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5년 카라코룸을 건설하기 시작했을 무렵, 몽골은 중앙아시아와 만주, 북중국의 많은 부분을 정복 및 점령했고 고려로도 진출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추가로 서방 원정을 계획했고, 이 원정은러시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약탈하기보다 이곳을 통치할 행정 중심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수도 건설은 몽골이 약탈자가 아니라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한층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 본토는 여전히이동하는 목축민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다. - P16

우구데이 가문과 차가다이 가문 간 충돌의 결과로 원 조정은1307년 몽골 지역의 군인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새로운 행정기구를 마련했다. 이러한 관료 기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초원을 통 - P34

치했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유목민 가구와 집단은 광활한 몽골지역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청(淸, 1644~1911)과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가축의 집산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도목축민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몇몇작은 마을들과 주변 지역, 그리고 거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앞으로 설명할 정책들을 따랐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게다가 대도의원 조정에 있는 몽골인들은 원래 초원 출신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꽤 오랫동안 정주 세계에 거주했고 일부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들은 유목민 사촌들과 연결이 끊겼고, 관심사와 정책 선호도도 달랐다. 이 몽골인들과 원 조정의 중국인 관료들이 고안한 행정기구가 과연 초원에서 효율적이었는지 여부를 규명하기는 어렵다. - P35

여러 몽골 집단 사이의 충돌은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됐다. 그가운데 하나는 중국에서 귀환한 몽골인과 몽골 지역에 남아 있던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피난민은 그 정확한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만 명에 달했다. 이 새로운 집단은 목초지, 물, 가축 무리를 놓고 거주민과 경쟁했다. 따라서 식량과 필수품이 부족해졌다. 1388년까지 계속된 명의 공격으로 사태가 더욱 심해졌는데, 카라코룸에 위치한 보급 본부뿐만 아니라토지도 손상됐기 때문이다. 이어진 명조의 무역 제한으로 몽골은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중국을 침략해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몽골은 분열 상태였다. 서몽골 집단 중 하나이자 몽골의 혼인 동맹이었던 오이라트가 칭기스 가문과 이른바 동몽골에 도전했다. 그들이 아릭 부케의 후손들과 손을 잡으면서 북원이 중국에 대한 권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 P44

고려와 칭기스계 관계의다른 측면들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의 30년(1231~1259)가까운 파괴로 점철된 전쟁이 끝난 뒤 고려 황실은 1274년에 칭기스가문 황제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이러한 관계는 한 세기 동안지속됐다. 칭기스계는 일부 초기 동맹 세력 및 지방 군주(콩기라트와 위구르 등)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몇몇 정치체(금, 남송, 맘룩)와는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벌였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과 혼인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상호작용이 이처럼 눈에 띄게 결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4세기 중반까지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칭기스계의 방벽이 됐고, 1380년대에는 정통성을 갖춘 국가로서 칭기스계의 지위를 인정하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나라였다. - P51

초기 고려-몽골 관계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진행중이다. 10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1218~1219년의 연합으로고려가 몽골 속국의 지위를 갖기 시작했고, 이 지위는 간간이 중단되긴 했지만 몽골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지속됐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고려는 속국으로서 공물과 군사 원조 등 몽골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야만 했다. "반면 1218~1219년 연합과 초기고 - P55

려-몽골 관계를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한국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당시 몽골 지휘관들은 금에대항하기 위한 동맹이자 몽골의 지역 정권 통합을 위한 초석으로서 여러 지역에서 현지 세력을 물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몽골은동진 정권이나 일부 거란 귀족들과 연합했던 것처럼, 고려와도 비슷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 P56

유라시아의다른 곳에서도 그러했듯, 고려는 몽골 제국에 통합되면서 기존 무역 관계(주로 중국)를 확장했고 더 넓은 지역 간 네트워크에 연결됐다. 그리고 마침내 개별 칭기스계 귀족들과 그들이 통치하는 영역의 일체화가 대칸 한 사람의 지배 아래 통합된 정치체로서의 제국이라는 관념을 압도하자, 원 왕조의 일부는 고려를 독립적 속국이 아니라 하나의 지방으로 보고 원의 행정 구조 안에 편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 주장은 고려의 지위가 칭기스계 체제의 변화하는 역학 관계를 어떻게 반영 - P71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P72

1380년대 내내 고려는 가문, 외교, 군사 이해, 공동의 역사 등 공식적, 비공식적 관계를 통해 원과 얽혀 있었다." 요동은 고려를 떠난다수의 이주민이 거주하는 곳이자 고려 왕족과 홍씨 일가 [홍복원과 그의 후손들]의 자치에 익숙했던 곳으로, 명 왕조는 나름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요동 장악에 도전했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15세기 중반까지도 야심에 찬 초원 지도자들은 고려가 몽골제국의 부마국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조선 조정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명 조정에게는 한반도와 칭기스계 사이의 관계를상기시켰고, 우리에게는 칭기스계의 지속적인 유산에 대한 주의 - P82

