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공의회를 소집하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소집한들 교회 우두머리들의 현 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공의회를 통해 교회를 개혁한다는 건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안 되는 일이고,
다만 하느님께서 임하사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설교자가 꿈도 꿔보지 못한 방식으로 그 도움은 이미 오고 있었다. 그 "새 지식"(New Learning)은 교회를 개혁하게 될 그 거대한 운동을 향해인간들을 더디지만 착실하게 인도하고 있었다.
메디치가가 학문 증진을 위해 쏟은 노력에 힘입어 발굴된 오래 전의 저서들이 모든 인류의 공동재산이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계시와 같았다. - P210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게 만든 사건은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을 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한 사건이었다. 만약 위대한 자 로렌초가 여전히이탈리아 정계의 중추에 서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 침공을 막기 위한 묘책을강구했겠지만, 그럴지라도 조만간 비슷한 결과들이 잇달아 발생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제국의 세력이 기울던 때 공교롭게도 다른 나라들의 세력이 팽창함으로써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의 침공이 언제고 밀어닥치고 말 것이 필지의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써 이제 우리는 유럽 정계를 이끌고 가던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로마를 제치고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영국이 유럽을 주도함으로써 그런 변화가 일기 시작하던 때로 접어들게 된다. - P256

루터가 한 일은 이미 내연성을 가진 물질들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새 지식‘은 주로 메디치가에 의해서 태어나고 양육되고 보호되고 살이 붙었다. - P336

실로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로마 교회의 수장이 이런 식으로 말하거나 이런 정조에 고취된 사례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패했던 그 시대에서 이런 유형의 교황은 모든 정파에 혐오의 대상이었다. 자기들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루터의 추종자들, 교황이 올바로 지적했듯이 그 문제를 정치 목적에 이용할 수 있을 때만 관심을 가졌던 독일 제후들,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을 앗아간 개혁을 증오한 추기경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막대한 자금을 뿌리면서 도덕성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 타입의 교황을 사랑하던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누스 6세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추기경들과 로마인들은 하드리아누스 6세와 그의 통치 방식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역겨워했다. 이 극단에서 저 극단으로, 편한 것을 추구하고 사치스럽고 관대 - P345

했던 레오에게서 엄격한 개혁자 하드리아누스로 바뀐 것은 너무나 극단적인대조였다. 교회가 개혁이 필요함을 시인하고 개혁을 단행하고 있는 교황이란그들로서는 지지할 수 없는 존재였다. - P346

클레멘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황제와 분쟁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성하께서는 황제와의 우호 관계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공의회를 막아준다고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성하께서는 내키는 대로 자신을 지배하고 끌고가던황제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없으면서도 황제가 무슨 결정을 하든 그것이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내색 한 번 못한 채 동의했습니다. 이 모든게 다 공의회를 두려워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가, 그리고 그보다 한층 더 공의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꽉 사로잡고 있던 이런 고통스런상황, 사실상 노예 상태라고 할 만한 상황을 자각하고서, 그는 매우 기독교적인왕(프랑수아 1세)에게 더욱 동정을 얻을만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공작딸의 결혼은 그런 이유에서 계획한 것입니다. 성하의 생각은 자기 조카딸을 프랑스 왕의 아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자기 가문과 자기 자신의 문제, 특히그토록 두려워하던 공의회 문제를 뒷받침할 두 개의 기둥을 놓는 데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종교적 분쟁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고, 적어도 두려운공의회를 피할 수 있다는 기대가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 P386

카테리나가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녀가 추진하려고 한 노선은 그 시대의 수준을 몇백 년 앞선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입헌 군주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2백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유럽의 모든 나라에 도래한 모든 종교에 대한 평등한 관용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카테리나가 화해를 이끌어 내기 위해 방법이란 방법은 다 사용했다. 양 진영을 다 만족시킬만한 조치들을 취했다. 로마 가톨릭 교도들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교도들도관리로 기용했다. 기즈의 공작과 콩데의 제후 같은 철천지 원수들에게 서로화해의 악수를 하게 만들었다. 시녀도 로마 가톨릭 교도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사이에서도 많이 선택했다. 1555년에는 프랑스에 프로테스탄트교회가 하나뿐이었으나, 6년 뒤에는 그 수가 2천 개로 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자 중도 노선은 인기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되면 중도 노선을 취하는 사람이 ‘미온적 분자‘라는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 P449

