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로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P103

노브고로드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 주목받을 만하지만, 키예프가 쇠퇴한 이후에 키예프 루시의 땅이 변모되어갈 때에 생긴 하나의 변형된 발전 형태로서 그이상의 관심을 끌고 있다. 노브고로드의 특이한 성질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성질들이 키예프 시대-어느 정도는 키예프 이전 시대로부터 직접 유래되었으며, 때때로 키예프의 일부 핵심적인 특징을 강조된 형태로대변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노브고로드의 도시생활과 문화, 중간계급의 중요한 지위, 그곳의 상업, 외부 세계와의 긴밀한 접촉 등과 같은 모든것들은 노브고로드를 키예프 역사의 주류와 연결시켜주고 있다. 물론 베체 역시 키예프의 삶과 정치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담당했다. 노브고로드인들은 그것의 권위와 기능을 더 부각시킴으로써 키예프 루시의 정치적인 구성 요소들 중다른 두 가지를 희생시키고, 오직 한 가지, 즉 민주정적 요소를 발전시켰다. 그두 가지는 전제정치적 요소와 귀족정치적 요소인데,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 두요소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더 비옥한 토양을 발견했다. - P134

모스크바는 14-15세기에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이되었다. 이 국가는 통치자의 "세습 재산"으로 정의된 엄청난 부와 광대한 영토에의해서,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에 의해서, 경쟁자들과 몽골 칸국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에 의해서, 유산과 운명이라는 세속적이고도 종교적인 개념에 근거를 둔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사실, 필연성이라든가 민족적 운명이라는 암축된 의미를 가지고서 이 과정을 "러시아 땅 모으기(sobiranie russkikh zemel)"라고 묘사한 전통은 이 과정에 대한 많은 역사 서술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 P145

모스크바의 성장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판단은 그 과정에 대한 기술이나 설명보다 훨씬 더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모스크바의 성장이 모스크바 공들과 러시아 민족의 위대하고도 필연적인 업적이라고 찬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아서, 역사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통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시기의 역사학자들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 주장은 소련 이후의 공식적인 역사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 지도자들이 민족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반면에, 프레스냐코프 같은 혁명 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 오늘날의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 등은 이런 해석-비판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민족주의적 신화이다에 종종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저술가들은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러시아 모으기가 무엇보다도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같은 러시아인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비러시아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모스크바국 공들의 교묘한 침략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국 공들은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았고, 모든 사람들을 모스크바국의 전제정치에예속시켰다는 것이다. - P169

학자들은 비록 분화의 근원이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을지라도, 14세기에 분리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확실히 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쳐서 이 언어들을 변화시켰는데, 특히 분령 시기의 분열 및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인들이 통치하던 영토와 모스크바국 러시아 사이의 심화된 분리가중요했다. 따라서 대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국의 영토와,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와 각각 관련을 맺게 되었다. 우리는 만약러시아인들이 키예프국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통일성을 유지했다면, 혹은리투아니아-러시아가 모스크바를 대신하여 새로운 중심이 되었더라면, 사건의전개 양상이 달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비록 모든 것이 동일한 키예프로부터의 유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인 분리는 문화적인 이질화도 심화시키는 - P208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로 알려져 있는 지역에는 폴란드를 통해서 라틴 유럽의 강력한 영향력이 유입되었고, 그 영향력은 그곳에서 상이한 특성을 배양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러시아 정교회는 마침내 행정적으로 분열되어, 키예프에 있던 별도의 수좌대주교가 리투아니아국의 정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대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으로 분리되었고, 몇 세기 동안 떨어져 살면서 그런 현상이 더욱 강화되었던 사실은 그 이후의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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