를 일깨워준다.
한국사에서 더 중요한 점은 조선 왕조의 설립에 참여한 많은주요 정치인, 군인, 지식인이 몽골 치하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 P83

일 칸국이 성립한 이후 권력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코카시아에대한 통치는 더욱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귀족에 의존했다. 일 칸국의 종말이 바로 캅카스에서 몽골 지배가 종식했음을의미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권력이 분산되고 패권 중심이 사라지는 등 정치적 재적응의 과정이 시작됐다. - P126

몽골 제국의 탄생은 중세 국제 무역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캅카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정복은 새로운 무역로를 열었고, 서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국제 무역이 활발해졌다. 몽골은 캅카스의 주요 경제 중심지를 수없이 파괴했지만, 생산과 교환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이전에 국제 무역에서 소외됐던 타브리즈와 마라가 같은 도시들을 성장시켰다. - P127

"시베리아"라는 지명은 13세기에 작성된 「몽골비사」에 처음 등장하는시비르, 즉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사이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5세기까지 러시아에서 시비르는 오비와 이르티시지역을 가리켰고, 러시아가 동쪽으로 빠르게 진출하면서부터는우랄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북쪽 지역 전체를 의미하게 됐다. - P139

몽골의 통치권은 인구조사와 공물 납부, 그리고 공작들의 몽골 군사 원정 참여를 통해서도 관철됐다. 일반 루스인들은 몽골군에 징집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고, 특히 숙련 장인의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공작들은 주치 울루스를 자주 방문했고,
때로는 수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242년부터1445년 사이에 99명의 공작과 세 명의 공작 부인이 주치 울루스를250차례 방문했다. "주치 울루스에서 10년 이상을 보낸 야로슬라프와 스몰렌스크의 페도르 로스티슬라비치를 포함해 다섯 명의공작이 몽골 지배층과 혼인했다. - P180

몽골이 루스에 정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를릭을 하사하고 공물을 받은 것에서 입증되듯 몽골은 루스를 지배했다. 찰스 핼퍼린이 언급했듯이 루스인들은 타타르 지배의 실제 현실에 익숙했으나, 106 몽골이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공물의 관리를 양도하면서 문인들은 몽골의 통치권을 얼버무리고, 핼퍼린이 ‘침묵의 이데올로기 (ideology of silence)‘로 부른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문인들은 몽골의 약탈과 도시 파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의 압제", "가혹한 노예화" 같은 용어를 사용했지만, 복속과지배라는 개념은 애써 피했다. 107루스는 몽골의 관습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타타르인들이 모스크바 사회로 진입해 심지어 보야르 집단을 만들기도 했지만, 몽골인은 루스 사회의 외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 P203

침략의 충격을 극복하고 나자, 정치적, 상업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계가 발전했다. 정치적, 외교적 계획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해양 세력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호혜적 무역을 위한 유라시아 대륙로를 열었고, 흑해 식민지와 지중해 동쪽 항구라는 결절점을 통해 유럽과아시아를 연결했다.
하지만 상인과 선교사는 자신이 활동했던 사회로부터 매우분리된 상태로 지내며 몽골 지배층 내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 P238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몽골 제국 내의 주요 과학적, 철학적 대화는 이슬람과 중국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유럽은 몽골 조정에서있었던 주요한 지적 만남에서 주변부에 머물렀다. 몽골은 화약과같은 중국의 발명품을 유럽에 가져오는 데 주요 역할을 했을지도모르지만, 그 전파에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몽골의 통치가 끝나자 유럽인들은 곧 내륙 아시아의 대상로에서 자취를 감췄다. 유럽인들이 몽골의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현지 사회와의연결에 실패한 것이 아마도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 P239

1260년에 그랬듯이, 분명히정복 그 자체에 파괴적 성질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시리아에서 - P278

는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몽골의 점령이 짧기도 했고 그 후 맘룩이 지배권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몽골이 이 지역 전체에 진출한이후, 사람들이 이라크, 자지라, 아나톨리아 등지로부터 시리아와이집트로 이주하는 인구 변화가 발생했다. 맘룩-일 칸국 국경 지역에서는 일부, 어쩌면 상당한 정도의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는1320 년대 초 ‘평화 협상 과정‘과 함께 확실히 증가했다. 몽골이 아시아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개방한 것은 확실히 이집트의술탄국,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 가지 영향만 특별히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맘룩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몽골이 길을 닦았다는 점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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