정치에서 자유의 정신이란 자연히 종교 자유 사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카테리나 측에서 이 정신으로 거둔 한 가지 결실은 대단히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는 종교재판소의 공포가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를 기억할 때, 종교재판소가 주변의 모든 나라들 -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그밖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국가들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상황에서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평생 로마 가톨릭 신앙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를 과감히 거부했다는 사실만큼 카테리나 데 메디치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것도 없다. 이 일로 카테리나는 교황과 광적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비빌 언덕조차 없던 프랑스가 이들의 복수를 떨쳐 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카테리나가 ‘표리부동‘하다는 숱한 비판을 받아가며 펼친 외교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리나는 이 점에서는 무쇠와 같았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참혹한 고문과 죽음에서 보호해 준 유일한 은신처였다. 주변 나라들에서이런 이유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사람들이 카테리나에게 와서 보호를 요청하고 실제로 보호를 받은 경우를 거듭해서 보게 된다. - P502

메디치가가 맞이한 유일한 스페인계 여성인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가문이 외국에서 맞이한 여성들은 그녀를 빼놓고는 모두 프랑스나 오스트리아계였다는 그 가문의 역사에서 그녀가 실제로 받은 지위보다 훨씬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할 가치가 있다. 1539-1549년에 코시모가 권력의 기반을 다질 때 그녀가 발휘한 역할은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엘레오노라디 톨레도는 그 가문의 제2설립자로 간주돼야 옳다. 코시모가 약관의 나이에재산도 가문도 친구도, 그가 장악한 취약한 권좌를 뒷받침할 영향력도 없을때 그녀가 그에게 제공해 준 지원은 지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의지원이 없었다면 그는 얼마 못 가서 권좌를 잃었을 것이고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시모가 과연 어떻게 그처럼 한미한 상태에서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그렇게 확고히 권력 기반을 다졌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해왔지만, 그 비결은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에게 있다. - P603

코시모 1세는 이렇게 그가 맡은 것과 남긴 것을 비교해야만 올바로 평가할수 있다. 그는 능력 면에서 일찍이 피렌체를 당대의 모든 경쟁국들의 우위에서게 하고, 이탈리아의 예술과 학문의 수도로 만든 메디치가 조상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이러한 능력뿐 아니라 관대하고 숭고하고, 흔쾌히 용서하고 적에게 자비를 베풀고, 품행이 단정하고 백성을 동정하는 품성들을 아울러 겸비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품성들과 거리가 멀었고, 그의 통치는 철권을 휘두른 전제군주의 통치였다. - P614

여러 세기에 걸쳐곤팔로니에레를 포함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차지해 온 피렌체의 유서깊은가문들 중에서 코시모 정권에 비서로나마 한 사람이라도 등용시킨 가문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강렬한 적개심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있는 일이다. 당사자들은 그런 정서를 감히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럴수록안으로 더욱 깊이 새겼다. 차라리 ‘자유‘를 빼앗아가 내전을 겪었더라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유력한 - P660

가문들이 몇 세대에 걸쳐 지녀온 모든 권력과 중요성을 한순간에 앗아간 일은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메디치가는 다른 가문들과 다를 바 없이 무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혹시 천사들이었을지라도 공화정이 군주정으로 바뀌었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한 적개심만으로도 그들에게 가해진 모든 비판들이 일어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메디치가가 황제들과 교황들의 지원을 받아 왕가가 됨으로써 공공연한 공격이 더 이상 성공할 가능성이 사라지자, 이 다른 가문들은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복종하면서도 속으로는 이 가문이 성취한 고지에 강한 질투심을 쌓아갔고, 그 질투심을 더 이상 노골적인 공격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메디치가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범죄 이야기들을 은밀히 유포함으로써 표출했다. - P661

페르디난도 2세의 재위 말기에는 왕자 레오폴드의 제안으로 두동생 조반니 카를로와 레오폴드 이들은 가문의 공통 재산이었던 그림들과무관하게 각각 방대한 분량의 그림들과 그밖의 다수의 예술품들을 소장했다-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다 내놓아 피티 미술관과 우피치 미술관을 조성했는데, 조반니 카를로가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들은 주로 대공 궁전의 미술 - P710

관(피티 미술관)을 조성했고, 레오폴드가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들은 우피치 미술관을 조성했다. 동시에 페르디난도는 동생들이 내놓은 이 예술품들에다 자신이 가문의 수장으로 물려받은 그림들과 아내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와 함께우르비노에서 구한 그림들을 덧붙였다. - P711

메디치가는 사라졌으나 그들의 업적은 살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모든 것들 중에서 그들의 마지막 행위인 증여를 통해서 온세계가 즐기는 것과, 오래 전 그 가문의 설립자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에 기증하도록 심어 놓은, 심지어 부당과 좌절감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조차 그렇게 하도록 심어 놓은 그 가문의 전통과 원칙들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오늘날의 어느 이탈리아 저자는 이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행위로 공주 안나마리아는 그 나라에 가장 중요한 예술품들을 헤아릴수 없이 확보해 줌으로써 이탈리아에게 영원히 쇠하지 않는 칭호를 얻어 주었다. 그것은 실로 그녀의 조상들이 저지른 많은 과오들을 상쇄하고 덮을 가치가 있는 행위였다." - P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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