한 과거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버리지 않고 국가 통치 체제로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종족 조직, 향촌 사회, 상인 조합이나 장인 조합 등의 자치 단체들은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청 시기는 서양의 근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구조적 변화를 경험한 시기였다. 인구가 급증하고 토지의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의 이주가 장려되었다. 이로 인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 간의 충돌 문제가 생겨났다. 과거를 통한 관료 선출 수는 극히 적어 급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위층에 올라가는 것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토지는 늘어났지만 수요가 많았고 특정층에 토지가 집중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되었다. 그래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부유층도 상업을 통해 이득을 노렸다. 이는 대운하의 발달, 개인적인 이동이 가능해지고 상업적인 계약과 재산권 보호가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멕시코, 포토시 광산 등에서 생산된 대량의 은이 중국에 유입되고 지세 납부를 은으로 하게 되면서 실물 경제는 확대되었다. 이는 서양이 들어오기 전 청의 내부 동력이 충분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방에는 신사층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관혼상제를 고수하는 등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전당업, 고리대금업, 상업, 기부금, 의연금, 건설업 등에 종사하면서 부를 얻고 현직 관료와 친분 관계를 쌓으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국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항상 압도적으로 높았고,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경작과 독서‘라는 이상적인 신사-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던 중국의 엘리트 가문은 상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에게 교역의 미덕을 전파했다고 자부한 서양의 자칭 ‘상업 개척자들‘의 생각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물론 청 제국의 총 무역량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외국 무역의 증가와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본토로 침투한 서양 상인들로 인해 조금 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은 청제국의 광대하고 번창했던 국내 무역의 규모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 P219


그러나 은이 전세계적으로 귀해지면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외국과의 무역 수지에서 불균형 현상이 일어나면서 국내 제조업의 생산은 위축되었다. 이에 실업률은 증가하고 세금 부담률이 증가하면서 저항과 민란의 씨앗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1680년 중국 남부에 처음 들어온 후 양국 간 무역이 시작된 뒤로 영국은 차를 늘어나는 차 수입에 대한 수지를 맞추기 위해 면화에서 아편으로 중국 경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청은 세수의 감소와 무역 수지의 불균형으로 해마다 토지세 수입의 25퍼센트에 상응하는 은이 유출되면서 고통을 겪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동체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뜸해졌다. 실질적인 소득과 관료들의 사기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고, 부패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방위 예산이 증발해버리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국내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군사력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불황은 태평천국 운동이 터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불황은 매우 폭넓게 감지되었고, 1840년대 즈음에는 경기 침체가청을 붕괴 직전의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 P280


광동무역 체제는 옹정제의 계승자인 건륭제가 시행한 세 차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1757년에 청 조정은 이후로 서양이 청제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구는 오로지 광주뿐이라고 공표했다. 두 번째로 조정은 1745년경에 광주의 지방관료들이 발의하여 시행하고 있던 담보제도를 승인했다. 담보 제도를 통해 입항하는 모든 서양 선박들은 중국상행으로부터 보증과 감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760년에 청조정은 1년 중 외국 ‘오랑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간, 거주장소, 그리고 무역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정한 일련의 상세한 규정들을발표했다. 외국 상인은 아내와 가족들을 동반해 중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상인들의 사적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 P251


태평 천국 운동은 1840년대부터 반외세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한족 우월주의와 결탁하여 신도를 확보해나갔다. 공자와 만주족 청 관리를 악귀로 지목하고 기독교가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 중국 고유의 전통 종교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남경에서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지도층의 내분이 발생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서술은 냉전으로 알려진 팽팽한 이념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혁명적인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그들이 지지한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 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 특유의 기독교적 믿음을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탁월한 혁명 이론에 앞서 모든 운동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미신‘이었다고설명했다. 냉전 시기에 태평천국을 연구한 서양과 중국 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태평천국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집단화 계획을 위선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심지어 태평천국의 환상은 전체주의적인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은 진정한혁명이 아니라 그저 거의 성공할 뻔했던 반왕조적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P326


태평 천국 운동을 왜 후대에 소환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동치제 시기 청은 기계 산업 이전의 단계를 실현해나갈 정도로 중흥의 시기였다. 그러나 내부 개혁에 실패하면서 동력을 잃었고 청일 전쟁 이후 삼국 간섭까지 이어지면서 대외적으로도 힘을 상실했다. 


청 제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 일본, 서양을 통틀어서 정치적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레닌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가장높은 단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인 자본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생산, 개발, 잉여 축적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했던 영국과 같은 대도시 국가들에게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1920~1930년대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혁명에서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중국 내에서 실현되었던 제국주의의 정도는 굉장한 논란의 대상이자혁명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제국주의는 또한 매우 광범위한 시간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시각의 제국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와 접촉한 직후의 중국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이를 현재까지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제국주의를 이와 완전히 다르게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 개념이기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서구 열강(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위한 세계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강대국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식된 외교적 의사소통의 체제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P407~408


제국주의에 대해 청은 혁명, 근대적 개혁주의, 대중적 반항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학생 운동, 손문을 비롯한 혁명가들의 운동은 1908년 무렵이 되면 영향력이 떨어지고 개혁주의 엘리트들이 부상한다. 이들은 철도 부설권 회수 운동, 자의국을 중심으로 하는 책임 내각 창설을 요구하는 등 개혁을 이끌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고 나서 반란이 확대되고 드디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선포된다. 


19세기 후반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민족국가의 올바른 기초는 종족적 또는 민족적 조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 탄생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이 독점하는 영역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양한 비한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일부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13년에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족‘들의 고향에 주권 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1932년에 일본에 의한 대리국으로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 기오로 부의를 수반으로 하여 설립된 거대한 괴뢰국을포함하는 다양한 ‘만주국들‘이 간헐적으로 선포되었다." 21세기 초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티베트, 이슬람교도및 다른 분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청의 멸망 이후 20세기 내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청 역사의 유산이다. - P504~5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