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베이루트에서 쫓아내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지지하는 동안, 아랍 정부들은 형식적인 이의 제기만 했을 뿐이다. 그해 말 열리는 아랍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7월 13일에 회동한 아랍연맹 외무장관들은 전쟁에 대응하는 행동을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이미 5주 넘게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랍 국가들은 굴종적으로 전쟁을 묵인했다. 특히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앞서 두 나 - P219
라는 아랍연맹에서 1982년 여름에 워싱턴 방문 사절단을 구성하여아랍의 입장을 대표할 주역으로 선택된 상태였다. 아랍권 정부가 전쟁에 반기를 들었지만 미국이 새로운 미국-중동 외교 구상을 발표하겠다고 얄팍한 약속을 해서 매수해 버렸다. 마침내 9월 1일에 공개되어 나중에 레이건 플랜Reagan Plan이라는 이름이 붙은 구상이었다. 이구상이 실행되었다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유대인의 정착에 제한이 가해지고 팔레스타인의 자치 당국이 만들어졌겠지만, 두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주권 국가는 배제되었다. 미국이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가운데 베긴 정부가 손쉽게 무력화한 레이건플랜은 결국 아무 성과도 보지 못했다. - P220
1982년에 진실의 순간이 도래하자,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갑자기 세 핵심 집단을 포함한 여러 전통적인 동맹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비 베리Nabih Berri가 이끄는, 시리아와 제휴한 아말 운동과 레바논 남부와 베카 계곡에 모여 있는 다수의 시아파지지자들(하지만 아말의 젊은 전사들은 이후에도 여러 지역에서팔레스타인해방기구 편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베이루트 동남쪽 슈프산맥에 전략적으로 자리한 왈리드 줌블라트Walid Jumblatt의 드루즈세력권, 베이루트와 트리폴리, 시돈의 수니파 도시 주민들이 그 세 집단이다. 수니파 정치 지도자들의 지지는 1960년대 이래 레바논에서팔레스타인의 정치적·군사적 존재를 지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 P223
레바논 침공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미국의승인을 받지 않은 채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던 1956년의 대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이런 씁쓸한경험에서 교훈을 얻은 이스라엘은 1967년에는 동맹국 미국의 지지를 받고 나서야 전쟁을 벌였다. 이제 1982년에 이스라엘의 많은 전문가들이 이름 붙인 대로 <스스로 선택한 전쟁>을 개시한 것은 전적으로 알렉산더 헤이그가 청신호를 준 결과였다. 이 점은 전쟁 직후에이스라엘의 정통한 언론인들이 확인한 사실이다." 이전에는 입수할수 없었던 문서들에서 새롭게 드러난 더 자세한 내용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샤론은 이제 막 하려는 바로 그 일에 관해 헤이그에게아주 자세히 말했으며, 헤이그는 이를 지지함으로써 사실상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또 다른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이후에, 베이루트 폭격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뒤, 레바논과레스타인의 민간인들이 숱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대중의 격렬한 반응이 나타난 뒤에도, 미국의 지지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 P235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부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을 창설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1982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나란히 싸운 이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서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 그중에는 맬컴 커를 비롯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내 동료와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그들이 치른 셈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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